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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토비작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파견하여주신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들에 의하여 조직된 조선인부대들은 중국 동북해방전쟁의 초시기에는 주로 근거지창설과 근거지보위임무를 수행하면서 동북지방에서 무분별하게 날뛰며 장개석군대의 동북침공에 유리한 조건을 지어주려던 토비, 토호, 일제패잔병, 괴뢰《만주국》군잔여세력을 숙청하는 군사활동을 주동적으로 벌리였다.

온갖 반동세력을 소탕하는 주동적인 군사작전을 성과적으로 벌리였기때문에 동북해방전쟁에서 승리할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였다.

이에 대하여 중국의 한 필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김일성주석은 일찌기 조선의 군정간부들을 동북에 파견하실 때 그들에게 토호, 토비들과 일본군패잔병들과 〈만주국〉군잔여세력을 진압하는데서 중국동지들을 적극 방조할데 대한 훈시를 주신바 있다. 동북해방전쟁승리에 기여한 김일성주석의 업적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도 있다.》

토비들이 패망한 일제침략군잔여세력과 결탁하여 장개석군대와 합세하려고 하였기때문에 반토비작전은 처음부터 치렬하였다.

1945년 10월경부터 연변지구에서는 부대력량을 증강하는 사업과 함께 연변지구의 토비들을 숙청하며 숨어있는 반혁명분자들을 적발숙청하는 전투를 벌리였다.

강건은 우선 연길포로수용소의 대렬을 검토하는 사업부터 시작하였다. 연길포로수용소에 잠입한 악질주구들을 적발숙청하기 위하여 1945년 9월말~10월초에 조선청년 라운혁을 비롯한 10여명을 포로병으로 가장시켜 그곳에 침투시켰다.

이들은 포로수용소에 침투하여 대렬을 료해하는 과정에 일제의 악질주구였던 리경윤, 순사부장 강병철, 국민당특무인 요위령 등 60여명의 악질적인 이전 헌병, 경찰, 특무들이 숨어있다는것을 밝혀내고 그자들을 숙청하였다. 강건은 계속하여 삼도만을 비롯한 연변지방의 산악지대로 달아나 토비로 된 국민당 선견대들과 일제의 주구, 토호들을 숙청하기 위한 작전을 펼치였다.

1945년 10월 어느날 국민당 선견대로 기여들었던 국민당패거리들과 일제주구들은 묘령에 있는 기차굴에 들어가있으면서 자기들이 항복하겠으니 와달라고 강건에게 제기하였다. 강건은 그자들의 제의를 받고 정치부주임 세곡민과 함께 선전부장(중국인), 서간과장(중국인), 서간과원 라운혁을 데리고 담판장에 갔다. 적사령은 강건이 제놈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무조건 항복할것을 요구하자 책상을 치며 오히려 강건에게 항복하라고 큰소리를 쳤다. 이 순간 적사령의 곁에 있던자가 강건에게 권총을 겨누었다.

강건의 호위로 따라갔던 라운혁이 재빨리 그자의 권총쥔 손목을 비틀면서 적사령에게 자기 권총을 들이대자 그자는 자기 부하에게 권총을 거둘것을 명령하였다. 이날 회담은 이렇게 되여 파탄되고 서로 안전을 보장하기로 하고 헤여졌다.

이 시기 화룡탄광에 300여명의 토비들이 몰려들어 탄광을 차지하고 연길, 룡정시내와 화력발전소에 보내는 석탄공급을 금지시키는 책동을 하였다. 이로하여 해방지구 인민들의 생활에서는 혼란이 조성되였다. 강건은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박근식부대를 그곳에 보내였다. 박근식부대는 쏘련군과 협동하여 1주야의 전투끝에 적 수백명을 살상포로하고 화룡탄광을 해방하였다.

훈춘의 어느 한 마을에서는 중국인 마가가 거느린 500여명의 토비들이 부락어귀에 포대까지 쌓아놓고 저들의 진지를 견지하려고 발악하고있었다.

훈춘보안련대의 지병학련대장은 11월말 어느날 밤중에 대원들을 데리고 은밀히 포대에 접근하여 불의에 포대를 폭파하고 적들을 족치고 마을을 해방하였으며 도망친 적들을 쫓아 명월구까지 추격하여 마가를 체포처단하였다.

훈춘보안련대의 남만우참모장은 련대의 일부 력량을 인솔하여 훈춘현 《공안국》을 습격하는 전투를 벌리였다.

훈춘현에서는 국민당패거리들이 《공안국》을 조직하고 활동하고있었다. 남만우는 지병학과 토의하고 한개 대대를 이끌고 《공안국》을 불의에 습격하여 무기 500여정과 중기 2정, 경기 11정 등 수많은 무기들을 로획하였다.

삼도만의 토비들은 악질들이였다. 연길현 삼도만부근의 토비들은 둔림대를 토대로 하여 무리를 짓고있었다. 둔림대란 8.15전에 일본관동군 소좌 아끼와라가 삼도만일대에서 조직한 산림경찰대인데 평시에는 목재를 채벌하고 관리하였고 일단 비상시에는 무장을 들고 산림과 목재를 지켰다.

일제가 패망하자 국민당군 기병대 대장이였던 전부흥이 이 둔림대를 제 손아귀에 넣고 토비들을 풍원툰에 둥지를 틀게 하였다. 여기에 전부흥의 부관으로 19련대에서 장교로 있던 리대위가 들어오면서 삼도만과 팔도구일대에서 토비들의 만행이 더욱 악랄해졌다.

 

남 만 우

주체14(1925)년 3월 26일 출생. 해방전 반일투쟁에 참가. 해방후 철도보안대 대대장으로 동북해방전쟁에 참가. 그후 조선인민군과 함경남도 인민경제 여러 부문의 중요직책에서 사업하다가 주체81(1992)년 7월 17일 서거. 반일애국렬사임.

 

명월구에는 조선인무장대 15련대가 있었는데 여기에 경비대가 편입되면서 한족지휘성원들이 몇명 보충되였다. 그들중 한사람인 손영장은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하고 쏘련군을 따라 연변으로 나온 사람이였다. 그는 삼도만부근 풍원툰에 둥지를 틀고있는 토비두목 전부흥을 평화담판으로 귀순시켜보려고 전부흥에게 둔림대의 총과 말을 다 바치라고 통첩을 내리였다. 그러자 전가는 조선인무장대내에 한족들이 있다는것을 알고 내부모순을 일으켜 저항하려고 풍원툰부근의 동구촌, 주목 재촌, 삼도만촌 등 10개 마을을 돌아다니며 《조선사람들이 무장을 들고 한족과 대결하려고 한다.》고 요언을 퍼뜨려놓았다. 그러면서 한족들이 집과 재산을 지키려면 총을 메고 조선사람들과 싸워야 한다고 추동하여 토비무리에 100여명이나 더 받아들이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되자 손영장은 교도원 김만석과 20여명의 전사들을 데리고 풍원툰에 찾아가 정치적공세를 들이대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안 전부흥은 리대위를 시켜 토비들을 눈속에 매복시켰다가 손영장일행이 대문으로 들어설 때 몽땅 체포하였으며 손영장과 김만석은 총살하고 나머지 성원들은 엄동설한에 옷을 몽땅 벗기고 내쫓아 다 얼어죽게 하였다. 여기서 겨우 3명이 살아돌아왔다.

이것을 알리없는 부대의 정치위원이 그들을 찾아 토비굴로 갔다가 그도 토비들에게 잡혀죽었다. 토비들은 그의 목을 잘라 대문밖에 걸어놓았다.

원쑤는 용서할수 없다고 결심한 15련대는 1946년 1월 23일 남창수의 지휘하에 풍원툰으로 떠났다.

전부흥은 둘레가 700m되는 풍원툰주위에 높이 4m되는 통나무로 울타리를 든든히 치고 그 안쪽에다 깊이 1m반이나 되는 홈을 파놓았으며 마을주위에는 포대를 쌓아놓고 밤낮 보초를 세워 감시를 하고있었다. 토비들은 중기, 경기, 포까 지 가지고있었다.

일본군패잔병들과 국민당 토비들이 발악적으로 날뛰였다. 전부흥은 대석두에서 80여명의 증원병을 풍원툰으로 더 끌어들였다.

전투가 시작된 후 아군전사들이 마을대문으로 달려나오는 적병 10여명을 쏴눕히자 그 다음부터는 울타리안에서 방어만하고 대문밖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아군은 적의 방어시설이 견고한데다가 기관총이 고장나는 바람에 잠시 후퇴하여 적을 유인하려고 하였다. 이것을 본 전부흥은 1월 25일 기세등등하여 200여명의 토비가운데서 80명만 남기고 모두 삼도만으로 내몰았다. 전부흥은 풍원툰에 앉아서 토비들을 지휘하였다.

연길별동대에서는 리두수(항일혁명투사)가 대대장(영장)이였다. 이 별동대도 토비숙청에 참가하였다. 이 별동대는 리두수가 조양천의 한개 중대, 8도구의 한개 중대, 두도구에 있던 한개 소대를 합하여 대대로 꾸린 력량이였다. 리두수는 항일무장투쟁시기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경위중대장으로 활동하다가 부상당한 후 김백산의 변절로 체포되여 연길감옥에서 감옥생활을 하였는데 해방과 함께 출옥하여 다시 항쟁의 대오에서 싸웠다. 처음에 그는 연길현 조양천에서 한개 중대 의 별동대를 조직하였다가 후에 별동대를 더욱 확장하여 대대로, 련대로 승격시켰다. 15련대 련대장은 남창수, 16련대 련대장은 박락권이였다.

이들은 서로 합세하여 삼도만지역에 있는 토비숙청에 나섰다.

아군은 16련대를 먼저 삼도만으로 출동시켰다. 16련대의 전사들은 용감하게 전진하였다. 토비들은 공격하는 부대를 발견하자 기관총을 쏴대면서 전진을 막으려 하였다. 삼도하강변을 따라 공격하던 부대와 대문으로 돌격하던 부대에서 얼마 후부터 적의 기관총사격으로 희생자가 나기 시작하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련대장 박락권은 자신이 척탄통을 들고 토비들의 기관총화점을 까부시였다. 그리고 전사들의 앞장에 서서 돌격하였다. 이때 명월구에서 온 15련대의 한조는 16련대의 전진을 엄호하고 다른 조는 삼도만 동산고지를 점령하 여 적들의 퇴각로를 차단하였다. 토비들은 포위속에 들었다.

이때 땅크 한대가 전투장에 들어섰다. 강건이 삼도만의 전투가 치렬한것을 알고 일본군에서 로획한 땅크를 보낸것이였다. 토비들은 이전에 보지 못했던 괴물이 굴러오자 황황히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포위속에서 빠질수는 없었다.

박락권의 련대는 땅크가 열어놓은 길을 따라 동대문안으로 달려들어가 육박전을 벌리였다. 한동안 가렬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토비들은 너무 급해맞아 총을 버리고 농가로 숨어들어가기도 하고 길옆 눈더미속에 대가리를 박고 부들부들 떨기도 하였다.

아군은 마을을 수색하여 농민으로 가장한 놈, 김치굴에 숨은 놈, 무기를 버리고 제집에 들어가 아닌보살하는 놈들을 다 색출하였다. 해질무렵에 삼도만은 완전히 점령되였다.

전부흥의 지령을 받고 풍원툰쪽으로 내빼던 토비들도 기관총, 척탄통, 보총의 몰사격을 받고 60여명중에 절반이나 쓰러졌고 남은 토비들은 풍원툰쪽으로 도망갔으나 아군의 추격으로 몽땅 소멸되였다.

전부흥은 풍원툰에서 저들이 완전히 패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분풀이로 마흔다섯에 처음 본 자기의 갓난애를 첩의 품에서 빼앗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아이가 죽은것을 보고 비명을 지르는 첩을 일본도로 목을 베여버리였다. 그리고는 잔여토비 몇명을 데리고 장춘으로 도주하였으나 제1차 장춘해방전투때 민주련군에게 포로되여 끝내 제갈길을 갔다.

간악무도한 삼도만의 토비들은 이렇게 소탕되였다.

로야령기슭 왕청일대에도 토비들이 많았다. 로야령줄기를 본거지로 하고 여기에 《동북 제1정진군》, 《동북 제2정진군》, 《보안대》 등 수많은 토비들이 있었다.

이들은 다 장개석이 공산당과 인민정권을 뒤집어엎을것을 목적으로 특무를 파견하여 조직한 정치토비들이였다.

대지주이며 일본군헌병대의 특무로 전락되였던 마희산은 장개석의 지시로 토비무리를 《동북 제1정진군》이라고 하고 사령이 되였다. 그는 토비 2 000여명을 거느리고 로야령의 깊은 밀림속에 둥지를 틀고앉아 왕청과 로야령구간의 철도를 장악하였으며 이곳에 괴뢰정권까지 세워놓고 인민들의 생명 재산을 해치였다. 중무기로 무장한 이자들은 장갑차까지 가지고있었다. 1년도 못되는 사이에 공산당군대의 간부와 전사, 인민들을 560여명이나 살해하였고 현금 1억여웬(구화페)과 말 300여필을 략탈해갔다. 그래서 인민들은 마희산을 가리켜 《마백정》이라고 하며 치를 떨었다.

토비두목 안진유는 이전에 항일투쟁을 하다가 적에게 변절하여 라자구경찰서의 특무로 전락된자였다. 그는 1930년대 전반기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직령도하신 라자구, 동녕현성전투에도 참가하였으나 그후 일제의 주구로 전락되여 술집을 운영하면서 특무노릇을 하였다. 그는 일제가 패망하자 혼란된 기회를 리용하여 라자구를 보위한다는 미명하에 일본군패잔병들과 괴뢰경찰을 기본으로 하여 700여명으로 《자치대》라는것을 조작하였다가 장개석특무의 지시를 받고 《동북정진군》 5련대로 이름을 바꾸고 련대장이 되였다. 그는 일본군과 괴뢰군에서 얻어온 여러가지 포 8문과 중, 경기관총 39정, 각종 보총 600여정으로 토비들을 무장시키고 1945년 11월 한달 기간에만도 무고한 인민들을 100여명이나 살해하였다.

안진유는 초기에 2 000여명의 무장인원을 가지고있었으나 1945년말에는 6 000명으로 그 인원을 확장하였다.

최광은 안진유를 제압하기 위하여 20여명의 끌끌한 청년들을 쏘련군대 자동차에 태우고 라자구시내에 들어갔다. 최광은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기 전에 라자구아동단에서 사업을 하면서 안진유구국군부대에 몇번 가서 유희대공작까지 한 일이 있어서 그를 잘 알고있었다.

그런데 그는 쏘련군복을 입은 최광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최광이 그에게 당신은 나를 잘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을 잘 안다, 나는 쏘련군복을 입었지만 쏘련군대가 아니라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끄시는 조선인민혁명군이다라고 말하자 그는 당황하여 벌벌 떨었다.

최광은 우리는 과거를 묻지 않는다, 지난날 당신이 우리와 함께 동녕현성전투와 라자구전투에도 참가하지 않았는가, 그후 당신이 일본놈들에게 투항은 했지만 이제부터라도 우리와 또다시 손을 잡고 싸우겠다면 과거를 다 용서해주겠다, 그러니 어떻게 하겠는가고 하면서 손잡을것을 요구했다.

최광은 3일간이나 같이 지내면서 그에게 영향을 준 후 정치위원도 보내주고 참모장도 보내주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최광에게 자기 부대병사들을 모여놓고 연설해줄것을 요구했다. 최광은 중국말로 조중인민이 단결하여 일제를 반대하여 투쟁한것처럼 앞으로도 손잡고 장개석을 반대하여 싸워나가자고 연설하였다.

그후 안진유는 최광이 보내준 사람들을 정치위원과 참모장으로 임명하고 편지련락도 하면서 치안유지를 같이하였다.

이렇게 안진유부대를 중립화시킴으로써 라자구지방의 치안은 평정되였다.

그러나 그후 안진유는 본성을 버리지 못하고 로흑산으로 도망쳐가 오삼호토비와 합세하였다. 그래서 최광은 4월 7일 로흑산으로 추격하여 오삼호토비와 안진유토비들을 모두 소탕하였다.

1946년 2월 강건은 박락권에게 왕청보안련대 최광과 왕청경비사령부 대대장 김양춘과 함께 왕청일대에 남아있는 토비들을 숙청할데 대한 명령을 하달하였다.

명령을 받은 박락권, 김양춘은 최광과 토의하고 1946년 2월 22일 천교령에서 리모경의 《보안대》토비들을 공격하였다.

바빠맞은 리모경은 흰기를 들고 담판을 요구하였다. 담판을 거쳐 리모경은 526명의 토비를 데리고 투항하였다. 이때 일부 토비들은 투항하지 않고 묘령으로 도망쳤다. 박락권과 최광은 다시 묘령을 포위하였다. 도망친 토비들은 처음에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나중에는 190명이 하는수없이 투항하였다. 알밀대와 초피구 등지에 가있던 토비 300명도 포로되였다. 이리하여 묘령일대에서 날치던 토비무리들은 몽땅 소멸되였다.

로야령기슭에 둥지를 틀고있던 마희산은 그곳 인민무장대의 공격을 받게 되자 1 000여명의 졸개를 이끌고 왕청현 라자구일대로 도망쳐갔다.

 

김 양 춘

주체10(1921)년 8월 17일 출생. 해방전 북만에서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에 참가. 해방후 왕청현에 파견되여 길동분 구 왕청경비사령부 대대장으로 동북해방전쟁에참가. 그후 조선인민군의 중요직책에서 사업하다가 주체83(1994)년 7월 25일 서거. 항일혁명렬사임.

 

2월에 강건은 박락권과 최광에게 마희산을 공격할데 대한 임무를 주었다. 이들은 녕안무장대와 협동하여 마희산을 량쪽에서 공격하였다. 치렬한 전투끝에 대부분의 토비들은 소멸되였으나 마희산은 일부 졸개들을 데리고 도망쳐 후에는 길림의 국민당군에 가담하였다.

일제의 특무 요옥령, 괴뢰《만주국》경찰이였던 왕경운이 조직한 《동북 제2정진군》도 1946년 1월 최광의 보안련대공격을 받고 요영구방향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묘령, 천교령으로 밀려갔으나 거기서 대부분 소멸당하고 나머지는 마희산에게 가서 국민당군대로 되였다. 요옥령 등은 후에 아군에게 체포되여 처단당하였다.

안도현에는 악질지주인 단가성을 가진 삼형제가 두목으로 있는 무장토비들이 있었다. 단병준, 단병인, 단병의 삼형제는 1932년부터 일제에게 붙어 700여명의 졸개들로 경찰대대를 조직하고 단병의를 대대장으로 내세운 후 일제를 등대고 항일유격대원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인민들을 학살하였다.

일제가 패망하자 이들은 토비들을 긁어모아 《공안대》를 꾸리고 단병의가 대대장으로 되였다. 병력이 1 000여명이나 되였는데 이들은 이도백하, 량강, 송강, 대전자 등지에 나타나 인민들의 생명재산을 해치였다.

1946년 3월 강건은 길동분구 경비6련대장 박근식을 책임자로 하여 2개 련대를 화룡에서 출발시키였다. 90리 눈길을 행군하여 안도현 오도양차를 지키고있던 토비 한개 대대를 포위하였다. 오도양차촌은 산으로 둘러싸여있었는데 무장을 갖춘 토비들로 욱실거리고있었다. 마을주위에는 2m의 높이로 토담을 쌓았고 서북산마루에는 화점들이 구축되여있었다.

아군은 3월 6일 오전 7시에 공격을 시작하였다.

박근식련대장은 련대를 지휘하여 우선 높은 고지를 점령하고 화력으로 적을 제압하는 한편 적의 화점들을 격파하였다. 질겁한 토비들중에는 도망치는 자들도 있었다. 기관총을 쏘아대며 발악하는 토비들과 오후 4시까지 격전을 벌렸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토비 80여명을 소멸하고 기관총, 보총 40여정을 로획하였다. 그후 3월 8일 한개 련대는 동북방향으로부터 대전자(오늘의 만보향)로 공격하여 토비 800명을 투항시켰다.

1946년 3월 16일 강건은 이도백하에 도사리고있는 단가 삼형제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전에 강건은 단가 삼형제에게 투항하라고 사람을 보내였으나 그들이 완강하게 거절하였기때문에 더는 그냥 둘수 없어 소탕하기로 하였던것이다.

오전 11시부터 시작된 전투는 밤 12시까지 계속되였다. 이도백하전투는 끝났으나 단가의 토비들이 안도현성까지 도망쳐갔기때문에 계속하여 안도현성으로 진격하였다. 결과 토비두목들인 단병준과 단병의를 비롯한 350여명의 토비들이 포로되였다. 그러나 나머지 200여명의 토비들은 단병인을 따라 화전, 길림일대로 도망쳤다. 단병인은 그후 길림을 해방할때 생포되였다.

단가 삼형제는 안도현성과 송강에서 인민의 심판을 받고 처형당하였으며 안도현의 토비무리는 모조리 소멸되였다.

돈화현에는 인민정권을 뒤집어엎고 공산당과 인민정권, 무장대의 간부들을 살해할 목적으로 날뛰는 이른바 《선견군4사》, 《돈교사령부》, 《공안대》 등 토비무리가 5 000여명이나 있었다.

이들은 돈화에 국민당의 괴뢰정권을 세울 목적을 가지고 장개석이 파견한 특무들인 토비두목 기대조, 장중일, 류화일에 의하여 움직이고있었다.

류화일은 일제와 괴뢰《만주국》군의 잔여세력을 모아 부대를 조직하는 한편 돈화에 국민당《림시정부》까지 만들어놓고 그 현장까지 하였는데 그에게는 국민당 제15집단군, 중앙《선견군》, 《국민당 돈화현당부》의 《위임장》까지 있었다. 그는 공개적으로 국민당간판을 내걸고 공산당군대인 돈화보안련대의 8개 대대가운데서 7개 대대를 자기의 수하에 넣었으며 수많은 공산당 간부들과 인민들을 해치였다.

여기에서 적들에게 투항하지 않은 단 한개의 대대가 있었는데 그것은 조선사람들로 조직된 대대였다.

이렇게 엄중한 사태가 빚어지고있을 때 강건은 마침 이곳으로 오고있던 조선인부대에 명령하여 돈화에 남아있던 조선인대대와의 배합작전으로 돈화현 토비보안사령부를 들이치게 하였다. 토비두목 류화일은 체포되였으며 기대조의 토비무리는 소멸되였다. 토비두목 장중일은 남은 토비들을 거느리고 현성남쪽으로 도망쳤다.

1946년 2월 강건은 길동분구의 무장대를 동원하여 돈화현성을 들이쳤다. 전투는 그때로부터 3월초까지 계속되였다. 강건은 여기에 다른 부대까지 동원하여 끝내 《선견군4사》사령부를 점령하였다.

100여명의 희생자와 수십명의 부상자를 내는 가렬한 전투에서 끝내 1 000여명의 토비들을 다 소멸하고 돈화에 뻗친 국민당의 검은 마수를 완전히 제거해버리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강건은 3 000여명의 병력으로 삼도만 평강에 둥지를 틀고있던 토비들을 소멸하기 시작하였다. 첫 타격이 시작되자 토비들은 부랴부랴 돈화북부로 도망쳤다. 이어서 천교령과 묘령에 둥지를 틀고있던 700~800여명의 토비들에게 두번째 타격을 가하자 포위되였던 적들은 투항하였다.

그러나 토비무리들은 춘양에서 도망친 마희산패거리와 합세하여 라자구에 집결하였다. 적들은 훈춘경내에서 넘어온 토비들까지 합쳐 2 000여명이나 되였고 무기도 보충되여 경기, 중기와 소구경포까지 가지고있었다.

1946년 3월 강건은 박락권과 함께 라자구토비들을 청산하는 전투를 벌렸다. 라자구전투에는 훈춘보안련대와 연길현 그리고 목단강에서 조직된 14련대와 15련대가 참가하였다. 당시 부대의 각 중대에는 중기 1정, 경기 2정, 척탄통 2문이 있었다.

전사들은 집에서 입고 온 옷을 그대로 입고있었으며 어떤 전사들은 내의도 입지 못하였다. 적지 않은 전사들은 짚신을 신었다. 그렇기때문에 먼거리행군을 할 때에는 미리 짚신을 몇컬레 삼아가지고 떠나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사기는 매우 높았다.

천교령에서 약 한달동안 군사훈련을 한 후 부대는 라자구로 떠났다.

4월 4일 부대는 라자구에 들어갔다. 토비들은 조선인부대가 왔다는 소식을 듣자 강건에게 《특사》를 파견하여 투항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강건은 토비들이 교활하다는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경각성을 늦추지 않고 경계근무를 철저히 세웠다.

아니나다를가 다음날 이른아침, 토비들의 《특사》가 《투항조건》을 가지고 강건에게 왔다. 《무조건 투항하라.》는 최후통첩을 받은 그자가 부대로부터 약 500m 벗어나자 불의에 적들의 포탄이 날아오기 시작하였다. 《특사》는 아군사령부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하여 이틀동안 두번이나 찾아왔다가 정찰을 끝내고 토비들에게 공격신호를 하였던것이다.

그때 토비들은 벌써 전투준비를 다 갖추고 아군부대보다 높은 지대에 있는 부락에 틀고앉아 아군을 손금보듯 내려다 보고있었다.

강건은 삼도하자 곁에 있는 비행장 지휘탑자리에 위치한 사령부에 있으면서 전투를 지휘하였다.

강건은 각 련대에 기병련락병들을 파견하였다.

강건은 먼저 고지뒤에 있는 적의 포진지를 불의에 습격하여 파괴해버린 후 적들을 정면과 좌우측으로 포위하여 섬멸 하도록 하였다. 이 전투에서 제7중대 부중대장 김성범이 토비들을 무리로 족치였다.

토비부대는 앞뒤로 공격을 받게 되자 뿔뿔이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도망치는 적들을 계속 추격하여 소멸하였다. 아군은 이 전투에서 야포 1문, 평사포 4문, 중, 경기관총 4정을 비롯하여 많은 무기와 탄약을 로획하였다.

이 시기 안도현 오도양차, 화룡현 송하평일대를 싸다니며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해치던 400여명의 토비들도 강건의 지시로 완전히 소멸되였다.

연변지구를 위협하던 토비들은 1946년 7월까지 완전소멸되였다. 근 8개월에 걸치는 전투기간에 각종 포 24문, 중기관총, 경기관총 76정, 보총과 탄약을 비롯한 수많은 군수물자들을 로획하였다.

연변지구의 토비숙청성과는 동북지구에서 제일먼저 달성한 큰 승리였고 이 지구 인민들의 생명재산을 보호하고 동북해방전쟁을 힘있게 지원할수 있는 튼튼한 담보로 되였다.

연변지구의 토비숙청성과는 동북지구에서 제일먼저 달성한 큰 승리였고 이 지구 인민들의 생명재산을 보호하고 동북해방전쟁을 힘있게 지원할수 있는 튼튼한 담보로 되였다. 토비들이 결탁하여 일으킨 폭동을 성과적으로 진압하였다.

리홍광지대에서는 박정덕의 지휘밑에 당시 위대한 수령님의 지시로 통화에 들어간 평안북도의 수천명의 청장년들이 주동이 되여 싸우고있었다. 이들은 1946년 2월 3일 반혁명적무장폭동을 2시간동안에 완전히 진압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1946년 2월 2일은 음력설명절이였다.

네면이 백두산줄기의 산봉우리로 첩첩히 에워싸인 통화시는 명절을 맞아 폭죽터치는 소리, 꽹과리와 북소리에 맞추어 양걸춤을 추는 사람들,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들로 흥성거렸다. 저녁 7시가 지나 집집마다 내건 채색등으로 거리가 환해졌다.

이때 리홍광지대 규찰대가 거리를 지나가다가 팔에 완장을 두른 두사람을 단속하고 권총을 압수하였다.

 

로흑산일대의 토비들을 숙청한 훈춘보안련대(1946년 5월)

 

같은 시간에 다른 곳에서 또 팔에 완장을 낀 두놈을 체포하였다.

놈들의 실토에 의하면 2월 3일 정각 4시 전통화시에서 폭동이 일어난다는것, 폭동신호는 전등불이 세번 꺼졌다 켜졌다가 완전히 꺼진다는것, 옥황산에서 3개의 모닥불이 일어난다는것, 폭동시 일본군(무장해제를 당한 관동군)은 《동변지구림시부대》라는 완장을 끼고 국민당은 《중국국민당 료녕당부 통화현당부 집행위원회》라는 완장을 두른다는것, 암호는 《산천》이라는것, 주의사항은 짚신감발을 하고 각 대에서는 손전지로 세번 동그라미를 그어 한편임을 알린다는것, 폭동지휘자는 손경효라는것이였다.

이 사실을 지대장과 정치위원이 즉시 통화성위에 보고하였다. 성위에서는 적들의 《2.3반혁명폭동》을 진압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폭동두목 손경효는 괴뢰《만주국》의 관리노릇을 하며 많은 혁명가들을 학살하였고 8.15후에는 국민당의 주요인물이 되여 국민당 통화현서기, 동변지구 림시군정위원회 주임으로 있으면서 토비, 위만군, 경찰들을 긁어모아 국민당지하보안군을 조직하고 반혁명폭동을 준비하였다.

두번째 두목인 후지다(별명은 다모도)는 일본관동군 125사단 참모장(대좌)을 하던 전범자이다. 이자는 일본이 패망한 후 통화시에 잠입하여 손경효와 손잡고 무장해제를 당한 3 000여명의 일본관동군패잔병들을 모아 반혁명음모를 꾸미였다. 손경효는 장개석의 지시에 의하여 후지다에게 먼저 10만웬을 주고 폭동이 성공한 후에는 1 000만웬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후지다는 국민당 동변지구 림시군정위원회 군사부장이라는 직무를 맡고있었다.

손경효와 후지다는 이미 1945년말부터 통화, 림강, 무송, 장백, 집안, 안도 등지에서 투항한 일본군, 위만군, 괴뢰경찰, 토비들을 긁어모아 대규모적인 반혁명적인 폭동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그것이 실패하자 통화시에서만이라도 2월 3일에 폭동을 일으키려고 시도하였다.

이자들은 통화시가 남만의 중요한 혁명근거지이고 전략적 요충지라는것을 고려하여 통화시를 장악하면 전남만지구를 쉽게 점령할수 있을것으로 타산하였다.

폭동의 구체적인 방안은 다음과 같았다.

폭동신호는 ① 기차나 자동차가 고동을 세번 울린다. ② 비행기 꼬리부분을 붉은천으로 싸매고 지상에다는 붉은천으로 감싼 《T》자형의 판자를 놓는다. ③ 땅크우에 《동변지구 림시부대》라는 글을 쓴 3각형의 기발을 꽂는다. ④ 각 지휘소에는 국민당 기발을 거는것이였다.

무력은 기관포와 기관총을 설치한 전차 4대, 폭탄, 기관총, 기관포로 장비하고 선전물을 실은 비행기 4~5대 그리고 권총대, 긴칼대, 기관총대였다.

공격목표는 ① 리홍광지대와 인민자위대 통화사령부, ② 통화행정공서, ③ 현민주정부, 현무장대, 법원, ④ 시공안국, 후근부, ⑤ 시전화국, 전업국이였다. 그외 동북포병학교, 비행장, 동북비행기학교, 통화지구방송국, 적십자병원, 《단결일보》사와 《통화일보》사 등도 목표로 삼았다.

폭동군은 땅크부대로 룡천가를 점령한 다음 통화시를 통제하고 항공대는 선전삐라를 뿌리면서 옥황산을 점령하려고 기도하였다.

당시 공산당내기관들은 비밀로 되여있었기때문에 공격계획에 넣을수 없었다. 그때 통화시의 공산당군 주력부대는 다른 지역으로 토비숙청을 나가고 한개 대대만 남아있었다. 그리하여 지대사령부와 팔로군 한개 대대만 폭동진압의 주력으로 되였다.

리홍광지대에서는 내탐한 반혁명적인 폭동계획과 적아간의 력량관계에 대한 분석에 기초하여 다음과 같은 전투방안을 작성하였다.

① 폭동이 일어나기 전에 손경효와 후지다를 사로잡는다.

② 다른 지역에 나가있는 주력부대를 빨리 이동시킨다.

③ 간부들과 당원들을 무장시킨다.

④ 로동자자위대를 무장시킨다.

⑤ 경각성을 높이고 경비를 강화하며 전투준비를 잘한다.

리홍광지대와 조선족지방공작일군들은 모두다 무기를 들고 전투준비를 하였다. 이들은 먼저 손경효의 집을 포위하였다. 그때 손경효는 몇몇 두목들과 함께 6마리의 구운 닭과 6마리분의 돼지발쪽을 놓고 이른바 《6.6대순》(6자가 겹치면 만사가 순조롭다는 미신)을 빌면서 술을 마시고있었다.

리홍광지대 전사들이 앞뒤 창문을 봉쇄한 후 대문으로 가 폭동군의 약속대로 신호하니 적들은 제꺽 문을 열었다. 그러자 리홍광지대 전사들은 유유히 들어가서 10여명의 놈들을 체포하고 폭동문건과 무기, 관동군장교복 등을 로획하였다.

그러나 적들의 폭동은 계획대로 일어났다. 2월 3일 새벽 4시 전등불이 세번 꺼졌다 켜졌다 하더니 인차 꺼졌다. 옥황산우에는 모닥불 3개가 타오르고 시내에 긴 고동이 세번 울렸다. 적들은 통화시 변전소부터 점령하였다.

손경효는 체포되였으나 후지다는 전 일본관동군 좌급장교 구마에모도의 집에서 폭동을 계속 지휘하였다.

적들은 계획대로 분산되여 정권기관, 리홍광지대의 주둔지를 비롯한 이미 예견하였던 대상기관들을 공격하였다. 그때 통화시에는 공산당군과 리홍광지대 성원들이 500명밖에 없었다. 전투는 치렬하게 벌어졌다. 서산에 주둔하고있던 전사들은 폭동군에 의해 포위되였다. 일본놈들은 이리떼처럼 달려들었다. 그러나 지휘관들이 앞장에 서서 적들과 침착하게 맞서 용감히 싸웠다. 포위된 전사들은 육박전으로 적들을 100여명이나 소멸하고 포위를 뚫고 새로운 전투에 진입하였다. 이 전투에서 리학문은 적 9명을 무자비하게 총창으로 요정냈다.

적십자병원으로 달려간 전사들은 뜻밖의 정황에 맞다들었다. 이 병원의 의사, 간호원들은 다 일본사람들이였는데 여기에 박혀있던 폭동자들은 폭동이 시작되자 여기에서 치료받던 리홍광지대 부상자들을 마구 학살하였다.

적십자병원으로 들어간 조선족전사들과 팔로군전사들은 비오듯하는 총탄속에서도 집중사격으로 적들의 화력을 눌러버리였다. 전사들은 총칼로 병원안의 폭동분자들을 몽땅 소멸하였다. 온 통화시가 총소리로 가득찼다.

리홍광지대성원들은 옥황산에서 내려오는 적들과 마주치자 총창과 총탁으로 가렬한 육박전을 벌리였다.

전원공서를 점령하려다가 실패한 적들이 기관총으로 아군 전사들이 전진하는 거리에 대고 마구 사격을 하였다.

이때 다른 지방에 나가있던 전사들이 달려왔다. 지병학은 경기관총으로 적들을 제압하면서 중심광장에 포를 끌어다놓고 우편국을 향해 집중사격을 하였다. 그러자 적들은 옥황산으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비행장에서도 적들의 기도는 파탄되였다.

아침해가 떠오를무렵 아군전사들의 총반격으로 온 통화시 거리는 적들의 시체로 덮이였다.

2월 4일 오전에 후지다가 살고있는 주택지구를 포위하고 후지다 등 30여명의 지휘부성원들을 체포하였다.

2월 3일 폭동진압에서 리치호(반일애국렬사)가 잘 싸웠다. 8.15전부터 중국에서 반일투쟁에 참가한 그는 1946년초 통화에서 리홍광지대에 편입되여 여러 전투에 참가하였다. 장개석도당의 2월 3일 폭동진압작전에 처음부터 참가한 리치호는 자기가 속한 부대가 폭동에 가담한 관동군패잔병들을 200여명이나 사로잡는데서 특출한 역할을 하였다. 리치호는 포로가운데서 로동자, 빈고농출신 일본군인들을 교양하여 적진속에 박아넣고 그들을 통하여 계속 반혁명적인 음모를 꾸미는자들과 장개석의 특무로 전락된 이전 일제특무 수십명을 색출하여 폭동진압에 적극 기여하였다.

심문에 의하면 폭동지휘부는 세곳에 정하였고 폭동의 목적은 통화에 있는 공산당무력을 소멸하고 인민정부를 뒤집어 엎은 후 중일련합정부를 세우고 전남만지구의 공산당근거지를 점령하자는것이였다. 폭동이 성공한 후 손경효가 국민당과 국민당정부를 책임지고 후지다는 군사를 관할하기로 되여있었다. 그리고 투항한 일본관동군은 동변도지구 림시부대로 재편성하고 토비, 경찰, 특무 등을 포함하여 중앙군으로 편성하기로 하였다.

적들이 장개석의 지시로 이렇게 큰 폭동을 주도세밀하게 조직하였지만 결국은 패하고말았다. 후지다는 처단되였다.

적들은 모두 1만 2 300여명이였는데 살상된 일본놈들은 1 000여명, 포로된 일본놈들은 3 000여명이고 국민당토비는 130여명이였다.

장개석도당이 조작한 《2.3폭동》진압작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것은 조선인부대인 리홍광지대였다.

이에 대하여 《만주경찰소사》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져있다.

《2월 3일, 3시 50분 한방의 총성이 들리였으며 여기저기에서 전투가 개시되였다. 그후 〈사령부 및 전원공서〉쪽으로의 진격은 대체로 예정대로였는데 조선인부대방면의 전국은 아군에게 불리했고 각조에서 3명만 도망쳐 들어와 천정에 숨었다.》

장개석도당이 조작한 반혁명적인 폭동진압작전에서 리홍광지대가 논 결정적역할에 대하여 남만지구의 당과 인민정부, 동북민주련군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리홍광지대는 남만에서 1946년 12월 림강보위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7개월동안 백두산지구에서 토비무리들을 기본적으로 소멸하였다.

길림시에서 조선청년들을 위주로 조직한 길림보안총대 제7대대는 제7지대로 개편된 후 화전에 지휘부를 두고 그 주변의 토비들을 숙청하는 사업부터 시작하였다.

당시 7대대는 500여명의 조선사람들로 구성되여있었는데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하였던 송무선이 대대장이였다.

화전일대에는 옛날부터 토비들이 많았는데 8.15후 국민당의 사촉밑에 반동들이 크고작은 토비부대들을 도처에서 꾸려가지고 날치기 시작하였다. 큰 토비부대는 상산호부대로서 400여명이나 되였고 작은 부대는 30~50명정도였다.

당시 길림성적으로 화전일대의 토비를 청산하는 문제가 중요하게 제기되였으므로 송무선은 자기 대대가 책임지고 이자들을 소멸하겠다고 하였다. 그는 먼저 작은 토비부대부터 숙청하기로 하였다.

항일무장투쟁시기 위대한 수령님께서 먼저 군중속에 들어가 정치사업을 진행하고 군중을 각성시키고 발동시켜 적들과의 전투를 벌리시던 경험을 본받아 송무선은 화전동쪽 쟈피거우에 있는 토비들을 그런 방법으로 없애버렸다.

그는 마을에 들어가 먼저 군중을 모여놓고 중국인민이나 조선인민이나 다 지난날 일제의 억압통치를 받다가 해방되여 이제는 나라의 주인이 되였는데 지금 반동들과 토비들이 또 다시 책동하고있으니 우리가 힘을 합쳐 토비들을 없애버려야한다, 그러자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토비들에게 먹을것을 주지 말고 식량을 집집에 다 감추어두라, 그리고 토비들이 나타나면 즉시 우리 부대에 알려주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렇 게 군중정치사업을 하니 인민들이 합심하여 쟈피거우토비들을 몽땅 없애버릴것을 결의하였다.

얼마후 인민들이 홍석라자 동쪽에 토비들이 나타났다고 정보를 알려왔다.

송무선은 새벽에 습격조직을 하여 잠자던 토비들을 몽땅 소멸하였다.

이런 방법으로 화전일대의 작은 토비무리들을 다 숙청한 다음 상산호부대를 치는데 달라붙었다. 먼저 이들은 상산호부대에 군사적위협을 부단히 조성하면서 와해공작을 하기 위해 중국사람을 통하여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지금은 옛날과는 다르다, 토비는 전도가 없다, 이미 작은 규모의 토비는 다 소멸되고 당신들만 남았는데 투항하면 살려주고 투항하지 않으면 전멸된다고 씌여져있었다. 한편 토비들의 친척들을 리용하여 토비들에게 부단히 영향을 주었다. 처음에는 토비들이 편지를 돌려보내고 싸우자고 접어들었다. 그러나 와해공작을 하는 한편 군사적공세도 들이대자 나중에는 하는수없이 투항하고말았다. 이리하여 1946년 봄까지 길림주변의 토비들도 다 소멸되였다. 이때 길림군구사령부에서 주보중이 송무선의 부대를 찾아와 이 대대의 활동을 높이 평가해주었다.

북만지역에서도 토비숙청투쟁이 힘차게 벌어졌다.

1945년 10월 목단강시에 인민정부가 수립되자 국민당반동들은 이 지구에 특무들을 파견하여 민족반역자, 괴뢰《만주국》시기의 헌병, 경찰, 관리를 해먹던자들을 비롯한 반동들을 모아가지고 인민정권을 뒤집어엎을 시도를 하였다.

국민당반동들은 사문동, 리화당, 마희산, 주표 등 악명높은 토비두목들을 국민당군의 사령들로 임명하고 사문동은 계서를, 리화당은 림구를, 마희산은 록도를, 주표는 목릉을 차지하도록 함으로써 목단강시에 대한 포위진을 형성하였다.

사태가 엄중해지는 속에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파견해주신 조선인민혁명군 군사정치간부들은 《고려경찰대》를 비롯하여 시내와 교외에서 입대한 2 000여명의 조선인청장년들로 목단강군구 14련대 3대대와 15련대 3대대를 조직하였다.

목단강군구사령부 파견원은 군구사령부 경위중대장 조명선(항일혁명투사)이였는데 14련대 3대대장 등과 함께 1946년 1월 하순부터 목단강시를 포위한 토비숙청에 떨쳐나섰다.

 

조 명 선

주체12(1923)년 11월 27일 출생. 해방전 중국 장백현에서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에 참가. 해방후 목단강군구사령부 경위중대장으로 동북해방전쟁에 참가. 그후 보안간부훈련소를 거쳐 조선인민군의 중요직책에서 사업하다가 주체83(1994)년 7월 8일 서거. 항일혁명렬사임.

 

14련대는 림구쪽으로, 15련대는 목릉쪽으로, 2련대와 7련대는 록도와 계서쪽으로 달려가 토비들의 거점을 소탕하였다. 이 작전에서 14련대의 조선인대대는 화림, 북전자, 오림, 행수 등지에서 토비들을 소탕하고 3월 18일 새벽에는 마련하에서 매복전으로 100여명의 토비들을 살상하였다. 계서부근에서도 토비들을 섬멸하였다.

이후 토비들은 《고려부대(조선인부대)》라면 싸울념도 하지 않고 줄행랑을 놓았다. 그러나 악질토비들은 주력부대가 일시 다른 곳에 나가 싸우고있는 틈을 타서 목단강시를 차지하려고 시도하였다.

1946년 5월 14일 밤에 500~600명의 토비들은 큰 길로 해서 시내에 들어와 군구사령부를 포위하고 집중공격하였다.

사령부의 경위중대장 조명선은 적들과 맞서 완강히 저항하였다. 중기관총사수들은 재빨리 지붕우에 올라가 유리한 위치에 중기를 걸어놓고 사격을 들이대였다. 때를 같이하여 경기관총, 기관단총, 보총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겁에 질린 토비들은 머리도 쳐들지 못하다가 수류탄을 던지며 뒤걸음쳤는데 적들이 던진 수류탄은 겨우 울타리를 넘어와 뜨락에서 터지군 하였다.

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자지러진 총소리가 났다. 다른 패거리의 토비들이 수녕성(당시)정부, 성정부보안처 등 주요기관들을 습격하고있었다. 성정부의 조선족청장년들로 편성된 경위련대가 토비들을 호되게 족쳤다. 간부학교에 있던 조선족 학생들도 전투능력이 높았으므로 토비들을 보기좋게 갈겨대였다.

사령부뜨락에는 일본군대가 버리고 간 땅크 한대를 수리한것이 있었는데 명령이 내리자 그 땅크가 기관총사격을 하면서 전진하였다.

그때 목단강군구사령부 정치위원은 세린하반의 두도하자에 있다가 목단강시내에 토비들이 쳐들어갔다는 소식을 받고 부대를 목단강시로 진격시켰다. 30~40㎞되는 밤길을 달려 그들이 목단강시에 들어섰을 때는 동이 트기 시작하고 총소리가 멎은 뒤였다.

1946년 5월 15일 토비들이 인민정권을 전복하려고 조작한 《5.15반혁명무장반란》은 이렇게 원쑤들의 실패로 끝났다.

토비두목들은 인민의 심판을 받고 목단강시 서구운동장에서 처형되였다.

이 전투에서 누구보다 용감히 싸운 땅크병 김병준은 싸움이 끝난 후 땅크의 웃뚜껑을 열고 사방을 살피다가 갑자기 날아온 총탄에 맞아 24살의 꽃나이로 청춘을 마치였다.

1946년 2월 24일 삼강의 민주련군은 리화당토비를 숙청하려고 떠났다. 그날 강행군하는 대오를 따라 군량과 포탄을 싣고 몇대의 자동차가 함께 떠났는데 시내를 벗어나자 차 한대가 전복되는 바람에 후방부전사들 여러명이 부상당하였다. 알고보니 차를 전복시킨 그 운전사는 아군에 끼여든 토비였던것이다.

무장대는 각성을 높이며 토비들을 숙청하다가 드디여 리화당무리와 맞다들었다. 그런데 일부 토비들은 살상했지만 아군의 손실이 더 컸다. 그후 아군전사 6명이 또 지뢰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전우들이 희생되는것을 본 전사들의 가슴마다 복수의 불길이 치솟아 전투가 시작되자 총이 없는 전사들까지 몽둥이로 토비들을 족치면서 총을 빼앗아 무장하였다.

방정에서 호되게 얻어맞은 리화당은 흩어진 졸개들을 모아가지고 사문동과 합세하려고 조령쪽으로 몰려갔다. 그해 3월 사문동과 마희산무리들이 목단강쪽에 나타났다.

아군부대는 두도령자라는 마을에서 토비들과 맞다들었다. 토비들은 그곳에 화점을 쌓고 주위에 여러겹의 가시철조망을 늘인 후 전호까지 파놓았다. 그러나 아군전사들은 적들의 화점을 까부시고 철조망에 널판자를 놓고 그우를 내달리며 적들에게 몰사격을 퍼부었다. 토비들은 드센 공격을 받고 소탕되였다.

이 전투가 끝나자 목단강군구사령부 정치위원은 14련대를 이곳 무장대와 합쳐 대오를 더 확대하고 계속 토비들을 소탕하며 사문동을 추격할것을 명령하였다. 그때 사문동의 수하에 한개 기병련대가 있었는데 련대참모장이 조선사람이였다.

부대에서는 그 참모장을 설복하여 아군편으로 의거시켰다. 그후 한달 남짓한 사이에 수백㎞의 거리를 행군하면서 무려 30여차나 토비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여 토비들이 준동하지 못하게 하였다.

사문동은 5월 어느날 토비들을 거느리고 토비소굴인 청룡산에 기여들었다. 아군은 이 정보를 받고 청룡산을 포위공격하여 200여명의 토비들을 소탕하고 67명의 기병대를 생포하 였다. 이 기병대는 일본군복을 입고 일본제무기로 무장하고있었다. 사문동은 여기서 겨우 살아나 조령으로 달아났다.

목단강군구사령부에서는 500여명의 아군전사들에게 청산, 호산에 있는 토비들을 섬멸하고 리련희토비무리를 소탕할 명령을 내렸다. 이들이 사문동의 졸개무리 70여명을 숙청하고 그후 두달동안 부금, 집현, 사방대일대에서 토비와 전투를 계속하였는데 그 기간은 참으로 어려운 나날이였다. 무더운 여름날에도 도로기를 신고 하루 50㎞씩 걸어야 했고 풀숲에서 숙영할 때는 모기떼와 싸워야 했다. 옷과 신발이 다 해지고 식량공급이 되지 못해 닦은 강냉이 한줌으로 끼니를 대신하거나 몇끼씩 먹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아군전사들은 끝까지 임무를 수행하고 리련희토비무리를 숙청한 다음 가목사로 돌아왔다.

이날 민주대동맹에서는 그들을 환영하여 푸짐한 음식상을 차리였다.

수백만 인민들을 기근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아군은 쏘련과 경제무역을 하는데 필요한 금을 지켜야 하였다.

목단강군구사령부에서는 9월 3일 가목사 남부지역에서 아군의 발전소와 금광을 보위하면서 금을 받아들이는 특수임무를 수행할데 대한 지시를 하달하였다. 이 임무를 원만히 수행하다가 금광을 지키던 16명의 용사들이 장렬하게 최후를 마치였다. 이에 격분한 아군은 토비들을 계속 족치였다. 손방유는 아군의 맹렬한 추격을 받아 다음날 오후 화남현경내에 있는 달련포로 쫒겨가 숯가마안으로 기여들어갔다가 아군의 총에 맞아 즉사하였고 50여명의 졸개들도 모두 소멸되였다. 그후 얼마 안되여 리화당, 마희산, 장활자 등 토비두목들이 아군의 총탄에 맞아 저승으로 갔다.

토비두목 사문동은 민주련군부대의 전사들에게 체포되였다. 1946년 12월 3일 이자를 영평금광에서 희생된 16명의 렬사릉앞에 끌고가 무릎을 꿇어앉히고 목을 벴다.

가장 악질적이였던 북만의 토비두목들과 토비들은 이렇게 소멸되였다.

녕안에서도 목단강군구 파견원들의 지휘밑에 100여차의 전투를 거쳐 토비무리들을 숙청하였다.

중국 동북지방에 파견된 조선인민혁명군 군사정치간부들이 진행한 반토비작전은 중국혁명가들과의 공동투쟁이였다. 조선의 혁명가들은 이 전투들에서 언제나 앞장에 섰으며 모두의 모범으로 되였다.

반토비작전에서 빛나는 승리가 이룩됨으로써 제3차 국내혁명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벌써 중국 동북지방에서 토비들이 더는 련합된 세력으로 활동할수 없게 되였으며 적들이 바라던 《내응외합》은 파탄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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