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7

 

제 2 장

7

 

멀리서 개짖는 소리가 어슴푸레하게 들려왔다. 알지 못할 위험이 고양이걸음새로 다가오는듯 하였다.

리준상은 펀듯 정신을 차리며 눈을 떴다. 굽도리로 빙 돌아가며 날창을 처박는듯 한 재빛천정이 머리우에 낮추 드리워져있었다.

(여기가 어딘가?)

그는 푹신한 이불우에 누워있는것 같았다. 손더듬을 해보니 마른 나무잎사귀가 손아귀에서 부서지며 버스럭거렸다. 일어서려고 상반신을 움직거리니 무서운 동통이 발끝에서 머리우로 줄달음쳐와 치를 떨었다.

그제야 모든것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산중턱을 타고가던 대오, 큰 배낭을 메고 맨뒤에서 가시던 김정숙동지, 너무도 반가와 소리쳐불렀었다.

《정숙동무!―》

그 순간에 총성이 울리고 어데서 나타났는지 적들이 갈가마귀떼처럼 날아내렸다. 마지막순간에 그의 뇌리를 친것은 적들이 내뒤를 밟았구나, 그러니 이 리준상은 적들을 끌고온 너절한 놈이 되고말았구나 하는 절망감이였다.

그가 굴러떨어진 곳은 눈밑에 락엽이 수북이 쌓인 웅뎅이였다. 낮추드리운 천정은 트레트레 흐린 하늘이였고 그 변두리에 꽂힌 날창은 이깔숲우듬지들이였다. 사위는 고느적하고 이따금 바람결에 날려온 마른 잎사귀들과 싸늘한 눈가루가 그의 몸을 덮어줄뿐이였다.

갈가마귀떼도 사라지고 콩볶듯 하던 총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바탕 끔찍한 꿈을 꾸고난것 같았다.

개짖는 소리가 더 또렷이 들려왔다. 적들이 수색을 벌리는것은 아닐가? 폭풍이 지나간 다음에야 이 썩은 락엽무지에 묻힌 인간을 기억해내고 찾으려하는것은 아닌가?

다음순간 김정숙동지가 어찌 되였을가? 하는 걱정이 피끗 떠올랐다.

그는 눈무데기를 헤집으며 몸을 일으켜보려 무진 애를 다 썼다. 일여덟마리되는 사냥개무리가 급작스레 달려와 왕왕 짖어댄것은 그 순간이였다. 몸피할 여유가 없었고 피할데도 없었다. 모든게 끝장이다. 그는 눈을 감아버렸다.

《이것들아, 그만 짖거라. 부상자를 썰매에 끌어올리자꾸나.》

석쉼한 로인의 목소리가 먼 하늘가에서 들려오는것 같았다.

리준상은 흔들리는 썰매우에서 다시 정신을 차렸다. 지옥행을 하는가부다 생각했는데 머리우엔 건듯 들린 오리알빛의 하늘이 열려있고 제법 해님조차 방글거렸다.

리준상을 구원한것은 사방대수림속에서 사냥으로 살아가는 최로인이였다. 로인은 사냥개를 거느리고 다녔다. 그것들이 합동을 하여 메돼지나 노루는 물론 큰곰 같은것도 물어메치였다.

사냥군막에는 집지기개가 마당에 놓인 관옆에 서슬푸르게 버티고서서 보초를 서고있었다.

최로인은 리준상을 산전막아래목에 눕히고 상처의 처치부터 해주었다. 총알이 겨드랑이를 스치고 지나간 자리는 경상이였지만 신다리의 상처는 중상이였다. 총알이 왼쪽신다리에 맞았는데 탄알이 뼈짬에 들어가 끼웠는지 한발자국도 걸을수가 없었다. 로인이 느릅나무 달인 물로 상처를 씻어내고 자비로 만든 고약을 발라주면서 장담하였다.

《이 고약은 가문비나무껍질과 청밀, 콩기름, 짐승털 태운 재를 섞어 만들었는데 특효가 있다네. 숱한 유격대원들을 살려냈지.》

《내가 유격대원이란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다 알도리가 있는게지. 자네 이름이 리준상이지?》

로인은 신통스레 그의 이름까지 거들며 히죽이 웃었다. 알고싶어 감질이 나게 만든 후에야 로인은 실토정을 하였다.

《엊그제 밤 유격대 녀대원이 산전막에 찾아왔댔네. 정숙이라구 삼도만유격구시절에 면목이 있던 녀성입데. 그의 말이 소백초구초입에서 적들과 맞불질할 때 한 대원이 총에 맞고 대오에서 떨어졌는데 찾을 방도가 없는가 합데다. 그와 함께 개썰매를 타고 현지에 가서 온밤 눈무지를 헤쳤지만 어디 찾을수가 있더라구.

날밝을무렵 떠나면서 그는 내 손을 잡고 울먹이면서 부탁합디다. 자넬 꼭 찾아 구원해달라구. 장군님께서 애타게 기다리시니 꼭 대오로 돌아와야 한다고 전해달라구 신신당부합디다.》

리준상은 말 못할 충격에 벌떡 일어서다가 찌르는듯 한 상처의 모진 아픔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로인을 덤쑥 그러안았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런 헛소리도 한다던가.》

그는 로인의 가슴에 어푸러져 울었다. 그새 무리에서 떨어진 외기러기신세가 되여 얼마나 애를 태웠던가. 가슴속에 꽉 찼던 매운 연기가 시원스레 빠져나가고 맑은 공기가 흘러드는것 같았다. 꺼져가던 마음속 등불은 심지를 돋군듯 기세좋게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아픔도 덜해지고 불사약을 먹은듯 기운이 솟구쳐올랐다.

《그런데 제 행방을 어떻게 찾았습니까? 개들이 추적했는가요?》

《아닐세. 우리 개들이 자네 냄새를 알기나 하나. 본적도 없는데.》

로인은 머리를 젓더니 어정거리며 마당으로 나갔다. 사냥개가 근엄한 자세로 보초를 서는 관뚜껑을 열더니 자루 하나를 들고오는것이였다. 낯익은 자루였다. 들고온것을 보니 그가 숯구이막사람들에게서 얻어 메고오던 수수쌀자루였다.

《이 수수쌀자루가 자네 행적을 알려줬네.》

리준상은 어안이 벙벙하여 로인을 쳐다보았다.

《산속을 훑으면서 보니 빨간 수수쌀이 눈우에 줄을 쳐놓은것처럼 흘러내린게 보이질 않겠나. 식량을 구하러 갔던 대원이라니 그 사람이 지나간 자리가 분명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눈을 살살 헤집으며 따라갔더니 소백초구어귀 수림속에 이 마대가 있질 않겠나. 그래 사냥개한테 마대냄새를 맡게 하고는 웅뎅이 락엽무지속에 빠져들어간 자네를 찾아냈다네.》

《흰눈우에 수수쌀이 흘러내렸다구요?》

리준상은 쇠몽둥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듯 아뜩해났다. 그는 부랴부랴 수수쌀마대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마대밑굽에 터진 자리가 있었다.

어디 걸려서 터진것도 아니요, 실밥이 가쯘히 잘라진것을 보니 마대에 미리 구멍을 내놓은게 분명하였다.

(그러니 인정을 베풀던 아편막놈들이 밀정이였단 말인가?!)

적들의 무서운 흉계에 말려들었다는 생각에 급소를 찔리운듯 아찔해졌다.

적들은 쌀마대에 미리 구멍을 뚫어놓고 떨어지는 수수쌀을 따라 그를 미행했으며 마침내 사령부가 속한 소부대의 행로를 알아낸것이였다. 그는 시우쇠빛으로 얼굴이 컴컴해지고 귀밑에서 쥐가 풀떡풀떡 일었다.

본의는 아니지만 그는 적들에게 사령부의 위치를 로출시켰으며 사령부로 적들을 끌고오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사령부를 위험에 빠뜨리였다. 적들의 포위에 든 사령부는 어찌되였을가? 자기때문에 이제 행로가 로출된 사령부소속부대가 어떤 곡경을 겪게 될것인가를 생각하자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무서운 절망감이 심장을 갈퀴손으로 움켜잡고 마구 비틀어대는듯 하였다. 추악한 배신자의 오명을 들쓴다 해도 변명할 여지가 없는 그였다.

어째서 일이 이렇게까지 꼬여들었는가? 실책의 실마리는 어데서부터 시작되였던가?

밀가루를 건지러 갔던 버새벼랑에서부터 시작되였는지도 모른다.

···벼랑우에서 총소리가 몰방으로 터졌을 때 그는 적들을 유인하려고 맞총질을 해대며 강웃쪽으로 냅다 뛰였다. 어깨박죽이 띠끔 하는 순간 그는 산아래로 눈덩이처럼 내리굴렀다. 적들은 강웃쪽으로 그냥 총질을하며 달려가고있었다.

다행히도 총알은 겨드랑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그는 빨리 김정숙동지와의 약속지점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구새통에서 연기가 몰몰 나는 산막을 띠여보았다. 언몸도 녹이고 마른 목도 추기고 피가 떨어지는 상처도 처치하고 뜨끈한 구들에서 원기도 얻고싶어졌다.

숲속의 산전막, 사냥군막, 아편막, 숯구이막들에도 밀정들이 배겨있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으나 리준상은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였다.

산막에는 늙수그레한 남정 셋이 있었다. 거무데데한 행색을 보니 숯을 굽는 령감들이거나 몰래 아편재배를 하는 농군들이 분명했다. 대평구로 가다가 산속에서 길을 잃고 승냥이까지 만나 봉변을 당했노라 했더니 먹을것도 주고 겨드랑이상처에 약도 발라주고 붕대도 처매주었다.

배가 부르고 더운 구들에 누우니 혼곤히 잠이 왔다.

준상은 화재가 난 산전막에서 몸부림치는 꿈을 꾸다가 소스라쳐 잠이 깨였다. 온몸이 땀에 떠있었다. 괴춤을 만져보니 권총은 그대로 있었다.

령감들이 대통의 담배를 태우며 두런거리고있었다.

《유격대가 자주 찾아오더니 요새는 통 발길을 안하는군.》

《들리는 말이 〈토벌〉에 거의 결딴이 났답디다. 겨우 빠져나간 유격대는 쏘련으로 들고뛰였다던지.》

《원, 세상에··· 이젠 누굴 믿고사노.》

준상은 일어나앉으며 넌지시 한마디 하였다.

《그건 왜놈들의 악선전입니다. 개구리가 몸을 움츠리는건 더 높이 뛰여오르기 위해서지요.》

령감들은 머리를 끄덕거리며 눈을 맞추더니 떠나려는 그에게 수수쌀마대까지 지워주었다.

《보매 범상한분같질 않은데 이거라도··· 그저 성의뿐이외다.》

그 수수쌀마대에 이런 쪼간이 있을줄이야.

하고보면 그 두상들이 태우던 대통에 재운것이 아편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탕개가 풀렸을가? 후회란 언제나 때늦은 법이다.

텅 빈 삿갓봉숙영지에 당도했을 때 그는 자기를 기다려주지 않은 사람들이 야속했었다. 산전막화재때문에 련락원대렬에서 떨어졌고 아편막에 누워버린때문에 또 끈떨어진 뒤웅박신세가 되였건만 그는 자기를 돌이켜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대렬에서 떨어진다는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그는 너무나 잘 안다. 그것은 적들이 욱실거리는 적구에 홀로 남는다는것을 의미한다. 우익도 좌익도 없고 후방도 없는 전선에서 홀로 싸운다는것을 의미한다.

지금같은 형편에서 홀로 싸울수 있는가? 하늘로 오르자니 길이 없고 땅으로 들어가자니 문이 없다는격이다.

여기서 이렇게 모든것이 끝난단 말인가. 그의 눈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고였다.

행여나 하여 숙영지를 어정거리던 그는 작식터가 자리잡았던 곳에서 바위에 긁어놓은 아래로 향한 화살표식을 보았다.

바위밑을 손더듬했더니 봇나무껍질이 집혔다. 거기에는 《로정 변함없음.》이라는 글이 씌여져있었다.

온갖 억측과 불신, 노여움이 삽시에 봄눈슬듯 하였다. 그는 수수쌀포대를 지고 정신없이 달렸다.

한데 적들이 조명등을 환히 켠 무대우에서 헤둥거린 꼭두각시였을줄이야. 이 리준상이 어떻게 왜놈의 잔꾀에 놀아나는 속물이 될수 있단 말인가.

경멸이 어린 방철룡의 눈빛이 언듯 떠올랐다. 다부산자를 입고 동만특위에서 거들거린 자기에 대한 멸시일것이다. 국제당의 지시를 력설했을 때 창백해지시던 김정숙동지의 모습도 새삼스레 떠오른다. 측은하게 바라보던 그 눈빛, 잘못 생각하면서도 곧장 옳다고 우겨대는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눈빛이랄가.

하고보면 자신은 일생동안 그 무엇인가를 찾아 방황해온셈이 아닌가. 분명 제 무리를 찾지 못한 외기러기였다. 기러기떼는 선두기러기를 따라 대양을 건느고 대륙을 지나 목적지로 간다.

혁명을 한다고 동분서주해왔지만 뒤돌아보니 무엇 하나 건질것 없는 텅 빈 인생이였다.

타오르던 마음의 등불은 급기야 꺼져버렸다. 그는 빛없는 암흑의 나락으로 서서히 꺼져들어갔다.

상처는 벌겋게 세나면서 곪기 시작하였다. 고열이 나고 곪는 상처가 쑤셔대여 한잠도 잘수 없었다. 다리는 통나무처럼 팅팅 부어올랐다. 꼭 구원해달라던 당부를 받은지라 있는 지성을 다해 간호하던 최로인도 벌겋게 세나는 상처자리를 보더니 꺼지게 한숨을 쉬였다. 더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던지 관속에 넣어두었던 낟알을 꺼내 굴뚝모퉁이를 파고 묻는것이였다. 적들의 수색질이 너무 심해서 관속에 숨겨두었던 낟알이였다. 로인이 죽은 다음에 눕자고 좋은 나무를 골라 마련해놓았던 관을 나그네에게 먼저 양도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였다.

리준상은 자기에게 죽음이 가까와왔다는것을 알았다. 온몸이 열에 들떠서 정신이 혼미했지만 너무나 상처가 쑤셔대서 도시 잠들수 없었다. 채독처럼 부어서 화농하는 신다리를 굽어보면서 그는 이제 하루이틀 더 지나면 화농이 밸이나 방광에까지 미칠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마지막이다. 결국은 이 외진 사냥군막에서 속절없이 죽게 될것이였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많은것을 생각한다고 한다. 하지만 리준상은 오직 한가지만을 생각하였다. 그것은 차디찬 얼음물속으로 제 먼저 들어가시며 남긴 김정숙동지의 목소리였다.

《우린 김일성장군님을 곧 조선혁명이라 생각합니다. 그분의 구상과 뜻을 따르고 기어이 관철하는 길이 혁명의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바로 여기에 조선의 혁명가들 아니, 온 민족의 삶의 좌표가 있는게 아닐가요.》

그이는 돌아갈 때 더 론쟁해보자고 했었다.

론쟁하고싶었다. 어떻게 그런 신념이 굳혀졌는가를 알고싶었다. 어째서 그들과 자신사이에 차이가 생겼는가를 알고싶었다.

마음을 잡아찢는듯 한 괴로운 의혹을 가실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마지막시각에조차 안정을 얻지 못하고 방황속에 눈을 감는다는것은 너무나 비참한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숭상해오던 리준의 시를 곱씹어 외우고 또 외웠다.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고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니라

그릇살면 죽음만 같지 못하고

잘 죽으면 오히려 영생하니라

···

 

그는 자신에게 물어본다.

(준상이, 너의 삶은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였더냐?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다는것은 어떤 삶이여야 하는가?)

그는 그 대답을 도시 찾을수 없는것이 통절하였다. 그자신은 조선의 독립과 혁명의 승리를 얼마나 열렬히 갈망했던가. 반평생의 모든 노력을 다 바쳐 그리도 힘들게 톺아오른 령마루우에서 그는 허무와 오욕에 몸부림치며 이역의 외진 산중에서 죽어가고있다. 결국 인간이란 이렇게 되고마는것인가. 여직 남을 기만한적 없고 자신을 욕스럽게 한적도 없었던 량심인임에 틀림없는 그가 어째서 배신의 오욕을 쓰고 이렇듯 값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였는가?

자신도 대답할수 없었고 그 리유를 말해줄수 있는 사람도 곁에 없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자기의 한생의 빚을 되새겨본다고 한다.

리준상은 정연이와의 일만을 돌이켜보았다. 방학때 고향에 돌아가면 야학방에는 저녁마다 코흘쩍이 개구쟁이들, 외태머리 처녀애들이 바깥채가 미여지게 모여들었다. 그들에게 글을 가르치느라면 뚫어져라 바라보는 소녀의 물기머금은 까만 눈과 어쩔수 없이 마주치는것이였다. 그러면 그 눈은 거센 빛을 뿜으며 휘둥그래지는것이였다. 준상은 까닭없이 가슴이 두근거려 그쪽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무진애를 다 썼으나 그 강렬한 빛은 살을 뚫고 마음속까지 스며드는것 같았다. 중학을 졸업할무렵 그 까만 눈의 소녀가 서울바닥의 그의 하숙집에 나타났다. 소녀가 아니라 어언 처녀꼴이 잡혔다. 거센 빛을 확 뿜는 그 눈을 어찌 잊었으랴.

《나 류사공네 정연이야요.》

《아니, 여길 어떻게?》

《공부하고싶어서 집을 몰래 나왔어요.》

그 능청스런 검은 눈은 보고싶어왔다고 말하고있었다.

불달린 화살에 심장을 정통으로 맞은듯 가슴이 확 달아올랐었다. 한데 편지 한장 써놓고 훌쩍 떠나버리다니··· 그는 응당 정연을 손잡아이끌고 함께 걸어야 했었다. 두 내물이 합쳐 바다로 흘러들듯이 사랑의 하나가 되여 줄기차게 흘러 혁명의 바다에 뛰여들어야 했었다.

(정연이, 할수만 있다면 이 옹졸하고 용렬한 사내를 용서해주오.)

정연을 만나 용서를 빌고싶었다. 그만은 이 준상을 리해해줄것이다. 깨끗함을 보증할것이다. 그의 리해를 얻고 그 빛나는 검은 눈을 바라보며 마지막숨을 거둘수만 있다면 가슴속아픔이 다소 덜릴듯싶었다.

리준상은 헐떡거리며 지게문을 열어젖혔다.

로인은 어데 갈 차비인지 개썰매를 메우고있었다.

《저, 로인님···》

《이 사람, 좀 께름직해도 의원을 모셔와야겠네.》

《아니, 안됩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이젠 늦었습니다.》

리준상은 열에 들떠 헐떡거리며 서둘러 말을 이었다.

《저를 위해 할수만 있다면 한가지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그러게.》

《대평구··· 계수촌에 라진서 온 윈나루집이 있습니다. 그 집에 가서 내가 여기 있다는걸 알리고 누구든 데려다주십시오.》

로인은 저녁무렵에 떠나갔다가 새벽에 돌아왔다. 정연의 이모가 함께 왔다. 그는 울음부터 터뜨렸다.

《어쩌다 이렇게 됐소? 여기 있으면서 정연이 속을 그렇게도 태웠소?》

《정연이는요?》

《그 앤 임자를 찾아 만주로 나왔다는데 우리 집엔 오질 않았네. 잘못됐다는 흉흉한 소문도 있네만···》

머리속에서 무엇인가 와지끈 부러져내리는가싶었다. 그는 실신해버렸다. 마지막기대마저 꺼져버린것이다.

(불은 죽으면 죽었지 식는 법이 없다더니··· 아, 정연이!)

그는 더없이 귀중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감았다. 가슴은 마냥 지끈거리는 질둔한 아픔으로 마지막안식마저 주려하지 않는다.

빨리 종말이 왔으면··· 이 고통이 끝났으면···

《여보게, 이 사람.》

이모가 다급히 잡아흔든다.

《이 사람, 자넬 찾아왔던 새애기가 있네.》

리준상은 안깐힘을 써서 무거운 눈시울을 쳐들었다.

이모의 목소리가 아득히 먼곳에서 들려오는듯 했다.

《어슬녘인데 누군가 문을 두드립데. 〈여보세요, 여기가 라진서 온 윈나루집인가요? 리진사댁 아들이 오지 않았는가요?〉하질 않겠소.

자넬 잡으러 왔나싶어 사지가 떨려납데. 우린 그런 사람 모른다고 딱 잡아뗐는데도 가질 않고 문밖에서 이발을 똑똑 쪼으며 기다리질 않겠나. 창구멍으로 내다보니 구수하를 건너왔는지 온몸이 홀딱 젖어 치마자락으로 물이 떨어집데. 좀더 있으면 옷이 소가죽처럼 될판인데도 돌아갈 잡도리가 아니더라구. 령감이 말하데. 저렇게 떨면서 가지 않는걸 보니 나쁜 녀자같진 않다구. 문을 열어주니 온몸이 얼음버캐가 된 새애기가 문지방에 쓰러집데.

여사모사해서 대렬에서 떨어진 자넬 찾아 헤매다가 그 지경이 되였다질 않겠나.》

이모는 옷고름으로 눈굽을 훔치였다.

《장정이 제 사람들을 찾아오지 못할가봐 아녀자가 이 고생을 하는가고 했더니 〈이모님, 아닙니다. 사람이 바른길에 들지 못하면 헛고생만 하고 인생을 망칩니다.〉하질 않겠나.

참, 여기 편지를 두고갔소.》

리준상은 눈을 번쩍 떴다. 무슨 힘이 솟구쳤는지 웃몸을 반쯤 일으켰다. 최로인이 얼른 잔등을 받쳐주고 이모가 광솔불을 가져다 바투 비쳐주었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읽어내려갔다.

《리준상동무, 어떤 일이 있어도 대오를 찾아오십시오. 우린 애타게 기다리다가 예정된 로정대로 행군해갑니다. 장군님께선동무를 꼭 데리구 가야 한다고 하셨어요. 인생에는 갈 지자도 있고 곧을 직자도 있다지만 수백수천의 대중을 바른길로 이끌어야 할 사명을 지닌 혁명가에게 갈 지자도 허용할수 없고 방황이란 더욱더 있을수 없는 일이라 하셨습니다. 사령부를 끝까지 찾아오는 이번 걸음이 동지에게 인생의 좌표를 찾는 길이 되리라 믿습니다.

다시 만나 돌아올 때 하자던 론쟁을 계속해보자요. 조선독립을 갈구하며 이역의 하늘아래서 배를 가르고간 리준의 생이 어찌하여 결실없이 이슬처럼 사라졌는지, 과연 어떤 희생이 죽어도 죽지 아니함인지, 사령관동지의 구상과 뜻을 받드는것이 왜 조선혁명승리의 길로 이어지는지. 우린 동무가 돌아오리란걸 믿어요.

김정숙》

쩝쩔하고 달짝지근한것이 괴여서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그것은 다시 눈굽으로 솟구쳐올라 떨어졌다.

리준상은 여직껏 속썩여온 모든것, 마음속 모대김을 눈물에 녹여 쏟으려는듯 소리없이 오래동안 울었다. 그러다 문득 울음을 그치였다.

좀전까지 생명의 불빛이 꺼진듯이 보이던 눈은 지금 밝고 강렬한 빛으로 타오르고있었다. 생에 대해 갱신한듯 한 얼굴이였다. 꺼져버렸던 마음의 등불이 다시금 피여오른것이였다.

《로인님, 칼을 좀 가져다주십시오.》

《칼?! 이 사람 어쩌자고 그러나?》

이모가 놀란다.

《이모님은 너부죽한 돌을 좀 구해다주십시오.》

어리뚱했으나 최로인이나 이모는 그의 어조에 풍기는 완강한 그 무엇에 눌리워 요구대로 칼과 돌멩이를 가져다주었다.

리준상은 짐승가죽을 벗길 때 쓰는듯 한 크지 않은 칼을 돌에 갈기 시작하였다. 온밤 칼가는 소리가 썩썩 사냥군막을 울리였다.

날이 밝자 리준상은 자기를 바깥으로 옮겨달라고 하였다.

산전막뒤 마른 잔디밭이 있는 곳에 나앉은 리준상은 밤새 갈아 날이 선 번들거리는 칼을 이윽히 들여다보았다. 이모와 최로인이 우들우들 떨면서도 그의 눈빛이 하도 예리하게 번뜩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는 칼과 말을 나누듯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살아야 한다. 살아서 싸워야 한다.》

리준상은 다리의 상처에 칼을 콱 박았다. 그리고 힘껏 잡아돌렸다. 모진 아픔에 악 소리를 지르며 뒤로 훌렁 넘어졌던 그는 다시 일어났다. 얼굴에서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그는 칼을 두번, 세번 잡아돌리며 리준의 시를 읊조렸다.

 

아, 살고 죽는건

모다 자신에게 있더라

하거니 사람아, 오로지

참된 삶과 죽음의 뜻 힘써 알라

···

 

칼을 내던지고난 리준상은 최로인에게 부탁했다.

《내 이를 악물고 참을테니 로인님, 힘껏 상처 곪은데를 쥐여짜주시우.》

로인은 그를 타고앉아 상처를 눌러짰다.

누렇고 뻘건 썩은 농즙과 칼날에 끊긴채 썩지 않은 살들이 왈칵왈칵 쏟아져나왔다. 농즙속에 뼈짬에 끼웠던 총알도 섞여나왔다. 큰 짐승을 하나 잡아놓은것만치나 피고름이 흘러내렸다.

《이젠 그만할가?》

한참후 최로인이 물었다.

《이젠 소금물로 상처를 씻어주시우.》

이모가 얼른 소금물을 타가지고 왔다. 로인은 그를 깨끗한 곳으로 옮겨눕히고 소금물로 씻어주었다.

이틀동안 그는 《수술》한 다리가 어찌나 쿡쿡 쏘며 아팠던지 이를 악물고 땀을 쫙쫙 흘리며 매삼을 쳐야 했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줄곧 열두시간을 내처 잤다. 깨여나니 머리가 좀 거뜬한것 같았다. 열이 내리는 모양이였다.

이모가 기뻐하며 죽을 쒀오고 최로인이 산꿀을 한사발 들고왔다.

《사람두, 내 관을 먼저 가져가려나부다 했더니 그렇게 렴치없는 젊은인 아니였구만.》

로인의 말에 준상은 처음으로 소리내여 껄껄 웃었다. 숨막히는 골방에서 자유로운 세상에 뛰쳐나온듯 어쩐지 새롭고 기꺼운 기분이였다.

한 인간의 소생에 바쳐진 김정숙동지의 남모르는 지성이 가슴저리게 되새겨졌다.

보름쯤 지나니 그는 나무막대기를 짚고 간신히 일어설수가 있었다.

《이젠 어쩌려나?》

이모가 묻는 말이였다.

《가야지요.》

《어데루?》

리준상은 북만으로 갈 결심이였다.

버새벼랑아래 소로 제먼저 내려가며 하시던 김정숙동지의 목소리가 다시금 뇌리를 쳤기때문이였다.

―동무는 북만부대들에 사령관동지의 지시를 전달할 임무를 받은 몸인데 찬물속에 들어갔다가 화상자리가 도지면 어쩌자고 그러는가. 장군님은 조선혁명이고 그분의 뜻을 관철하는 길에 혁명승리의 길, 조국해방의 길이 있다는걸 명심하세요.

맡은 과업을 수행하는 길이 대오로 가는 길이였다. 김일성동지께로 가는 길이였다.

희망의 등불이 손짓해부르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