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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사령원의 요청

소화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받은 긴급지시에 따라1945년 9월 산동군구의 사령부, 정치부, 후방부의 일부 간부 1 000여명을 인솔하고 봉래현 란가구에서 출발하여 바다를 건너 동북으로 진군하여 9월말에 심양 동북국에 도착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산동에서 많은 부대들이 련이어 동북에 들어왔다. 소화는 중앙에 보고한 후 9월말부터 10월초까지 부대를 단동지구에 배치하였다.

 

※ 소화는 1945년 10월 중순에 중국공산당 료동성위원회와 료동군구가 수립된 후 성위원회 서기, 군구사령원 겸 정치위원으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동북국위원, 남만군구 부사령원 겸 정치위원, 제4야전군특수병종사령원, 병단정치위원으로 사업하였다.

 

1945년 11월에 들어서면서 장개석국민당군이 단동으로 밀려들었다. 그러나 소화에게는 조성된 어려운 난관을 타개할 방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시 장개석국민당군은 미국의 군사적지원밑에 중국 동북지방을 일격에 타고앉아보려고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몇가지 날자별 공격정형은 다음과 같다.

1945년 9월 30일 미군 중국 당고에 상륙.

1945년 10월 2일 미해군륙전대 1 400여명이 진황도를 공격하여 점령

1945년 10월 4일 연대앞바다에 침입한 미태평양함대 황해분함대 파견장교가 해안에 올라와 공공연히 연대에 주둔하고있는 중국 팔로군(공산당군대)에게 연대를 미군에 《접수》시킬것을 협박.

1945년 10월 30일 진황도주둔 미군은 국민당 94군 일부와 함께 기동해방구의 림유현 해강진을 점령하고 산해관지구를 침범, 국민당 13군 미국군함으로 진황도에 상륙.

1945년 11월 1일 진황도에 상륙한 국민당 13군이 대병력으로 동북인민자치군 산해관수비대를 공격.

1945년 11월 13일 국민당 52군의 조공무부대 수십척의 미국군함으로 수송되여 진황도에 상륙하고 국민당 13군과 함께 산해관을 맹렬히 공격.

1945년 11월 16일 국민당군 대병력이 미군의 지원하에 산해관 점령.

1945년 11월 19일 국민당군이 수중을 점령.

1945년 11월 21일 국민당군이 흥성을 점령.

1945년 11월 22일 국민당군이 금서를 점령.

1945년 11월 26일 동북인민자치군은 주동적으로 금주에서 철수, 적군이 뒤따라 금주를 점령.

1945년 12월 11일 국민당군이 산해관, 금주를 점령한 다음 동북을 향하여 대대적으로 군대를 수송하기 시작.

1945년 12월 22일 미군 7함대가 국민당의 두률명부대를 호로도로 수송하기 시작.

1945년 12월 22일 국민당이 장춘에 저들의 시장을 파견함.

1945년 12월 27일부터 다음해 설날(1월 1일)까지 국민당에서 임명한 시장들이 심양시와 할빈시로 들어감.

우에서 본바와 같이 장개석국민당군대는 미군의 지원과 저들의 일시적인 력량상우세를 리용하여 심양과 장춘을 비롯한 동북지방의 주요 도시들과 철도연선지대들부터 장악하면서 남쪽으로는 단동과 통화, 북쪽으로는 할빈과 치치하얼, 동쪽으로는 길림방면으로 진출하여 장차 동북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렇게 되자 중국공산당군대는 8.15직후 차지하고있던 단동시를 비롯한 압록강연안의 넓은 지역과 중요대도시들과 철도연선지대를 내놓고 일시 농촌산간지대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당시 소화부대는 연안근거지와도 련계가 끊어져 홀로 국민당군대와 싸우게 되였으므로 군사지휘성원들은 자기 가족들을 미리 후퇴시켰는데 그들이 도중에서 국민당군대의 습격을 받고 돈화지방으로 끌려가고있었다.

부대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위급한 시각에 소화는 위대한 수령님께 방조를 요청하였다.

소화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고견을 듣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군구사령부 참모장을 조선에 보내였다.

그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평안북도 신의주시에 가시여 새 조선의 항공대창설을 위한 사업을 현지에서 지도하고계시 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린접해있는 단동에서 료동군구가 매우 어려운 고비를 겪고있는것을 아시기에 자주 압록강가에 나가시여 쌍안경으로 단동시내를 바라보시며 마음을 놓지 못하고 계시다가 찾아온 참모장을 신의주에서 만나시였다.

참모장은 소화사령원의 긴급요청을 가지고왔다. 그 요청이란 밤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단동으로 건너오시여 위기에 직면한 료동군구의 사태를 수습할수 있는 고견을 주실것을 바란다는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후날 이에 대하여 우리 나라가 해방된 해인 1945년 겨울 료동군구사령원이였던 소화가 단동에서 자신에게 사람을 보내여왔다고, 그는 국민당군대가 곧 단동으로 공격하여오게 되며 단동에 주둔하고있던 자기 부대는 철수한다고 하면서 단동까지 와주실것을 요청하였다고, 그래서 자신께서 신의주에서 밤에 단동으로 건너가시였다고 뜨겁게 회고하시였다.

당시 우리 일군들은 위대한 수령님의 신변안전문제와 국제관계문제를 고려하여 수령님께서 단동에 가시는것만은 삼가해주실것을 말씀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만류하는 일군들에게 지금 일부 사람들은 국제관계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중국혁명을 돕는것을 주저하고있는데 우리 조선혁명가들에게 있어서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원칙을 떠난 국제관계를 생각할수 없다, 장개석국민당군벌들이 미제국주의침략세력을 등에 업고 중국혁명에 도전해나서고있고 중국혁명앞에 새로운 난관이 조성되고있는 이때에 국제관계문제만을 생각하면서 중국혁명을 돕는것을 주저하는것은 프로레타리아국제주의자의 립장과 태도가 아니라고 준절히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는 중국혁명에 대하여 강건너 불보듯 할수 없다, 중국인민은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우리와 한 전호속에서 생사운명을 같이 한 혁명전우라고 하시면서 준엄한 전구인 단동에 직접 가실 단호한 결심을 표명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소화사령원의 요청대로 주체34(1945)년 11월 29일 밤 일신의 위험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압록강을 건너 단동의 료동군구사령부를 찾으시였다.

소화는 이전에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온적은 없었으나 이미 오랜 항일전쟁과정의 체험을 통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선의 빨찌산장군이시고 조중인민의 동지적우의를 귀중히 여기는 국제주의자의 귀감이시라는것을 자기 군구에서 사업하는 황옥청을 통하여 많이 들어서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

황옥청은 대일작전이 선포된 시기 주보중이 인솔하는 항일련군부대와 함께 동북에 나와 쏘련군주둔지역에서 치안임무를 수행하다가 료동군구에 소속되여 사업하였다.

황옥청은 쏘련의 원동훈련기지에서 국제련합군시기 로어 통역을 하였는데 위대한 수령님과 한부대에서 생활하였다. 그는 대일작전이 림박하고있던무렵 위대한 수령님과 주보중이 장차 동북을 중국공산주의자들의 본토해방을 위한 강력한 기지로 꾸릴데 대한 문제를 가지고 진지한 토론을 거듭하는것을 목격하였다.

그때 주보중은 위대한 수령님께 동북지방에 진출하여 활동하는 항일련군의 지휘력량강화를 위해 조선인민혁명군의 우수한 지휘관들을 보내줄데 대해 요청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를 수락하시여 강건을 비롯하여 최광, 박락권 등 많은 핵심들을 파견해주시는 중대조치를 취하시였다.

황옥청은 그때를 회상하며 동북해방전쟁은 원동훈련기지에서부터 벌써 그 승리의 시초가 마련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였다.

황옥청의 회상에 의하면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제의 패망이 시간적문제이기는 하나 그후의 동북정세가 걱정된다고, 그래서 요즘 주보중이 밤잠도 제대로 못잔다고 하시면서 자신께서도 힘껏 돕겠다고 말씀하시였다는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중국혁명을 두고 그토록 마음쓰시였기에 소화사령원의 요청에 주저없이 응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총포소리가 그칠새없고 장개석이 미국에서 끌어들인 비행기들이 눈먼 폭탄을 마구 떨구고있는 단동으로 주저없이 가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무너진 벽체들과 폭탄구뎅이들을 에돌아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 지휘성원들은 일신의 위험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압록강을 건느시여 자기 부대를 찾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 뜨거운 감사를 드리였다. 철수준비를 하느라 어수선한 사령부사무실들을 지나 소화사령원의 방에 들어서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모여온 군구지휘성원들과 따뜻한 인사를 나누시였다.

방안에는 2개의 초대가 타고있었고 벽에는 성에가 하얗게 서리여있었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 들어서시자 즉시 군구지휘성원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고 희망이 비끼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먼저 군구지휘성원들의 건강과 그들의 가족들에 대한 안부부터 물으시였다.

그러자 군구지휘성원들은 가족들이 먼저 할빈으로 후퇴하던 도중 국민당군대의 습격을 받아 현재 돈화지방으로 끌려가고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말씀드리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주체 34(1945)년 11 월 29 일 중국 단동에 가시여 작전회의에 참가하시였던 료동군구사령부자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안되였다고 하시고는 걱정말라, 이제 구출대책을 세우자고 하시며 그들을 안심시키시였다. 그이의 말씀에 모두의 얼굴들이 밝아졌다.

이윽고 작전토의가 시작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 소화사령원이 군구사령부와 그 산하 부대들의 상황을 그대로 말씀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중국 동북지방에 대하여 관내에서 온 중국사람들보다 더 잘 알고계시였다. 그이께서는 지도상에서 이름없는 두메산골로부터 산과 강들을 하나하나 짚어가시며 아군의 배치상태와 기동상태, 적군의 배치와 기동에 대하여 일일이 료해하시고나서 동북지방에 조성되고있는 엄중한 사태의 본질과 그 변화발전추이 그리고 중국공산당과 인민들이 반드시 승리할수 있는 요인에 대하여 분석하시고 당장 닥쳐온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전략전술을 사리정연하게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현재 동북지방에 조성된 엄중한 사태는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동방정책》이 가져다 준 산물이며 장개석도당의 반쏘반공정책과 매국배족적인 대미추종정책의 연장이라고 하시면서 동북해방전쟁에서 국민당은 반드시 패하고 공산당이 승리할수 있다고 하시며 그 요인을 천명하시였다.

첫째로, 중국공산당이 진행하는 전쟁은 정의의 전쟁이고 장개석이 진행하는 전쟁은 부정의의 전쟁이기때문에 국민당은 절대다수 인민대중의 지지를 받을수 없고 병사들의 전투사기를 높일수 없으며 장기전에 필요한 인적, 물적력량을 계속 보충할수 없다.

둘째로, 이미 일제를 반대하는 전쟁에서 여실히 폭로된것처럼 장개석군대는 군벌호상간의 알륵관계와 장교들과 병사들간의 모순, 군대와 인민들간의 모순으로 하여 그 수자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은 군대가 아니라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셋째로, 중국 동북지방인민들은 이미 일제를 반대하여 싸우면서 장개석군벌들의 매국배족행위를 잘 알고있으며 항일무장투쟁의 영향을 받아 각성되고 단련되였기때문에 그 누구도 다시 국민당에게 속지 않으며 예속되려고 하지 않는다.

넷째로, 동북에 기여든 장개석군대의 운명은 1941년도에 쏘련에 들어와 얼어죽고 굶어죽고 공포에 질려있던 파쑈도이췰란드군대의 운명과 같이 될것이며 남방에서 겨울을 모르고 지내온 장개석군대의 멸망을 다가오는 동북의 겨울이 더욱 재촉하게 될것이다.

다섯째로, 장개석도당은 공산당이 더 큰 세력으로 자라나기 전에 깔고앉으려고 전쟁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모험을 하여 동북에 왔는데 이것은 완전한 오산이다. 왜냐하면 동북땅을 완전히 깔고앉으려면 적어도 몇백만군대가 있어야 하겠는데 장개석은 겨우 100만군대밖에 동원하지 못하였다. 일본이 동북에서 100만의 관동군을 유지하고있으면서도 적수공권이나 다름없는 동북땅을 끝내 틀어쥐지 못하고 망하였는데 장개석이 100만이나 가지고서야 어림도 없다.

여섯째로, 중국 동북땅은 조선, 쏘련과 잇닿아있기때문에 어려울 때 필요한 원조를 받을수 있지만 장개석은 동북땅에 들어와 사면으로 포위된 상태에 있으니 후방이 든든하지 못해 어쩔수없이 패망한다.

이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당면한 위기를 타개하고 장차 공세에로 넘어갈수 있는 전략전술적방안을 제시하시였다.

당시 중국 동북지방에 들어온 적지 않은 팔로군부대들은 아직 유격투쟁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었으며 군사작전과 행동에서 일치성도 보장하지 못하고있었다. 그들은 여러지방에 분산적으로 주둔하고있으면서 자기들이 차지하고있는 지역을 사수하는데만 급급하였고 국민당군대의 대규모적인 군사적공세에 대처하기 위한 적극적인 군사활동을 벌리지 못하고있었다. 당시 단동지방에 주둔하고있던 팔로군부대의 지휘관들속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단동지방을 계속 고수하고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적들에게 단동을 내주고 일시 농촌의 산간지대로 후퇴하였다가 기회를 봐서 다시 공격하는것이 좋을것 같다고 하면서 적극적인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러한 사실들을 료해하시고 적들의 무분별한 공격앞에서 차지한 지역을 사수하는데만 매여달리는것은 놈들의 각개격파전술앞에서 실패를 면할수 없는것이며 적들의 대공세앞에서 무작정 물러서는것도 결국은 패배를 의미하는것이라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적들의 대규모적인 공세와 각개격파전술앞에서 지역사수에만 매여달리는것은 결국 자멸을 의미하는것이다, 지금의 형편에서는 적극적인 대선회작전과 포위전으로 심양, 장춘을 비롯한 중요도시들과 철도연선들에 집결되여있는 적들의 병력을 분산약화시키며 적들을 한 지역씩 단계별로 섬멸해버려야 한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전략전술적방안을 내놓으시였다.

첫째로, 무모한 정면충돌을 피하고 도시들을 내주어 적들의 력량을 최대한 분산시키고 그대신 농촌에 강력한 근거지를 꾸려야 한다.

둘째로, 군대내에서와 인민들속에서 정치사업을 활발히 벌려 승리의 신심을 잃지 않고 계급적원쑤들을 반대하여 끝까지 투쟁하도록 하여야 한다.

셋째로, 백두산을 중심으로 꾸려진 해방지구를 끝까지 고수하면서 적후에서 대부대기동전과 유격전을 광범히 전개하여 끊임없는 소모전으로 적들의 력량을 극도로 약화시켜야한다.

넷째로, 해방지구에서 토지개혁을 비롯한 제반 민주개혁을 실시하며 군민관계를 옳게 유지함으로써 인민들로 하여금 장개석국민당군에 식량과 물자를 내주지 말며 팔로군을 성심성의로 원호해나서도록 하여야 한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싸우다 정 곤난하면 백두산에 들어가라, 백두산은 당신들의 믿음직한 후방으로 될것이라고 강조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을 받아안자 모임에 참가하였던 군구지휘성원들은 약속이나 한듯 하나와 같이 박수를 치며 환성을 터치였다.

그날의 그 뜻깊은 자리에 참석하였던 중국의 황옥청은 자기의 회상실기 《고결한 혁명적의리를 되새기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지금도 생각하면 주석동지의 말씀을 숨을 죽이고 듣고있던 우리 지휘성원들의 광경이 환히 떠오른다.

아군의 활로를 열어주고 초조와 불안에 싸인 사령부의 기류를 희망과 신심으로 일변시킨 그분의 지략에 접한 우리의 심중에 소용돌이친것은 망망대해에서 항로를 잃고 헤매이다가 등대를 만난 선원들의 심정 그대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과 뜨거운 은정에 고무된 팔로군부대들은 그후부터 적들을 분산약화시키면서 차지한 지역들을 일단 내주고 산간지대들에 들어갔다가 대대적인 반공격에로 넘어가기 위한 만단의 정치군사적준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때 단동을 중심으로 압록강연안일대에 주둔한 부대들도 이미 차지하고있던 지역들을 적들에게 일시 내주고 적들을 역포위하기 위하여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와 의주, 황초평과 룡암포, 청수와 수풍일대에 들어왔다가 다시 만포쪽에서 압록강을 건너 관전, 집안지대를 차지하고 적들을 답새기기 시작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 우리 나라의 렬차와 자동차, 배들을 다 동원하여 팔로군부대들의 기동을 보장해주도록 하시였으며 많은 무기와 탄약, 식량과 의약품 등 군수물자들도 지원해주도록 하시였다.

장개석국민당 반동군벌들이 일시 단동을 비롯한 압록강연안지역을 강점하였을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국경경비를 강화하도록 하시여 장개석반동군벌들의 무분별한 국경침범책동을 용납하지 않도록 하시였다.

그후 팔로군은 위공작전을 벌려 적들에게 일시 내주었던 단동시를 다시 해방하였으며 계속 전과를 확대하여 단동과 심양을 련결하는 지역에 제2전선을 형성하고 적들의 퇴로를 차단한 다음 동북의 여러 지방에 깊숙이 기여들었던 장개석국민당군대를 섬멸하기 위한 대소탕전을 벌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체34(1945)년 11월 29일에 단동에서 하신 연설은 그후 동북민주련군과 조선인부대들에 널리 전달되였다. 조선인부대안에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내용을 가지고 학습토론을 하고 그것을 실천에 구현하기 위한 회의도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 소화사령원과 하신 약속대로 중국 동북지방에 파견하신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인 박락권이 지휘하는 조선인부대에 명령하시여 장개석군대에 붙들려 돈화방면으로 끌려가고있던 소화사령부 지휘성원들의 가족들을 구원하도록 하시였다. 박락권은 위대한 수령님의 명령을 받자 즉시 한개 대대를 데리고 돈화방면으로 가서 렬차를 탈환하여 지휘성원 가족모두를 구원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보내주신 군대에 의하여 무사히 구원된 료동군구지휘성원들의 가족들은 너무도 고마와 눈물을 흘리면서 《김일성장군 만세!》를 소리높이 불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가족들을 사경에서 구원해주시였을뿐아니라 그들모두를 조선북부의 안전한 지대에까지 소개시키고 김일을 보내시여 그 가족들을 위로해주고 생활상 제기되는 문제들을 다 풀어주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1월의 그날밤 소화사령원이 자기 부대의 부상병들과 환자들, 일부 군속들을 조선경내에 받아들여달라고 한 요청도 잊지 않으시고 신의주와 청수, 중강 등지의 길을 열어주시여 중국공산당의 군대와 인민들이 우리 나라 북부지대의 안전한 곳에서 치료하도록 해주시고 휴식을 충분히 하고 다시 전장으로 갈수 있게 돌봐주시였다.

소화사령원은 이 일을 두고두고 잊지 못해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에 대하여 감회깊게 회고하였다.

※ 동북해방전쟁때 료동군구사령원이였던 소화는 1979년 9월 10일부터 10월 27일까지 중국인민해방군 친선참관단 단장으로 우리 나라를 방문하였다. 당시 소화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중국인민해방군란주군구 정치위원이였다. 1979년 9월 24일 위대한 수령님의 접견을 받았으며 우리 나라 자유독립훈장 제1급을 수여받았다.

소화는 우리 나라에 친선참관단 단장으로 왔을 때에도 그때의 일을 회고하면서 《김일성동지께서 조선은 중국의 믿음직한 후방이다. 중국혁명을 성심성의로 도와주겠다고 말씀하신데서 큰 힘을 얻어 싸워 승리하였다.》고 말하였다.

참으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조선인민의 수령이신 동시에 중국혁명가들이 생사를 판가리하는 전쟁마당에서 굳게 믿고 따른 가장 진실하고 훌륭한 동지이시였다.

소화는 그후 부대를 이끌고 새로운 전방으로 이동하였으며 력량을 더욱 보강하여 동북해방전쟁의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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