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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해방전투

사평시는 장개석국민당군이 동북에 기여들어 저들의 사령부를 설치하고있던 심양과 장춘, 해룡과 료원을 련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이며 중요한 군사요충지였다.

1947년에 들어서면서 중국공산당군대의 공격이 강화되자 국민당군대는 동북의 광활한 지역들에서 쫓기워 장춘과 심양, 사평, 금주를 비롯한 여러 도시들과 철도를 장악하고 최후발악을 하고있었지만 사실상 이미 아군부대들에 의하여 사면이 포위되여있었다.

사평을 공산당의 수중에 넣는것은 동북에 기여든 국민당군대의 사등뼈를 꺾어놓는것과 같은 의의를 가지였다. 그러므로 국민당군대는 사평을 내주지 않으려고 이곳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어놓고 필사적으로 저항하고있었다.

사평시는 서남쪽에 강이 있고 시내에는 고층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서있으며 주변에는 낮은 산릉선과 계곡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있어 공격하기는 어렵고 방어에는 유리한 곳이였다.

국민당군대는 계곡과 산릉선을 따라 높이 5m, 너비 4m되는 높은 토성을 쌓고 토성우에는 영구화점들을 설치하였다. 토성밖에는 토성을 쌓으면서 파낸 깊은 웅뎅이에 물을 가득 채워넣었고 거기에 또 토성밖으로 철조망과 지뢰, 차단물과 가시덤불 등 장애물들을 200m너비로 둘러쳤으며 시내의 요소마다에는 영구화점들을 구축하여놓았다.

국민당군대는 여기에 살인자로 악명높은 진명인과 그의 동생인 특무단 단장이 지휘하는 71군과 12군을 비롯하여 10여만명의 대병력을 배치하고있었다. 국민당군은 비행기도 100여대나 가지고있었다.

사평해방을 위하여 림표가 동북민주련군의 사령원으로 파견되였으며 사평포위전에 30여만명의 병력이 투입되였다. 당시 1종대, 12종대, 20종대 등 30여만의 병력가운데는 조선사람이 절반이상이나 되였다.

처음에 림표는 동북민주련군의 중국인부대만으로 사평에 대한 공격을 2차에 걸쳐 진행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1947년 6월 중순에 조선인부대들과 함께 다시 공격을 하여 사평시의 2/3를 장악하였다. 당시의 이 전과에 대하여 《로동신문》 주체36(1947)년 7월 2일부는 《사평가총공격》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는데 그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도되여있었다.

《···지난 (6월을 말함) 14일 밤 사평가의 국민당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바 12주야에 걸친 대격전으로 국민당군이 1년나마 점령하고있으면서 완전히 현대화한 많은 보루중 방어진지 6개소를 파괴하고 국민당 두률명군의 진명인병단 71군소속 포병 특무련대, 운수련대, 공병대대와 림시편성된 3사 전부, 87사(한개 련대 결여), 12군의 54사(한개 련대 결여) 료북 보안 1련대, 보안 17련대, 교통경찰총대 등을 소멸하여 71군의 참모장이하 만여명을 살상하고 6 000여명을 포로하였는데 포로자중에는 남경에서 비행기로 온 군관단 183명이 포함되여있었으며 나머지 국민당군은 민주련군이 섬멸중이다. 그리고 이로써 사평가의 대부분은 민주련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공산당군대가 전과를 올렸지만 심양에서 국민당군 5개 사단이 증원해왔기때문에 다시 아군은 사평시를 내주고 17일만에 철수하여 심양과 장춘사이의 도로와 철도를 차단하고 적들을 견제하였다.

《로동신문》 주체36(1947)년 7월 2일부에 실린 보도기사

국민당군대는 사평시내에 포위된 부대들에 비행기로 후방물자를 날라다 공급하는것과 함께 포위를 뚫기 위해 곽가점을 비롯한 아군지역을 련일 폭격하여 막대한 인명피해를 주었다. 아군은 전과를 확대하지 못하였다.

동북민주련군이 사평전투에 진입한것은 1947년 6월 록음이 짙어가는 계절이였으나 장개석국민당군대와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무려 10개월이나 계속되는속에 아군도 손실을 많이 입었다.

그때 이 사평해방전투를 두고 그 간고성과 치렬성, 그 전략적의의에 있어서 제2차 세계대전시기 쓰딸린그라드격전과 같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결코 과언이 아니였다.

동, 서, 남, 북만을 련결하는 주요철도망을 차지하고 대방을 사분오렬시켜 고립시키고 전쟁의 주도권을 쥐자면 기어이 사평을 장악해야 하였으므로 적아가 다 이 전선에서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견고한 방어선에 의거한 국민당군대가 비행대를 동원하여 맹폭격을 들이댔기때문에 공산당군대측에서는 반돌격을 여러번 시도했으나 인명손실만 내고 성과를 거둘수 없었다.

사태는 결정적인 대책을 긴절하게 요구하였으나 신통한 방책도 없었고 아군은 병력과 무장장비를 지원받을데도 없었다.

이러한 때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전화로 사평전투의 실태를 상세히 보고받으시고 조선인부대의 지휘관에게 동북에 있는 전체 조선인부대들과 인민들을 총동원하여 적들에게 숨돌릴 틈을 주지 말고 집중적인 공격을 들이대여 사평해방전투를 빨리 결속하도록 대책을 취해주시였다.

그전까지 조선인부대들이 사평해방전투에 참가하였으나 주로 심양, 장춘의 장개석군대의 증원부대를 격퇴하는 작전에 인입되였던것이다.

조선인부대 지휘관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취하신 조치를 동북민주련군에 전달하고 동북지방에서 활동하고있던 모든 조선인부대들이 다 사평으로 모이게 하였다.

이때 사평지구에 있던 조선사람들만이 아니라 멀리 연변지구의 조선사람들까지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이 계셨다고 하면서 담가대와 치료대까지 무어가지고 사평으로 모여들었는데 그 바람에 사평지구는 조선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였다.

당시 국민당군대내에서는 조선인부대라면 위대한 수령님의 존함을 부르면서 《축지법》을 쓰는 사람들이기때문에 무조건 저들이 죽는다고 생각하고 말만 들어도 벌벌 떨고있었다.

그런데 김일성장군님께서 사평전투를 결속할데 대한 말씀이 계시여 동북의 조선사람들이 다 모여들게 되자 적들은 공포에 질려 어쩔바를 몰랐다.

사평전투에 참가한 조중전투원들의 사기는 고조되였다.

동북인민해방군은 신심에 넘쳐 1948년 3월 최후공격전을 개시하였다.

사평전투에서 모든 전투원들이 다 잘 싸웠지만 특히 조선인대원들이 대오의 앞장에 서서 불굴의 투쟁정신과 높은 희생성을 발휘하여 전투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가운데서도 조선인공병들이 큰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수십명의 희생을 내면서도 주저하지도 동요하지도 않고 첫조가 실패하면 둘째조가, 둘째조가 쓰러지면 셋째조가 련이어 적진에 육박하여 적들의 견고한 방어시설들을 까부시고 공격의 돌파구를 열었다.

그가운데는 우리 나라에서 만들어 보낸 황색폭약을 안고 육탄이 되여 적의 화구를 막아 부대의 진격로를 연 김형두도 있었다.

김형두는 조성두에 이어 동북해방전쟁에서 배출된 두번째 육탄영웅이다.

이 전투에서는 공산당군대가 인민들이 받는 피해를 적게하기 위해 쓰지 않던 포들까지 총동원하여 일제사격으로 적들의 토성을 까부시였으며 곳곳에 설치한 적중기화점들은 조선인부대 전투원들이 김형두처럼 화약을 안고 희생적으로 달려가 폭파시키군 하였다.

총공격을 개시한지 2일만에 적 71군 군장이 도망치고 사평은 3월 13일에 완전히 해방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의도대로 동북의 전체 조선인부대들이 총동원되여 일격에 적들을 소멸함으로써 적들은 혼비백산하여 사평에서 손을 들고말았다. 사평해방전투에서 사등뼈가 부러진 장개석군대는 더는 춰설수 없게 되였다.

이 전투에서 국민당군대 2만여명을 살상하고 4만여명을 포로하였으며 나머지는 저들의 총사령부가 있는 심양으로 달아났다.

사평전투에서 아군은 수백문의 포를 비롯한 막대한 무기를 로획하였다.

그중 어느 한 부대는 심양계선에서 지원해오는 적들을 포위섬멸하고 자동차만 해도 150여대를 로획하였으나 운전수가 없어 다 불태워버린 사실도 있었다.

사평해방전투의 승리는 동북해방전쟁과 중국의 제3차 국내혁명전쟁에서 공산당군대의 완전승리를 예고하는 신호로 되였다.

사평해방전투를 통하여 조선사람들의 용감성과 희생성이 얼마나 높은가 하는것이 다시금 시위되였다.

사평전투에서 희생된 조선사람들의 수는 무려 수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적의 포대를 까부시려 폭약을 안고 달려나갔다가 적탄에 희생된 조선사람들만 해도 수십명에 달하였다.

이 전투후 장개석국민당군대내에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고 조선사람들에 대한 공포심이 더욱 커지게 되였다.

사평전투에서 승리한 후 당시 동북인민해방군 총사령원은 사평전투를 승리로 결속하도록 고견을 주시고 아낌없는 지원을 주신 위대한 수령님께 감사의 표시로 높은 신뢰와 존경을 담아 좁쌀 10만t과 흥안령산 수달피로 만든 외투와 사자털돗자리를 선물로 드리였다.

이 선물에 대하여 당시 동북민주련군의 한 지휘성원은 자기의 글에서 《동북해방전쟁기간에 민주련군지휘성원들이 김일성주석께 흥안령산 수달피외투와 사자털돗자리를 선물로 삼가 드린것은 조선속담에 있는것처럼 머리칼을 베여 신이라도 삼아 그분께 보은하고싶은 우리의 심중을 표시하기 위한것이였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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