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2

 

제 7 장

2

 

안개가 흐르고있었다.

푸르스름하고 뭉실뭉실한 안개는 천천히 꿈틀거리며 언덕과 골짜기를 에워싸고 등성이우의 촌락을 순식간에 삼켜버렸다.

집도, 길도, 울바자도 죄다 안개속에 묻힌 부락아근에서 반디불같은 불티들이 드문드문 반짝거렸다. 잠을 깬 집들의 창문에 등잔불이 어리기 시작한것이다. 이윽고 사방에서 문들이 여닫기고 우물가에서 드레박소리가 울렸으며 거기에 달구지가 굴러가는 소리, 소의 영각소리, 말소리, 개짖는 소리들이 한데 어울린 부드러운 소음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부락의 맨 끝집, 버섯모양의 작은 지붕을 이고 까맣게 고삭은 싸리울바자를 두른 권용산의 납작한 마가리에서 삽짝이 팔짝 열리더니 춘옥이가 사뿐사뿐 걸어나왔다. 그는 보통 흰저고리에 발목우에 들린 깜장치마를 입고 김이 솟아오르는 빨래버치를 들었는데 길에 나서자 유심히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하였다. 춘옥의 움직임은 날렵하고도 조심스러웠다. 그는 소리없이 개울로 내려갔다. 가끔 어디선지 개울에 흙이 떨어져들어가는 철버덕소리며 커졌다작아졌다하는 물소리가 들리고 잠을 깬 물새가 안개속을 회파람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춘옥은 개울가에 빨래버치를 내려놓고 다시금 안개속에 귀를 강구었다.

그는 요즘 김정숙동지로부터 마을에 드나드는놈들의 동정을 살피라는 임무를 받은것이였다.

산판에 갔던 농민들이 돌아오기 시작하고 부락 공사판에서도 사람들이 떨어져 놈들의 토성공사, 포대공사에 대한 농민들의 반감이 높아지자 이에 질겁한놈들은 뻔질나게 도천리를 오르내리면서 무슨 음모들을 꾸미고있었다.

놈들은 린근부락사람들을 며칠간씩 도천리공사판에 동원시키는가 하면 색주가들을 불러들이고 공사에 열성을 내는 농민들에게는 눅거리지하족같은것도 공짜로 주고 외상술도 먹이고 며칠전에는 환등시보를 가져다 돌리기까지 하였다.

지주놈은 이틀이 멀다하게 경찰서로 드나들었다. 정체를 알지 못할 낯선놈들을 꽁무니에 달고 들어오기도 하였다. 아라가와대위는 거의 매일이다싶이 공사장에 나와있었다. 그런가 하면 가끔 무슨 청부업자차림을 한 놈들이 오기도 하고 웬 행상인들, 사냥군들이 부락의 모퉁이에서 기웃거리기도 하였으며 유격대《토벌》을 나왔다는 위만군 정안군놈들이 며칠씩 묵기도 하였다.

춘옥이의 보고를 들으실 때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사뭇 긴장한 빛을 띠우시고 마을에서 조만간 큰 싸움이 있을것이므로 낯선놈들에 대한 감시를 더 잘하라고 말씀하시였다. 그리하여 춘옥이는 요즘 내내 온 신경을 길에 모으고 살았다.

아래쪽에서 문뜩 인기척이 들려왔다. 강에 고기잡이를 나온 사람들의 말소리인것 같았다. 조금 지나자 허공으로 그물을 뿌리는 맑고 새된 음향이며 수면에 작살이 떨어져 철썩 물을 튕겨올리는 소리들이 똑똑히 들려왔다.

춘옥이는 빨래돌에 물을 끼얹고 손바닥으로 돌을 씻은후 암팡지게 빨래를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안개가 엷어져갔다. 하늘의 푸른 한쪽귀퉁이가 드러나고 새까만 새의 몸뚱이들이 휙휙 지나가는것이 보였다. 안개는 개울쪽에만 있고 다른곳은 벌써 환히 걷히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행길쪽에서 말발굽소리가 났다. 턱에 모자끈을 걸고 누런군복을 입은 사람이 바람처럼 달려지나갔다. 춘옥은 물방치를 든채 언덕으로 뛰여올라갔다. 백지주놈의 컴컴한 담장모퉁이에서 말의 시뻘건 꽁무니가 얼씬거리다가 사라졌다. 춘옥이는 대충 빨래를 헹구어가지고 들어왔다.

마당에서는 필섭로인이 수수대를 잘라가지고 바자를 엮고있었다. 며칠전부터 로인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하였는데 이즈음에는 가벼운 일들을 곧잘 해치우군하였다. 김정숙동지께서 일심전력으로 로인의 시중을 해드리더니 그것이 큰 효험을 본 모양이였다. 그이께서는 며칠전 17도구쪽에 갔다오실 때에도 어디서 큰 산치 한마리를 구해다가 곰을 만들어서 대접하셨다. 그걸 들고 처음은 벽에서 거미가 줄을 타고 내리는것이 보인다고 하더니 어제부터는 눈이 더욱 밝아지고 제법 바깥일을 잡기 시작하였다.

춘옥은 바자를 엮는 로인을 보고 의아쩍게 물었다.

《갑자기 바주는 왜 엮어요?》

《어제 지주가 와서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바주를 엮어달라고 하더구나.》

《아니 강도가 무섭다구 돌담을 산같이 쌓고 앉았는데 바주는 무슨놈의 바주란말이예요?》

《얘, 바주라구 왜 한가지뿐이겠니. 울바주두 있구 개바주두 있구 곡간담벽에 두르는 빗바주두 있구··· 거야 하많을테냐? 우리같은 가난뱅이야 울바주가 고작이지만 그 집같이 번창한 살림에는 바주두 여러가닥이야.》

리필섭로인은 고개를 들고 딸을 쳐다보며 껄껄 소리내여 웃는다.

춘옥은 늙은이옆에 앉아 풀어진 저고리고름을 매여드렸다.

《그런데 지주가 왜 아버지더러 바주엮어달라고 하였을가요?》

《좀 낚아보자는 수작이겠지. 소를 빼앗아갈 형편이 못되니까 좀 당겨다가 구슬러보자는걸게다.》

늙은이는 무슨 일이 있었다는것을 눈으로 암시를 하면서 삽짝밖을 내다보았다.

《저놈이 나더러 하는 말이, 얘, 명심해 듣거라.》

필섭로인은 여전히 삽짝밖을 살피면서 조심히 말했다.

《들어요, 아버지.》

《지주놈말이다. 너더러 구장누이하구 밀려다니지 말구 토성공사같은데 얼굴을 비치라구 하는구나. 그래서 내가 우리 사위가 노상 채벌장에 가있는데 딸까지 공사판에 나가야 하느냐구 했더니 그래주면 뭘좀 생각해주겠다는거다. 빚을 탕감해주든지 소작지를 물방골 태남이네 밭으루 옮겨주든지 하겠다는거야.》

《그래서요?》

《내가 뭐라고 했을테냐. 모르는척하구 주사님이 실언을 하신다구 했었지. 뭐니뭐니해두 우린 보리밭갈이부터 해야겠다구 우겼다. 그랬더니 〈마꼬〉한갑 주머니에서 빼놓고 가더구나. 하니까 이놈들 눈치가 순조롭지 않다는걸 알구 구장누이에게 무슨 탈이 없도록 하여라. 사람이 은공을 모르면 개나 도야지하구 다를바가 없는거다.》

로인은 김정숙동지의 교양을 받고 지금은 혁명사업을 돕고있다. 춘옥이는 머리에서 수건을 풀어 로인의 목을 감싸고 그 끝을 가슴앞에 여미여드리면서 즐겁게 속삭였다.

《아버지, 우린 너무두 세상을 모르구 까막눈이 돼서 살았지요. 우리 그 형님이 아니면 어쩔번했어요?》

《그러게말이다. 나는 너희들 하는 일을 힘자라는껏 도우련다. 그러니 내 걱정을 말어라.》

《고마와요, 아버지. 이제 형님이 우리 집에 오시면요 지주놈집에 붉은 말을 탄놈이 하나가 들어갔다구 하세요. 잔등만 보았는데 웬놈인지 알수가 없어요. 난 우물집에 좀 갔다오려구 해요.》

《알겠다. 그놈이 돌아갈 때두 우리 집 뒤길루 빠져나갈터이지?》

《글쎄요. 아마 그럴거예요.》

춘옥은 동이를 이고 우물로 나갔다. 그는 김정숙동지에게서 우물집아낙네를 깨우칠데 대한 과업을 받고 얼마전부터 접촉을 해오고있는것이였다. 그이께서는 우리가 원쑤들을 반대해 싸워이기자면 무엇보다 사람들을 다 묶어세워야 한다고 하시면서 한사람이 열사람을 깨우쳐주고 그 열사람이 백사람을 깨우쳐주며 다시 그 백이 천을, 천이 만을 깨우치는 식으로 전체 조선인민이 다 한데 뭉쳐 일어나게 해야 한다고 하시였다.

그래서 춘옥이며 쌍별이며 신분단은 모두 동네아낙네들을 깨우쳐주는 사업에 떨쳐나섰다. 춘옥이는 벌써 옥탄이와 인순이네 고모를 일정하게 장악하고 세번째로 우물집 집난이인 방숙이와의 일을 시작한것이였다.

방숙이는 마침 우물가에 앉아서 약간 새들새들해진 산나물을 가리고있었다. 춘옥이를 보자 그는 반색하면서 나물을 좀 함께 가리자고 하였다. 춘옥이는 틈만 나면 방숙이한테로 찾아가서 그가 힘들어하는 일들을 열성껏 도와주었는데 이제는 어려워 안하고 무슨 일이나 부탁하게 된것이였다.

《아이유, 요샌 왜 유격대소식이 즘즘한지 모르겠어요.》

춘옥이는 일손을 쥐고앉아 슬쩍 방숙이를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

요즘 마을에서는 조직원들이 퍼뜨린 유격대에 대한 이야기가 술렁술렁 돌아가고있었다.

《그러게말이야, 난 유격대가 보구싶어 죽겠어.》

방숙이는 얼른 말을 받아챘다.

《아유, 형님은 큰일날 소리 하시네. 그런 말이 놈들 귀에 들어가면 어쩔려구?》

《난 무섭지 않아. 끌어가겠으면 끌어가라지. 어차피 난 이대로는 살것 같지 않아.》

춘옥이는 방싯 웃고 말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형님은 시집에 있지 않구 친정집에 자주 와요?》

《오구싶은걸 어찌겠어?》

《여긴 놈들이 토성공사, 포대공사를 벌려놓구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데 시끄럽지두 않아요?》

《에이구 참, 맞갖지 않으면 한번 해볼판이지··· 난 정말 속이 타.》

《해보면 뭐 어찌겠어요. 형님이 무슨 큰일 치겠어요.》

춘옥이는 슬쩍 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방숙이는 짜증이 난듯 얼굴을 찡그리고 한숨을 쉬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이런 때에 같이 한탄만 하지 말고 적극적인 방법을 써야 한다고 일러주시였다.

《참 우린 언제까지나 저놈들에게 짓밟혀 살겠나요. 밤낮 꼬불딱거리며 일을 해두 옷 한벌 해입지 못하구 사는 신세가 아니나요. 이렇게나 살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는게 나을것도 같아요. 그전엔 그래두 제손으로 장을 담가먹었는데 이젠 메주를 못쑤니 장구경도 못하지요. 난 아버지께 밥상 차려들구 들어갈 땐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서 견디지 못하겠어요.》

듣고있던 방숙이는 손맥이 풀리는듯 일손을 놓고 한숨을 쉬였다.

《에이구, 시집살이 그만두구 어디로든지 달아나지 않겠어?》

춘옥이는 눈에 생기를 띠우고 방숙이를 들여다보았다.

《달아나면 어딜 달아나겠어요?》

《저 서울이나 피양같은 도회에 달아나면 못써?》

《거길 가서 어떻게 살아요?》

《왜 잘만 산대. 향옥이가 그러는데 여기 지주집 다니는 자동차운전사 있지 않어, 그 사람하구 부탁하면 피양까지두 실어다준대. 피양 가문 일자리두 많구, 어찌하문 돈두 모으고 산다니까.》

《형님, 그런 말 곧이듣지 말라요. 우리같은건 가야 부엌데기노릇밖에 못해요. 거긴 돈있는놈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돼서 눈이 시여서두 못산다구 해요. 형님이나 나같은게 가야 신세나 망치구 말지요.》

방숙이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였다.

《그럼 어떡하면 좋아? 여기서두 못살아, 도회가두 못살아···》

《누가 그러는데 우리가 잘살자문 일본놈과 백지주같은 저런것들이 없어져야 한대요.》

춘옥이는 방숙이의 옆으로 꼭 다가앉으며 절절하게 속삭였다.

《그런데 그런것들을 어떻게 없애?》

《왜? 그게 영 어려운 일이 아니래요. 사람들이 한데 뭉쳐서 일어나면 아무리 강한 놈들두 꺼꾸러지구만다니까. 이번 우리 집일만 봐두 지주와 왜놈이 아무리 세도가 당당해도 마을사람들이 술렁술렁하니까 어쩌지를 못해요.

게다가 산에서 유격대가 내려오군하니까 더 꼼짝 못하는거예요.》

《참 그렇구만!》

방숙이는 감탄한 나머지 사내들처럼 껄껄 소리내여 웃었다.

《형님, 거저 웃기만 하고있겠나요? 무슨 수를 보아야지!》

춘옥이는 못견디겠다는듯 방숙이를 졸라댔다.

《그러잖음 어쩔테야, 아낙네들 힘으루 무슨 마련을 보겠어?》

《하긴 그래요. 우리 마을에서두 누가 이끌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할텐데. 참 형님, 어느 마을에서는 유격대에서 공작원이 내려와서 농민들을 묶어가지고 지주를 꺼꾸러뜨렸다는 말두 있어요.》

《그래···》

방숙이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렇다면 우리 마을에도 이제 오게 될는지 알어?》

춘옥이는 잠간 속궁리를 하면서 머뭇거렸다. 이런 때에는 언제나 상대방을 앞장세우고 자신은 뒤에 서야 한다고 김정숙동지께서 알려주시였다.

춘옥이는 약간 락심한 태를 보이면서 말하였다.

《형님은 그래도 몸이랑 든든하고 남자들처럼 성미도 괄괄하니까 큰일을 할지 몰라도 나같은 약골이야 무슨 일을 할가요?》

《왜?》

방숙이는 춘옥의 손을 꽉 쥐며 속삭였다.

《춘옥인 약해뵈두 여간 딴딴한 축이 아니야.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두 할수 있어. 이번에 지주한테서 소를 빼앗아내는걸 보고 부락사람들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살아가자면 춘옥이쯤 저래야 한다구들 했어. 사람들이 공사판에서 소를 떼내여 거름 실어나르는것두 춘옥이한테서 힘을 얻고 그러는거야. 나두 실은 춘옥이를 보구 눈을 떴어. 그런데 춘옥이 못한다니 말이 돼?》

《그럼 내가 뭐 좀 할수 있을가요?》

춘옥이는 반색하며 물었다.

《할수 있지 않구!》

방숙이는 다시한번 춘옥이의 손을 꽉 쥐며 반색하였다.

《그럼 형님, 우리 뭘 좀 일을 벌려볼가요?》

《그래 해보자구!》

방숙이는 조금도 헛소리가 아니고 진심이라는듯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춘옥이는 너무나 큰 기쁨에 몸둘바를 몰라하였다.

《그런데 이봐 춘옥이.》

방숙이는 갑자기 심중해지면서 춘옥이를 바라보았다.

춘옥이는 가까스로 흥분을 누르고 눈으로 《뭔대요?》 하는듯 정차게 마주보았다.

《내 당부할게 있으니 들어주어야겠어. 춘옥인 이 말을 누구에게도 함부로 하지 말라구. 제일 친한 구장누이에게두··· 말이 나가면 다야.》

《말을 안해요, 형님부탁인데···》

춘옥은 생긋 웃고 신이 나서 나물을 가리였다. 그때 향옥이가 물동이를 이고 자박자박 신발소리를 내면서 다가왔다.

《나는 가야겠어.》

방숙이는 나물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춘옥이는 향옥이를 보자 새침해서 돌아섰다. 그는 아무 말도 않고 활차를 돌려 물을 길었다.

향옥이는 춘옥의 기색이 좋지 않은데 당황하여 물동이를 어디다 놓을지 몰라 망설였다.

향옥이는 며칠전에 자기 시어머니가 춘옥이네 집에 빚받으러 가서 소란을 피웠기때문에 이렇게 새침해진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춘옥이는 사실상 그런것이 아니고 방숙이의 말만 들어도 향옥이는 맑은 녀자가 못된다는 불쾌감이 든것이였다.

《참 오랜만이지 춘옥이?》

드디여 향옥이가 말을 떼였다.

《그래 오래간만이구나.》

춘옥이는 곁을 주지 않고 랭담하게 말을 받았다.

《우리 시어머니가 빚받으러 가서 소란을 피운건 미안한 일이야. 나는 그걸 알구서 어머니더러 좀 화를 내였어. 춘옥인 이 말을 곧이듣지두 않겠지?》

《곧이들으면 뭘하니, 빚이야 아무렴 물어야 할테니까. 그것때문에 미안해할것은 없다구 봐. 다음장엔 닭을 팔아서라두 빚을 갚을테니.》

《그렇다면 새파랗게 동할거야 없지뭐.》

《너는 밥두 안먹구 사는 녀자니?》

춘옥이는 차츰 더 흥분하였다.

《토성공사에서 소를 떼가지구 들어와 거름실어나르는 사람들보구 따라다니면서 만류할게 뭐있니? 그 사람들 농사 망치면 네가 먹여줄테야?》

《난 부락사람들이 화를 당할가봐 그러는거지, 난··· 내막을 좀 알구있으니.》

향옥이는 말끝을 흐리마리해버렸다.

《네가 걱정하지 않아두 부락사람들은 살아갈게다. 네가 우리 동네에 시집오기전에두 사람들은 별일없이 살았다.》

《춘옥인 어쩜 그렇게 말할수 있을가?》

향옥이는 구슬퍼져서 얼른 손을 얼굴에 가져갔으나 누가 볼세라 황급히 손을 치워버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드레박을 기울여가면서 물을 펐다. 춘옥이는 못보는척 그것을 외면해버렸다. 지주놈을 반대해 싸우자면 어차피 향옥이하구두 정을 끊지 않을수 없으리라는 모진 생각을 한것이다. 춘옥이의 마음도 좋을리는 없었다.

이 우물가에서 함께 물을 긷고 빨래랑 하던 그때 일이 생각났다. 그러나 춘옥이는 자기나 향옥이는 그때의 녀자들이 아니며 서로 다른 곬으로 멀어져가고있다는것을 감촉하였다. 춘옥이는 스스로 자기를 다잡고 향옥이한테서 서둘러 물러가고있었다.

그것이 아픔이라면 춘옥이는 그보다 더 큰 아픔을 얼마나 겪었던가? 가난과 멸시, 학대와 굶주림 속에서 별의별 고생, 별의별 억울함과 수모를 당하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향옥이는 이런 고생살이를 모르고 귀엽게 자란 녀자지.

향옥이는 동이에 물을 채우고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머뭇머뭇하고 서있었다. 춘옥이는 먼저 동이를 이였다.

《가려니?》

《응!》

《내 할말이 있는데···》 향옥이는 춘옥이의 눈치를 보며 망설이더니 물동이를 이고 따라섰다.

《춘옥인 구장누이하구 너무 가까이 사귀지 말아야 할가봐. 백지주가 벼르고있으니, 소를 빼앗은거랑 다 구장누이 추동질이라고 하는데···》

춘옥이는 금시 숨이 멎는것 같아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향옥이는 서지 않고 총총히 앞질러 걸었다. 그때 누군가 등뒤로 다가와 머리우에서 물동이를 들어갔다. 깜짝 놀라 돌아서니 김정숙동지께서 어느새 머리우에 물동이를 이시였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향옥이가 나를 보고 왜 저렇게 서둘러 갈가요?》

춘옥이는 말을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가자요, 길에서 그러지 말구.》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다는것을 눈치채신 김정숙동지께서는 낮은 목소리로 주의를 주듯 말씀하시더니 먼저 걸음을 떼시였다.

춘옥이는 홀개바람이였으나 물동이를 이였을 때보다 더 다리가 무거웠다. 향옥이라는 녀자가 자기 주위를 그림자처럼 묻어돌아가면서 가슴속을 들여다보고는 내처 함석필의 귀에다 대고 무엇을 자꾸만 불어넣는것 같았다.

함석필이 순수한 사람같지 않으니 주의해서 살펴야겠다고 김정숙동지께서 말씀하신것은 며칠전 일이다. 그러고보면 향옥이도 결국은 순수한 녀자가 아니며 이 녀자때문에 화를 당할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점점 커지는것이였다.

부엌으로 들어와 물동이를 내려놓으신 김정숙동지께서는 한손에 또아리를 드신채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자초지종 캐여물으시였다. 춘옥이의 이야기를 들으신 김정숙동지께서는 안도의 숨을 내쉬시며 무슨 큰일도 아닌데 상심할것이 무엇인가고 하셨다.

지주가 구장누이하고 가까이 사귀지 말라고 하는거야 어제오늘 들은 말도 아니고 또 그놈이 무엇을 단단히 벼르고있다는것도 바이 모르고있는 문제가 아닌데 그것때문에 속을 상할건 없다고 하시였다.

《그렇지만 향옥이하고는 그렇게 대하지 말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심중히 말씀하시였다.

《내보기에는 향옥이는 나쁜 녀자같지 않아요. 큰고생은 모르고 자란 녀자기때문에 구석구석 거슬리는 일이 있을수 있지만 량심은 있는 녀자라구 생각되는군요.》

《나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지요. 그래서 가까이 사귀기도 했었구, 그런데 지금보면 마음이 곱다는 생각을 못하겠군요.》

춘옥이의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들, 그것이 아주 사소하고 지어 하잘것없는것이라 하더라도 놓치지 않고 세세히 관찰하는데 그이께서는 이미 습관이 되시였다. 처음은 춘옥이의 그처럼 조용하고 무던하며 어진 성품이 이 모진 세상에 어떻게 항거하며 살아갈가 하고··· 그다음 춘옥이가 혁명을 차츰 리해하면서 생기를 띠고 뜻밖의 강의하고 대담한 기질을 나타내기 시작했을 때는 이 훌륭하고 사랑스러운 성품이 혁명의 줄기찬 흐름속에서 또 어떻게 여물어갈것인가 하고···

지금보면 춘옥이에게는 사랑스럽게도 철저한 그 무엇이 유리쪼각에 비친 해빛처럼 순간순간 강렬한 광채를 던지고있었는데 이 급작스런 행동의 변화들에 주의를 집중하고 기쁨과 혹은 동시에 불안을 나타내면서 그것을 주시하지 않을수 없으시였다.

미운놈을 철저히 미워하고싶어하는 그 마음이야 금을 주고도 바꿀수 없을것이지만 거기에 뼈가 박혀 혁명이 버리지 말아야 할 사람까지 밉게 본다면 그것은 다른면에서 걱정이 아닐수 없었다.

더구나 앞으로는 도천리 부녀회장의 중책을 지녀야 하겠고 별의별 형태의 사람들을 이끌고 혁명을 해야 할터인데 도량이 넓지 못하면 그것때문에 오는 시련이 이 사랑스러운 녀인을 얼마나 괴롭게 만들것인가?

《형님, 내가 왜 향옥이를 못미더워하는지 그걸 모르겠나요. 난 향옥이 시어머니가 행상을 해다 변놓이를 하구 남편이 돈많은 사람들한테 묻어다니구··· 아무튼 꼴사나운 일이 많기는 하지만 그것이 모두 돈있는 사람들의 행실이거니 하구 참아올수밖에 없었어요. 지금도 그만한것은 참을수도 있구요. 그런데 토성공사에서 소를 떼다 밭갈이하는 사람들보구 따라다니면서 화를 당한다구 야단을 치는거예요. 나더러는 지주 소를 빼앗아 어쩔라는가구 잔침질이지.

방숙이형님보고는 돈벌랴문 또 도회에 나가야 한다구 하더라지 않나··· 그러니 뭐 향옥이를 내가 어떻게 대해야 할가요?》

《글쎄 그렇게 따지고보면 나쁜 녀자라고밖에 할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사람은 한쪽만 보구 그래서는 안되는거예요. 내 듣자니까 요즘 향옥이 시어머니는 며느리더러 빚받아오라고 내모는 모양인데 시어머니 성화를 이기지 못해 나와가지구는 돈내라는 소리를 못하고 집집을 돌아가며 이것저것 일만 거들어주다가 가군한대요. 그래서 시어머니에게 봉변을 당하구···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향옥이는 마음이 고운 녀자라구 생각했어요. 이런 고운 마음이 악한짓을 할수 있을가 하고 생각도 해보구요. 그가 사람들에게 겁질린 소리를 하는것은 화가 미칠가봐 진정으로 걱정스러워 그럴수 있는거라고도 보아지는군요. 향옥이는 남편을 통해 놈들의 거동을 더 잘 알수 있으니 겁두 날게 아닌가요. 만약 이것이 향옥의 진심이라면 우린 그를 버리지말구 오히려 손잡고 나가야 하는거예요. 혁명을 하자면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묶어세우는 일을 해야 해요. 진실로 혁명을 하려는 사람에게는 버릴 사람이 얼마 없는거예요. 무슨 뜻인지 리해하겠어요? 사람들을 쟁취하지 못하면 혁명은 실패하고말아요. 봉녀 아지민 이걸 잊지 말아야겠어요. 이제라두 마음을 돌리구 향옥이를 교양하는 일을 해봐요. 인순이 고모랑 옥탄형님이랑 다 봉녀 아지미가 교양을 해서 혁명을 하게 되지 않았나요. 앞으로는 방숙형님도 혁명을 하게 될것이고··· 향옥이도 그렇게 우리 일을 도와나서도록 만들자요. 나는 이 일을 봉녀 아지미가 맡아주면 그이상 기쁨이 없겠어요.》

춘옥이는 홍조가 피여오른 얼굴로 김정숙동지를 하염없이 지켜보고있었다.

(어쩌면 이렇게도 마음이 비단같은 형님일가?)

춘옥이는 그이의 말씀을 들으며 이렇게 생각하고있었다. 자신이 채심해야 하겠다는 결심은 아직도 아득히 먼 그뒤에 놓여있었다. 그이의 말씀을 들으면 한없이 다정하고 사랑으로 가득찬 구슬같은 그 마음의 깊은곳을 들여다보게 되는것이였다. 그이 마음, 그이 눈, 그이 생각···

거기에 비치면 이 세상에 미울것이 무엇일가?

춘옥은 보통 자기들이 살아온 그 생활에서는 전혀 보기 드물었던 선량함과 혈육과도 같은 인정의 너그럽고 따뜻한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자기를 잊고 다시금 온통 사랑과 배려에 충만된, 세상 더없이 미더운 그이의 모습을 보게 되며 그 모습앞에 매혹되고마는것을 느끼는것이였다.

그러자 춘옥이의 눈앞에서 향옥이의 존재는 가까와오는것이 아니라 점점 더 뒤로, 빠르게 밀려나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김정숙동지께서 향옥이를 가까이 하려고 하면 할수록 이런 모순된 생각이 앞으로도 점점 자신을 괴롭히며 깊어지게 되리라는것을 춘옥은 의식하였다.

춘옥은 자신이 전혀 감정상으로 화해할수 없는 그런 상태에서 김정숙동지에게 무엇인가 약속하고(그것은 분명 향옥이 문제만 아니였으나 후에는 그저 향옥이 문제였던듯이 그렇게 어렴풋이 생각된) 그다음 정신을 차리고 요즈음 방숙이와 사업한 정형이며 또 아침마다 감시를 선 일들을 자초지종 알려드렸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생각깊으신 눈길로 춘옥이를 줄곧 굽어보시면서 적들의 준동에 대처하여 해나가야 할 일들을 차근차근 긴 시간을 걸쳐 말씀해주시였다.

이야기가 거의 끝나갈무렵에 쌍별이가 뛰여들었다. 그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지도 모르고 김정숙동지와 춘옥이를 보자 기뻐 떠들어대였다.

《모두 있는걸 그냥 찾아헤매구 다녔네, 남은 막 안타까와 죽어가는데.》

쌍별이는 드무에 가서 물을 떠먹고 입술에 맺힌 물방울을 빨아들이면서 이마를 찌프렸다.

《왜, 일이 잘 안되는 모양이군요. 기색이 좋지 않은걸 보니.》

김정숙동지께서는 춘옥이와 눈길을 마주치고 웃으시였다. 쌍별이는 야학에 안나오는 아낙네들을 동원하느라고 부락을 한바퀴 돌아오는 참이였다.

《저 태봉준아바이네 십가에서 모두 꼼짝을 안해요. 야학에서 밥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 이러면서··· 남정들은 모두 부역에 열성이구 아낙네들은 모두 이렇게 락후해요.》

《협화회 이름으로 을러보지 왜?》

춘옥이가 나무라듯하며 끼여들었다.

《협화회가 뭐 대순가? 아낙네들은 모여서 입씨름만 하면서 꼼짝을 안한다니까.》

알지도 못하면서 참견이라고 쌍별이는 새침해졌다.

《답답하니 그러는거예요. 나하구 가보자요. 친한 형님 한분 있으니 그 형님만 일어서면 모두 따라나설거예요.》

《글쎄 그럴것도 같애 막 달아온거예요.》

쌍별이는 해죽 웃고 보란듯이 춘옥이를 약간 밀쳐대면서 밖으로 뛰여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