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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주재 동북국판사처

해방후 우리 인민은 나라의 주인이 되였으나 중국에서는 일제가 패망한 후 미제의 사촉밑에 장개석국민당이 공산당을 반대하는 국내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인민의 정권을 세우기 위한 투쟁은 계속되였다.일부 해방지구에 지방인민정부가 나오기는 하였으나 그것으로는 전동북지방을 대표할수 있는 주권기관으로서의 자격을 가질수가 없었다.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동북국이 유일하게 중국 동북지방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전반을 돌보고있었으나 이 경우도 장개석국민당군대가 점령한 지역은 례외로 되였다.

1946년초 국민당반동들은 미제의 적극적인 지지와 비호밑에 많은 병력과 현대적인 장비에 의거하여 중국의 동북땅을 일거에 집어삼키려고 하였다.

그때 공산당군대는 동북지방에 공고한 근거지도 꾸리지 못했고 지방정권도 미처 조직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많은 위만군패잔병, 토비, 건달군, 망나니, 지어 패망한 일본군잔여세력까지 공산당군대의 대렬내에 끼여들어왔다가 정작 국민당군대가 대대적으로 공격을 시작하자 이 틈을 타서 준동하였으며 4~5만명이나 도주하거나 지어 공산당에서 파견한 간부들과 부대의 골간들을 살해하기까지 하였다.

무순에서는 1개 려단이 국민당군대에 투항했는가 하면 주보중부대에서는 한번에 7 000여명이나 도주, 투항했고 돈화현 보안대에서는 8개 중대가운데서 7개 중대가 투항하고 오직 조선인중대만이 남아있었다. 리운창이 인솔한 부대의 4만여명은 금주에서 철수하여 열하까지 오는 사이에 거의다 도주투항하고 겨우 5 00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

통계에 의하면 합강, 목단강, 송강, 룡강, 눈강에서 투항한 인원은 33만 6 000여명이고 살해된 간부는 154명이나 되였다. 북만의 정세도 크게 변하여 당시 2/3이상의 현과 성을 국민당 반동파들이 장악하고있었다. 이와 동시에 쏘련이 국민당정부와 맺은 《중쏘우호동맹조약》에 따라 동북의 행정권을 국민당에 넘겨주게 되자 중국공산당군대는 하는수없이 심양, 장춘 등 큰 도시들에서 철수하였다.

국민당군이 빠른 속도로 금주, 심양, 장춘, 매하구, 길림, 교하 등의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동남만과 남북만과의 련계를 차단하였으므로 공산당군대는 하는수없이 후방에 있는 단동, 통화지구를 내놓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이렇게 되니 남만의 부상병들과 가족들, 후방인원들이 철수할데가 없어지고말았다.

1946년 국민당군이 중장철도인 심양―장춘의 중요간선을 점령한 후부터 동북의 식량과 석탄, 대련의 식료품과 피복, 의약품과 의료기구들, 공업원료들을 수송하지 못하게 되여 전선과 후방에는 매우 엄중한 정세가 조성되게 되였다.

동북의 교통이 이렇게 허리를 잘리운 상태에서 그 수송대책을 빨리 세우는것이 절박한 요구로 제기되였다.

이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나라 북부지대를 중국 동북의 남만과 북만 그리고 관내와 련결하는 외랑으로 리용할데 대한 은정깊은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중국 동북의 동쪽외랑은 우리 나라이다. 중국 단동으로부터 도문까지 국경연선의 연장길이는 천수백㎞에 달하고 수로로 밀접히 련결되여있다.

중국공산당에서는 동북의 끊어진 도로와 철길들을 대신하여 우리 나라의 도로와 철길들을 리용하여 우리 나라에서 지원하는 각종 물자와 류동하는 중국측의 인원들을 주관하는 일정한 기구가 있어야 하겠다는 필요를 절실히 느끼게 되였다. 그것은 하루이틀이 아니라 전쟁 전기간 우리 나라와 련계를 계속해야 하기때문이였다.

이로부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동북국은 조선의 북부를 통하여 수륙수송통로를 개척하고 인원과 물자의 수송을 보장하며 물자교류를 진행하도록 해줄것을 우리 나라에 제기해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제의를 쾌히 수락하시고 해당한 실무적문제들을 시급히 해결하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나라에 《쏘미공동위원회》가 주재해있고 《얄따협정》이 효력을 내고있는것을 고려하여 우리 나라측과 중국공산당측이 판사기구를 통하여 여러가지 방법을 적절히 배합해가면서 내적으로는 《조선주재 동북국판사처》라고 하고 외적으로는 《평양리민공사》라는 명칭으로 중국의 동북해방작전에서 제기되는 여러가지 물자수송과 인원수송, 물자교류를 진행하는 상설기관을 내오게 하시였다.

중국측에서 주리치와 소경광이 1946년 7월에 평양에 와서 정식으로 《조선주재 동북국판사처》를 조직하였으며 9월에 소경광은 귀국하고 주리치가 이 판사처의 전권대표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였다.

당시 《조선주재 동북국판사처》가 자리잡고있던 곳은 평양시의 차관리(당시) 104번지였다.

판사처의 중요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1) 부상병들의 안전한 철수보장, 전략물자의 안전한 이전 보관, 2) 조선을 외랑으로 하여 동북지구의 남북만련결, 대련과 기타 근거지와의 물자교류, 인원들의 국경통과, 수송보장, 3) 조선으로부터의 지원과 전략물자의 구매, 4) 조중 당과 인민의 우호합작관계의 발전, 경제무역거래보장, 5) 조선과 협동하여 화교들과의 사업진행.

판사처는 비서, 상무(상업업무), 운수, 부기, 총무 등의 기구를 가지고있었고 이 기구의 성원들이 일상적인 사업을 책임지고 진행하였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동북국과는 무전으로 정상적인 련계를 가지였다.

판사처는 1946년 7월부터 1949년 2월까지 존재하면서 자기 사업을 진행하였다.

당시 판사처 지도일군으로서는 문사정, 리사경, 주력, 리반명, 리경천, 예위정이였다. 제광, 이진, 황우년, 양진영, 리문화, 황림, 백옥홍 등은 비서, 상무, 운수, 기요, 부기와 총무사업을 하였다.

조선어와 로어번역원은 강룡구, 서재현, 정성렬, 류문천이 하였다.

사업업무량이 늘어나자 우리 나라의 남포, 신의주, 만포, 라진에 4개의 분판사처를 두고 그 이름은 《평양리민공사 ○○○분공사》라고 하였다.

분판사처의 책임자와 성원들은 모두 동북지구 각 근거지들에서 선발되여왔는데 남포분판사처에서는 주력, 궁화헌, 신의주분판사처에서는 리장경, 왕선성, 만포분판사처에서는 왕작번, 라진분판사처에서는 주홍승, 려량병이 일하였다.

평양판사처의 인원은 100명정도였고 분판사처의 인원은 업무량에 따라 각이하였는데 라진분판사처에는 100여명의 직원과 500여명의 로동자들이 있었다. 분판사처중 이곳에 제일 인원이 많았다.

평양판사처와 분판사처의 임무는 기본적으로 동일했고 일부 분판사처는 소재지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도 하였다.

국경을 넘은 중국관내의 인원과 물자들을 주로 남포에 집중시키고 남만과 북만으로 이동시키는 부상병들과 전략물자들은 주로 신의주와 만포에 집결시켰다. 수송해야 할 식량, 소금, 천, 석탄 등과 일부 국경통과인원들은 주로 라진에 집결시켰다.

중요한 면담과 담판은 기본적으로 평양판사처가 담당수행하였다.

판사처는 공산당군대가 동북의 남만에서 국민당군대의 해방지구에 대한 공격을 막게 하는데서뿐아니라 전동북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거대한 역할을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북이 급한 고비를 넘기도록 일시적으로 몇번의 지원사업이나 조직하신것이 아니라 이 판사처를 통하여 동북해방전쟁의 전기간 끊임없는 지원을 해주시였다.

판사처는 2년반 남짓하게 존재하면서 주로 5가지 방향에서 자기 사업을 진행하였다.

첫째로, 부상병들의 안전한 치료대책과 전략물자의 이전 사업을 하였다.

실례로 국민당군대의 남만공격으로 공산당군대가 단동, 통화에서 철수할 때 1만 8 000여명의 부상병들과 가족, 후방인원들이 우리 나라 경내로 철수하였다. 이때 전략물자의 85%이상을 압록강동쪽대안 우리 나라 경내로 이동시켰다.

둘째로, 물자와 국경을 넘어온 인원들을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물자운반과 인원을 접수하여 국경을 순조롭게 넘겨보내기 위하여 우리 나라의 수로와 륙로의 4개 선을 리용하였다.

하나는 동북의 단동으로부터 신의주, 남양을 거쳐 동북으로 가는 륙로였고 다른 하나는 동북의 통화, 집안으로부터 만포를 경유하여 동북의 도문으로 가는 륙로였으며 이 두 륙로는 우리 나라 북부와 중국 동북의 남만, 북만을 련결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 륙로로 동북해방전쟁 전기간 수많은 전략물자와 인원이 통과하였다.

나머지 2개 통로는 해상수송로였는데 중국 대련과 조선 남포 그리고 대련과 당시의 라진을 련결하는 통로였다. 남포항과 라진항은 겨울에도 얼지 않기때문에 직접 철도와 련결하여 물자들을 운반하기가 매우 편리하였다.

이 수륙통로를 성과적으로 리용하기 위하여 주체35(1946)년 9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중국측과 물자수송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셋째로, 중국측에서 요구하는대로 많은 전략물자들을 구입하여 넘기였다.

실례로 위대한 수령님께 직접 주리치가 요청하여 12차량을, 류아루가 요청하여 24차량을, 주서가 요청하여 110차량의 물자들을 가져갔다.

넷째로, 조중 두 당, 두 인민들사이 우호합작관계를 수립하고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였다.

판사처를 통하여 조중쌍방은 충분한 협상을 거쳐 압록강 공동운행, 중국의 우리 나라 수풍발전소전력사용, 량국간의 우편통신분야에서의 호상합작을 비롯하여 20여가지의 협정들을 체결하였다. 쌍방은 물자대금처리는 무역협정에 따라 1년에 한번씩 하였다.

우리 나라가 중국에 준 물자는 식량, 소금, 무연탄, 수산물과 일용필수품, 의약품, 천, 신발들과 군수물자 등이였다.

판사처는 이외에도 중국혁명가들의 전권대표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물론 중국에 인민의 새 정권이 탄생하기 전이여서 정식 국가간의 관계라고는 할수 없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무런 부대조건도 없이 또 외교관례를 앞세우지 않고 판사처를 정식 국가대표부 못지 않게 존엄있게 대해주시였던것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주체36(1947)년 상반년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동북국 일군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쌍방의 관계는 친밀하고 간격이 없으며 우리들은 모든 힘을 다하여 그들 판사처일군들을 방조한다고 하시였다. 그리고 판사처일군들을 만나주시였을 때에는 중국의 사정이자 곧 우리의 사정이라고 하시며 진심으로 동북해방전쟁을 지원하시였다.

바로 그러하였기때문에 판사처가 자기 임무를 원만히 수행하여 동북해방전쟁에 크게 기여할수 있었던것이다.

조선주재 동북국판사처는 그후 조선주재 중국대사관으로 승격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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