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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은 전국해방의 날까지

1948년 11월 중국 동북지방의 가장 큰 도시이며 장개석국민당군대의 총사령부가 자리잡고있던 심양이 해방되여 중국에서의 동북해방전쟁은 중국공산주의자들의 승리로 끝났다.일제가 패망한 후 피의 결전의 대가로 이루어진 동북해방전쟁의 승리는 참으로 거대한 력사적의의를 가지는 사변이였다. 이제는 전중국을 해방하고 공화국창건을 선포해야 할 과제가 앞에 놓이게 되였다.

심양을 해방한 후 중국인민해방군의 주력부대의 하나인 우리 조선사람들이 속한 제4야전군은 이어서 산해관을 해방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관내로 진격해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관내에 들어가서 진행한 작전은 평진전역이였다.

평진전역은 북평(베이징), 천진, 장가구일대의 적들을 소멸하기 위한 작전을 말한다. 이 작전은 1948년 12월 5일부터 1949년 1월 31일까지 진행되였다.

당시 부작의가 국민당군 60만명을 거느리고 북평, 천진, 장가구일대에 견고한 방어진을 치고있었다.

제4야전군은 땅크, 장갑차와 각종 포를 비롯한 기계화부대의 엄호하에 파죽지세로 관내에 진격해들어가 화북야전군과 배합작전을 하여 베이징과 천진의 적들을 고립무원한 상태에 놓이게 하였다. 이런 상태에서 첫 타격을 천진에 가하였다. 천진은 대도시인데 사계청소를 하여 성밖에는 집 한채도 없었다. 적들은 성문에 철조망을 치고 수많은 포대를 축성해놓았으며 성밖으로는 깊이 6m, 너비 5m의 해자를 파고 바다물을 끌어다넣었으며 그앞에는 지뢰원을 설치하고 철조망을 둘러쳤다. 적들은 천진을 어떤 일이 있어도 내놓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치고있었다.

이때에 와서 해방군의 무력은 동북해방전쟁때와는 대비할수 없이 강화되였다.

전투방식에서는 장기간 포위하다가 적들이 맥이 빠진 다음에 폭약을 안고 들어가 적포대를 까부시던 방법이 아니라 강력한 포사격과 기계화부대의 엄호밑에 전면공격을 위주로하였다. 즉 지구전으로부터 전격전으로 이행하였다.

1948년 12월 중순 해방군은 천진포위를 끝내고 항복을 요구하였으나 적들은 거절하였다. 해방군은 즉시 1949년 1월 14일 각종 구경의 수백문의 포로 일제사격을 가한 후 뒤따라 보병이 진격을 개시했다. 이때 조선사람들 대부분이 포의 조준수 혹은 땅크나 자동차의 운전사로 활동하였다. 해방군의 강력한 포화력과 수십만의 보병들의 총공격앞에서적들은 도주하거나 투항하였다. 아군은 적군 13만여명을 섬멸하고 1949년 1월 15일 천진을 해방하였다. 장가구는 이보다 앞서 해방되였다.

천진, 장가구가 해방되자 베이징방위총사령 부작의는 30만에 달하는 자기의 부대를 이끌고 투항하였다. 1949년 1월 31일 베이징은 한방의 총소리도 없이 해방되였다. 결국 평진전역에서 중국인민해방군은 적 52만여명을 살상포로하였으며 장강이북 화동지방에서 회해전역(1948년 11월 6일부터 1949년 1월 10일까지 사이의 작전)을 벌려 적 55만 5 000여명을 소멸하고 장강이북지역을 완전히 해방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내에서는 장강이남으로 계속 진출하는 문제를 두고 의견이 제기되였다. 남방의 지형이 어떻다느니 자연조화가 신비로와 《남방에 가면 동북사람은 살아오지 못한다》는 소문이 돌아 하루에도 수백명씩 도주자가 생겼다.

장개석국민당군대가 조선사람들때문에 쫓기운다고 비명을 지르며 장강이남으로 줄행랑을 놓았고 이제는 국민당군의 패배가 눈앞의 시간문제로 남아있던 때에 대오내에서 이런 문제가 제기됨으로써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하는것이 중국공산당앞에 심중한 문제로 제기되였다.

전중국해방에서 제4야전군이 핵심적인 주력부대의 하나이고 또 여기에서 조선사람들이 돌격대적역할을 하고있는 조건에서 조선인부대들이 중국혁명을 끝까지 도와주는 문제는 중국인민의 해방전쟁을 결속하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였다.

 

※ 왕효명은 해방전 국제련합군시기부터 위대한 수령님과 함께 투쟁하였으며 해방후 길림위수사령부 부사령, 연길군구사령원, 동북야전군 제11사 사단장, 포병 제6사 사단장, 1950년이후 해군포병학교 교장으로 사업하였다.

 

1949년 2월 왕효명은 우리 나라가 중국의 해방전쟁을 끝까지 도와줄것을 요청하기 위하여 평양에 왔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왕효명을 접견하시였다. 왕효명은 접견석상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동북해방전쟁에 물심량면의 지지성원을 준데 대하여 중국공산당과 인민이 보내는 감사를 전해드리고 중국의 전국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제기되고있는 문제들을 솔직히 말씀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이야기를 주의깊이 들으시고나서 중국혁명을 끝까지 도와주는것은 조선의 변함없는 립장이라고 천명하시며 중국측의 요구를 쾌히 수락하시였다.

왕효명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어제나오늘이나 변함없이 중국혁명을 도와주고계시는데 대하여 다시한번 뜨거운 감사를 올리고 그 길로 압록강을 넘어섰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왕효명을 접견하신 다음날 조선인민군의 한 책임일군을 부르시여 중국인민해방군의 군사활동과 전쟁형편에 대하여 알려주시고나서 빨리 중국의 천진에 가서 조선인부대들이 중국인민의 해방전쟁을 끝까지 도와주고 조국으로 돌아오게 할데 대한 지시를 주라고 명령하시였다.

명령을 받은 책임일군은 곧 압록강을 건너 조선인부대들이 주둔하고있던 천진에 가서 위대한 수령님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그는 동북해방전쟁시기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전국해방을 위한 전투에서 앞으로도 용감무쌍하게 잘 싸워 위대한 수령님의 기대와 요구 그리고 중국공산당의 믿음에 보답하고 조국에 귀국하라고 고무추동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명령을 전달받은 조선인부대들은 잠시 주춤거리였던 자신들을 다잡고 중국의 전국해방을 위한 길에서 다시한번 용맹을 떨칠 결의를 다지였다.

이리하여 조선인부대들은 또다시 준엄하고도 간고한 3만여리의 진격의 길에 나서서 남하행군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무더운 날씨, 체질에 맞지 않는 물과 풍토, 말라리아, 리질 등 질병을 이겨내며 매일 40㎞를 행군하였고 적과 싸우면서 장강을 건너 해남도까지 전진하였으며 수십차의 전투끝에 하남성, 강서성, 광동성, 호남성, 광서성, 귀주성을 해방하고 중국의 베이징 천안문광장에 오성홍기가 휘날릴 때까지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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