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5

 

제 7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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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리는 요즘 퍼그나 조용하였다. 여전히 한쪽에서는 토성공사가 벌어지고 농민들은 밭을 갈고있었다. 도저히 합쳐지지 못할 두 세계의 서로 다른 생활이 한마을에서 벌어지고있었다. 그것은 경계가 보이지 않으며 따라서 적아의 구분도 명백치 않은 기이하게 혼탁된 생활이였다.

백지주와 농민들은 서로서로가 조금씩 양보하고 눈치를 보면서 싸우지 않기를 원하는것 같았다. 그러나 적들이 소요를 일으키지 않고 《안정촌》을 만들며 부락에서 움직이는 힘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음흉하게 기틀을 보고있다는것을 마을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마을의 농민들은 토성공사에서 소를 떼가지고 거름을 내여도 이전처럼 지주가 학대를 하지 않으며 세금도 들씌우지 않는 현상에 풀길없는 의문을 가지면서도 거기에 차츰 익숙되여갔다. 그것은 쌍별이나 지세경의 경우에도 다를바가 없었다. 그들은 이 고요한 정적속에서 적이 새로 력량을 집결하고있으며 렴탐군을 박고 음모를 꾸미고있으리라는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조용한 마을을 굽어보시면서 여느때없는 긴장을 느끼시였고 이 기회에 적을 앞질러 우리의 력량을 빨리 조직하고 힘을 키우기로 결심하시였다.

마을사람들을 각성시키는데서 야학방이 노는 역할이 크다고 생각하신 김정숙동지께서는 군중교양을 더욱 적극적으로 벌리기 위해 지세경을 만나기로 하시였다.

지세경의 집은 동기와지붕을 이고 통나무울바자를 둘러친, 탐탁하게 꾸린 집이였다. 삽짝밖에서 들여다보면 앙징스러워보일만큼 좁은 칸살들의 안방 대청 건넌방이 있고 두어자넓이의 좁은 퇴마루가 달렸으며 모로 꺾인 반칸부엌이 마주보였다.

건넌방 맞은편에는 뜰아래 광이 있는데 거기에 뒤창을 내고 두짝 완자문을 달아서 매대를 꾸려놓았다. 지세경의 아버지 지석참로인과 그의 늙은 안해가 손님이 있거나 없거나 번갈아 이 광속의 매대에 꼴방석을 깔고 나앉아있었다.

매대는 지금 비여있었다. 지석참로인은 굴뚝담뒤에서 울짱을 두드려 박고있었는데 울짱주변에는 하얀 자귀밥이 무둑무둑 널려있었다.

지석참은 흰 무명바지저고리에 연한 회색빛 무명조끼를 입고 바지에는 가뜬히 대님을 매고있었는데 높이 올리춘 상고머리는 하얗게 세여있었다. 한때 독립운동에 나서다닌 늙은이다운 정갈하고 결곡한 체모가 어디서나 내비치고있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지세경을 찾아가신 걸음이기는 하나 안주인부터 만나보시려고 부엌쪽으로 가셨다가 열려진 문안에 아무도 없는것을 아시고 광옆의 조그마한 박우물께로 가시였다. 지세경의 어머니는 통나무를 파서 만든 커다란 함지에 물을 가득 부어넣고 빨래를 헹구고있었다.

김정숙동지를 보자 늙은이는 몹시 반가와하였다. 정신없이 들로만 돌아치던 아들이 요즘은 안착을 하여 야학에도 나가고 집에 들어와서도 여느때없이 곰살궂게 굴자 늙은 어머니는 마음을 놓게 되고 따라서 사뭇 즐거움을 느끼고있었던것이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저고리소매를 걷고 늙은이손에서 빨래를 빼앗아 짜서 빨래줄에 널어놓고 함지의 물도 말끔히 버리고 무거운 박우물뚜껑을 닫으시였다. 그리고 버치에 물을 가득 담아 부엌에 안아들이시였다.

그이께서는 매대일이며 살림살이걱정이며 이웃집 돼지가 밖으로부터 울타리밑을 뚜지고 들어와 령감이 울짱을 고쳐박고있다는 사연 등 늙은이의 푸념을 한참 들어주시고나서 지석참로인에게도 인사를 하시였다.

로인은 허리를 굽혀 고맙게 인사를 받고 반가와하면서 아들이 있는 건넌방앞까지 그이를 안내해드렸다.

《얘 세경아, 구장누이가 오셨구나.》

지게문이 펄쩍 열리더니 와이샤쯔바람의 세경이가 퇴마루로 성큼 뛰여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방금 찾아갈가 하고 생각하던 참입니다.》

세경이는 얼굴에 웃음을 담뿍 담고 서둘러대며 말했다.

부엌문앞에서 세경의 어머니가 아들이 기뻐하는양을 보고 즐거이 웃더니 짝지발이에서 북어 한코를 벗겨가지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김정숙동지께서는 퇴마루아래에서 신을 벗어 가볍게 마주쳐서 흙을 터신다음 벽에 세워놓고 방안에 들어가시였다.

지세경은 방금 무엇을 쓰고있었던 참인지 손에 철필을 든채로 돌아가며 방안을 치웠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구석에 밀어놓았던 재털이며 담배갑이며 성냥을 도로 제자리에 놓아주시며 마주앉으시였다.

《참 선생님의 도움을 많이 받으면서두 이렇게 찾아오긴 처음이군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비록 처음이긴 하지만 자주 다니시는듯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길로 방안을 둘러보시였다.

동향방이여서 해가 서켠으로 기운 지금은 채광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던지 지세경은 앉은책상을 조그마한 봉창밑에 갖다붙이고 책이며 신문이며 손가방이며 하는것들을 그 한쪽구석에 빽빽이 쌓아놓고있었다. 그리고 벌써 컴컴하게 그늘이 드리운 맞은편구석에는 이댁 늙은이의 오래된 유물인듯한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문갑 하나가 석유방등 받치개로 놓여있었다.

장지문을 테놓은 아래방에서는 등디우에 올려놓은 새까만 거북등 같은 장곱돌뱅이가 발랑발랑 소리를 내며 끓고있었다. 지세경의 어머니가 북어를 두드려 장물이 사품을 치고있는 곱돌뱅이안에 집어넣었다. 방안에는 구수하고도 군침도는 북어장냄새가 풍기기 시작하였다.

《오랜만에 구장누이가 왔는데 대접할게 없어 어떡허지?》

지세경의 어머니는 눈구석에 잔주름을 모으고 상냥하게 김정숙동지를 쳐다보았다.

《어머니두, 저는 곧 돌아가야 합니다. 선생님에게 잠간 여쭐말이 있어서 들렸던거예요.》

《원, 내 집에 왔다 그냥 돌아가다니. 조밥 한술이라도 같이 뜨고 가야지.》

그는 웃으며 다가오더니 살며시 장지문을 닫아주고 물러갔다.

《좋은 어머니시군요, 어머님을 위해서두 선생님은 큰일을 하셔야겠어요.》

《자식된 도리가 아니지요. 내내 걱정만 끼쳐드리고, 나때문에 속타는 일이 한두가지 아니였구 눈물두 많이 흘렸습니다.》

지세경은 서글피 웃었다. 이따금 정신을 차리고 고생속에 늙어가는 부모들을 살펴보면 가슴이 쓰린 때가 뜨문한것이다.

김정숙동지께서도 어설픈 미소를 띠우시였다.

어머니, 조용히 그 다정한 이름을 한번 그렇게 불러보면 그이의 가슴은 말할수 없는 사연으로 뒤설레이고 아픔으로 죄여드시였다.

그러나 어머니를 생각하시여 자애로운 어머니사랑과 따뜻하고 희생적인 그 품을 오래오래 추억할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그이께서는 드물게밖에 차례지지 않았다.

부엌에서 울리는 식기의 달그락소리에 잠시 귀기울이고계시던 김정숙동지께서는 말씀하시였다.

《저는 긴요하게 의논할게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런줄로 짐작했습니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지세경은 방등에 불을 달려고 성냥을 집어들었으나 잊은듯이 그대로 무릎우에 손을 놓고 기다렸다.

《야학에서 배워주는 내용이 농민들의 계몽에 좀 더 절실히 도움이 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이지요. 그래야 합니다. 저도 이왕 야학을 연바에는 가갸거겨나 배워주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던중입니다.》

지세경은 그렇지 않아도 바로 그것이 고충이였던듯이 흔연히 말을 받고 자기의 심정까지를 명쾌히 토설하고나서 방등에 불을 달았다.

불이 켜지자 눈앞이 밝아지는 반면에 구석구석에는 그늘이 생겨나 방안전체는 더 어두워진것 같았고 벌써 밤이 다가온듯 한 생각이 드시였다.

《선생님이 그처럼 절박히 공감하시니 참으로 기쁩니다. 좀 생각해두신것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그럽시다. 저는 야학문제에 대해서 어떤 개혁안을 가지고 있거나 야학이 농민생활에 미치는 의의를 심각히 추구해보려는 욕심을 가져보지는 않았습니다. 농민들이 절실히 눈을 뜨고 자신과 자기 주위를 돌아보아야 하며 시대에 맞는 생활구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있습니다. 물론 야학으로 농민생활의 근본을 개혁할수는 없겠지만 명실공히 계몽은 해야 한다 하고 생각하게 된것입니다. 지금 농민들은 도무지 무엇을 통 자각하고있는것이 없으니까요. 그것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너무도 고지식한 생활의 피페와 무자각의 혼동이 가난보다 더 무겁게 사람들을 짓누르고있다는것을 찾아보지 않을수 없습니다.》

지세경은 구석쪽에 손을 뻗쳐 부지런히 헤집더니 낡은 잡지에서 찢어낸 종이쪼각을 끄집어내였다.

《여기 있군. 이것 보십시오.》

먼지 오른 잡지 한쪽머리를 손바닥으로 닦아 책상우에 올려놓으면서 지세경은 사뭇 흥분하였다.

《이게 무엇입니까?》

《우리 농촌의 질곡, 농민의 무자각의 세계에 대해서 쓴 고명한 인사의 글입니다. 오래된 옛사람이라고 말할수 있는 이 필자는 현대의 문명에 미역을 감고난 인사들보다 주장이나 열정이나 애국애민의 감정에 있어서나 몇배로 더 열렬하고 더 책임적이라고 할수가 있습니다. 제가 읽을테니 좀 들어보시겠습니까?》

김정숙동지께서는 책상우에 손을 올려놓으시고 고개를 끄덕이시였다.

《조선농민아!》하고 지세경은 목청을 가다듬고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이 세상에서 가장 대담하고 가장 강한자가 누구인줄 아느냐? 그 이름의 소유자로서는 오직 농민이 있을 따름이다. 보라, 괭이끝이 한번 번쩍하여 지각을 깨뜨리고 호미를 듦이여 오곡을 자래우고 낫을 휘두름이여 생명의 열매를 거두도다.

산에서 흐르는 물과 하늘에서 흐르는 물을 대여서는 논을 만들고 나무그루 가시넝쿨을 파내여서는 밭을 만드도다. 초목금수 고충어별, 이 세상의 어느것 하나 농민의 손에 정복당하지 않은것이 없나니 이렇게까지 농민은 자연을 정복하고 모든것을 리용창조하는 대담하고도 강한 힘을 가지고있다.
이 농민의 창조적힘, 그것으로 인류가 살고 사회가 존재하며 온갖 재부가 축적되는것이다. 얼마나 거룩한 일이냐! 때문에 농민은 이 세상에서 가장 대담하고 가장 강한자가 되는것이다.》

지세경은 중도에서 머리를 들었다. 입가에는 빙그레 미소가 떠있고 눈은 어떤 애무의 감정으로 빛났으며 얼굴 전체에도 활력과 기쁨이 떠돌았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조용히 미소하시고 상당한 면에서 공감되신듯 고개를 끄덕이시였다.

《그런데 이 다음이 문제입니다. 굉장히 큰 사상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런것도 우리 농민들에게는 필요하다 하고 굳이 생각하게 되는 그 소박한 개혁적내용이 강력한 의분으로 서술되여있는 그것입니다. 이것 보십시오. 이 중간부분은 필요없습니다. 그렇지, 바로 여기로군. 여기서부터 문제는 폭발합니다.》

지세경은 방등을 조금 앞에 당겨놓았다가 뒤로 밀어놓고 다시 앞으로 당겨놓으면서 글을 비추어보더니 상반신을 약간 불쪽에 기울이고 읽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선농민은 가장 겁쟁이였고 가장 약하였다.》

여기서 지세경은 열렬히 고개를 끄덕여 자기의 감정도 동시에 표현하였다.

《그리고 하나에서 열까지 어리석은짓을 하지 않은것이 없었다.

약삭바른 놈들에게 얼리워왔고 장사군놈들에게 속히워왔고 돈있는 놈들에게 빨리워왔고 권세있는 놈들에게 눌리워왔고 그리고도 자기가 어떻게 얼리웠고 어떻게 속히웠고 어떻게 빨리웠는지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한것만이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보라, 조선농민아!

너는 네자신과 떠나지 못할 지중관계를 가진 길흉화복과 병노생사를 어데다 믿고있었던것이냐? 혹은 하늘을 혹은 부처를 혹은 귀신을 믿고 례배당으로 중의 절로 산으로 물로 나무밑으로 들로 우상에게로 헤매였으며 일관, 풍수, 무당, 복술에 의지하여 부귀다남자하고 다수다복하기를 빌었다.

아, 이 얼마나 겁쟁이며 약하고 어리석고 우매한짓이냐. 이리하여 우리는 오늘처럼 못살고 오늘처럼 마소의 고역을 치르며 인생의 온갖 구박과 업심을 받아오는 불쌍하고도 처참한 인생이 되였다.
아, 조선농민아, 지금이라도 우리는 자기의 살아온 모양을 돌이켜보고 반역의 기발을 높이 들어야 한다.

분발하라, 강하라, 대담하라, 용감하라.》

지세경은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손끝에서 가벼이 춤을 추고있는 종이장을 정에 차 다시 굽어본 다음 그것을 책상우에 놓고 그우에 두손을 포개여얹으면서 미소를 짓는것이였다.

《생각해보십시오. 반만년동안 밟히우고 주물리고 눌리우고 속히우고 빨리워서 항상 불안과 공포와 빈천에 결박되여 살아오는 인구의 팔할이나 되는 농민의 인격적해방과 그리고 급전직하로 달음박질하여 황페와 파멸의 맨 밑바닥구렁탕으로 쏠려들어가는 조선농민들의 빈천, 농민들의 가난을 구제하기 위하여 우리는 마땅히 농민대중의 비상한 의식적자각을 고취해야 하지 않을가요?》

이때 장지문이 열렸다. 세경의 어머니가 김정숙동지께 눈웃음을 보내며 밥이 거지반 잦아가니 그냥 가지 말구 꼭 함께 저녁을 들어야겠다고 다짐하는것이였다.

《참 어머니두 그저 밥밥.》

《아니 이녀석아, 밥처럼 단게 있느냐?》

《밥보다 더 단게 있어요. 밥이 무에 그리 달아서요.》

《온참, 구장누이가 무슨 재미난 이야길 들려주었던 모양이군.》

《어머니, 오늘은 지세경선생이 흥미있는 이야길 들려주고있답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늙은 어머니의 드물게 맛보는 즐거움이 밝게 어린 주름깊은 얼굴을 세세히 다정하게 바라보시였다.

《우리 세경이한테 무슨 이야기가 있겠다구. 아무튼 그냥 가지는 말라구. 늙은이를 섭섭하게 하는건 도리가 아니니.》

세경의 어머니는 문을 닫으며 점점 좁아지는 문짬으로 웃음과 함께 다시한번 김정숙동지께 의미심중히 고개를 끄덕여보이였다.

김정숙동지께서도 문쪽으로 고개를 마주 끄덕이시였다.

《선생님은 참말 인자한 어머님을 모셨군요. 어머니를 위해서도 큰일을 하셔야 되겠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아까 하시던 말씀을 다시 하시였다.

《어머니, 인류가 수천년을 두고 다정히 불러온 그 이름은 상상할수 없는 거대한 희생을 내포한 사랑입니다. 사랑의 비애라고 할가요. 사랑하기때문에 빼앗기며 수탈을 당하는··· 그렇게 생각하면 인생마저 구슬퍼지지요. 이런 말은 맙시다. 내가 아까 무어라고 했던가요? 사회의 불합리에 대한 랭혹한 비평으로, 우리 농민들의 세기적락후에 대한 통절한 의분으로 보았던겁니다. 여기에는 농민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동정이 있는가 하면 사회에 대한 랭혹한 반역의 감정도 있습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지세경의 어깨너머 불빛에 너울거리는 빛을 바라보고계시였다. 누래진 신문지에 무슨 박람회, 무슨 술광고따위들이 얼룩덜룩 그려져있는것이 눈에 띄우며 그것들이 지세경의 말과 한데 혼탁이 되여 더욱 복잡하고 답답한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저는 선생님이 감동하시는 내용의 뜻도 알겠고 글의 취지도 알겠습니다. 리해가 됩니다. 그러나 섭섭한 생각도 없지 않아 있구만요.》

《그야 물론.》

지세경은 인차 수긍하였다.

《제가 선생님에게 솔직한 불평을 터뜨린다 해도 노여워하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어느만큼 리해를 해두면서도 불평이 더 많은 까닭입니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노여움을 쓰다니요. 원 천만에!》

지세경은 머리를 흔들어 전혀 그럴수 없다는 뜻의 진정을 내보였다.

《그러시다면 좀 들어주십시오. 이 글에는 우리가 생활에서 그처럼 뼈저리게 감수하는 처절한 생활고와 원한에 찬 울분의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 참담한 생활을 빚어낸 이 세상의 모순이 무엇인지도 밝히지 않았구요.》

김정숙동지께서는 곧 상대방에게서 울려올 반향을 들으시려는듯 주의를 집중하시고 세경이를 보시였다.

《그것은 물론입니다. 사회개혁적리념의 견지에서 본다면 모순이 많겠지요. 나는 일면적인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농민들의 무식과 무지로 하여 빚어낸 사회의 혼란을 통탄하는겁니다. 자각도 항거도 없는 농민의 무지가 오늘날 무엇을 빚어내고있습니까. 착취자들, 흡혈귀들, 악한들이 마음대로 농민과 그 생활터전을 마음껏 착취하고 학대하며 짓뭉개치도록 내쳐두고있지 않습니까.》

《선생님, 하필 그렇게 생각하실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매를 든 사람보고 말하지 않고 매를 맞은 사람보고 꾸짖는격이 아닙니까? 힘이 없어 매를 맞는 사람에게 힘을 보태줄 생각을 하셔야지 함께 몰아주어서야 되겠습니까. 물론 저는 선생님의 아픈 심정을 리해합니다. 그래서 저도 또한 가슴이 아픈거예요. 그렇지만 우리는 분별있게 문제를 보아야 합니다.

농민들이 못사는건 과연 무엇때문입니까? 그들이 무식하고 무지해서 자기들의 길흉화복과 병노생사를 미신에 의탁하고 살았던때문은 아니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농민들이 못사는건 지주놈들때문입니다. 지주놈들이 농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기때문에 농민들이 못삽니다.

선생님은 멀리 보실것없이 어머님을 보십시오. 얼마나 인자하고 소박한 어머닙니까. 선생님을 위해서, 이 가정을 위해서 편한잠 한번 자보시지 못하고 일에 부대끼우며 밥한끼 배불리 자셔보게 동정과 위로를 해드리지 못할망정 무식하고 무지해서 일생 이 모양이라고 나무랄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죄가 아니겠습니까! 농민이란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 어머니와 같으신 분, 어머님처럼 다정하고 소박하며 고운 심정을 지니고사는분들이 농민입니다. 우리 어머님을 보아도 그렇고 선생님의 어머님을 보아도 그렇고 그 훌륭하고 어진 품성을 생각하면 참말 눈물이 쏟아지는걸 진정할수가 없습니다. 선생님은 이런분들을 사랑하시고 힘을 주셔야지요. 못된놈들이 이분들을 학대하지 못하게 힘을 주셔야지요. 예? 선생님은 이 일을 할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생님을 믿고 찾아왔습니다.》

지세경은 천천히 눈을 감고 까딱않고 앉아있었다. 명상에 잠긴 듯도 하고 애상에 어린듯도 한 얼굴이다. 오랜 번민과 고심의 나날에 형성된 심뇌의 빛이 그 얼굴에 드러나있었다.

농민문제, 농민생활!···

순결하고 의분에 찬 젊은 가슴을 태우며 수없는 한숨과 눈물을 뿌리게 하고 오랜 고민이 드디여 부서져나가는것을 지세경은 깨달았다.

다시 더 무엇으로 자신을 포박하고 괴로움에 잠겨 방황의 길을 걸을것이 무엇인가? 농민의 무지와 무자각의 지루한 세계를 통탄하며 몸부림을 하던, 그리하여 농민 그 전체에서 희망을 잃었던 그 방황이 끝나간다는것을 지세경은 분명히 느끼였다.

그가 이렇게 빨리, 아무 의혹도 주저도 없이 불현듯 자신의 심장에 날아든 새세계와 합쳐질수 있었던것은 야학을 통해 농민들과 뉴대가 맺어지고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한다는 기쁨과 따라서 그들을 리해하며 동정하려고 애쓰는 그 마음의 반향이 일어난때문인지도 모른다.

지세경은 서서히 눈을 뜨고 머리를 흔들어 무엇인가를 털어버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생에 충만된 빛이 그 얼굴에 함뿍 어리기 시작하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후둑후둑 뛰여오르는 심장의 맥박을 분명히 느끼시면서 자신께서도 지세경을 두고 흥분하시고 동시에 가슴도 조였으며 남모르는 안타까움과 고심에도 잠겼던것을 생각하시였다.

한 인간의 소생, 분명 그렇게밖에는 적중히 표현할 길이 없을듯싶은 청년의 소생을 그이께서는 목메여오는 반가움과 축복속에 바라보고계시였다.

《내가 통 꺼꾸로 생활을 보았군.》

지세경은 허구프게 미소를 짓다말고 심중해지는 마음에 다시금 얼굴도 심중해졌다.

《생각해보면 의분이라는것도 때로는 사람을 망치게 하는가봅니다. 이 의분이라는것은 따지고보면 분명 인간의 정의로운 감정의 표현일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일체의 감정은 사상의 지배하에서 다양한 양상을 가지는것입니다. 옳은 사상의 지배를 떠난 정의로운 감정이란 있을수 없겠지요. 나는 사상을 받은셈입니다!》

이런 치하에 조금도 습관되지 않았던 김정숙동지께서는 다소 난처한 기색을 띠우시였다. 그것은 지세경이로 하여금 더욱더 김정숙동지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품게 하였다.

《그리고보면 이제는 야학에서 무엇을 가르치겠는가, 농민계몽을 어떤 내용으로 하겠는가 하는 문제로 되돌아가지 않을수 없구만요.》

《그럴수밖에 없겠습니다.》

지세경은 기쁘게 말을 받았다.

《한데 내가 생각하는 문제란 결국 공으로 돌아간 셈이고 이제는 구장누이가 이야기할수밖에 딴 도리가 없지요.》

《선생님이 그렇게 겸손하시면 제가 무엇을 아는것이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저는 무산에 있을 때 거기 야학에서 조금 얻어들은것밖에는 없습니다.》

《야학에서요?》

지세경의 눈에는 놀라와하는 빛이 스쳐지나갔다.

《선생님과 같은 사상가청년이 한분 있었지요. 그분이 야학을 지도해주셨답니다. 거기 사람들이란 처음은 이곳 농민들처럼 아무것도 모르고있었습니다. 야학선생은 세상에 부자와 가난한 사람은 왜 있는가? 지주란 무엇이고 농민이란 무엇인가? 가난한 사람이 모두다 잘사는 세상을 꾸리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것부터 배워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아, 대단히 절실한 내용들이군.》

지세경은 심각한 생각에 휩싸이며 중얼거렸다.

《그다음은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일본제국주의는 우리 나라를 왜 강점하였는가? 일제와 지주, 자본가를 때려부시고 조국을 해방하며 인민이 잘사는 세상을 세우자면 농민들이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이렇게 차츰 복잡하고 절실한 문제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나중에는 그분이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시고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끄시는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더군요. 유격대에서 부르는 노래도 틈틈히 배워주시고···》

《아-》

지세경은 가벼운 탄성을 질렀다.

《대단하군, 대단해. 구장누이가 나를 좀 도와주어야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지금까지 구장누이를 우리하고는 다른 사람이라고 보아왔습니다. 이제야 그 까닭이 좀 알립니다.》

좀 알린다고 한것은 그것만으로는 죄다 리해가 가지 않았기때문이였다.

그는 김정숙동지에 대한 풀길없는 의문을 가지고있었다.

이 녀성은 보통녀성이 아니다. 이 녀성은 도대체 누군가? 말과 행동과 인품이··· 무엇인가 큰 비밀을 가지고있는 사상가녀성이 아닌가?··· 하고.

《선생님이 즐거워하시니 저는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힘껏 돕지요···》

김정숙동지의 이야기가 채 끝나기전에 《얘, 세경아, 어디 나좀 보지 응?》 하는 어머니의 간절한 목소리가 장지문뒤에서 들렸다.

《원 이렇게두.》

지세경은 답답해하면서 어머니에게로 나갔다. 한참동안 무엇이라 타이르던 지세경은 문을 닫는데 류달리 신경을 쓰면서 자리에 와 앉았다.

《무슨 일입니까?》

《또 밥소리지요.》

《어머님을 섭섭하게 하시지 않았나요?》

《그럴수가 있습니까?··· 가만 방금 노래이야기도 하셨지요. 유격대에서 부른다는?··· 그래 앞으로 어떻게 도와줄 작정입니까?》

김정숙동지께서는 다정하고 정에 넘친 부드러운 눈길로 지세경을 침착히 지켜보시였다. 어쩌면 이다지도 민감한 청년일가? 이 민감성, 이 금선같은 예리한 감수성이 장차 투쟁의 마당에서 보여질 연약한 마음의 표현은 아닐지 하여 세세히 마음을 쓰시였다. 그러나 다음순간 그 우려는 씻은듯이 사라져버리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지세경을 믿으시였다. 자신의 굳센 마음이 결국은 이 청년을 어떤 난관에도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인간으로 만들어주게 되리라는, 그러한 힘에 넘치는 확신을 가진것이였다.

《선생님, 솔직한 말로 저는 선생님이 결심만 하고 나선다면 마을사람들을 위해 큰일을 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뜻을 가진 사람들은 처처에서 조직들을 뭇구 일본놈과 지주, 자본가들을 반대하는 투쟁을 벌리고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여기서 인민들을 계몽하고 핵심들을 묶어세워 조직을 꾸릴수 있으며 이 조직을 통해 마을사람들의 리익을 지키고 점차 일본놈과 지주를 반대하는 싸움에 궐기시킬수 있습니다.》

《그게 가능할가요?》

지세경은 눈가장이 불깃불깃 상기되여오르면서 흥분을 걷잡지 못해하였다.

《가능하지 않구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한번 팔을 걷고 나설 용단도 생깁니다.》

《그래봅시다. 선생님.》

김정숙동지께서는 간곡하게 말씀하시였다.

《선생님같이 지식있고 의분이 있는 청년들이 결심하고 나서서 못해낼 일이 무엇입니까. 앞으로 리풍우지국장선생같은분도 조직에 인입하고 점차 영향력을 확대해나갈수 있습니다. 일제를 반대하고 지주, 자본가를 미워하는 사람이면 누구하고나 손잡고 싸울수 있으며 조직의 성원으로 키울수 있습니다.》

지세경은 완연히 흥분하여 격렬한 빛을 띠우고 안절부절 못했다.

《해봅시다. 구장누이이야기를 들으니 신심이 생깁니다. 번민과 공허로 창이 났던 가슴에 무엇인가 열렬한 기운이 가득차고 맑은 공기가 흐르는것 같은 환희를 걷잡지 못하겠습니다.》

김정숙동지께서 지세경의 집을 나서시였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였다. 지세경의 아버지 지석참로인은 다소 불안해하면서 삽짝밖으로 그이를 따라 나가고있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지세경의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강아지까지 달고나와 멀리 바래웠다. 아들이 여느때없이 즐거워하고 밥도 달게 먹는것을 본 어머니는 령감하고는 달리 마음이 푹 놓였으며 세상없는 상쾌한 기쁨을 맛보았던것이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이미 댁을 지나치시여 캄캄한 골목길을 걸어가고계셨다.

이 밤으로 상덕이를 만나 지세경이와 손잡고 마을청년들을 교양하여 시급히 조직을 무을데 대한 과업을 주시기 위해서였다.

그이께서는 부녀회도 시급히 조직할 결심을 가지시였다.

무산에 조회를 간 놈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파보고있는지?···

김정숙동지께서는 가끔 그 생각을 하시였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곳 조직과 동지들을 굳게 믿으시였다.

그이께서는 모든 힘을 다하여 마을사람들을 조직에 묶어세우고 원쑤들의 준동에 대처한 다음단계의 투쟁을 벌려나가시려는 그 한가지 생각밖에는 없으시였다.

각일각 준엄한 사변은 다가오고있었으나 그것을 딛고 일어서실 마음의 준비는 그보다 더 빨리 앞으로 내달리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