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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타개의 방략

중국 동북지방에는 1946년 봄부터 본격적인 국공대결전의 시각이 시시각각 다가오고있었다.중국공산당은 동북지방을 차지하기 위하여 1945년 8월 중순 10여만의 대병력을 동북에 진출시키기로 하였다. 이때 간부들도 2만여명이나 이곳에 보내기로 하였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지시를 받은 간부들과 군대들은 수송기재도 부족하고 관내에서 동북까지의 거리를 행군할수 있는 물질적준비도 든든하지 못하였으며 장개석군대의 끊임없는 비행기타격도 있었으므로 야간에 주로 행군하였다. 하늘소까지 타고 행군한 선두부대는 한달이 채 못된 9월 6일에 심양에 들어섰고 다른 부대들은 11월경에 모두 동북땅에 들어섰다.

바빠맞은 장개석은 미국을 등에 업고 미국의 비행기와 함선의 지원밑에 국민당군대 30여만명을 급히 동북에 진출시키였는데 중국의 서남부에서 떠난 놈들은 늦게야 동북땅에 들어설수 있었다.

당시 동북땅에 들어온 중국공산당군대와 국민당군대의 력량대비는 현저히 차이났다.

중국공산당의 군대는 장개석군대에 비하여 수적으로만이 아니라 무장장비도 락후하였다. 오랜 기간 항일전쟁을 하였으므로 그들은 무장장비를 개선할수 없었고 공군이나 해군도 없었다.

1946년 5월 쏘련군대가 중국 동북지방에서 완전히 철수하자 장개석은 이 기회에 어떻게 해서라도 전동북을 타고앉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22개 사단을 동북에 투입하여 주요 도시들과 군사요충지들을 거머쥐였으며 공산당군대가 손을쓰지 못하게 하려고 갖은 발악을 다하였다. 이런데로부터 공산당군대는 일시 북만과 압록강까지 밀려났으며 부대호상간 그리고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와의 련계도 끊어져 중앙의 지시도 제때에 받을수 없는 처지에까지 놓이게 되였다.

1946년의 봄은 바야흐로 전국적인 국내전쟁의 불비가 쏟아질 엄혹한 시기였다.

중국공산당에서는 이 국내전쟁의 불구름을 어떻게 해서나 막아보려고 각방으로 노력하면서 여러차례 국민당이 요구하는 담판에 응하였으나 장개석은 저들의 무력을 계속 증강하고 동북을 타고앉기 위한 시간적여유를 얻기 위하여 교활하게 담판을 악용하였다.

1946년 6월 6일부터 또다시 정화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장개석군대가 협정을 위반하고 배신적으로 공격하였기때문에 지역적인 전투는 계속되였다. 장개석은 1월 10일부터 정전협정이 이룩된 1946년 6월초까지 100만명이상의 병력을 이동시켰다.

중국공산당을 반대하는 전면적인 전쟁계획을 완성한 후 장개석은 란폭하게 정전협정과 정치협상결의를 페기하고 국민당군대로 하여금 중원해방구에 있는 공산당군대를 포위공격하게 함으로써 끝내 전면적인 내전을 폭발시켰다.

장개석은 미국무장관 마샬을 통하여 중국공산당에 아래와 같은 조건을 제기하였다.

1. 화북에서 인민해방군(공산당군대)은 열하와 챠할 2개성, 연대와 위해위 그리고 6월 7일이후 산동의 위만군수중에서 해방한 대소도시들에서 철수하며 국민당군이 청도, 천진에 각각 한개 군을 증파한다.

2. 동북에서 동북민주련군(공산당군대)은 할빈, 단동, 통화, 목단강과 백성자에서 철수한다.

장개석은 정전담판과정에 또다시 인민해방군이 철수할 지역을 몇곳 더 늘여 요구하였다. 즉 6월 7일이후 산서, 하북의 해방된 대소도시를 국민당군대에 내놓으라는것이였다. 장개석의 이러한 일방적이고도 오만무례한 요구는 6월 남경에서 진행되던 정전담판이 파탄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1946년 6월 26일 국민당군대의 중원해방구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로 전면적인 제3차 국내혁명전쟁의 막이 열리였다.

동북해방전쟁은 이 전쟁의 한부분이였지만 동북에서 공산당군대가 승리하여야만 전국적인 전쟁에서도 승리할수 있었기때문에 피어린 투쟁을 거듭하면서도 기어이 간고한 이 시련을 이겨내야 하였다.

이 위기를 타개하도록 도와주시고 동북해방전쟁이 승리하도록 지원하여주신분이 바로 우리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이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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