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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잡혀진 《정풍운동》

중국 동북해방전쟁기간 장개석국민당군대와의 싸움에서만 어려운 고비가 있은것이 아니라 대오내에서도 참기 어려운 시련이 있었다.

1947년 3월 동북해방전쟁에서 중국공산당이 수세에서 벗어나 공세에로 넘어가던 시기 즉 2차 림강보위전투가 끝난 이후에 일부 일군들의 그릇된 처사로 하여 매우 복잡한 정세가 조성되였다.

동북지방의 일부 해방지역들의 조선인학교들에서 조선말로 교육하는것을 금지시키는가 하면 조선인지휘성원들을 중국인지휘성원들과 동등하게 대하지 않고 마구 해임철직시켰으며 농촌에서는 지난날 밥술이나 뜨던 조선사람들에 대해서 그가 항일렬사유가족이건 누구이건 관계없이 가산을 다 빼앗고 마구 내쫓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렇게 되자 조선인부대와 조선사람들속에서는 이제는 다 집어치우고 조선에 나가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중국인들과 싸우고 서로 적대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중국공산당에서 조선인지휘관들에게 사정도 하고 중국혁명을 계속 도와줄데 대한 해설사업을 진행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장개석국민당군대를 제압하고 바야흐로 총반공격전에로 넘어갈 준비를 하고있던 이때 혁명대오내부에서 벌어진 이런 사태는 혁명력량을 약화시키고 해방지역을 튼튼히 다질수 없게 할뿐아니라 혁명 그자체를 말아먹을수 있는 매우 위태로운 일이였다.

이 사태를 수습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장차 동북민주련군을 강화하는데서나 해방지역을 사수하는데서 돌이킬수 없는 후과를 초래할수 있었다.

중국공산당에서는 이 사태를 자체의 힘으로 바로잡으려고 하였으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북의 정세와 조선사람들의 사상동향을 통찰하시고 당시 길동분구사령원을 부르시여 보고를 청취하시였다.

그 일군은 일부 해방지역들에 조성된 비정상적인 정세로하여 조선인부대안에서 이제는 더 싸우지 않고 조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현상이 나타나고있는데 수습하기 힘들다고 보고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보고를 다 들으신 후 중국 동북지방에서 싸우고있는 동무들이 아직도 우리 당의 의도를 잘 모르고있는것 같다, 중국 동북지방에서 싸우고있는 동무들이 조국에 돌아와 군대에 복무하겠다는것은 자기 조국에 대한 열렬한 애국심에서 출발한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동북해방전투임무를 집어던지고 당장 조선에 뛰여나오는 식으로 해서는 안된다, 물론 나는 동무들의 그 애국심을 높이 평가한다, 조선사람들에게 바로 그러한 애국심과 민족정신이 있고 특히 동북지방에서 살고있는 조선사람들은 일찌기 항일무장투쟁의 영향밑에 혁명의식이 자라났으며 일제와 장개석도당의 만행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였기때문에 모두가 손에 총을 잡고 떨쳐나서 몇배나 되는 국민당의 진격을 저지시키고 놈들을 수세에 몰아넣을수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 동무들이 전투에서 발휘한 용감성과 희생성, 달성한 전과와 공로들은 중국인부대의 지휘관들과 병사들에게 고무적힘으로 되였으며 우리 조선인민들의 커다란 자랑으로 되였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동무들이 중국혁명에서 손을 떼고 조선에 나오겠다고 하는것은 사상적으로 볼때 나쁘다고만 할수 없는 문제다, 우리 동무들이 조국에 나오겠다고 하는데 대해서 민족본위주의라고 때려서는 안되며 그것을 높은 애국심으로 보고 평가해주어야 한다, 그러면서 일부 동무들처럼 문제를 너무 한곬으로 생각하면서 중국 동북해방전쟁을 승리적으로 끝내기 전에 당장 조국으로 나오겠다고 억지를 쓰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동북해방전쟁을 도와주는것이 결국은 조선혁명을 위한것이며 그것이 곧 우리의 애국심의 표현으로 되기때문이라고 깨우쳐주시였다.

계속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지금 장개석도당이 동무들에게서 된타격을 받고 일본놈들을 고용병으로 끌어들이며 조중인민들사이에 리간을 조성시키려고 획책하고있다고 하시면서 장개석도당이 조선사람들을 자기 편에 끌어당기기 위하여 조선의 민족주의세력들까지 규합하여 회유정책을 쓰고있는 조건에서 잘못하다가는 계급적적개심보다도 민족배타주의적 감정이 전면에 나설수 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중국혁명에 어떤 후과를 미치겠는가 하는것을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심중히 고려해야 하며 이에 대하여 응당한 주의를 돌려야 한다고 가르치시였다.

이어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중인민들간에 조성된 민족배타적감정을 바로잡기 위하여 앞으로 중국동지들과도 이야기하겠다고 하시며 동무는 우선 군대내에서 우리 동무들에게 중국혁명이자 조선혁명이기때문에 지금까지 잘 싸운것처럼 앞으로도 동북해방전쟁에서 계속 주력으로 활동하여야 한다는것과 동북해방전쟁에서 꼭 승리하고 조선에 나와야 한다는것을 잘 말해주어야 한다고 다시금 강조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부 중국지휘관들이 협애하게 나오는데 대해서도 그것이 중국공산당의 지시를 받고 그런것이 아니라 일부 개별적일군들이 지금 달성한 성과에 자만자족하면서 민족주의적사고방식에 사로잡혀 무분별하게 행동하는 일시적현상이라는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시였다.

그 일군은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받아안고 동북에 들어가 전체 조선인부대에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전달하고 학습하게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는 조선인부대들에 그대로 침투되였으며 당과 각계층 조직들에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에 대한 학습을 통하여 모든 지휘성원들과 대원들이 동북해방전쟁에 끝까지 참가하여 잘 싸우고 조국으로 돌아갈것을 굳게 마음다지도록 하였다.

한편 동북지구 해방지역들에서는 극좌적인 《정풍운동》을 바로잡기 위한 된바람이 불었다.

중국공산당에서는 이 난국을 수습하기 위하여 주보중을 위대한 수령님께 보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보중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위임에 의하여 조선에 찾아온다는 련락을 받으시자 동북해방전쟁을 하고있는 속에서 그가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게 하시려고 친히 남양까지 가시여 마중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6(1947)년 3월 26일 새벽에 기차에서 내리시여 그 길로 남양의 국경려관에 가시였다. 주보중은 도문에서 남양교두로 넘어와 위대한 수령님과 상봉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해전에 남양에서 만나신 주보중의 손을 잡으시고 그동안 동북해방전쟁에서 많은 성과가 있었다고 높이 평가하시였다.

주보중은 그이의 말씀에 아닙니다, 김일성동지께서 우리의 작전을 지휘해주시고 물심량면으로 도와주시였기때문에 우리가 성과를 거둘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위대한 수령님께 다시한번 동북인민의 이름으로 감사를 드리였다. 그러면서 주보중은 현재 연변을 비롯한 동북지구에서 일어나고있는 사태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였다. 나중에 주보중은 현사태를 수습하고 동북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 친히 키워오신 항일투사를 연변지구에 보내주실것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은 주보중의 의견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요구였다. 당시 동북국사업에 관여한 류소기도 위대한 수령님께 조선의 투사를 연변지구에 보내주실것을 간청하여 명주천에 쓴 친서를 정중히 보내여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깊이 생각하시다가 연변태생이고 연변지구에서 지하공작도 하고 무장투쟁에도 참가하였으며 동만실정에 밝은 림춘추동무가 좋을것이라고 하시며 그를 파견하기로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신께서도 동북의 실정을 알고있는데 우리 힘을 합쳐 제기된 문제를 풀어보자고 하시였다.

당시를 회상하여 중국공산당 동북국에서 사업한 당천제는 《항일전쟁시기에 이어서 해방후의 다사다난한 정국을 지략과 담력으로 주도해나가시며 인간애로 충만된 정치로 만인을 단합시키는 주석동지께서만이 여의치 못한 동만의 형세도 바로잡을수 있다는것이 우리의 확신이였다.》고 하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보중과 점심식사를 같이 하시고 그가 다시 남양교두로 해서 두만강을 넘어갈 때까지 차후 동북해방전쟁에서 제기될수 있는 정치, 군사, 경제문제들에 대하여서도 구체적인 조언을 주시고 더 많은 물자들을 지원해주겠다고 말씀하시였다.

남양을 떠나는 주보중의 가슴은 탁 트이였다.

그후에도 주보중은 1948년 가을에 안해인 왕일지와 딸 주위를 데리고 길림성부주석 겸 동북군구 부사령원의 자격으로 우리 나라에 나와 또다시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웠다.

당시 주보중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동북해방전쟁을 물심량면으로 적극 도와준것이 너무 고마와 사의를 표시하기 위하여 많은 량의 밀가루를 기차에 싣고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보중가족을 뜨겁게 맞아주시고 동북일대를 해방하는 전쟁에서 정말 수고가 많았다고 하시면서 그의 건강을 념려하시여 치료도 받도록 하시고 금강산에서 휴양도 하도록 해주시였다. 주보중가족이 귀국할 때에는 날씨가 추워진데 맞게 겨울옷도 마련해주시고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일성동지와 다같이 기념사진도 찍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양에서 주보중과 만나 한 약속대로 평안남도당에서 중요사업을 하고있던 림춘추를 소환하여 연변지구로 파견하시였다. 우리 나라에서도 간부가 부족한 때였지만 우리 수령님께서는 서슴없이 자신께서 아끼시던 간부를 보내시였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림춘추가 동북으로 떠나기에 앞서 그와 아침식사를 함께 하시며 조국을 떠나기 서운해하는 그의 마음을 풀어주시면서 연변지구사업과 관련한 중요한 교시를 주시였다.

 

림 춘 추

주체1(1912)년 3월 8일 출생. 해방전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에 참가. 해방후 연변지역 정권기관에서 전원공서 전원, 연변지구당위원회 부서기. 그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 공화국부주석,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위원으로 사업하다가 주체77(1988)년 4월 27일 서거. 항일혁명렬사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지난날 조중인민은 동북산야에서 어깨겯고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싸웠는데 지금 중국동지들의 곤난을 보고만 있을수 없으며 따라서 연변의 사업을 도와주는것은 곧 중국인민의 사업인 동시에 조선동포들의 사업이니 우리는 마땅히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중국에서 싸우고있는 일부 조선사람들이 조국에 나와서 건국사업에 이바지하겠다고 한다는데 그들에 대한 사상사업을 잘하여 중국혁명을 위해 계속 잘 싸우게끔 이끌어주어야 한다고 교시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중국인민들과의 단결을 더욱 강화하고 중국공산당의 령도밑에 정권건설을 비롯한 연변의 제반 건설에 힘쓸뿐아니라 동북해방전쟁승리를 위해 적극 힘써야 한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파괴된 인민경제를 복구하고 인민생활을 안정시키며 조선족의 문화와 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한 사업도 추진시키도록 하라고 가르치시고 동북지방에 흩어져있는 혁명렬사유가족과 유자녀들을 찾아내여 조선에 내보낼데 대한 과업도 주시였다.

림춘추는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높이 받들고 당시 길림성 기관들이 소개되여있던 연길에 가서 주보중과 성당서기를 만나 협의한 후 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는 성당의 요청으로 초기 성정부 민족사무청장의 직무를 맡고 사업하면서 먼저 조선인고급간부반의 《정풍》을 책임지고 편향없이 진행되게 이끌었다. 이로부터 사람들속에서 김일성장군의 특별명령을 받고 온 투사간부가 흑백을 바로 가르고 고깔모자를 씌우지 않고도 복잡한 사람문제를 잘 처리한다는 평가를 받게 되였다.

얼마후인 1948년 3월 27일 림춘추는 연변전원공서 전원으로 중국공산당 연변지구위원회 부서기를 겸임하게 되였다. 그는 연길에서 연 7일간에 걸쳐 강연회를 열고 연설하였다. 내용은 조선민족이 중국형제들과 일치단결하여 모든 난관을 뚫고 동북해방전쟁을 적극 지원하자는것이였다. 그때 많은 조선사람들이 연설을 듣기 위해 멀리 북만에서까지 찾아왔다.

그는 각급 당, 정권기관들에 잠입하였던 일제의 주구, 혁명의 배신자들, 불순이색분자들을 직접 색출제거하고 항일무장투쟁참가자들을 비롯한 핵심들을 간부로 내세웠다. 연길, 도문을 비롯한 각 현의 현장들이 새로 임명된것도 바로 이때였다.

림춘추가 혁명투쟁의 오랜 전통을 가지고있고 대중의 혁명의식수준이 높았던 왕청지구에 나가 당, 정권기관을 정돈하고 이를 본보기로 다른 지역들에서도 따라배우게 한것은 연변지구를 정치사상적으로 강화하는데서 큰 의의를 가지였다.

림춘추의 지휘밑에 연변전원공서는 좌경바람이 빼앗아갔던 중농과 중소기업가들, 혁명가유가족들의 재산을 돌려주었고 살던 고장을 떠나갔던 사람들을 되돌려세워 안착시키고 극빈한 한족사람들을 도와주었다. 이리하여 서로 불신하고 흩어졌던 사람들이 서로 단합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동북해방전쟁이 공격단계에 들어서서 전쟁규모도 커진 조건에서 그는 각지의 기관, 기업소와 학교들에서 군사복무자들을 계속 늘이고 원군사업을 힘차게 벌리며 전선원호를 강화하는데 큰 힘을 넣었다. 그리고 민주선거를 거쳐 토지개혁실시과정에서 선발된 능력있고 신망이 높은 사람들을 기본으로 농촌의 정권기관을 세웠으며 각 현과 향(구)에서도 중국공산당의 령도밑에 각 민족, 각 촌의 대표들의 인민대표회의를 열고 민주선거를 통하여 구, 현인민정부를 세우는 사업도 밀고나갔다.

그는 또한 토지를 분여받은 농민들의 적극성을 발양하여 호조합작운동을 광범히 벌려 농촌에서 생산을 다그치고 농업집단화의 기초를 다지고 중국공산당의 공업정책을 관철하여 여러가지 방법으로 생산을 늘이고 전선의 물질적수요를 보장하기 위한 어려운 사업도 짜고들었다

림춘추는 특히 조선사람들의 민족문화와 교육을 발전시키면서 새 세대 간부들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그는 중국공산당의 지식인정책을 관철하여 문화교육인사들을 안착시켜 일하게 하였고 1949년 봄부터는 연변 각지 농촌과 향마다 소학교, 중학교가 문을 열게 하는 사업도 조직지휘하였다.

한편 교육출판사의 인쇄소를 확대하고 조선족소학교와 중학교교재들을 자체로 편찬출판하여 배포하게 하였다.

1948년 3월에는 연변당정간부학교를 세우고 림춘추자신이 교장을 겸임하면서 기층간부양성사업에 힘썼다.

그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자기를 부르시여 만나주시였을 때 혁명골간을 빨리 양성하라고 하신 교시를 높이 받들고 연변에 민족대학을 세우는 사업을 적극 추진시켰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연변지구에서 민족대학창설사업을 추진하고있다는 림춘추의 보고를 받으시고 대단히 만족해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대학을 하나 창설한다는것이 물론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조국에서의 경험이 보여주는것처럼 광범한 군중의 힘과 지혜를 동원하면 대학창설문제도 능히 해결할수 있습니다. 연변지구에 대학을 내오는 사업을 조국에서도 적극 도와주겠습니다. 애로되는 문제를 교육성을 비롯한 해당 기관에 제기하여야 하겠습니다.》

림춘추는 조국에서 방조를 받는것과 함께 다른 방면으로는 연변과 동북각지의 조선족유지들에게서 기금을 모집하였다. 또한 동일무역회사를 세우고 얻은 자금으로 대학을 세우는 사업을 성과적으로 결속지을수 있었다. 그는 동북각지에 인원들을 파견하여 도서를 구입하여 도서관을 꾸리고 1949년 2월부터 학생모집을 시작하여 수백명의 입학생들로 3월 20일에 연변대학 개학식을 하게 하였다.

그는 병원도 개설하도록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림춘추가 연변에서 사업하는동안 그를 부르기도 하시고 서신을 보내기도 하시며 그의 사업을 구체적으로 지도해주시였으며 그가 맡은 임무를 끝내고 주체 38(1949)년 3월에 귀국한 후에도 연변대학에서 애로되는 거액의 자금과 도서, 자료들을 마련하여 연변대학에 보내주도록 하시였다.

주체38(1949)년 7월에는 연변대학 부총장을 단장으로 하는 교수, 간부 등 7명이 위대한 수령님의 은정으로 김일성종합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들의 경험을 배우고 돌아갔다.

동북민주련군의 한 지휘성원은 이렇게 말하였다.

《실로 우리가 어쩔수 없었던 어려운 일을 맡아 복으로 전환시켜주신 그분의 은공을 세월이 흐른들 어이 잊을수 있을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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