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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의 철도복구사업을 도와

중국혁명을 지원할데 대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교시를 높이 받들고 중국 동북지방의 철도를 복구하고 철도수송을 원만히 보장하는데서도 조선인부대들이 큰 역할을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보내주신 파견원들은 연변민주대동맹을 조직하고 그에 기초하여 각계각층을 민주주의기발밑에 단합시키면서 중국인민들을 도와 경제복구사업 특히 철도복구사업을 주동적으로 밀고나갔다.

일본제국주의는 패망하고 도망치면서 철도를 무참히 파괴해버리였다. 그런데다 8.15직후 이미 없어져야 할 괴뢰《만주국》의 잔여분자들이 아직 장개석을 믿고 연변지구에 버티고 앉아 철도를 손아귀에 넣으려 시도하고있었다.

괴뢰《만주국》길림철도국 국장은 국민당이 지도하는 길림철도국유지회를 내오고 각지에 《접수대원》을 파견하였다. 조양천지구에는 이른바 《감리부》가 서고 괴뢰《만주국》철도감시원을 하던 왕홍운이라는자가 감리부장으로 임명되였다.

이자는 부임되자 괴뢰《만주국》철도경찰과 지방경찰을 규합하여 이른바 철도경찰대라는것을 조작하였다.

실태를 료해한 강건이 철도로동자들속에 연변철도로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한 발기위원회를 내오고 룡정, 연길, 도문, 로두구, 조양천 등지에 사람들을 파견하여 그 준비를 다그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945년 10월 15일 조양천에서 민주대동맹의 지부장 26명과 대표 52명 그리고 방청 615명의 참가하에 연변철도로동조합창립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강건이 축하연설을 하였다. 회의에서는 강령, 규약을 채택하고 위원장, 상무위원, 후보위원, 감찰위원등을 선거하여 연변철도로동조합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연변철도로동조합은 창립된 첫날부터 반동세력과 투쟁하였다.

1945년 11월초 로동조합총지부에서는 3명의 대표를 《감리부》에 파견하여 왕홍운에게 로임을 달라, 우리는 당신들을 믿을수 없다, 민주주의적선거로 간부를 선거하자 등의 요구를 제기하게 하였다.

바빠맞은 왕가는 곧 길림철도국유지회에 사람을 보냈다. 길림에서는 절대로 권한을 내주면 안된다는 대답을 보내왔다.

강건은 철도경찰대들의 무장을 해제할데 대한 지시를 주었다. 1945년 11월 20일 연길현정부회의실에서 열린 연변인민대표대회에서 강건은 민병과 군대가 협동하여 철도경찰대의 무장을 해제할데 대한 안을 제기하고 밤중에 자동차와 땅크에 탄 무장대를 이끌고 철도경찰대를 포위하고 무장해제시켰다. 이에 겁을 먹은 왕홍운일당은 도망쳐버렸고 연변의 철도는 인민의 손에 장악되였다.

11월 30일 연변철도관리국 창립대회에서는 연변민주대동맹 위원장인 지희겸을 연변철도관리국 국장으로, 리충진을 부국장으로 선거하고 철도관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러한 때인 1945년 12월초 교하에 도망가있던 왕가는 국민당동북접수위원회의 소개신을 가지고 연변철도관리국 국장 지희겸을 찾아가 자신은 장경국의 지령을 받고 파견되여 온 대표라고 하면서 연변철도를 접수하겠다고 요구하였다.

장경국이란 장개석의 아들이다. 당시 장경국은 심양에 와있으면서 동북을 다 제손아귀에 넣으려고 시도하고있었다. 왕가는 바로 이 국민당 동북접수위원회의 세력이 든든하다고 믿고 자못 거만한 태도로 제가 국민당대표라고 하였던것이다.

지희겸은 그 노는 꼴이 가증스러워 당신네 국민당이 연변땅에 피 한방울은 고사하고 땀방울이나 흘린적이 있었는가, 연변의 철도는 연변인민이 접수관리하고있으니 좋게 말할 때 돌아가라고 면박을 주었다. 왕가는 불그락푸르락하다가 뺑소니를 쳤다.

이렇게 하여 인민의 손에 연변의 철도는 완전히 넘어왔으나 복구가 큰 문제였다. 극악무도한 일제침략자들은 패망하여 도망가면서 팔도구, 왕청, 대홍구의 철교를 폭파하였고 수많은 역사들을 불태워버리고 급수설비들을 파괴하였다. 기관차, 차량, 통신시설들이 다 파괴되였다.

달릴수 있는 기관차가 조양천과 도문기관구에 있었지만 그것도 수리하지 않으면 쓸수 없었다. 기관차부속품들이 부족하였고 기계설비가 갖추어있지 못한데다 디젤유같은 기름조차 없어서 수리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철도의 주인이 된 로동자들은 있는 힘과 지혜를 다하여 곤난을 극복하며 난관을 뚫고나갔다.

당시 조양천기관구에 전동기 한대가 있었다. 기계수리공들은 피대 여러개를 여기에 걸어 몇대의 기계를 돌렸다. 디젤유가 없어서 콩기름과 돼지기름에 비누를 섞어쓰기도 하였다.

로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1947년 1월에 연변일대의 철도가 전부 개통되였다. 그런데 기관차에 땔 석탄이 없어 어떤 때는 석탄대용연료를 때기도 하였다. 여러 역의 급수소들이 파괴되여 필요한 물을 우물에서 보충하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차량도 파괴되였으므로 빨리 수리하여야 하였다. 도문차량단구내에는 일본군대가 버리고 간 차량들이 있었는데 성한것이 별반 없었다. 차량직장에는 기중기는 물론 쟈끼조차 없었다. 그래서 차량수리공들은 차바퀴를 바꿀 때에는 악전고투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부속품은 야장간에서 마치로 두드려 만들었다. 나무건조실이 없어서 로동자들은 목욕탕에 증기를 넣고 나무를 찌고는 해빛에 말리워 썼다. 1947년 《7.1》로동경쟁운동속에서 《군중》호라고 이름지은 첫 려객렬차가 수리되였다.

렬차가 수리되니 파괴된 철길, 철교, 차굴을 급속히 복구하는 문제가 더욱 긴절해졌다.

그때 목도(목단강―도문)선의 파괴가 더욱 혹심했다. 8.15후 삼도구철교가 복구되여 왕청까지는 차가 통했는데 왕청, 대홍구철교가 복구되지 않아 녕안으로 통할수 없었다.

기관차수리를 끝내고(1947년 4월)

철도국의 로동자들은 왕청, 대홍구철다리수리를 자체의 힘으로 하려는 결심밑에 적극적으로 투쟁하여 아무런 교량수리설비도 없이 다른데서 쓰지 않는 레루를 뜯어 철길을 이어놓았다.

왕청, 대홍구철다리수리를 끝내고 이어서 녕안, 해란철다리를 복구하여 1946년 9월에 이르러 동만과 북만근거지가 철길로 이어지게 되였다.

라빈선은 동만과 북만근거지를 이어놓는 철길이며 해방군의 진격과 후퇴에 리용될수 있는 로선이였다.

복구에 동원된 로동자들은 자신이 탄원하여 스스로 어렵고 힘든 부문에 나선것만큼 수수밥을 먹고 박달나무도 얼어 터지는 엄동설한에 천막에서 숙식을 하면서도 누구하나 고생스럽다는 말한마디 하지 않고 일하였다. 그들은 손과 귀를 다 얼구면서도 교하로부터 천강까지의 구간에 전선대를 세웠고 가법으로부터 서란까지의 구간에서 철길, 철다리, 차굴을 다 복구하였다.

그때 조양천철도에서는 15명이, 도문철도에선 40여명이 동원되였는데 적기가 무시로 날아오는데다 엄동설한이여서 얼음장을 까고 물속에 들어가 작업해야 하였지만 이들은 끝까지 해내였다.

철도가 복구되는데 뒤이어 철도일군들과 로동자들은 갖은 시련과 난관을 이겨내며 군수품을 수송했다.

이 시기 남만에서는 동북민주련군과 남만군구가 근거지건설을 다그치면서 남만철도의 안전보위사업에 각별한 주의를 돌리였다.

동북민주련군에서는 무순 등지에서 운반하여 온 포탄과 탄약을 비롯한 군수물자들을 사평전투장으로 보내고있었는데 리홍광지대의 교도대가 이 군수물자운반의 안전을 보장하게 되였다.

그런데 이곳 남만철도국내에 잠입한 국민당특무들의 련락을 받은 적비행기가 날아와 매하구에서 휘발유차와 포탄, 탄약을 실은 차량을 련속 폭격하여 사평으로 보내려던 군수품들이 몽땅 불타버렸다.

1946년 5월말 이러한 손실을 막기 위하여 료녕군구는 남만철도보위의 임무를 리홍광지대에 맡기였다. 리홍광지대에서는 이 임무를 원만히 수행하기 위하여 이미 있던 500여명의 병력에 인원을 더 보충하여 료녕군구철도경비대대를 조직하였다. 이 대대는 5개 중대와 1개 경위소대로 꾸려졌는데 각중대는 통화, 류하, 혼강, 림강, 집안 등 지구에 배치되여 중요역과 철다리, 차굴을 지켰다.

철도경비대대는 군사문제에서는 료녕군구의 지휘를 받았고 당사업과 간부관리는 리홍광지대에서 하였다. 철도경비대대의 대대장은 철도국의 국장이 겸임하고 정치위원은 료녕군구 군사대표가 겸임하였다. 렬차운행때에는 소부대를 파견하여 엄격한 군사관제조치를 취하였다. 이 료녕군구철도경비대대는 동북민주련군이 제일 처음 조직한 조선족으로 구성된 철도경비부대였으며 중국인민해방군 철도병단의 전신이였다.

철도경비대대의 임무는 철도 및 그 시설과 렬차운행의 안전을 보장하며 아군이 퇴각할 때에는 철도시설을 파괴하여 적들의 수송선을 끊어놓는것이였다. 철도선이 길고 토비들의 교란이 심한데다가 철도국내부에 간첩들이 잠복해있고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철도경비대대는 많은 곤난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난관을 타개하기 위하여 전사들에게 철도를 보위하는 방법과 적들의 파괴암해책동을 미리 알아내는 방법도 가르쳐주고 중국말학습도 부단히 시켰으며 매화구역폭격사건의 피어린 교훈을 잊지 않고 기관사도 자체로 양성하였다.

1946년 여름과 가을 팔도강에서 무송, 몽강쪽으로 뻗어간 산림철도연선에서는 적들의 철도파괴활동이 심하였다. 철도경비대대는 석인역에 소부대를 파견하여 역부근의 차굴을 지키게 하였다. 석인역은 큰 산으로 첩첩 둘러싸인 작은 역인데 그 일대에 토비들의 소굴이 있었다.

어느날 소부대가 차굴입구 숲속에 잠복하고있는데 어둠이 깃들무렵 한무리의 토비들이 차굴을 파괴하려고 슬금슬금 다가왔다. 순간 경비대원들이 불의에 달려들어 적들을 치고 한명을 생포하였다. 살아남은자들은 혼비백산하여 산속으로 도망쳤다.

혼강지구를 책임진 중대는 혼강과 삼차자간의 철도연선에 부대를 파견하여 토비들의 습격을 방지하게 하는 한편 손가 보자와 삼차자사이의 철도연선에는 전투소대를 주둔시켜 렬차운행의 안전을 보장하면서도 토비들을 소멸하여 이곳 토비들이 철길주변에 얼씬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료녕군구의 중요한 재정원천인 목재의 수송을 보장할수 있었다. 철도경비대대가 조직된 후 남만철도의 류하, 통화, 림강, 집안 등 구간의 철길경비가 철저히 세워짐으로써 렬차의 정상운행이 보장되게 되였다.

1946년 10월 국민당군의 3개 군단이 통화를 공격할 때 철도경비대대는 류하와 통화사이의 철길을 파괴하고 여러 역의 물자들을 후방으로 소개시켜 적들이 철도수송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국민당군이 1946년 12월초 집안을 공격할 때 철도경비대대는 그곳에 와있던 소화사령원과 사령부의 성원들을 마지막 기차로 호송하고 철창자에 이르러서는 그곳 발전소를 폭파하여 적들의 철도수송을 크게 저애하였다.

1946년 12월 말 철도경비대대를 3개 중대로 개편하고 관영천을 대대장으로, 리가홍을 교도원으로 임명하였다.

1947년 하기공세의 결과 통화와 매하구가 해방되자 철도경비대대는 다시 남만철도를 복구하였다. 그후 동북민주련군은 매하구에 철도경비군사령부를 설치하고 료녕군구철도경비대대를 철도경비군에 편입시키였다.

1946년 봄 흑룡강성에서도 철도를 장악보위하는 호로군 한개 련대를 수화에서 조직하였다. 호로군의 임무는 철도를 장악하고 보위함으로써 철도수송을 원만히 보장하는것이였다.

초기에 이들은 할빈―가목사구간의 철길을 보위하였다. 당시 국민당군대가 대부대로 동북지방에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을 때여서 지방토호무리들이 이에 편승하여 철길과 철다리를 파괴하면서 악랄하게 준동하고있었다. 호로군은 이 토비무리들을 소탕하면서 파괴된 다리와 철길을 수리복구하였다. 그때 조선인청년들이 보위군부대에 수백명씩 계속 입대하였으므로 1946년 여름에 제2련대와 제3련대를 새로 조직하였다.

제2련대는 목단강에 주둔하면서 할빈과 수분하사이의 구간을 책임지고 제3련대는 계서에 주둔하면서 목단강과 가목사사이의 구간과 밀산―목단강사이의 구간을 책임지고 철도수송을 보장하였다.

호로군에서는 자체의 교도대를 조직하고 조선인간부 100여명을 양성하여 각 련대와 중대, 소대에 배치하였다. 당시 호로군은 3개 련대에 9개 중대를 가진 조선인부대로서 동북해방전쟁시기 토비무리들을 숙청하고 철도의 안전을 보장하는데서 커다란 공적을 쌓았다.

1948년 7월 남만에 있던 조선인철도경비대와 북만에 있던 조선인호로군 3개 련대를 통합하여 동북인민해방군 철도병단으로 재편성하였다. 철도병단에는 4개 지대(사단급)를 두었다. 지대는 선로대, 교량대, 반항공대 등 전문업종부대로 구분하였다. 동북이 해방된 다음에는 동북인민해방군 철도병단의 이름을 중국인민해방군 철도병단으로 바꾸고 재편성하였다.

철도병단의 조선인철도병부대는 료심전역에 앞서 심양과 금주사이의 철도연선에서 군수물자와 전투부대의 수송을 보장하기 위하여 파괴된 철다리와 철길을 복구하였다. 조선인철도병부대는 파괴된 통화철다리의 복구임무를 악전고투하면서 련속 전투를 벌려 끝냄으로써 렬차의 안전한 운행을 보장하였다. 또한 심양―길림간 철도선에 있는 청원-무순사이 철길복구사업도 잘하였다. 청원남쪽의 10여리나 되는 선로를 복구할 과제가 제기되였을 때 강얼음을 까고 얼음구멍속에 들어가 모래를 파내면서 하루밤사이에 전부 복구, 수리함으로써 아군의 대부대가 이 철도선으로 신속하게 이동하여 무순을 해방하는 전투에 진입할수 있게 하였다.

조선인부대 철도병들은 료심전역기간 홍수로 많은 철길구간이 파괴된것을 15일동안에 복구하라는 임무를 받은 다음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간고한 전투를 벌려 7일동안에 끝냄으로써 료심전역의 승리를 보장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때 병단에서는 조선인부대 철도병들을 크게 표창하고 매 전사들에게 은전 5개씩 상금으로 주었다.

그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중국공산당의 작전을 적극 도와주기 위해 동북인민해방군이 할빈으로부터 도문을 거쳐 우리 나라 남양을 지나 동해안철도를 리용하도록 하고 고원, 양덕, 서포를 지나 신의주로 해서 다시 중국 단동쪽으로 빠지는 렬차수송을 하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에 앞서 벌써 중국 동북지방에서 싸우고있는 일군들과 련계를 가지시고 우리 나라 철도부문전권대표를 할빈에 파견하여 이 작전을 원만히 보장하게 하시였다.

이때 할빈에서부터 도문으로 오는 철도구간에서 철도병들은 최대의 안전성과 비밀을 보장하였으며 적들의 어떠한 공격에도 대처하여 철저한 방어를 할수 있게 준비하고 이 작전을 보장하였다.

이리하여 동북인민해방군은 금주해방전투, 흑산, 대호산전투, 심양해방전투 등을 승리적으로 결속하고 전동북을 해방할수 있었다.

1948년 10월에 준공된 송화강철다리수축공사는 많은 조선인철도병부대가 참가하여 완공하였다. 제4야전군의 대부대가 평진전역에 참가하기 위하여 중국관내로 진출하는것을 보장할 임무가 철도병단에 하달되였을 때 조선인철도병부대들은 대부대의 관내진출을 보장하기 위하여 강행군으로 창리역에 도착하여 국민당군대가 파괴한 철길과 철다리를 복구하기위한 전투를 밤낮으로 벌려 천진부근까지 렬차통행을 성과적으로 보장하였다. 조선인철도병부대들의 헌신적인 노력은 제4야전군 대부대의 중국관내에로의 진출과 평진전역의 승리를 마련하는데 큰 기여로 되였다.

조선인철도병부대들은 중국인민해방군의 회해전역과 장강도하작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계속하여 진포철도선, 경한철도선, 북녕철도선, 룡해철도선복구에 뛰여들었다. 안휘성 명광교는 길이가 400여m나 되는 큰 철다리인데 이 다리를 국민당은 3년동안에 준공하였다. 국민당은 저들이 건설한 이 철다리를 패주하면서 파괴하고는 반년 혹은 1년이 걸려야 복구할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인철도병부대는 3주일동안의 줄기찬 투쟁끝에 1949년 3월에 철다리를 개통시켰다. 이때에도 철도병단에서는 조선인부대를 크게 표창하고 매 전사들에게 은전 5개씩 상으로 주었다.

안휘성 장하대교는 길이가 408m이고 높이는 7.5m이다. 여기에는 20개의 높고 큰 다리기둥이 있는데 항일전쟁시기 국민당군이 일제에게 광활한 화북지구를 내주고 도망가면서 이 장하대교를 파괴한 후 일제패망후에도 복구하지 못하고있었다. 기둥 20개중 19개가 완전파괴되였다. 중국의 남과 북을 관통하는 대동맥과 같은 경한철도선의 파괴된 여러 철다리중장하대교복구가 가장 큰 공사의 하나였다.

철도병단에서는 조선인철도병부대인 제4지대 제24선로대대에 철다리를 복구할 임무를 맡기였다. 조선인철도병들은 찬강물에 들어가 낮에 밤을 이어 악전고투하여 3개월만에 이 다리를 훌륭히 복구함으로써 중국의 남과 북을 련결하는 대동맥을 이어놓을수 있었다. 병단에서는 조선인부대를 크게 표창하고 매 전사들에게 은전 4개씩 상으로 주었다.

다른 한 조선인철도병부대는 룡해철도선복구임무를 맡았다. 이들이 맡은 동관교는 지질이 매우 복잡하여 복구하기가 어려웠지만 조선인철도병부대는 동관교를 제때에 복구하여 서북지구해방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호남성에 들어가 200여m나 되는 동안교도 복구하여 서남지구해방에 기여하였다.

이외에도 조선인철도병부대들은 광동성 동안현 자계철다리복구공사에서와 락하대교복구공사에서 생명까지 바치면서 맡겨진 전투임무를 성과적으로 수행하였다.

조선인철도병부대들은 중국본토의 남쪽관문인 광동성과 해남도해방전투를 보장하기 위하여 오량철도선에 진출하여 파괴된 철다리들을 복구함으로써 해방군부대들의 남진을 성과적으로 보장하고 전중국을 해방하는 위업에 커다란 공헌을하였다.

중국인민해방군에서는 철도병단의 조선인철도병부대를 가리켜 《해방군의 척후병》이라고 높이 찬양하였다.

복구해놓은 철길로 렬차를 타고 전방으로 달려가는 지휘관들과 전사들은 조선인철도병들에게 열정적으로 손을 흔들며 감사의 뜻을 표시하였고 방금 복구해놓은 교량옆에 흙투성이, 기름투성이가 되여 서있는 그들을 보고는 렬차우에서 《적들과 용감히 싸워 전국을 해방하는 실천행동으로 〈척후병〉들의 수고에 보답하자!》라고 구호를 높이 부르며 지나갔다. 어떤 전사들과 지휘관들은 쌀주머니, 과자, 빵상자, 지어 군복까지 던져주었다.

그럴때마다 조선인철도병부대 전사들은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높이 받들고 중국혁명에 이바지하고있는 자신들의 투쟁에 대한 크나큰 자부심을 간직하였으며 기어이 중국혁명의 승리를 보장하고 그리운 조국으로 기차를 타고 한달음에 달려갈 그날을 그려보군 하였다.

이처럼 조선인철도병부대는 중국인민해방군 철도병단의 시초를 열어놓았고 철도보위와 철도복구건설에서 자기의 고귀한 피와 땀을 다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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