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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통로

군대와 전투기술기재, 후방물자들을 제때에 전선에 보내주고 부상병들과 가족들을 안전한 지대에 소개하자면 수송이 원만해야 한다. 그러나 전쟁시기 적아간에 전진과 후퇴가 엇바꾸어지는 과정에는 응당 아군이 가지고있어야 할 도로를 적이 차지하는 경우도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군대와 탄약, 식량 기타 필요한 모든것의 보장이 차단되고 부대는 난관에 부닥치게 되며 보급로가 풀릴 때까지 견지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괴멸될수도 있다.

때문에 전략적이동통로쟁취는 전쟁에서 승리를 달성할수 있게 하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되는것이다.

한때 동북해방전쟁에서 관내와 동북, 남만과 북만사이의 통로가 장개석국민당군대에 의하여 다 막혀버린 때가 있었다.

이러한 때인 1946년 가을이였다. 료동군구 소화가 지휘하는 부대가 안산과 해성을 점령하려고 공격을 시작하자 거기에 주둔하고있던 장개석국민당군대 184사는 장개석을 반대하여 봉기를 일으키고 공산당군대편으로 넘어오려고 하였다.

184사 사단장 번삭단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받자 장개석은 두률명을 전화로 불러 반기를 드는 부대들은 사정을 보지 말고 없애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두률명의 동북군은 미친듯이 184사에 달려들었다. 두률명은 지상과 공중에서 맹렬한 공격을 들이대여 184사를 압록강가에까지 압축하였다.

부대는 뒤에서 겨누고있는 총구와 앞에 놓인 압록강사이에서 더는 어쩔수없는 진퇴량난에 빠져 운명의 시각을 기다릴수밖에 없게 되였다.

이런 때 주보중은 184사가 구원되는 길은 오직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가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동북국사무소에서 사업하고있는 강환주에게 조선당과 정부지도간부들과 련계를 가지도록 지시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주보중은 반변부대를 구원할 방도를 협의하기 위해 대표들을 연방 우리 나라에 보냈습니다. 왕일지도 그 대표의 한 사람으로 라남에 왔다갔습니다. 그후 우리는 반변부대가 우리 나라 령토를 거쳐 동부만주로 들어갈수 있게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강환주는 라남에 가서 강건을 만나 구원을 요청하였다. 강건은 조선경내로 들어오는 문제는 반드시 위대한 수령님의 비준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강환주는 전보로 동북국에 이에 대하여 알리고 자신은 즉시 평양으로 가서 옛 상급이며 자기의 입당보증인인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려고 하였다.

시간을 다투는 문제였기에 주보중은 당시 동북국사무소에서 일하면서 중국공산당과 조선과의 관계를 많이 다루었으며 국제련합군시기 위대한 수령님과 한부대에 있었던 경력을 가지고있는 자기의 부인 왕일지를 또다시 우리 나라에 보내였다.

강환주와 왕일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강건의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184사를 위하여 우리 나라 문을 열어놓으신 뒤였다.

생사기로에서 헤매다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반변부대성원들은 이제는 살았다고 눈물을 흘리며 죽어도 김일성동지의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184사는 그후 렬차로 매우 빨리 남양에 도착하였고 남양―도문다리를 거쳐 길료해방지구에 가서 주보중 등 군구지도자들과 군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다시 장개석을 반대하는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모택동동지가 진운을 통하여 부탁하였던 문제도 해결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상해에 있던 중국공산당 간부들과 군사인원들을 우리 나라의 남포에 상륙시키고 다시 렬차로 남양에 보내여 할빈으로 들어가게 해주시였으며 소화의 료동군구 지휘관들과 전투원들, 그 가족들이 철수할 때에도 우리 나라를 거쳐 다시 중국 동북지방으로 들어갈수 있게 해주시였다.

장개석군대가 우세한 병력을 리용하여 료녕의 광대한 지역을 점령하여 공산당군대가 장백과 무송의 중간지대에 압착되게 되였을 때였다. 협곡에 압착된 부대에 대한 전략물자보급에서는 엄중한 사태가 조성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주보중은 《북조선의 길을 빌려 수륙수송로를 열고 아군의 전략물자를 긴급히 수송하려 한다.》는 의견을 주어 자기의 안해인 왕일지를 평양에 보냈다.

이 제의 역시 위대한 수령님에 의하여 즉시 해결되였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더라도 주체36(1947)년의 첫 7개월동안 우리 나라에서 운반한 전략물자는 21만여t이였고 주체37(1948)년 한해동안 우리 나라 경내를 통하여 수송한 전략물자가 30만 900여t에 달하였다. 인원은 주체35(1946)년 하반년에 18개의 부대가 우리 나라 경내를 통과했다. 주체36(1947)년 9개월간 우리 나라 경내를 통과하여 동북근거지에 들어간 인원수는 1만여명에 달하였다. 주체37(1948)년에 남양을 경유한 인원만도 약 9 000명이였으며 기타는 우리 나라의 다른 지역을 통과했다. 동시에 새로운 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하기 위하여 당시 적지 않은 민주당과 무당파, 화교대표들도 우리 나라 경내를 경유하여 할빈으로 들어갔다. 그중 저명한 인사들은 심균유, 곽말약 등 수십명이다.

사업상관계로 우리 나라를 경유한 중국공산당 간부들은 주보중, 진운, 소화, 주서, 리부춘, 류아루, 장애평, 한선초, 우약목, 채양, 리립삼, 오수권, 등대원, 한광, 구양흠, 두평, 리일맹, 려동, 하장공 등 수없이 많다.

1947년 진가강이 당시 체스꼬슬로벤스꼬의 수도 쁘라하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할수 있은것도 대련에서 남포에 왔다가 남양으로 해서 할빈을 경유하여 모스크바를 통과하였기때문이다.

특히 지적해야 할것은 정황이 급할 때 우리 나라에서는 려객수송까지 중지하고 중국의 전략물자들을 운반한것이다.

당시 우리 나라 주재 동북국판사처에서 일한 일군은 자기의 회상실기에서 《이 기간 우리들의 수송임무를 도와주기 위하여 평안북도당위원회 부위원장과 함경북도당위원회 부위원장은 사업시간전부를 우리들에게 바쳤다. 이러한 국제주의적 혁명전우애에 대하여 우리는 영원히 잊지 않을것이다.》라고 썼다.

중국 동북땅의 주요 수송로가 장개석국민당군대에 의하여 점령당하고 공산당군대가 리용할수 없었던 시기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처럼 중국공산당이 요구하는대로 우리 나라 문을 다 열어주시고 공산당군대가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시였기 때문에 동북해방전쟁에서 승리의 길이 열리게 되였다.

한편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나라를 동북해방전쟁에서 중국의 후방기지로 리용하도록 하시였다.

후방도 전선이다. 전쟁에서 후방이 없으면 전방도 있을수 없다. 전쟁승리의 관건적요인의 하나는 강력한 후방을 가지고 있는데 있다. 무기와 군수물자, 식량을 보장해주고 부상병들과 환자들을 치료해주며 병력을 보충하고 전략물자를 보관하는 후방은 참으로 그 역할이 크다.

장개석국민당군대의 공격에 의하여 단동이 함락되였을 때 많은 인원들이 신의주로 피신하였는데 미군정보고서에 의하면 그 인원은 1만~2만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그때 주보중은 방금 조선에서 돌아온 안해 왕일지를 다시 평양으로 보내여 위대한 수령님을 찾아가 동북국의 명의로 위대한 수령님께 남만에서 철수하는 군대와 전략물자들을 우리 나라에 소개시켜줄것을 부탁하도록 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그때를 회고하시여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왕일지는 주보중을 대신하여 동북해방작전을 여러모로 도와준데 대하여 감사를 드린다는 인사부터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번에 2만여명의 부상병들과 가족, 후방인원, 2만여t의 전략물자를 안전한곳으로 소개시키자면 아무래도 또 조선땅을 빌려야 할것 같은데 김장군의 도움을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자리에서 그의 요구를 들어주고 즉시 해당한 대책을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왕일지는 전체 동북민중이 김장군의 은혜를 잊지 않을것이라고 하면서 거듭 사의를 표하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 남만 무장장비의 85%와 2만여t의 전략물자가 압록강을 넘어 우리 나라 산간오지에 은페되도록 조치를 취해주시였으며 전투인원들과 부상자들을 우리나라 집집들에 분숙시켜 휴식도 하고 치료도 받도록 하시였다. 부상병들과 가족, 후방인원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후 치료받다가 5 000여명은 돌아가고 주체36(1947)년 6월까지 2 000여명은 남아있었다.

당시 우리 나라 형편에서 이렇게 많은 부상병들을 매 가정에 분숙시켜 휴식도 하고 치료도 하게 한다는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경제적으로 먹을것과 입을것, 일용품이 모두 부족한 상태였지만 중상자들이 여전히 우리 나라에 남아 치료를 받도록 하시였다.

당시 단동, 통화에서 철수한 후 조선경내로 들어온 전략물자만 해도 2만여t이나 되였는데 이것이 로출되지 않게 하기위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압록강연안에 있는 로동당원들을 동원시켜 야간에 은밀히 운반하여 감추어주었다. 단동, 통화가 다시 중국공산당군대편으로 넘어온 후 이 물자들을 순 인력으로 남만까지 보내주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일제가 패망할 때 버리고 간 많은 군수물자들도 중국 동북해방전쟁에 지원해주었다. 중국 동북해방전쟁시기에 중국공산당군대에 지원한 2 000여화차분의 물자들은 일제가 패망하면서 버리고 간 물자들이였는데 이것들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무상으로 또는 일부는 물자교환의 방법으로 넘겨주도록 하시였다. 대치하거나 교환한 물자중에는 1946년 산동성에서 판사처에 이진을 보내여 구입해간 300t의 폭약, 300만개의 뢰관, 120만m의 도화선도 있다. 1947년 봄에 산동성에서는 황우년을 판사처에 보내여 120t의 폭약, 200t의 질산, 100t의 아세톤, 15만컬레의 신발을 구입해갔다.

이러한 물자들은 남포에서 배로 대련에 수송한 다음 산동까지 보내였는데 산동 및 화동해방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47년 조선에서 산동에 지원한 수많은 화약이 남포에 집결되여있었는데 화교청년들도 동원되여 경비를 서주고 포장도 하고 통역도 하였다.

국민당반동들이 동북에 대한 침공을 대대적으로 진행할때 동북군구는 처음에 목단강지구로 군수공장을 이동시키려 하였으나 목단강다리로 차가 통과할수 없어 다시 토의하고 우리 나라를 경유하여 훈춘으로 이동하게 하였다. 1946년 6월 24일부터 30일까지 기계와 물자들이 도문을 거쳐 남양을 경유하여 훈춘으로 이동하게 되였는데 이때 많은 기계와 물자들이 우리 나라의 남양철다리를 통과하여 훈춘까지 무사히 수송되였다. 이때 군사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화차들은 모두 야간에만 유개를 씌우고 통과시켰다. 통화에서 우리 나라의 만포로 넘어온 180여대의 화차들은 다시 중국의 도문, 연길 일대에 집결된 후 편성되여 한주일내에 300여차량들이 목적지까지 무사히 가닿았다.

1946년초 국민당반동들은 해방지역들에 대한 공격과 함께 훈춘군수생산기지들을 공격했다. 중국 군수공업부문의 일군들이 군수공장들을 우리 나라 경내에로 이동시켜줄데 대하여 제기하여왔을 때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당시 아오지석유공장자리에 이동하도록 은정깊은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그리하여 1947년 2월 먼저 영안탄약공장, 주물공장, 화학공장을 우리 나라 경내로 이동시켰다가 로동자, 기술자들과 함께 그해 4월에 다시 넘겨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중국 동북지방에 우수한 간부들을 파견하시고 무선통신체계를 정연하게 세워 중국의 실정을 제때에 료해하시였으며 필요한 대책을 세워주시였다.

주보중은 당시 있었던 일들을 회고하면서 1946년 여름부터 1948년까지 2년반동안에 자기 나라에 보내온 지원물자가 2 000여차량에 달한다고, 그때의 형편에서 이것은 정말 대단한것이라고, 자기 나라의 해방전쟁에 돌려주신 김일성동지를 위시로 한 조선인민의 사심없는 국제주의적지원에 대하여 중국인민은 절대로 잊지 않을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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