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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이남지역의 안전을 지켜

북쪽에서 살던 사람들이 장강이남지역에 가서 전투보다 더 큰 고초를 겪은것은 자연기후조건과의 《전투》였다.

남방의 모기에 한번만 물리면 말라리아에 걸리고 모기에 물리는것자체가 벌한테 쏘인것만큼 아팠다. 그렇기때문에 휴식할 때에도 모기장이 없으면 곤난하였다. 날씨가 너무 무더워 갈증에 시달렸고 찬물만 한모금 마시면 영낙없이 리질에걸렸다. 이로 해서 동북에서 온 부대들은 정말 고생을 많이하였다. 게다가 국민당군대들이 달아나면서 반동선전을 얼마나 하였던지 마을주민들이 인민해방군을 피하여 달아났다. 조선인부대들은 이러한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 항일무장투쟁시기 인민들의 생명재산을 아껴주시던 그 모범을 따라배워 마을들에 들어서면 사람이 없어도 집집의 마당을 쓸어주고 빈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마당에서 잤으며 물독이 비였으면 물도 길어 가득 채워주었다. 지병학을 비롯한 항일투사들이 앞장서서 전사들에게 위대한 수령님의 고매한 인민적품성에 대하여 이야기해주면서 조선인부대들을 이끌었다.

주민들은 해방군의 동정을 살피다가 국민당군대들이 거짓말을 했다는것을 깨닫고 곳곳에서 달려나와 물을 끓여주고 음식을 가져다주면서 환영하였다.

그러나 해방지역에서 반동들은 의연히 준동하면서 저항하였다.

 

지 병 학

주체6(1917)년 5월 24일 출생. 해방전 중국 훈춘현에서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에 참가. 해방후 훈춘현 경비대 대대장, 길동분구사령부 보안대 5련대장, 제4야전군 156사 16련대 부련대장, 독립15사 참모장으로 동북해방전쟁에 참가. 그후 조선인민군의 중요직책에서 사업하다가 주체66(1977)년 2월 28일 서거. 항일혁명렬사임.

 

장강이남지역은 력사적으로 북방과 대립되여있었으므로 장강이남지역인민들의 북방사람들에 대한 감정은 좋지 못했다. 당시 이곳 주민들속에서는 그때까지도 제갈량에 대한 원성도 크다고 하는 형편이였다.

장개석도당은 인민들의 이러한 감정을 악용하여 부락마다에 저들의 특무망을 늘여 정보수집조, 암살조, 파괴조 등을 조직해놓고 해방군을 해치려고 하였다. 국민당이 조직한 특무망에 100만명이 있다는 소리까지 들렸다.

당시 이 지방에서는 권총으로부터 경기관총에 이르기까지 무기들을 자유판매하였다. 수많은 무기들이 악질적인 반동들의 손에 들어가있었으므로 해방군부대들이 피해를 많이 입었다.

반동들은 무지몽매한 주민들을 부추겨 해방군초소에 총과 창, 칼을 들고 달려들게 하였으며 분대나 소대가 움직일 때길에 매복하였다가 불의에 달려들어 해방군을 해치였기때문에 마음놓고 다니지도 못하였다. 특히 광서성을 통과할 때 해방군은 시련을 겪었다.

남방지대에 묘족, 이족, 동족 등 많은 소수민족들이 분산거주하고있었는데 광서성에는 묘족이 약 300만명정도 있었다. 이곳에는 정권도 없었고 비행기, 자동차를 본 사람도 없었다. 묘족들은 찰벼를 발방아로 찧어 죽밥을 해먹었고 귀한 손님이 오면 쥐를 잡아 볶아주었다. 이곳에서는 은전 한잎을 주면 돼지 한마리를 살수 있었다. 다른데 같으면 이 돈으로 돼지고기 2㎏밖에 살수 없었다. 이런 묘족과 함께 귀주성에는 녀자들이 무리를 지어다니며 남자들을 랍치하는 종족이 30만명정도 있었는데 수적으로 적은 남자들은 녀자들에게 붙잡혀가지 않기 위하여 집단방어를 하며 굴에 숨어살고있었다. 장개석반동들이 이런 종족들에게 반동선전을 들이대여 해방군을 해치는데 리용하였기때문에 무지몽매한 이들은 서슴없이 군인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살해하였다. 그래서 사방에서 해방군이 사살되고 행방불명이 되고 화재가 나고 뜻밖의 비상사고가 계속 일어나 수습하기 어려웠다. 이때에도 조선사람들은 규률을 잘 지키고 범죄자들을 색출하여 처단하는 한편 정치사업을 잘하여 지역을 평정하고 인민정권을 수립하는데 앞장섰다.

남방에는 대를 두고 내려오면서 로략질만 해먹고 사는 상습토비무리들도 있었다. 호남성과 귀주성 경계지대의 여러곳에 이런 무리들이 수백명씩 떼를 지어 살고있었다. 이들은 어느 정권의 통치도 받아들이지 않고 소왕국을 형성하고있었는데 농사를 지으면서도 주변인민들의 재산을 략탈해먹으며 제멋대로 살고있었다. 제4야전군 47군의 주력부대는 사천성에서 호남성서부지구로 돌아와 그곳에서 토비숙청을 하고있던 140사와 합세하여 139사는 원릉에, 140사는 회창에, 141사는 녕도에 군구를 설치하고 토비들을 숙청하는 투쟁에 착수하였다. 토비무리들은 장개석국민당정부가 오래동안 숙청하느라 하였지만 끝내 소멸하지 못한 토비들이였다.

광서에 있던 국민당군벌 백승회는 아군이 진격할 때 도망가면서 이곳 토비들에게 여러가지 《임명장》과 많은 무기를 주면서 국민당군이 반공격할 때까지 《적후유격전》을 하라고하였다. 이렇게 국민당군의 부추김을 받은 토비무리들은 상서북부와 남부의 복잡한 지형을 리용하면서 해방군과 장기적으로 대항할 시도를 하고있었다. 당시 이곳 상서지구의 23개현에는 크고작은 토비무리가 8만여명이나 있었다. 그들이 지리적으로 방어에 유리한 지점들을 차지하고있었기때문에 소멸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여러곳에 있는 이 악질적인 토비무리들을 소탕하는데서 조선인부대들은 잘 싸워 《동북범》으로 명성을 날리였다. 141사와 139사의 조선인부대는 중국인민해방군과 함께 팔면산과 상서, 수원지구의 적과 마양, 봉황의 적들을 소멸하고 2개 현성을 되찾았으며 그후 토비무리들을 습격하여 1 000여명을 소멸하였다.

47군의 조선인부대들은 3개월동안에 9차례의 큰 전투를 진행하여 9 000여명의 토비들을 소탕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영순현의 토비들을 소탕한것이 그 대표적실례이다. 영순현에는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막힌 고원지대의 자연요새에 토비소굴이 있었다. 여기에는 수백호의 토비들이 부락을 이루고있었으며 늙은이들과 녀자들이 농사를 짓는 수십정보의 밀밭까지 가지고있었으나 주로는 청장년들이 무장을 갖추고 떼를 지어돌아다니며 로략질해온 물건을 가지고 살아가고있었다. 이들의 소굴로 들어가자면 외통길인 굴안의 물길을 따라 배를 타고 들어가다가 사람이나 겨우 빠져나갈수 있는 굴길을 톺아올라가야 하는데 굴입구에는 토비들이 기관총까지 걸어놓고 지키고있어 누구도 범접할수 없었다.

이런 정황에서 조선인부대인 141사 422련대의 전투원들은 굴길을 기어이 통과할 목적밑에 방도를 모색하다가 류황을 얻어다 굴밑에서 태워 굴간을 지키던 토비들을 다 쫓아버리고 방독면을 쓰고 굴길을 통과하여 토비소굴로 들어갔다. 그들이 소굴에 들어가보니 젊은것들은 다 도망치고 늙은이들과 아이들만 남아있었다. 늙은이들에게서는 토비들이 간 곳을 알아낼수가 없었다. 오히려 항거하는것이였다.

조선인부대는 무지막지하게 살아온 토비들에게 공산당의 정책을 알려주고 그들에게 쌀과 천을 비롯한 물건들을 가져다 나누어주면서 꾸준히 해설설복하였다. 결과 토비노릇을 하던 젊은이들이 다시 돌아와 새 생활을 시작하게 되였다.

제4야전군 43군의 조선인부대인 156사는 장강을 도하한 후 국민당군을 계속 추격하여 5월 22일에 강서성 남창시를 해방하는 전투에 참가하고 남창시에 주둔하면서 강서성위수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들은 발전소, 식량창고 기타 설비와 물자들을 장개석군대의 특무들과 패잔병들의 파괴암해책동으로부터 보위하고 공장들이 다시 생산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도처에서 날치는 토비무리들을 소탕하고 해방시킨 부락에서 일체 무기를 회수하였다. 156사는 이어 3 000여명의 조선인부대 지휘관들과 전투원들을 파견하여 농촌지역을 완전히 해방하였다.

제4야전군 13병단 38군, 49군에 속하는 조선인부대들도 산해관을 넘어 평진전역에 참가하고 장강을 건너 수십차의 전투를 거듭하면서 하남성, 강서성, 광동성, 호남성, 광서성, 귀주성을 련이어 해방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40군, 44군에 소속된 조선인부대들도 장강을 건너 해남도까지 진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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