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3

 

제 5 장

3

 

길이란 사람들이 다녀야 생기는 법이다.

대홍단지구에서 서두수수전공사 언제건설장이 있는 하원봉부근까지는 이깔나무가 꽉 들어찬 무연한 수림속에 직선으로 뻗은 오솔길이 있었다.

원래 이곳에는 길이 없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올기강류역에서 활동하던 시기와 김정숙동지께서 백두산밀영에 계시던 시기에 연사지구로 자주 다니시면서 여기에 길이 생겼다.

이 길은 뭇사람들이 드나드는 길이 아니라 백두의 혁명바람이 북부조선일대로 흘러드는 길이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1939년 6월 서두수가의 국사봉비밀근거지에서 국내정치공작원들과 조국광복회조직책임자들의 회의를 소집하시고 전국적범위에서 조국광복회운동을 힘있게 발전시킬데 대한 방침을 제시하시였다.

그 이후 김정숙동지께서는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는데서 중요한 전략적지대인 북부국경일대를 확고히 장악하기 위하여 이 길을 걷고 또 걸으시였다. 그뒤를 이어 수많은 정치공작원들과 조선인민혁명군소조, 소부대들이 이 길을 거쳐 국내깊이로 들어갔다. 오솔길은 다져지고 넓어져 어언 소발구길이 되였으며 여기서 전국각지로 새로운 길이 뻗어나갔다. 연사지구의 붉은 바람은 그 길로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회오리쳐갔다.

수십번 오간 사연깊은 오솔길을 다시금 걷는 김정숙동지께선 감회가 깊으시였다. 그이께선 여러 갈래의 오솔길중에서 어렵잖게 국사봉으로 가는 길을 가려내시였다. 이제 조금 가면 우뚝 솟은 삼태봉이 보일것이며 그 골짜기를 따라내려가면 7~8호가량의 귀틀집이 모여앉은 작은 마을이 보일것이고 마을옆으로 흐르는 강이 맞이할것이였다. 그 강이 서두수였다.

서두수기슭에 고삭은 나루배 한척이 흐느적이고있었다. 노도 없고 사공도 보이지 않았다.

관모봉쪽 함경산줄기에 시원을 두고있는 서두수는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합쳐서 흐르기때문에 두만강상류보다 물량이 훨씬 많았다. 나루배없이는 강을 건늘수가 없었다.

조치삼이 사공을 찾으러 마을로 내려갔다. 얼마후에 그는 버쩍 마른 사공로인을 데리고 나타났다. 사공은 감자밭김을 매던중이였는지 한손에는 호미를, 다른 손엔 새알같은 감자 몇알을 쥐고 시쁘둥해서 뒤따라오고있었다.

김정숙동지께선 로인의 손에서 흙묻은 호미를 받아들며 상냥스레 말을 건네시였다.

《나루터가 꽤 쓸쓸하구만요. 수전공사가 잘 안되는 모양이지요?》

로인은 허줄한 로동복차림의 조치삼과 토목치마에 삼베적삼을 입으신 김정숙동지의 차림새를 흘끔 곁눈질하더니 푸접없이 물었다.

《수전공사장을 떠나는 나그네요?》

《아니, 우린 찾아오는 길손이예요. 여기 공사장이 벌이가 좋다 해서 만주에서 오는 길인데요. 어째 형편이 여의칠 않은가요?》

《다 파먹은 금전판에 금덩이 얻으러 왔소그려.》

로인은 헛소문에 귀가 항아리되여 가산을 떠메고 찾아온 나그네들이 가엾은지 삭정이를 주어다 불을 피운 후 감자알을 던져넣고 자상한 이야기를 하는것이였다.

《달포전에 민속놀이구경을 하느라구 언제와 취수구공사장이 있는 하원봉에 갔을 때만 해두 수전공사로동자들이 어찌나 많은지 씨름판이 벌어지는 학교운동장에 발을 들여놓을 자리가 없었수다. 인부들이 무슨 회합을 하는지 우리 마을에두 자주 내려와 내 집 웃방에 모여앉군 했지요. 한데 요즘엔 수전공사를 중지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모두 뒤숭숭해서 일도 별로 하지 않는것 같습디다.

어제 밤엔 밤중에 우리 집 문을 두드리길래 나갔더니 인부들 네댓명이 보퉁이를 꿍져가지고와서 배를 태워달라고 하질 않겠소. 밤도망을 하는 사람들이 분명합디다.》

《공사가 중지된다는건 헛소문이라는 말도 있다던데 도망은 왜 친답디까?》

김정숙동지께서 짐짓 궁금한듯 말꼬리를 다시였다.

《헛소문일게 뭐요. 헛소문이라고 나발은 불어대면서도 극비밀리에 언제공사장에 징병과 〈보국대〉로 끌려왔던 사람들을 어디론가 실어가고있수다. 그 사람들을 어느 비밀공사장에 데려다가 일을 시키고 공사가 끝나면 다 죽인다는 소문이 나돌아서 밤중에 함바에서 뛰쳐나와 나루배를 태워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매일 대여섯명이 넘수다.》

로인은 누가 들을세라 사위를 두릿거리며 입속말을 하였다.

이야기하는 사이에 감자가 노릿하게 구워져 구수한 내를 풍기였다.

《신발을 보니 먼길을 온가분데 새알같은 감자래두 요기들이나 하시우. 내 생각엔 어디서 오는 길손들인지 돌아서는게 좋을것 같소다.》

사공로인은 좋은 사람이 분명했다.

김정숙동지께선 의향을 묻는듯 조치삼에게 말을 건네시였다.

《왔던김에 적은이를 만나봐야지요?》

《그럼, 예까지 왔다가 그냥 갈수야 없잖소.》

조치삼은 남정행세를 하며 이렇게 대꾸하고는 로인에게 다가붙었다.

《로인장, 나루배를 좀 띄워주시우. 사례는 섭섭치 않게 하리다.》

버쩍 마른 얼굴에 주름살이 얼기설기한 로인은 별로 내키지 않는듯 모닥불속에서 까맣게 탄 감자알들을 굴려내여 껍질을 벗기면서 느닷없이 물었다.

《임자네들은 어드메서 오는 길인가?》

《만주에서 살다가 제 나라 땅이라고 되찾아오는 길이우다.》

달라는 배는 안 내주고 꼬치꼬치 캐묻는 로인에게 다소 언짢아하는 조치삼의 대답이였다. 그러거나말거나 로인은 또 캐물었다.

《만주에서 살았다면 혹 봉천엘 가봤나?》

이 령감이 왜 이럴가 하고 경계심을 가졌는지 그이쪽을 흘끔 보고난 조치삼이 봉천엘 못 가볼리 있겠느냐고 흰목을 뽑았다.

《그럼 서탑을 구경한적이 있겠구만.》

조치삼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생뚱같은 탑소리가 나오자 어리둥절해서 입안의 소리를 하였다.

《아니요.》

《원, 봉천엘 갔다가 서탑을 보지 않고 오다니.》

시체사람이면 의례 서탑을 알아야 한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로인은 저으기 불만스러워 그를 흘겨보기까지 하였다. 조치삼은 실수를 했다는걸 깨닫고 인츰 둘러쳤다.

《아, 서쪽의 탑 말인가요. 그게 어찌됐는가요?》

시쁘둥해서 까맣게 탄 감자알을 나무등걸에 탁탁 털던 로인이 입을 다물어버렸다.

《로인님, 무슨 사연인지 어서 말씀해주십시오. 우리도 독립의 날을 일일천추로 기다리는 조선백성입니다.》

김정숙동지께서 살갑게 말씀하셔서야 로인은 마음이 헌헌해졌는지 입을 열었다.

《우리 막내녀석이 봉천에 가서 공업학교엔가 다니고있는데 그 애가 편지에 쓰기를 김일성장군이 봉천의학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떠나면서 명함장을 놓고 가셨다누만. 그런데 그 명함장뒤에 이런 글이 있더래.

〈서탑이 남쪽으로 넘어지면 조선이 독립된다.〉

그래서 내 아들놈의 학교애들이 매일같이 서탑엘 가본다질 않소. 서탑이 빨리 넘어지라고 돌을 자꾸 던져서 남쪽이 우묵하게 패웠다누만. 그게 년초에 온 편지이니 이젠 서탑이 남쪽으로 기울었을지도 몰라.》

그러자 조치삼이 금시 깨도가 된듯 무릎을 치며 맞장구를 쳐댔다.

《아, 그 서탑 말입니까! 암, 가보구말구요. 조선사람치고 독립의 날을 고대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서탑이 금방 남쪽으로 넘어질듯 기우뚱했더구만요.》

《그럼 그럴테지. 그게 언제나 넘어질고?》

《넘어질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내가 목재판에서 들은 소리인데 개성사는 로인이라던지 원산사는 늙은이라던지 꿈에 소 스무마리가 제앞을 지나가는것을 보았답니다. 잠에서 깬 그 늙은이가 참 상서로운 꿈이라고 생각하며 아침먹을 생각도 않고 이모저모 해몽을 해보다가 무릎을 탁 쳤답니다. 〈옳거니, 소 스무마리이니 소화 20년에 김일성장군님이 조선을 독립시킨다는 뜻이겠다.〉하면서 말입니다.》

《소화 20년이면 1945년?! 서탑이 무너질 때가 정말 멀지 않았어.》

사공로인은 그제서야 마음이 동했는지 모래불에 숨겨놓았던 노를 찾아가지고왔다.

한낮의 해볕이 재글거리는 강우엔 고즈넉한 정적이 깃들었는데 나루배는 서두수의 잔잔한 물결을 헤가르며 소리없이 미끄러져갔다. 우쩍 힘주어 노를 저어가던 사공로인이 누구에게라없이 속깊은 생각을 터놓았다.

《오늘은 노젓기가 한결 편하구만. 들끓던 수전공사장에 시름이 깃든건 공사가 중지되구 인부들을 비밀공사장에 끌어간다는 소문때문만이 아니였네. 왜놈들이 김일성장군님빨찌산이 다 녹아나고 만주가 평정되였다고 어찌나 나발을 불어대는지 어디 견딜수가 있더라구. 희망을 잃구 정처없이 어디론가 도망치는 사람들을 바래느라면 억장이 무너져내리는것 같더라니. 그래 배사공노릇도 손대기 싫었던거네. 오늘은 늙은 몸에도 기운이 솟네.》

로인의 노젓는 팔에 불끈불끈 힘줄이 솟았다. 배는 강복판의 소용돌이를 기운차게 헤가른다. 배코숭이가 뿜어내는 물이랑을 이윽토록 내려다보시는 김정숙동지의 심경은 말할수 없이 아프고 착잡하시였다. 정황은 예상했던것보다 더 위급하였다.

수전공사장에 심혈을 기울여 조직된 력량으로 묶어세웠던 로동자들이 모래성 무너지듯 산지사방으로 흩어지는것도 억이 막힌 문제였지만 그들의 마음속에서 희망의 등불이 꺼진채 떠나간다는것은 상상할수 없는 일이였다. 한시라도 빨리 가서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그이께선 일어나시여 로인과 함께 노를 저으셨다.

미구에 배는 서두수 맞은편 기슭에 닿았다. 사공로인은 답답한 속에 시원해지는 희소식을 알려준 길손들이라고 배삯을 받는것도 거절하였다. 김정숙동지께선 로인에게 절을 올려 사례를 하시였다.

김정숙동지일행이 물방아골밀영에 당도하신것은 자정이 넘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