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연 변 지 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제시하신 연변지구에 튼튼한 혁명근거지를 꾸릴데 대한 교시는 유리한 이 지구의 자연지리적조건과 사회계급적관계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에 기초하고있었다.

연변지구는 N 41°로부터 44°, E 127°로부터 132°사이에 위치하고있는 지역으로서 동쪽으로는 쏘련의 연해주 하싼지구와 잇닿아있고 남쪽은 두만강을 사이두고 우리 나라 함경북도와 마주하고있으며 서쪽은 중국 길림성의 교하, 화전, 무송현들과 접하고 북쪽은 중국 흑룡강성의 동녕, 녕안, 해림, 오상현들과 잇닿아있다.

연변지구 넓이는 현재 4만 2 700㎢로서 길림성 총 면적의 1/4을 차지하고 이 성의 동부에 자리잡고있다.

이 지구에는 조선족, 한족, 만족, 회족, 몽골족을 비롯하여 16개의 민족이 살고있는데 그중에서 제일 많은 민족이 조선족으로서 1984년 현재 75만 4 567명 즉 연변지구 총인구의 40.32%를 차지하고있었다.

연변지구의 땅은 서남과 서북, 동북쪽으로부터 동남쪽으로 가면서 점점 낮아져 훈춘일대는 매우 낮다. 연변지구에 있는 산지의 넓이는 3만 2 000㎢로서 이 지구 면적의 약 76%를 차지하고있다. 구불구불 기복을 이루고있는 이 산지들은 험준한 산으로 첩첩히 둘러져있으며 산과 산사이에는 크고작은 강들이 흐르고 산림이 무성하다.

연변지구에는 현재 2개의 도시인 연길시와 도문시가 있고 연길현, 화룡현, 훈춘현, 왕청현, 안도현, 돈화현 6개 현이 있는데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당시에는 돈화현이 연변에 속해 있지 않았다.

연길현의 소재지는 이전에는 연길시였고 1950년부터 룡정진으로 되였다. 이전에는 《륙도구》, 《룡드레촌》이라고 부르던 곳이다.

훈춘현의 소재지는 훈춘진인데 이곳은 오랜 옛성으로서 옛날에는 《대팔툰》이라고 불렀다.

1920년대 훈춘진은 로씨야의 울라지보스또크, 우리 나라 당시의 웅기와 무역을 활발히 진행하였는데 훈춘진안에 크고 작은 상점만도 300여개나 있어 연변지구의 5개 통상지가운데서 제일 큰 통상지로 되여있었다. 당시 길림쪽으로 들어온 일본상품 총액보다 우리 나라를 거쳐 훈춘진으로 들어간 상품액이 36배나 되였으니 얼마나 상품교류가 번창하였는가를 알수 있다.

화룡현의 소재지는 화룡진이다. 원래 화룡현은 연길부에 속해있다가 1909년에 화룡현으로 되였다. 현소재지는 원래 대립자였다가 1940년에 삼도구 즉 오늘의 화룡진으로 옮겨왔다. 현소재지가 대립자로부터 삼도구로 옮겨오면서 그곳을 화룡이라고 이름을 고치였다.

왕청현의 소재지는 왕청진인데 이전에는 《대두천》이라고 불렀다. 왕청현은 림업이 번창한 곳으로 이름났다.

안도현의 소재지는 1949년 6월까지는 송강진이고 그 이후부터는 명월구로 옮기였다. 송강진은 1909년부터 현소재지로 있었는데 중국에서는 백두산아래의 첫 소도시로서 백두산유람지의 중요통로이다.

연변지구에서 살아온 조선민족은 일찍부터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에 떨쳐나섰다.

1931년 9월 동북을 강점한 일제는 1934년 12월 여기에 괴뢰《간도성》을 세웠다. 《간도성》소재지는 연길에 두었으며 연길, 훈춘, 화룡, 왕청, 안도 5개 현을 관할하게 하였다.

1943년에 일제는 연길현 관할하에 있던 연길가를 《간도시》로 고치고 《간도성》의 직할시로 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1906~1907년경부터 연변지구에 마수를 뻗치기 시작하여 1909년 9월에는 《간도협약》을 체결하고 룡정에 일본총령사관을 설치하였으며 길회선철도부설권을 빼앗았고 동북땅에서 제세상처럼 날치기 시작하였다.

1920년 이후에는 일제가 연변지구의 연길, 화룡, 훈춘, 왕청 등 14개 지방에 경찰서, 경찰분서를 설치하고 친일단체들을 조작하였으며 돈화령사관분관을 세우고 침략의 마수를 돈화, 액목, 안도 등지에까지 뻗치였다.

그리하여 1930년 6월부터 그 이듬해 2월까지 기간에만도 연변지구에서 일제에게 체포된 인원이 1 354명이나 되였다.

1931년 《9.18사변》후 일제는 연변지구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일제는 연변지구에 관동군 《수비대》, 《헌병대》와 특무기관을 두었으며 《협조회특별사업반》, 《선무반》 등 특무외곽조직을 내왔다. 또한 모든 반동들을 긁어모아 《특설부대》, 《자위단》을 조작하고 인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일제침략자들은 조선민족과 중국사람들사이에 리간을 조성시키기 위해 별의별짓을 다하였다. 특히 조선학교의 교과서는 모두 일본말로 편찬하도록 하였고 조선아이들이 조선말과 글을 배우거나 쓰는것을 엄금하고 조선사람의 이름까지 일본이름으로 고치도록 강박하였다.

일제침략자들은 조선사람들에 대하여서는 끊임없는 《토벌》을 감행하여 정든 고향에서도 살수 없어 중국땅에 찾아온 사람들까지도 집단적으로 무참히 살해하였고 마을들을 불살 라버렸다.

압박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반항이 있는 법이다. 연변지구인민들은 우리 나라를 강점하고 중국땅에까지 마수를 뻗친 일제를 반대하여 일찍부터 투쟁하였다.

우리 인민의 반일민족해방투쟁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항일무장투쟁로선을 제시하시고 그 투쟁을 진두에서 령도하심으로써 새로운 높은 단계에로 발전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안도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신 후 수령님께서 파견하신 지도핵심들에 의하여 왕청, 연길, 화룡, 훈춘 등 동만의 여러 지역에서 먼저 항일무장대오들이 꾸려졌으며 뒤이어 전동북땅이 항일의 불도가니로 전변되였다.

항일무장투쟁의 영향밑에 연변지구인민들은 혁명적으로 각성되여 조국광복회를 비롯한 여러 조직에 결속되였으며 무장투쟁을 비롯한 여러가지 형태의 투쟁으로 일제침략자들을 무자비하게 족쳤다.

이렇게 조선사람들이 장구한 기간 일제를 반대하여 투쟁하였기에 연변지구 주민들의 혁명적각오가 아주 높았다.

지리적으로도 연변지구는 백두산으로부터 높고 험한 산줄기들이 여러 갈래로 뻗어있고 밀림이 울창하여 적은 력량으로도 적들의 공격을 능히 막을수 있고 또 유격전과 대부대기동전으로 적을 공격하기도 유리한 곳이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와 쏘련과 린접해있고 남만과 북만을 련결하는 지점에 놓여있으므로 연변지구는 교통상, 군사전략상으로도 중요하고 유리한 지점이였다.

이런데로부터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연변지구를 동북해방전쟁의 승리를 위한 근거지로 선택하시였던것이다.

원래 중국공산당에서도 이 지구에 근거지를 창설할데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여러가지 난관으로 그것을 실현하지 못하고있었다.

1945년 11월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동북국에 다음과 같은 결정을 하달하였다.

《우리가 전동북을 점령하려고 한 기도는 불가능한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동북지방에서 일정한 지위를 차지하기위해 노력해야 한다.》

1946년 1월 중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동북국에 보내는 전보문에는 다음과 같이 지적되여있다.

《우리에게 근거지가 없으면 싸우기 어렵지만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근거지도 세울수 없다. 그러므로 병력을 분산하여 군중을 발동시키고 비적들을 숙청하며 근거지를 창설해야 하며 또 병력을 집중하여 적들의 공격을 타파함으로써 근거지창설을 엄호하여야 한다. 이 량자는 꼭 병진시켜야 한다.》

중국공산당은 1946년에 들어와서 근거지창설의 첫발을 내디디였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의 전략적의도에 따라 주체34(1945)년 9월 동북지방에 파견된 조선인민혁명군 지휘성원들과 대원들은 벌써 그해 가을부터 근거지창설을 한창 다그치고있었다.

이렇게 연변지구에서 근거지창설을 미리 예견성있게 앞질러 진행했기때문에 이 근거지에 의거하여 파죽지세로 달려들던 국민당군대와 즉시 싸울수 있었고 또 싸워서 이길수 있었다. 만일 이때에 강력한 연변근거지를 미리 꾸리지 못하였더라면 동북해방전쟁의 승리는 막대한 희생의 대가를 치르고서야 달성할수 있었을것이다.

 

이전 차례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