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6

 

제 8 장

6

 

불행에 처한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누구나 필요한 일을 해야 한다고 굳이 주장해왔던 리풍우는 이즈음 계몽활동에 발벗고 나섰다. 그는 신파읍내 로동자촌들과 농촌마을들에 야학을 설립하는 운동을 벌리는 한편 얼마전에는 신문지상을 통해 전국의 학생들에게 다가오는 여름방학을 농촌문맹퇴치에 바쳐달라고 간곡하게 호소하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오늘아침에는 전국각지의 학생들로부터 수십통의 편지가 한꺼번에 날아들었다.

리풍우는 손에 닿는대로 한통씩 잡아 성급히 읽기 시작하였다 처음으로 집은것은 연한 옥색의 네모난 봉투였다. 거기에는 평양녀고 채정미라 씌여있었다.

《선생님, 퇴락한 민족의 넋을 붙안고 몸부림치시는 선생님의 고귀하신 모습을 보고 끝없이 감동되였습니다.

조선민족의 팔할을 차지한 농민 그리고 농촌의 무산아들들과 찌는듯 한 여름날을 방종하게 허비할 소학생들을 위해 여름방학을 바쳐달라고 하신 선생님의 그 극진한 호소를 접하고야 어찌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저는 부유한 나라에 태여난 몸이였다면 여름을 리용해서 려행도 다니고 피서지를 찾아가기도 하련마는 가난한 조선의 딸로 그런것을 바랄수는 없습니다.

방학이 오면 시골로 돌아가 다만 얼마동안만이라도 어린이들을 모아놓고 한자의 글이라도 가르치며 비오는 날 호박잎을 머리에 얹어놓고라도 유익한 노래를 배워주겠습니다.》

리풍우는 대번에 가슴이 얼얼해졌다. 그 상냥하고 착한 결심이 그의 가슴을 이상한 련민의 정으로 부풀어오르게 하는것이였다.

《채정미.》

그는 련모하는 심정이나 다를바없는 애틋한 심정으로 다시한번 녀학생의 편지를 읽었다.

그것은 눈물이 있고 의분이 있고 감개와 충정이 있는 목소리다. 리풍우는 머리가 무거워서가 아니라 욱신거리는 흥분과 감격때문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자기의 목소리에 대한 대중의 반향은 컸다. 나라와 겨레를 위해 바치려는 자기의 한 작은 소원이 너무도 큰 사회의 감격을 불러일으킨 모양이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동경 어느 음악학교에서 공부하고있는 한 녀학생의 편지를 뜯었다.

 

《방학후 하기순회음악회나 끝나면 문맹아들을 동무삼아 우리 집 농원에서 몇주일 살아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평생 자선과 수양을 목적으로 한 저에게는 상당한 위안으로도 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촌의 논물에 잠긴 개구리 울음소리까지 그리워지는군요. 그리고 한번도 보지 못했으나 마음속에 퍼그나 가까와진 선생님의 얼굴 또한 그리워집니다.

존경과 더불어 련민의 정을 안고··· 설정향》

 

리풍우는 그것을 읽자 천천히 주먹안에 편지종이를 꾸겨쥐였다. 그것은 신성한 사업에 대한 거대한 모욕처럼 느껴겼다. 허영과 방종에 젖어버린 이 녀자의 들뜬 편지만 아니였어도 리풍우는 대단히 드물게 맛보게 되는 후더운 감정에 오래도록 취할수 있었다. 그러나 이 엄연한 사실, 자기를 모욕하고 자기의 정당한 행위를 우롱한 그 분격할만 한 사실은 드디여 세상을 향해 웨친 자기의 호소가 만인공정의 감격만을 자아낸것이 아니라 시대의 풍조에 들떠 돌아치는 젊은이들의 감상적인 기분도 자극하였다는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슬픈 일이였다. 민족이 겪는 이 나라의 비극을 체감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것으로 영원한 멸망을 고하게 되거나 보다 더 암담한 비애를 맛보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누구나 오늘은 자기가 살고 민족이 살고 겨레가 살아야 할 길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열렬히 모색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우선은 계몽하는 길이다. 인구의 팔할을 차지한 농촌의 계몽, 농민의 계몽을 이룩하는 길이다. 모든것을 농촌에로! 모든 힘을 농촌계몽에로! 리풍우는 이것이야말로 절박하고 또 절박한 민족운동, 사회운동으로 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리풍우는 책상서랍을 쭉 뽑았다. 그리고 책상우에 널린 편지들을 주룩 모아 서랍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한달가까이 청탁을 받아놓고 완성하지 못한 원고를 오늘은 기어이 끌내볼 결심으로 달라붙었다.

그것은 서울에서 발간되는 좌익계통의 한 잡지에서 《현재의 조선과 앞날의 조선》에 대한 일종의 정치리론문제에 견해를 표명해달라는 청탁이였는데 리풍우는 그새 번다히 다닥치는 일때문에 눈코 뜰새도 없었지만 그것이 이만저만한 탐구와 정력을 요하는 글이 아니여서 하루하루 미룬것이 결국 오늘에 이른것이다. 리풍우는 자기가 시작해놓은 글의 첫머리를 조용히 눈으로 읽어내려갔다.

《인생으로서 제일 먼저 할것은 자기와 자기 시대를 똑똑히 아는것이다. 우리 나라와 같이 불우한 운명에 처한 민족에게는 이것이 급하고도 중대한 문제이다. 그러면 현대는 어떠한 시대인가?···》

리풍우는 여기서 펜을 멈추었었다. 그는 다음의 문장을 계속하여 이렇게 썼다.

《현대는 번뇌하는 시대이다. 과거는 가서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아니하여서 황당무계한 시대이다. 그래서 모두가 철저한 철학이 없이 바람에 불리는 갈대와 같이 움직이고있다. 아무 리론이 수립되지 못하였고 아무 정견이 없다. 그래서 무정부상태에 빠지고있다. 모두가 선배요 모두가 선진이로되 실상은 따라갈자 바이 없고 존경할이 너무도 없다. 그래서 이리 가야 옳을가 저리 가야 옳을가 방향을 잡기 어려운 때이다. 란마이다. 실로 번뇌의 시대이다.》

리풍우는 여기서 무춤 펜을 멈추었다. 말로 다할수 없는 구슬픔과 비애가 사무치게 가슴속에 엄습하였다.

한때 독립군이였던 그의 아버지는 이 나라에 걸출한 인물이 없어 총들고 독립전에 일어선 의로운 사람들이 눈물을 뿌리며 초야속을 헤매고있다고 한스러워하였다. 이 성스러운 인간들을 맡아 줄 위인이 언제야 이 나라에 나타나겠느냐? 하고 아버지는 편지마다에서 통탄하고 절규하였었다.

아버지의 그 소원, 그 절규는 지금의 리풍우, 그자신의 통탄이며 소원이며 갈망이기도 하였다.

속박당한 이 나라의 산천은 너무도 허약한 자식들만을 이 땅에 무수히 뿌려놓았다고 리풍우는 처절히 개탄하였다. 그가 지금껏 나다니면서 인물이라고 하여 찾아보고 상종해본 사람들은 별치 않은 위인들이였으며 좀상하고 천박하기 그지없는 인간들이였다. 그들은 대개가 시대의 풍운아들이였고 가슴에 서리서리 얽힌 울분을 설파하며 눈물속에 세월을 보내는것이 그들의 우국지정이고 절개였다.

간혹 그들중에는 무슨 사회주의이니 민족주의이니 하고 요란한 구호와 강령을 내걸고 무수한 쟁론과 주먹질을 해대며 강경히 날치는 운동가들도 있었으나 따지고보면 모두가 황당하기 그지없는 궤변가들이였고 사람들의 건전한 의식에 혼동과 막심한 착오만을 가져다주는 시끄럽기 그지없는 존재들이였다.

《실로 란마이다!》

하고 리풍우는 음울히 중얼거렸다. 이대로 십년, 이십년을 거듭하면 이 나라에 남을것이란 무엇이겠는가? 어디를 보나 암혹, 어디를 보나 적막이 드리운 황량한 페허가 문득 그의 눈앞에 참담하게 펼쳐졌다.

리풍우는 벌떡 의자에서 일어나 서성거리며 방안을 돌아갔다.

그가 한달나마의 시일을 거치면서도 원고를 끝내지 못했던것은 이 비애와 울분과 고뇌속에 떨어져 진저리나는 정신적번민을 겪고싶지 않은때문이였던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쩔수없이 이 가혹하고 역스러운 현실의 모순을 파헤치지 않을수 없게 된 지금 그는 리성적인 의지력을 가지고 민족이 겪고있는 이 시대의 비사와 혼동과 란마의 실체를 밝혀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리풍우는 스스로 땀나는 손에 펜을 움켜쥐고 페병환자처럼 가슴노리를 억누르고 전신을 덜덜 떨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이 시대가 세기말적이며 실혼상태이며 무지와 몰취미와 도덕적무질서를 연출하고있는 시대라고 감히 통탄하는바이다. 옛도덕은 묵어서 못쓴다고 누구나 없이 반항하면서도 현세의 새 도덕은 싹도 보이지 못하는게 오늘의 실태이다. 개인의 자그마한 적은 편의를 위해 나라의 운명조차 감히 희롱하려드는 개인중심의 절대적리기가 시대의 상층을 휩쓸고있는 현실이다. 구식계층은 신식계층에게 몰리우고 신식계층은 사대의 혼에 억눌려 우리의 자아의식, 자아각성이란 말조차 사위여가는 넋이 없는 내 나라 내 땅이다. 수세기의 암흑을 한꺼번에 뒤집어쓴 이 강토에는 빛도 향기도 색채도 모두 사라져버리고 무지와 몰취미만이 란마적광상곡을 부르며 행진하고있다.

사람에게는 응당 즐거운 노래가 있고 극이 있고 그림이 있고 조각이 있는 법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이 땅에 조상전례의 문화까지 몰락기에 빠져 가도가도 적막이고 가도가도 암혹인 광막한 페허만이 깃들어있다. 그리하여 사방으로 절개당한 불모의 땅우에서 드디여 <흙으로 돌아가라>, <신앙으로 돌아가라>, <거기서라도 안식을 찾으라> 하고 웨치는 목소리가 울리게 되였다···》

돌연 리풍우는 무섭게 굳어진 눈망울로 멍하니 자신이 헤집어놓은 글줄을 들여다보았다. 스스로 허무하고 스스로 암담해지는 생각에 빠져버렸다. 리풍우는 또다시 펜을 멈추고말았다.

그는 시대의 모순과 참담한 암흑의 리면을 밝히면 밝힐수록 그것은 어쩐지 자신의 가슴속 가장 깊은곳에 가라앉았던 슬픔과 고뇌를 퍼올리는것 같애 그이상의 집요한 사색을 하기가 겁에 질렸다.

《아, 참 세상은 점점 막막하구 참담해져가는구나!》

그는 의자의 등받이에 허리를 젖히고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계십니까?》

누가 문밖에서 찾는 소리가 났다. 리풍우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열어젖혔다.

《아니, 이게 누군가?》

리풍우는 두팔을 쩍 벌리고 소리쳤다.

《세경군이 어떻게 제발로 나타났나? 일전에 보낸 편지는 받았는가?》

《예, 선생님은 건강이 좀 어떠십니까?》

《좋지, 어서 올라오게!》

리풍우는 퇴마루에 신발을 벗고 올라서는 지세경을 두손으로 받들어들였다.

지세경은 노란 구리단추가 달린 학생복을 입고 꼭뒤가 조금 지치러진 학생모자를 썼는데 이마를 둥글게 감싸고 지나간 채양밑에서 영채도는 두눈이 리풍우를 쳐다보며 웃고있었다.

리풍우는 방한복판에 두다리를 벋지르고 선채 갑자기 달아오른 혈색좋은 얼굴로 지세경을 정에 넘쳐 바라보았다.

《자네 살갗이 검실검실해졌군. 요즘도 정처없이 들을 방황하는건가?》

지세경은 대답대신에 하얀 이를 드러내고 벙싯 웃어보였다.

《난 자네를 대하기만 하면 언제나 가슴에 넘치는 울분을 걷잡지 못하겠네. 들을 방황하는 젊음이 아까와. 무슨 일이든 하라구 이사람.》

《저에게 무슨 힘이 있습니까 선생님.》

《아닐세, 자넨 할수 있네. 자넨 정의인이야. 온갖 불의에 항거하는 정의인이란말일세.》

지세경은 또다시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정의인이긴 고사하구 제 한몸의 유지에도 숨차하는 인간입니다.》

《나라잃은 이 땅에서는 누구나 살아가기 숨차하는걸세. 그렇지 않다면 역적이나 다름없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힘자라는껏 나라를 위해 무엇이건 해야 하네. 그래 자넨 어쩔터인가? 리풍우는 지세경의 어깨를 눌러 자리에 앉히고 방가운데 재털이를 내놓았다.

《선생님, 저는 요즘 일을 시작했습니다.》

지세경은 모자를 벗어 방바닥에 놓고 싱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을 시작했다구? 자네가? 그게 무슨 일인가?》

리풍우의 눈가에는 일종의 애무와 호기심이 번쩍거렸다.

《뭐 일이래야 큰일은 못되고 소소한 직업을 하나 얻었다고 할가요. 야학방선생노릇을 한답니다.》

《아니, 그게 어쩐 일인가? 자네 그리도 하찮게 여기던 야학을 운영하다니··· 그래 또 며칠 하다 집어던질 그런 기분놀음은 아닌가?》

《처음은 마지못해 시작한노릇입니다. 한데 해보니 재미가 나지 않겠습니까? 농민들이 한자한자 우리 글을 익히고 의식을 깨우쳐가는게 얼마나 보람있는 일이겠습니까?》

《그렇지, 보람있는 일이구말구.》

리풍우는 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감격에 찬 표정을 띄웠다.

《나라 잃은 민족을 위해 야학이라도 하게 되였다는건 장한 일이야. 그건 되지도 않은 무슨 주의주장을 내들고 소란을 떨며 돌아치는 어중이떠중이 사상객들보다 백배나 나은 행동일세. 우린 작아도 나라를 위해 실제로 소용되는 유익한 일을 해야 하네. 그래 내가 이번에 전국의 학생들에게 다가오는 여름방학을 농민계몽사업에 돌려주기바란다고 광고문을 내지 않았겠나? 그랬더니 오늘아침에 갑자기 여러통의 편지가 날아들었어. 자네 그 편질 좀 보려나?》

리풍우는 얼핏 달아오른 흥분을 걷잡지 못하면서 후들거리는 손으로 책상서랍을 쭉 뽑아 편지들을 한웅큼 들어냈다. 지세경은 편지를 들여다보았다.

《선생님, 참 감동깊게 쓴 편지구만요. 여간 똑똑한 학생이 아닙니다.》

그의 손에서는 여러통의 편지가 한꺼번에 들려 벌그덕거리고 낮추 허리를 숙인 얼굴은 편지의 글줄들에 가까이 매달려있었다.

리풍우는 감격과 울분이 한데 뒤엉키는 뜨끔한 충격을 받으며 목구멍이 얼얼해졌다.

《그런데 여기 희롱하는 편지도 있군요.》

지세경은 머리를 기웃거리며 편지를 들여다보았다.

《개중엔 얼빠진 녀자들도 있지. 그건 이 땅의 참극을 보지 못하고 들떠있는 계집들이네. 슬픈 인간들이지.》

리풍우는 자리에 와앉았다. 그러자 지세경의 얼굴에 비낀 한줄기 의혹의 빛이 불현듯 그의 눈에 비껴들었다.

《왜 기분이 언짢은가?》

《아니, 저는 의문이 생겨서 그럽니다. 이 학생들은 농촌에 나가 무얼 가르쳐줍니까?》

《우선은 문맹퇴칠세.》

《그다음에는요?》

《그다음에야 가르칠것이 오죽 많겠는가? 우리 나라의 력사, 지리, 문화 그리구 농민들은 사측문제같은것두 풀줄 알아야 한단 말일세.》

지세경은 가볍게 숨을 몰아쉬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 농민들은 사측문제보다두 더 긴요하게 생활에서 바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 그게 뭔가? 어서 말해보게.》

《세상에서 죽도록 일만하고 못사는건 농민들인데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하면 농민들이 기를 펴고 한번 사람답게 살아볼수 있겠는가? 그걸 알고싶어 야학에 모이는겁니다.》

리풍우의 얼굴에는 문득 긴장한 빛이 떠돌았다. 그는 한손으로 방바닥을 짚고 상반신을 약간 앞으로 내여민채 찬찬히 지세경의 흥분한 얼굴을 굽어보았다.

《세경군, 자넨 이상하군. 응? 그건 무슨 사상객들이나 할 소리지 세경군이 할 말은 아닌것 같은데?···》

《저도 농민들의 생활에 들어가보기전에는 이런 의문은커녕 농민들에게 절박한 소망이 있다는것조차 모르고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그들과 접촉하자 생활상의 가장 요긴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였고 그 회답을 찾아 모대기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그래 생활상의 가장 요긴한 문제가 뭔지 알았는가?》

《예, 알았을뿐아니라 그걸 가르치고있습니다.》

《가르치고있다?··· 흥미있군. 어서 말하게!》

리풍우의 목소리는 근엄해졌다. 그는 책상우에 손을 뻗쳐 안경을 집어쓰고 다소 엄숙해진 낯으로 지세경을 주시했다.

《저는 농민들이 못사는것이 다른데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일본제국주의침략자들이 나라를 강점하고 농촌을 가혹하게 수탈하며 지주놈들이 농민들을 악착하게 착취하기때문입니다.》

《그거야 응당한 사실이 아닌가?》

《그러나 그 응당한 사실을 누구나 다 그렇게 말하는건 아닙니다. 어떤이들은 농민들이 못사는건 그들의 팔자탓이거나 우매하고 무식한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신문에나 잡지에다도 그렇게 쓰고있지요. 아주 공공연히 그들의 면전에서 힐책한단말입니다. 어디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자넨 불만이 있군.》

리풍우는 성난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패이고 두터운 안경알속에서 놀랍게 휘둥그래진 눈이 음울하게 내다보았다.

《선생님은 그걸 불만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현실의 절박한 요구를 외면하는건 뭐라고 하겠습니까?》

《세경군, 자넨 도대체 농민들에게 뭘 선동하자는겐가?》

지세경은 후둑후둑 뛰여오르는 관자노리에 손바닥을 붙이고 한순간 부산하게 소요하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자기들이 못사는 원인을 똑똑히 알고 잘살수 있는 길을 찾아 뭉치게 하자는겁니다. 일본놈들과 지주놈들을 때려부시고 착취없고 압박없는 인민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궐기시키자는거지요.》

《하-》

리풍우는 놀라웁게 입을 벌리고 한순간 그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넨 소학생처럼 쉽게 말하고있군. 세경군, 자네에겐 프로레타리아무산혁명이 그렇게도 손쉬워보이는가? 산재한 농민들의 힘이 그리두 강대해보여? 무슨 힘으로 강도 일본제국주의를 때려부시고 지주들을 쳐없애려고 하겠는가? 실없는 소리, 다시는 나한테 그런 소리 말게!》

리풍우의 얼굴에는 노여움과 더불어 강직한 질책의 빛이 어리여있었다. 그러나 응당 주눅이 들었어야 할 지세경의 얼굴은 반대로 랭철한 빛을 발산하면서 영채도는 밝은 눈으로 리풍우를 똑똑히 바라보고있는것이였다.

《선생님에게는 일본놈들이 그렇게 강대해보입니까? 지주의 세력이 그처럼 무서워보입니까? 강대한건 단결된 인민의 힘입니다. 어제 도천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지세경은 《협화회》연사라는놈들이 왔다가 골탕먹던 일이며 지주의 죄행을 폭로하고 농민들을 선동하던 일, 지주의 산판에 끌려간 농민들이 마을로 돌아와 씨붙임에 나선 일들을 흥분에 들떠 이야기하였다.

《놀랍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빚어질지는 심히 우려되는군.》

리풍우는 엄엄한 얼굴로 지세경을 응시하였다.

지세경의 얼굴에는 거의 환희와도 가까운 감격의 빛이 떠올라 그가 순간의 흥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것이 아니라 오래 마음속에 새겨온 자기의 넋을 토로하고있다는것을 확연히 느끼게 하였다. 떳떳하고 신념에 찬 지세경의 모습을 대하자 리풍우의 가슴은 무엇에 갑자기 지지눌리우듯이 답답하고 무거워났다.

(세경은 한번도 이런 식으로 말한적이 없었지. 언제나 번민과 우울에 빠져있던 사람이였어. 나는 이 청년의 끝모르는 우울이 사람을 망칠가봐 얼마나 걱정했는가!)

리풍우의 이 생각은 갈피를 잡을수 없는 한순간에 떠올라 온몸으로 퍼져가면서 갈수록 불안하고 갈수록 생생히 저려오는 아픔을 느끼게 하였다.

《그런데 선생님.》

지세경은 조금 어조를 낮추어 보다 본격적이고 허심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내처 말할수가 없었다. 밖에서 사람찾는 녀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던것이다. 리풍우는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네가 왔느냐?》

마루를 내려서면서 반기는 리풍우의 목소리다.

《귀한 손님이면 돌아가야죠. 후에··· 전 곡보철이 있나 보러 왔어요.》

애교를 떠는듯 한 녀자의 가는 목소리가 울렸다.

《괜찮다, 들어가자.》

리풍우는 녀자를 끌어올렸다. 지세경은 가는 문틈으로 어른거리는 녀자의 하늘색 스카트를 내다보았다.

《··· 내우를 말아. 내 찾아줄테니까.》

소곤소곤 계속되던 말소리끝에 한결 유쾌하고 활기를 띤 리풍우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윽고 미닫이가 드릉 열렸다. 리풍우가 헌헌한 얼굴로 지세경을 보며 싱긋 웃는다. 지세경은 약간 뒤로 물러앉으며 자리를 내주었다. 리풍우를 따라 들어온 녀자는 고개를 숙이고 지세경의 건너편에 가앉았다.

갑자기 고급향수냄새가 방안을 진동하였다. 지세경은 슬며시 고개를 들어 그 녀자의 얼굴을 살폈다.

그 순간 지세경은 깜짝 놀랐다. 그 녀자는 정장로의 딸 예화였다. 예화 역시 너무나 뜻밖이였던 관계로 허둥거리며 눈길을 피해버렸다.

《참 자넨 이 앨 본지가 오랬겠군. 요즘은 사정이 좀 있어서 집에 와있네.》

리풍우는 이렇게 말하고 곡보철을 찾으려고 서재로 들어갔다. 지세경은 덤덤히 아무 말도 못하고 예화를 바라보았다.

그 녀자의 머리는 쟈케트의 어깨우에 스칠듯말듯 드리웠는데 전기아이롱으로 끝을 지져 약간 안으로 굽어든채 곱슬곱슬 잔물결치며 흔들리고있었다. 홍조가 비낀 녀자의 얼굴은 귀엽고도 은근한 매력이 있었으며 눈은 크고 동그스름하였다. 그 눈은 무심히 그러나 결코 무심하지 않게 방안을 살피다가 이따금 지세경의 얼굴에 와서 멎군하였다. 그러면 녀자는 흠칫 놀라 당황해하였으나 눈길만은 얼른 돌리지 못했다.

지세경은 순하고도 야멸찬 녀자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볼수가 없어 방바닥을 굽어보았다. 그러자 무릎을 통통하게 감싸고있는 녀자의 스카트와 그우에 애교있게 손가락을 꼬부렸다폈다 하는 곱게 생긴 처녀의 손이 시선을 끌었다.

《여기 있나, 모르겠구나!》

리풍우는 두툼한 국배판 곡보철을 들고나왔다. 그 녀자는 곡보철을 받아들고 부지런히 넘겼다. 무슨 곡을 찾고있는지 이마를 약간 찌프리고 안타까와하기까지 했다. 그러더니 어느 페지엔가 머물어 손가락으로 책장을 꼭 누르고 눈으로 읽기 시작했다.

《있냐?》

리풍우가 물었다.

《예!》

처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세경은 무심히 곡보철을 넘겨다보았다. 그것은 쇼팡의 야상곡이였다.

처녀는 주머니에서 오선지를 꺼내여 사보하기 시작했다. 처녀는 아주 능란하게 펜대를 놀렸다.

문득 지세경에게는 몇해전 고보시절에 자기도 이 곡을 바이올린으로 타본 기억이 솟아올랐다.

지세경은 고보시절에 음악을 좋아했다. 그는 교내 음악회나 학예회같은데 자주 출연하였다. 그러나 지세경은 독서회에 관계하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는 음악도락보다도 자기앞에 더 큰일이 있다고 생각했기때문이였다.

그러한 경력을 가진 지세경의 앞에서 음악처녀가 로맨틱한 쇼팡의 야상곡을 필기하고있는것이다. 지세경은 현대음악이라는 말과 더불어 환기되는 자기 생활과 너무나 먼거리에 격리된 어떤 이방의 음영이 무겁게 드리우는듯 하여 사뭇 마음이 부산스러웠다.

지세경은 일어서려고 모자를 쥐기는 하였으나 밖으로 나가지는 못했다. 자기의 지나친 행동이 리풍우와의 공작에 후과를 미칠가봐 두려웠던것이다. 지세경은 망설이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지세경은 예화가 부르죠아가정의 들뜬 녀자라는 선입견으로 그를 경원하였다. 하긴 이 처녀에게는 향락적인 유흥기분이 적지 않았었다. 가세가 넉넉한 집안에서 귀염둥이로 자라난 처녀는 세상물정을 몰랐으며 서울바람에 들떠 돌아갔다. 재학중에 처녀는 자주 고향촌으로 오르내렸다. 그는 고스란히 학업에 전념할 생각이 없었다. 졸업전에 어느 레코드회사나 극단에 취직하여 가수로 살아가려고 꿈꾸었고 처녀에게는 그럴만 한 재능도 있었다.

정장로는 자기 딸의 장래를 어떻게 이끌어주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광란하는 자본주의의 유흥시장에 철없이 뛰여들려는 딸을 두려움과 불안에 싸여 바라보기는 하였으나 그것을 마다하고 시골에 비끄러맬 재주는 없었다. 그러자면 오로지 지세경이와 혼사를 하고 상점일을 넘겨주는것인데 그것이 현재는 거의나 불가능해졌다. 그리하여 이즈음 그는 딸의 장래를 리풍우에게 전적으로 부탁하였다.

그새 예화는 사보가 다 되였는지 펜을 놓고 오선지에 압지를 누르더니 가운데를 꺾어접어 쟈케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는 머리를 약간 숙이고 일어서더니 총총히 앞을 지나 문께로 갔다.

《왜 이렇게 성급히 떠나냐, 앉아라. 너하구 좀 할말이 있다.》

예화는 활발하게 동그란 눈을 똑바로 뜨고 두볼에 방그레 웃음을 띠우면서 지세경을 넌지시 내려다보았다.

지세경은 차라리 다행이다 하고 성큼 일어났다.

《왜 자네도 떠날터인가?》

《예, 후에 찾아오지요. 곧 다시 올터입니다.》

리풍우는 생각하더니 너그럽게 수긍하였다.

《오게, 기다리겠네. 자네하구 론쟁을 걸어볼 배심도 있으니.》

지세경은 모자를 눌러쓰고 터벅터벅 거리를 지나갔다. (오늘은 이렇게 물러나는것이 옳다.) 지세경은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첫날에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지 말고 약간의 자극이나 주고 돌아오는 방향에서 잘 처신하라고 당부하셨던것이다. 지내 겁질리게 하거나 불쾌하게 해서도 안되며 론쟁에서 말이 딸리거나 주눅이 들어도 안되며 그렇다고 너무 당돌하게 행동을 해서 사제간의 도리를 벗어나게 해도 안된다고 세세히 주의를 받은것이다. 김정숙동지께서는 혁명의 편에 한사람을 쟁취한다는 생각도 중요하지만 존경하는 스승을 옳은 길로 이끌어온다는 기쁨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일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지세경은 여느때의 남다른 사제간의 극친한 관계를 벗어나 복잡한 사색을 가진 인테리와 힘겨운 공작을 하게 된다는 사업의식에서 쉽게 해방될수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예화의 출현으로 하여 더욱 강해졌다.

지세경은 문득 자기가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미래를 절개당한 번민속에서 이 길을 걷군하였던것을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지금은 무엇인가? 나는 공산주의자로서, 혁명가로서 이 길을 왔는가?)

지세경은 걸음을 멈추고 까닭없이 솟아오른 그 의문에 대답을 하려는듯 생각을 집중하였다.

(아니다. 아직은 준비된 공산주의자도, 프로레타리아혁명가도 못된다고 말할수밖에 없다. 공산주의란 그렇게 쉽게 리해할수 있는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이 길을 왔으며 리풍우에게 그토록 열정을 기울여 무산대중의 각성된 힘을 력설하였던가?)

지세경은 곰곰히 생각하였다.

지세경의 눈앞에서 벌어지고있는 도천리의 전변, 그것은 기쁘고도 눈물겨우며 그가 일생을 고스란히 바쳐서라도 그것을 받들고 고수하고싶은 그 무엇이였다.

이것이 혁명인가? 그래 이것이 혁명이란말인가? 그처럼 거창한 프로레타리아무산대중의 위업이 이렇게 소박한 생활의 로정을 거쳐 이루어진단말인가?···

아, 이것이 참 무엇인가. 이것이 혁명이라면 나는 이 혁명의 승리를 어떻게 리해해야 옳겠는가?···

지세경은 끝없는 사색을 거듭하며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