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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도하작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교시를 높이 받들고 조선인부대들과 조선사람들은 장개석국민당군대를 끝까지 소멸하기 위하여 우선 부대내에서 진행하고있던 《정풍운동》에서 모범을 보였다.

《정풍운동》에서는 중국혁명을 끝까지 도와줄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내용을 가지고 부대내에서 학습도 하고 담화도 진행하였다.

이들은 고대그리스의 우화를 가지고도 담화하였다.

한 농부가 겨울에 꽁꽁 언 뱀 한마리를 발견하고 그 뱀이 몹시 가엾게 생각되여 품속에 넣어 녹여주었다. 온기를 받은 뱀은 소생되였는데 자기의 악한 본성을 버리지 못하고 후에 은인인 주인을 물어서 농부는 죽게 되였다. 그때 농부는 죽으면서 《나는 악한놈을 불쌍히 여겼으니 이런 화를 받아 마땅하다.》고 말하였다.

이 우화는 간악무도한 원쑤는 끝까지 소멸해야 한다는것을 깨우쳐주는것이였다.

부대에서는 《정풍운동》과 함께 《평공운동》을 하여 평진 전역에서 발휘한 조선사람들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일부 성원들은 관광단에 망라시켜 베이징의 고궁박물관과 북해공원, 천안문, 만수산 등을 비롯한 여러곳을 참관시켰다.

이렇게 정치사상사업을 진행하고나서 제4야전군은 장강전선으로 떠났다.

조선인부대들은 2개의 방향으로 남방진출을 진행하였다.

한 방향은 베이징을 포위하고있던 제4야전군 13병단 47군에 속한 조선인부대의 진격로였고 다른 한 방향은 천진해방전투에 참가했던 43군 156사를 비롯한 제4야전군 15병단에 속했던 조선인부대들의 진격로였다. 그외 38군, 40군, 44군, 49군에 속한 조선인부대들도 남방으로 진출하였다.

※ 당시 중국에는 야전군아래에 병단이 있고 병단아래에 군(군단)이 있었으며 군단아래에 사(사단), 그아래에 단(련대), 영(대대), 련(중대), 배(소대), 반(분대)이 있었다.

13병단 47군에 속한 조선인부대들은 1949년 4월 베이징을 떠나 평한로와 그 서쪽을 따라서 무한 서부지구를 향하여 매일 30~40㎞씩 남진하여 5월에 하남성 신향을 포위하고 국민당군 1만 7 500여명을 투항시켰다. 7월에는 의창을 해방하고 향금구에서 적의 포병대대를 소멸하고 중형박격포 12문을 로획하였으며 적병 100여명을 포로하였다. 47군의 포병련대는 화북야전군을 도와 염석산의 소굴인 산서성 태원을 해방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156사를 비롯한 15병단의 조선인부대들은 천진해방전투에 참가한 후 3월 23일에 천진을 떠나 황하를 건는 다음 개봉, 허창을 거쳐 7월에 경문에 도착하였다.

이때 중국공산당에서 조선혁명을 위하여 조선사람들을 아낄데 대한 지시가 내려 조선사람들은 포부대와 경위대 그리고 후방부에 배치되여 사업하다가 전투없이 장강대안에 도착하였다.

남방진출은 황하를 건느는 시기부터 매우 간고하였다. 황하를 건느는 도중 모래감탕밭에 마차와 말, 사람까지 빠져죽는 일이 허다하였으나 조선인부대들이 앞장서서 길을 개척함으로써 황하를 건너 개봉, 허창, 남양을 거쳐 3개월만에 경문에 도착하였다.

이 지대는 이미 해방된 지역이여서 전투는 없었으나 더운 날씨에 거의 매일 내리는 비때문에 옷을 말리울수 없었고 특히 식생활이 맞지 않아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개봉이남부터는 주식이 밀가루인데 끼니때마다 처음에는 만두를 7~8개 먹었으나 한주일 지난 다음부터는 보기만 해도 역겨워하며 하루에 한개도 먹지 못하였다. 그래서 만두를 물에 풀어먹어도 보고 다른 음식도 해먹어보았는데도 구미를 돋구지 못하여 한달이 지나자 전사들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수개월동안 행군하고 전투를 계속하면서 신경이 예민해져 서로 언쟁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조선인부대들은 이러한 정신, 육체적고통을 이겨내면서 3개월의 긴 행군끝에 장강일대에 도착하였다.

장개석은 중국인민해방군이 황하를 넘어 남진의 길에 오르자 미제의 조종밑에 중국공산당에 《평화담판》을 요구했다.

미제는 어리석게도 중국공산당에 장강을 경계로 하여 분할통치하는것이 좋겠다는 《절충안》을 제기하면서 만일 저들의 요구를 듣지 않으면 《원자탄을 쓰겠다》느니, 저들의 추종국가들을 다 동원하여 《무력간섭을 하겠다》느니 하고 위협하는 한편 장강을 경계로 하여 화평을 하면 20억US$의 무상원조를 주겠다는 등의 회유책동도 하였다. 중국공산당은 미제와 장개석국민당의 기도를 간파하였지만 하루빨리 국내전쟁을 종결짓고 평화를 이룩할 목적밑에 국민당과 담판할 용의가 있다는것을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1949년 4월부터 주은래와 국민당대표간에 담판이 진행되였다.

평화담판을 벌려놓은 장개석국민당은 막뒤에서 장강에 자기들의 무력을 증강하고 견고한 방어진을 구축하였으며 4월 20일에는 국내평화협정초안에 서명하는것을 거절하였다. 하여 중국공산당은 전국을 해방할데 대한 명령을 내리였다.

중국인민해방군은 장강을 도하할 목적으로 수백만의 대군을 장강연안에 배치하고 도하준비를 다그치였다. 그런데 중국인민해방군에는 배도 없고 도하기재도 없었으므로 장강을 도하하는것이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장강도하전투

조선인부대 지휘관들은 결사대를 무어 장강도하를 보장하기로 하였다.

장강도하작전은 단풍전투로부터 시작되였다.

무한에서 동쪽으로 약 50㎞ 떨어진 곳에 있는 단풍진은 제4야전군의 중요한 장강도하지점의 하나였다.

제4야전군의 맨 앞장에서 남방으로 진출한 15병단은 국민당군이 장강방어선을 강화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하여 야전군주력이 장강이북에 다 집결될것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단풍―무혈간의 약 100㎞ 전선에서 강행도하작전을 벌리였다. 선두부대들은 1949년 5월 7일경에 장강이북의 전투구역에 들어섰는데 15병단의 43군 조선인부대 156사는 신주―림산하일대에서 전투명령을 기다렸다.

국민당군대는 장강북안에 배치했던 저들의 26군을 장강남안으로 철수시키고 장강북쪽에는 8개 대대만 남겨두어 해방군의 도하작전의도와 움직임을 정찰하게 하고 북쪽대안의 배들을 장강남안으로 끌어감으로써 아군의 도하작전을 파탄시킬것을 획책하였다.

156사에서는 466련대로 하여금 단풍의 적을 불의에 습격하여 소멸하고 적들의 수중에 있는 선박들을 몽땅 탈취하게하였다. 466련대에서는 5월 13일 불의의 습격으로 2분만에 1호부두를 폭파하고 6분만에는 부두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계속 신속령활하게 전투를 진행하여 한시간 남짓한 사이에 적들의 장애물들과 영구화점들을 다 날려보내고 단풍전투를 승리적으로 결속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 500여명을 소멸하고 중기, 경기 18정, 보총 430정, 선박 68척을 로획하였다. 또한 장강남쪽대안의 적들을 들이치고 300여척의 각종 배들을 로획하여 제4야전군부대들의 장강도하를 신속히 보장하였다.

피를 바쳐 중국의 전우들을 구원하고있는 전투영웅 리순임

이 전투에서 8명의 전투영웅이 났는데 리순임은 두번째로 영웅칭호를 받아 2중영웅이 되였다.

한편 156사의 조선인용사들은 장강남쪽대안에 있는 적군함 4척을 탈취하기 위하여 처음에는 련대장, 대대장을 비롯한 수영을 잘하는 사람들을 선발하여 파견하였다가 적들에게 발각되여 다 희생되자 다시 밤을 리용하여 77명을 도하시켰다. 그중에서 14명이 적의 함선에 올라가 함선을 나포하는데 성공하였다.

해방군이 함선을 리용하여 장강을 건느게 되자 적 한개 군단은 스스로 투항하였다.

제4야전군 44군 131사가 담당한 구역에서도 조선인전투원 60여명이 나무배를 타고 노도 없이 손으로 물을 가르면서 장강을 도하하여 아군의 진격로를 개척하였으며 어떤 부대에서는 소오줌통을 수백개 얻어가지고 그것을 2개씩 목에 달고 도하하여 적화점들을 까부시고 돌격로를 개척하였다. 다른 지역에서도 조선사람들은 대부분 포의 조준수로서 적화점을 명중시켜 도하지점들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제4야전군 13병단 47군의 139사, 140사, 141사에 속한 조선인부대들은 장강을 건는 후 12병단과 함께 호남성 장사시를 반달형으로 포위하였다.특히 두 병단의 조선인부대가 주동이 되여 형양이남으로 진출한 결과 유일한 퇴각로가 차단당하게 되자 8월 4일에 한개 병단사령부와 3개 군단, 9개사단, 3개 보안련대를 포함한 장사의 모든 적들은 해방군에 투항하였다. 이렇게 되여 호남성 장사시는 전투없이 해방되였다.

장사시를 해방한 47군의 조선인부대들은 사천성으로 진격하였다. 이때 국민당군의 14병단과 20병단의 11만명의 적들은 해방군을 공격하려고 하다가 47군의 호된 타격을 받자 호남성서부의 높은 산과 장강, 오강의 천연요새에 의거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고 사천성으로 진격하는 해방군의 앞길을 막아보려고 시도하였다. 47군사령부에서는 139사의 조선인부대에 호남성서부로 들어가는 관문과 같은 대용현소재지를 점령할임무를 하달하였다. 139사의 조선인부대전투원들은 무더위를 무릅쓰고 높은 산과 령을 넘으며 도중에 토비들, 패잔병들과 부단히 싸우면서 행군을 다그쳐 저녁무렵에 대용에 도착하여 적들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전투에서 국민당 122군 군단장이하 5 000여명을 소멸하고 대용현소재지를 해방하였다.

대용전투후 139사, 141사의 조선인부대는 적들을 끊임없이 추격하여 흑수전투, 목동장전투를 벌려 수천명의 적을 소멸하고 사천성에 들어선후 매일 수십㎞씩 산길을 행군하면서 백계장, 백마 등에서 17차례의 대소전투를 진행하였다. 이 전투들에서 국민당군의 고위급장교들을 비롯하여 4 800여명을 포로하였다.

그후 조선인부대들은 1949년 11월 30일에 중경해방전투에 참가하였다. 이때 중국인민해방군 제2야전군 사령원 류백승은 중경해방전투에서 공훈을 세운 47군 부대들의 모든 전투원들에게 은전 2원씩, 군관들에게는 은전 4원씩 상금표창을 하였으며 중남군구사령부에서는 47군에 집체표창을 하였다. 원래 중경을 해방할데 대한 임무는 중국인민해방군 제2야전군이 맡았는데 제4야전군 47군 조선인부대들이 중경해방을 도와주어 승리하였기때문에 이에 대하여 매우 감사히 여겨 표창하였던것이다.

중경해방전투에서 중국인민해방군부대와 함께 조선인부대는 국민당군대의 련대급장교 19명을 포함하여 7 500여명을 살상포로하였고 무전기 5대, 무선전화 1대, 망원경 5개, 군마 180마리, 자동차 9대, 각종 탄약 30만 7 000여발, 수류탄 585개, 보총 2 890정, 경기관총 261정, 중기관총 60정, 척탄통 14문, 60㎜포 35문, 박격포 14문, 기관포 8문, 고사포 8문을 로획하였다.

조선인부대들은 이렇게 장강을 넘어 계속 남진하면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였으며 해방지역인민들을 새 생활에로 이끄는 사업에서도 커다란 공로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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