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2

 

제 5 장

2

 

공사판에서 늦게야 자리를 뜬 함석필은 바삐 걸음을 다그쳐서 백지주의 집으로 갔다.

오늘 긴급토의를 할것이 있으니 일이 끝나는차로 얼핏 들렸다가라는 백지주의 부름을 받은것이였다.

백지주집 뜰안에 들어서니 늘 소경의 눈처럼 캄캄하던 칠봉로인의 머슴방에 등잔불이 빨갛게 비쳐있고 중대문통 울바자가녁에도 불빛이 환하게 내비치고있었다.

곡간, 석마간쪽에서도 남포불이 어릿어릿 돌아가고 바삐 신발끄는 소리며 속살거리는 말소리에 가끔 누구를 꾸짖는 셋째첩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귀한 손님들이 온 모양이구나)

석필은 이렇게 생각하며 잠시 머뭇머뭇하였다. 이 집에 셋째첩이 나타나서 안방마루를 울리며 다니거나 머슴들을 몰아대기 시작하면 그것은 백지주에게 큰손님이 생겼거나 공력을 다해 일을 치뤄야 할 중대사가 생겼다는걸 의미하는것이다.

셋째첩이 나타나면 늙은 본댁네는 비단방석을 안고 사랑채에 나와서 꽁꽁 앓음소리를 내면서 《우리 집에선 저놈의 령감이 죽어야 만사가 편하지.》 하고 욕을 퍼붓는것이였다.

함석필은 눈이 시게 사방에 휘황히 방등을 한 사랑채를 한참 올려다보고나서 중대문안으로 들어섰다. 곡간앞에서 말같은 개가 사슬을 끌며 오락가락하고 밤에도 우리에 들지 않은 거위 한쌍이 긴 목을 빼들고 토방밑을 지나가고있었다.

부엌간 오물을 쏟아붓는 개수도랑쪽에서는 동네 개들이 모여들어 으르렁거리였다.

함석필은 웃방 아자문창호지에 여러 사람들의 머리그림자가 어른거리고 가끔 불빛을 가리우며 사람들이 지나가는것을 보았다.

잔들이 쟁가당하고 부딪치는 소리며 두런두런 울리는 말소리도 들었다. 함석필은 두쌍의 남포가 걸려있는 대청앞으로 다가갔다. 박차가 달린 빨간 가죽장화 두컬레가 주둥이를 이쪽을 향하고 놓여있었고 그옆에 남자의 넙적백고무신 한컬레가 있었다.

그것을 보자 함석필은 자기가 백지주의 부름을 받기는 하였으나 선뜻 여기에 나타난것이 잘한것인지 아닌지 분간치 못해 당황해났으며 백지주가 이런 좌석을 마련해놓고 자기를 부른것으로 보면 그럴만 한 무슨 중대사변이 터진듯도 하여 초조감에 잠기였다.

이때 안방문이 팔짝 열리고 콩콩 널마루를 울리는 재빠른 발걸음소리와 사르륵사르륵 치마자락 스치는 소리가 났다.

《십가장이 오셌구료.》

머리우에서 셋째첩이 불빛을 등지고 내려다보면서 반색하였다.

함석필은 얼핏 모자를 벗어쥐였다.

《공사판에서 막 돌아오는참입니다. 농군들을 보내고 쟁기들을 치우고 랠 일차비를 하고나니까 그만…》

《수골 하셌갔구료. 나는 또 웬 손님인가 해서… 령감님이 이 좌석에 오라구 하셌나요?》

《글쎄요 와보니…》

함석필은 다시금 갈피를 잡을수 없어 당황해하였다.

셋째첩은 머리를 젖히고 방끗 웃더니 치마를 살짝 들어 발을 옮겨놓고 창문을 돌아보았다.

그때 처량한 쇠소리를 울리면서 잔이 쟁그랑 하고 맞부딪쳤다. 조용히 껄껄거리는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기분들이 좋으셨구료.》

셋째첩은 만족스러워하면서 아자문 한쪽옆을 약간 밀쳤다. 그리고 치마로 안을 가리우면서 무어라고 속살거렸다.

함석필은 흔들리는 치마자락 틈사이로 누런 군복잔등의 사나이와 그옆에 검은 제복의 늙수그레한 낯모를 남자가 앉아있는것을 보았다. 가슴은 알수 없는 긴장으로 두근두근 뛰였다.

《뭘요. 천천히들 노세요.》

셋째첩은 어깨를 살짝 늘어뜨리고 손목을 보근보근 주무르면서 어지간히 지친양을 해보였다. 그것은 귀엽고도 매력있는 젊은 계집의 아양이였다.

함석필은 불현듯 지친 하루의 로동에서 오는 배고픔을 느끼였고 줄곧 경황없이 달려다닌 이즈음의 일들이 얼핏 떠올랐다. 명백한 까닭은 없으면서도 이상하게 서운하고 슬픈 마음과 다시금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나, 나는 무엇하러 여기루 왔을가 하는 복잡한 생각들이 한데 뒤섞여 떠올랐다.

《사랑채에서 좀 기다리라는구료, 어쨌으문 좋을가?》

약간 하대하는듯 한 계집의 야멸찬 눈이 내려다보고있었다.

《기다립지요.》

함석필은 돌아서서 사랑채로 나왔다. 게사니같이 엉치가 퍼진 지주본댁네는 이마에 얇은 명주수건을 동이고 비대한 가슴을 헐떡헐떡하면서 앉았다누웠다하며 부산을 피우고있었다. 머리맡에는 약주가 든 조그마한 은주전자와 은술잔이 하나 놓이고 식지를 덮어놓은 고기접시와 절반 깎다만 과실제기가 놓여있었다.

지주집 안방살림을 맡아보며 본댁네와 화투도 치고 산책도 하고 말동무도 해주는 먼 친척벌 되는 과부아낙네가 수다를 떨면서 위로하고있었다.

방등아래 창문옆에는 희순이네 어머니가 하얀 북포를 펼쳐놓고 적삼을 짓고있었다.

《석필인가. 올러오게.》

본댁네는 안고름을 풀어놓은 저고리앞섶을 여미다 말고 그냥 가슴을 헐떡헐떡하면서 머리맡에 놓인 은주전자를 가리켰다. 석필은 따라주는 약주를 한잔 받아먹고 머리가 핑하여 벽을 기대고 앉았다.

희순네 어머니는 부지런히 바느질을 한다. 그는 동리에서 신랑신부의 첫날옷을 꾸미는것을 전문으로 하는 아낙네다. 지주집 어른 아이 할것없이 모두 희순네 어머니 손끝에서 꾸며지는 옷을 입고 살아가고있었다.

희순네 어머니는 골무를 낀 손가락을 날래게 움직이면서 거지반 형태가 무어진 적삼깃을 상침하고있었다. 얇고 반짝거리는 보름새북포가 눈앞에서 어릿어릿 움직이면서 사륵사륵 소리를 내고있었다.

함석필은 (이 집 령감님은 벌써 북포적삼을 지어?) 하고 놀랍게 생각하였다. 북포의 보름새라면 발이 가늘고 빛이 고우며 몸에 붙지 않아서 여름천 옷감으로서는 북포를 릉가하는것이 없었다. 그래서 백지주는 봄, 가을, 겨울에는 명주나 비단으로 옷을 해입고 양단, 공단으로는 이부자리를 하지만 여름 한철만은 북포중의적삼에 모시조끼를 입고 북포홑이불속에 코를 골며 딩굴었다.

함석필은 부러움과 돈의 부족을 탄식하며 나도 언제면 이놈의 집처럼 돈을 긁어모으고 하인을 두고 사람답게 살아보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정녕 꿈이면서도 꿈이 아니고 꿈으로서는 끝나지 말아야 할 자기의 인생이라고 함석필은 눈물겹게 생각하였다.

《이사람, 자네 뭘 좀 소식을 들었나?》

함석필은 눈을 번쩍 떴다.

《무슨 소식말입니까?》

《자넨 통 깜깜이로군. 부락에서 재변이 터졌는데두 아주 깜깜이야. 그래가지구 부락일을 어떻게 한다고 그래!》

함석필은 무릎걸음으로 황황히 다가앉았다.

《어디 곡간에 도적이라도 들었습니까. 요즘 듣자니 근동에 강도가 나돈다고 하던데.》

《도적도 이만저만한 도적일세말이지…》

《그러니까 경찰서에서…》

함석필은 자못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재산 많은 백지주가 좀 털리운들 뭐 못살기까지야 하겠는가 하는 일종의 고소한 생각도 하였다.

자기보다 잘살고 거들먹거리는것들을 보면 함석필은 은근히 싫고 시샘이 났다.

《부락의 년놈들이 작당을 해서 우리 소를 뺏어갔어.》

본댁네는 울상이 되여 말했다.

《소를 빼앗다니요?》

함석필은 놀라서 되물었다.

《저, 춘옥이년이 뒤에서 수를 쓰고 구장을 경찰서에 내띄우고하더니 소를 다시 끌어오지 말라는 가와사끼의 명령이 떨어졌어…》

《그래서요?》

《마당을 나가보게. 소발자국밖에 남은게 없어. 백주에 이런 강도행위를 당하구야 어떻게 살어. 우리 집엔 저놈엣 령감이 죽어야지. 육고에 얼른 팔아버리라구 했더니 사타구니에 그냥 끼고앉아있다가 끝내 재변을 쳤지.》

함석필은 약주기운이 씻은듯 사라지고 정신이 새말개졌다.

《이사람, 자네 말먹이를 좀 내다주게. 곡간모퉁이에 말 두필이 있으니.》

《예.》

함석필은 얼른 일어나 고간에서 귀밀자루를 꺼내여 둘러메고 컴컴한 모퉁이로 돌아갔다. 울타리너머에서 초생달이 떠오르고있다. 잎이 없는 돌배나무의 앙상한 가지가 곡간벽에 얼기설기 그림자를 던져주고있었다. 말들은 돌배나무밑에 서있었다. 잔등에 얹어진 안장이 달빛에 번들거렸다.

함석필은 귀밀을 먹이중태에 쏟았다. 말들은 발을 구르고 푸르르 코를 불더니 서걱서걱 먹기 시작하였다.

중대문밖에서 뚝뚝 쌍엽장 내짚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검은 그림자가 서둘러 이쪽으로 다가왔다.

《뉘기유?》

의심을 품은 목소리가 울리였다.

《나우다. 칠봉로인이유?》

《난 뉘기시라구. 말을 잘 보라구들 하시기에.》

《이보 령감.》

함석필은 개수도랑쪽으로 나가면서 돌을 뿌려 개떼를 몰고있는 칠봉로인을 불러세웠다.

《댁에 웬 손님들이 오셨소?》

《아라가와지도관님허구, 무슨 경부라나 하는 경찰관이 오셨어유.》

함석필은 그들이 무슨 공론들을 벌리고있는지 알고싶었으나 칠봉로인은 곧 돌아서서 뚜걱뚜걱 쌍엽장을 짚으며 가버렸다.

《저 산너머 구름에…》

어디선가 길게 뽑아치는 탁한 남자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골목길에 삽을 끌고 지나가는 농군들의 발소리도 들려왔다. 6호촌, 5호촌 작업조들에서는 밤작업을 하는데 탁배기도 한사발씩 공으로 준다고들 하였다.

부락사람들이 들고일어났는가?… 하긴 요즘 마을의 공론들은 좋지 않았다.

《백지주가 남정들을 공사에 다 끌어내면 아낙네들끼리 보리씨붙임을 어떻게 하노? 함석필십가장도 염체가 없지. 저는 농사군이 아니고 공사 십장인듯 행세를 하지? 고현것들.》 하는 소리들이 나돌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공사를 태만하는 사람들이 더러 나졌고 춘옥이, 구장누이, 쌍별이, 옥탄이… 하는 아낙네들이 들고나서서 남정들을 그냥 부추기면서 부역에 보내라는 소를 안내고 거름들을 실어나를 준비들을 했다. 그래서 버릇을 떼느라고 백지주가 손을 걷어붙이고 강제집행을 한 노릇인데 그것이 거꾸로 뒤집혀서 농군들이 이기고 백지주는 패하여 나앉은 모양이다. 그러나 함석필은 아직 벌어진 사태들이 진실로 믿어지지 않았으며 여기에는 분명 다른 사연이 놓여있으리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는것이였다. 부락농민들이 감히 백지주같은 사람들을 상대해서 싸움은 더 말할것도 없고 그런 생각을 할 엄두를 낸다는것조차 리해할수 없는 일이였다. 여기에는 분명 무슨 곡절이 있다고 함석필은 생각하였다.

함석필은 아라가와로부터 부락의 동정을 잘 살피라는 개별지시를 받은 사람이였다. 사실이 그렇다면 자기에게도 화가 미치지 않겠는가.

갑자기 안채쪽에서 문들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레는 소리가 났다. 아라가와가 돌아가려고 일어선 모양이다.

그는 바삐 사랑채로 나갔다.

지주 본댁네가 이마에서 수건을 풀어버리고 바삐 신을 찾아 신으려다 첩년의 웃음소리가 들리자 주먹으로 무릎을 치며 자리에 나앉았다.

말들이 뚜벅뚜벅 발통소리를 울리면서 문앞을 지나갔다. 이윽고 뜰안의 소요가 가라앉자 첩년이 찰찰 신발소리를 내면서 문밖에 다가와 함석필을 찾았다.

함석필은 곧 대청으로 올라갔다. 경복궁교태전처럼 문살구조가 복잡하고 위엄이 느껴지는 불빛 환한 아자문앞에서 함석필은 낮은 기침소리를 두번 울리고 조심스레 한쪽 섶을 지쳤다.

《석필인가 어서 오게.》

뽀얗게 담배연기가 들어찬 저쪽에서 백지주가 손을 흔들며 반기였다.

석필은 무심중 방안을 둘러보았다. 알른거리는 장판바닥에 꽃돗자리 두잎이 맞물려있는데 아래목에는 보료를 세로 깔고 벽에 기대여 안석을 세웠으며 보료우에는 장침과 사방침을 벌려놓고 남색바탕에 고동색 선을 두른 공단방석이 놓여있었다.

백지주는 안석에 어깨를 편안하게 기대고 장침에 한쪽팔을 걸친채 앉아있었다.

석필은 드물지 않게 지주집 출입을 하는 사람이지만 매양 이 대청에 오르면 주눅이 들고 머리가 휘둘러졌다.

석필은 조심스레 방안에 넘어섰다. 술상은 벌려놓은대로 있었으며 재털이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꽤 오랜 시간 술판을 벌린 모양이였다. 그러나 백지주의 얼굴은 술먹은 사람같지 않게 맹숭맹숭하고 눈은 또렷하였다.

《이사람, 내가 자네한테 술부터 권할 형편이 못되니 정신을 차리구 말을 듣게.》

백지주는 사뭇 긴장한 어조로 말을 시작하였다.

《자네 사랑채에서 대충 들었을줄 아네만 일은 험한 구멍에 빠졌네. 소 한짝을 뺏기고 말 일이 아니여. 가와사끼대좌께서는 관동군사령부로 올라가시면서 대단히 노하시였네. 사령부에서는 이곳 공사형편 보고를 청취하고 가와사끼대좌를 칭찬하신 모양인데 덜컥 이런 사변이 터졌은즉 일이 얼마나 맹랑하게 되였나. 자네 짐작을 해보게. 대좌어른은 농군들이 무슨 소요를 일으키구 들구일어나 공사를 지연시키기라도 하면 어찌하나 하는 근심을 하신 모양인데 일이 지금처럼 되여서는 안되네. 농군들이 기승을 부리게 해서는 안된단말일세. 한데 이놈들을 총칼로 내려누를수 있는가? 대좌어른은 그래서는 안된다구 하셨어. 〈안정촌〉을 만들자면 농민들이 총칼의 위협을 당하게 할것이 아니라 량심으루 (여기서 백지주는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제국시책을 받들고 황국신민으로 살게 해야 한다는거야. 실은 이것이 어려운 일일세. 하여 자네를 부른것인즉 자네 책임이 얼마나 중한지 그것부터 명심을 하구 자초지종을 들어야 하네. 얘, 정지간에 누가 없느냐?》

백지주는 목을 돌려 소리를 질렀다.

바퀴달린 새 문미닫이가 차르릉 열리더니 셋째첩이 통통한 하얀 버선발을 치마자락밑으로 재게 놀리면서 다가왔다.

《함석필십가장한테 한잔 붓게.》

《령감님은요?》

《나야 기껏 먹은 사람이니 상관허지 말게.》

《기껏 자시다니요. 오늘밤은 손님들두 술맛들이 없어하는 빛이여요.》

백지주는 엄엄한 눈초리로 힐끗 첩을 치여다보고는 담배를 꼬나물었다. 첩은 얼른 성냥을 그어 불을 붙여주고 한쪽무릎을 세우고앉아 알른거리는 은술잔에 술을 부었다.

함석필은 좌석이 하도 엄숙하여 술잔을 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가늠을 못하고 그저 받았다 놓기만 하였다.

《웨 들지 않나. 자넨 팔을 걷구 일해야 할 사람이니 들게. 내집 술을 들구야 동상이몽을 할수야 있나.》

《아이 그렇지 않고… 어서나 한잔 들어요.》

함석필은 할수없이 받았다. 술이 어떻게 목구멍에 넘어가는지 알수가 없었다.

《그런데 제가 이 술을 들고 해야 할 노릇이 무엇입니까?》

함석필은 이전에 아라가와에게서 받은 임무도 있고 하여 물었다.

백지주는 첩을 내보내고 미닫이를 틈사리없이 꼭 닫더니 그쪽에 잠잘 때 바람막이로 쓰는 두첩 병풍을 가져다 둘러놓았다. 백지주가 서두르는 품으로 하여 함석필은 자못 긴장되였다.

《자네 생각을 해보게. 사태가 어떻게 되겠나. 구장누이가 소를 뺏어갔은즉 농군들이 모다 고소해할것이구 여기에 불이 달려서 무슨 수작들을 벌릴수 있단말일세. 자네의 임무란건 다른게 아니구 농군들이 뒤에서 무슨 소요를 일으키며 추동하는놈들이 누구누군가, 여기에 혹시 유격대지하공작선같은게 미치지 않았는가, 이런걸 들추어내라는걸세. 이를테면 구장누이 뒤를 캐보라는걸세. 자네 수완으루야 이쯤한걸 못하겠는가?》

백지주는 손수 잔에 술을 부었다.

《들게. 난 자네를 친동기간으루 알구 하는 소릴세. 밭은 친척이라는것두 없구 재산만으루야 사람이 사는가! 이번 일만 잘해주면 자넬 모른다고 할 사람이 아닐세.》

함석필은 백지주가 들어주는 술잔을 받아 들이켰다. 가슴이 찌르르하면서 코구멍에서 달큰한 약주냄새가 쏟아져나왔다. 이제는 술맛도 알상싶었다. 그는 잔에다 술을 부어 이번에는 백지주에게 권하였다.

《허, 자넨 된 사람이야. 촌에서 썩이긴 아까운 사람일세. 자네 일전에 영림서에 취직을 한다든건 어찌 되였는가?》

《약차하게 교제비나 들이구말았지요. 영림서라는게 알고보니 경찰서이상으로 취직이 어렵더군요.》

《그럴테지. 그게 총독부산하 기관이니까. 그래서 사무원들도 누런 제복에다 뻘건 장화를 신고 다니는게야.》

함석필은 그새 들인 공력과 실패한 아쉬움에 살이 내리는것 같은 감정을 느끼면서 더수기를 긁적거렸다.

《이사람, 하지만 그깐것을 부러워할건 없어. 그저 내 마음에만 자네 들어보라구. 그리고 이번통에 가와사끼대좌의 총애를 받아보라니까.》

백지주는 미립만 틔워놓고 그 이상의것은 말하지 않았다. 함석필은 가벼운 흥분에 얼굴이 붉어졌다. 술잔이 몇번 더 왔다갔다하였다.

백지주는 함석필의 손목을 끌어다 단단히 잡아흔들면서 다짐을 두었다.

《자네, 내가 한 소리를 어디 방설하면 안되겠네. 그리구 또 한가지는 지세경이, 그놈 문제일세. 자네 듣는가?》

《예.》

함석필은 약간 맥풀린듯 한 눈을 돌렸다. 그는 취하자면 아직 멀었으나 좀 취한듯 해보고싶었다. 부락의 밀정노릇을 해야 한다는 맑지 못한 생각과 그로부터 오는 무형의 압박이 느껴진것이였다.

《대좌께서는 세경이 그놈도 풀어놓으라는 지령을 떨구었네. 부락의 소요가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할수없이 취한 조치일세. 한데 이놈이 돌아와서 할짓이 과히 두렵네. 서울공부를 했겠다, 총명두 하겠다. 아무튼 이놈이 돌아와서 말을 함부로 비뚤궈놓는 날에는 큰 화단일세. 그래서 내가 지석참로인에게두 침을 놓긴 하겠네만 자네가 이녀석 뒤를 놓치지 말구 밟아보게. 아주 불온한놈이여. 대좌께서는 우리가 한발 지는척하고 물러섰다가 죄여들어가자고 하셨네. 그리구 이사람.》

백지주는 이번에는 함석필의 귀를 끌어잡아당기였다.

《이번 문제를 뚜져일군건 구장누일세. 가만 보면 구장누이가 암만해도 순편치 못한 녀자야. 마을아낙네들이 적잖게 그 녀자의 품에 들었어. 그 녀자 하라는대루 하는 눈치거던. 춘옥이나 쌍별이따위가 감히 나하구 맞서서 을러볼 재목들인가? 한데 이것들이 제법 주장을 가지고 어째보는 눈치들이란말이야. 그게 틀림없는 구장누이 작간이라고 나는 보네. 그리구 구장자신두 그 녀자의 장단에 노는것 같은 기미란말일세. 자네 이것만 들추어내면 그 공로는 이따위 부락성쌓기에 비길바가 아니네.》

함석필은 자기가 점점 험한 모퉁이에 빠져드는것 같은 위구와 동시에 여기서 솟아날 가망이 또한 없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라가와가 자기에게 손을 뻗치기 시작했을 때 벌써 함석필은 한절반 묶이운 몸이라고 생각하고있었다. 백지주가 하는노릇을 보면 절반은커녕 손목이며 발목까지 꽁꽁 묶이여 이사람들 수족이 되지 않을수 없는 막다른 처지에 이른셈이다.

함석필은 제손으로 술을 부어 두어잔 거퍼 들이켰다. 여기서 무슨 리득을 볼가 하여 가히 막설하지 않고 조금 응하는척도 하여보았지만 마음사람들을 꽂아넣고 살구멍수를 볼 생각까지는 아직 없었다. 그러면서도 함석필은 자기가 어느만큼은 이들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수 없는 사람인것을 알고있었다. 만약 이 일에서 정말 돈이 생기고 좋은 취직자리가 얻어지고 한다면 그것을 뿌리칠 자기가 아닌것을 느끼고있었기때문이였다.

이래서 함석필은 속이 탔다. 이제는 백지주의 말이 거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더 듣지 않아도 그의 요구가 무엇인지 알았으며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똑똑히 가늠하고있었다.

그는 욱신거리는 눈을 들어 백지주의 머리우로 화려하게 펼쳐진 병풍을 주시하였다. 그것은 해와 구름, 물과 산, 소나무와 학, 대나무며 불로초 그리고 사슴, 거북 등 10장생을 그린것이였다. 창문 맞은편벽을 덮고도 남을만큼 큰 열두첩의 병풍이다. 언젠가는 여기에 사람의 일생을 기념하는 평생도를 그린 병풍이 있었는가 하면 백수백복도를 쓴것도 있었다. 어린애의 얼굴을 그린 병풍, 꽃과 나비만을 그린 화려한 병풍을 놓은적도 있었다. 병풍종류만도 가지각색이다.

냄새를 맡아도 이 집에서는 온통 달작지근하고 감미로운 향기가 풍긴다. 가끔 건넌방미닫이를 열면 거기서는 좀을 죽이는 나흐따린냄새가 풍긴다. 첩년들은 말할것도 없고 늙은 본댁네까지 세수비누도 외국산 수입품으로 쓴다. 크림, 향분, 머리빗 모두가 값비싼것들이다. 그런데 자기들, 그래도 밥술이나 떨구지 않고 먹는다는 자기네들 살림이란 어떤것인가? 방바닥에 코를 대보면 봉당냄새가 풍기고 문턱밑에 코를 가져가면 빈대냄새가 나며 문턱밖에 얼굴을 내밀면 개비린내가 난다. 뜨락에 나서면 소똥냄새, 돼지오물냄새, 그리고도 늘 하느니 돈타령이다. 사실 이 집보다 사람이 못난것이 무엇인가? 함석필은 보통학교시절에 사칙문제풀이에서 뛰여난 재능을 내보였던 사람이다. 글씨도 곱고 빠르고 하여 스무살안팎에 한때는 신파에 건너가 대서방에서 삯일을 한 때도 있었다.

결국 돈이 없어 백지주의 더러운 요구를 들어야 하고 량심을 속이며 마을사람을 꽂아넣는 행위도 해야 하는것이다.

함석필은 괴로와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그는 컴컴한 골목길을 터벅터벅 걸어갔다. 마음은 괴롭고 공허하기 그지없었다.

문득 어제 꼬부랑막대를 짚고 행상을 떠난 늙은 어머니가 떠올랐다. 늙은이는 향옥이를 시켜 신파장에 건너가 양초, 밀초, 분지기름, 어유기름, 비누, 참빗, 물감 기타 세세한 물품을 사오게 하여 그것을 꿍져이고 행상을 떠났다. 해마다 몇차례씩 그렇게 행상을 하였다. 돈이면 돈, 쌀이면 쌀 되는대로 받아가지고 무거우면 혼자힘으로 나르지 못하고 후에 함석필을 보내여 발구에 실어오든지 등짐으로 져오게 하였다. 그렇게 힘들게 물어온 쌀은 보리고개에 팔아서 돈을 만들고 그 돈으로 변놓이를 하여 다시 새끼를 치고… 이렇게 돈을 만드는노릇에 일생을 바쳤고 지금도 그 일을 계속하고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보아야 밥술이나 떨구지 않고 먹는 정도외에 더 무엇이 없었으며 돈을 모아 큰부자가 되여보려는 늙은이의 꿈은 꿈대로 남아있었다.

함석필은 한숨이 새여나갔다. 돈을 벌어보려는 욕망은 늙은 어머니 못지않게 자기에게도 강하였다. 향옥이도 돈을 모으고 잘살아보려는 꿈을 언제나 꾸고있었다. 그러나 향옥이는 너무 마음이 곱고 착하여 언제 돈을 벌어볼 녀자같지는 않았다. 그는 돈이 어디서 어떻게 언제 생기는지 모르는 녀자다. 돈을 벌자면 량심을 속이고 협잡을 해야 하는 피투성이 싸움도 벌려야 한다는것을 향옥은 모른다. 그래서 어머니의 행상을 달가와하지 않았고 변놓이를 하는일은 그보다 더 맞갖잖아하였다. 그저 석필이더러 어디가 돈이 생길 좋은 일자리를 얻고 그래서 가세가 펴나가기를 기원하였다.

답답한것이, 돈이 어떻게 생기는줄도 모르고…

함석필은 탄식하였다. 작년 이맘때 삼계골 봉선이하고 안삼계골 태철이하고 눈이 맞아 죽자살자하다가 13도구에서 청부업자녀석 하나가 날아들어 봉선이를 중도에서 채간 일이 생각났다. 그는 나이도 봉선이보다 스무살이상이고 못생긴 우악진 상판에다 세상없는 난봉군이고 칼싸움에 엄지손가락이 잘리운 망나니인데 그래도 돈냥이나 있다고 뻔질나게 오르내리더니 드디여는 혼약이 성립되여 봉선이의 랑군으로 되여버린것이였다.

봉선이는 마음은 태철이에게 두었으나 시집은 청부업자녀석한테 갔다. 봉선이를 태운 사인교가 마을을 떠나고 신랑이 꾸려보낸 례장감을 실은 노새 두필이 언덕을 넘어갔을 때 마을청년들은 모두 죽지가 처져서 막걸리 한잔씩에 거드럭거드럭하며 집으로 흩어져갔다. 돈이 없고 권세가 없는탓에 이 마을 숱한 총각이 있어가지고 고운 봉선이를 청부업자녀석한테 뺏기구말았구나 하는 울고싶은 허탈감이 모두의 가슴을 움켜잡았던것이다.

강성태구장을 믿지 못한다구? 구장누이를 단단히 살펴보란말이지… 함석필은 머리를 깊이 떨구고 무거웁게 걸음을 옮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