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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남현성전투

1946년 10월 19일 동북의 국민당군은 《남공북수, 선남후북》의 전략을 세우고 우선 남만근거지에 병력을 집중하고 공격을 개시하여 일거에 남만부대를 소멸한 후에 전체 병력이 북으로 공격하여 전동북을 독차지할 야망을 실현하려고 기도하였다.

이 전략을 실현하기 위하여 국민당군은 9개 사단 약 10만명의 병력을 집중하여 3개 방향에서 남만해방구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때에도 조선인부대들이 백두산지구와 로야령산줄기의 대산림지대에 의거하여 유격전과 산악전, 동기대부대기동작전을 벌려 적들을 숨쉴새없이 수세에 몰아넣으며 송화강이남에 진출하여 적의 집단을 타격소멸함으로써 남만일대에 집중되여있는 적의 력량을 분산약화시키라고 가르쳐주시였다.

장백, 림강, 무송일대는 높고 험한 산발과 천고의 밀림으로 뒤덮여있는데다가 겨울에는 기온이 -30℃~-40℃까지 내려가고 눈이 키를 넘게 내리기때문에 중국의 남부지방에서 겨울을 모르고 지내던 장개석군대는 추위에 견디지 못하였고 산악전에 경험이 없으므로 어쩌지 못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적의 이런 약점을 미리 타산하시고 동기대부대기동작전을 펼칠데 대하여 가르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에 의하여 리홍광지대가 동북민주련군과 함께 진행한 대표적인 전투의 하나가 휘남현성전투다.

남만의 휘남현성은 장개석군대가 군사전략상 매우 중시하던 곳이였다. 국민당 동북집단군사령부가 도사리고앉은 심양을 보위하는 동쪽의 보루가 매하구라면 휘남현성은 그 매하구를 지키는 전초진지였다.

매하구는 북으로 길림, 장춘과 통해있고 서북쪽으로는 사평과 통해있었으며 서쪽으로는 직접 심양과 이어져있었고 남쪽은 통화와 통해있는 군사요충지였는데 바로 이 요충지를 고수하자면 휘남현성을 잘 지켜야 하였던것이다. 그렇기때문에 국민당군대는 휘남현성에다 저들의 한개 련대와 승냥이무리로 되여버린 토비 한개 보안대대를 주둔시켜놓고 아군의 공격을 막으려고 시도하고있었다.

1947년 2월말에 남만의 리홍광지대는 중국동지들과 함께 휘남현성주변마을에 박아놓은 국민당군 소부대들을 섬멸하고 휘남현성을 포위하였으며 휘남현성에서 조양진으로 빠지는 도로까지 차단하였다. 이렇게 되니 휘남현성의 적들은 독안에 든 쥐신세가 되였다.

적들은 한개 대대의 국민당군과 보안대대의 한개 중대를 성밖으로 내보내여 끊어진 길을 이어놓으려고 시도하였다. 그러자 제2련대 2중대가 황니하에 림시방어시설을 설치하고 성밖으로 나오는 적들을 타격하였다. 싸움은 가렬처절하였다. 적들은 저들의 무장장비를 자랑하듯 모든 화력을 집중시켜 3차례나 아군진지로 돌격해왔지만 그때마다 격퇴당하였다.

3련대의 한개 중대는 발악하는 적들을 일격에 소멸할 임무를 받고 반돌격의 주력으로 앞장에 나섰다. 적기관총 3정이 아군의 진격로를 막는 바람에 전우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적의 진지를 탈취하여야 할 임무를 받고 돌격하던 중대는 약속된 시간 20분전까지도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있었다. 이때 대대장은 불을 뿜는 중기관총들을 까부실데 대한 명령을 조성두에게 주었다. 조성두는 지뢰 3개를 몸에 지니고 적의 중기가 있는 고지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적들의 기관총사격이 그에게로 집중되였다.

조성두는 전우들의 엄호를 받으며 계속 앞으로 나갔다. 엄페물로 삼은 관목림의 나무가지가 적들의 기관총사격에 뭉청뭉청 끊어져 눈우에 떨어졌다.

포복전진하다가 벌떡 일어나 나무사이로 달리던 그는 땅우에 널려있는 나무가지에 발이 걸려 앞으로 나딩굴었다. 그 바람에 땀에 흠뻑 젖은 그의 털모자가 눈우에 떨어졌다. 순간 그의 머리에는 털모자를 나무가지에 걸어놓고 앞으로 달리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나다를가 적들은 나무가지에 걸려있는 그의 모자에 대고 기관총사격을 가하였다. 적들은 그 모자를 보고 사람이 눈우에 엎디여있는줄로 알았던 모양이다.

이 순간을 놓칠세라 조성두는 날래게 적들의 사격권을 벗어나 지뢰 3개로 적기관총들을 다 벙어리로 만들었다.

아군전사들이 함성을 울리며 돌격하였다. 적들은 혼비백산하여 휘남현성안으로 도망쳤다. 조성두는 도망치는 적들의 등에 대고 불벼락을 안기였다. 명령받은 그 시각에 반격전은 승리로 끝났다.

이렇게 휘남현성에 대한 포위진이 좁혀지자 휘남현성에 들어박혀있던 적들은 휘남현성을 지키는 지탱점인 휘남현성의 남산고지를 강화하였다. 적들은 이 남산고지를 난공불락의 강철의 고지라고 호언장담하였다.

아군은 남산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구체적인 작전방안을 세우고 화력배치, 돌파구, 총공격시간 등을 정해놓고 정찰을 더욱 강화하였다.

1947년 3월 2일은 음력대보름날이였다. 전사들은 대보름 저녁식사를 푸짐히 하고나서 남산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전투에 나섰다. 전사들은 솜옷을 뒤집어입어 흰색으로 보이게 하고 모자에도 흰천을 씌운 후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속으로 행군해갔다.

밤 10시경에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전사들은 두텁게 쌓인 눈밑을 파헤치고 포복전진하여 4시간만에 적들의 첫 방어시설에서 100여m 떨어진 지점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적들이 단잠에 곯아떨어질 때까지 몇시간 더 기다려야 하였다. 그동안 그 어떤 기척도 내지 말아야 하였으므로 그것 역시 전투나 다름없는 힘든 일이 아닐수 없었다.

적들의 방어시설은 아군정찰이 알아낸바와 같이 여간만 견고하지 않았다. 적들의 중심보루인 1호화점이 남산의 제일 높은 고지우에 둥실 올라앉아있고 그 주위에 T자형으로 2호, 3호, 4호 화점들이 있었다. 여기에서는 동남, 서남, 남쪽을 마음대로 사격할수 있었다. 화점에 놓인 총구로 보아 동쪽의 큰길과 남쪽 산릉선에 화력을 제일 많이 집중시켜놓고있었다.

새벽 5시, 아군의 진격나팔소리가 울렸다. 뒤따라 아군의 총포소리가 세차게 울린 때에야 정신이 든 적들도 부랴부랴 대응사격을 하였다. 아군의 중기는 화점 4개를, 경기는 화점 2개를, 보총 3자루는 화점 하나씩 책임지고 엄호사격을 하였고 전사들은 적의 화점을 향하여 맹호마냥 달려나갔다.

오후 1시경에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는 적의 화점들이 입을 다물었으나 중심에 있는 적의 중기들은 여전히 불을 토했다. 흰눈은 우리 전사들의 피로 물들여져 붉은 눈이 되였다.

소나무를 베여내고 세멘트콩크리트로 구축한 적의 1호보루 주위에는 3.5m너비의 도랑을 1.5m깊이로 파놓고 사람이 올라오지 못하게 얼음강판을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경사면에는 철조망을 거미줄처럼 겹겹이 늘여놓고 철조망안에는 뾰족한 록시끝이 아래로 향하게 촘촘히 박아놓았다. 1호보루는 말그대로 겹겹의 해자, 가시철조망, 록시에 둘러싸인 성과 다름없었다. 진격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몇조의 폭파조가 돌격해 들어갔지만 폭파수들은 겨우 철조망과 록시를 까부시였을뿐 도랑을 넘어서지 못하고 희생되였다.

이 모든것을 지켜보던 3련대 조성두분대장은 자기 분대가 보루를 까부시겠다고 자원하였다. 조성두분대장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보루를 까부시겠다는 결심밑에 적의 1호화점을 향해 돌진하였다.

이런 정황속에서 오후 5시, 아군전선사령부의 총공격신호가 올랐다.

12명의 폭파조는 릉선을 타고 적의 화점에 신속히 접근하였다. 4명은 폭파수가 나갈 길을 열어제꼈고 5명은 엄호하고 조성두를 비롯한 3명이 지뢰를 안고 전진하였다.

적기관총들이 쉴새없이 폭파수들을 향해 불을 뿜었고 적들의 예광탄이 또한 계속 전장을 핥았다. 폭파수들은 쇠줄로 짝지발을 만들어 손발에 끼고 기여올랐다. 적의 화점을 가까이 할수록 기관총소리는 콩볶듯 하였고 화점주변은 앞을 가려볼수 없게 짙은 포연에 휩싸였다. 폭파수 한명이 적탄에 쓰러졌다. 그러나 조성두는 계속 전진할것을 단호히 명령하였다.

조성두는 오른쪽다리를 부상당하였으나 적화점 40m가까 이까지 다가갔다.

그때까지 적들은 그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눈먼총을 마구 쏘아대였다. 그러다 조성두와 같이 가던 폭파수가 지뢰에 걸려 희생되자 그 폭음에 놀란 적들이 이번에는 조성두를 발견하고 그에게로 화력을 집중하였다. 그때는 이미 조성두가 적화점 10여m의 거리에 이르렀을 때였다. 두 폭파수의 희생을 복수하기 위해서도 그는 기어이 적의 화점을 까부셔야 하였다. 조성두는 부상당한 다리를 끌고 한치 또 한치 피를 흘리면서 기고 또 기여갔다.

그는 끝내 적의 기관총구앞에까지 다가가 화점에 지뢰를 던져넣으며 방화선을 당겼다. 《동지들, 돌격앞으로!》 그는 기적적으로 상반신을 일으키며 웨치였다. 적의 화점이 하늘로 날아났다.

육탄으로 적의 화점을 까부신 조성두영웅

조성두는 이렇게 생을 마쳤고 영웅으로 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22살이였다.

지휘관과 전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고지로 달려갔다. 남산고지는 점령되였다. 남산고지를 탈취한 조선인부대는 물밀듯이 휘남현성거리로 공격하여 2시간 남짓한 사이에 현성을 해방하였다. 아군은 이 전투에서 적 1 000여명을 소멸하고 400여명을 포로하였으며 포 17문, 기관총 21정, 보총과 단총 370여정과 많은 량의 군수물자를 로획하였다.

조성두는 이 전투에서 승리의 길을 열어놓은 첫 육탄영웅으로서 그후 동북해방전쟁에서 폭파수의 본보기로 되였다.

휘남현성전투후 남만일대의 동북민주련군 부대들에서는 《지뢰수 조성두용사》라는 노래가 널리 보급되였다.

지뢰수 조성두용사

휘남산포대 향해 돌진할 때

원쑤의 철조망과 차단물은

아군돌격의 장애물이다

지뢰를 터쳐 부셔버리고

부대의 돌격로 열자

3월 3일 저녁 5시

공격명령은 내렸다

조용사 정위 손잡고 남긴 말

인민 위해 몸바침은 응당한 도리

피끓는 가슴에 지뢰를 안고

용감히 포대 향해 돌진했다네

별빛은 반짝이며 붉은 얼굴 비치고

용사들의 가슴엔 끓는 피 굽이치네

적탄에 중상을 당하였지만

붉은 피로 흰눈을 물들이면서

멀어지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세번 다시 일어나 임무 완성해···

그 이후 이 부대에서는 조성두에 대한 연극도 만들어 선전하였으며 그의 영웅적위훈은 중국인부대들에까지 알려져 전투사기를 높이는데 이바지하였다.

휘남현성전투는 동북민주련군이 수세에서 공세에로 넘어간 첫 공격전투였으며 이 전투후부터 아군은 적을 타승하고 승승장구하는 길에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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