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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총대를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연변근거지를 창설하는데서 무엇보다먼저 해야 할 일은 군대를 조직하는것이라고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동무들은 반동세력을 분쇄하기 위한 무장대오를 조직하는 사업을 적극 방조하여야 하겠습니다.

강력한 무장력량이 없이는 반동세력과의 투쟁에서 승리할수 없습니다. 무장대오는 항일전쟁에 참가한 사람들을 핵심으로하고 조중인민들의 우수한 청년들로 조직하여야합니다.》

혁명근거지를 꾸리는것은 무장으로 적들과 싸워 이기기 위한 거점을 꾸리는 사업이므로 총대를 떠난 혁명근거지란 있을수 없다. 적들과의 싸움뿐아니라 근거지에서의 당사업이나 정권건설, 경제사업 그리고 인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위하는 사업도 다 총대에 달려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혁명투쟁의 본질적요구와 오랜 기간 일제를 타승하는 싸움에서 얻으신 고귀한 경험에 기초하여 동북에 파견된 군사정치간부들이 근거지무장대를 꾸리는 사업을 적극 방조하도록 하는데 첫째가는 관심을 두시였다.

당시 길동분구사령부 정치주임을 한 당천제는 그때를 회상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조선동지들은 김일성주석동지의 훈교를 받들어 우리와 함께 연길에 강신태(강건)를 사령원으로 하는 길동보안사령부(그후 길동분구사령부로 개편)를 내오고 각 현과 중요지역에 우수한 지휘성원들을 파견하여 보안련대를 내왔는데 연길에서는 강사령이 직접 맡아 조직하고 룡정과 화룡에서는 박락권과 공정수, 왕청에서는 최명석(최광), 도문에서는 임철, 명월구에서는 오죽순이 각각 책임지고 조직편성하였던것이다.

일제가 항복한 후 비등된 혁명열을 타고 우후죽순과도 같이 각지의 경비무력이 급속히 장성했지만 특히 룡정보안련대는 초기 수백명으로부터 짧은 기간에 무려 3 000여명으로 늘어나 그때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여기에는 일제의 패망전부터 유격대에서 지도한 전윤필의 비밀지하조직성원들이 박락권의 지휘하에 맹활약으로 조선청년들을 각성발동시킨데 있었으니 그때의 연변형세를 미리 통찰예견하신 김일성주석동지의 선견지명이 안아온 결실이 아닐수 없다.》

 

오 죽 순

주체10(1921)년 2월 14일 출생. 해방전 중국 요하현에서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에 참가. 해방후 명월구에 파견되여 인민자위대 중대장, 동북민주련군 156사 303련대의 대대장으로 동북해방전쟁에 참가. 그후 조선인민군의 중요직책에서 사업하다가 주체63(1974)년 8월 21일 서거. 항일혁명렬사임.

 

연변지구에서의 무장대조직은 도시들과 현들에서 경비대 혹은 보안대를 꾸리였다가 그것들을 통합하여 길동분구사령부를 내오는 과정을 거치였다.

강건은 연길에 도착하자 9월 19일 연길시 중앙소학교에서 군중집회를 열었다.

강건은 동북지방의 정세를 분석한 다음 조중인민들이 압박과 착취없는 새세상에서 살자면 당장 자기 손에 무장을 잡고 덤벼드는 원쑤놈들과 싸워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그리고 대중단체의 지도일군들을 임명하고 각 조직들에서 무장대에 탄원하는 청장년들을 적극 도와줄데 대하여서도 강조하였다.

강건은 청년조직에 찾아가 청년들을 적극 발동시켜 며칠 사이에 연길시내에서 30여명의 청년들로 경비소대를 조직하였다. 소대장은 남룡수였다. 이어서 강건은 연길시주변에서 탄원해온 청장년들로 경비중대를 조직하였다.

중대장은 최호림이였고 부중대장은 박창범(항일혁명투사)이였다.

각지에서 무장대에 입대하는 궐기모임들이 진행되고 청년들이 어깨에 총을 메고 다니는것이 연변지구의 하나의 풍경으로 되기까지 하였다.

당시 출판물자료에 의하면 1946년 5월 중순부터 6월초까지의 사이에 연변 5개 현에서 3 659명이 입대하였는데 1946년 6월 연길 제2중학교에서만도 신체검사에서 불합격을 맞은 한명을 제외한 졸업생전원이 입대하였다.

이 모범을 따라 연길과 다른 현들에서도 수천명의 중학교 졸업생들이 입대하였다. 이리하여 연길시의 탄원자들이 10월 10일경에는 대대력량으로, 11월 중순경에는 련대급으로 인원이 늘어났다.

무장대를 꾸리자면 사람과 함께 무기가 있어야 하였다.

강건은 무장대성원들의 무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연길에 주둔하고있는 쏘련군사령부와 협상하고 일본군에서 로획한 무기창고에서 2개 중대를 무장시킬수 있는 99식보병총을 가 져왔다.

한편 일본군과 위만군패잔병들이 내던졌거나 숨긴 무기들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특히 항일무장투쟁시기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로획한 무기들을 땅에 파묻었던것을 이 시기에 파내여 무장대에서 리용하였다. 이리하여 11월에 연길시 보안련대가 조직되였다. 련대에는 3개 중대가 있었다.

련대장은 한범, 1중대장은 남룡수, 2중대장은 최태훈, 3중대장은 박창범이였다. 1개 중대에는 3개 소대가 있었다.

1945년말에는 인원이 많이 늘어나 보안련대의 각 중대를 대대로 개편하였다. 련대장은 한범, 참모장은 최호림, 1대대장은 남룡수, 2대대장은 강위룡(항일혁명투사), 3대대장은 박창범(항일혁명투사)이였으며 3대대 정치지도원은 홍춘수(항일혁명투사), 8중대장은 한태룡(항일혁명투사)이였다.

강건은 보안련대의 무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또다시 쏘련군사령부와 교섭하여 대홍구에 있는 패망한 일본군의 무기창고에 가서 두차례에 걸쳐 8대의 자동차에 99식보총과 중, 경기관총 20여정, 박격포 6문, 수십문의 척탄통 등을 가져다 대오를 무장시켰다.

 

박 창 범

주체4(1915)년 4월 18일 출생. 해방전 중국 연길현에서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에 참가. 해방후 길동분구 연길보안련대 3대대장, 독립3련대 정찰참모로 동북해방전쟁에 참가. 그후 당시 사회안전부문에 근무, 주체92(2003)년 3월 2일 서거. 항일혁명렬사임.

 

강 위 룡

주체3(1914)년 5월 18일 출생. 해방전 중국 화룡현에서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에 참가. 해방후 동북민주련군의 중대장으로 동북해방전쟁에 참가. 연길현 룡정시당 서기, 시장, 그후 조선로동당의 중앙당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사회안전성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사업. 주체90(2001)년 1월 3일 서거. 항일혁명렬사임.

 

홍 춘 수

1894년 2월 29일 출생. 해방전 중국 밀산현에서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에 참가. 해방후 연변에서 경위련대 정치주임, 독립4련대 정치주임으로 동북해방전쟁에 참가. 그후 조국해방전쟁시기 인민군대에 복무하고 광성영예군인학교 교장으로 사업하다가 주체56(1967)년 6월 12일 서거. 항일혁명렬사임.

 

보안련대가 조직되자 연길시내의 사회질서가 세워졌다.

일시 혼잡된 틈을 리용하여 국민당패거리들이 내붙였던 국민당간판도 없어지고 밤에 총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였다.

룡정시에서는 8.15전부터 전윤필이 조직하였던 룡정무장대(후에 룡정별동대)가 발전하여 1945년 11월 말경에는 룡정 경비련대로 강화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제가 패망하기 전인 주체33(1944)년초 룡정지하혁명조직에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 책임자 홍춘수를 파견하시여 일제와의 최후결전준비를 위한 조직사업을 직접 이끌어주시였으며 그후 이 조직에서 무장대를 꾸릴 준비가 되자 주체34(1945)년 7월에는 홍춘수, 박광선에게 무장부대를 어떻게 조직하며 일단 유사시에 그 대오를 어떻게 확장하며 적들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고 룡정으로 또다시 파견하시였다.

 

조선인들로 조직된 《룡정별동대》 (1945년 8월)

 

전 윤 필

1906년 2월 17일 출생. 해방전 일본과 중국등지에서 반일투쟁에 참가. 10여년간 감옥생활을 하고 주체34(1945)년 2월부터 중국 연길현 룡정에서 반일투쟁에 참가. 해방후 강건, 박락권과 함께 룡정에서 경비대 조직. 길동보안사령부 부사령원으로 동북해방전쟁에 참가. 그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와 당시 내무성의 중요직책에서 사업하다가 주체60(1971)년 6월 19일서거. 반일애국렬사임.

 

룡정무장대는 일제침략자들을 타승하는 결전에서 큰 승리를 이룩하였으며 일제패망후 새로운 정세가 조성된 시기 또다시 위대한 수령님께서 파견해주신 강건을 비롯한 조선인민혁명군 군사정치간부들의 지도밑에 자기 대오를 더욱 확대강화하고 이름을 별동대라고 한 후 《항장원화》의 길에 들어섰다. (《항장원화》란 장개석을 반대하여 투쟁하고 중국인민을 돕는다는 뜻이다.)

룡정별동대인원은 처음에는 약 80명정도였으나 곧 500명으로 늘어났다. 별동대의 대장은 전윤필이였고 정치책임자는 정두환이였으며 참모부책임자는 김중산, 부대장은 김동우였다.

한편 룡정별동대의 대장 전윤필은 정무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산하에 경비분대를 두었다. 이 경비분대에는 인원이 매우 많았다.

경비분대 분대장은 일제시기 경찰서 부서장을 하던자였고 부분대장은 별동대의 정치책임자 정두환이 겸임하였다. 정두환이 여기에 들어간 목적은 룡정공안국이 가지고있는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룡정별동대는 절반인원밖에 무장을 갖추지 못하고있었다.

8.15직후 국민당은 조선사람들과 중국사람들간의 리간을 조성시키고 조선사람들의 혁명적기세를 누르기 위해 반동적인 중국인지식인들과 일제시기 경찰에 복무하던자들, 룡정공안국에 복무하던자들을 규합하여 《치안유지대》라는것을 만들고 룡정시를 장악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정두환은 조선청년 40여명과 함께 경비분대에 들어가 분대장이란자와 련결되여있는 《치안유지대》의 룡정공안국을 비롯하여 이자들의 무장조직이 가지고있는 무기들을 전부 탈취할 기회를 찾고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강건일행이 연변지구에 도착하자 정두환은 이 사실을 그에게 보고하고 차후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놈들과 큰 무장충돌을 일으킬수 있는 정세가 조성되였다.

강건은 일이 이렇게 되자 비상대책을 취하였다. 그는 룡정시내에 있는 전체 무장성원들을 다 한자리에 모이게 하였다. 그 자리에는 《치안유지대》를 비롯한 반동단체의 무장대까지 다 모였다. 강건은 무장대를 다 정렬시켜놓고 모두에게 치안유지 하나 제대로 못하고 옥신각신하고있다고 되게 다불러댄 다음 무장대오를 다시 조직하겠다고 선포하고 일체 무장을 해제하여 자동차에 싣고 연길로 떠나갔다.

이렇게 하여 반동들이 가지고있던 무장도 다 회수할수 있었다.

강건은 그날 저녁 연길에 가서 전화로 전윤필에게 자동차로 실어온 무기를 다 룡정별동대에서 가져가도록 지시하였다.

이튿날 전윤필은 연길에 가서 가지고온 무기를 룡정별동대의 1 000여명의 청년들에게 나누어주고 룡정별동대의 이름을 룡정경비대로 고치였다. 룡정경비대는 박락권(항일혁명투사)의 지도밑에 치안유지와 반혁명분자들에 대한 숙청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때로부터 두달이 지나 11월 말경에는 룡정경비대의 력량이 무려 3 000여명에 이르러 룡정경비련대로 발전하게 되였다. 룡정경비련대의 련대장은 전윤필이였고 정치책임자는 정두환, 정치부책임자는 최창은, 부련대장은 김동우, 참모장은 김중산, 1대대장은 김성룡, 2대대장은 박근춘, 3대대장은 리동무, 두도구중대장은 공정수였다.

왕청현에서는 그곳에 파견된 최운경(최광)이 보안련대를 조직하였다. 최광이 조선인민혁명군에서 파견되여오기 전에 왕청의 반동들은 《적색청년단》이라는 반동단체를 조작하고 팔에 완장까지 끼고 사방을 돌아다니며 공산주의가 나쁘다는 선전을 하면서 갖은 만행을 다하고있었다. 최광은 왕청에 도착한 후 이 사실을 료해하고 경비사령부의 이름으로 이 단체를 해산해버리고 보안련대를 조직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파견하신 항일투사가 와서 부대를 조직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며칠사이에 수천명의 청년들이 자원해왔는데 그 수가 대단하였다. 그들중에는 리순임이와 같이 나어린 처녀들도 있었다.

 

공 정 수

주체10(1921)년 9월 15일 출생. 해방전 중국 의란현에서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에 참가. 해방후 룡정시에 파견되여 길동분구사령부 중대장으로 동북해방전쟁에 참가. 그후 조선인민군의 중요직책에서 사업하다가 주체80(1991)년 11월 9일 서거. 항일혁명 렬사임.

 

최광은 그들로 대대를 조직하고 곧 련대로 확대시켰다. 련대의 인원은 3 500명정도였다.

왕청보안련대 련대장은 최광, 참모장은 김영만, 1대대장은 김양춘(항일혁명투사), 2대대장은 최덕무(반일애국렬사), 3대대장은 박영춘이였다.

훈춘현에서는 남만우가 《보국대》로 끌려갔던 돈화, 교화지방의 청년 500명을 데리고 강건의 지시로 한창봉(항일혁명투사)과 함께 훈춘에 가서 거기에 있던 지병학(항일혁명투사)과 토의하고 훈춘보안련대를 조직하였다. 인원은 2 000명 정도였다. 훈춘보안련대 련대장은 지병학, 정치위원은 한창봉, 정치주임은 전홍문, 참모장은 남만우였다.

화룡현에서는 지주 리영춘의 반혁명적책동으로 매우 간고하게 무장대를 조직하게 되였다.

화룡현에 파견된 박근식(반일애국렬사)과 남운학이 여기서 지하혁명활동을 하던 김창일, 최운학, 김정, 김병철과 토의하고 그들과 함께 무장부대를 조직하기 위하여 선발된 200여명의 청년들을 이끌고 화룡과 남면에 갔다.

이들은 여기에서 9월 30일에 1만명이 참가하는 경축행사와 시위를 조직하여 인민들을 각성시킨 다음 무장부대조직을 선포할 예정이였다. 그런데 지주 리영춘은 제손아귀에 있는 중국인 무장부대를 사촉하여 화룡읍의 명신총공서앞에까지 온 시위대렬을 향하여 총을 쏘게 하여 그 자리에서 3명을 즉사시키고 7명을 부상시켜 대렬을 해산시켰다. 리영춘은 자기의 무장대를 자동차에 싣고 남면으로 가서 또 7명을 총으로 쏘아죽이고 시위대렬을 해산시켰다.

 

한 창 봉

주체11(1922)년 8월 18일 출생. 해방전 중국 장백현에서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에 참가. 해방후 훈춘보안대 정치책임자로 동북해방전쟁에 참가. 그후 조선인민군의 중요직책에서 사업하다가 주체39(1950)년 11월 30일 전사. 항일혁명렬사임.

 

박 근 식

1906년 11월 7일 출생. 해방전 중국 연길현에서 반일투쟁에 참가. 해방후 길동분구사령부 보안대 제6련대 련대장으로 동북해방전쟁에 참가. 그후 조선인민군의 중요직책에서 사업하다가 주체41(1952)년 2월 17일 전사. 반일애국렬사임.

 

이자가 이렇게 날뛰게 된데는 교묘하게 쏘련군 위수사령관의 동의를 얻었기때문이였다. 이자는 쏘련군 위수사령관을 앞세우고 명신소학교에 나타나 남운학에게 국민당에서 세운 《림시정부》의 승인도 없이 조선사람들이 제마음대로 무장대를 조직하고 소란을 피운다고 호통을 치면서 쏘련군 위수사령관에게 이것은 조중인민의 민족적리간을 조성시키는 행위라고 비난하였다. 그러자 쏘련군 위수사령관은 문제를 계급적립장에서 식별하지 못하고 《림시정부》의 승인밑에 조직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돌아갔다. 이렇게 되여 화룡현에서의 첫 무장대조직계획은 실패하고말았다. 박근식은 이 사실을 연길에 가서 강건에게 보고하였다. 강건은 화룡현의 실태를 료해하고 박락권과 함께 쏘련군의 까츄샤포들을 앞세우고 유격대복장을 한 경위소대와 룡정보안대 300여명을 인솔하고 화룡에 도착하였다.

이 광경을 본 중국인 반동무장대원들은 겁에 질려 무기를 버리고 뿔뿔이 살구멍을 찾았다.

강건은 포들을 시내의 강가에 배치한 후 연길, 룡정에서 온 보안대원들을 데리고 시내에 들어가 북문과 서문, 동문에서 《림시정부》를 공격하여 해산해버리였다. 그리고 지하실에 숨은 리영춘을 체포하였다. 동시에 강건은 쏘련군 위수사령부에 가서 위수사령관을 체포하였다.

그날부터 3일후인 10월 3일 강건은 명신소학교 운동장에서 군중대회를 열고 지주와 반동관료배들의 죄행을 폭로하면서 조중인민은 단결하여 의좋게 살아야 한다고 중국말로 류창하게 연설한 다음 악질지주 리영춘을 군중심판하고 총살하였다.

이것을 본 화룡의 인민들은 혁명적으로 더욱 각성되였으며 무장대를 꾸리는 사업에 적극 나서게 되였다.

그후 박락권이 남아서 연길과 룡정에서 데리고왔던 대원들을 핵심으로 하여 화룡보안련대를 조직하였다. 화룡보안련대는 11월말에는 2 000여명을 망라한 큰 부대로 되였다. 련대장은 박근식, 정치주임은 남운학, 참모장은 최하전, 1대대장은 엄홍석, 2대대장은 김동근(장개석의 특무), 3대대장은최영환이였다.

명월구에서는 일제의 패망후 명월구 명의소학교 교원인 리인환과 한주빈, 주재일(항일혁명투사), 손장산이 주동이 되여 《한국동지회》라는 조선사람들의 조직을 무었다.

그러나 국민당이 일제통치시기의 《협화회》 회장과 일제경찰에 복무하던자들 그리고 각성되지 못한 중국인 청년들로 꾸린 《치안유지회》라는 반동조직성원들에게 일제경찰이 가지고있던 무기를 쥐여주고 선진적으로 나오는 조선청년들을 탄압학살하게 하였기때문에 《한국동지회》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있었다.

이러한 때 강건일행이 연변지구에 도착하였다.

강건이 연길에 왔다는 소식을 듣자 주재일과 한주빈은 강건을 찾아가 명월구의 실태를 보고하였다. 주재일은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한 사람이였고 한주빈도 반일투쟁에 참가하고 8.15후에는 연길현 명월구에서 《한국동지회》의 부위원장사업을 하다가 강건의 지도밑에 《항장원화》의 길에 나선 사람이였다.

 

주 재 일

주체4(1915)년 11월 11일 출생. 해방전 중국 화룡현에서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에 참가. 해방후 연변보안사령부 경비려단 중대정치지도원, 그후 조선인민군에 복무, 방송부문에서 사업하다가 주체74(1985)년 4월 17일 서거. 항일혁명렬사임.

 

강건은 명월구에 가서 가병 100여명씩이나 데리고있던 진수진을 비롯한 7명의 악질분자들을 체포하고 《치안유지회》에서 가지고있던 무기 300여정과 도목구에 있던 《치안대》의 무기 80여정을 회수한 후 군중대회를 조직하였다. 군중대회에서는 변절자를 폭로하고 처단한 다음 명월구 정무위원회와 경비대를 조직하였다.

초대정무위원장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초기혁명활동시기 길림에서 투쟁하실 때 그이의 지도를 받았던 한주빈이였으며 경비대장은 오죽순(항일혁명투사)이였다. 그후 명월구경비대는 약 500명으로 늘어났는데 이때 대대장은 손장산, 정치주임은 오죽순, 중대정치지도원은 주재일, 정무위원회 위원장은 한주빈이였다.

도문시에서는 조선인민혁명군에서 파견된 항일혁명투사 임철에 의하여 1 000여명의 규모로 보안대대가 조직되였는데 대대장은 임철이였다.

조양천에서는 남창수, 리두수들이 강건의 지시로 500명규모의 보안대대를 조직하였다. 대대장은 남창수, 정치주임은 리두수였다.

이와 같이 연변지구에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파견하신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들에 의하여 각지에서 무장대가 조직되고 그들을 통일적으로 지휘할수 있는 길동보안사령부가 조직됨으로써 연변근거지를 믿음직하게 보위할수 있는 무장력이 마련되게 되였다.

이 시기인 11월 중순에 연변지구에는 중국공산당에서 보낸 옹문도를 비롯한 32명의 중국인간부들이 도착하였다.

한편 연안에 있던 박일우, 리익성, 리권무, 전우 등이 와서 500여명의 청년들로 무장부대를 따로 조직하였으며 그 이름을 《조선의용군 제5지대》라고 하고 조양천에 주둔하였다. 이들은 분파적목적밑에 연변지구의 모든 조선인부대들은 《조선독립동맹》산하에 뭉치라는 포고문을 낸 후 연변지구의 모든 조선인부대들은 조선의용군 제5지대에 속한다고 일방적인 선포까지 하였다.

강건은 실태를 위대한 수령님께 보고드리고 그이의 전략전술적방침에 따라 연변지구에 조성된 새로운 정황을 고려하여 부대를 전면적으로 개편하였다.

 

남 창 수

주체2(1913)년 2월 11일 출생. 해방전 중국 화룡현에서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에 참가. 해방후 길동분구사령부 보안대 2련대 련대장으로 동북해방전쟁에 참가. 그후 조선인민군에 입대하여 주체39(1950)년 10월 10일 전사. 항일혁명렬사임.

 

리 두 수

주체4(1915)년 1월 3일 출생. 해방전 중국 연길현에서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에 참가. 해방후 중국 연길현 조양천보안대 중대장, 대대장으로 동북해방전쟁에 참가. 그후 조선인민군의 중요직책에서 사업하다 가 주체83(1994)년 2월 4일 서거. 항일혁명렬사임.

 

부대를 전면적으로 개편한데는 두가지 목적이 있었다. 그 하나는 부대의 규모가 확장되였기때문에 그 지휘체계를 그에 맞게 개편함으로써 부대의 전투력과 기동력, 통일적인 지휘를 보장하려는데 있었다. 다른 하나는 중국공산당에서 파견되여 온 간부들과의 관계를 조절하고 박일우의 분파적행동을 방지하며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들이 이끄는 부대와 중국인부대 그리고 기타 여러 부대의 통일적인 행동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중국인간부들이 연변지구로 오다가 돈화에서 국민당군대에 체포된 일이 있었다. 이 소식을 보고받은 강건은 쏘련군대 대원들을 인솔하고 돈화에 가서 그들을 구출해왔다.

이 사건이 있은 후 강건은 룡정에서 부련대장을 하던 김동우를 련대장으로 등용하고 화룡에 그의 부대를 주둔시키고 박근식부대는 돈화로 이동시켰다. 부대를 조직개편한 다음 길동보안사령부를 길동분구사령부로 명칭을 고치였다.

1945년 9월에 조직된 길동보안사령부는 그 산하에 야전군과 보안대를 두었으며 야전군에는 1련대(연길), 2련대(왕청), 군정대학이 속해있었고 보안대에는 1련대(연길), 2련대 (조양천), 3련대(왕청), 4련대(화룡), 5련대(훈춘), 6련대(돈화), 7련대(룡정, 중국인부대), 8련대(화룡, 중국인부대), 철도보안대대, 안도보안대대, 도문보안대대가 속해있었다.

1945년 11월초에 개편된 길동분구사령부에는 정치부, 참모부와 후방부, 경위련대가 있었고 정치부에는 조직과, 선전과, 간부과와 산하에 보위소대가 있는 서간과가 있었다. 참모부에는 작전과, 통신과, 정찰과, 공병과가 있었고 작전과를 제외한 매 과에 통신중대, 정찰중대, 공병중대가 소속되여있었다. 후방부에는 경제건설과, 관리과, 공급과, 량정과, 재정과, 운수과, 경비소대가 있었다.

길동분구사령원은 강건이고 정치위원은 옹문도(중국인)였다. 부사령원은 전윤필과 구회괴(중국인), 참모장은 리평야(중국인)였다. 후방부 부사령 겸 재정과장은 정두환이였고 통신과장은 김룡하, 서간과장은 김중산, 경제건설과장은 한주빈, 량정과장은 지광겸, 관리과장은 최병건이였다.

야전군 1련대장은 박락권, 2련대장은 최광, 보안대 1련대장은 한범, 2련대장은 남창수, 3련대장은 최광, 4련대장은 김동우, 5련대장은 지병학, 6련대장은 박근식, 7,8련대 련대장은 중국인들이였다. 철도보안대대장은 남만우, 도문보안대대장은 임철이였다.

부대규모를 보면 야전군은 8 000명, 보안련대는 1만 6 000명정도였으며 포병 및 보안대대는 3 000명, 군정간부학교 학생은 1 000명정도였다.

길동분구사령부에는 기본부대외에도 폭약제조소, 무기수리소를 비롯한 군수공장들이 있었다. 여기서는 자동차를 개조하여 장갑차도 만들고 일본제땅크도 수리하였다.

중국출판물자료에 의하면 길동분구사령부산하에는 경비(야전군) 제1, 2려단, 연길, 왕청, 훈춘, 화룡, 안도, 돈화 등 7개 현의 보안련대와 한개 포병대대가 배속되여있었는데 그 인원은 무려 2만 8 000여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들은 무장대를 강화발전시키면서 그에 요구되는 군사정치간부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1946년 1월초 연길에 길동군정대학을 창설하였다. 이 대학은 연변지구만이 아니라 길동지구 청년군정간부들을 양성하는 군사학교였다. 길동군정대학 교장은 강건이 겸임하였다.

 

한 주 빈

1908년 7월 30일 출생. 해방전 중국 길림, 할빈일대에서 반일투쟁에 참가. 해방후 연변지구민주대동맹 명월구정무위원장으로 동북해방전쟁에 참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와 국가계획위원회에서 사업. 조국해방전쟁시기 전선사령부 피복부장으로 사업. 주체73(1984)년 5월 8일 서거. 반일애국렬사임.

 

임 철

주체3(1914)년 12월 27일 출생. 해방전 중국 훈춘현에서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에 참가. 해방후 동북민주련군 독립 3련대 대대장으로 동북해방전쟁에 참가. 그후 조선인민군의 중요직책에서 사업. 주체90(2001)년 4월 24일 서거. 항일혁명렬사임.

 

군정대학에서는 한기에 500명정도의 우수한 조중인민의 아들딸들을 받아들여 군사정치교육을 하였다. 후에는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로 이름을 바꾸고 동북해방전쟁 전기간에 3 700여명의 군정간부들을 양성하였는데 그가운데 조선사람이 2 520명이였다. 이들은 동북해방전쟁승리와 전국을 해방하는 전쟁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정규적인 무장대와 함께 반군사조직을 꾸리는 문제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높이 받들고 파견원들은 연변지구 도처에 지역별, 조직별로 되는 여러가지 명칭의 반군사조직들을 꾸리였다. 공안대, 무장민병 등 반군사조직에 참가한 연변지구의 조선청년들은 무려 12만명이나 되였다.

이렇듯 연변지구에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정규무력을 1만~2만명만 꾸려놓으면 연변근거지를 적들로부터 사수할수 있고 이 지방을 근거지로 하여 적들을 패망에로 몰아넣을수 있다고 하신 교시를 빛나게 관철하였다.

연변지구에서 근거지를 튼튼히 다지기 위한 첫걸음으로 강력한 무장대오가 결성되자 다른 지구에서도 무장대조직이 활발히 벌어졌다.

1945년 10월 목단강지구에 파견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들에 의하여 1 500여명의 조선인청장년들로 목단강군구 14련대 3대대와 15련대 3대대가 조직되였고 그해 11월에는 16련대, 17련대를 조직하였는데 매 련대의 3대대는 조선인부대였다. 그 규모는 약 900명정도였다. 목단강지구의 조선인부대들은 목단강군구사령부의 지시와 함께 강건의 지시도 동시에 받았다.

 

박 정 덕

주체7(1918)년 9월 12일 출생. 해방전 국내와 중국에서 반일투쟁에 참가. 해방후 동북민주련군 제491사단 참모장으로 동북해방전쟁에 참가. 그후 중앙보안간부학교를 거쳐 조선인민군 전선사령부 참모장으로 사업하다가 주체 41(1952)년 10월 11일 전사. 반일애국렬사임.

 

남만지방에서는 박정덕과 8.15전부터 투쟁을 하던 최영환에 의하여 1945년 10월경에 한개 대대가 조직되였으며 10월말에는 한개 사단의 력량으로 자라나 부대명칭을 리홍광지대라고 불렀다.

이때 우리 나라 평안북도에서 수천명의 조선청년들이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들고 중국에 건너가서 리홍광지대에 망라되였다.[이 부대가 후에 동북민주련군 독립4사로 되였다가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로 되였으며 주체38(1949)년 7월에 조선에 나와 조선인민군 제6사로 되였다.]

할빈지구에서는 1945년 9월 25일에 600여명의 청년들로 할빈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를 조직하였다가 11월 25일에 《조선의용군 제3지대》로 개편하였다. 그때 인원은 1 000여명이였다. 그후 1946년 4월에는 부대를 4 000여명까지 확장 하여 사단으로 개편하였다.

길림에서는 조선인민혁명군에서 파견된 최용건의 지시로 조선사람 500여명을 모체로 길림군구 72련대를 조직하고 강건과의 련계밑에 송무선이 련대장을 하였다.

이밖에도 교하, 서란 등 조선사람들이 많이 살고있는 현소재지들마다에 조선인대대가 조직되였으며 수많은 조선인부락들에도 무장부대가 조직되여 동북 각지에서 투쟁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고록 《세기와더불어》에서 동북항일련군의 전우들에 대하여 뜨겁게 회고하시면서 그 당시 동북땅에서는 항일유격대출신의 우수한 군정간부들인 강건, 박락권, 최광을 비롯하여 25만명에 달하는 조선청년들이 동북해방전쟁에 직접 참가하고있었다고 교시하시였다.

 

송 무 선

1908년 2월 15일 출생. 해방전 중국 영길현에서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에 참가. 해방후 동북민주련군 72련대 련대장 으로 동북해방전쟁에 참가. 연변 조선족자치주 인민반항공위원회 반항공실주임. 그후 평양시에서 수원지관리소 부지배인을 하다가 주체72(1983)년 4월 8일 서거. 항일혁명렬사임.

 

1948년말 주보중이 작성한 37개 사단의 부대구성명단에는 12만명의 조선사람들의 이름이 들어있었으며 1945년 8월부터 1948년까지 기간에 조선사람들이 희생된 수가 수만명이 되고 동북해방전쟁기간 연변에 있는 조선사람 연 20여만명이 전선지원에 나갔으며 일부 회상자들의 말에 의하면 사평전투에서만도 수만여명의 조선사람들이 희생되였다고 한다.

동북지방에서 조선인부대들의 지휘체계는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에 따라 1945년 9월부터 1946년 8월까지는 강건이 책임지고 지휘하였으며 1946년 9월부터는 목단강지구에 파견되여 군구정치위원을 하던 파견원이 연길에 와서 강건의 사업을 인계받아 일하였고 1948년초 동북민주련군이 동북인민해방군으로 개편된 다음부터는 조선인부대들이 중국인부대의 종대(군단급) 또는 사단과 련대들에 배속되여 투쟁하였다.

연변지구가 강력한 무력을 가지게 된 후부터 연변근거지가 더욱 튼튼히 다져졌고 장개석국민당군대를 비롯한 혁명의 원쑤들과 견결히 맞서 싸워 빛나는 승리를 이룩할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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