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장 2

 

제 10 장

2

 

덕산동부녀회책임자 배증녀는 집곁에 있는 발방아간에서 덜컹덜컹 방아를 찧고있었다. 그는 보채는 애기를 겨드랑밑으로 돌려끼고 젖을 빨리며 방아다리를 디디고 올라서군했다. 그와 함께 방아를 찧는 같은 또래의 녀인도 애기를 업었다. 그들은 밀정놈들을 적발해내서 처단한다는 소리를 쑥덕거렸다. 누구의 입으로 어떻게 새나왔는지 그들은 한기천이들이 토론하는 일들을 죄다 알고있었다.

《다 없애버리면 그게 빠르긴 빠르지요. 살려놓고 그놈들 눈을 피해가며 무슨 일을 하는것보다···》

배증녀의 말이였다.

《난 더두 말구 이 덕산동에선 저 박가네를 옹이 뽑아버리듯 뽑아버려줬으면 좋겠다니까···》

《그러게말이지. 우리 용수가 말하는걸 보면 무슨 계획이 있긴 있는가봅디다만···》

《용수가 뭐라게요?》

《아무날이구 박대동이 천당으로 안가는가 보라는거지.》

《박대동이만 없애구 그 진주기생은 그냥 내버려둔답디까?》

진주기생이란 박대동의 마누라를 말하는것이였다.

《박대동이만 없애문야 그까짓 진주기생따위야 우리 부녀회원 손으론들 요정을 못내겠게 그러우. 그저 그놈의 집에서 동정이 가는건 불쌍한 며느리지.》

《어이구 성님두, 며느리가 뭐 우리 편이랍디까? 옛말에도 가재는 게편이란 말이 있다우.》

둘이 이런 소리를 주고받는데 웬 처녀들이 발방아간으로 쑥 들어섰다. 김정숙동지와 복녀였다. 녀인들은 어마지두 놀라며 입들을 다물었다.

《여기 배증녀아주머니라구 계신가요?》

복녀의 묻는 말이였다.

《나예요. 그런데 어데서들 왔나요?》

배증녀가 방아다리를 디딘채 의아쩍은듯 쳐다보며 반문했다.

《우린, 신개동에서 왔어요.》

《신개동이라니? 건넌말말인가요?》

《네.》

《건넌말 뉘집 딸들이게요?》

배증녀는 건너마을이라면 누구네 집에 숟가락이 몇가락 있다는것까지 다 알고있는데 거기서 왔다는 말이 믿어지질 않아서 두 처녀를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오긴 건너말에서 왔지만 본시 거기서 살지 않았으니까 아주머닌 잘 모르실거예요.》

김정숙동지께서 이런 말씀을 하며 녀인들곁으로 다가가시였다.

《글쎄 건너말에서 온건 아니겠지.》

《아주머니,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제가 좀 찧어드리겠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배증녀를 밀어내며 방아다리를 디디고 올라서시였다. 배증녀와 함께 방아를 찧던 녀인은 어데서 이런 상냥스런 처녀가 왔는가 해서 그러는지 귀밑머리가 흔들거리는 김정숙동지의 옆얼굴을 얼른 훔쳐보았다. 배증녀도 어리둥절해서 김정숙동지를 쳐다보았다.

이러는데 방아간밖에 배증녀의 오랍동생 용수가 나타났다.

《누님, 이리 좀 나와요.》

증녀는 아이를 올려추며 방아간밖으로 나갔다. 키가 큰 배용수는 아무 말 없이 회춤길로 걱실걱실 걸어갔다.

《어데로 가나?》

《글쎄 이리 좀 와요.》

증녀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였다. 방금 방아간에서 방아를 찧으며 박대동네를 죽인다 어쩐다 하는 말을 했는데 그게 화단을 일으키지 않았는가싶은 생각도 들었다. 용수가 처녀들을 데리고 오다가 십상 방아간밖에서 그 말을 엿들은것 같기도 했다.

《누님, 누님네 집에 손님을 한명 두게 해야겠어요.》

마당으로 들어온 배용수는 누이를 토방앞에 세워놓고 이런 말을 했다.

《손님이라니? 무슨 손님말인가?》

《지금 방아간에 온 녀성동무를 한명 누님네 집에 있게 해야겠어요.》

《어느 녀성동무를? 그 얼굴 넙적한 처녀말인가?》

《아니야요. 감장저고리에 감장치마 입은 동무가 있잖아요. 그 동무가 상촌에서 여기 조직을 지도하러 온 공청원이야요.》

《그래···》

배증녀는 놀라는 표정을 했다.

《신문에도 났던 녀성동무야요. 어쨌든 조직에서 믿구 누님네 집에 와있도록 한거니까 잘 돌봐야겠어요.》

《알겠네. 그런데 함께 온 처녀는 누군가?》

《그 처녀는 태봉에서 왔는데 혁명을 하겠다고 뛰고있는 처녀야요. 그 처년 신개말에 와있어요.》

배용수는 누이를 다시 방아간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자기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몇해전 남편이 태봉광굴에서 광석을 캐다가 죽고 살길이 막혀 친정으로 돌아온 누이였다. 애들 셋을 데리고 두칸짜리 오두막에서 사는데 방이라는것이 정말 코구멍만큼씩 작았다.

배용수는 방바닥에 널린 애들 옷가지들도 홰대에 집어걸고 구들도 쓸었다. 부엌에서 올라올 때 발을 문대게 만들어놓은 덕석이도 들어내다가 먼지를 털었다. 한참 방안을 거두고난 배용수는 정지방에 있는 화로를 웃방에 올려다놓고 앉아서 담배 한대를 붙여물었다.

《인제 일이 제대로 돼가는가부다. 태봉조직에서 지시를 주지 않는다 해도 저 공작원만 말을 들어준다면 그깐놈이야 해치울수 없겠는가!》

배용수는 혼자 중얼거리며 담배연기를 뿜었다. 그는 지금 박대동이를 처단하지 못해 등이 단 청년이였다. 그래서 김정숙동지께서 오신 날 밤에도 한기천이와 맞장구를 치며 제일 피대를 세웠다. 그는 혁명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못살며 천대받던 사람들이 부자놈에게 복수를 하는것인데 자기네가 어째서 박대동이 같은놈을 없애버리지 못할가싶었다.

배용수는 담배를 거퍼 두대나 피우고나서야 자리에서 움쑥 일어섰다.

배증녀는 가슴이 쿵쿵 뛰였다. 자기네 집으로 공작원이 오다니? 어쩐지 인젠 정말 덕산동부녀회가 우쩍우쩍 소리를 치며 일어설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그는 김정숙동지가 자꾸만 고쳐 쳐다뵈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봐서 그런지 정말 범상한 처녀같아보이질 않았다.

함께 온 처녀와는 너무도 차이가 있다. 유순하고 애되보이는가 하면 그윽하게 깊어도 보이고 허구많은 뜻이 담겨져있어서 무슨 말을 붙이기도 조심스러울것 같은 그런 얼굴과 그런 눈매였다.

배증녀가 저녁을 짓는동안 복녀는 아이 하나를 붙안고 앉아서 이름을 물어보고 나이를 물어보고 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여섯살 먹은 딸애가 입을걸 못입었다고 어깨팍과 잔등을 쓸어주며 몹시도 측은해하는 표정을 지으시였다. 그이께서는 같이 온 복녀에게 무어라고 한참이나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시였다.

그러자 이어 복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난 가겠어요. 무슨 불편한 일이 있으면 신개말로 련락을 띄워요.》

《무슨 불편한 일이 있겠기에··· 어서 떠나요.》

배증녀는 복녀가 부엌으로 내려서는바람에 저녁이나 먹고 떠나라고 말렸다. 그러자 복녀는 그 소리엔 대꾸를 안하고 배증녀의 곁으로 다가서더니 두터운 입술을 귀가에 갖다붙이며

《아주머니, 공작원이예요. 잘 보살펴줘요.》 하고 소곤거렸다.

《알아···》

배증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복녀가 돌아간 뒤 김정숙동지께서는 배증녀네 어린애들을 둘러끼고 앉아서 배증녀와 함께 저녁을 드시였다.

《아주머니, 어려운 생활에 저까지 와서 이렇게 신세를 져서 안됐어요.》

《무슨 그런 말을 하우? 난 조직에서 공작원동무를 우리 집에 와있게 했다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니까···》

《아주머니, 저를 뭐 공작원, 공작원 하고 부르지 마세요. 남들이 들으면 안되기도 하지만 전 뭐 무슨 공작임무를 띠고 왔다기보다 일을 배우러 왔어요.》

배증녀는 무안한 생각이 들어 낯이 붉어졌다. 정말 그런 말은 안해야 되는것인줄 알면서도 입이 빠르게 말이 나갔다.

《아주머니, 여기 부녀회원은 몇이나 되나요?》

《모두 일곱이라우. 조직에서 막 받아들여선 안된다고 하기에 진짜배기만 받아서 넣느라고 했지요.》

《이 동네에 집은 모두 몇집이나 되게요?》

《백여호가 잘되지요.》

《백여호가 되는데 부녀회원이 겨우 일곱밖엔 없으세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놀라는 낯빛으로 물으시였다.

《우에서 여러가지로 보는게 많은가봅디다. 아마 부녀회원도 공산당원 수준이 다는 못돼도 절반은 돼야 하나봅디다. 그러기에 우리가 누구를 받겠다고 하면 며칠씩 두고 상론을 하고나서야 받으라느니 받지 말라느니 하고 지시를 주지요.》

《그렇게 똑똑한 사람을 받는게 나쁘기야 하겠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웃으시였다. 그이께서는 이 지역에서 무엇인가 일이 잘못되고있다는것을 느끼시였다. 신개마을부녀회 형편을 물어보아도 불과 십여명밖엔 뭉치질 못했다고 했다. 대중조직이란것이 명색만 대중조직인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지주나 주구를 처단하자는 일엔 눈에 피발이 서서 뛰고있다. 이건 정말 해야 할 일은 집어내던지고 그저 들떠서 뛰는게 아닌가.

김일성장군님께서는 혁명은 혼자서는 할수 없으며 혁명을 하자면 군중과 단결하여야 하고 각계각층의 광범한 반일군중들을 하나의 혁명력량으로 묶어세워야 된다고 가르치셨다고 하였다.

그런데 대체 여기서는 무슨 사업을 첫째가는 사업으로 내세우고있는가? 백여호나 되는 동네에서 일곱명의 부녀회원을 묶어세웠다니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아무렴 이 마을에 그렇게야 왜놈을 미워하는 녀성들이 적을가?

김정숙동지께서는 확실히 이 지역에선 장군님의 가르치심과는 맞지 않게 일을 잘못해나가고있다는 생각이 드시였다.

그렇다고 일곱명중에서 뽑아세운 이 소박한 부녀회책임자 배증녀한테 그런 사정을 물어볼수도 없으시였다. 그이께서는 자신의 앞에 큰일이 가로놓이는것을 의식하면서 곁에 앉아있는 어린애의 입으로 밥숟가락을 가져가시였다. 네살 잡힌다는것이 낯가림도 하지 않고 다소곳이 앉아 김정숙동지께서 떠넣어주시는 밥을 잘 받아먹었다. 다금다금 낳아서 젖먹이까지 세 오누이인데 세 아이가 한마디 키정대지도 않아 온 집안이 절간같이 조용하였다.

이날밤 김정숙동지께서는 배증녀네 어린애 하나를 옆에 끼고 누워서 상촌근거지 생각을 하시였다. 두고 온 아이들이 간절하게 그리워지시였다. 기송이, 철이, 태국이, 태호, 수십명되는 애들의 귀여운 얼굴이 한꺼번에 무데기로 떠오르고 하나하나 차례로 눈앞에 떠오르기도 하시였다. 적통치구역으로 비밀공작을 떠나는 길이니 애들과 간다는 말도 못하고 한밤중 몰래 떠나오시였다. 주림과 헐벗음을 함께 이겨내며 가난한 사람들의 새세상 자유천지인 근거지와 함께 자라난 아이들, 부둥켜안아 쓰다듬어주기도 하고 매질하듯 아프게 꾸짖기도 하고 함께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시며 정성다해 키워온 아이들, 같이 있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떨어지고 보니 제 육신의 한쪽을 어느 먼곳에 떼여놓고 온것 같이 가슴이 허전해지기도 하고 안타깝게 그리워지기도 하시였다.

그사이에 무슨 사고나 없었는지? 날씨가 점점 차지는데 고뿔걸린 아이들이나 없는지? 지금쯤 모두 잠들었을텐데 자리를 차던지고 춥게 자는 애들이나 없는지? 금실이와 상녀어머니가 어련히 다 돌봐줄줄은 알면서도 김정숙동지의 맘속에는 불면 날가 들면 꺼질가 하는 애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의 정이 넘치고넘쳐 이것도 저것도 다 근심이 되시였다. 한합숙에서 어렵고 괴로운것을 함께 이겨나가는 상녀어머니와 금실언니, 속이 크고 깊은 락천적인 차응도회장, 열정적인 희섭선생과 리진구 그리고 김봉석중대장과 최정수, 그 모든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곁에 그냥 있는것 같으시였다. 상촌은 마음속으로 그려만 보아도 그 어떤 후더운 온기가 온몸을 감싸주는것 같으시였다. 아, 상촌, 사랑하는 상촌, 이렇게 떠나와 생각해보니 상촌은 자유와 사랑과 행복의 집이라는것이 뼈에 스며들도록 느껴지시였다. 인제 조국을 광복하고 온 조선땅을 상촌과 같이 만들고 장군님을 받들어모시고 천년만년 살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가.

김정숙동지께서는 그립고 행복한 꿈을 쫓으며 밤새도록 잠들지 못하시였다. 그러나 그이께서는 새벽 일찌기 깨여나 동이를 끼고 물길러 나가시였다. 배증녀가 말리긴 했으나 어떻게 조반짓는 일을 거들지 않으랴싶으시였다. 그이께서는 아직 어둑어둑한 땅거미가 발치에 감기는 방아간뒤를 돌아나가시였다. 한참 걸어나가 우물가에 오시니 등성이너머에 앉아있는 박대동네 기와집 추녀가 나무들사이로 넘겨다보인다. 웬 녀자가 등성이를 돌아올라간 길로 물동이를 이고 천천히 올라가고있다. 허리가 가늘고 귀밑이 살핏해보이는데 동이 하나를 간신히 이고 올라가는것 같다. 어제 덕산동으로 들어올 때 복녀가 등성이너머에 대고 대포를 한방 쏘았으면 좋겠다고 하기에 그게 박대동네 집인줄 알았는데 그럼 박대동네 집쪽으로 물을 길어가지고 넘어가는 녀인은 누굴가? 분임이 아닐가? 꼭 그럴것만 같아 바라보시는 사이 벌써 동이를 인 녀자는 큰 나무들 서있는 등성이너머로 사라져버렸다. 아무래도 분임이같아 보이시였다. 그렇지만 또 한편 분임이는 아닌것 같은 생각도 드시였다. 분명히 나이든 중년부인같은데 분임이가 무슨 분임일가.

김정숙동지께서는 그 녀자가 다시 나타나는가 해서 천천히 물을 길으시였다. 그러나 등성이우로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뿌잇뿌잇 서광이 물드는 나무가지에서 까치들만 푸드득이며 날아넘어가고 날아넘어온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물을 세동이나 길으시였다. 혹시 그 녀인이 다시 나타나는가싶어서 물을 물드무에 쏟아붓고는 또 우물가로 나가군하시였다. 그러나 끝내 그 녀인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마음이 무거워 배증녀가 하는 부엌일을 도우시였다.

《아주머니, 저편 등성이너머집이 박대동네 집이예요?》

김정숙동지께서는 가시물그릇에 마주서서 그릇을 부시는 배증녀에게 물으시였다.

《그럼요. 그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그놈의 집이라우.》

《그 집에서도 등성이 이쪽에 있는 우물을 길어다 먹어요?》

《그 우물을 길어다 먹지요. 그러게 늘 그게 께름직하구 우리가 준절치 못한 생각도 들군하지요.》

《한우물을 길어다 먹는다고 싸우지 못하겠어요? 그런데 그 집에서 물을 길어들이는 녀자는 웬 녀자예요? 아주 약하게 생기구 허리가 가는 녀자말예요.》

《인제 나갔다 보았소?》

《네, 언덕으로 올라가는 뒤모습만 보았는데 물동이를 이고 겨우 올라가는것 같잖아요.》

《그게 그집 며느리라우. 첨 시집올 때는 그렇게도 꽃같더니 한해동안에 온통 서리를 쳐서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지요.》

김정숙동지께서는 가슴이 떨리시였다. 차라리 그게 분임이가 아니였으면 하는 생각이 있기도 했는데 역시 분임이가 옳다는거다. 서리를 쳤다니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한해동안에 사람을 그 모양으로 만들었단말인가.

《그 남편이란 사람은 지금 집에 있어요?》

《그놈은 공부를 가있지요. 지난겨울 서울공부를 떠난다 어쩐다 하며 집에 와서 제 녀편네를 두드려패구는 떠나갔다우. 지금 아마 서울에 가있겠지요.》

《그놈이 제 안해를 왜 그렇게 구박해요?》

《무식쟁이 녀자와는 안살겠다는거지요. 맨첨부터 그런 녀자한텐 장가를 안간다는걸 박대동이 녀자가 량반의 씨라고 억벌로 데려왔지요. 무슨 말인지 색시가 시집을 와서도 박대동의 아들과는 같이 살아본 일이 없다고 수군수군 소문이 돕니다. 그까짓 량반의 씨라니 불쌍히 여길건 없지만··· 그래도 한편 생각하면 녀자란 어째서 아무 죄두 없이 신세가 그렇게 가긍하게 돼갈가 하고 같은 녀자로서 억울한 생각도 들군하지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입술을 깨물며 말을 못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문뜩 작년여름 장보러 갔다오던 날 생각이 또 나시였다. 그때 분임이는 시집을 가지 않을수 없게 된 기막힌 사연을 이야기하며 난 어떻게 하면 좋아? 나같은게 무엇하러 이 세상에 태여났을가고 안타까이 묻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물음에 대답해주지 못하였다. 지금같으면 힘이 되게 옳은 대답을 해줄수 있었는데 그때는 그러질 못하였다. 대답을 못했을뿐만아니라 분임이로서는 시집을 가는게 어쩔수 없는 운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도 하였다.

그 일을 생각하면 분임이를 오늘의 운명에로 굴러떨어지게 한것이 어쩐지 자신인것 같은 느낌도 드시였다. 너를 이 지경에 몰아넣은 이 세상을 뒤집어엎어야 한다고, 혁명하는 길로 뛰쳐나와야 한다고, 지금은 너무나도 명백하고 확실한 그 한마디 대답을 그때는 왜 해주지 못하였던가!

《그 녀자는 불쌍한 녀자예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저도모르게 이런 말씀을 하시였다.

《박대동네 며느리말이우?》

배증녀가 눈이 둥그래서 돌아보며 묻는다.

《네.》

《잘 아는 사이우?》

《한동네에서 자랐어요. 량반집이라고는 하지만 지주놈한테 땅을 죄다 뺏겼어요. 그 녀잔 부모님과 어린 동생들을 구원하겠다구 팔리다싶이 시집을 왔어요.》

《원 저런, 글쎄 어쩐지 있는 집에서 자란 녀자 같지는 않았다니까. 시집을 오자 이어 부엌데기같이 팔을 걷으고 일해내는걸 본다든가 사람이 숫부드럽고 매끄럽지 않은걸 보면···》

《매끄러운 녀자가 아니예요. 일손이 무섭고 고생도 많이 하면서 자랐어요.》

《그런 녀자구먼…》

배증녀는 혀를 찼다. 그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은근히 큰숨을 짓는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인제라도 혹시 분임이를 저 박대동네 무서운 담장안에서 구원해낼수는 없을가고 생각하시였다.

어떻게 할지는 딱히 떠오르지 않으시였으나 분임이를 구원할수도 있다는 그 어떤 한가닥의 희망이 마음속에서 부쩍 생겨나는것이였다.

어쨌든 당장은 마을의 부녀회사업을 추켜세워야 할것이다. 김정숙동지께는 온 태봉지구가 겪는 시련으로부터 여기 분임이라는 한 녀자가 제기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것이 혁명조직을 꾸리는 그 한고리에 얽히고 매듭져있는듯이 느껴지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이튿날밤 부녀회원들을 모두 배증녀네 집으로 모이게 하셨다.

일곱명의 부녀회원들이 사람들의 눈을 피하느라고 새까맣게 어두워서야 모여들었다. 그들은 배증녀네 부엌문으로 들어서는것도 치마폭을 휩싸며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누구나 다 방안에 김정숙동지께서 계시는것을 보고는 부엌바닥에서 배증녀와 무슨 이야기를 소곤소곤 주고받고나서야 올라왔다. 거의다 서른안팎의 젊은 아낙네들이다. 모두들 김정숙동지의 눈치를 살피며 어려워들 했다. 그들이 그러니김정숙동지께서도 몹시 송구스러우시였다.

《어서 이리 앉으세요.》

《온, 우리네야 아무데 앉으면 어떻습니까? 우에서 오신 나그네가 깊숙이 앉아야지요.》

꼭 올케처럼 눈에 서러운 미소를 띠고 쳐다보는 아낙네도 있다.

《우리 부녀회원이란게 모두 이렇지요. 신개말에 와있는 안경 쓴 선생은 우리들을 보고 부녀회원들도 연설마디나 해야 하구 책두 볼줄 알아야 한다고 합디다만 어데 그런 회원이 있답디까? 이 복순 엄마가 그전에 심청전은 더러 읽었지요.》

배증녀가 방에 올라와앉으며 궁색스러워뵈는 부녀회원들을 변명하듯 말했다.

《온 성님두···》

복순 엄마라고 불리운 녀인이 배증녀의 무르팍을 찌르며 낯을 붉혔다.

《인제 배워야 해요. 우리가 부녀회를 조직했다는게 배우지도 않고 또 무슨 일을 하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있다면 그게 무어가 되겠어요? 그건 부녀회를 조직한것이나 안한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어요.》

《그럼, 예전처럼 밥먹고 농사나 짓자고야 뭘하러 부녀회를 조직했겠소.》

김정숙동지의 말씀에 배증녀가 대꾸했다.

《아무것두 안하문사 절간의 부처님같지.》

딴 녀자가 한마디 끼여들었다.

《절간의 부처 같애서야 혁명을 하겠어요? 왜놈들은 태봉시에 수비대까지 틀고앉아서 조선사람이란 조선사람은 하나 둘 죄다 붙들어다 까막골에 피바다를 만들고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팔짱끼고 부처님같이 앉아있겠어요. 전 정말 여기 와 보니 생각되는게 많아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말을 꺼내놓고보니 낯빛이 그냥 부드러워지지만은 않으셨다. 글쎄 이런 녀자들로, 그것도 예닐곱명 가지고 부녀회라는것을 만들어놓고는 가르치지도 않고 내버려두고있으니 이게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혁명을 하자면 왜놈들보다 힘이 크고 세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게 우리들은 매 사람이 다 배워서 아는것도 중요하고 또 더 크게 더 많이 뭉치는것도 중요해요. 몇사람이 뭉쳐가지구 그나마 배우지도 않구 어떻게 왜놈을 당해내겠어요?》

녀인들은 모두 가슴들이 쭝해져서 김정숙동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직 애티나는 처녀인데 어쩜 저렇게도 큰 뜻이 있는 말을 할가. 확실히 속엔 큰뜻이 들어앉은 녀자다. 어떤 녀인은 저고리의 깃고대가 어떻게 저리도 바르고 품이 저렇게도 꼭 맞을가싶어 김정숙동지의 옷매무시를 유심히 바라보기도 했다.

《전 이 덕산동에서도 부녀회원을 늘궈야 되겠다고 생각해요. 이 일곱명 가지고야 무슨 일을 하겠어요. 그래서 오늘밤 이 문제를 좀 이야기해보려고 여러분들을 모이라고 했어요. 혹시 제가 생각하는게 잘못이 아닌가싶기도 해서···》

《잘못이 무슨 잘못이겠소. 늘구라군하면서도 자꾸 튀기니까 못늘구는거지요. 벌써 열두 더 퇴맞았겠소.》

《열이 뭐요. 스물두 넘겠소. 수준이 어리다는둥 말방납질이 많다는둥, 박대동네와 건건이 된다는둥 가정이 봉건이여서 재미가 없다는둥 아이구 참, 부녀회에 들자면 옛날에 진사급제하는것보다두 더 힘들게 돼있으니 누가 부녀회에 들어내겠소.》

그처럼 조심스러워하던 아낙네들이 속에 가둬두었던 소리들을 물쏟듯 쏟아놓으며 불평들을 했다.

《그럼 아주머니들은 모두 부녀회를 늘구는걸 나쁘다고 생각은 안하세요?》

《온 정신이 나갔다구 그걸 나쁘다고 생각하겠어요.》

아낙네들이 모두 웃었다. 인제 자기네들의 맘을 알아주는 진짜 공작원이 온것 같아서 모두들 화색이 돌아 웅성거렸다.

《아주머니, 종이와 연필이 있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배증녀를 쳐다보며 물으시였다.

《있지요. 뭘 쓰자구 그러우?》

《좀 주세요.》

배증녀는 반짇그릇을 뒤지더니 얼른 공책과 연필을 꺼내놓았다. 그는 상에 받쳐놓고 쓰라고 개다리소반까지 방가운데 들어다놓았다.

《인제 말씀하시던 조직에서 튀겨서 못들었다는 녀자가 누구누구예요. 한사람씩 말씀해주세요.》

김정숙동지께서 연필을 들고 앉아 물으시였다.

《우선 리금녀.》

배증녀가 이름을 댔다.

《리금녀, 이 녀자는 무어가 어떻게 돼서 퇴맞았어요?》

《입이 빠르고 말방납질이 많다는거지요.》

《입이 빠르고 말방납질이 많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받아외우며 적어나가시였다. 녀인들이 상머리로 다가앉아 글쓰시는것을 들여다보았다. 김정숙동지의 머리우로 넘겨다보는 아낙네도 있었다.

《그담 또 누구예요?》

《오봉애.》

《오봉애··· 이 녀자는 어째서 퇴맞았어요?》

《오봉애는 층층시하에서 부녀회에 들어도 일을 못한다는거죠.》

《층층시하에서 부녀회에 들어도 일을 못한다.》

《어쩜 글씨를 저렇게 맘대루 좔좔 내리쓸가? 거기다 한마디 더 적어요. 오봉애는 친정이 잘사는 집인가봅디다.》

《어이구 친정이 무슨 잘사는 집이라우? 그저 소짝이나 매구 농사를 짓지.》

《그래두 용수적은이가 그러는데 그게 걸린다고 합디다.》

《그만두세요. 그럼 그것두 적겠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녀인들의 싱갱이질을 막으며 오봉애의 이름밑에 또 한줄 써넣으시였다.

《그담엔 또 누구예요?》

《그담엔 보배.》

《그 녀잔 수준이 낮다고 받지 말라는거지요.》

《수준이 낮다니, 글을 모른다는말예요?》

《글이야 우리도 다 모르는데 그게 무슨 못들 조건이 되겠나요? 묻는 말도 잘 대답을 못한다는거지요.》

《원 성님두, 공작원동무가 보배를 벙어린가 하겠어요.》

《호호호, 벙어린 무슨 벙어리요? 사람이 어질어서 그렇지···》

김정숙동지께서는 보배의 이름밑에 또 그렇게 적으시였다. 그이께서는 밤이 깊을 때까지 묻고 쓰고 하시였다. 다 쓰고나시니 스물두명이나 되였다. 결국 이 숱한 사람들을 들이자고 했는데 조직이 막아서 못들였다는것이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억울한 생각도 들고 기가 막힌 생각도 드시였다.

그이께서는 정색해져서 이마에 내돋은 땀을 씻으시였다. 이런 땐 눈빛이 몹시 차고 쌀쌀해보이기도 하시였다.

그뒤 김정숙동지께서는 여러날동안 마을아낙네들의 형편을 알아보시였다. 배증녀네 빨래감을 이고 빨래터에 나가서도 동네아낙네들을 사귀고 방아간에서 방아를 찧어주면서도 사귀시였다. 어떤 날 저녁엔 배증녀와 함께 이집저집 마실을 다니며 아낙네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기도 하시였다. 마을아낙네들도 부암아낙네들 다를바없이 모두 가난에 쪼들리고 시집살이에 시달리는 불쌍한 녀인들이였다.

김일성장군님을 흠모하며 근거지의 별세상을 무척 동경했다. 그런데 무엇때문에 그들을 이런 조건 저런 조건 붙여서 부녀회에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그 까닭을 알수 없으시였다. 아무리 생각해보셔야 장군님의 가르치심대로는 일을 안하고있는것이 분명했다. 어쩐지 김정숙동지께서는 참을수가 없으시였다.

어느날 아침 김정숙동지께서는 배증녀를 데리고 한기천을 만나러 신개동으로 건너가시였다. 어떻게 하든지 한기천이와 의논하고 일을 바로잡아야 되겠다고 생각하시였다. 그런데 배증녀는 뒤가 무거운 걸음으로 따라섰다. 사실 그는 김정숙동지의 생각이 옳다고는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자기네들이 그 문제를 제기했을 때처럼 한기천이 또 무슨 우경투항주의니 뭐니 하는 알아들을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말로 막아칠것 같아 겁이 났다. 그렇지만 그는 공작원처녀의 록록치 않은 일잡도리에 힘을 얻어 따라서기는 따라섰다.

신개동아지트에 가니 한기천이 웃방에 와앉아있었다. 김정숙동지께서 들어서며 의논할 문제가 있어서 왔노라고 하시자 어서 웃방으로들 올라오라고 하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배증녀더러 올라가자고 이끄시였다. 그러나 배증녀는 김정숙동지의 등을 밀어올려보내며 자기는 정지방에 앉았다.

김정숙동지께서 혼자 웃방으로 올라가 한기천의 앞에 조심스럽게 앉으시였다. 대걸이는 어데 나갔는지 누웠던 자리만 있고 뵈지 않았다.

《그래 객지에 나서 얼마나 고생을 하우? 잠자리나 편하오?》

한기천의 말은 상냥하고 부드러웠다. 처음 만났던 날 처단한다 어쩐다 론쟁을 하던 때의 한기천이와는 판판 다르다.

《고생이 무슨 고생이겠어요. 그저 동네 여러분들께 페만 끼쳐요.》

한기천의 태도가 부드러우니 김정숙동지께서는 더욱 송구해져서 조심스럽게 몸을 움츠리시였다. 한기천은 신문지로 굵다랗게 만 담배를 풀썩풀썩 피웠다. 곁엔 꾸겨진 캡이 놓여있는데 어데로 가자고 차비를 하고 나선것 같기도 했다.

《그래 무슨 문제를 의논하자고 왔소? 그러지 않아도 내가 한번 들려본다는것이 겨를이 없어서 그러질 못했소. 아마 복잡한 문제들이 많이 제기될거요. 적통치구역 일이라는게 그렇소.》

《저 한가지 제 소견을 말씀드려보자구 찾아왔어요.》

《어서 말을 하우.》

《우선 부녀회원을 좀 늘여볼가 해요.》

《부녀회원을 늘인다? 늘여야지요. 그래 안을 내놓아보우.》

역시 한기천의 어조는 서글서글하였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거리며 싱글싱글 웃기는 하는데 어딘가 속깊게 말을 받아주지 않는것도 같아 마음이 쓰이시였다.

《지금 백여호동네에 부녀회원이 모두 일곱명인데 이 힘을 가지고는 동네부녀자들을 이끌어나갈수가 없어요. 요새 여러날동안 형편을 알아봤는데 동네부녀자들 대부분이 부녀회에 들일수 있는 대상자들이예요.》

《아니 대부분이 대상자란말이요?》

한기천이 펄쩍 놀란다.

《그래요. 그가운데서도 이미 부녀회에서 대상으로 잡았던 아주머니네들은 거의 조금씩만 영향을 주면 인차 부녀회에 들일수 있겠어요. 가령 오봉애아주머니를 놓고보면 층층시하에서 부녀회에 들어두 일을 못한다는건데···》

《가만, 오봉애 사정은 내가 잘 아우. 그러지 말고 어디 잡은 대상자들의 이름부터 먼저 죽 꼽아보우.》

김정숙동지의 말씀이 길어질것 같아서 그러는지 한기천이 이렇게 서두르며 올방자를 고쳐 틀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말이 끊기운것이 안타까왔으나 사정을 다 안다는데 굳이 우기고 계속할수 없어서 수첩에 적어둔 이름들을 하나하나 꼽아내려가며 부르시였다. 배증녀는 아래방에 앉은채 불안스런 표정으로 김정숙동지와 한기천을 올려다보고있었다.

《정숙동무, 다 알겠소. 내가 벌써 동무한테 한번 얘기해준다는것이 그만 틈이 없어서 그렇게 됐소. 부녀회를 늘이자는 동무의 지향은 아주 좋은것이요. 하지만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여기는 상촌근거지와는 다른, 적들이 통치하는 지역이라는 특수성을 알아야 하오. 근거지는 혁명조직들이 다 합법적으로, 공개적으로 내놓고 활동하는 우리 세상이지만 여기는 걸음걸음 원쑤들의 탄압을 뚫고나가야 하는 비합법지하투쟁이요. 정수분자만 골라서 꾸려도 밀고나가기 어려운데 어떻게 온 마을 어중이떠중이 부녀자들을 조합식으로 혁명조직에 끌어들인단말이요. 뭐 동무가 의식적으로 그러자는것은 아니고 혁명을 위하여 하자는 일이겠지만 그렇게 하는것은 결국 혁명조직을 무의식군중속에 용해시킴으로써 적들앞에서 혁명조직을 무장해제하며 드러내놓는거나 다름없는 결과를 가져온다는것을 알아야 하우. 내 이 문제에 대해선 동무 오빠와도 론쟁한바가 있소. 그러나 동무 오빠는 원칙문제에서는 의견상치가 없다고 하면서 잘 연구해가며 하는것이 좋겠다고 했소. 동무처럼 그렇게 막 받아들이는것이 좋겠다곤 안했소.》

너무도 엄청난데로 말이 뻗어나가는바람에 김정숙동지께서는 아연해지시였다. 그러나 그이께서는 이어 정신을 차리시였다.

《저두 막 받아들이자는건 아니예요. 대상자들을 잡고 교양을 주어 준비시켜가지고 받아들이자는것이지. 그리구 적통치구역일수록, 적들이 탄압할수록 더욱 조직을 확대하고 튼튼히 꾸려야 하지 않겠어요.》

《허허, 그건 좋소. 영향도 주고 교양도 해야지요. 그대신 받아들일 땐 반드시 나하구 의논해주우. 쇠소리나는 정수분자만 된다면야 왜 혁명조직에 받아들이지 않겠소. 그러나 교양대상자를 잡는데서 두 계급투쟁로선을 바로세워야 하우. 특히 환경이 걸리는 대상은 뽑소. 정숙동무, 혁명은 계급투쟁이요. 절대로 개별적사정이나 인정에 끌려서는 안되우. 내 오늘 동무한테 간곡히 충고하자는것은 이 말이였소. 동무야 계급적처지로 보나 기준동지의 누이라는 립장으로 보나 또 상부조직에서 파견된 공작원이라는 위치에서 보나 일에서 과오가 있어서야 되겠소? 물론 아직 경험이 없어서 그렇긴 하겠지만···》

《그건 어떻게 하시는 말씀이예요?》

김정숙동지께서는 갑자기 심각해진 낯빛으로 한기천을 쳐다보시였다.

《말하기조차 거북하지만 그래두 동무를 위해서 좀 충고를 해야겠소. 듣자니 동무는 박대동이네 며느리와 아는 사이라면서?》

《그래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대답을 하며 여전히 한기천을 쳐다보시였다.

《동무는 그 녀자에 대하여서도 동정하고있다는데 그런 생각을 버려야겠소. 글쎄 인정적으로 보면 한동네에 살던 녀자가 그처럼 비참한 꼴이 되였으니 몹시 동정이 갈수도 있소. 그러나 그까짓 유산자놈들 가정에 들어가 물고뜯는 싸움판에서 희생되는 인간을 동정할 필요가 어디 있소? 우리는 박대동의 며느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박대동이 같은놈들을 때려부시고 수백만 우리 무산자대중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계급투쟁을 선포한 혁명가들이란말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뭐요. 원쑤의 울타리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든 무엇때문에 거기에 동정을 보내겠소? 동무는 녀자고 또 착한 처녀인만큼 인정이 깊은건 좋은 일이요. 하지만 이런 경우에 인정은 원쑤를 돕는것이라고 생각하고 싹 잘라버려야 하오. 그런 인정을 잘라버리지 못하니까 동무는 지금 매사를 인정에 쏠리여 이 아낙네도 들이고 저 녀자도 받아들이고 온 마을 부녀자들을 모두 부녀회에 끌어넣자는 우경으로 기울어지고있소. 재삼 말하지만 박대동의 며느리는 원쑤들의 울타리속에 사는 원쑤들과 한동아리라는것을 잊지 마우. 우리는 언제든지 박대동이를 처단하고야말겠소.》

김정숙동지께서는 입을 다물고 표정이 굳어지시였다. 무엇엔가 한번 되게 잡아휘둘리운것 같이 머리가 뗑하고 가슴이 후들후들 떨리시였다. 그이께서는 이때까지 장군님의 말씀을 놓고 이곳 사업을 연구해보셨기때문에 자기의 주장이 옳다는 확신도 있었고 또 옳은 그만큼 어떻게 하든지 한기천을 끈덕지게 설복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있으시였다. 그러나 분임이의 이야기가 이렇게 불쑥 튀여나와 말을 못하게 만들줄은 꿈에도 모르시였다.

배증녀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앉아서 민망스러운 눈빛으로 김정숙동지를 올려다보고있었다. 며칠전 한기천을 만났을 때 아무런 속맘이 없이 박대동네 며느리이야기를 했던것인데 그것이 똑똑하고 착한 공작원처녀를 궁지에 몰아넣는 빌미가 될줄은 물랐다. 더군다나 마을아낙네들 문제가 이야기될 때까지는 한기천이 그전과는 다르게 상당히 휘여드는것도 같았는데 그만 박대동네 며느리이야기를 꺼내면서부터 목에 피줄을 세웠다. 그럴줄 알았더면 자기가 박대동네 며느리이야기를 하지 않을걸 그랬다고 몹시도 뉘우쳐졌다. 그러나 어쨌든 오늘 자기네가 마을아낙네들이야기를 꺼냈다면 당장 웩떽 소리를 질렀을 한기천이가 그처럼 부드러워진것을 보면 공작원처녀를 함부로 다룰수 없긴 없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어 맘이 좀 훈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