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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장춘해방전투

1946년 봄에 있은 장춘해방전투후 《중쏘우호동맹조약》에 의하여 국민당군에 다시 장춘을 내준 동북인민해방군은 1948년 4월부터 또다시 장춘을 포위하고 해방전투를 시작하였다.

그 기간에 사평과 금주를 해방하였기때문에 장춘시내에 있는 국민당군은 완전포위에 들게 되였다. 당시 장춘시내에는 장개석국민당군대가 10여만명이나 틀고앉아 철벽의 방어진을 구축하고있었다. 이 병력이면 한개 전쟁도 치를수 있는 력량이였다.

반면에 동북인민해방군은 장춘을 포위하기는 하였으나 수적으로나 무장장비에서 장개석국민당군대와 견줄바가 못되였다. 장개석은 우세한 국민당군이 튼튼한 방어시설을 갖추어놓고 장춘을 타고앉아있기때문에 동북인민해방군의 공격은 불가능한것으로 믿고있었다. 더구나 당시 장개석군대는 이미 저들이 차지하고있던 동북의 주요도시들을 거의다 빼앗겼으므로 장춘만은 끝까지 고수하려고 더욱 발악하였다.

동북인민해방군 사령부에서는 련일 작전회의를 하였으나 전투에 진입할 엄두를 쉽사리 내지 못하고있었다. 이렇게 반년이나 흘렀다.

동북인민해방군에서는 이 사실에 대하여 위대한 수령님께 알려드리고 고견을 요청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이때에도 장춘계선의 실정을 구체적으로 료해하시고나서 한개 포련대를 파견하여 장춘해방전투를 지원하게 하시였다. 그리고 사평이 해방된 조건에서 장춘해방은 시간적문제이다, 전투에서 전면공격을 하여 많은 희생자를 낼것이 아니라 포위진을 물샐틈없이 치고 기만적인 위협공격과 적군와해공작을 면밀히 결합시키며 항일전쟁시기 성시공격전투를 하던 그런 경험을 살려야 한다, 약한 고리에 집중적으로 공격을 들이대여 돌파구를 열어나가면서 점차 적들을 모조리 소탕해버려야 한다는 귀중한 방안을 내놓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방안을 전달받은 동북인민해방군 지휘성원들은 환성을 올리였다.

당시 동북인민해방군은 련전련승하고있었기때문에 전투원들의 사기는 매우 높았지만 반대로 장개석군대는 련전련패에 포위까지 되여있어서 사기가 극히 저락되여있었다. 그렇기때문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투에서 대원들의 사기문제가 매우 중요하다는것을 포착하시고 포위망을 더 조일데 대한 조언을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더우기 길림, 사평, 금주가 해방되였기때문에 장개석군대는 보급선이 차단되여 식량과 군수물자의 공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태였으므로 포위망을 조이면 조일수록 적들의 처지는 더 나빠진다는것을 타산하시였다.

동북인민해방군이 전면공격을 피하고 포위진을 물샐틈없이 치고 조여들어가면서 집중공격을 들이대니 출로는 열리기 시작하였다.

오래동안 포위되여있다나니 장개석의 직계군인 신7군과 운남성에서 온 지방군인 60군사이의 모순이 첨예화되고 온시내에 기아가 휩쓸었다. 기아선상에 놓인 장춘시민들의 불만이 나날이 높아갔다. 게다가 사평지구에서 명성을 떨친 조선인부대들이 전부 장춘에 집결되고 금주까지 빼앗기게 되자 장춘시내의 적들은 공포에 떨고있었다. 해방군편으로 넘어오는 장개석군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바로 이런 기회를 잘 리용하여 적군와해공작을 잘할데 대한 가르치심도 주시였던것이다.

아군부대에서는 정찰병들과 공작원들을 장춘시내에 들여보내여 와해공작을 진행하고 외부에서도 함화공작을 련일 들이대였다.

그러나 악질적인 장교들은 이미 구축해놓은 방어진에 의거하여 어떻게 하나 기회를 봐서 포위를 뚫고나갈 방도를 모색하면서 요소요소에서 반공격도 진행하고 장개석과 련계하여 비행기로 식량과 무기들을 날라오기도 하였다. 아군은 이에 대처하여 더욱 적극적인 와해공작을 들이대는 한편 대공화력을 강화하여 적비행기들의 저공비행을 불허하였다. 적비행기들은 하는수없이 고공에서 식량과 무기, 탄약을 떨어뜨리다나니 그것들이 적들의 손에 들어가지 못하고 대부분 적군과 아군사이나 아군진지에 떨어지군 하였다.

이때 위대한 수령님께서 파견해주신 한개 포병련대가 장춘해방전투를 지원하기 위하여 장춘에 도착하였다. 포병련대의 도착은 장춘해방전투에 참가한 전체 대원들과 지휘성원들의 사기를 더욱 북돋아주었다.

동북인민해방군에서는 조선사람들을 동원하여 적구에 들어가 적군을 랍치하고 적 60군을 끌어당기기 위한 공작을 맹렬히 벌리였다.

당시 소경광은 국민당 60군을 투항시키기 위하여 독립6사 3련대장인 박근식을 적 60군 2련대장과 련계시켜놓고 편지거래와 담판을 여러차례 진행하게 하였다.

소경광은 동북인민해방군 부사령원 겸 길림군구 사령원으로서 전투를 지휘하였다.

박근식련대장은 해방직후 룡정무장대에서 전윤필과 함께 싸우다가 화룡보안련대장, 길동분구 보안련대장을 하다가 이 시기 독립6사 3련대장을 하였다. 그는 이전에 룡정중학교 교장이였으며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이였다. 그는 학식도 있고 군사에도 밝아 국민당 60군을 투항시키는데 적임자로 선출되였다.

련락임무는 박근식련대(조선인련대)의 배성엽이 맡아하였다. 그는 위험한 적후방에 단신으로 말을 타고 공개적으로 들어가 적 60군장에게 보내는 편지를 2련대장에게 전달한 다음 그곳에 들어가있는 아군공작원의 지시를 받아가지고 나오군하였다. 적 60군장의 편지는 박근식련대장을 통하여 소경광에게 전달되군 하였다.

당시 길동지구에서 조직된 독립6사는 장춘의 동쪽계선을 포위하고 독립4사는 서쪽계선을 차지하였으며 독립11사 1련대는 독립4사와 6사사이를 차지하고 독립11사의 2련대와 3련대, 37사는 장춘북쪽의 비행장을 장악함으로써 장춘은 4면으로 3중포위망에 들게 되였다.

장춘에 있는 적군사령관은 정동국(동북지구 국민당군 부총사령)이였고 신7군 군장은 리홍, 60군 군장은 증택생이였다.

아군에서는 적 60군의 군장과는 련계를 가지면서 동남쪽을 봉쇄하고있는 독립11사로 하여금 위협공격을 들이대게 하였다. 이 지역은 적 60군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련대장이 부대를 지휘하고있었다.

독립11사 1련대의 폭파조장 김성현은 대원 2명을 데리고 감쪽같이 적포대에 접근하여 투전놀이를 하던 12명의 국민당군대를 생포하고 포대를 하늘로 날려보냈으며 독립6사의 3련대 폭파조장 리기춘은 조원 5명을 데리고 적의 화점 12개를 련속 까부시였다. 그러다 마지막 화점에 가서 그는 적들에게 발각되여 가슴에 폭약을 안은채 적의 화구를 몸으로 막아 폭파시키고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리하여 리기춘은 동북해방전쟁에서 세번째의 육탄용사로 되였다.(조성두, 김형두, 리기춘 세사람은 모두 육탄용사로 되여 영웅칭호를 수여받았다.)

박근식련대는 리기춘이 목숨으로 개척한 통로를 따라 진격해들어갔다. 바빠맞은 적 60군장 증택생은 10월 18일 자동차에 흰기를 띄우고 나와서 담판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소경광과 독립11사 부사단장 김창덕이 적 60군장과 담판을 하게 되였다.

담판에서는 적들의 요구대로 집에 가겠다는 사람은 집으로 보내고 해방군에 복무하겠다는 사람은 부대에 받아주기로 하였다.

담판의 결과 10월 19일 0시 국민당 60군은 은밀히 아군지역으로 들어오고 그대신 아군의 독립6사와 독립11사 1련대, 독립4사를 비롯하여 한개 종대력량이 60군이 차지하였던 지역으로 들어갔다. 이날 교방사업이 얼마나 은밀히 진행되였던지 적들은 물론 아군의 린접부대들도 전혀 알지 못하였다.

10월 19일 아침, 이런 사정을 전혀 알수 없는 국민당 신7군 참모가 자기의 관할구역이라고 하여 거들먹거리며 나타났다가 체포되였다. 아군은 그를 통하여 신7군의 동태와 무력배치정형을 알아가지고 신7군에 대한 불의의 공격을 들이대였다. 신7군 병사들은 불의의 공격에 당황하여 대항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투항하고말았다.

그러나 신7군 지휘부는 항복하지 않고 중앙은행의 견고한 건물을 차지하고 계속 저항하면서 장개석에게 도주할 비행기를 요구하였다. 장개석은 그들에게 비행기를 보낸것이 아니라 끝까지 싸우라는 명령을 보내였다.

막다른 처지에 빠진 동북지구 국민당군 부총사령 정동국은 아군진지에 대고 몇시간동안 목표도 없이 맹목적인 사격을 한 후 하는수없이 부대를 이끌고 투항하였다.

이리하여 1948년 10월 19일 제2차 장춘해방전투는 승리적으로 결속되고 장춘시는 해방되였다.

아군은 장춘해방전투에서 적 10만여명을 살상포로하고 포를 비롯한 수많은 무기를 로획하였다.

이때부터 공산당군대는 240㎜야포를 비롯한 최신식무기로 무장하고 싸울수 있게 되였다.

해방된 시내에는 국민당돈이 한벌 깔려있었고 집들은 굶어죽은 사람들로 차넘쳤다고 한다. 후에 조사한데 의하면 당시 굶어죽은 사람이 12만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장춘해방전투가 있은 다음 공로를 평가하는 사업이 진행되고 수백명이 참가하는 모범전투원회의가 있었는데 여기에 참가한 80%의 성원이 조선사람들이였다.

이때 중국에서는 소공을 세번 세우면 중공으로, 중공을 세번 세우면 대공으로 평가하고 대공을 세번 받으면 특공이되며 모택동동지의 표창을 주었다. 그리고 대공을 세운 사람에 대해서는 15일간 휴가를 주어 집에 보냈으며 그 가정에 대해서는 부락에서 돈을 모아 돼지, 천을 비롯하여 수많은 물건을 사서 달구지로 실어다주고 꽹과리와 북을 치면서 굉장히 환영해주었다.

《로동신문》 주체37(1948)년 11월 3일부에는 《중국인민해방전의 새 발전》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게재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장춘에서는 국민당 60군 군장 증택생의 령솔하에 3개사단이 붕괴되였다. 이밖에 장춘에서는 장춘국민당 최고지휘관이며 동북지구 국민당군 부총사령인 동시에 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 위원인 정동국이가 자기 부하 다수와 더불어 투항을 하였다.》

《로동신문》 주체37(1948)년 10월 22일부에는 《중국인민해방군 동북지구 제압》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로동신문》 주체37(1948)년 10월 22일부에 실린 기사

《(평양 21일발 조선중앙통신) 남경 20일발 프랑스통신이 전하는 할빈으로부터의 중국인민해방군측 방송에 의하면 중국인민해방군은 동북의 최대도시 장춘을 완전히 점령하였고 장춘수비의 국민당군측 제7군과 제1군 각 부대는 무기를 버리고 투항태세를 취하였다고 한다. 한편 북경 19일발 UP통신에 의하면 장춘을 〈사수〉중이던 국민당 제70사군의 항복의 보고에 접한 봉천 및 그 주변의 국민당군 약 10만은 구장학량친위대 본령인 북대영에 주둔해있는 주력군과 봉천역 부근에 주둔해있는 부대 및 봉천시의 본계호 등지에 있는 부대들과의 사이에 중국인민해방군의 치렬한 공세앞에 투항하느냐 또는 영구방면으로 탈주의 혈로를 타개하느냐의 량론으로 내분중에 있다하며 점점 포위망을 압축하여오는 인민해방군의 공격과 아울러 최근 수일중의 국민당군 운명이 경각에 있다고 한다.

국민당군의 〈사기조장〉차로 봉천선을 항공방문하려던 장개석의 〈시찰행〉도 연기되였다.

그리고 남경발 AP통신에 의하면 최근 국민당정부립법원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화북지구의 패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150만의 군대를 새로 징모할것을 정부에 요구하였는데 여기에 대하여 국민당정부 국방상 하응흠은 500만을 증모한다하더라도 지금의 전국을 전환시키기에는 절대 부족한것이라고 고백하였다 한다.》

장춘해방전투를 지휘하였던 소경광은 이렇게 말하였다.

《조선사람들이 동북해방전쟁시기 특히 장춘해방전투에서 중국력사에 영원히 빛날 커다란 위훈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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