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제1차 장춘해방전투

동북해방전쟁 초시기 동북의 정세는 중국공산당에 매우 불리하였는데 특히 장춘지구가 매우 심상치 않은 형편에 놓여있었다.

일제가 패망한 직후 동북의 대도시들을 중국공산당군대가 차지하였으나 《중쏘우호동맹조약》에 따라 도시들을 내놓는 바람에 1946년 1월 장춘도 장개석에게 넘겨주게 되였다. 그리하여 공산당군대는 장춘에서 나오고 장개석이 비행기로 수송한 국민당군대가 장춘을 타고앉게 되였다.

장개석군대는 심양―장춘간 철도를 따라 철령, 사평계선으로 계속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

이것을 막아보려고 중국공산당군대가 사평계선에서 필사적으로 방어하였으나 아군은 8 0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적들의 포위에 들게 되였다.

장개석은 포위에 든 공산당군대를 몽땅 《소멸》하고 동북지방에서 저들의 작전을 《영예롭게 결속》하려고 시도하였다. 장개석은 병력과 무장장비를 계속 보충하면서 포위의 올가미를 점점 더 조이고있었다.

공산당군대는 좁은 포위망안에서 군수물자도 받지 못하고 탄약과 식량도 떨어져 날이 갈수록 더욱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였다. 게다가 좁은 포위망안에서 위생조건까지 불비하다보니 환자들이 생겨 사망자가 매일같이 늘어났다. 이런 사태가 계속된다면 공산당군대는 파멸을 면할수 없게 될것이였다.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주체35(1946)년 3월 28일 남양에서 강건과 박락권을 만나시였을 때 동북민주련군을 도와 장춘해방전투를 조직하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북에 파견되여있는 강건과 박락권에게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장춘해방작전을 벌려 사평계선에서 포위되여 위급한 처지에 있는 중국공산당부대들의 퇴로를 열어주라고 교시하시였다.

장춘해방전투에는 길동분구사령부산하 박락권이 인솔하는 1련대와 포련대를 비롯한 2만여명의 조선인부대가 동북민주련군부대들과 함께 참가하였다. 전투는 1946년 4월 14일에 시작되였다.

4월 14일에는 먼저 장춘시교외에 널려있는 적들을 섬멸하였다. 다음날 아침 6시부터 장춘시내에 대한 총공격이 시작되였다.

박락권이 지휘하는 련대는 법정대학과 공업대학에 틀고앉아있는 적들을 소멸할 임무를 받고 치렬한 시가전을 벌렸다. 폭약이 부족하여 군용곡괭이로 적보루의 벽체에 구멍을 뚫고 그속에 수류탄묶음을 박아넣군 하였는데 그 폭발이 대단하였다. 전사들은 수류탄묶음으로 열어놓은 통로로 공업대학의 웃층으로 올라갔으며 적들의 기관총을 피해가면서 파손된 문짝을 모아 불을 질러 웃층의 적들이 연기속에서 눈을 뜨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게 만든 다음 달려들어 육박전으로 적들을 소멸하였다.

조선인부대는 법정대학과 공업대학을 점령한 후 이번에는 대륙과학원을 점령할 임무를 받았다. 대륙과학원은 당시 아시아에서도 손꼽히는 과학연구기관이였는데 화강석으로 지은 6층청사는 적들이 장춘을 고수하는 남단의 가장 중요한 방어거점으로 삼고있었다. 적들은 한개 중대를 여기에 주둔시키고 정문과 지붕에 모래마대로 방어진지를 만들었으며 창문마다에 각종 화력무기들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청사앞에는 철조망을 늘이고 록시를 박아놓았다.

박락권은 1대대에 화력을 집중하여 적들을 제압한 후 공격할것을 명령하였다. 오후 2시 공격은 시작되였으나 높은 위치에서 드센 불질을 하는 적들의 화력을 압도할수 없었다.

기관총의 엄호를 받으며 폭파조가 몇차례 포복전진하였으나 적들의 화력이 너무 맹렬하여 희생자만 내고 어쩌지 못하고있었다.

박락권은 포사격을 명령하였다. 몇문의 포가 청사지붕과 청사앞에 설치한 장애물들을 마구 짓부셨다. 이때 기관총도 세차게 불을 뿜었다. 포탄 한발이 요란한 폭음과 함께 대륙과학원에 불을 질러놓았다. 아군의 드센 화력에 적들의 화점은 하나하나 벙어리가 되고 아군의 사기는 올랐다.

박락권은 이때 돌격명령을 내렸다. 전사들은 수류탄으로 청사앞의 화점을 까부시며 돌진하였다.

청사에 불길이 세차게 타오르자 적군은 아래층으로 몰려들었고 여기서 육박전이 벌어지자 적들은 저마다 살구멍을 찾아 뛰기 시작하였다. 총을 바치면 죽이지 않는다는 박락권의 호령과 투항하라는 대원들의 웨침소리에 당황해진 적들은 총을 내던지고 손을 들었다. 대륙과학원은 점령되였다.

이때 한개 분대가 계속 적을 따라 공격하다가 적진깊이 들어가게 되였다. 정황을 판단한 전사들은 얼른 적들의 시체에서 국민당군복을 벗겨 입고 부대를 찾아 돌아오면서 적들의 자동차를 로획하였다. 분대는 무사히 아군진지에 도착하였을뿐아니라 차에 탔던 한개 소대도 넘는 많은 적들을 포로하는 전과를 올리였다.

련대는 전과를 확대하면서 《협화회》중앙훈련소와 만주광산살림집구역에로 돌진하였다. 여기서 련대는 적들이 주력이라고 떠드는 《철석부대》와 맞다들었다. 《철석부대》는 주로 일본군패잔병들로 구성된 악질부대였다.

적들은 3층으로 된 훈련소건물과 살림집구역들에 경기 10여정, 박격포 3문, 중기 5정, 척탄통 10여문을 설치하고 련대의 진격을 막아보려고 발악적으로 책동하였다.

박락권련대장의 돌격구령이 떨어지자 전사들이 성난 호랑이와 같이 적진을 향해 달려갔다. 적탄이 비발치고 전사들은 쓰러졌다. 가슴에 적탄을 맞은 전사들은 쓰러지면서도 《나는 념려말고 계속 전진하오.》하며 동지들을 격려하였다. 혈전은 밤에도 계속되였다. 4월 16일의 전투는 더 가렬하였다.

《협화회》중앙훈련소와 만주광산살림집구역으로 통하는 골목마다에는 적들의 시체가 깔려있었다. 아군도 손실이 적지않았으나 전사들의 사기는 계속 고조되였다.

만주광산살림집구역을 공격하던 전사들은 얼마후 좁다란 골목에 들어서게 되였는데 이곳을 통과해야만 적진으로 들어갈수 있었다. 모두가 죽음을 각오하고 이 골목에 들어서서 탄우를 무릅쓰고 결사전을 하여 끝내 그곳을 통과하고 드디여 《협화회》중앙훈련소와 만주광산살림집구역에까지 들어가 돌격시간을 기다리게 되였다.

이윽고 붉은 신호탄이 오르고 《철석부대》를 일격에 소멸하기 위한 야간공격이 시작되였다. 적들은 미처 아군의 의도를 알아차리지도 못한채 불벼락을 맞았다.

밤 9시, 적들이 그처럼 난공불락의 요새로 자랑하던 《협화회》중앙훈련소건물과 만주광산살림집구역은 드디여 박락권련대에 의하여 완전히 점령되였고 《철석부대》도 녹아났다.

박락권련대와 동북민주련군부대들이 3일간의 맹공격으로 시내의 1/3을 점령하자 바빠맞은 적들은 담판을 제기해왔다.

적들은 이 담판으로 시간을 얻어가지고 방어시설을 완비하여 아군의 진격을 기어이 막아보려고 하였다.

박락권련대장은 담판을 거절하고 무조건 항복하라고 들이댔다.

적들이 그 요구를 거부하여 담판은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며 아군은 다시 전투에 진입하였다.

박락권련대는 적의 증원부대를 견제하고있던 최광이 지휘하는 부대의 후원밑에 련속적으로 도시중심부로 전과를 확대하였으며 적들의 총지휘부가 도사리고있던 중앙은행청사를 비롯한 주요기관들을 점거하여 장춘해방전투승리의 돌파구를 열어놓았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훌륭한 군사지휘관이였던 박락권련대장이 대오의 앞장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박격포탄의 파편을 여러군데 맞고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그날은 1946년 4월 18일 이였다. 그는 적진으로 접근해가는 전사들을 계속 엄호하다가 그만 적탄에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의 이마와 가슴에서 선지피가 샘솟듯 흘러나왔다.

전선구급소에서 의식을 차린 박락권련대장은 전투형편을 알아보고나서 아군이 계속 드센 공격을 하여 적들을 소멸한다는것을 알자 마음을 놓으며 가까스로 말하였다. 《동무들 난 이젠… 그러나 혁명에 바치는 목숨이니 …기쁘오. 김일성장군님의 안녕을…》

그리고 그는 품속에 손을 넣었다. 전우들이 그를 도와 그의 품속에서 손수건에 싼 물건을 꺼내 펼쳐보니 그속에는 박락권련대장이 그때까지 받은 메달과 훈장들이 있었다. 그는 《혁명이 승리하면 이 메달과 훈장들을… 우리 어머니에게…》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는 자기 어머니에게 아들이 혁명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바쳐 싸웠다는것을 꼭 말해달라는 유언을 남기였던것이다. 박락권련대장은 28살을 일기로 피끓는 청춘을 우리 나라 혁명과 중국혁명을 위하여 바쳤다.

그가 장춘해방전투에서 희생되였다는 소식을 길동분구사령부에서 제일 먼저 안 사람은 무전수인 박경숙이였다.

그는 무전으로 장춘과 계속 련계를 가지고있다가 뜻밖에도 박락권련대장의 희생에 대한 전문을 받았다.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함께 싸워온 전우, 몇달전에 그가 룡정에서 결혼하여 장래를 축복받던 일이 눈앞에 선하였다. 이 사실을 박락권련대장의 안해에게 어떻게 알린단 말인가···

박경숙은 눈물이 앞서 인차 상급에 보고할수 없었다. 보름전에 강건, 주보중과 함께 남양에 가서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고 돌아와 이제는 막혔던 고리들이 다 풀리게 되였다고 기뻐하며 우리 사령관동지께서 포위된 중국인부대를 구원하기위해 장춘해방전투를 하라고 하시였는데 내 장춘에 얼른 갔다와서 다시 만나자고 하던 박락권련대장이 이렇게 가다니···

박경숙은 무전대앞에서 어찌할바를 모르다가 가까스로 일어나 옷매무시를 바로하고 강건에게 우선 이 사실을 알리러 갔다.

 

박 경 숙

주체10(1921)년 9월 27일 출생. 해방전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에 참가. 해방후 중국 연길현에서 강건(남편)의 지도밑에 길동분구사령부에서 무전수로 동북해방전쟁에 참가. 그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중요직책에서 사업함. 년로보장을 받고있음.

 

박경숙은 북받치는 오열을 가까스로 참으며 남편인 강건앞에까지 갔으나 《박락권동무가…》하고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강건은 모든것을 알아차리고 일시에 굳어진듯 서있더니 《아, 이 사실을 우리 사령관동지께 어떻게 보고해야 하오. 일제와의 싸움에서 별의별 고생을 다 하면서도 살아온 박락권이 조국에 가지도 못하고 여기서 죽다니…》하고는 창문쪽으로 돌아서서 먼 하늘가를 바라보며 비분에 떨었다.

박락권은 1932년에 왕청현 석현에서 지하공작을 하였고 1933년에는 소왕청지구에서 공청비서사업을 하였으며 그후 훈춘현 대황구근거지에서는 돌격대 대장으로 활동하였다. 박락권은 항상 당과 혁명에 충실하였으며 어떤 환경속에서도 무비의 용감성과 불굴의 투지로 원쑤들을 족치였다.

1933년 여름 훈춘전투에서 그는 배에 상처를 입었는데 손으로 창자를 밀어넣으면서 전투를 하고 그 길로 걸어서 밀영에 돌아온적도 있었다.

항일전쟁시기 주보중의 부관을 하면서 부상당한 주보중을 업고 적들의 겹겹한 포위를 뚫고 끝내 부대로 찾아온적도 있었다. 그는 조국이 해방된 후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받들고 중국 동북지방에 파견되여 중국 동북해방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길동분구 제1련대장으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전투를 지휘하였다.

얼굴이 둥그스름하고 다부진 체격, 중국말도 류창하게 하고 싸움에선 맹호같은 그였다. 결혼한지 몇달밖에 안되였지만 그는 계속 전장에 있었다.

1946년 1월 25일부터 박락권련대장은 토비숙청에 참가하여 삼도만전투로부터 대황구, 묘령, 천교령, 락타산, 아미달령 등 전투에서 마의봉, 리무청, 류탄장의 토비부대를 섬멸하였다. 그리하여 토비들은 《조선족련대》란 말만 들어도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

조중련합부대의 용감한 투쟁으로 하여 총공격을 개시한지 5일만에 장개석의 아들 장경국이 위수사령관으로 들어앉아있던 장춘은 완전히 해방되였다. 아군은 2 500여명의 적을 살상하고 1만 4 000여명을 포로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장춘이 해방됨으로써 사평계선에서 포위되였던 중국공산당군대의 퇴로가 열리게 되였고 동북해방전쟁승리의 전망이 열리게 되였다.

이 전투에서 박락권련대장이 희생된데 대한 소식을 들으시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처럼 아끼고 사랑하시던 전사를 잃은데 대하여 몹시 가슴아파하시면서 장춘해방전투의 앞장에서 적진으로 돌격하다가 박격포탄파편을 여러군데 맞고 전사했다는데 최후를 박락권이답게 마치였다고, 그는 조중인민이 다같이 기억하는 영웅으로 력사에 남아있을것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중국공산당에서는 희생된 박락권을 추모하여 연길에 그의 비석을 세워 동북해방위업에 한몸을 서슴없이 바친 그의 위훈을 후세에 길이 전하도록 하였다.

 

박 락 권

주체7(1918)년 3월 3일 출생. 해방전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에 참가. 해방후 중국 연길현에 파견되여 길동분구사령부 야전군 1련대장으로 동북해방전쟁에 참가. 주체35(1946)년 4월 18일 장춘해방전투에서 전사. 항일혁명렬사임.

 

제1차 장춘해방전투에서 장렬하게 희생된 박락권렬사의 추모비

 

이전 차례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