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4

 

제 1 장

4

 

빽빽이 우거진 이깔나무숲사이로 가늘게 트인 오솔길이 끝없이 뻗어있었다.

천고의 밀림이 자아내는 무시무시한 정적속에 기척없이 누워버린 오솔길은 세월의 퇴적같은 묵은 나무잎들이 쌓이고 덧쌓이여 이제는 여기에 언제인가 길이 있었다는 희미한 흔적을 남기고있을뿐이다.

사냥군은 물론 산짐승들도 접어들지 않고 때때로 골짝바닥에서 불어오르는 밀림의 솔바람만이 나무잎을 흔들며 스쳐지나는 이 오솔길에 문득 사람의 인적이 울리기 시작했다.

딱딱 삭정이 부러지는 소리, 나무가지들이 설레며 흐르르 락엽이 흩어지는 소리, 고요한 정적에만 익숙되였던 밀림의 놀란 새들이 날개를 푸득이며 어디론가 날아나는 소리···

그와 함께 숲의 어느 언저리에선가 묵은 락엽우를 미끄러지듯 재빨리 밟아가는 자태가 비쳐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발이 푹푹 빠지는 락엽우를 스칠가말가하게 드리운 검정색치마에 자주빛저고리를 받쳐입고 납작한 보자기를 가슴에 꼭 부둥켜안은 모습이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긴치마자락아래에서는 자그마하고 단단한 흰 버선발이 언뜻언뜻 드러나보이고 길고 부드러운 자주색고름이 가슴우에서 얼핏얼핏 나붓겼다.

김정숙동지께서 오솔길에 들어서신것이였다.

그이께서는 천상수의 산전막련락소에서 며칠 묵으시면서 공작준비를 면밀히 갖추시고 오늘 도천리로 들어가시는 길이시였다. 조직에서는 이미 도천리지하조직책임자인 강성태에게 련락원을 보내여 장군님께서 직접 파견하시는 공작원동지가 도천리에 들어간다는것과 무산에 있는 강성태의 사촌누이로 가장하고 공작하게 된다는것을 알렸다.

그이께서는 곰털토시를 낀 산적막로인이 화승대를 둘러메고 길안내를 나섰다가 올코에 걸린 노루를 뽑아가지고 돌아간 다음에는 줄창 혼자서 밀림속의 오솔길을 걸으시였다.

해묵은 거미줄이 얼굴에 휘감기고 해토무렵의 질척거리는 물이 깊이깊이 배여든 묵은 락엽속에 발목은 푹푹 잠겨들었다. 머리우에서는 때없이 화르르 화르르 락엽이 흩어져내리는 얼기설기 얽혀붙은 나무가지들이 촘촘히 눈앞을 막아나섰으며 비바람에 나자빠진 아름드리 진대나무가 터실터실한 껍질에 허옇게 버섯을 돋친채 길우에 가로누워있었다.

실로 심술궂은 자연의 훼방같이 느껴지는 귀찮은 오솔길이였으나 김정숙동지께서는 산길에 익숙하신 걸음으로 치마자락을 스치며 날렵하게 빠져나가시였다. 나무가지들은 그이의 등뒤에서 흐느적거리고 발에 밟힌 락엽들은 한번 깊숙이 움츠러들었다가는 천천히 소리없이 살아올랐다.

그이께서는 잠시 걸음을 멈추시고 은실같은 해빛이 실실이 비쳐내리는 숲의 고요한 공간을 휘둘러보시였다. 회초리같은 나무가지 하나가 갑자기 놀란듯이 공중에서 뛰여올랐다. 누런 꾀꼬리 한쌍이 나무가지를 치스르며 오르락내리락하였다. 주둥이가 노랗고 몸뚱이가 탐스러울만치 퉁퉁한 암놈이 청청한 대기속에 힘껏 우짖었다.

《너 날래날래, 너 날래날래.》

그러자 수놈이 꼬리를 유쾌히 촐싹거리며 신이 나서 받아넘겼다.

《날날 놀래놀래.》

신명이 난 꾀꼬리들은 제바람에 섭쓸려가지고 엎치락뒤치락 숲사이를 빠져나갔다. 그 숲이 흔들리는 어느 어방에선가 《피리리 피리리》 하고 까투리의 울개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락엽이 깔린 산비탈로 힘차게 내닫는 장꿩의 찬란한 긴 몸뚱이가 드러났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인가가 가까와지고있다는 생각으로 미소를 머금으시였다.

얼마나 다그쳐오신 걸음이신지 그이께서는 자신도 놀라실 지경이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다시 걸음을 재우치시였다. 오솔길은 차츰차츰 넓어지기 시작했다.

길은 나무가 없는 밋밋한 등판으로 가로질러나갔다. 숲이 끊어진 등판에는 희슥희슥 은빛을 뿌리는 새초와 갈대들이 무성했으며 바람이 스칠 때마다 지난해의 묵은 이삭들을 날리지 못한 쭉정이꼬투리들이 설렁대고있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발구길을 따라 새초밭으로 들어서시였다. 숲이 와슬랑거리며 누런 개가 화닥닥 뛰여나왔다. 부르르한 털에는 우엉이씨가 가득 달라붙었고 씩씩거리는 넙적한 주둥이에는 날짐승의 보드라운 털들이 묻어있었다. 개는 주둥이로 냄새를 맡으며 멀리 산자락쪽을 향해 컹컹 짖어대더니 두귀를 벌쭉 세우고 다시 숲으로 뛰여들었다.

밝은 해빛이 어우러진 찬란한 새초웃초리들은 삽시에 소란스레 뒤번져지고 허옇게 먼지가 피여오르듯 묵은 꼬투리들이 날아올랐다. 개가 달려가고있는 산자락에서 나물바구리를 든 젊은 녀자가 가고있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그에게 길을 물으려다 말고 달구지길에 들어서시였다. 새초밭을 벗어나자 길은 등성이아래로 굽어들었다. 수림속을 걸으실 때는 언제 평탄한 땅이 있을것 같지 않더니 앞에는 고원지대와도 흡사한 낮은 구릉이 펼쳐져있었다. 무성한 숲이 우거진 산자락은 구불구불 구릉언덕을 감싸고 돌아갔는데 그안에 밭들과 농가들이 널려있었다. 그러고보면 이곳 주민들은 저 아름드리나무를 찍고 수풀을 쳐내여 땅을 일구고 집을 세운 모양이다. 농가들을 둘러싸고 우중충 늘어선 나무들을 보면 마을은 마치 깊은 산속에 파고들어앉은것 같았다.

숲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숲으로 통하는 길은 밭지경 하나를 사이에 두었을뿐이다. 지하공작을 하기에는 유리한곳이다. 지난 2월에 장군님께서는 여기 도천리계선에 나타난 정안군 한개 대대를 주변의 깊은 수림속으로 이리저리 끌고다니다가 실컷 지치게 하고는 밤중에 소굴로 돌아가는놈들을 도로연변에 나가 통쾌하게 족치시였다.

그것이 바로 두달전일이다. 사람들의 머리에는 그때의 인상이 아직도 똑똑히 살아있을것이다.

생각하면 정든곳, 정든 사람들속으로 오는것 같은 기분이시다.

도천리사람들이 장군님의 전설같은 이야기를 외우며 다시 유격대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릴것 같은, 그것이 그들의 소원이며 희망이며, 그리하여 바로 그 숙원을 안고 자신께서 오신듯한 행복하고도 유정한 감회가 가슴에 차고넘치신다.

걸음이 저절로 빨라지시였다.

한집두집 산재된 농가들을 눈으로 세여넘기면서 달구지길을 따라 조금 걸으시니 둔덕아래로 제법 큰 마을이 내려다보이였다.

한 100여호 가까이 들어앉은 부락이였다. 황철나무의 기다란 웃초리들이 빽빽이 들어차있고 간혹 자작나무의 흰 가지들이 바람에 번쩍거린다.

집들은 모두 풀더미같은 오두막들이다.

동네의 서북쪽, 안침진 산자락에 치우쳐 붉은 양철지붕을 인 집 한채가 유난히 드러났다. 그 집을 둘러친 거무스레한 성벽같은 담장이 나무그림자속에 싸여 한결 칙칙해보였다. 그것은 지주 백가놈의 집이다. 천상수의 산전막련락소에서는 도천리백지주가 돈냥이 있고 세력이 당당한놈이여서 왜풍양식으로 거들먹거리며 살아간다고 하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이윽토록 마을을 내려다보시였다.

컴컴하고 조용한 마을, 이 땅의 어데 가나 보게 되는 버림받은 마을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 마을이 장군님의 조국진군에 디딤돌이 되고 고임돌이 되여 그이를 받들어나갈것이다.

백두산근거지로부터 조국의 랑림산계선으로 진출하는 우리의 통로가 이곳에 닦아지게 될것이다. 그날은 멀지 않았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끝을 모르게 설레며 깊어지시는 생각에 잠기신채 걸음을 옮기시였다. 한참후에 김정숙동지께서는 자그마한, 넓지 않은 강이 길을 가로질러 흘러가는 강가에 다달으시였다. 얕은 물에는 빨래돌같은 징검다리가 놓여있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발끝으로 첫번째 징검돌을 건드려보시고 날렵하게 돌을 밟아나가시였다. 그러나 얼마 못가시고 강복판에 멎어서시였다. 징검돌들이 물속에 잠겨버리고만것이였다. 그래도 물속에 잠기지 않은 돌머리를 밟으면 그런대로 건널수 있겠지만 무엇인가 잠시 망설이던 김정숙동지께서는 되돌아나오시였다. 개울가에 보퉁이와 신발을 벗어놓고 팔을 걷어올리신 그이께서는 징검다리를 돋구어놓으시려고 강으로 들어서시였다. 이른봄의 산골물은 얼음같이 차거웠다.

그이께서는 망짝같은 돌들을 가까스로 움직여 괴여올리시였다. 얼굴을 수그린 가슴밑에서는 푸득푸득 물방울을 튕겨올리며 강물이 빠르게 흘러갔다. 얼굴이며 옷이 젖기 시작했다. 물에 잠긴 다리와 팔목은 빨갛게 얼었다.

강건너편 둔덕우에서 쌍지팽이를 짚은 체소한 로인이 걱정스런 눈으로 강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애기네, 손을 얼구지 말고 어서 나오게. 눈석임물이 자꾸자꾸 불을텐데 소용이 없는 노릇이니.》

김정숙동지께서는 물속에 손을 잠그신채 강건너둔덕을 쳐다보시였다. 둔덕우에서는 쌍지팽이에 몸을 의지한 로인이 병색이 완연히 짙은 얼굴을 들고 이쪽을 바라보고있었고 로인의 등뒤로 일매지게 펼쳐진 등판에서는 살진 돼지떼가 부산스레 풀을 뜯고있었다. 로인의 손에 들린 채찍으로 미루어보아 돼지몰이를 나온 모양이였다. 그는 백지주집에서 머슴을 사는 칠봉로인이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로인의 행색이 처량한데다가 목소리가 또한 인정이 깊어서 잠시 허리를 펴고 서시였다.

《괜찮아요. 물이 불어나면 또 고쳐고이면 된답니다.》

《원 저런 고마울데라구야. 애기넨 어디루 가는길인가?》

《도천리에 오는 길이랍니다. 할아버지.》

《도천리면 우리 부락이군. 뉘집 자손인가?》

로인은 쌍지팽이를 짚고 깐깐히 캐물었다.

《강구장의 사촌누이동생입니다.》

《아하, 내 이야길 들었네. 구장이 사촌누이가 온다고 요즘 구들도 뜯어고치고 부엌이랑 손질했다는 말 들었어. 원 이런 착한 마음이라구야.》

칠봉로인은 혀를 끌끌 찼다. 그러다가 흩어지는 돼지무리에 대고 채찍을 휘둘러대며 급히 언덕아래로 내려갔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생각깊은 눈길로 멀어져가는 칠봉로인의 처량한 모습을 이윽토록 바라보시였다.

마을쪽에서 까만 양복을 입고 꼭뒤가 조금 지치러진 학생모자를 쓴 젊은이가 걸어왔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얼굴이 창백해보이는 청년이였다. 그는 돌다리가 번듯하게 놓인것을 보고서도 신을 벗었다.

《징검돌로 건느시지요. 왜 신을 벗습니까?》

김정숙동지께서는 젖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리시며 말씀하셨다. 청년은 맨발로 몇걸음 조약돌을 밟으며 걸어오다가 멈춰섰다. 부리부리한 눈에는 정기가 흐르고 미간으로 모여든 눈섭이 강한 인상을 주었다.

청년은 낯모를 녀성이 놓아준 징검돌을 그냥 밟고 건늘수 없어 잠시 망설이고있었다.

《어서 건느십시오.》

김정숙동지께서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시고 다시금 권고하시였다.

청년은 손으로 발바닥을 털고 신을 신었다.

《미안합니다. 참으로 안됐습니다.》

청년은 깍듯이 머리를 숙여 례의를 표하고 징검돌을 건너갔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물을 헤가르시며 강에서 나오시였다. 팔과 다리는 새빨갛게 얼었다.

나물바구니를 든 젊은 아낙네가 강역으로 다가왔다. 아까 새초밭에서 본 녀인이였다. 그는 권용산의 안해 춘옥이였다. 춘옥은 아까 신발을 벗고 건넜던 개울에 징검돌이 놓인것을 보자 놀라움을 금치못하며 김정숙동지를 바라보았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눈웃음을 지어보이시며 미안해서 징검돌을 밟지 못하는 춘옥이더러 어서 건느라고 하셨다. 춘옥은 급급히 머리수건을 벗어쥐였으나 얼굴만 빨갛게 붉히고 인사를 못했다.

눈은 감실감실하고 얼굴은 복스럽게 생겼다. 그는 너무 일찍 틀어올린 머리봉을 보이기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지 못하는것 같았다.

이윽고 김정숙동지께서는 춘옥이를 앞세우고 징검돌을 건너 달구지길에 나서시였다.

《댁에 앓는이가 계시나요?》

아낙네는 낡은 베보자기에 싸든 느릅나무껍질을 새삼스레 여겨보면서 잠시 대답을 망설이더니 시름겹게 한마디 하였다.

《허리를 다쳐서 몸져누운 아버님이 계세요.》

《많이 상하셨나요. 어디서 다쳤게요?》

《지주집 산판일에 나갔다가 통나무에 치였어요. 꼭 이태가 되여오는데 병은 차도가 없구··· 바깥구경이란 영 못해요.》

《그래요···》

김정숙동지께서는 괴로움에 휩싸여들면서 사뭇 동정에 넘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동네에 의원은 있어요? 병구완은 어떻게 하나요?》

《병구완이란게 뭐 별로 없어요. 느릅나무껍질을 찧어다 상처에 붙이구 찜질을 하는게 고작이예요. 작년 이맘때 우리 쥔이 술기를 가지고 가서 소경의원 한분 모셔왔는데 눈을 감구 잔침질을 몇번 하고나서 가버린 뒤론 의원그림자두 구경 못해요. 약값이 너무 비싸서···》

김정숙동지께서는 녀인의 가정일에 마음이 씌여 위로의 말씀을 더 못하시고 한동안 걷기만 하시였다.

《형님은 어디서 오시나요?》

춘옥은 사뭇 다정한 눈길로 그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산서 온답니다.》

《먼길을 오셨구만요. 며칠 묵으시게 되나요?》

《아주 살러 왔어요.》

《왜요. 다시 무산으루 안가시구요?》

춘옥은 가볍게 놀라며 다시 물었는데 그것은 상당한 관심과 살틀히 정을 붙인 녀인의 복잡하고 의미있는 물음이였다.

《예.》

김정숙동지께서는 짤막히 대답하시고 고개를 드시였다.

《전 세상에 살붙이라군 오라버님 한분밖에 없어요. 적적할 땐 댁에 놀러 가군하겠어요. 좀 많이 도와주세요.》

아낙네는 당황함을 금치 못하고 김정숙동지를 새삼스레 굽어보았다.

《그러세요. 도와줄 일은 없겠지만 자주 놀러 오세요. 그런데 어느댁으로 가시는건가요?》

《저 강구장댁으루··· 그이가 저의 사촌오라버니예요.》

《그래요.》

순간 춘옥의 눈에는 이상한 의혹의 빛이 언뜻 비치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는 바구니를 옆구리에 다가끼고 저혼자 생각에 싸여 총총히 걸음을 내짚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어딘지 모르게 표정이며 거동이 달라져가는 춘옥을 눈여겨 살펴보시였다.

마을어구에서 한 장정이 달려오고있었다. 춘옥은 이마우에 손을 얹고 잠간 여겨보더니 강성태구장이 온다고 일러주었다. 회색한복바지저고리에 그보다 조금 진한 진회색조끼를 받쳐입은 사나이였다. 그는 40가까운 나이에 얼굴이 부석부석하고 관골이 큼직큼직하게 생긴 사람이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초면인 강성태를 마주 향해 몇걸음 총총히 다그쳐가시였다.

김정숙동지의 눈가에는 한없는 반가움과 감격이 스쳐가고있었다. 적구에서 손잡고 함께 싸워나갈 귀중한 동지를 만난 기쁨이 오죽하셨으랴. 말로 다할수 없는 혈연적인 감정, 이제는 그렇게밖에 달리는 표현할수 없는 혁명이 맺어준 두터운 우애의 깊고깊은 정에 가슴을 태우며 겉으로 드러낼수 없는 류다른 첫상봉의 복잡한 감정에 휘말려드시였다.

마을어구에서 방아를 찧던 한무리의 아낙네들이 울바자에 매달려 한길을 내다보고있었다.

《저게 뉘기오다?》

손에 뻘겋게 수수겨를 묻힌 아낙네가 목을 빼들고 춘옥이에게 물었다.

《구장누이래요. 우리 마을에 아주 살러 왔대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상긋이 웃음을 지으시며 아낙네들앞으로 다가가 머리숙여 인사를 하시였다.

《수고들 하시는군요.》

아낙네들은 그이의 밝은 웃음과 인정이 흐르는 목소리에 끌리여 저마다 한마디씩 하였다.

《구장누이, 처음 보겠소.》

《그 먼길을 걸어올래기 실루 힘들었겠소다.》

아낙네들은 유심히 호기심을 품고 지나가는 김정숙동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참, 곱게 생긴 색시요. 얼굴이랑 손이랑 몸매랑 보오. 구장은 나막신같이 생겼어두 누인 얼마나 알뜰하오?》

《그런데 왜 우리 마을에 살러 왔을가?》

《오라버니가 구장이니 덕보자고 왔겠지. 강성태구장이 세도가 좀 좋아서···》

아낙네들은 방아찧을 생각조차 잊고 한참동안 울바자에 몰켜서있었다.

 

이날밤 김정숙동지께서는 강성태와 함께 밤이 지새도록 사업을 의논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우선 장군님께서 국내의 넓은 지역에서 조국광복회조직을 급속히 확대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한 전반적조선혁명을 일대앙양에로 이끄시기 위한 원대한 구상을 품으시고 많은 지하정치공작원들을 국내 각지에 파견하시는 한편 몸소 백두밀영에 나오시여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고계신다는것을 알리시였다.

뜻밖의 소식에 접한 강성태는 너무도 감격하고 흥분한 나머지 도저히 몸둘바를 몰라하면서 눈을 슴벅슴벅하였다.

《장군님께서 조국으로 진군하시다니요. 캄캄한 조국산천에 장군님의 총소리가 메아리치게 되겠군요. 온 삼천리강토가 들썽하겠습니다. 얼마나 목마르게 장군님을 기다리는 조국입니까?》

《그래요. 정말 그렇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우리는 조선혁명을 책임진 공산주의자들로써 암운속에서 신음하는 부모형제들을 보고만 있을수 없다고 하시면서 대부대로써 국내에 들어가서 일제침략자들에게 심대한 군사정치적타격을 주고 인민들에게 혁명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심을 안겨주어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장군님의 조국진군을 눈앞에 두고 우리에게는 할일이 많습니다. 우리는 급히 신파지구에 조국광복회조직망을 꾸리고 인민들을 반일의 기치아래 튼튼히 묶어세워 장군님의 조국진군을 받들어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국내의 넓은 지역으로 지하혁명조직망을 확대하여나가야 합니다. 그러자면 도천리를 중심으로 한 장백일대를 국내공작을 위한 발판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도천리에서 지하조직정치사업을 활발하게 벌려 조직을 확대하고 혁명적군중지반을 형성한 다음에는 곧 신파지구 공작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니 도천리는 국내공작을 위한 기지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도천리에서 발판을 닦는 사업을 잘하면 잘할수록 국내공작은 그만큼 빠르게 진척될수 있습니다. 그러고보면 지회장동지의 임무가 여간만 중하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힘자라는껏 돕겠습니다. 단지 제가 우려하는것은 저의 힘과 능력이 모자라서···》

강성태는 그냥 흥분을 걷잡지 못하면서 약간 더듬거리는 석쉼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서로 도우면서 장군님의 구상을 받들어나가자요. 저는 이곳 조직원들과 인민들을 믿습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진정에 넘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이의 어조와 표정에서 어느정도 마음을 가라앉힌 강성태는 불안이 없지 않았으나 자신을 다잡고 마을의 실정부터 세세히 보고드리였다.

지난해 《도문회담》이후 압록강연안일대에서 적들의 탄압이 전에없이 심해져서 조직원들이 활동하지 못하고있으며 군중들을 조직적으로 단련하고 핵심을 키우기 위한 사업 같은것은 전혀 엄두도 내지 못하고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마을에는 조직들을 내올수 있는 아무런 기초도 마련되여있지 않으며 일반군중계몽을 위한 야학같은것도 못하고있는 형편이라고 하였다.

강성태는 특히 적들이 벌리고있는 《안민촌》운동에 대하여 자못 긴장하여 이야기하였다. 《안민촌》소동으로 하여 마을마다에 집단부락이 형성되고 적의 감시망이 조직되는 날에는 지하정치공작사업이 더욱 어렵게 되지 않을수 없다고 강성태는 심히 우려하고있었다.

《가와사끼라는놈이 당장 착수하겠다고 하는 치본공작이란 주로 집단부락건설과 〈안민촌〉형성을 비롯해서 보갑자위단의 확충과 련좌법의 엄수, 협화회조직을 확대하는 문제, 여기에 검문검색사업을 강화해서 쥐도새도 드나들지 못하게 하겠다는겁니다. 게다가 〈안민촌〉을 만들자면 주민들을 모두 〈황민화〉해야 한다고 하면서 무슨 생활개선운동이니, 위안시설이니, 선무공작을 들이대겠다고 합니다. 이렇게만 되면 사태는 험악해지지 않을수 없습니다.》

강성태는 될수록 벌어진 사태의 진상을 상세히 알려드리려고 여러번 이미 한 말을 다시 곱씹었다. 그는 혹시 자기가 문제의 본질을 석연하게 말하지 못하여 실지 도래한 사변의 엄중성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할가봐 걱정되였으며 그렇게 자칫 스치고 지나간 대목에서 후날 무슨 일이 터질것 같은 예감이 사로잡히기까지 하였다.

《이제는 충분히 리해됩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시며 낮은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강성태는 하던 말을 중도에서 멈추었다. 그러자 자기가 방금전까지 무슨 일을 하고있었으며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것인가 하는것까지도 잊어버렸다.

매우 흥분하고 당황했던 강성태는 김정숙동지께서 벌어진 사태를 어떻게 리해하시고 어떤 태도를 표시하시는가 오직 그것만을 주시하였으며 거기에 대해서만 신경을 썼다.

《그러니까 놈들이 그 어마어마한 계획을 실시하기 위한 첫공정으로 집단부락토성공사와 포대공사에 쓸 원목을 채벌하려구 하는군요. 보갑자위단의 확충이니, 련좌법의 엄수니, 위안시설이니하는것도 집단부락을 만들어놓고야 볼일이 아닙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강성태는 그이께서 사태의 본질을 정확히 리해하고계시며 그 매개 문제들에 의의를 부여하고있다는것을 알자 우선 마음이 놓이였다.

《그런데 적들이 〈안민촌〉지대로 선정한 마을은 얼마나 됩니까?》

《13도구, 14도구, 17도구를 비롯해서 수십개 마을입니다. 그런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놈들이 채벌장목재를 신파, 후창, 호인쪽에다두 넘겨준다고 합니다. 지금 그쪽 강안에서 토목화점들을 대대적으로 만들고있으니까요.》

김정숙동지께서는 한쪽무릎우에 두손을 포개여 얹으시고 이윽히 창문을 바라보시였다. 진중하고 무거운 빛이 얼굴에 비끼는가 하면 사색적이며 열정에 넘친 표정이 순간순간 드러나기도 하였다.

《그러니 소동은 도천리에서만이 아니겠군요?》

이윽고 그이께서 말씀하시였다.

《그렇지요. 수십개 마을에서··· 이제 온 장백현 하강구일대가 〈안민촌〉소동에 발칵 뒤집힐겁니다.》

《그중에서도 도천리가 적들의 중심이겠지요. 우리가 도천리를 혁명촌의 중심으로 만들려는것처럼 적들도 이곳을 〈안민촌〉의 〈모범〉으로 내세우려고 하겠지요?》

《하긴 그래서 가와사끼라는자가 직접 현지시찰을 내려왔구 경찰서지도관인 아라가와대위를 파견하였습니다.》

이야기는 잠간동안 동강이 났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아까와 같은 자세로 창문을 바라보시며 생각에 잠기시였다. 강성태는 이야기가 끊어질 때마다 늘 그러하듯이 초조한 빛을 얼굴에 드러내고 낮게 기침을 하면서 부산하고 걷잡기 어려운 몸가짐을 하였다.

《강성태동지 생각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무슨 일부터 해나가야 옳겠습니까?》

김정숙동지께서는 허심하게 많은것을 강성태에게 기대하시면서 문득 이렇게 물으시였다. 강성태는 사뭇 어안이 벙벙해졌다. 적의 공세에 대처하여 투쟁을 어떻게 벌려나갈것인가에 대해서는 그자신이 아직 깊은 생각을 가지지 못하였다. 적수공권이나 다름없는 지금의 형편에서는 맞서 싸울것이 아니라 될수록 충돌을 피하면서 조심스레 한사람한사람 장악하는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고있었다.

그래서 강성태는 자기 심정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헤쳐놓았다.

그의 이야기를 주의깊이 들으시던 김정숙동지께서는 문제를 그렇게 추구해서는 안될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적들의 반동공세가 그 어느때보다 강화되고있는 조건에서 혁명력량을 빨리 키우고 조직을 급속히 확대하기 위해서는 적들과의 투쟁속에서 군중을 단련하고 핵심을 육성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봅니다. 적의 눈을 피해 한사람한사람 은밀히 구하는 방법으로는 적의 공격을 막아내기 어려워요.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군중들속에서 지하정치공작을 능숙하게 벌려 한편으로는 적의 기도를 저지파탄시키며 다른편으로는 투쟁속에서 군중을 묶어세우는 적극적인 투쟁을 진행하는것이 옳다고 봅니다.》

강성태의 얼굴에는 불현듯 착잡하고 갈피를 잡을수 없는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

《물론 그 말씀은 옳습니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군중을 투쟁에 궐기시키겠는가 이것이 문젭니다.》

《그거야 그리 어려운 문제겠습니까? 농민들은 씨붙임을 앞두고 채벌장으로 갔습니다. 마을에서는 씨붙임을 밀어두고 토성공사를 벌리지 않을수 없을것입니다. 농민들을 조금만 각성시키면 채벌장과 공사판에서 일제히 떨어져 씨붙임을 하게 할수 있습니다. 놈들에게는 아주 불리한 계절이고 우리에게는 유리한 계절이라고 볼수가 있습니다. 저의 생각은 이런데··· 어떻습니까. 강성태동지 생각은요?》

강성태는 문득 고개를 들고 그이를 지켜보더니 얼굴에서 서서히 긴장성을 풀고 알릴락말락 고개를 끄덕였다.

《리해가 됩니다. 가능도 하구요. 권용산이를 산판에서 돌아오도록 수를 써야겠구만요.》

《왜요? 그러실 필요가 있겠나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너그럽게 미소를 지으시고 자신의 의향을 말씀하셨다.

《산판에 일부러 조직원을 파견하기라도 해야 할텐데 권용산동지를 돌아오게 하다니요. 채벌장에 모여온 수백명 사람들을 장악하여 투쟁에 궐기시키고 그들속에서 핵심을 키워 조직을 뭇는다면 장백현 하강구일대의 모든 마을들에 우리의 지하조직이 일시에 생겨나게 되지 않겠습니까?》

강성태는 사뭇 놀란 기색으로 눈뿌리에 힘을 모으고 그이를 바라보더니 뒤이어 눈을 슴벅슴벅하면서 벙긋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참 그럴듯한 말씀이군요. 한데 일은 어려울겁니다. 규모가 하도 방대하고 게다가 한번도 해보지 못한 일이라···》

《일이야 물론 어렵겠지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미소어린 눈길로 강성태를 바라보시며 말씀을 이으셨다.

《그렇기때문에 강성태동지가 한번 산판에 올라가 형편도 알아보고 권용산동지의 결심이랑 물어가지고 차후 투쟁방향을 세워보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럽시다. 그거야 필요한 일이지요. 래일아침에 꼭 채벌장에 다녀오리다.》

《그래주십시오. 갔다오신 다음에 산판일을 의논하고 마을에서 야학이랑 어떻게 열고 핵심을 장악하는 투쟁이랑 어떻게 벌리겠는가, 이런 문제들을 좀 연구해봅시다.

그리구 권용산동지더러 집일에 너무 걱정을 말라고 하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좀 도와드리겠으니.》

《예.》

강성태는 이번에도 흔연히 대답할수밖에 없었는데 그러자 불현듯 눈굽이 달아오르며 이상한 감격으로 가슴이 설레였다.

오랜 나날의 고민과 투쟁의 방황의식이 끝장나고 활기에 찬 새 기분, 확실한 전망과 명백하게 타산된 의도를 가지고 어려우나 어렵기때문에 그만큼 영예스럽기도 한 그러한 락관적인 투쟁의욕에 휩싸여버리는것이였다.

김정숙동지께서도 애초의 사뭇 긴장되였던 마음이 가라앉고 일심전력으로 파고들어 사령관동지의 구상을 활짝 꽃피우리라는 그 한가지 열망에 가슴이 뛰시였다.

언제나 무거운 임무, 힘겨웁고 시련에 찬 임무에만 익숙되여오신 그이께서는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시고 결심을 다지시자 벌써 전과 같이 마음이 안정되고 점점 뚜렷해지는 전망을 똑똑히 바라보게 되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