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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방어진지를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들고 할바령과 로야령산줄기, 송화강이북지역과 서남지역에서 방어공사가 힘차게 벌어졌다.

지병학과 송무선이 속해있던 부대와 리홍광지대에서는 할바령과 화수림자, 휘남현성을 비롯한 넓은 계선에서 방어진지를 꾸리기 위해 투쟁하였다.

1946년 겨울은 유별나게 눈이 많이 내렸다. 산에 내린 눈은 전사들의 허벅다리를 쳤다.

전투원들은 사나운 눈보라를 무릅쓰고 로야령산줄기를 따라 전호를 파고 땅굴집을 지었다. 그 전호의 길이는 수백여리나 되였다. 이 시기 지휘성원들과 전사들은 전투와 방어공사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자력갱생하여 해결하였다. 전사들은 신발이 부족하여 짚신을 삼아 신었고 속옷이 없어 맨 솜옷만 입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갖은 곤난을 무릅쓰고 유수차, 대두자, 대장원, 석도하자 등 많은 지역에서 국민당군대와 보안대를 부단히 습격하여 많은 유생력량을 소멸하면서도 로야령진지를 튼튼히 꾸리고 수호하였다.

1946년 11월 리홍광지대는 신개령을 지키는 한편 견고한 방어시설을 구축할 임무를 맡았다.

살림집이 한채도 없는 신개령의 험산준령에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전사들은 나무를 찍어 귀틀집을 짓고 거기에서 방어공사를 하였다. 겨울옷이 미처 공급되지 못하여 람루한 흰 솜바지와 솜저고리를 입고 울로초짚신감발을 하고 수수밥이나 강냉이가루떡을 짠 무우와 함께 먹으면서도 모두가 사기왕성하여 언땅을 파고 전호와 화점을 설치하였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오직 하나 국민당군대를 동만의 한치의 땅에도 들여놓지 않겠다는 각오밖에 없었다.

전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을 이겨내며 억척스럽게 일하여 기한전에 방어공사임무를 끝내고 상급의 표창을 받았다.

리홍광지대는 그후 1947년 3월에는 휘남현성을 해방하는 전투에 참가하였고 조양진, 해룡일대에서도 공세를 들이대였으며 이어서 공업도시 료원시를 해방하고 1947년 9월 중순부터 11월초까지는 공주령, 사평, 개원 등을 해방하는 대공격전에 참가하였다. 그후에는 방어로부터 공격에로 넘어가 1947년 10월 25일에는 길림시교외의 402고지를 탈취하였고 철가산전투, 전오가자전투, 양가교전투 등 공격전을 벌려 련전련승하였다. 왕청보안련대에 있던 조선인중대도 1946년 5월부터 11월까지 할바령에서 연변으로 나가는 국민당군대를 막기 위하여 다른 중대들과 함께 방어공사를 진행하였다. 중대지휘부에서는 《여기도 싸움터!》라는 구호를 내걸고 10여㎞ 되는 구간에 전호, 교통호, 엄페호를 파고 화점을 구축하였다. 중대는 하루에 3교대로 낮과 밤이 따로없이 일하여 기한내에 방어공사를 마감지었다. 이 방어공사에서 《꼬리없는 소》로 불리운 구자춘, 《고동마》라고 한 정도학, 《곰》으로 불리운 정창주는 길동분구로부터 영웅칭호를 수여받았고 10여명이 큰공을 세웠다.

지병학이 련대장으로 있던 부대에는 16살난 리순임이라는 처녀병사가 있었다. 그는 녀성의 몸으로 부대에 입대한 후 할바령지역의 방어공사에 동원되였는데 남자들보다 흙짐을 더 많이 나르면서도 식사를 보장하였으며 적들이 달려들면 남자들과 함께 전투에도 참가하여 공을 세워 방어공사가 끝난 후 영웅칭호를 수여받았다.

견고한 방어진지에 의거하여 완강한 방어전을 진행하면서 국민당군대를 타격하기 위한 공격전을 백수십차나 벌리는 과정에 길림, 돈화, 화전계선에서 날치던 국민당군대는 혼란상태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였고 많은 병력을 잃은 부대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였다.

동북해방전쟁에서는 새로운 국면이 열리였다. 1946년 12월 중순부터 1947년 4월초까지사이에 있은 림강보위작전은 국민당의 남만해방지구에 대한 거듭되는 공격을 막아낸 방어전과 적극적인 반타격전의 대표적인 작전이였다. 이것을 일명 3하강남 4보림강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아군부대들이 세번 송화강을 넘어와서 적을 치고 림강에 대한 적들의 공격을 네번이나 막아냈다는 의미이다.

견고한 방어진지에 의거하여 완강한 방어전을 벌릴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작전적방안은 동북해방전쟁의 전환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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