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튼튼한 대중적지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중국 동북지방에 파견되여 가는 조선인민혁명군 군사정치간부들에게 연변근거지를 튼튼히 꾸리는데서 무장대를 조직하는 사업과 함께 당과 인민정권기관, 대중단체를 조직하는 사업을 적극 협조할데 대하여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공산당지방조직을 꾸리기 위한 사업을 적극 협조하여야 하겠습니다.

아직 공산당기층조직이 없는곳에 당조직을 내오는 동시에 당장성사업을 잘하여 로동자, 농민의 우수한 분자들로 당대렬을 부단히 확대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북지방에 파견되는 군사정치간부들이 매 지방의 구체적실정과 대중의 준비정도에 맞게 대중단체들을 조직하며 모든 민주력량을 단결시키기 위한 통일전선결성사업도 협조할데 대한 과업을 주시였다.

파견원들은 공산당지방조직을 꾸리는 사업을 활발히 벌리였다.

강건은 먼저 연변당위원회를 조직하고 초대서기로 사업하였다.

1945년 9월경까지 거의 중단상태에 처하였던 연변지구에서의 중국공산당의 활동은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들이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교시를 높이 받들고 연변당위원회를 발족시킨 때부터 활기를 띠였다.

연변당위원회는 중국공산주의자들과 힘을 합쳐 당과 대중단체, 정권기관을 꾸리는데서 주되는 역할을 하였다.

1945년 10월 3일 강건의 보증으로 룡정에서 정두환을 비롯한 6~7명의 핵심들을 입당시켜 공산당룡정구당을 조직하였다.

1945년 11월에는 파견원들이 연길에서 김병규, 최증만, 최명환, 남룡수 등 5명으로 당소조를 조직하고 남룡수를 책임자로 하였다.

 

남 룡 수

주체6(1917)년 8월 3일 출생. 해방전 중국 연길현에서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에 참가. 해방후 길동분구사령부 보안대대대장, 동북민주련군 165사 495련대 포병대대장으로 동북해방전쟁에 참가. 그후 조선인민군에 복무. 주체84(1995)년 4월 30일 서거. 반일애국렬사임.

 

1945년 12월 5일에는 조양천에 파견된 려영준에 의하여 조양천당지부가 나왔고 이어서 동불사, 태양촌, 팔도구 등지에서도 당지부가 조직되였다. 연변지구에서 공산당조직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근거지를 꾸리는 사업이 더욱 힘있게 진척되였다.

강건은 연길에 온 후 룡정에서 전윤필이 조직한 정무위원회와 로동자동맹, 농민동맹, 청년동맹, 녀성동맹, 교원동맹의 경험을 살려 연변의 전반적인 지역에서 정무위원회와 대중단체들을 조직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945년 9월말에는 연변지구의 모든 현과 부락들에 정무위원회가 조직되였으며 여러가지 명칭을 가진 대중단체들이 출현하였다. 새로 조직된 정무위원회들은 악질적인 지주와 일제주구들을 처단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인민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소작료를 낮추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고 생산을 조직하였으며 교육을 장려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사업에 착수하였다.

한편 새로 조직된 대중단체들도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중에서도 강건이 조직한 연변민주대동맹은 특출한 공적을 남기였다. 강건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대중적지반을 튼튼히 꾸리자면 조선사람과 중국사람을 다 하나로 묶어세울수 있는 통일전선체조직으로서 민주대동맹과 같은것을 결성하는것이 좋을것이라고 하신 교시를 높이 받들고 1945년 9월 19일 연길시에서 로동자, 농민, 청년, 녀성대표대회를 열었다. 회의에는 연변 각 현의 3만여명(로동자, 농민, 청년, 녀성동맹맹원들)의 대표 600여명이 참가하였다. 대표대회에서는 연변로농청녀총동맹을 결성하고 집행위원회를 선출하였다. 그리하여 연변지구의 로동자, 농민, 청년, 녀성운동은 통일적인 지도를 받게 되였다.

그후 강건은 1945년 10월 27일에 연변로농청녀총동맹 집행위원회를 열고 동맹의 명칭을 연변민주대동맹으로 개칭한 후 동맹의 강령을 채택하도록 하였다. 강령에는 《일본제국주의가 중국에서 소유하고있는 광산, 철도, 공장, 은행을 몰수하여 인민들의 소유로 돌릴것》, 《간첩과 매국역적을 체포하여 인민의 재판에 넘길것》, 《소작료와 리자를 인하시키는 정책을 실시하며 토지는 밭갈이하는자에게라는 원칙을 실시할것》, 《일본제국주의가 차지하고있는 모든 토지를 몰수하여 땅이 없는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할것》, 《일본제국주의의 노예화교육제도를 철저히 페지할것》, 《남녀평등권리를 실현할것》 등 14개 조항이 규정되여있었다.

회의는 강건의 지도밑에 진행되였는데 먼저 강건이 연설하고 그다음 동맹위원장을 선거하고 부서로서 총무부, 로동부, 농민부, 청년부, 감찰위원회를 조직하였다. 회의에서는 강령과 규약을 채택하고 현, 시, 구, 촌단위로 동맹의 하부조직을 두게 하였다. 그리하여 9월말~10월초에 이르러 각 지방에 동맹조직들이 결성되였다.

회의에서는 또한 인민정권형태로서 《연변전원공서》를 조직하고 그 산하에 《현공서》, 《시공서》, 《촌공서》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1946년 2월 20일부 《연변민보》의 보도에 의하면 연변민주대동맹의 맹원총수는 14만 5 000여명(당시 연변 5개 현의 인구는 도합 85만명이였다.)에 달하였다. 민주대동맹의 맹원 총수의 94%가 조선사람이였다.

연변민주대동맹의 핵심은 해방전에 반일투쟁에 참가한 애국자들이였다. 연변민주대동맹의 책임자는 강건이였고 총무부장은 정두환이였다.

민주대동맹은 많은 사업을 진행하였다. 특히 국민당지방 조직과 적대세력의 파괴책동을 반대하는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일제가 패망하자 국민당은 동북지방을 장악하기 위하여 여기에 저들의 지방조직들을 내왔는데 연변지구에도 그자들이 조직한 지방조직들이 뻐젓이 간판까지 내붙이고있었다. 그때 연길시내에는 국민당 길림성당부 순시원이 조직한 《국민당 길림성 연길판사처》라는 간판과 지방의 국민당패거리들이 제멋대로 조작한 《국민당 연길현당부》라는 간판이 나붙어있었다. 이들은 《치안유지회》, 《보안대》와 같은 반동조직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조종하여 조중인민간의 리간을 조성하고 사회질서를 혼란시켰으며 민주대동맹이 내놓은 소작료 3.7제, 4.6제를 반대하면서 소작료 5.5제를 주장하였다.

민주대동맹은 이에 대처하여 국민당의 반동적본질을 폭로하고 적들이 더는 날뛰지 못하게 여러모로 공세를 취하였다.

당시 연길시에는 반동적인 신문인 《한민보》와 《광복보》가 있었다. 《한민보》는 남조선 리승만의 반공사상을 고취하는 조선어로 된 신문이였고 《광복보》는 장개석의 국민당반동파들의 리익을 대변하는 중어로 된 신문이였다. 이 두 신문은 인민들의 건전한 사상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있었다.

민주대동맹은 이 두 신문의 발간을 금지시키고 민주대동맹의 기관지로 새로 《연변민보》를 발간하여 인민들속에 진리를 깨우쳐주고 공산당의 로선과 방침, 정세를 알려주며 군중을 조직발동하게 하였다. 이 신문은 조문판과 중문판으로 발간되였다.

연변민주대동맹은 또한 인민무장대를 조직하여 토비와 일본군패잔병, 그와 결탁한 괴뢰《만주국》군의 잔여세력과 마적을 숙청하는 사업을 힘차게 벌리였다. 일제패망초기에 일본군 패잔병들과 괴뢰《만주국》군의 잔여세력들은 아직 인민정권이 서지 못한 기회를 리용하여 도처에 숨어있으면서 인민의 생명재산과 안전을 위협하고있었다.

연변민주대동맹은 광범한 인민무장대들을 조직하고 토비와 괴뢰《만주국》군의 잔여세력을 가차없이 징벌하고 인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였으며 사회질서를 세워나갔다.

연변민주대동맹은 사실상 기층정권의 역할을 수행한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민주대동맹은 각계각층을 망라하는 사회단체이지만 그의 기층조직 특히 구, 촌조직은 당의 기층조직과 기층민주정권이 정식으로 나오기 전에 민정사무를 처리하고 생산을 조직하였으며 교육을 실시하고 리재민을 구제하며 무장을 관리하는 등 사실상 기층정권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실례로 8.15직후 일제의 만행으로 하여 연변지구의 여러 갈래의 철도는 다 파괴되여 기차가 다니지 못하였다. 이때 연변민주대동맹은 철도부문에 철도로동조합을 조직하고 그를 발동하여 기관차와 차량을 수리하고 철도를 복구하여 1945년 10월경에는 기차가 다닐수 있게 하였다.

연변의 모든 현들과 마을들에 정무위원회를 조직하고 그것을 인민정권형태인 현공서, 시공서, 촌공서로 승격시키고 《연변전원공서》가 나오게 한것은 다 민주대동맹의 공적이다.

때문에 당시 적대세력들은 민주대동맹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면서 동맹의 간부들과 맹원들을 피눈이 되여 해치려 하였다. 한때 토비들이 숨어있던 왕청현 천교령과 라자구, 연길현 삼도만, 화룡현 남평, 안도현 송강 등지에서 100여명의 동맹간부들과 맹원들이 장개석도당과 결탁한 토비들에게 살해되였다. 이것은 연변민주대동맹의 혁명적역할을 적들이 얼마나 무서워하였는가를 실증해준다. 반면에 인민들은 연변민주대동맹을 적극 지지하였다.

연변민주대동맹은 그후 당조직과 인민정권기관들이 정연하게 세워지자 자기의 사명을 훌륭히 끝마치고 1947년 7월에 스스로 해산되였다. 여기서 일하던 간부들은 토지개혁과 정권기관건설에 동원되였으며 동북해방전쟁의 전장으로 달려나갔다. 연변민주대동맹이 존재한 기간은 그리 오래지 않지만 그가 이룩한 성과는 매우 컸다.

동북민주련군 부총사령원이며 길료군구사령원인 주보중은 1946년 12월 길림성 민족사업회의 연설에서 연변민주대동맹의 역할과 공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15만명이상의 맹원을 가진 연변민주대동맹은 강신태를 비롯한 연변림시당위원회의 지도밑에 조직되였는데 그 성원의 99%가 조선족이였다. 길림성민주련맹도 왕효명, 리유민 등 중국공산당 길림시위원회 지도성원들의 지시에 따라 황재동, 량환준 등 조선동지들을 중심으로 조직한것이다. 연변민주대동맹은 건군, 정권개조, 청산투쟁의 발동, 토지개혁, 국민당특무숙청, 토비숙청, 전선지원 등 제반투쟁에서 결정적역할을 하였다. 첫 시기에는 한동안 실제적인 정권의 역할을 하였다. 민주대동맹의 력사적역할과 공적은 불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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