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7

 

제 7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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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옥은 부락의 한쪽끝에 떨어져있는 낡은 발방아간 처마밑에서 야학방창문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고있었다. 야학방에는 들어갈수 없고 집에서는 함석필의 성화때문에 떠나지 않을수 없고 하여 여기까지 와서는 짚갈비들이 우시시 떨고있는 무시무시한 빈 방아간에 들어가 야학이 필할 때까지 기다리고있었다.

며칠전까지만 해도 춘옥은 야학에 나가자고 저녁마다 데리러 오군하였다. 그러나 이즈음엔 발길조차 하지 않았다. 가만히 눈치를 보면 자기를 꺼려하는것이 분명하였다. 우물가에서 만나거나 길에서 마주쳐도 춘옥은 랭랭한 표정을 하고 지나갔다.

향옥이는 그들이 무슨 눈치를 채지 않았나 하여 속이 조마조마하였다.

그래서 향옥은 야학방에 갈수 없고 이렇게 밖에서 기다리다가 야학방에서 사람들이 나오는 눈치가 보이면 뛰쳐나와 골목길에 스며들어가지고 집까지 콩콩 뛰는 가슴을 부여안고 가까스로 발을 내짚군하였다.

집에 와서 책보를 내던지고 저고리를 벗어보면 목이며 잔등이 온통 식은땀에 푹 젖고 겨드랑밑은 거의 물주머니가 되여있었다.

(내가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나?)

한편으로는 슬프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독하여 오래오래 울군하였다. 그러다가도 다음날이면 향옥은 또 할수없이 시어머니와 남편 보는 앞에서 책보를 싸가지고 나왔다. 그다음은 야학에 가느라고 깔깔 웃고 떠들고, 갈갬을 치기도 하면서 길이 메게 밀려가는 부락아낙네들, 처녀들과는 떨어져 남몰래 이 무시무시한 빈 방아간으로 들어오는것이였다.

향옥은 남편을 배반할수도 없고 동네사람들을 해칠수도 없는 그런 딱한 갈림길에 서있었다.

함석필은 밤마다 향옥이더러 야학에서 무슨 일이 없었느냐고 따져묻군하였다. 그는 백지주의 산판에서 넘겨받을 푸르싱싱한 채벌림지를 눈앞에 그리면서 독하게 마음을 도사려먹고 안해더러 채근하는것이였다.

남편이 서두르는 품을 보면 향옥은 겁이 났다. 이 사람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만 하면 그것은 즉시에 백지주의 귀에 들어갈것이고 아라가와나 가와사끼에게 알려져 부락은 참변을 당하게 될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향옥은 일체 야학과 관련된 일은 좋은것이건 나쁜것이건 함석필에게 방설할수 없었다. 부락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그런 악한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고있었던것이다.

향옥은 야학방에 며칠 다니지는 않았으나 거기서 벌어지는 일들을 대강은 짐작하고있었다. 거기서는 지주를 반대하며 토성공사를 못하게 하는 비밀이야기들이 오가고 뒤일들이 조직되고있으며 여기에 부락의 숱한 사람들이 끼여들고있다는것을 향옥은 눈치챘다. 방아간에서 내려다보면 요즘 수상한 움직임이 더 뚜렷이 스며졌다. 야학방둘레로 담배불이 번쩍번쩍하면서 순시가 돌고있는것이 보이고 멀리 동구길에 사람이 나타나면 어둠속에서 어떻게 련락이 취해져가지고 야학방문 고리쇠가 달깍달깍 소리를 내는것이 들렸다. 그러면 방금 울리던 말소리며 노래소리는 일제히 멎고 다른 말소리, 다른 노래가 울리는것이였다.

향옥은 때로 야학방에서 지금 무엇을 할가 하는 궁금한 생각이 들어 가보려고 길에 나서면 어디서 사람이 불쑥 나타나서는 코끝이 마주치도록 얼굴을 가까이 마주대고 들여다보며 우정 으험으험하면서 안으로 무엇을 알리는 기동이 엿보였다.

그렇게 되면 다음날 향옥이를 보는 야학방사람들의 눈은 이상하게 랭랭하고 모두들 곁을 주려고 하지 않는것이였다. 이리하여 향옥은 야학에 제발로 가고싶어도 그럴수가 없었다.

그러나 향옥은 함석필의 성화에 못이겨 매일같이 방아간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시간을 보내는것이였다. 구석에서는 쥐들이 버스럭거리고 머리우에서는 박쥐들이 찍찍거리며 돌아쳤다. 가끔 동네 개들이 겨냄새를 맡고 다가왔다가 향옥이의 희끗희끗한 자태를 보고 화닥닥 놀라 뛰여달아났다. 그러면 향옥이의 잔등에선 소름이 줄달음쳐 지나갔다. 부락의 봄고양이들은 야웅야웅하면서 멀리에서부터 쌍쌍이 서로 소리를 내며 다가와 매번 이 빈방아간 모퉁이에서 마주쳤다. 그것들은 향옥이의 그림자를 보고 놀라 도망치는것이 아니라 눈에 푸른 불을 켜가지고 어듬속으로 휙휙 날아다녔다.

족제비들도 기승스레 날치였다. 겁에 질린 향옥은 방아간 낡은 울짱대를 뽑아들고 목에서 겨불내를 쏟으면서 짐승들을 쏘아보았다.

갑자기 야학방쪽에서 사람들이 들레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언덕우로 공부를 마친 사람들이 들썩 고아대면서 밀려올라왔다. 사방에서 담배불들이 번쩍거리고 초롱불, 솔광불들이 움직였다. 향옥은 냉큼 방아간에서 뛰쳐나와 골목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마치 야학에서 오는듯이 사람들을 뒤에 달고 총총히 걸음을 다그쳤다.

《앞서가는이가 평산집아지미가 아니예요?》

뒤에서 누군가 따라오며 소리쳤다. 평산집아지미란 향옥을 두고 하는 말이였다. 향옥은 마치 남의 물건을 탐내여 가만히 기여들었다가 들킨것처럼 정신이 아뜩해졌다. 향옥은 머밀머밀하다가 책보를 꼭 부둥켜안고 고개를 폭 숙인채 반달음쳐 빠져나갔다.

사람들에게 들키면 이 무슨 망신인가? 그리고 나더러 수상한년이라고 소문을 내지 않겠는가? 정신없이 삽짝을 밀고 들어선 향옥은 부엌문을 막 열려다 말고 사람들의 기동을 엿보려고 재간옆 처마밑으로 새여들어갔다. 낡은 거미줄이 얼굴에 휘감겼다.

향옥은 코끝이 알알해지는 먼지냄새에 금시 재채기를 하려다가 꼭 참았다. 아낙네들의 한떼가 향옥이네 울밖을 지나갔다. 조금 사이를 두고 몇사람의 남정이 지나가고 뒤떨어진 녀자 하나가 막 줄달음쳐 따라갔다. 길은 좀 뜸해졌다. 사람들의 말소리는 향옥이네 집둘레에서 차츰차츰 멀어져갔다. 향옥은 귀를 강구어 멀어지는 말소리를 들으며 처마밑을 나서려고 하였다. 그때 기침을 깇으면서 또 한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불달린 담배꽁초를 향옥이네 뜰안에다 홱 집어던지고 지나갔다. 자칫하다간 담배꽁초가 향옥이의 치마자락을 지질번 하였다. 담배꽁초는 죽지 않고 땅에서 검불을 태우고있었다. 향옥은 다가가 담배꽁초를 꼭 눌러디디고 사방을 휘-살피였다.

삽짝이 바끄닥하고 열렸다. 향옥은 흠칫 놀라 뒤걸음쳤다. 흰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모습이 뜰안에 들어섰다. 향옥은 순간적인 예감으로 아까 자기를 부른 목소리의 임자임을 직감하였다. 향옥은 감쪽같이 시치미를 뗄양으로 책보를 재간 처마밑에 찔러넣고 마치 재를 쏟고나오는것처럼 빈삼태기를 들고 툭툭 털며 걸어나왔다.

《그게 누구예요?》

향옥은 천연스레 놀라면서 소리쳤다.

《나예요. 구장누이예요.》

순간 향옥은 가슴이 못견디게 방망이질하였다. 그는 조용히 다가서는 김정숙동지를 꼼짝않고 지켜보기만 하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자신이 마을을 떠나 있은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보고받으시고 향옥이가 가긍하여 이렇게 찾아온것이지만 막상 그를 대하시자 순순히 말이 나오지 않으시였다.

향옥이가 겪었을 고통, 번민이 애처로운 상념을 불러일으키면서 떠오르는것이였다.

이윽고 그이께서 말씀을 떼시였다.

《아무 생각 말구 래일부터 야학에 나오세요. 방아간에까지 왔다 돌아가는걸 우린 알지두 못했군요.》

《난 야학에 안갈테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향옥은 곁을 주지 않고 랭랭하게 쏘아붙였다.

《뭔가 좀 섭섭한 생각이 있었다 해도 너그럽게 리해하구 나와요. 혼자 떨어지면 점점 더 적적하구 괴로워지는거예요.》

《글쎄 난 상관하지 말라요. 좋은 사람들끼리 하면 좋겠지요. 춘옥이랑, 방숙이랑 다 구장누이하구 한편이더군요. 그런데 이제 와서 나더러 선심쓸게 뭐 있어요.》

향옥은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는 순전히 구장누이때문에 자기곁에서 좋은 동무들이 떨어져가며 고독하게 되였다고 생각하는것이였다. 그지없이 노엽고 섭섭한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편이야 무슨 편이 있겠어요. 평산집아지미를 나무라는 사람이 없어요. 오히려 마음이 고운 녀자라고들 하지요.》

《그런 침발린 소리말아요. 그런다구 누가 구장누이를 모를줄 알아오. 언제는 나꾸었다 언제는 밀어버리구, 사람들이 어쩌면 그럴수 있이요?》

향옥은 쫓기듯이 물러나 부엌문을 열고 들어가버렸다. 문설주에 이마를 기대고 잠시동안 꼼짝않고 서있었다. 무어라 형언키 어려운 억울하고도 얄궂은 생각이 갈마들었다.

(구장누이가 왜 왔나?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을가?···)

향옥은 구장누이가 단순히 야학때문에 찾아오지는 않았으리라고 단정하였다. 분명 자기의 마음속 비밀을 들여다보고 그래서 찾아왔으리라는 생각이 드는것이였다. 무서운 반발심이 가슴을 태우며 일어났다. 자기곁에서 좋은 동무들을 다 뺏어가고 이제는 자기의 마음속까지 파헤쳐 부락사람들앞에서 얼굴조차 들지 못하게 하려는 모진 생각을 품고 왔다는것이 갈수록 뚜렷해졌다.

함석필은 이즈음 언제나 그렇듯이 술에 딸딸해가지고 좀 비척거리면서 들어섰다.

향옥은 잠든 모양을 하고 벽을 안고 누워있었다. 저녁마다 채근하는 물음에 대답할것을 생각하면 이제는 진저리가 쳐졌다. 함석필은 술냄새를 풍기면서 향옥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어깨를 잡아흔들었다. 마지못해 향옥은 일어나앉았다.

《아유 술냄새. 이젠 진저리가 나 죽겠군요.》

향옥은 귀를 막으면서 돌아앉았다.

《오늘두 무슨 기동이 뵈지 않아?》

함석필은 의례 시원한 대답이 없을줄 알고 다시 말을 잇대였다.

《그래 당신은 야학에 꼬박꼬박 나가기는 하오?》

《나가지 않으문요.》

《당신을 보지 못했다는 사람이 있어.》

함석필은 의문스레 안해를 들여다보았다. 향옥은 가슴이 떨렸다. 그는 입술을 꼭 깨물고 억울한듯 부르짖었다.

《내가 야학에 안가면 어딜 간다는거예요. 왜 사람을 믿지 못해요?》

향옥은 은연중 남편의 눈치를 보았다. 함석필은 고통스러운듯이 머리를 내젓고 이마를 싸안았다. 향옥이 못지않게 백지주앞에서 시달리고있다는것을 알수가 있었다.

《그럼 어디 봅시다. 무엇을 배웠나?》

함석필은 문턱밑에 내쳐둔 향옥의 책보를 집었다.

《놔요. 별걸 다 보겠다고 해요 참!》

향옥은 책보를 홱 나꾸채다 치마밑에 놓고 다리를 꼭 그러안았다.

함석필은 어느만큼 짐작한듯 쓰겁게 입맛을 다시였다.

《그래 야학에선 뭘 배우?》

《가갸거겨, 그런걸 배우지요. 처음인데 뭘 복잡한걸 하겠어요?》

《그래 당신은 어느 반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향옥은 얼떠름해졌다.

《아니 야학에 갑반, 을반, 병반이 있지 않아.》

《난 또, 갑반이지요.》

《갑반에서 가갸거겨를 배워?》

향옥은 점점 등탈이 난다는걸 생각하자 등이 오싹해졌다.

향옥이가 며칠 나갔을 때는 반을 가르지 않았는데 요즘 달라진 모양이였다.

《사람을 왜 믿지 못하구 저녁마다 죄인 다루듯하는거예요?》

향옥은 바로 그러지 않을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빠져들었기때문에 함석필이가 더 질문을 못하게 시집와서 겪은 별의별 섧은 소리를 다 꺼냈다. 함석필은 안해의 속심을 빤히 아는지라 그따위 푸념은 귀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는 향옥이나 다름없이 괴로운 순간을 매일같이 겪고있는것이였다. 함석필은 안해에게서는 무슨 말을 듣지 못해도 백지주앞에서는 그럴듯이 꾸며대면서 하루하루 숨박곡질을 하고있었다.

그는 지주에게 큰 자료를 넘겨주지 않으면서도 그렇듯 열성만이라도 꾸며보여 채벌림지를 떼받으려는 그 한가지 생각뿐이였다.

《당신은 대답을 똑똑히 해야 해. 내앞에서나 그따위 유치한 얼림수를 썼지 뉘앞에서 얼림수를 쓸테야.》

향옥은 눈이 둥그래서 남편을 쳐다보았다.

《아라가와대위가 당신을 직접 만나겠다고 하오.》

《아라가와가? 무엇하러요?》

《그거야 누가 아는가. 시험을 쳐보려는지 칼로 목을 치려는지?》

향옥은 불현듯 머리에서부터 싸늘하게 피가 식어져내려오는것을 느꼈다.

《어서 차비를 하고 가보오. 아라가와가 부르오》

《어디서요?》

《방아간모통이에서···》

함석필은 괴로와 머리를 움켜쥐였다.

《미쳤어요? 만날테면 정정당당하게 제가 찾아오든지 경찰에 호출하든지 할것이지 외딴 방아간엔 왜 불러요?》

《그걸 누가 아는가? 엉, 누가 알아?》

함석필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안해의 머리채를 잡아휘두를 잡도리를 하였다. 향옥은 자기도 모르게 발딱 뛰여일어났다. 이렇게 사나와지는 함석필을 난생처음으로 보는 향옥이다. 향옥이는 정신없이 문밖으로 뛰여나가 거의 갈팡거리는 상태에서 방아간어방에 이르렀다.

시커먼 방아간모퉁이에서 담배불이 번쩍번쩍하고 꺽두룩한 사람의 움직이는 모양이 똑똑히 보였다. 향옥은 숨을 죽이고 서있었다. 달이 희끄무레 떠오르고있었다. 사위는 점점 더 환하게 밝아졌다. 아라가와의 종다리에서 달빛에 번들거리는 장화목다리가 보이는가 하면 칼자루가 절컥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향옥은 점점 더 가슴이 죄였다. 정말 맞갖지않으면 목이라도 치려고 이렇게 한지에 불러낸것이 아닌가? 얼핏 떠오른 그 생각은 거의나 피할수 없는 운명적인 공포로 엄습하였다.

향옥은 주저앉아 얼굴을 싸안고 친정의 보고싶은 어머니며 어진 아버지를 생각하며 울었다. 그리고나서 향옥은 아라가와에게로 다가갔다. 기다리기에 지친 아라가와는 무뚝뚝하게 향옥이를 맞이하였다.

《왜 이렇게 늦었는가?》

향옥은 대답을 않고 정신을 차리고 아라가와를 올려다보았다. 아라가와는 말없는 향옥이가 이상한듯 고개를 숙이고 마주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그의 입에서는 까닭을 알수 없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라가와의 목소리는 불시에 누그러들고 행동거지가 삽삽해졌다.

그는 존경어를 써가며 야학에서 무엇을 배우며 거기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있는가를 물었다. 함석필에게서 닥달을 받아 무엇을 좀 깨친 향옥은 힘들지 않게 주어섬겼다.

향옥은 우선 자기를 갑반이 아니라 병반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여기서는 고작해서 가갸거겨나 배울것이며 그다음 노래공부랑 할것인데 그것도 어렵지 않게 꾸며낼수 있었다.

아라가와는 향옥이의 말을 곧이듣는것 같았다. 그는 향옥이더러 일을 잘하라는것, 그러면 큰 상이 있고 일본같은데 구경도 보내줄수 있으며 본인이 요구하기만 하면 카페같은걸 운영할수 있게 조력을 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앞으로는 향옥이가 직접 자기하고 련계를 지으며 둘사이의 비밀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였다.

향옥은 권력이 권력이니만치 요구에 빈말로나마 응해주지 않을수 없었다. 뿌리쳐버린다면 산판채벌림지를 바라고있는 집안에 큰 소동을 일으키게 될것이였다. 함석필이를 비롯하여 온 집안이 횡재를 기대하고 아차아차하게 줄타기를 하고있는것이다.

아라가와는 몇대째 담배를 연신 갈아대며 향옥의 주위를 서성거렸다.

향옥은 어떤 알수 없는 불안에 가슴을 떨며 자기도 모르게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아라가와의 눈에서는 이상한 광채가 번쩍하였다.

《만약에 나의 지시에 불응하거나 성의없이 일할 때는 어떤 징벌이 차례진다는걸 각오하고있는가?》

아라가와는 어느덧 자기를 다잡았다. 아무리 아름다운 녀자가 앞에 있다고 해도 대일본제국의 신성한 군인으로서 중대하고도 긴급한 사업상의무를 저버릴수 없다고 생각한것이였다.

향옥은 아라가와의 물음이 너무도 위혁적이고 랭혹한데 놀라움을 금치못하고 그를 지켜보기만 하였다.

《우리 쥔두 다짐을 둔게 있구··· 명심하지요.》

향옥은 말없이 랭랭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아라가와의 기상이 두려워 얼결에 대답해버리고말았다.

《빈말이 아닌가? 나에겐 시간이 없어, 그러니 다음번엔 자료를 내놓아야 해. 그걸 약속할수 있겠는가?》

향옥은 목이 타는듯하였다. 아라가와는 대답을 재촉하였다.

《왜 대답이 없는가? 자신이 없다는 뜻인가?》

아라가와는 향옥이의 가슴속에 숨은 비밀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려는듯 낮추 고개를 숙이고 찬찬히 굽어보았다.

향옥은 무심결에 저고리앞자락을 여미였다. 뛰는 가슴은 조금 진정되는듯하였으나 목은 그냥 홧홧 달아올랐다.

《애를 써보겠어요.》

향옥은 조여드는 입술을 움직여 간신히 말하였다.

《알아보라. 중요한건 구장누이다. 그 녀자가 불온한 사상을 가졌다는건 우리가 알고있다. 구장누이, 이 녀자의 자료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당신도 그 녀자와 같은 인물로 취급할수밖에 없다. 나는 약속에 성실한 사람만을 용납하는 성미다.》

아라가와는 인사도 없이 돌아서더니 방아간 처마밑에 들여세운 말잔등에 뛰여올랐다.

말이 껑충 앞발을 들고 뛰여오르더니 발통으로 흙을 찍어던지며 내달아갔다. 향옥은 총총히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