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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해방전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동북해방전쟁의 전국을 내다보시고 제2차 장춘해방전투를 결속하기 전에 금주부터 해방시킬데 대한 작전안을 내놓으시였다.

금주는 동북지방에서 중국관내로 들어가는 관문이기때문에 금주를 동북인민해방군이 장악하면 동북에 들어와있는 장개석국민당군대는 독안에 든 쥐신세가 되게 된다.(1948년 1월부터 동북민주련군을 동북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하였다.)

이미 길림, 사평전투에서 패한 국민당군대가 이제 장춘에서까지 패하면 금주를 통해 관내로 도망칠수 있기때문에 미리 금주를 해방하고 이 물목을 막아놓으면 장개석군대는 오도가도 못하고 포위속에 들어 아우성치게 될것이였다.

그러니 금주를 해방시키면 국민당군대의 증원과 보급로를 끊어놓기때문에 동북해방전쟁을 승리로 종결하는데서 큰 의의를 가지였다. 또한 금주를 해방하면 장춘은 완전포위에 들어가게 될것이였다.

이렇게 금주해방전투는 이모저모로 의의가 큰 전투였다.

사평해방전투가 동북에 기여든 국민당군대의 사등뼈를 꺾어놓은 전투였다면 금주해방전투는 국민당군대의 목을 조이는 전투였다.

국민당군대는 금주계선에 20여만의 대병력을 집결시키였다. 동북인민해방군은 금주전투에 7종대, 10종대, 44군의 주력사단 등을 참가시키였다.

국민당군대는 수적우세를 믿고 영구화된 진지에 의거하여 완강히 저항하였다.

아군은 1948년 10월 13일 적의 사령부를 폭파해버리기 위한 작전을 시작하였다.

그를 위하여 사령부주위에 있는 영구화점까지 200여m나 되는 갱도를 하루밤사이에 파게 하였다. 짧은 시간안에 그것도 대낮처럼 밝은 적의 조명탄밑에서 발각되지 않고 작업을 진척시키자니 부득불 매우 낮은 갱도에서 허리도 펴지 못하고 엎드려 파야 하였다.

아군전사들은 하루밤사이에 매우 어려운 이 작업을 끝내 완수하였다. 손과 발에서는 피가 흘렀다.

이렇게 파놓은 갱도로 해서 적의 지휘부옆에 폭약을 설치하고 돌격신호에 따라 200m밖에서 줄을 당겨 지휘부부터 날려보냈다.

조선인부대들의 참가밑에 국민당군 20여만을 격파한 금주해방전투(1948년 10월)

그다음 네거리마다 영구화점을 만들어놓고 쉴새없이 기관총을 쏘아대고 포탄을 퍼부어대는 적들을 7종대직속 지병학이 지휘하는 조선인포병대대가 보기좋게 까부시기 시작하였다.

이 포병대대는 금주전투에서 총포탄이 비발치는 속으로 포를 끌고들어가 포탄 한발에 적화점 하나씩 까부시는 전과를 올림으로써 적의 화력을 제압하고 부대의 돌격로를 열어놓았다.

10월 14일부터 시작한 금주전투는 31시간만에 아군의 승리로 결속되였다. 금주가 해방되니 동북의 국민당군을 독안에 든 쥐신세로 만들어놓고 답새길수 있게 되였다.

《로동신문》 주체37(1948)년 11월 3일부에 실린 보도기사

이 전투에서 아군은 10만의 적들을 소멸하고 수많은 무기들을 로획하였다.

당시 《로동신문》 주체37(1948)년 11월 3일부에는 《중국인민해방전의 새 발전》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게재하였다.

 

《10월 15일에 해방된 금주는 중요한 철도련락점이며 동북지구국민당군대의 가장 큰 병참기지였다. … 장춘은 10월 19일에 함락되였다. 장춘시 국민당방어군은 봉기한 군대를 제외하고는 금주함락의 직접적결과로 자기들의 퇴로를 잃고 절망에 빠진 나머지 투항을 하고말았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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