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2

 

제 1 장

2

 

《북부동변도 치안공작위원회》통제자인 가와사끼대좌는 밤중에 만주국 군정부 최고고문 사까이의 호출을 받았다. 그는 최근의 《치안공작》상황을 기록한 보고의 초안들을 가방속에 쑤셔놓고 총총히 사까이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널마루를 깔고 기다란 앞상을 가운데 들여놓은 넓은 방안에는 촉수낮은 탁상등만 켜져있었다. 방안은 어슴푸레하고 구석에는 차일을 쳐놓은듯 어둠이 드리워있었으며 사까이의 머리우에 걸린 커다란 벽시계의 유리는 얼음쪼각처럼 번들거리고있었다.

《가까이 오게, 가와사끼.》

사까이는 한손으로 턱을 고이고 거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말하였다. 가와사끼는 절도있게 걸어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밤중에 불러 안됐네, 자네 오늘신문을 보았는가?》

《각하, 방금 현지출장에서 돌아온 참입니다.》

《그렇지, 이것보게. 뉴른베르그발 통신이야.》

사까이는 책상우의 신문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하였다.

《독일 최대규모의 제9차 나치스당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이네. 히틀러총통과 게링그항공상, 겝벨스선전상을 비롯해서 전국의 10여만 나치스당 골간이 참석하는 대회인데 여기서 히틀러는 독일제국이 자국민에 대하여 항구적인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식민지를 필요로 한다는 선언을 발표하게 될것이라고 하네. 땅에 대한 독일국민의 요구를 공공연히 세상에 공포한다는거야 놀라운 일이 아닌가?》

가와사끼는 얼른 신문을 집어들고 재빨리 들여다보았다. 황실과 제국의 중요정책이나 군부의 최특급 중대기사를 싣군하던 1면상단에 화형을 두른 짤막한 보도가 실려있었다. 기사의 내용이나 그것을 편집한 편집국의 의도를 보나 그것은 단순히 나치스당대회의 보도에 그치지 않고 제국이 지향하는 웅심깊은 의도가 스며있다는것이 대번에 알렸다.

《참!》

가와사끼는 순간 가슴이 끓어올라 신문을 든 손을 가볍게 떨었다.

《어떤가?》

사까이는 두손을 마주잡고 조용히 여겨보면서 로령의 관직에 어울리는 체모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세계적인 사변이 유럽대륙에서 태동하고있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히틀러는··· 해낼것이라는 신뢰가 생깁니다.》

《해내겠지!》

사까이는 머리를 끄덕였다.

《사령관각하는 이 신문을 읽고 모두 자기 소감들을 피력하라고 하셨네. 주의를 돌릴만한 사변이야. 독일이 베르사이유강화조약에서 자국의 상비군을 10만으로 제한받은것을 30만으로 늘이게 해달라고 군축회의에 요구한것이 언젠가? 그것이 겨우 5년전이야. 그리구 군축회의 의장이 중재해서 독일의 재군비요구를 들어주도록 한것이 이태전일세, 이태!···》

사까이는 손가락을 꼿꼿이 펴들고 허공에 흔들어보이면서 차츰 흥분하였다.

《30만 군비확장이 세계적인정을 받게 된것이 이태란말이야, 한데 그때로부터 다시 두해가 지난 오늘에는 세상에 대고 식민지를 달라고 공공연한 요구를 들이대고있네. 이거야말로 기적같은 사변이 아닌가? 그리고 이 기적같은 사실에 비추어볼 때 대일본제국의 관동군무력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겠는가? 이를테면 남들은 30만병력을 한두해사이에 불궈가지고 유럽대륙을 삼킬 작정을 하는데 우리는 그 배나 되는 무력을 쥐고앉아 김일성공산군조차 제압하지 못해 애쓰고있으니 꼴이 되였는가말이야···》

사까이는 두팔을 벌려 책상을 짚고 천천히 일어나더니 장화신은 무거운 다리를 조금 높이 들어올리며 뚜벅뚜벅 방안을 거닐었다. 대륙의 진기한 야생화의 적갈색화분이 놓여있는 창턱앞까지 걸어간 그는 창유리에 이마를 부딪칠듯이 가까이하고 밖을 내다보았다.

뿌연 전등불빛에 드러난 정원의 나무가지들이 그물처럼 얼클어져 바람에 흔들리고있었다. 아직 잎을 돋치지 못한 나무가지들은 시커멓고 메말라보였으며 흔들리는 가지들사이에서는 가벼웁고도 애처로운 음향이 흘러내려 창밖의 어둠속을 배회하고있었다. 그러자 분명 그의 귀에는 처량한 한줄기 가는 호궁소리가 들려왔다.

낡은 중학생복을 걸치고 거리를 돌아치며 담벽밑에서나 장마당에서나 마차들과 기마경관들이 자갈을 뿌리며 내달리는 먼지낀 길가의 나무아래서나 정신없이 호궁을 켜대던 젊은이의 형상이 문득 떠올랐다.

눈먼 중학생, 뜻도 없이 슬픔만을 읊조리며 석류나무의 마르고 연약한 가지처럼 행인들을 향해 허공에 내밀려있던 새파란 젊은이의 동냥손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대륙의 슬픔··· 약한자의 비애··· 맥락이 이어지지 않은, 토막토막 끊어지는 상념이 심뇌한 그의 의식에 비쳐들어 이상한 운명의 련관과 사건의 귀결을 형성하였다. 처량한 호궁소리의 가닥가닥이 마치도 거룩한 자기 운명에 침침한 어둠을 불러오는것만 같아 그는 전신을 떨었다.

그는 자신의 심중을 애써 감추며 창에서 물러나 흰 전등갓의 희미한 불빛이 흐르는 큰 사무상의 옆구리에 재빨리 다가왔다.

가와사끼는 꼼짝 않고 그 자리에 굳어서서 아까부터 집요히 한곳을 응시하던 그 표정으로 다갈색의 양회의 벽을 그냥 지켜보고있었다.

사까이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까닭모를 운명의 희롱에 시달림을 받고있는것이다. 가와사끼대좌··· 대일본제국에 대한 충성에 불타는 결패있는 이 사람의 가슴에도 관동군수뇌부가 겪고있는 심뇌의 그늘이 비끼지 않을수 없다.

사실 지난겨울 조선인민혁명군주력부대가 압록강연안에서 맹활약을 벌리다가 갑자기 자취를 감춘 다음부터 관동군에서는 큰 소요가 일어나고있었다.

며칠전 제국의 수상관저에서 1936∼1937년 겨울의 만주사태를 분석하면서 히로다수상은 관동군의 실력에 대단한 우려를 표시하였다. 그러자 대륙전쟁확대를 앞두고 관동군수뇌부의 작전능력을 검열하는것이 필요하다는 견해들이 튀여나왔다. 그리하여 관동군사령부에서는 시급한 대책으로 감쪽같이 자취를 감춘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의 행방을 알아내는 문제와 함께 한해겨울 수많은 일본정예부대들과 경찰관, 위만군대대들이 녹아난 장백지대의 현지를 시찰하고 원인규명을 똑똑히 하도록 군정부 고문, 참모들을 현지에 뻔질나게 내띄웠다. 가와사끼도 얼마전 현지에 나갔다가 금방 돌아온것이였다. 관동군사령부가 가와사끼를 현지시찰에 망라시킨것은 《동변도》의 《치안공작》을 맡고있는 그에게도 금번실패의 책임이 있다고 보았던것이다. 그리하여 가와사끼는 이번 사태에 직면하여 남만 못지않게 위구와 불안을 느끼고있었다.

《가와사끼, 사령관각하는 자네의 사업분야에 특별한 주의를 돌리기 시작했네. 지난겨울 아군의 토벌대와 위만군정예대대들이 김일성유격대에 여지없이 녹아난것은 무엇때문인가? 물론 그들의 신출귀몰한 지략에 있은것은 사실이지만 인민들속에 뿌리박은 지하조직과 그들의 지지성원에도 있었다는걸 잊지 말아야 하네. 고기가 물을 떠나 살수 없는것과 같이 유격대는 인민을 떠나 살수 없다는것이 그들의 구호야. 그러고보면 자네의 사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명백해지지 않는가?》

사까이는 마치 시력이 약한 사람처럼 안면근육을 실룩거리며 가와사끼를 들여다보았다.

《각하 명심하겠습니다. 김일성유격대의 본거지에서 대륙의 치안공작을 부여받은 각하의 사업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하겠습니다.》

가와사끼는 흥분된 가슴을 움켜쥐고 깊이 머리를 숙여 자기의 숙연한 기분을 표시하였다.

《고맙네. 그러나 대좌, 우리는 긴급히 의논하지 않으면 안될 한가지 사태에 직면했네.》

사까이는 의자에 앉으려다 말고 다시 벌떡 일어났다. 군복앞자락이 팽팽히 헹겨지면서 풍채좋은 그의 가슴노리가 불뚝 돋아났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요시하라가 신갈파진에 도착하였다는 통보가 왔네. 관동군의 실력을 믿을수 없어 반도로 흘러드는 공산세력을 자기들 힘으로 견지하려고 요시하라가 국경연안에 내려온것이네. 사령관각하는 흥분하여 저녁도 드시지 않았네.》

《각하, 믿을수 없는 일입니다.》

가와사끼는 초연히 놀라움을 금치못하면서 입을 열었다.

《미나미총독은 올해 신년지사에서 반도만이 광휘있게 혜택을 입어 치안은 안정되고 산업은 향상하여 전도가 양양한바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까짓 신년지사가 다 무언가?》

사까이는 손을 홱 내젓고 책상앞을 돌아 널바닥을 뚜벅뚜벅 울리면서 창곁의 팔걸이의자에 가앉았다.

《지난해 도문회담이 있은후 미나미는 사실상 국경연안의 치안을 철석같이 믿었네. 그래서 조선 물산과 이 지대의 가공품을 널리 만주에 진출시킬 구상까지 펼쳤어. 상공성과 협의해서 할빈, 목단강, 봉천 등지에 제반 시설을 갖춘거야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어디 그뿐인가. 만주의 광활한 황무지를 개간하여 전시식량을 마련하고저 조선이민계획도 세워놓았지. 한데 일은 어떻게 되였는가? 〈도문회담>이 열린 그 시각부터 김일성유격대는 압록강연안에서 맹활약을 벌렸지. 사령관각하는 미나미와의 언약을 리행하기 위해서도 전력을 다해 유격대와의 혈전을 벌렸지만 결국은 패하고말았네. 그러니 미나미로서는 반도의 치안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으며 종당에 요시하라와 같은 큰인물을 국경연안에 파견하게 된것이네. 결국 이 사변으로 해서 관동군사령부는 제국의 면전에서 창피를 들쓰게 되고 실력자들의 존망문제가 위태하게 된거라고 말할수 있네. 여기선 나나 자네가 결코 례외로 되지 않아. 자넨 어떤 사변의 와중에 우리가 깊숙이 빠져들고있는지 리해할수 있겠는가?》

가와사끼는 꽉 부르쥔 주먹을 허벅다리에 붙이고 침통하게 방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지난겨울 《토벌지휘부》와 《치안공작위원회》가 뜬눈으로 밤을 새며 유격대의 진출을 막아보려고 필사의 노력을 경주하였는데 오늘에 와서 얻어진것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미나미총독의 사무실과 히로다수상의 관저에서 그리고 데라우찌륙군대신의 심복들사이에서 명예손상을 당한것밖에 아무것도 없다.

이제 요시하라도 신파일판에 둥지를 틀고앉아 총명한 두뇌를 짜내여 실력을 행사하게 될것이다.

가와사끼는 요시하라의 수완과 능력을 충분히 알고있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반공산주의문제 전문가인 요시하라와 실력쟁투를 하게 될것이다.

《가와사끼.》

사까이는 안락의자의 팔걸이에 손을 올려놓고 약간 웃몸을 젖힌채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이 밤으로 떠나 장백현에 나가게. 현공서와 경무통제위원회, 협화회의 사업을 검열하고 호인, 신갈파, 후창일대와 면한 장백지구의 치안공작을 빈틈없이 조직하게.》

《예!》

가와사끼는 절도있게 구두발을 모으고 정수리가 드러나게 머리를 숙였다. 사까이의 표정은 엄숙해졌다. 그는 불시에 못마땅한 기색을 짓고 손가락을 들어올리더니 가와사끼의 이마전에 흔들어대면서 힘을 주어 말하였다.

《자네가 내려가서 해야 할 사업은 우선 선무공작과 치본공작을 강력하게 내미는것이네. 산재된 부락들은 토성안에 가두어넣고 철저한 보갑제도를 실시하여 쥐새끼 하나 얼씬 못하게 하게. 주민들의 통행증, 주민증, 구매허가증은 함부로 내주지 말며 검문검색을 철저히 해야 하네. 그리고 중요한것은 〈안민촌〉을 건설하는것이야. 아무리 토성을 둘러치고 검문단속을 엄격히 한다 해도 주민들을 모두 량민으로 만들기전에는 완전무결의 치안유지는 불가능하다는걸 알아야 해, 그러니 자네가 내려가서 〈안민촌〉을 하나만이라도 똑똑히 꾸린다면 그건 큰사변이야. 그렇게 되면 그 모범으로 장백현을 안민현으로 꾸리고 나아가서 만주땅 전체를 모두 안전지대로 만들수 있네. 지금은 종이장에 써놓은 계획뿐이지 실지로 얻어진 열매는 없어. 모두 입씨름군들이고 협잡군들이란말야.》

가와사끼의 얼굴에는 천만유감의 뜻과 함께 비통한 표정이 떠올랐다. 건장한 온몸에 제국의 충신다운 순결한 피가 끓고있는 가와사끼로서는 실로 참아내기가 어려웠다.

《자네 이 밤으로 떠나겠다고만 하면 즉시 현공서와 헌병대에 통지를 하여 유감없이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이르겠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보통걸음으로 조용히 떠날 생각입니다. 소요를 일으키지 않고 들어가 현내의 사업을 검열하겠습니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군.》

사까이는 빙긋이 미소를 짓고 안락의자에서 일어났다. 밤이 깊었으나 그는 가와사끼를 데리고 료정으로 떠나갔다.

이튿날 가와사끼는 사관학교출신의 애숭이부관 하나를 데리고 장백현으로 떠나갔다. 그가 말을 달려 장백현경에 들어선 그 순간부터 현내의 모든 기관들에서는 소요가 일어났다.

가와사끼는 현경의 조그마한 산골 검색소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호감자를 구워먹고있는 위만경찰을 즉석에서 사살하고 피발선 눈으로 현공서에 들이닥친것이였다.

헌병대와 《토벌대》에서 오래 치여난 가와사끼는 조폭하고 메마른 성미에다 총명한 두뇌와 재빠른 판단력을 가지고있어 잘못 걸려든자는 큰 앙화를 입기가 일쑤였다. 더구나 지금은 관동군사령부의 대단한 실력자인 사까이의 총애하는 심복으로서 천하에 두려운것이 없었다.

며칠사이에 현공서와 경무통제위원회, 협화회의 수뇌부에서 몇놈이 목이 날아났다. 경찰서장들과 지도관들은 가와사끼의 시찰을 기다리며 간이 콩알만해있었다.

가와사끼는 눈석이가 한창인 장백지대의 땅을 실컷 밟아 돌아치다가 4월초순에 도천리에 나타났다.

지난 2월에 위만군 한개 대대가 로상에서 전멸을 당한 도천리아근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가와사끼는 자못 신경이 예리해졌다.

사까이는 도천리일대의 깊은 수림속에 유격대의 활동지점, 이를테면 밀영같은것이 있을수 있다고 예언하였으며 이 지대를 봉쇄하고 안민지대를 꾸리는것은 가급적으로 속한 시일안에 해야 할 일이라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요시하라의 본거지인 신파일대와 가까이 면하고있는 도천리, 여기서 무슨 사변이 발생하여 조선대안에까지 일이 파급되는 경우에는 더욱 문제가 용이치 않으리라는것을 가와사끼는 잘 알고있었다.

깊은 수림에 둘러싸인 구릉언덕을 가와사끼는 낮은 한숨속에 묵묵히 넘어가고있었다.

13도구와 14도구 경찰서의 일본지도관들과 경찰서장들, 현에서 내려온 고위장교들이 그를 옹위하며 따라서고있었다. 일행중 한사람만이 한복차림을 하고있었는데 그는 도천리구장이며 마을의 지하조직책임자인 강성태였다. 그는 13도구경찰서에 올라가 가와사끼를 안내하여오는 길이였다.

가와사끼는 크지 않은 밤빛 말을 타고 동구밖의 구릉언덕우에 올라섰다. 태양은 동남방향에서 사선으로 비쳐오고있었다. 가와사끼는 채찍을 감아쥔 손을 허리에 얹고 약간 찌프린 눈으로 등성이의 넓은 진회색빛 땅우에 산재되여있는 농가들을 바라보았다.

낮은 울타리를 둘러치고 띠염띠염 널려있는 집들은 얼핏 보아 마초무지들 같았다. 지붕이며 벽이며 울짱이며 혹은 집앞에 가려놓은 나무가리들까지가 모두 새까맣게 고삭은 빛이였다.

《여기가 도천리인가?》

가와사끼의 말소리가 울리자 수하장교들과 경찰관들이 일제히 말잔등에서 뛰여내렸다.

《그렇습니다. 도천리 7호촌입니다.》

13도구경찰서 지도관인 아라가와대위가 대답하였다.

《그런데 왜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가?》

《부락민들은 토성공사에 쓸 돌을 채취하고있습니다. 매일 가옥당 3㎥채취과제를 주고 촌민들을 다그어대고있습니다.》

가와사끼는 홱 고개를 꺾어 아라가와를 쏘아보았다.

《여기선 어째서 집단부락건설이 늦어졌는가? 치안공작 대강에는 농촌자위력의 강화와 함께 집단부락건설이 치본공작의 중요항목으로 된다고 밝혀있지 않는가?》

아라가와는 상반신을 뒤로 꼿꼿이 젖히고 턱을 우로 쳐들었다.

《저희들은 1급경찰서가 자리잡고있는 13도구를 우선 집단부락으로 꾸렸습니다. 도천리사람들은 13도구 토성공사에 수천자루의 품을 바쳤습니다. 14도구와 15도구가 련속 유격대의 기습을 받고난 뒤에 13도구를 친다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아라가와, 유격대는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을 친다는 말을 못들었는가?》

가와사끼는 랭랭한 얼굴로 차겁게 한마디 던지고나서 말배때기를 가볍게 걷어찼다. 말은 흠칠 놀라 앞으로 달려갔다. 장교들은 닭무리처럼 확 풍겨나 저마끔 말잔등에 뛰여올랐다.

눈석임물때문에 길은 질쩍거렸다. 말들은 진창에 이겨진 발통을 구르며 달려갔다.

가와사끼는 안장우에서 몸을 가볍게 젖히면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보고있었다.

동북과 서쪽방향에 큰산들의 지맥이 뻗어있고 남쪽은 다소 기복이 완만한 구릉이 펼쳐져있었다. 밭들이 있는 골짜기와 산자락들마다에는 농가들이 있었고 작은 개울들이 밭들을 잘게 토막치면서 남서방향으로 뻗어갔다.

가와사끼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주위를 일별하고나서 말고삐를 나꾸어챘다. 순간 뒤따르던 말들은 서로 등자를 부딪치면서 빽빽이 몰켜섰다.

《도천리는 가옥이 몇이나 되는가?》

아라가와가 대답하려고 한발 앞으로 내짚었으나 가와사끼의 시선은 강성태에게 가있었다.

강성태는 머리를 들지 않고 약간 쪼프린 눈으로 부락아근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 도천리는 200여호가 잘됩니다. 삼계골, 안삼계골, 유가골, 최영감골 이렇게 여러 부락이 합쳐서 도천리를 이룹니다.》

《도천리라는 이름은 뭔가?》

《여기서 한 시오리 내려가면 큰 개울이 있는데 개울물복판에 복숭아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도천리란 이름이 생겼습니다.》

가와사끼는 말채찍으로 손바닥을 두드리며 무엇인가 생각하였다.

《구장, 여기 주민구성은 어떤가?》

《대개 조선서 건너온 이주민입니다. 함경도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경상도와 강원도, 전라도에서 온 사람들도 간혹 있습니다.》

《그래 여기 부락은 모다 조선개척민부락인가?》

《그렇습니다. 1910년대에 그러니까 금세기초에 개간사업이 본격적으로 벌어졌습니다. 본래는 자그마한 오두막들이 있고 손바닥같은 화전뙈기들이 널려있었는데 압록강을 건너온 이주민들이 잡관목을 쳐내고 돌을 뽑아내여 한평 두평 전장을 늘군것이 결국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가와사끼는 흥미있게 강성태의 말을 듣고있었다.

《여기 주민들의 사상동태는 어떤가? 유격대와 선을 맺고있는 불온한 기미는 보이지 않는가?》

강성태는 두손을 마주잡고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웃지는 않았다.

《촌민들은 순박한 사람들입니다. 살림이 궁색하고 살아가는게 귀찮아서 짜증을 내는게 탈이라면 탈이지요.》

《그래도 알겠는가? 구장은 뭣으로 담보하는가?》

강성태는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가와사끼를 바라보았다. 목이 굵고 꼿꼿하며 턱에 군살이 붙은 철색의 단단한 얼굴이 그를 향해 숙여져있었다.

강성태는 그 얼굴이 아니라 어깨우의 저쪽을 바라보며 침착하게 말하였다.

《각하, 우리 촌민들은 모두 고지식하고 순하게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실례입니다만 우스운 말을 한마디 하겠습니다. 한때 여기 개척민촌에는 이리떼가 내려와서 아이들을 해치고 집짐승들을 물어가는 소동이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밤이면 사처에 불무지들을 피워놓고 양푼을 두드려대는 소리가 소란하였습니다. 가옥이 늘어나고 집짐승들이 번성하자 굶주린 호랑이까지 내려와서 부락을 해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근심과 걱정에 싸여있었지요. 이런 때 마을에 소금장사들이 퍼뜨린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백두산호랑이가 소금을 먹지 못해 마을에 내려오는것이니 소금주머니들을 난벌에 매달아놓으면 화를 면할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금을 사서 마을어귀에 줄줄이 매달아놓았지요.

그러자 밤마다 그곳에서는 짐승들이 물어뜯고 발버둥치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아침에 나가보면 소금주머니아래에는 짐승의 피와 살점들이 나딩굴군하였습니다. 소금을 먹으러 모여온 장백땅의 사슴, 노루들이 호랑이의 밥이 되군하였지요.

부락이 입는 화는 다소 덜어졌으나 짐승들의 피투성이 싸움때문에 사람들은 견뎌낼수가 없었습니다. 참말 큰 란리를 만난듯이 마을은 뒤숭숭해졌고 이사짐을 꾸리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갔습니다. 이런 때 풍산에서 박칠량이라는 포수가 왔습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있는 사냥총은 담배불로 화약에 불을 달아 총알을 내보내는 구식렵총이였는데 오늘날 기병총보담두 성능이 썩 좋았지요. 박칠량이가 동네 장정들을 이끌고 나가 총소리를 몇방 울리자 짐승들이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마을의 화가 물러가기 시작한것입니다. 이때부터 부락들에는 안정이 깃들었지요. 사람들은 박칠량포수의 은공이 하도 고마와 그를 공으로 먹여살리다싶이 하고 나중에는 그의 선정비까지 세워주었습니다. 지금은 그게 어느 수풀속에 묻혀있는지 모르지만 비문에 새겨진 글은 부락의 전설로 남아있습니다. 이렇게 순하고 의리있는 사람들의 후손들이 도천리에 살고있습니다.》

가와사끼는 유쾌하게 소리를 내여 웃었다.

《그러니 사람들을 믿어도 좋다는 말인가? 구장, 당신은 수완이 있는 사람이다. 당신이 유격대의 지하공작원이 아니라면 우리를 위해 큰일을 해줄수 있는 인물이다. 나는 당신하고 친구로 사귀고싶다. 어떤가?》

《각하!》

강성태는 넌지시 웃으며 가와사끼를 마주보았다. 가와사끼는 유쾌하고 들뜬 기분을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변의 산발들을 다시금 둘러보았다.

《아라가와, 지난 2월에 정안군 대대가 녹아난 장소가 어딘가?》

《방금 지나온 저쪽 둔덕입니다. 밤중에 기지로 돌아가던 대대가 유격대의 갑작스런 기습을 받고 장병 수십명이 몰살당했습니다.》

가와사끼는 오한을 느낀듯 몸을 떨었다. 말은 불안스레 코를 불고 연신 발통을 구르면서 안절부절못했다.

《도천리사람들이 아무리 순해빠졌다 해두 안심은 못할곳이다. 도천리는 유격대가 공작하기 아주 유리한 지형이야. 저것보라, 집들은 사처에 널려있고 수림은 우거져서 산에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따라잡기 어려운 형편이다. 이 산발을 타고 신파, 후창, 호인 계선으로 쉽사리 진출할수 있다. 위태한 지대야, 아라가와.》

《그렇습니다, 각하!》

가와사끼의 눈은 금시에 차디찬 빛을 담고 번쩍거렸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토성공사를 벌리지 않았으니 엄중하지 않은가? 내보기엔 13도구보다도 여기가 더 위험해, 너의 관할구역에서는···》

가와사끼는 말채찍으로 아라가와의 어깨를 건드리며 또박또박 말하였다.

《장백현일대에서 가장 중시해야 할곳이 도천리지구다. 알겠는가? 앞으로 도천리지구에는 지구토벌대와 선무공작반을 주둔시킬 결심이다. 도천리를 유격대의 영향에서 떼내여 〈안민촌〉으로 꾸리라. 현공서와 경무통제위원회, 협화회에서도 다같이 명심들 하라. 장백현에서는 도천리지구를 잘 꾸려서 〈안민촌〉의 모범으로 내세우기만 하면 장백현을 안민지대로 꾸릴수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 구체적인 지시를 들으라!》

일행은 엄숙하게 기착하고 가와사끼의 명령을 받았다.

강성태는 깊은 불안과 우려를 가지고 가와사끼의 칼날같은 목소리를 듣고있었다. 그는 긴장한 속에서도 찬바람이 몰려오기 시작하는 서북쪽 산비탈을 언뜩 바라보았다. 거기에 유격대원의 그림자라도 얼른거리는것만 같은, 난생처음 느끼는 위구심이 온몸을 휩쌌다. 강성태는 바로 어제저녁에 상급 혁명조직으로부터 도천리에 장군님께서 직접 파견하시는 유격대지하공작원이 나가므로 잘 맞이하라는 특별지시를 받은것이다. 불안스러운 시선을 감추려고 강성태는 될수록 온화한 몸자세로 서서 머리를 숙이였는데 가슴속에서는 갈수록 불안감이 솟아올라 시각시각이 천추로 길어졌고 그와 함께 가와사끼의 출현으로 이제 도착할 유격대지하공작원의 신상에 실로 뜻밖의 시련이 들이닥칠것만 같아 마음은 그지없이 무거웠다.

 

이날 가와사끼는 도천리를 중심으로 하여 13도구, 14도구, 17도구일대에 속히 집단부락토성을 쌓고 포대를 세우기 위해 농민들을 원목채벌에 동원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채벌장을 백지주의 림지로 정하고(도천리 백지주는 상당한 규모의 산판림지를 소유하고있었다.) 관동군사령부의 특별지시로 자금을 넣어주며 여기에 동원된 농군들에게는 채벌이 끝나는 차례로 사례금을 지불하겠다고 하였다.

백지주는 산판경영에서 리득이 생길뿐만아니라 도천리에 《안민촌》을 꾸려 유격대의 기습을 막아준다는바람에 기가 동해 채벌장인부들을 모집하였다.

마을의 끌끌한 청장년들은 거의다 동원대상에 올랐다.

마을에 두사람밖에 없는 지하조직원중의 한사람인 권용산도 채벌장으로 떠나게 되였다. 이리하여 강성태와 권용산은 장밤 이 문제를 놓고 어떻게 할것인가를 의논하였다. 유격대에서 지하공작원이 내려온다는 통보를 받은 이상 무슨 구실을 대고라도 마을에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권용산은 강성태에게 자기의 이런 생각을 비치였다.

그러나 강성태의 생각은 달랐다. 가와사끼가 내려와서 도천리를 《안민촌 모범부락》으로 꾸릴 작정을 하고 《토벌대》며 선무공작반까지 주둔시키겠다고 날치는 형편에서 유격대공작원의 활동이 가능하겠는가. 혹시 요방자나 탕성리같은곳에 공작기지를 정하는것이 여러모로 유리하지 않겠는가 하는것이였다.

의논끝에 권용산은 채벌장으로 떠나게 되였다. 권용산이같은 끌끌한 장정을 동원에서 면제시킨다는것이 사실은 거의나 불가능한 일이였고 게다가 자칫 잘못하여 놈들에게 무슨 기미라도 엿보이게 되면 차후의 활동에서 지장이 있을것으로 합의를 본것이였다.

권용산이 떠나는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두사람 다 같은 견해를 가지였으나 그가 떠남으로 해서 가정에서 겪게 될 고충때문에 그들은 다같이 마음이 무거웠다.

권용산은 이태째 병으로 앓고있는 장인을 모시고있었다. 게다가 그의 안해 춘옥은 나이가 어린데다 너무 어질고 량순하여 혼자힘으로 험한 농사일을 감당해낼것 같지도 못했다.

강성태가 그의 가정일을 간혹 도울수는 있겠지만 놈들의 주위를 덜 끌기 위하여 지금까지 마을사람들앞에서 취하여온 태도로 보나 지금 부닥치고있는 정황으로 보나 춘옥이네 일을 자주 돌봐주기는 힘들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오랜 시간을 서로 속을 썩이면서 곡달을 하다가 아무 마련도 보지 못한채 밤늦게 헤여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