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 다츠지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

후세 다츠지, 그는 1880년 일본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22세에 메이지 법률학교를 졸업했다. 같은 해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관 시보로 우츠노미야 지방 재판소에 부임하지만 “고통 받는 사람을 미래의 천국으로 인도하기보다 현세에서 돕고 싶다” 라며 변호사를 지망했다. 사법관 시보를 사임한 직접적인 이유는 아이들과의 동반 자살을 계획했던 어머니를 살인미수로 기소한 데에 따른 반발이었다. 후세는 검사라는 직책에 대해 ‘탐욕스럽고 잔인한 직업’ 이라고 비난하는 「사직의 이유」를 발표하고 도쿄 변호사 명부에 등록한다.

후세가 인권 옹호를 위한 변호를 하게 된 배경에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의 영향이 컸다. 또 톨스토이의 「러일 비전론」에 크게 감화되어,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만년에 후세 스스로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던 것은 톨스토이로부터이고, 『레미제라블』로부터는 계급적, 반역적, 저항적인 정신을 배웠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변호사로서의 능력은 탁월했으며 그의 결심대로 사회문제에 관련한 변호를 많이 맡는다. 1906년 도쿄 시영전차 요금인상 반대 소요사건, 1910년대 노동쟁의, 쌀 소동 변호, 보통선거 요구 운동, 공창폐지운동 등을 전개했다. 그 당시 도쿄의 유명한 민완 형사 변호사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30세에는 도쿄에 좋은 사무실과 가문(家紋)을 새겨 넣은 인력거를 타고 다닐 정도로 부와 출세의 가도를 가고 있었다.

그러나 40세가 되던 1920년에 부와 출세의 길을 스스로 끊는다. 후세는 다이쇼데모크라시 운동의 고조를 배경으로 분출되었던 보통선거 운동과 사회단체의 결성을 계기로 ‘전통적인 변호사’에서 ‘민중의 변호사’로 변신한다는 장문의 「자기 혁명의 고백」을 선언한다. 1920년 5월에 발표된 「자기 혁명의 고백」의 첫 부분의 요약본을 아래에 적는다.

인간은 누구라도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 정직한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이것은 양심의 소리다. 나는 그 목소리에 따라 엄숙하게 ‘자기혁명’을 선언한다. 사회운동의 급격한 조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종래의 나는 ‘법정의 전사라고 말할 수 있는 변호사’였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사회 운동의 일개 병사로서의 변호사’로서 살아갈 것을 민중의 한사람으로서 민중의 권위를 위해 선언한다. 나는 중요한 활동의 장소를 법정에서 사회로 옮겼다.

후세는 이어 「자기 혁명의 고백」의 구체적인 실천 방법으로서 민사 · 형사를 불문하고 다음과같은 사건에 대해서만 변호 활동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1. 관헌으로부터 무고죄, 부당한 부담을 강요받은 사람에 대한 사건

2. 자본가와 부호의 횡포에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에 대한 사건

3. 관헌이 진리의 주장에 간섭하는 언론범 사건

4. 사회운동에 대한 탄압과 싸우는 무산계급의 사건

5. 인간 차별과 싸우는 사건

6. 조선인과 타이완인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사건

후세가 변호사로서 최초의 조선인을 변호했던 것은 1919년 2월8일 일어난 ‘2 · 8 독립선언 사건’의 2심 법정이다. 당시 1심 변호사들인 하나이 다쿠조, 우자와 소메이 는 당시 일류였고 대가들이었다. 그들 변호사들은 당국의 자비를 바라는 방향으로 변호를 했고 그것은 당시 독립선언한 조선 청년들의 뜻과도 배치되는 변론이었다. 그러나 후세는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아래는 후세의 말.

하나이 씨는 피고를 동정했지만, 국헌 문란이기 때문에 국법을 인정한 방법으로 재판이 행해져야만 한다고 말하고,―유죄를 인정한 상태에서―집행 유예를 주장한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저는······반격을 가한 것입니다. 우자와 씨는 조선이 합병된 것은 일본의 몸채에 행랑을 붙인 것과 같다. 행랑이 없어진다고 해서 일본의 국체가 파괴될 일은 없다는 의견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대체 조선을 뭐라 생각하는가?” 라고 말했지요.

당시 법정에서 조선 침략의 부당성을 고발한 변호사는 후세 말고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후세의 자세는 조선인을 위한 법정 변호에서 일관되게 나타났다.

이후 후세는 의열단 김지섭의 니주바시 폭탄투척 사건(1924년), 박열 · 가네코 후미코 사건 재판(1926년), 김한경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1931), 유종환 · 유여종 형제 경찰관 치사 사건(1932), 조선 수해 이재민 구원 활동(1925년), 오타루 상업고등학교 군사교련에 대한 항의 운동(1925), 미에현 기노모토 마을 조선인 살해 사건의 진상조사(1926년), 재일 조선인 노동 산업 희생자 구원회(1929년) 결성 운동 등을 전개한다.

그 사이 후세는 조선을 네 번 방문해서 강연 활동, 법정 변호 및 사건조사를 왕성하게 펼쳐 나간다. 1923년 7월 말 첫 번째 방문에서는 조선인 유학생 단체인 북성회가 주최하고 동아일보사가 후원한 하계 순회 강연회에 참석해 남부 각지에서 강연 활동을 전개하면서, 체재 기간 중에 의열단원 김시현의 재판에 참여했다. 두 번째 방문은 전라남도 나주군 궁삼면 토지 사건 조사를 위해서였다. 그때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에 대한 사죄문을 신문사에 보냈다. 그리고 조선공산당 사건 변호를 담당했던 1927년에 조선을 두 번 더 방문했다.

후세는 이런 활동으로 민주사변 이후 형무소에 두 번 투옥되고, 몇 차례에 걸쳐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는 등, 일본 파시즘 체제의 억압을 받았다.

후세는 1923년 10월에 ‘도쿄 지방 이재 조선인 후원회’에 고문으로 참석하고, 12월에 개최된 ‘피살 동포 추도회’에서 추도 강연을 했다. 후세는 조선인 학살에 대한 당국의 태도를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무서운 인생의 비극입니다. 너무나도 가혹한 비극이었습니다.

특히 조선에서 온 동포의 최후를 생각할 때 저는 애도할 말도 찾지 못했습니다. 또 어떠한 말로 추도한다고 해도 조선 동포 6천 명의 영혼은 성불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을 슬퍼하는 1천만의 추도의 말을 늘어놔도 그들의 원통함이 가득 찬 최후를 추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 학살은 계급투쟁의 일부였습니다. 우리의 동지가 살해당한 것도, 6천 명의 동포가 그와 같은 처지에 직면한 것도 우리가 계급투쟁에서 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졌습니다. 원통하기 그지없습니다. 왜 우리가 졌는지 생각해 주십시오.

후세가 신문사에 보낸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사죄문은 다음과 같다.

‘전 세계의 평화와 전 인류의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 무산계급 해방운동자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활동의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해도 일본 민족이라는 틀에 사로잡히는 일 없이, 또 실제 운동에 있어서도 민족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지진 직후의 조선인 학살 문제에 대한 정직한 나의 소신과 소감을 모든 조선 동포에게 전하려고 합니다.········· 일본인으로서 모든 조선 동포에게 조선인 학살 문제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를 표명하고 자책을 통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후세가 조선인 학살을 일본인 사회주의자 학살과 동일선상에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후세는 조선인 학살 문제를 민족 문제가 아닌 계급 문제로 파악한 것이다.

후세는 8 · 15이후 『조선독립헌법초안 사고(私稿)』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는 23년 동안 옥중 생활을 마치고 출감한 아나키스트 독립투사 박열이 헌법초안을 조국 해방의 선물로 가지고 돌아가고 싶다고 제안해서, 두 사람이 의견을 나누면서 작성했다고 한다.

후세는 1953년, 만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는 많은 조선인이 고별식 장례 위원으로 참가했다. 후세는 조선인이 평가하듯이 ‘일본 무산운동의 맹장’ 이었다. 후세와 조선인의 관계는 한일 연대 투쟁의 귀감이다. 조선인 역시 그의 추도식 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생님은 우리 조선인에게 있어 정말로 아버지와 형 같은 존재이고, 구조선과 같은 귀중한 존재였습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영원히 선생님과 이별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은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슬픈 일입니다.”

위의 글은 『후세 다츠지』 책의 여기저기에서 발췌하였다.

후세 다츠지는 근대 일본의 대표적 ‘양심’ 이었고 양심적 지식인의 삶이 어떠해야하는가를 생애를 통해 보여준다. 명예와 부를 포기하고 무산자와 연대한 삶으로 살다간 후세 다츠지는 그의 좌우명인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실천한 진정한 양심적 지식인이었다. 오늘날 좌파 지식인들이 선택해야할 삶이 있다면 가까운 미래에 권력을 쟁취하는 것에 몰두 하느라 좌파의 정체성의 훼손마저 감수하는 것보다 진정으로 무산자를 위해 자본에 의해 철저히 배제당하는 그 곳, 한 없이 낮은 곳으로 연대하는 삶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 생각은 그 길이 무산자들과 보잘 것 없는 자들을 위한 진정한 권력쟁취가 더 빨리 올 것 같은 데 말이다.

『후세 다츠지』- 지은이: 오오이시 스스무 · 고사명 · 이형낭 · 이규수 옮긴이: 임희경 펴낸 곳: 지식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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