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1

 

제 5 장

1

 

관동군 소지구《토벌》대가 틀고앉았던 천교령에는 지난해부터 나가시마《공작반》이 기여들어 갖은 모략을 다 꾸미고있었다.

요시다 잇세이도 명월구의 《우리 장모네 토장국집》으로부터 이곳의 《겨울별장》으로 옮겨앉았다.

그 집은 원래 백계로씨야인이 상점과 식당을 함께 운영하던 저택이였는데 잇세이의 눈에 들어 소유자가 졸지에 바뀌여버렸다.

잇세이가 《겨울별장》이라 칭한 이 집도 《우리 장모네 토장국집》처럼 잇세이라는 첩보의 왕거미가 도사리고앉은 정보모략소굴이였다.

춘분이 지났으나 벽난로에서 굵다란 장작이 불찌를 탁탁 튕기며 기세좋게 타고있었다. 하지만 잇세이의 가슴은 엄동의 겨울처럼 싸늘하게 얼어들었다. 그는 방금 첩자로부터 조선인민혁명군 김일성사령관이 조국해방3대로선이라는 대일최종작전방향을 내놓았다는 무전문을 받았다.

조국해방3대로선이라는것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과 그에 배합한 전민항쟁, 배후련합작전으로 일본의 기반으로부터 조선을 해방하는것이라고 한다.

아래다리가 매시시하여 안락의자에 주저앉은 잇세이는 정교하게 만든 유리장안에 걸어놓은 금치훈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선인민혁명군 소멸과 만주평정을 맹약하고 동만에 날아들었던 잇세이는 벌써 40년 겨울에 자신이 운수사납게 수렁판에 뛰여들었다는것을 깨달았다.

조선인민혁명군은 령활하게도 불리한 도전을 피해 물방울처럼 광활한 대지에 잦아들었다. 날고뛴다는 나가시마《공작반》의 특무들도 종시 김일성사령부의 종적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다행히도 이듬해 봄에 화전현 쟈피거우 산속에서 병으로 사망한 1로군 군장 위증민의 무덤을 찾아내게 되였다. 호위병이였던 중국인대원이 산에서 내려와 투항하면서 군장의 무덤위치를 밀고했던것이다. 나가시마《공작반》은 재빨리 무덤을 파헤쳐 위증민의 머리를 잘라다 내걸고 전투에서 사살하였다고 허위선전을 내돌렸다. 허형식의 경우도 다를바 없었다.

이러루한 모략으로 특무들은 현상금을 타먹고 잇세이는 만주를 평정했다는 장계를 궁성에 울리였다. 잇세이에게는 《천황》히로히도의 칙령으로 금치훈장이 수여되였다. 최고훈장을 수여받았지만 잇세이의 마음은 평온치 않았다.

땅속에 스며든 물은 때가 되면 샘줄기로 솟음쳐 개울이 되고 개울이 합쳐 강을 이루듯이 노호하는 항일의 대하를 이루어 제국의 아성을 들부실것이였다.

아닐세라 41년 봄부터 가을까지 김일성사령관이 친솔하는 소부대가 동만 각지와 백두산지구에 출몰하여 총성을 울린다는 소식, 뒤이어 원동에서 국제련합군이 조직되였다는 소문, 오늘은 또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에 호응한 전인민적봉기로 제국에 철추를 내린다는 청천벽력의 정보이다.

가장 무서운것은 조선반도가 몽땅 들고일어나는 전민항쟁이였다.

이해에 들어서면서 세계정세는 급변하여 도이췰란드도 내리막길에 들어섰고 일본도 중국전선에서나 태평양상에서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고있는 비상시국에 조선반도에서 전민봉기로 호응한다는것은 일본의 배속에서 폭풍이 터진다는것을 의미하였다.

잇세이는 금치훈장을 서랍에 줴던지고 벌떡 일어섰다.

무엇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몰라 마음을 진정하지 못한채 성난 맹수처럼 방안을 오락가락하던 그는 펼쳐놓았던 나가시마《공작반》의 내부교재를 다시금 집어들었다. 몇번이고 새겨본 문구가 다시금 화살처럼 눈알에 박혔다.

《···엄옥순의 정탐기법은 정탐자들 일체가 연구할바가 있다. 광대한 구역을 종횡무진 출몰하면서도 반탐자들을 매번 오리무중의 함정에 몰아넣는 그의 절묘한 수법은 실로 신비스럽다. 그가 장악한 지하조직망은 무려 150여개나 되고 통솔한 망원은 5만여명에 이른다고 하니 경악과 전률을 금할수 없다.》

이게 언제적의 자료인가? 조선인민혁명군에서 반일지하조직망을 일괄하여 총찰한다는 엄옥순이라는 녀공작원의 도천리-신파공작때라고 하니 1940년이전자료일것이다. 최후결전준비를 다그친다는 지금에는 그가 장악한 지하조직망이 열배 아니, 백배로 불었을것이다. 잇세이는 발밑이 뭉청 꺼지는것 같아 무서운 전률을 느끼였다.

이렇게 모든것이 끝장나는가? 《정한》의 념원도, 《대동아의 맹주》가 되려는 꿈도?

아니다, 요시다가문이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질수 없다. 조선이라는 고기덩인 절대로 뱉아놓을수 없다.

잇세이는 발딱 일어섰다.

뇌리에서 몇가지 방략이 번개쳤다.

첫째로, 정탐기지를 조선반도로 급히 옮겨야 한다.

둘째로, 조선인민혁명군 정치공작원들의 국내진출을 결정적으로 막아야 한다. 특히 엄옥순이 나타나면 전민항쟁세력은 우후죽순의 기세로 자랄것이다. 전민봉기를 결정적으로 사전에 좌절시켜야 한다.

잇세이는 책상옆에 붙은 호출단추를 눌렀다.

 

무덤속같은 감방에 내던져졌던 리준상은 갑자기 병원으로 옮겨졌고 수술을 두번이나 받았다. 몸에 들어가박혔던 총알 다섯알이 떨어지는 쟁그렁소리를 그는 어렴풋한 의식속에서 들었다.

그의 명은 질기기도 하였다. 젊은 육체는 또다시 죽음을 이겨냈다.

몸을 얼마간 움직일수 있게 되였을 때 리준상은 어디론가 실려갔다. 그가 끌려간 곳은 감방이 아니라 국화차내음이 향긋하게 풍기는 조촐한 응접실이였다.

여름샤쯔를 시원스레 입은 후리후리한 키의 젊은이가 다반에 차잔을 들고 들어섰다. 차잔 하나는 그의 맞은편 빈자리에 놓고 또 하나는 그앞에 가져다놓았다. 아득한 옛시절의 추억인양 국화꽃향기가 물씬 풍겨왔다.

뜻밖의 대접에 리준상은 눈길을 들었다. 자기 나이또래 젊은이의 길쑴한 눈과 딱 마주친 순간 두사람의 눈동자가 동시에 굳어졌다.

(이 사내를 어디서 보았던가?)

아주 낯익은 얼굴이요, 표정이였다. 방을 나가던 젊은이가 문지방에서 획 돌아섰다. 그도 자기를 알아본듯 하였다. 리준상은 가쁜 숨을 가까스로 톺고나서 물었다.

《여기가 어데요?》

《천교령이요.》

처음으로 떠오른 생각은 1차북만원정때 사령관동지께서 이 령에서 촉한으로 사경에 처하셨을 때 불사신의 넋으로 《반일전가》를 지어부르신 전설같은 사연이 태여난 고장이라는것이였다. 뒤이어 떠오른 불길한 생각은 한때 소지구《토벌》대가 틀고있던 이곳에 나가시마《공작대》가 기여들었다는 사실이였다. 그러니 그는 분명 나가시마《공작대》라는 왕거미줄에 든든히 걸린 날벌레신세가 되였다는것을 의미하였다.

《당신도 그 악명높은 나가시마<공작대> 성원이요?》

준상은 젊은이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당신이 동만의 소백초구에서 우리를 사령부로 안내한 그 <공비>가 아니요?》

젊은이의 입가에 야릇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 선이 선명한 입귀에 찍혀지는 회의적인 표정··· 갑자기 생각났다.

《선일이-》

순간 젊은이의 길쑴한 눈이 휘둥그래졌다가 가늘게 쪼프러졌다.

《그럼 자네가 리진사네 준상이란 말인가?!》

아연해서 입을 다물지 못하던 리선일이 《내 이름은 센니찌야.》하고 운명에 도전하듯 내뱉더니 사라져버렸다.

준상과 선일은 한어머니젖을 먹고 자란 형제아닌 형제였다.

선일의 어머니는 윈나루의 유일한 부호인 선주 남치용의 외동딸이였다. 그는 어떤 연줄을 타고서인지 도꾜류학을 갔다가 몸을 망치고 돌아왔다. 남치용은 노발대발하여 배속의 아이를 지우려고 별의별 수를 다썼다. 높은데서 뛰여내려보라고 윽박지르기도 하고 서슬을 먹어보라고도 하였으며 지어 봉덕사의 에밀레종의 녹을 긁어다 술에 타먹으면 아이가 떨어진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을 사서 봉덕사로 보내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만사가 허사였다.

그의 외동딸 진려는 왜서인지 독을 먹고 태아를 지켜냈다. 열달을 채워 아이를 낳은 후 그 녀자는 바다에 빠져죽었다. 마을사람들은 그가 죽은 곳을 진려곶이라고 불렀다.

준상의 어머니 양씨부인이 준상을 낳은지 보름이 되는 때인데 새벽에 지게문을 열고 나가보니 토방우에 분홍빛누비포대기에 돌돌 싼 애기가 있었다. 진려가 죽기 전에 애기를 그 집토방에 가져다놓은듯 하였다. 마을에서 리진사집이라면 가세는 그닥 풍족하지 못해도 량반의 도덕과 가풍이 있는 집으로 존대를 받고있었다. 더구나 양씨부인은 점잖고 부덕한 녀인이였다.

애기를 감싼 누비포대기안에는 치렁치렁한 머리타래와 함께 바지저고리에 학생모자를 쓴 사내녀석의 당콩알만 한 사진이 들어있었다.

어미없는 사생아는 양씨부인의 젖을 먹으며 준상과 함께 자랐다.

후에 남치용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선일을 데려다가 학교공부도 시키고 일본류학도 보내였다. 남치용은 라진항건설때 왜놈들에게 붙어 치부를 하고 양주업까지 벌려놓아 벼락부자가 되였다. 준상의 아버지가 남치용을 경멸하였기때문에 두 집은 남남처럼 지냈다. 서울에 중학공부를 떠난 후 준상은 선일을 한번도 만나지 못했을뿐더러 그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알지 못하였다. 외로운 알을 품어안아 키워놓았더니 독사새끼라고 선일이 유격대 《토벌》에서 제일 극악한 악질특무 간첩단체인 나가시마《공작반》일줄이야. 오강뚜껑으로 물을 떠먹은듯 께름직하고 속이 메슥메슥해났다.

국화차가 싸늘하게 식도록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바깥동정을 살펴보려 창문쪽으로 다가가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돌아보니 정장차림의 반백의 사나이가 안경알속에서 차겁고 쏘는듯 한 눈찌로 그를 겨눔해보고있었다. 사나이는 식은 차잔이 놓인쪽에 앉더니 그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하였다. 사나이는 금시 너누룩한 표정을 지으며 점잖게 자기 소개를 하였다.

《동남부치안숙정특별공작을 마무리짓기 위해 륙군첩보부에서 내려온 요시다 잇세이라고 하오.》

잇세이는 상대방의 기색을 넘보는듯 잠시 묵묵하더니 비죽이 웃으며 못박았다.

《우린 이미 세상에 남북만주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을 위시한 항일부대들을 일망타진했다는것을 공개했소. 지난해에는 허형식의 목을 베다 내걸었고 올해에는 조선혁명군을 떠받들고있던 마지막기둥그루라 할수 있는 박길송을 교수대에 매달았소. 갈팡질팡하던 잔존세력은 대체로 세뇌농장지구에 몰아넣었고.

당신은 지성인이니만치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고도 남음이 있을거요. 대일본제국은 조선이라는 땅덩어리를 집어삼켰을뿐아니라 이미 소화시켰고 만주와 중국대륙의 넓은 지역을 먹었으며 지금은 대동아성전으로 동남아지역을 파죽지세로 손에 넣고있소. 그런데 이미 위속에서 다 소화시켜버린 조선을 다시 찾겠다? 분별있게 처신하길 바라오.》

이미 모든것을 각오한 리준상은 태연히 응수하였다.

《날 교수대로 보내시오.》

잇세이는 갑자기 앙천대소하듯 껄껄 웃어대였다.

《박길송이처럼 공산주의는 세계의 청춘이다, 미래를 사랑하라, 미래에서 당겨올수 있는 모든것을 당겨오라고 력설하며 영웅남아답게 최후를 마치고싶단 말이지. 자넨 우리와 함께 가야 할 운명이야.》

잇세이는 길쑴한 눈에 능갈치는 웃음을 짓더니 그앞에 신문 한장을 밀어놓았다.

무심히 신문을 내려다보던 리준상은 초풍하리만치 놀랐다. 언제 찍었는지 그의 사진이 받쳐진 전향기사가 실려있었다. 눈더듬으로 대충 읽어내려가던 리준상은 상우의 차잔을 집어들고 힘껏 내던졌다.

《더럽고 요사스러운 놈들.》

잇세이가 날래게 몸을 피하는 바람에 차잔은 담벽에 가맞고 박살이 나서 떨어져내렸다.

잇세이는 독사같은 랭혹한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며 뇌까렸다.

《아직 이 신문은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네가 우리를 도와주면 이 신문은 영영 나가지 않을것이며 네가 우리 일을 거절하면 이 신문은 세상에 공개될것이다. 그러면 넌 살아도 죽은 목숨이요, 여기서 아무리 지조를 지켜 죽는다 해도 변절자의 오명을 면치 못할것이다.》

억울하고 분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잇세이는 손수건을 내밀며 달콤하게 씨벌였다.

《슬퍼말아,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의 슬픔과 비애, 분노를 나는 충분히 리해한다. 그러나 그 민족적의분은 항구적인것이 아니라 일시적인것이다. 현시대는 강국에 의해 국가와 민족의 경계선이 새로 그어지는 재분할의 시대다. 세월이 흐르면 새로 그어진 경계선안에서 조선사람이나 일본사람의 피가 혼탕되고 반목과 의분도 사라질것이다. 고려, 신라, 후백제가 서로 반목질시하며 서로 싸우다가 조선반도의 통일이 이루어진것처럼 대동아의 강약한 민족들은 공영권의 테두리안에서 평화롭게 살게 될것이다.

선견지명이 있다면 리군은 응당 이 성업에 몸바쳐야 하지 않겠는가.》

과연 섬오랑캐다운 강도의 론리였다.

《민족의 피는 물이 아니요. 물처럼 혼탕시킬수 없단 말이요.》

《혼탕시킬수 있다. 나는 이미 실천으로 증명하였다.》

잇세이는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손벽을 쳤다.

그러자 리선일이 소리없이 들어왔다. 잇세이는 그들을 마주 세우며 흡족해서 씨벌였다.

《임자들은 한어머니젖을 먹고 짜개바지시절에 함께 딩굴며 자랐다면서. 운명이란 어쩔수 없는거야. 함께 앞날을 개척해보게나.》

잇세이는 짜장 인자스럽게 두사람의 어깨를 량팔에 껴안고 두드려주더니 모든걸 그들에게 일임한다는듯 너그러운 표정을 지었다.

리준상은 그자의 팔을 뿌리치며 결연히 선언하였다.

《우리 나라 력사에는 박제상이란 사람이 있는데 그는 왜왕의 신하로 되면 많은 상과 높은 벼슬을 주겠다는 회유에 이렇게 대답했소. 내 차라리 내 나라의 개, 돼지는 될지언정 왜나라 신하로는 될수 없으며 내 차라리 제 민족의 매를 맞을지언정 왜나라의 벼슬과 록은 받을수 없다. 나도 그렇게 말할것이다.》

《그게 소원이라면 박제상처럼 장작불에 태워죽이라.》

잇세이는 싸늘하게 뇌까리고 사라져버렸다.

리준상은 결박당한채 사형장으로 끌려나갔다. 서슬푸른 두개의 총창이 잔등을 떠밀치였다.

초여름의 청청한 숲이 뒤설레이고있었다. 공지에 쌓아놓은 장작더미앞에서 그는 멈춰섰다. 싱그러운 숲향기를 마지막으로 페부 그득히 들여마시며 그는 가없는 창공을 바라보았다. 문득 류정연의 모습이 언듯 떠올랐다.

(용서하오.) 그는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 찰나에 총성이 울렸다.

쓰러진것은 그가 아니라 뒤에 총창을 꼬나들고 섰던 경찰놈들이였다.

《준상이, 뛰자구.》

선일이 그의 팔을 움켜쥐고 숲속으로 냅다 뛰였다.

젖먹던 힘까지 다 내여 달리던 리준상은 뇌리를 치는 그 어떤 예감에 불의에 돌따서며 뒤에서 헐레벌떡 따라오던 선일의 급소를 내질렀다.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진 그자에게서 권총을 뽑아든 준상은 선일의 이마빡에 총구를 겨눈채 매섭게 따지고들었다.

《이건 무엇을 위한 연극인가?》

《연극이라니? 나야 자네와 한 어머니젖을 먹고 자란 형제나 같은 사이가 아닌가. 자네 어머니한테 어찌 죄되는 일을 하겠나.》

《네가 어떻게 요시다 센니찌가 됐어?》

《글쎄 잇세이가 갑자기 나타나 제가 실수로 만든 아들이라 하더군.》

《네 어머닌 왜놈의 씨를 받을 녀자가 아니야. 그랬더라면 애당초 너같은걸 낳지도 않았을거야. 너의 어머닌 조선녀성이고 너에게 젖을 물려준것도 조선의 녀인들인데 그들을 배신하고 정체도 알수 없는 그 알량한 쪽발이를 애비로 섬기겠는가? 죽여버릴테다.》

격발기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선일은 화들화들 떨었다.

《말해, 날 살려낸 진의도가 뭐야?》

《나도 당신이 가는 길을 따르자는거요.》

예상밖의 뻣뻣한 대꾸였다. 소가 웃다 꾸레미터질노릇이였다.

《순사질 해먹고 나가시마〈공작반〉의 특무였던 네가?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개처럼 쏴죽일테다.》

선일은 그제서야 보자기를 벗어던지고 통사정을 하였다.

《자넨 나와 한어머니젖을 먹고 자란 죽마고우가 아닌가. 자네 나를 데리고 쏘련으로 가주게. 국제려단에서 혁명군노릇을 계속하란 말이야. 자네도 살고 나도 사는 길은 이 길뿐이야.》

부지중 잇세이의 음흉한 모략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리준상은 그 음험한 왜놈의 손발노릇을 하는 선일이가 참을수 없이 역겨워졌다.

《난 너와 한어머니젖을 먹고 자랐지만 결코 한길을 갈수 없어. 넌 민족반역자, 배신자야.》

평소에도 구슬퍼보이던 선일의 눈은 절망으로 컴컴해졌다.

이 가련한 인간에게는 총알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준상은 총을 거두고 돌아섰다.

뒤에서 선일의 흐느낌소리가 들려오는듯 했다.

리준상은 자유의 몸이 되였으나 그 역시 갈곳이 없었다. 세상은 넓어도 찾아갈 곳도 몸붙일데도 없었다. 왜놈들과 끝까지 싸우려는 결심은 마른 나무에 불붙듯 하였으나 혼자서는 아무 일도 할수 없었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사령관동지 가까이에서 가르치심을 받으며 산다는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이때처럼 절감해본적은 없었다. 령도자를 따르고 받드는 문제는 한 민족의 운명뿐아니라 구체적인간의 생활에서도 운명을 좌우하는 실천적문제였음을 그는 비로소 뼈에 새기게 되였다. 그는 류정연에 대해 생각하는것조차 저어하였다. 자기를 상실한 인간은 미상불 사랑도 잃게 되는가보다.

어려울 때나 희망이 없는 순간에 사람은 희망을 찾는다. 그는 그 희망을 찾아 줄곧 헤매였다. 그가 훈춘현 어느 마을에 당도했을 때였다. 경방단놈들이 길가던 그를 다짜고짜로 잡아끌어갔다. 잇세이가 어느새 그가 도망친것을 알고 뒤쫓아왔는가? 지칠대로 지친 준상은 될대로 되라 하는 심산으로 순순히 끌려갔다.

감자가는 망돌이 있는 넓은 공지에 끌려온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밭에서 일하던 농부들, 집집의 아낙네들과 아이들, 소학생들까지 매모조리 끌어온것을 보면 여기서 무슨 집회를 하자는 심산인것 같았다. 잠시후 모인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머리를 수굿하고있던 준상은 고개를 들었다.

피에 절은 갈가리 찢어진 옷을 입은 죄수가 끌려오고있었다. 얼마나 매를 맞고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던지 머리카락은 불에 그슬리고 얼굴은 짓이겨졌다. 발톱을 뽑히고 가드라붙은 몽당발에 무거운 쇠고랑을 끌며 죄수는 천천히 걸어오고있었다. 눈섭이 타버리고 터지고 부어오른 눈두덩밑에서 선량한 눈이 태연히 내다보고있었다.

검은 제복을 입은 경관이 왜가리청으로 고아댔다.

《조용들 하라. 이제부터 악질공비를 처형하겠다. 이자는 쏘련에 들어가있던 김일성빨찌산의 잔당으로서 지난해 우리 현에 잠입하여 불온사상을 류포시키고 장차 쏘련과 합세할 무장단을 조직하기 위해 조선으로 나가던중 체포되였다. 가소롭기 그지없는 행위이다. 조선과 만주는 물론 광활한 중국대륙의 대부분과 태평양상의 여러 나라들을 석권하고 아시아의 맹주로 된 대일본제국과 맞서보겠다는것은 달보고 짖는 개처럼 미련한짓이다.

이제라도 개심한다면 살려주겠다. 마지막으로 할말이 있는가?》

리준상은 저도 모르게 사람들을 헤집고 앞으로 나갔다. 쏘련에 들어갔다 나온 유격대원이라면 혹 그가 아는 사람일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사람은 너무도 처참하게 짓이겨져 누군지 모색을 도무지 가려볼수 없었다.

수인이 입을 열었다. 변성기전의 소년같은 맑고 챙챙한 목소리가 침착하게 울려왔다.

《여러분, 저는 조선인민혁명군에서 김일성장군님의 전령병으로 싸운 유격대원 김홍수라고 합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선 건재하시여 부대를 이끌고 만주 각지에로 자주 나오시였고 국내각지에도 여러번 나가서 일제놈들을 족치시였습니다. 지금 만주는 물론 국내 각지에도 곳곳에 혁명조직이 씨앗처럼 박히고 청장년들이 무장대를 꾸리고 훈련을 하고있습니다. 이제 장군님께서 최후결전의 총성만 울리시면 전민항쟁부대들이 도처에서 일떠나 전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일본제국주의숨통을 끊어놓을것입니다.

여러분, 조선이 해방될 날은 멀지 않았···》

김홍수의 목소리는 여기서 끊어졌다. 곁에 서있던 일본경찰이 군도로 그를 후려쳤던것이다. 뒤로 넘어진 그를 경방단놈들이 사지를 들어 끌어다 감자가는 매돌우에 올려놓았다. 매돌이 돌아가는 소리가 아츠럽게 들려왔다. 김홍수는 각일각 매돌밑으로 빨려들어가고있었다. 시뻘건 피가 매돌아래로 감자즙처럼 흘러내렸다. 그 순간 리준상은 김홍수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마지막으로 웨치는 소리를 들었다.

김일성장군 만세!》

《조선해방 만세!》

《왜놈들은 곧 망한다. 모두 장군님을 받드는 전민항쟁의 씨앗이 되라.》

비명을 지르며 통곡하던 사람들이 다 흩어져간 후에도 준상은 피에 벌겋게 절은 매돌앞에 말뚝처럼 굳어져있었다.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나니

잘 죽으면 오히려 영생하더라

 

김홍수의 최후가 바로 그런 값높은 죽음일것이였다. 아니, 리준은 상상도 못했던 애국의 피가 이 황량한 들판에 뿌려지고있었다. 죽음에도 각양한 죽음이 있다. 그중에서 오로지 죽어도 죽지 아니하는 죽음은 자기 수령, 자기 령도자의 뜻을 받들다 생을 마치는 죽음일것이다.

꼬마신랑이라 놀림을 받으면 두볼이 사과알처럼 빨개져 분개하던 그 애되고 천진스럽던 나어린 대원 김홍수가 어쩌면 그렇게 인생의 높은 경지에 올라설수 있었는가. 애오라지 사령관동지를 따르고 그분의 사상과 뜻, 의도를 관철하는 길이 조선독립의 길이라는 드팀없는 신념을 가졌기때문일것이다. 그보다는 혁명년조도 오래고 학식도 있는 리준상이지만 그처럼 투철한 신념을 지니지 못했기에 곡절을 겪었으며 김홍수보다 아득히 뒤떨어지게 된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기둥이 옳바른 지지점을 가지지 못하면 집이 무너지는것처럼 인간이 옳바른 인생좌표를 가지지 못하면 인생이 무너지고 허물어지고만다는것을 그는 똑똑히 알았다.

김홍수는 그에게 인생의 바른 지지점을 깨우쳐준 스승이였다. 그는 자신에게 마지막혼신의 힘을 모아 웨친것이였다.

장군님 받드는 전민항쟁의 씨앗이 되라고.

가자! 조국으로 가자, 그가 가려던 그 길을 가자. 그곳에서 씨앗이 되고 전민항쟁의 숲을 이루는 한그루의 나무가 되자. 이런 결심을 다지며 그는 매돌앞에 깊숙이 엎드려 절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