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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반 민주개혁실시

토지문제는 민주주의혁명의 수행에서 나서는 근본문제로서 연변지구 인민생활문제를 풀고 근거지를 꾸리는데서도 역시 매우 중요한 문제로 나섰다. 그것은 특히 연변지구경제에서 농업이 기본을 이루는 사정과 관련하여 더 절박한 요구로 제기되였다.

연변지구를 튼튼한 혁명근거지로 꾸리는데서 무장도 중요하고 당, 정권기관, 대중단체건설도 긴절하였지만 경제문제를 푸는것도 매우 중요한 문제의 하나였다. 경제적담보가 없으면 인민들의 생활문제를 풀수 없으며 인민생활이 풀리지 못하면 연변근거지가 동북해방전쟁을 물질적으로 지원할수 있는 기지로서의 역할은 둘째치고 자체로 살아나가는 문제도 해결할수 없게 될것이였다.

그렇기때문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북에 파견되는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들에게 연변지구에서 토지개혁을 빨리 실시하도록 적극 도와 농민들을 봉건적질곡에서 해방시키는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교시하시였다.

당시 연변지구는 오래동안 지속되여온 봉건적토지소유관계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어 농민들은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지만 자기 땅이 없어 기아와 빈궁에서 헤매고있었다.

이 문제를 푸는 길은 토지개혁에 있었다.

그때까지 연변지구의 토지는 지주들에게 집중되여있었고 또 많은 땅은 《공유지》라는 명목으로 일제가 차지하고있었다. 《동양척식회사》, 《만주척식회사》와 같은 일제와 괴뢰 《만주국》의 경제략탈기구가 지주와 결탁하고 많은 토지를 략탈하였는데 이른바 《공유지》, 《개척지》, 《국유지》, 《군용지》, 《현용지》, 묘지, 학전 등은 경작지의 30~50%를 차지하고있었다. 통계에 의하면 《공유지》가 경작지에서 차지하는 비률은 안도현이 60%, 화룡현과 돈화현이 각각 50%, 연길시와 훈춘현이 각각 30%, 왕청현이 26%였다.

《동양척식회사》와 《만주척식회사》는 저들이 차지하고있는 토지를 직접 농민들에게 소작을 주어 높은 액수의 소작료를 받아먹었고 또한 토지를 높은 외상가격으로 팔아주고는 그 가격에 리자를 붙여 고리대착취를 하였다.

지주와 부농은 당시 7%밖에 되지 않았지만 사유토지의 62.5%를 차지하고있었다. 농촌인구의 72.5%를 차지하는 빈고농들은 사유토지 총 면적의 19.9%밖에 가지고있지 못하였다.

지주, 부농들은 토지를 소작인들에게 주고는 농사형편이 어떻게 되였든 관계없이 소작료를 전부 받았고 소작인들을 강박하여 매해 무보수로 자기 집의 잡일을 시켰다. 일제와 괴뢰《만주국》의 금융기구 그리고 지주, 부농들은 다 변놓이를 하여 또다시 농민들을 등쳐먹었는데 그 년리가 보통 50% 또는 60%이상 되였다.

이렇게 농민들이 피와 땀을 흘려 가꾼 곡식을 몽땅 긁어갔기때문에 농민들은 나날이 더 비참한 처지에 빠져들어갔다.

연변지구에 파견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1930년대 전반기에 두만강연안에 유격구를 꾸리시고 거기서 토지개혁을 하시였던 경험과 해방후 우리 나라에서 주체35(1946)년 3월에 실시한 토지개혁을 본보기로 하여 연변지구에서 토지개혁을 진행하였다.

제1단계에서는 일제침략자들과 괴뢰《만주국》이 가지고있던 《공유지》를 몰수하여 무상으로 땅이 없거나 땅이 적은 농민들에게 분배하였다.

조사에 의하면 토지개혁 첫단계에서 연길, 훈춘, 왕청 3개 현에서 분배된 《공유지》는 8만 2 000㏊에 달하였는데 이것은 이 3개 현의 총 경작지의 1/3을 차지하였다.

《공유지》를 분배함으로써 땅이 없거나 땅이 적은 농민들의 토지문제가 초보적으로 해결되였다. 그러나 지주, 부농들은 여전히 소작료와 고리대로 농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있었으며 일제와 괴뢰《만주국》의 잔여세력들과 서로 짜고 새 정권을 뒤집어엎을 흉계를 꾸미고있었다. 때문에 봉건적토지소유제를 철저히 없애지 않고서는 연변근거지를 튼튼히 다질수 없었고 농민들의 근본문제도 해결할수 없었다.

토지개혁 2단계에서는 빈고농단체를 발동하여 악질지주들을 체포하고 그들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여 빈고농들에게 나누어주는 사업을 하였다.

토지개혁을 진행하는 과정에 일부 좌우경적편향이 발로되였는데 이런 현상을 극복하기 위하여 토지분배위원회를 내오고 그것을 통하여 바로잡도록 하였다. 토지분배위원회는 우선 빈고농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토지가 평균수보다 낮은 농민에 대해서는 그 부족되는 부분을 보태주었으며 지주와 부농은 자신을 단련하고 개조할수 있도록 보통농민들과 같은 평수의 토지를 가질수 있게 허락하였다.

토지개혁의 결과 연변의 5개 현(돈화와 액목을 제외)에는 15만 4 243호에 71만 8 886명(그중 조선사람이 81.9% 차지)의 인구가운데서 농호 11만 6 681호(5개 현 총 호수의 75.64% 차지)에 인구 55만 167명이 도합 18만 2 064㏊의 토지를 분배 받았는데 이것은 총 경작지면적 22만 2 767㏊의 81.72%를 차지하였다.

빈고농들은 집과 집짐승, 농기구, 량곡, 의복 등도 분여받았다.

그후 인민정권은 토지증을 주고 농민들의 투쟁의 전취물을 보호할데 대한 법령을 발포하여 토지개혁을 법적으로 담보하였다.

토지개혁은 연변지구의 농민들 특히 조선사람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였다.

연변의 대다수 조선족농민들은 화전민의 후대들이였다. 그들은 일제와 지주들에게 땅과 가산을 다 빼앗기고 새땅을 일쿠느라 피땀을 흘렸지만 토지소유권을 가지지 못하여 지주의 소작인으로 전락되여 가장 비참한 생활을 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난생 처음으로 땅의 주인이 된 이들의 기쁨은 끝이 없었다. 대대로 내려오면서 자나깨나 바라던 숙원을 실현하였던것이다.

토지를 분여받은 농민들은 자기들에게 땅을 주고 새 삶을 안겨준 공산당과 인민정권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칠 한마음을 안고 근거지를 꾸리는 사업에 적극 떨쳐나섰으며 무장 대오에도 선참으로 참가하였다.

파견원들은 토지개혁의 실시로 앙양된 농민들의 열의에 맞게 농업생산을 늘이기 위한 대책들을 세웠으며 그리하여 얼마후에는 자체의 수요를 보장하면서도 동북해방전쟁에 식량을 비롯한 많은 농산물들을 보내줄수 있게 되였다. 다른 부문들에서도 민주주의적개혁을 실시하여 연변근거지를 경제적으로 튼튼히 다지였다.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들은 중국공산주의자들과의 긴밀한 협력밑에 연변지구의 철도, 공장, 기업소, 은행, 체신 등을 장악하고 인민의 소유로 선포하였으며 무장대와 혁명조직을 발동하여 이 전취물들을 철저히 보위하였다.

또한 파견원들은 교육의 민주화를 실현하며 연변지구에 대학을 창설하는 사업을 적극 방조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주체37(1948)년 10월 23일 당시 연변전원공서의 책임적인 임무를 수행하고있던 림춘추를 만나시고 연변지구에서 교육사업에 힘을 넣고있는것은 잘하는 일이라고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새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서는 인재를 키우는 교육사업을 잘하여야 합니다.

현재 연변지구에서 민족대학창설사업을 추진하고있는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연변지구에 조선민족을 위한 대학이 창설되면 중국 동북지방에 살고있는 조선청년들의 교육문제도 해결될수 있고 연변지구의 교육문화발전도 더욱 촉진시킬수 있을것입니다.》

파견원들이 교육사업에도 큰 힘을 넣음으로써 1949년에 와서 일제통치시기보다 소학교수는 16.1%, 소학교학생수는 34% 늘어났으며 같은 기간에 중학교가 31개 있었는데 그가운데 조선족중학교가 28개, 재학생수는 1만 3 797명이고 조선족학생이 91.7%를 차지하였다. 일제패망전에 비하면 중학교수는 72.2%, 재학생수는 88.5% 늘어난셈이다.

1949년에는 연길시에 중국에서 처음으로 되는 소수민족 종합대학인 연변대학이 창립되였다. 연변대학의 창립은 조선족들의 크나큰 긍지와 자랑으로 되였다.

주체36(1947)년 2월 16일 중국 목단강지구 조선인민주련맹대표위문단이 평양에 와서 위대한 수령 …동지의 접견을 받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4(1945)년 9월 목단강지구 일군들인 김동렬, 류형렬, 안시웅 등을 만나주시고 《고려인협회》를 《민주대동맹》과 같은 조직으로 고치도록 하시였다.

목단강지구의 일군들은 그후 조직명칭을 《조선인민주동맹》으로 개칭하고 사업하다가 자기들의 그동안의 사업성과를 위대한 수령님께 보고드리고 새로운 가르치심을 받자고 그이를 찾아왔던것이다.

김 책이 그에 대하여 보고드리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들을 만나주시고 그동안 그들이 재중동포들의 민주주의적민족권리를 옹호하고 조국의 완전자주독립을 이룩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고있는데 대하여 평가하시면서 그들이 앞으로 해야 할 사업방향에 대하여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제는 조선인민의 민족의식과 고유한 문화를 말살하려고 책동하였다고 하시면서 일제침략자들은 모국어도 못쓰게 하고 조선사람의 성과 이름도 고치게 하였으며 조선사람들의 교육의 길을 막고 과학과 기술도 배우지 못하게 하였지만 우리 인민은 해방된 첫날부터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북조선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세울수 있었으며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의 지도밑에 불과 1년남짓한 기간에 력사적인 민주개혁을 빛나게 수행할수 있었다, 교육사업은 민족의 장래와 혁명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사업이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조국이 해방된 첫날부터 교육사업에 선차적인 힘을 넣고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일제의 식민지노예교육제도를 철페하고 민주주의적교육제도를 세워 새세대들에게 배움의 길을 활짝 열어주고있으며 청소년들의 머리속에서 일본제국주의사상잔재를 뽑아버리고 그들을 민주주의사상으로 무장시키고있다고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보내주신 편지를 전달하는 모임 목단강에서 진행 주체36(1947)년 3월 30일

연길중학교 졸업생 150여명을 포함한 연길시 청년들의 무장대입대탄원모임 주체35(1946)년 6월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재중동포자녀들에게 민주주의적민족교육을 실시하기 위하여 투쟁하여야 한다고 가르치시였다. 조선사람들이 살고있는 모든 곳에 학교를 세우고 모든 동포자녀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며 그들을 민주주의적인 사상으로 교육교양하며 그들이 높은 민족적자부심을 가지고 조국을 사랑하며 자기의 민족성을 잃지 않도록 교육교양하여야 한다, 그러자면 동포자녀들에게 우리 말과 글, 우리 나라의 력사와 지리를 잘 가르치는데 깊은 주의를 돌려야 한다, 재중동포들속에서 문화계몽사업을 힘있게 벌리고 그들을 민주주의사상으로 교양하여야 한다, 인민대중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키는데서 출판물 특히 신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하시면서 지금 그들이 발간하고있는 《인민신보》가 기본방향을 옳게 정하고 편집되고있다고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이 해외에서 사업하고있는것만큼 국제민주진영나라인민들 특히 중국인민들과의 친선단결을 강화하며 자유를 사랑하는 세계 각국 인민들과의 친선협조를 계속 발전시켜나가야 한다고 지적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을 만나주신 다음 동북지방의 해외동포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친필로 써주시였다. 그리고 목단강동포자녀들의 교육교양에 필요한 교과서와 학습장, 연필 등 많은 물자를 보내주시였다.

목단강지구일군들은 동북해방전쟁이 가렬하던 시기였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 보내주신 편지를 전달하고 편지에서 제시된 과업을 관철하기 위한 모임을 광범히 조직하고 수령님의 가르치심대로 일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연변지구에서는 토지개혁을 비롯한 제반 민주개혁들을 실시하면서 인신매매와 기생축첩제도를 철저히 없애버리는데도 커다란 관심을 돌렸다.

1946년 2월초 어느날 저녁 강건은 박락권과 함께 연길시 중심거리 서쪽끝에 있는 황해관으로 갔다. 이들은 황해관에 아직도 기생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해방시켜주기 위하여 찾아갔던것이다.

강건은 밤 11시가 넘자 분주히 심부름을 하고있던 23살난 처녀를 불러 어떻게 되여 여기에서 일하게 되였는가고 물었다. 그 처녀는 의아해하다가 강건일행을 둘러보면서 하소연을 하였다. 그는 1945년 초에 흑룡강일대에서 외삼촌을 찾아 연길로 왔다가 얼림수에 걸려 3 000원에 팔려왔다고 말하였다. 처녀는 자기의 고생이 말이 아니라고 하며 눈물을 흘리였다.

그 순간 격분한 박락권은 공중에 대고 총을 두방 쏘았다. 권총소리가 야밤의 정적을 깨뜨리자 공포에 질려 낯색이 새파랗게 된 집주인이 속이 한줌만해서 강건의 앞에 나타났다.

그는 무슨 분부인가고 물었다.

강건은 녀인들을 즉시 불러내라고 하였다.

주인은 찍소리 한마디 못하고 즉시 기생들을 다 불러내였다.

강건은 그들앞에서 우리는 김일성장군님께서 파견해주신 조선인민혁명군인데 당신들을 해방시키자고 여기에 왔다는것, 이제부터 팔리워왔거나 빚을 진 녀성들에게 들씌워진 이전의 모든 계약은 무효라고 선포하고 그 누가 이것을 어기면 이 강신태를 찾아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렇게 되자 모였던 녀성들이 일시에 울음바다를 펼치였다. 돈 2 000원에 팔려왔다는 녀인, 지주에게 진 빚을 갚지못하여 지주집에 들어갔다가 다시 지주가 팔아서 여기까지 왔다는 녀인, 시집을 보내주겠다고 얼려가지고 돈을 받아먹은 다음 주인에게 넘겨주어 억울하게 여기에 끌려온 처녀들이 자유를 찾게 되니 처음에는 선뜻 믿어지지 않아 어리둥절해 있다가 통곡을 하였던것이다. 이렇게 되여 연길시내의 황해관 기생들은 일시에 다 해방되였다.

강건은 연길에서의 경험을 살려 연변지구 각지에서 일체 기생제도와 인신매매, 빚값에 녀성들이 끌려가는 현상이 더는 없도록 강한 조치를 취하였다.

명월구에는 해방전부터 기생집들이 많았다. 그곳에는 인구가 3만 9 000명밖에 안되였지만 기생집이 30여호나 되였고 여기에 기생이 200여명이나 있었다. 8.15후였지만 괴뢰《만주국》관리와 건달군들로 조직된 《치안유지회》라는 반동단체는 1946년초까지 존재하였다.놈들은 영경, 량강, 만보 등의 지구를 통제하면서 녀자들을 마음대로 강간, 릉욕하고 죽이기까지 하였다. 이자들은 당장 국민당군대가 오고있으니 누구든 절대로 경솔히 공산당을 따르지 말라고 하면서 기생해방,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공산당의 조치와 선전에 도전해나섰다.

강건은 민주대동맹을 발동시켜 녀성해방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대회를 련속 네번이나 조직하게 하였다. 매번 대회에는 500~600명의 녀성들이 참가하였고 그때마다 기생집의 주인들을 끌어내여 대중심판을 받게 하였다. 이렇게 하니 더는 배겨내지 못하고 기생들을 다 돌려보냈는데 대부분의 녀성들은 우리 나라에서 팔려간 녀성들이였다. 부녀조직에서는 고향으로 가겠다는 녀성들은 보내고 나머지는 적당한 일자리를 주었다. 방직공장, 국수집을 운영하여 단번에 수십명씩 받아 들이기도 하였다.

이것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인간의 매매를 끝장내는 세기적인 변혁으로서 8.15후 연변지구에 펼쳐진 새로운 풍경이였다.

이런 변혁속에 연변지구는 더욱 혁명화되여갔고 연변근거지가 더욱더 굳건히 다져졌다.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높이 받들고 연변근거지를 튼튼히 꾸리였기때문에 장개석국민당군의 군사적공세와 경제봉쇄를 과감히 짓부시고 동북해방전쟁의 승리를 이룩할수 있었다.

하기에 중국도서들에서는 경애하는 김일성주석의 관심과 힘있는 지원으로 연변지구에 혁명무력, 당, 정권기관, 대중단체가 조직됨으로써 이 지구는 혁명의 보루로 솟아올랐다, 혁명근거지로서의 연변은 전란의 와중에 잠긴 동북지방을 장개석의 기반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투쟁에서 중국공산당과 인민이 의거할수 있는 발판이였다고 쓰고있다.

1945년 8월 일제패망후 얼마동안 정치적공백지로 남아있던 중국 동북지방을 누가 먼저 장악하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중국공산당과 장개석국민당간에 치렬한 정치군사적대결전이 벌어지던 때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들고 먼저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들이 연변지구에 들어가 혁명근거지를 창설하였다.

이것은 중국혁명을 돕기 위한 조선혁명가들의 국제주의적 지원의 중요한 결실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제패망직후 중국정치정세의 복잡성을 미리 간파하시고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들을 동북지방에 파견하시였으며 장개석군대가 여기에 들어와 일제로부터 정권을 《접수》하기 전에 연변지구에 튼튼한 성새를 쌓게 하심으로써 중국공산당의 활동에 유리한 국면을 마련해 주시였고 동북근거지창설의 귀중한 경험과 빛나는 모범을 창조하시였다.

중국공산당은 우리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들이 연변지구에 파견되여 근거지창설을 한창 다그치면서 무장대오를 이미 그쯘하게 꾸려놓았던 시기인 1945년 12월 튼튼한 동북근거지를 창설할데 대한 지시를 하달하였다. 지금도 중국 동북지방 인민들은 당시 연변근거지창설의 개척자, 선구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파견하신 우리의 군정간부들이였다고 말하고있다.

이렇게 빨리 연변지구에 혁명의 울바자를 든든히 쳤기때문에 1945년 10월 말경부터 장개석국민당군이 동북땅에 들어 왔어도 연변지구에서는 공개적으로 활동할수 없었던것이다.

그러므로 중국공산당과 그의 군대는 연변지구에 튼튼히 의거하여 새로운 동북근거지창설을 힘있게 밀고나갈수 있었다.

이에 대하여 당시 중국출판물은 10여만명에 달하는 팔로군, 신사군부대들과 2만여명의 중국간부들이 조선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 발을 든든히 붙일수 있은것은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들과 대원들이 당을 건설하고 혁명단체를 결성하고 인민무장대오를 조직하고 민주정권을 수립하여 사업 기초를 다져놓고 국면을 타개한것과 갈라놓고 생각할수 없다고 썼다.

연변근거지는 군사기지로서도 그 의의가 컸다.

중국 동북지방의 중요군사전략적요충지인 연변지구를 기본군사기지로 하여 중국공산당은 적의 측면과 뒤통수를 타격함으로써 《먼저 남쪽을 점령하고 후에 북쪽을 점령》할데 대한 장개석의 전략적기도를 짓부시고 《3하강남 4보림강》작전을 성과적으로 치를수 있었다.

또한 연변근거지는 정치군사적으로 튼튼히 준비된 동북민주련군과 조선인부대들이 이곳을 출발진지로 하여 동북지방의 주요도시들을 공격하는 작전을 성과적으로 보장할수 있게 하였다.

연변근거지의 인민들은 평상시에는 식량과 피복, 무장장비들을 생산보장하였고 일단 전투가 벌어질 때에는 부상자를 후송하고 식사를 보장하였으며 전투원들과 함께 손에 총을 들고 적을 족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전선에 나가 위문공연도 하면서 전투사기를 북돋아주었다.

연변지구인민들의 투쟁에 대하여 전 동북민주련군지휘성원은 《장개석도당을 반대하는 국내해방전쟁의 전기간 연변은 전국적으로 원군운동의 선봉에서 력사에 기록될 모범을 창조하였다. 3년간의 동북해방전쟁기간에만도 약 5만명의 장병들과 12만여명의 담가대원들이 전선에서 용전분투하였는데 1947년 한해동안에 참군한 청년들의 수만 해도 1만 3 000여명에 달하였다.》라고 썼다.

중국의 한 필자는 《…주보중과 길림성위의 령도밑에 연변지구를 기본군사기지로 하여 적들의 측면과 뒤통수를 위협하였으며 적들의 남만작전을 저지시키며 림강을 보호하고 3하 강남의 작전을 힘있게 지원하였으며 동만해방지역을 공고확대하였다.》고 썼다.

연변근거지는 후방기지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연변지구는 군사전략상, 교통상 요충지이기때문에 이 지구에 튼튼한 근거지가 창설됨으로써 믿음직한 후방기지의 역할을 담당하여 동북해방전쟁의 승리에 큰 도움을 주었다.

1946년 6월 장개석국민당군대가 대규모적으로 공격해왔을 때 동북지방의 중국공산당의 주력부대와 당, 정권기관, 후방기관들이 연변근거지에 소개되여 여기서 병력을 보충받고 식량과 군수품을 받아 대오를 정비보강하고 부상병들을 치료하였다. 또한 우리 나라를 경유하여 들어오는 남만과 중국관내의 일부 부대들도 연변에 집결하였다가 다시 목적지로 떠나갔고 우리 나라에서 지원한 무기, 탄약, 피복, 군수물자들을 받아들여 보관관리하였으며 조선의 북부지방에 소개시켰던 동북민주련군의 전략물자들도 여기서 접수하였다가 공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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