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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엽의 동북지구

중국 동북지방은 자연경제적조건이 유리한 지대이다.

그곳에는 높은 산악지대와 비옥한 농토가 펼쳐져있다. 산지에는 홍송, 백송, 가문비나무 등 경제적가치가 높은 수십종의 용재림들이 있고 산삼, 단삼, 단너삼을 비롯한 수백여종의 약용식물들과 송이버섯 등 백여종의 산나물과 산열매들이 자라고있으며 검은담비와 수달, 동북범 등을 비롯한 포유동물들과 꿩을 비롯한 여러 종의 조류들, 담수어들도 많다. 지하자원도 많아 금, 연, 아연 등 금속광물자원이 100여종이나 있고 1940년대 중엽에는 공업도 일정하게 갖추어져 강철과 기계설비, 석탄생산량은 전국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있었다. 면적이나 인구로 볼 때는 전국의 9~10%를 차지하였지만 자원이 풍부하고 일정한 경제력이 갖추어져있어 이곳을 중국의《노란자위》라고 하였다.

일제침략자들이 오래전부터 중국 동북지방을 넘겨다보고 침을 흘리다가 끝내 1931년에 《9.18사변》을 조작하고 여기에 괴뢰《만주국》을 세우게 된 까닭도 군사전략적의의와 함께 이 《노란자위》를 삼키기 위해서였던것이다. 그러나 일제 는 14년만에 패망했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자 중국의 동북지방(이하 동북지방으로 략함)인민들은 목청껏 만세를 불렀다.

동북의 인민들은 갖은 악행으로 인민들을 학살하고 재산을 마구 략탈하던 일본제국주의가 망했으니 이제는 새세상, 인민의 세상이 오리라 믿었던것이다. 그러나 동북땅에는 새로운 전쟁의 불구름이 몰려왔다. 그 장본인은 미제였다.

미제는 중국을 아시아의 중요한 반쏘, 반공기지로 만들기 위하여 일본이 패망하기 전부터 장개석에게 60억US$의 군사적 《 원조 》 를 주고 국민당군대를 반공의 돌격대로 준비시켰다. 미제의 방조밑에 일본의 패망을 전후한 시기 국민당군대는 현대적무기로 무장한 106개 사단에 200여만명의 대군으로 늘어났다. 미국의 군사고문들까지 들어와 이들을 훈련시키느라고 열을 올렸다. 장개석군대는 보병만이 아니라 공군, 해군도 다 갖추었다.

여기에 《중쏘우호동맹조약》까지 체결되여 장개석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였다.

 

※ 장개석은 국민당행정부 행정원장 송자문과 외교부장 왕세걸을 모스크바에 파견하여 1945년 8월 14일에 《 중쏘우호동맹조약 》 을 맺게 하였다. 이 조약은 8월 26일부터 정식 공포발효되였다.

 

이 조약은 쏘련외무상 몰로또브와 국민당 외교부장 왕세걸이 수표하였는데 쏘, 미, 영수뇌자들이 얄따회담에서 비밀리에 약속한 내용을 기본틀거리로 하고있었다.

조약은 평화회복후 호상 주권 및 령토보호를 존중하고 내정불간섭을 준수한다는것을 기본원칙으로 제기하고 조약의 유효기간을 30년간으로 설정하였다.

같은날 쌍방은 동북지방과 관련한 협정문건에 조인하였다.

쏘련은 괴뢰 《 만주국 》 (동북3성)을 중국의 일부로 인정하고 만주에서의 국민당정부의 완전한 주권행사를 존중한다고 하였으며 중국의 국민당측은 대련에서 쏘련의 리익을 보호하고 대련항을 자유무역항으로 하는데 동의하고 장춘철도는 중쏘가 공동으로 관리운영하는것으로 하였다.

조약에는 일본의 항복후 동북지방에서 쏘련군대는 3개월만에 철수하기로 되여있었다.

조약이 이렇게 중국의 장개석측과 쏘련사이에 맺어지게 된것은 그때까지도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하던 시기였고 대외적으로는 장개석이 통치하는 중화민국이 합법적정권으로 행세하고있었던 사정과 관련되여있었다.

이 조약이 체결되자 장개석은 이전부터 노리고있던 중국 동북지방을 몽땅 제 손아귀에 넣기 위한 작전을 벌리였다. 장개석은 중국공산당과 평화담판을 제기하고 1945년 8월말부터 중경에서 담판을 벌려놓았다. 장개석은 평화담판의 막뒤에서 시간을 얻어 이전에 일본군에 쫓기여 서남, 서북 등 각 성들에 피신하여있던 자기의 무력을 화동(산동성, 강소성, 안휘 성, 절강성, 복건성), 화북(하북성, 산서성, 수원성), 동북(길림성, 료녕성, 흑룡강성)지방으로 급속히 이동시켜 큰 도시와 철도들을 다 장악하였다. 특히 동북지방에는 빈수도가(할빈, 수분하, 도문, 가목사) 당무전원으로 후전곤을 파견하고 사문동에게 국민당중앙선견군 보안총사령이라는 임명장을 주게 하였다.

사문동은 항일전쟁시기 동북민주의용군 총사령으로 있었고 그후 동북항일련군 8군장을 하다가 1938년 일제에게 투항 한자였다. 그리고 이전에 항일련군 9군장을 하다가 1938년에 변절한 리화당을 동북정진군 1집단군 사령관, 동북 제6로군 보국군 제5사 사단장, 신27군 8사 사단장으로 임명하였고 마희산을 동북정진군 1려단 려단장으로, 정운봉을 국민당 동 북정진군 총사령으로, 남만지방에는 산상호를, 동만에는 반일부대 련대장을 하다 투항하여 술장사를 하고있던자를 그 지 방의 토비부대 려단장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장개석은 국민당조직을 내오기 위하여 남만에서 활동하던 마영산을 연변지방의 국민당대표로 파견하였고 일본 관동군 제125사단 참모장을 하던 후지다와 련계를 가지고 일제패잔병들을 끌어들여 공산당을 공격할데 대한 지시를 주었다. 국민당군은 패망한 일제침략군이 가지고있던 모든 무기와 군수물자, 철도, 항만 그리고 큰 도시들과 중요한 군사전략상 요충지들을 다 차지하기 위하여 물밀듯이 동북땅으로 쓸어들었으며 일제의 특무망까지도 넘겨받았다.

이 과정에 장개석군대는 430만대군으로 늘어났고 중국 전 인구의 70%에 해당하는 주민지역을 차지하게 되였다.

이리하여 중국공산당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였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장강이북의 산서성, 하북성, 하남성, 산동성일대의 농촌지역들에 해방지구를 꾸리였는데 그 주민수는 불과 중국인구의 30%밖에 되지 않았다.

또한 장개석이 몽땅 먹어치우자고 덤벼든 동북지방에서 중국공산당조직은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난 후 파괴되였던 상태에서 미처 복구되지도 못하고있는 형편이였다. 게다가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군대는 보병밖에 없었으며 보병도 그 무장장비수준이 좋지 못하였다.

수적으로나 기술장비수준에서 비할바없이 우월한 국민당군 대와의 싸움은 공산당군대에 있어서 어려운 시련으로 되였다. 동북땅을 둘러싼 싸움에서 누가 이기는가 하는것은 차후 중국의 정치정세와 아시아의 정치변화에 큰 영향을 미치는 첨예한 문제였다.

조선과 쏘련, 몽골과 린접하여있는 동북지방을 공산당이 차지하면 이미 가지고있던 해방지구와 동북지방을 련결하고 그에 의거해서 장개석군대를 격파할수 있고 우리 나라나 쏘련에도 유리하게 되지만 만일 장개석군대가 차지하게 되면 중국공산당군대가 동북과 남쪽에서 협공을 받을수 있고 동북 지방이 반쏘, 반공기지로 되여 아시아의 정치정세발전에도 불리하게 될것이였다. 따라서 중국 동북땅은 공산당과 국민당간의 대결장으로 되였다.

당시에는 그 어느 나라도, 그 누구도 이 싸움에서 중국공산당이 승리하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하였다.

이 어려운 시기 쏘련은 얄따협정을 준수해야 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시기 련합국으로 되여있던 중화민국과의 관계도 나쁘게 할수 없었기때문에 중국공산당을 도와줄수 없었다.

오직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만이 동북지방의 엄중한 정세를 통찰하시고 중국공산당의 위업을 도와주어야 하겠다는 결심을 내리시였다. 그리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방된 조국으로 개선하시기에 앞서 전반적중국정세와 그 변화추이를 내다보시고 장차 벌어질 동북해방전쟁을 적극 도와줄데 대한 교시를 하시였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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