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5

 

제 1 장

5

 

따뜻하고 부드러운 훈향이 온몸을 감싸고있었다. 포근한 햇솜우에 잠시 시름을 잊고 누우신듯한 감촉이시다.

가까운데서 무엇인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듯한 소리가 들린다. 무슨 소릴가?···

구수하고 달콤한 냄새가 문득 페부에 깊이 스며든다. 가벼운 입김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는듯한 간지러운 느낌도 드신다.

내가 지금 어디에 누워있을가.

가랑잎을 깔아놓은 재봉대귀틀막인가? 아니면 산전막련락소의 부뚜막일가?

김정숙동지께서는 조용히 눈을 뜨시였다. 푸르스름한 둥근 반점들이 무수히 나붓기고있었다.

이건 뭘가? 도배를 한 벽이로구나. 저건?··· 그래 저건 벽에 걸린 옷들이구··· 그런데 군복두 아니구 낯선 치마저고리로구나. 저기 검스레한 저 중절모자는 누구의것일가?···

김정숙동지께서는 가슴우에 얹어진 포단을 조심스레 밀고 상반신을 일으키시였다.

처음으로 눈에 뜨인것은 부엌에 켜놓은 등잔불이였다. 말쑥하게 닦아놓은 찬장속에는 수없는 불꽃들이 반짝거린다.

그것은 그릇들과 종지에 부딪친 등잔불빛이였다. 수천의 애기별들을 가두어넣은듯이 찬장속은 곱다.

그이께서는 혼미한 의식속에서도 미소를 지으시였다.

가마에선 실실 김이 솟아오른다. 얇은 가마뚜껑이 흔들리고 게밥이 끓어오르는듯이 김방울이 솟아오른다.

부엌아궁에선 장작불꽃이 탁탁 튀는 소리도 들린다. 강아지가 문을 열어달라고 낑낑거리며 부엌문을 버적버적 허빈다.

《공작지로 왔구나!》

문득 김정숙동지의 마음속에 강렬한 생각이 비껴들었고 그와 동시에 찌르르 가슴이 울리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새삼스레 설레는 가슴을 안으시고 방안을 둘러보시였다.

등잔의 으스름한 그림자가 반나마 가리운 방안에서 얌전이가 자고있다. 가느다란 팔을 내던진채 제법 코를 쌕쌕거리며 잠에 취해있었다.

아무리 《고모》라고 두번세번 대주어도 부지불식간에 《언니》라고 부르고는 깔깔대며 돌아가던 얌전이다. 그 애는 자면서도 해쭉해쭉 웃고있다.

달콤한 꿈을 꾸고있는 모양이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어린것의 잠자는 모습을 미소속에 지켜보시였다.

거기에 행복과 평온과 안식이 깃들어있으며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 안해들과 누이들이 쏟아붓는 애무가 함께 잠자고있었다.

벌써 문득 희끄무레 밝아온다. 토방에서 닭들이 뛰여올라 창호지를 쫏고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조용히 일어서시였다.

《아니, 왜 벌써 일어나셨어요?》

물동이를 이고 부엌에 들어서던 신분단이가 놀라와하면서 물었다.

《온돌이란게 늘 그모양이예요. 그쪽으로는 영 온기가 없다니까요.》

분단이는 진심으로 걱정했다.

《원, 형님두 우린 산에서 나무잎을 깔고 잤답니다. 오래간만에 방안에 앉으니 이상한 생각이 들어요. 저 찬장이랑 부엌이랑···》

김정숙동지께서는 팔소매를 걷어올리시고 물동이를 받으시였다.

《제가 좀 긷겠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상냥하게 웃으시며 물동이를 받으시였다. 그이께서는 드무에 물을 쏟아부으시고 사뿐히 옆구리에 물동이를 끼시였다. 청초하고도 단아하신 모습이였다. 줄곧 부드러운 미소가 어리신 그이의 눈가에는 불안의 흔적같은것은 찾아볼수도 없었다.

《물을 긷다니. 피곤할텐데 안돼요.》

분단이는 동이를 빼앗으려고 덤비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가볍게 몸을 돌려 피하시였다.

《형님, 걱정말아요. 일없어요.》

분단이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웃방문을 쳐다보았다. 주인이 무어라고 책망할지 그것이 걱정되는것이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사뿐히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가시였다. 맑고도 신선한 산촌의 대기가 얼굴을 스쳤다.

구정물을 쏟아버린 재간옆에서는 까치 한마리가 부러진 삭정이를 물고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한쌍의 까치가 깍깍거리며 둥지를 틀고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싸리울바자사이로 트인 골목길을 총총히 걸어가셨다.

뉘집 굴뚝담에서 흘러나왔는지 골목길에는 연기가 한벌 깔린채 서서히 흘렀다.

발목은 연기속에 파묻혔다. 걸으시면 연기가 푸실푸실 흩날린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물동이를 옆게 끼신채 가볍게 걸음을 옮기시였다.

난생처음으로 대하는 마을이건만 퍼그나 친숙해진것 같은, 오래전부터 벌써 이 골목길을 수없이 걸으신듯한 마음이시다.

무엇이 그러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것일가? 어디라없이 배여있는 가난인가? 낡은 싸리울바자? 길바닥에 기여다니는 저 연긴가? 아니면 공작지로 왔다는 생각, 여기서 혁명을 하며 장군님의 조국광복구상을 꽃피우게 되리라는 생각을 줄곧 해오신 그 마음속의 신선한 부딪침일가?

그래 바로 그것이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눈물겹게 그 모든것이 다시금 생각되시였다.

그이께서는 머리우에서 이상한 감촉을 느끼시고 고개를 드시였다. 버섯이 돋은 시꺼먼 울짱우에 엄청나게 큰 수리부엉이가 앉아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커다란 눈이 밝아오는 동쪽을 바라보고있었다. 그것은 불꺼진 등잔같은 희미한 눈이였다. 눈주위의 부루루 일어선 부드러운 털이 마치 사위여가는 등잔불을 감싸듯이 점점 정기를 잃어가는 그 허연 눈을 둥글게 감치고 돌아갔다.

부엉이는 억센 발톱으로 울짱을 움켜잡고 이따금 그 큰 날개를 들어 서서히 공중으로 부채질한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문득 지난해 압록강연안의 가재수마을에 들어섰을 때 황혼이 비낀 머리우에서 저렇게 큰 부엉이가 빙빙 돌아가는것을 보시던 생각이 떠오르시였다. 골목저쪽에서 드레박 부딪치는 소리, 쭈룩쭈룩 물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골목을 돌아서시였다.

통나무로 짠 우물귀틀이 보이시였다.

물동이를 이고 손으로 동이굽을 훔치면서 한 처녀가 걷고있었다. 우물주위의 땅은 조금 젖어있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그 젖은 땅을 조심스레 밟으시며 사뿐히 동이를 내려놓으시였다. 머리우에서 핑핑 활차가 돌아가고 까마득한 우물속으로 드레박이 솨-떨어져들어갔다. 풍, 물에 드레박 떨어지는 소리, 드레박이 기울어지고 물이 담기는 감촉이 팽팽한 줄을 통해 알려진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줄을 당기시였다. 드레박새짬으로 빠지는 물소리가 우물속에 가득찼다. 물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절반쯤 물이 찬 드레박이 불쑥 눈앞에 솟아올랐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얼른 드레박을 잡으시고 동이에 쭈르륵 물을 쏟아부으시였다. 그다음 물동이를 들어 휘휘 흔들어서는 저편 개수도랑에 쭈룩 쏟아버리시였다. 신선한 물방울이 날려 그이의 얼굴에 튀여올랐다. 드레박은 다시 줄을 타고 아득한 우물바닥으로 떨어져들어간다.

머리우에서는 활차가 돌고 팽팽한 드레박줄에서 물방울이 듣는 미묘한 감촉···

그 순간 김정숙동지의 머리에는 잊지 못할 한가지 일이 불현듯 떠오르시였다. 그것은 행군도중에서 있었던 일이였다.

며칠동안을 내처 전투와 행군으로 보내던 어느날 장군님께서는 힘들어하는 녀대원들의 행군대오에 오시여 함께 걸으시다가 물으시였다.

《여기 녀성동무들중에 물동이를 이여보지 못한 동무들이 없소?》

녀성대원들은 뜻밖의 물으심에 처음은 어리둥절하였으나 곧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행군에 지친 녀대원들이였으나 그들의 얼굴에서는 순식간에 피로가 사라졌다. 누구는 물동이를 이여보았다느니 누구는 이여보지 못했다느니 하면서 한참이나 떠들었다. 그들은 장군님께서 옆에 계신다는 생각을 깜박 잊어버리고 소란을 피웠다. 장군님께서는 즐겨 미소를 띠우시고 한동안 녀대원들을 바라보셨다.

《그러니 우리 녀대원들중에 물동이를 일줄 모르는 동무가 한두동무가 아니군.》

그이께서는 소탈하게 말씀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지주집에서 물지게는 실컷 지여보았지만 물동이는 한번도 이여보지 못했다고 하면서 물동이를 이여본 동무를 부러워하는 한 녀성대원의 어깨우에서 총을 벗겨드시였다.

《래일아침까지 이 총은 나에게 맡겨두시오.》

장군님께서는 친근하고도 부드러운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녀대원은 처음 한동안 영문을 몰라 멍청히 있었지만 곧 총을 돌려달라고 졸라대기 시작하였다.

《사령관동지, 총을 주십시오. 저는 힘들지 않습니다. 저는 얼마든지 견디겠습니다.》

《아니, 그러지 마오.》

사령관동지께서는 그 녀대원의 어깨를 두드려주시며 진정시키시였다.

《동무는 오늘 좀 홀가분히 걸으면서 물을 긷던 동무들의 이야기나 들으시오. 스무살이 가깝도록 지주집물지게만 지였다니 가슴이 아프오.》

그리고나서 장군님께서는 녀대원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우리가 북만원정에 갔다 돌아왔을 때 일이 생각나오. 그때 녀성동무들은 나에게 매달려 치마를 입게 해달라고 졸라댔소. 그때는 녀성들도 바지를 입었으니 치마를 입고싶었던것이요. 나는 녀성동무들의 청을 듣고 즉시 광목에다 가둑나무물을 들여 치마를 지어주도록 하였소. 우리 녀대원들은 간고하고 시련에 찬 싸움속에서도 녀성으로서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꿈을 간직하고있소 그것이 얼마나 훌륭한 일이요? 우리 녀대원들은 녀성으로서 누릴 온갖 권리와 꿈을 위하여 성스러운 혁명의 길을 가고있소.

얼마나 장하오. 나는 우리 남성동무들보다 녀성동무들이 더 기특하오. 오늘은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긷던 이야기나 실컷 합시다. 그러면 힘이 날것이요.》

대오는 술렁거렸다. 즐거운 이야기들이 벌어졌다. 한 녀대원은 시집간 첫날에 우물가에 나가 물동이를 곱게 이려고 맵시부리던 이야기를 하여 온 대오를 웃겼다. 다른 녀대원은 장작을 한임 이고 장에 가서 20전 주고 사온 물동이를 얼음판에 깨치고 울던 이야기를 하여 또다시 대오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생활이 있고 추억이 있었던 행군이였다. 잊지 못할 그 행군은 낮과 밤을 이어 계속되였다. 모두들 고향을 생각하였다. 빼앗긴 고향, 짓밟힌 조국, 수난당한 겨레들을 생각하였다.

걸음걸음 웃음이 있고 걸음걸음 비분이 흐르던 행군이였다. 장군님께서는 내내 녀대원들의 옆에서 걸으시였다.

그 즐겁고도 가슴벅찬 행군은 이미 끝난지 오랬으나 김정숙동지의 가슴속에는 그때의 웃음소리, 그때의 행복하고 즐겁던 일들이 지금도 또렷이 가슴속에 남아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물이 찬 동이를 들여다보시였다. 장군님의 미소어리신 모습이 그 동이전에 어린다. 인자하시고 부드럽고 숭고하신 모습이시다.

《장군님!》

김정숙동지께서는 눈앞이 흐려 앞이 보이지 않으셨다. 무엇을 생각하거나 어떤 추억에 잠기거나 장군님께서 불비속에 뿌리를 내리고 아지를 치게 한 조선혁명의 가지가지 눈물겨운 사연들을 돌이키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깊은 생각에 잠기신 그이께서는 어떻게 집에까지 오셨는지 느끼지 못하시였다.

《야, 고모!》

문밖에 서있던 얌전이가 소리치며 마주 달려왔다.

《얘, 물동이를 깨겠다. 작작 좀 덤벼라.》

분단이는 얼른 부엌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며 혀를 차다가 물동이를 받아내렸다.

김정숙동지의 치마자락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지고있었다. 동이에서 넘쳐난 물이 저고리를 적시고 치마자락에까지 흘러내린것이다.

《아이구, 옷이 젖었구만···》

분단이는 서두르며 김정숙동지의 저고리앞섶에 달린 물방울을 털어내렸다.

《서툴러서 그러지요. 물이 출렁거려서 걷기가 힘들구만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이어 조그마한 싸리비자루를 집어드시고 부엌을 깨끗이 쓰시였다. 불때고 남은 장작은 한쪽구석에 세워놓으시였다.

부엌은 넓어지고 아담해졌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불이 꺼진 질화로를 들어다 재를 쏟아버리고 이글거리는 숯불을 떠놓으시였다.

《형님, 화로에 된장찌개를 들여놓아야지요?》

신분단은 빙그레 미소를 띠운채 고개만 끄덕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화로우에 적쇠를 걸쳐놓고 찌개가 담긴 양은남비를 올려놓으시였다. 남비는 곧 달랑달랑 소리를 내며 끓기 시작했다.

그이께서는 이번에는 수저통에서 숟가락을 꺼내시였다. 찬장에서 놋그릇도 들어내시였다.

《그건 또 어쩌려구 그래요?》

《밥이 잦을 때까지 좀 닦지요.》

벌써 사각사각 그릇닦는 소리가 들렸다. 재가루를 움켜쥐신 가벼운 손이 재빠르게 움직이자 놋그릇들은 불빛을 받아 번쩍거리고 환하게 윤이 흐르기 시작한다.

《언제 그런 일 다 배웠을가?》

신분단은 진심으로 감탄하였다.

《그릇닦는 일이야 산에선들 못하겠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호- 숨을 내쉬며 말씀하셨다. 그이의 얼굴에는 밝은 웃음이 떠돌고있었다.

얌전이도 김정숙동지곁에서 꼭지숟가락을 닦고있었다. 고모를 본따느라고 재를 묻히고 새끼오리로 문다지며 쌕쌕거렸다.

《얌전이가 곱게 닦는구나.》

김정숙동지께서는 애무에 찬 눈길로 얌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셨다.

《해해 난 고모가 좋아.》

얌전이는 깔깔거렸다. 그러다가 재가루가 묻은 손으로 주저없이 김정숙동지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니, 저 애가 너 고모저고리가 뭐가 되니? 이 계집애!》

신분단이 아이를 떼내려고 막 부엌에 내려서는것을 김정숙동지께서는 말리시였다.

《놔두세요.》

《원 애를 그렇게 버릇궂혀서는 못쓴다니까요.》

신분단은 얌전이에게 눈을 부라렸다.

얌전이는 뾰로통해졌다. 어머니쪽은 보지도 않고 고모에게만 얼굴을 돌렸다.

《고모, 난 밤에 꿈을 꿨다.》

《무슨 꿈?》

《하얀 꿈》

《꿈에도 하얀 꿈이 있니?》

신분단이 퉁을 놓았다.

《아마 꿈에 함박눈을 보았던게지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얌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시였다.

《그렇지?》

《응.》

《그래 꿈은 어디서 오나요?》

《하늘에서 내려와요.》

얌전이는 두팔을 벌려 내려오는 시늉을 하였다.

《그럼 꿈을 어디로 꾸나요.》

《배속으로 꿔요.》

얌전이는 깔깔대면서 배를 불쑥 내밀었다. 참고참았던 웃음이 터져올랐다.

신분단은 배를 안고 돌아갔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부뚜막에 손을 짚으시고 웃으시였다. 얼마나 웃으셨는지 어깨마저 녹작지근해졌다.

《아이참》하며 신분단은 기쁨속에서 눈물을 씻었다. 한없이 다정하고 살가운 정이 가슴에 넘쳐났다. 남편이 그렇게도 어마어마하게 말하던 혁명군의 녀성대원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알고있는, 그리웁던 살틀한 동생이 문득 집에 돌아와 이렇게 웃음꽃을 피우는것만 같아 신분단은 새삼스런 눈으로 김정숙동지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