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4

 

제 6 장

4

 

청학역앞에 있는 랭면옥은 김정숙동지께서 박광선소조와 련계를 맺기로 한 접선장소였다. 한발 먼저 라진에 보낸 조치삼네와도 이 국수집에서 매주 3자가 들어간 날에 만나기로 약조가 되여있었다.

한적한 읍거리에 귀청을 째는듯 한 고동소리가 울리더니 길가던 사람들, 가게앞에서 우물거리던 길손들이 동쪽을 향해 고개를 짓숙이고 《정오묵도》를 하였다. 《창씨》를 해라, 《신사참배》를 해라, 일본의 귀신한테 묵도를 해라, 왜놈들의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이 한적한 읍거리도 례외가 아니였다.

묵도시간이 끝날무렵 호화마차 한대가 양지를 마주하고앉은 청학랭면옥마당에 들어섰다.

풍뎅이를 벗어쥔 마부가 황급히 마차문을 열고 귀부인차림의 젊은 녀인을 부축해내리였다. 김정숙동지이시였다.

새틋하게 회를 바른 조선기와집에서 젊은 남자가 황급히 마중나와 례를 차렸다.

《어서 오십시오. 변변치 못한 저의 국수집에 왕림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서른고개에 올랐을가말가한 젊은이가 주인인 모양이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어느 고박한 촌선비가 살던 집같은 구식기와집에 내건 한문자로 된 국수집간판과 새파랗게 젊은 주인을 번갈아보시며 어쩐지 구색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시였다. 사위를 천천히 눈겨눔하면서 그이께서는 주인에게 느슨히 말을 건네시였다.

《청학랭면이 소문났길래 라진방문차에 우정 들렸어요. 영업이 잘되는가요?》

칼칼하게 생긴 젊은이의 꺼진 볼에 불그레 피기가 번졌다.

《거 뭐··· 메밀값이 비싸놔서.》

《요즘 여기 메밀금새가 어때요?》

《쌀값이 천정부지로 뛰여오르니 메밀값도 뒤질세라 자꾸 오르지요. 영업이 잘될리가 있나요. 저 혹시 부인님은 쌀도매상을 하신다는 어르신네···》

젊은이는 굳어졌던 혀가 다소 풀리는지 실토리 풀리듯 말이 슬슬 흘러나왔다.

김정숙동지께서는 하얀 이속을 드러내시며 방긋 웃으시였다. 첫 접선암호가 맞아떨어진것이였다.

주인의 안내를 받으며 그이께선 마루에 달린 유리미닫이를 열고 국수집안으로 들어가시였다.

겉보기와는 달리 집안은 양식으로 때벗이를 한 음식점이였다. 탁자와 의자를 놓은 넓은 식사방도 있고 화문석을 깔고 다담상을 놓은 귀빈실도 있었다. 그이께선 귀빈실로 안내되였다.

주인은 접대부에게 얼른 랭면 두그릇을 잘 말아오라고 이르고는 정색하여 그이와 마주앉았다.

《귀한분이 오신다는 련락을 이미 받았습니다.》

젊은 주인은 왜서인지 조급해하고있었다. 본론에 들어가긴 아직 이르다고 그이께선 생각하시였다. 여유를 가지려고 우정 말머리를 돌리시였다.

《국수집간판을 한문으로 썼던데 촌농부들이 알아보는가요?》

《그럼 어쩌겠습니까. 쇠통 조선글은 쓰지 못하게 하고 말도 못하게 하는데요. 일본말을 하지 않으면 차표도 팔아주지 않고 창씨를 하지 않으면 애들이 학교공부도 못하고 배급으로 주는 콩깨묵도 얻어먹지 못합니다. 일본귀신에게 묵도를 하지 않으면 덜미를 잡혀 경찰서에 끌려가 곤죽이 되게 얻어맞던가 콩밥먹기가 일쑤지요.》

조선사람을 동화시키려는 일제의 발악은 극에 달하고있었다. 망하는자의 단말마적 발악일것이다.

《저 함남도 어디선가는 창씨를 강요당하던 한 늙은이가 우물에 빠져죽었다고 합니다. 창씨를 하면 조상을 욕보이겠고 안하자니 애녀석들이 학교에서 쫓겨나 울고불고하지, 어쩌겠습니까.》

《그렇다고 값없이 죽어서야 되겠어요.》

《글쎄 말입니다.》

젊은이는 반색을 짓고 들썽하다가 목구멍으로 치민 말을 꿀꺽 삼켜버리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말아온 국수를 천천히 드신 후에야 별다른 기미가 없음을 확인하시고 넌지시 물으시였다.

《이 아근에 고마재네 집이 있다던데 혹 아시는지요?》

순간 국수집주인의 칼칼하던 얼굴에 피끗 미소가 어렸다. 《고마재》란 최종접선암호였다. 국수집주인은 정색을 하며 정중한 몸가짐으로 자기 소개를 하였다.

《제가 고마재입니다. 산에서 귀한분이 오신다는 련락은 이미 받았습니다.》

《김정숙이라고 합니다. 적구에서 얼마나 수고많으십니까?》

순간 고마재의 눈이 화등잔이 되였다.

《총 잘 쏘신다는? ··· 백두산의 녀장수로 불리우는 그 김정숙분이십니까?》

그이께서 방싯이 웃기만 하시자 고마재는 기가 차다는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난 녀장수라고 해서 키도 크고 위엄있는 장대한분이실줄 알았는데 이렇게 단아한분일줄은··· 당대의 녀걸을 내 집에 모셨은즉 이것만으로도 나는 혁명한 보람이 있습니다.》

반가와 어쩔줄을 모르는 고씨를 보니 그이께서는 오래동안 찾던 혈붙이를 불쑥 만난듯 형언할수 없는 친근감이 솟구치시였다. 국내공작을 하는 소조와 소부대원들이 자주 입에 올리던 《고마재》였다. 그것은 접선암호이기도 했으며 동지를 의미하는것이기도 했고 위험할 때 도움을 받을수 있는 은신처를 의미하기도 했다.

《난 고마재가 사람이름이라면 나이지숙한분일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 동무들속에서 그 이름이 불리워진게 오래전부터이거던요.》

그이께선 제집에 온듯 한 기분을 느끼며 방그레 웃으시였다. 그이께 있어 제집이란 동지들이 있는 곳이였다.

《그럴겁니다. 고마재란 사실 저의 맏형 고운명의 별명입니다. 혹시 아실지도 모르겠는데 우리 형은 유격대초창기부터 북만부대에 입대하여 싸웠는데 7군에서 군수관을 하다가 1936년에 전사하였습니다. 코잔등에 마마자욱이 있어 고마재란 별명이 붙은것 같습니다.

우린 3형제였는데 저와 둘째형은 맏형이 유격대에 들어간 다음부터 련계를 가지고 녕안쪽에서 지하공작을 해왔습니다.》

《그랬었구만요. 7군 군수관에 대해서 나도 들은 기억이 있어요. 고운명은 희생되였으나 그가 뿌린 씨앗은 이렇게 움트고 자라 혁명의 숲으로 무성해졌군요.》

그이께선 감개무량하여 시를 읊듯이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고씨형제는 온성과 그리고 여기 청학에서 혁명조직을 무수히 늘여나갔었다.

《우린 39년초에 온성에 나가 공작하라는 지시를 받고 국내에 나와 국수집을 꾸려놓고 련락이 와닿기를 기다렸는데 1년남짓이 소식이 없어 정말 속을 태웠습니다. 만주에 〈토벌〉나갔던 놈들이 두만강을 건너오며 만주를 평정했노라고 흰소리를 칠 때는 정말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후에 박광선소조와 련계가 맺어졌습니다. 조국광복회조직은 북부조선일대에 거미줄처럼 뻗어나갔습니다. 사실 이곳은 유격대의 치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번에 사령부에서 오신분을 만나니 정말 반갑습니다. 많이 지도해주십시오.》

《그런데 어떻게 온성역앞 국수집에도 고마재가 있고 여기 청학에도 고마재가 있는가요?》

그이께선 의아해서 물으시였다. 온성국수집에서의 접선암호도 고마재이고 여기서도 고마재를 찾아야 하니 말이다.

《예, 그건 온성국수집 주인은 저의 둘째형 고주명이고 여기 청학국수집은 형제중 셋째인 내가 맡아보기때문입니다. 접선암호는 다 맏형의 별명이던 고마재를 쓰고있습니다.》

그이께선 가슴이 확 달아오르시였다. 국내에 깊이 뿌리내린 항일혁명의 거목을 눈앞에 보는듯 하시였다. 만주광야에서의 간고한 항일혁명은 이렇게 조국땅에 지심깊이 뿌리박은것이였다.

그것은 이제 바야흐로 막을 열 전민항쟁의 뿌리이기도 하였다.

고씨형제네 막내인 고진명은 참배처럼 삭삭하면서도 침착한 젊은이였다.

청학지구에는 무장봉기조직이 착실하게 꾸려져있었고 반일지하조직체계도 정연하였다. 청학에는 제l, 제2, 제3의 접선장소가 있었는데 제1접선장소는 고씨네 집, 제2접선장소는 청학산속의 약수터부근 비밀련락장소, 제3의 접선장소는 청학산줄기에서 뻗어내린 저술령에서 한눈에 바라보이는 백학산 초대바위어방에 있다고 하였다.

하루밤을 고씨네 집에서 묵으신 김정숙동지께서는 이튿날 아침 제2접선장소인 청학산 비밀련락지점으로 떠나시였다. 조치삼네가 그곳에 와서 기다린다고 하였다. 그이께서는 산나물 뜯으러 가는 촌아낙네차림을 하고 고진명과 함께 떠나시였다.

10리쯤 산속으로 들어가니 산밑에 약수터가 있고 거기서 초간히 떨어진 곳에 아름드리 피나무가 있었다. 피나무꽃이 한창 피는 때여서 그 아근에는 온통 목구멍이 싸한 진한 향기가 진동하고있었다. 어스름속에서 젖빛피나무꽃이 희뜩거리고 꿀을 찾아온 벌들의 웅웅 소리가 현악기의 울림처럼 미묘한 음향을 내고있었다.

약수터쪽에서 국민복을 입은 다부진 사내가 엎드려 소처럼 물을 들이키고있었다. 경방단원이 분명했다. 저자가 무슨 냄새를 맡고 여기까지 쫓아왔을가싶어 그이께선 얼른 피나무뒤 잡관목속에 몸을 피하시였다.

한참이나 물을 들이키고난 《국민복》은 두릿두릿거리며 곧장 피나무쪽으로 왔다. 피나무둘레를 살피고난 그는 염낭에서 담배쌈지를 꺼내더니 두툼하게 만 마라초에 성냥불을 달았다. 성냥불빛에 푹 눌러쓴 모자밑의 얼굴이 드러났다. 뜻밖에도 《국민복》은 박광선소조의 한대원인 한창봉이였다.

《한동무.》

덤불속에서 움쭉 일어서시는 그이를 한창봉은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였다. 여기서 그이를 뵈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다.

《어쩌자구 이런델 나오신단 말입니까. 사람이 그렇게도 없단 말입니까.》

《무사했군요.》

하많은 의미가 담긴 말씀이시였다.

한창봉은 김정숙동지께서 도천리에서 공작하실 때 교양을 주어 유격대에 입대시킨 동무였다. 백두산밀영에서 그이의 지도를 받으며 백두산동북부의 연사, 무산일대를 넘나들며 지하공작을 한 동무였다. 방철룡의 도하를 엄호하느라고 물속에서 적들과 격투를 벌리였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난 그의 무훈담을 듣고싶었으나 회포를 나누실 시간이 없었다. 좀 있으면 날이 밝을것이다.

걸음이 빠른 한창봉은 날밝기 전에 그이를 제3접선장소인 백학산비밀근거지로 안내하였다. 그곳에 조치삼이 와서 기다리고있었다. 박광선과 이 지구 조국광복회조직 책임자들과 라진무장대 대장도 대기하고있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일일이 인사를 나누신 후 먼저 박광선에게서 소조의 사업정형부터 보고받으시였다.

《우리가 전화도청사업을 하면서 료해한데 의하면 대체로 비밀지령이 라진에 있는 관곡군마보충부에서 날아가고있다는것입니다. 며칠전에도 ㅅ지구에서 500명을 징집하여 남태평양전선에 보내라는 전화지령이 도청되였습니다.》

《ㅅ지구라면 서두수수전공사장을 의미할거예요.》

《그 말목장이 적들의 정탐활동의 본거지가 분명합니다.》

한창봉이 더 론의할 여지조차 없다는듯 찍어말하였다.

《그 내막을 더 파헤쳐야겠어요. 무슨 방도가 없을가요?》

그이께서 좌중을 둘러보며 물으시자 박광선이 언듯 머리를 들었다.

《대초도에 량형모라는 사람이 살고있는데 제국대학졸업생으로 한때 최남선의 수제자였다고 합니다. 한때는 김형직선생님을경모하여 선생께서 원동에 들어가실 때 따라갔는데 변심했는지 원동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몇해전에 라진에 나와 대초도에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최남선이처럼 일본놈턱찌끼를 먹고사는게 분명하지만 우리가 손을 뻗쳐 리용할수는 있을것 같습니다.》

한창봉이 말도 말라는듯 휘손질을 하며 도리머리를 저었다.

《최렬동무가 그 사람이라면 질색입니다. 여기 나와 일본놈들과 교제를 하는걸 보면 역리용되는것 같다고 합니다.》

최렬이라면 회령에 나와 공작하며 까치봉무장대를 조직한 우리 사람이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여유있게 말씀하시였다.

《하지만 량형모에 대해서두 료해해봐야겠어요. 과거는 어쨌든 죄를 지은 사람까지도 민족적량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전민항쟁대오에 다 묶어세워야 한다는것이 사령관동지의 웅지이십니다.》

그이의 말씀에 힘을 얻었는지 고진명이 서둘러 한가지 보고드릴 사실이 있다고 하였다.

《온성국수집 고마재네가 유격대오에서 떨어져 조직을 찾아 헤매던 사람을 흡수하여 말목장에 침투시켰다는 련락을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경력에도 퀴퀴한데가 있어서 접선을 보류하고있습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그가 어떤 사람인가고 따져물으시려다가 리순사의 행방을 아는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되시여 조치삼에게 그간 사업정형을 먼저 이야기하라고 하시였다.

왜서인지 침울해진 조치삼의 보고는 간단명료하였다.

《리순사의 행방은 찾지 못했구 수전공사장인부들이 라진의 비밀기지에 옮겨왔다는 확실한 정보도 쥐지 못했습니다. 다만 리준상이 관곡군마보충부에서 마구간청소부로 있다는것을 알아냈습니다. 정연동무가 그 사람을 막무가내로 만나겠다고 야단이여서 여기 조직원네 웃방에 가두어놓았습니다.》

그 어떤 예감에 그이께선 가슴이 활랑거리시였다. 온성 고마재네가 침투시킨 조직원이 바로 리준상이 아닐가싶으셨다.

조치삼이 침울해진 리유도 명백해졌다.

《군마보충부엔 누구도 얼씬 못한다는데 정연동무가 어떻게 리준상을 만난다는거예요?》

《한고향사람이 경찰서에 있다는지. 리준상을 취직시켜준것도 그자랍니다. 포스터사건으로 정연동무얼굴을 경찰들이 모를리 없겠는데 그자를 찾아간다는거야 호박쓰고 돼지우리에 들어가는격이 아닙니까.》

《가만, 그 순사이름이 뭐래요?》

《글쎄···》

《정연동무를 당장 데려오세요.》

김정숙동지께선 쿵쿵 뛰는 가슴을 더위잡으시고 움쭉 일어나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