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2

 

제 6 장

2

 

리병찬은 과장실에서 나왔다. 복도 한끝까지 정신없이 걸음을 옮긴 그는 자기 방으로 돌아오자 책상에 마주앉았다. 팽팽한 가슴에 자연스럽게 드리웠던 줄무늬넥타이를 풀어 책상우에 아무렇게나 던지였다. 숱이 많고 기름기가 도는 머리카락은 헝클어져있었고 얼굴색은 백지장처럼 되였다.

《과장의 말이 옳아, 나의 잘못이 한두가지가 아니지.》

그는 같은 말을 곱씹었다.

한시간전에 과장이 불러서 갔었다. 방에 들어서는참 과장은 《당신은 요새 왜 그 모양이요?》하고 야유하며 껄껄 웃었다. 비대형이 모두 그런것처럼 살가죽이 터질것처럼 몸이 난 과장은 노여움을 보이는 경우에조차 벙글벙글 웃는것이다. 하긴 말라꽁이가 새파랗게 질려서 양양거리는것보다는 나을수 있다. 이런 때는 덮어놓고 침묵하는것이 좋은것이다. 그래 그는 머리를 숙이고 허옇게 본색이 드러난 구두코를 바라보면서 무저항주의로 나가고있었다.

《당신이 하는 일이 뭐야. 〈보도지침〉을 틀어쥐고 이번 북에서 보내오는 구호물자에 대한 의의를 령으로 만들거나 반타격을 하도록 하라고 했는데. 우리 안기부는 자선단체가 아닌만큼 언제까지나 무위도식하는자들을 두고 볼수는 없단말이요. 난 당신을 그렇게 보지 않았더랬소. 대학을 갓 나온 애숭이 리병찬을 내가 맡아나설 때 그래도 일정한 기대가 있었던것만은 사실이요. 그러나 4∼5년이 되도록 뭘 한것이 있는가. 인내성에도 정도가 있고 인도적관점에도 한계가 있는거요. 쥐를 잡지 않는 고양이를 뭣에 쓰는가? 엉?》

리병찬은 그대로 침묵을 지키였다.

《어떻게 하겠는가? 대답해보오. 어째서 우리 〈남한〉신문들에 이남민중이 북의 자선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한다는투의 기사들이 실리는가? 왜 한둘을 징계해서 열백을 깨우쳐 바로잡지 못하는가. 당신이 말한대로 〈동아〉의 한영국이같은놈을 왜 코를 꿰서 끌지 못하는가말이요. 도대체 그자는 건방지거든. 우리 부장님께서 연회를 차리고 치하를 하시는데 그놈은 퇴장했소. 그런것을 용납하니까 그자가 우리의 덜미를 누른단말이요···》

리병찬은 책상을 짚고 훌쩍 일어났다. 당장 달려가 한영국을 끌어다 요정을 내고싶었다. 그러나 정보사업이란 그렇게 닥치는대로 기분내키는대로 할수는 없는것이다.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하나하나 톺아나가며 침식해야 하는것이다.

그는 철궤문을 열고 한영국에 대한 자료철을 꺼내였다. 사진이 있고 경력과 신원조회자료가 끼워있었다. 그중에는 조사과에서 넘겨보낸 자료가 많았다. 주민조사를 할 때 대방확인을 한 자료도 있고 정보원들에 의해 비밀리에 조사한 자료도 있었다. 그는 한영국이를 잡아없애는데 자료가 없어 곤난하다고는 보지 않았다.

우선 첫째, 그를 《북한》의 밀정으로 만들수 있었다. 형이 북으로 넘어갔다. 더구나 그자체를 감추고있을 때는 문제가 다르며 현행에서 북과의 련계가 있는 경우는 확연히 문제삼을수 있다.

그렇게 놓고볼 때 며칠전에 그가 대성동에서 북의 운전수와 그 무엇인가를 주고받은것은 유력한 증거이다. 그리고 또 이번 수재를 천재가 아니라 인재라고 한것도 크게 걸수 있다. 게다가 며칠전에 인천항에 들어온 《북한》상선 《순천》호 선원실에서 찍어온 사진은 크게 걸수 있다. 무슨 목적으로 김일성주석과 김정일지도자의 초상을 찍었으며 그 필림을 돌리여 수십매나 복사하도록 하였는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흥분이 차차 가라앉은 그는 큰고기를 낚으려는 야심가처럼 낚시의 호수와 미끼를 잘 선택하고 아울러 그것을 던질 터를 잘 선정하기로 하였다. 담배를 련달아 피워물면서 그는 애릿한 명상에 잠기였다.

한동안 구상을 정교하게 짜나가던 그는 훌쩍 고개를 들어 달력을 쳐다보았다. 벌써 10월이다. 다시 책상에 시선을 던졌을 때 그는 인옥이한테서 빌어온 소설책에 주의가 갔다. 범한출판사에서 밤색호화장정을 한 두툼한 《현대의 세계문학》인데 그중의 장편소설 《화려한 출발》이다.

철학이나 정탐자료, 또는 기이한 비사가 이나면 거들떠보지도 않던 그였지만 인옥이가 어떤 글에 흥미를 두고있는가 하는 호기심에 의해 이틀동안에 거뜬히 읽어치웠던것이다. 색정이 기본이였다. 읽는 과정에는 흥미에 끌렸지만 다 읽고나서 주인공과 인옥이사이에 어떤 류사점을 발견하게 되였을 때 보지 말았어야 할것을 띄여보기나 한것처럼 속이 메슥메슥하였다. 그러나 지금 청년들치고 그런 정도의 정서적랑만이 없이야 무슨 현대인이라고 할것인가.

리병찬은 전화통을 당겨 집에다 돌렸다. 인옥이와 련계는 집으로 하게 되여있었다. 잠내나는 고녀생 동생의 목소리가 울리였다.

《대낮에 자는거지? 공부는 안하고.》

그는 동생을 늘 이렇게 제압하는것이다.

《어머!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데 오빠, 내 짐작이 맞았어요. 딱 요렇게 련결될걸.》

반공격이다.

《뭔데?》

《뭐긴 뭐겠어요. 쉐라톤에서 걸어왔는데요, 급히 만나자는거죠. 집으로 오라는거예요. 유감인데요. 공원이나 강가보다는 정서가 덜할테니까.》

《요건 그저.》

그가 《쉐라톤》에 전화를 걸었더니 인옥은 어제부터 집에서 나오지 못한다고 하였다. 《해주》가(장인감 박만호에 대해서 인옥이와 이렇게 통용하고있었다.) 위독해졌는가, 아니면 인옥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겼단말인가? 하긴 수재후에 감기와 소화기계통질환이 만연되고있는데 그축에 끼였을수도 있는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도 과로에 꼬꾸라질수도 있는것이다.

그는 급히 차를 몰아 망원동쪽으로 달려갔다. 한곳에 이르자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한눈에 그들은 아직 수재로 인한 재난의 티를 채 벗지 못한 이곳 주민이라는것이 알리였다.

그는 차를 세우고 열어놓은 차창을 통해 물었다.

《왜들 이러고있소?》

《북에서 보내온 쌀을 준다기에 모이긴 했는데···》

시들한 불만조의 대꾸였다.

《그래 왜 주지 않는가요?》

리병찬은 무도수금테안경을 밀어올리며 다시 물었다.

《몇사람 주다가 경찰에서 부른다고 갔다는데 암만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군요.》

파마를 한 중년녀인이 당신이 좀 도와주구려 하는 얼굴로 대답한다. 그러는 사이에도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자루나 비닐통을 든 남녀가 꾸역꾸역 모여들고있다.

리병찬은 100명이상 되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룬것을 빙 둘러보면서 차를 돌려 이곳 동사무소를 찾아갔다. 주겠으면 소문없이 슬슬 주든지 아니면 밤에 보이지 않게 처리할것이지 이건 보란듯이 모이게 하고있다.

동사무소에 들어서니 중년사나이가 정복을 입은 순경한테 뿌옇게 닦이우고있다.

《동장이라는 사람이 그런 눈치도 없소?》

순경이 책상을 치며 고함을 지른다.

《북에서는 쌀이나 천, 세멘트를 보내면서 그보다 몇배 더 큰 정치선전을 노리는건데 거기에 장단을 맞추어? 그 후과를 어떻게 책임지겠는가? 외국기자들이 개싸다니듯 하는 서울 한복판에서 쭉 줄을 서게 해가지구.》

《그러면 밤 10시쯤에 하겠습니다. 로골적으로 말해서 비밀리에는 못하겠습니다. 원래 체적이 큰데다가 우리 동주민은 전부 해당이 아닙니까. 우선 곤난한것은 쌀보관입니다. 벌써 하루사이에 세포대나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도 〈한국〉국민인것만큼 나라체면을 보는것은 응당하지만···》

《여보! 여보, 그런 선전은 나한테 하지 않아도 되오. 〈아사히〉인가 〈요미우리〉인가 사진을 찍어갔다는데 당신이 찾아가서 쓱싹해버리오. 몰래 필림을 포광시키든지 한잔 먹여서 무효로 하든지 맘대로 하오.》

리병찬은 그 이상 간참할 필요가 없어서 인차 돌아나오고말았다. 그가 마당에 나서자 이상한 광경이 벌어졌다. 리병찬은 걸음을 멈추었다.

몸통과 팔소매의 색갈이 각각 다른 잠바를 입은 중년사나이가 줄을 지어 서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톺아나가면서 손바닥에 놓인 그 무엇인가를 조금씩 나누어주고있다. 그가 내미는것을 받아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야, 야 하는 탄성을 지르고있다. 그럴수록 잠바입은 사나이는 신바람이 나서 무엇이라고 알아들을수 없는 소리로 웨쳐대고있다. 사나이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맨앞에서부터 차례로 나가면서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있다. 그에 따라 사람들은 차츰 흥분되기 시작하더니 제각기 무어라고 지껄여대면서 떠들썩해졌다.

그 사나이는 이미 이 동사무소 앞마당에서 단단히 혼쭐이 났던 속성자전거수리방 심창억이다. 물란리가 난 다음다음날 바로 이 마당에서 《북한》에서 쌀을 보내주겠다고 했다는데 그걸 빨리 받아와야 할것이 아닌가고 객적은 소리를 했다가 순경에게 졸경을 치른바 있었다. 그는 직업상관계도 있었지만 자기 소개를 해야 할 기회가 있을적마다 나는 상이군인이다 하고 내붙였기때문에 여기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그를 알고있었고 설사 다리병신이라 하더라도 그를 무턱대고 깔보거나 업신여기지 않았다. 그런데다가 그자신의 성격이 락천적이고 소문난 익살군이였다.

《자! 손들을 내미시오.》

그는 흑인처럼 꺼멓게 탄 얼굴을 들고 구호미 배급을 타러온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구청에서는 상부의 지시가 있어야 내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제가 대신해서 이제부터 구호미를 나누어주겠습니다. 몇알씩 나누어줄테니까 빛갈이나 보시오. 밥해먹을건 차츰 받을셈치고 우선 선이나 보시오. 자! 이북에서 보내온 쌀입니다.》

그는 쌀창고 문턱앞 땅바닥에 흩어진 쌀을 움켜서 염낭에 넣더니 사람들앞으로 다가갔다.

《자, 받으시오!》

그는 세손가락으로 쌀알들을 얼마간씩 집어서 줄선 사람들의 손바닥우에 놔주는것이다. 흡사 닭의 주둥이같이 만들어진 손가락이 저편 손바닥을 쿡 찌를 때면 거기에는 쌀이 소복이 놓이군 하였다. 그러면 쌀을 받은 사람들은 각기 제나름으로 그것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였다. 그런 후에는 한마디씩 하였다.

《야! 정말 백미 백미 하더니 참 옥백미구먼.》

《맛은 어쩌구? 막 달작지근한데.》

《주리긴 주린 모양이다. 쌀이 달다고 하는걸 보니.》

《아니, 이런걸 둬두구 왜 이렇게 질질 끄는가. 제꺽제꺽 퍼주지 못하고.》

《누가 아니래, 당국에서 무슨 고려할 점이 있어서 한밤중에 어쩐다는거야.》

《도적질한것도 아닌데 왜 그런대?》

《함부로 딱딱 씹지 말어. 독이 들어있을거라고 신문에 났던데.》

아닌게 아니라 아낙네들은 쌀알을 입에 넣고 바작바작 씹고있다. 이렇게 되다보니 불을 지핀 가마처럼 처음에는 미적지근하더니 차츰 달아올라 심창억이 렬을 지은 중간쯤에 이르자 와글와글 끓어번지기 시작하였다.

소란해진 분위기속에서도 심창억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제 할일을 하였다. 그는 여기 모인 사람전원에게 먼저 북의 쌀맛을 보이려고 마음먹었다. 염낭에 넣은 쌀이 떨어지면 다시 창고문턱에 가서 흩어진 쌀알을 쓸어모아왔다.

《자! 누구에게나 다 차례지게 될테니까. 안심하고 기다리시오. 많아서 성의겠소? 그래 잘들 보시오. 공산당쌀이 새빨간가 흰가. 흐흐흐.》

제멋에 겨워서 그는 어깨를 들썩들썩하였다.

그때 군중속에서 누가 《좋다, 좋아!》 하고 흥을 돋구었다. 그렇게 되자 창억이는 등을 딱 꼬부리고 곱새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어차! 어차》

그는 팔을 휘두르고 엉뎅이를 이리비쭉 저리비쭉 하였다. 군중들이 박수장단을 쳤다. 또 누군가가 팔을 벌리고 뛰여나왔다. 한쌍이 된 젊은이는 쭐럭쭐럭 목을 흔들며 우습강스럽게 춤을 추었다. 웃음과 춤이 한데 어울려 굉장한 판이 벌어졌다.

군중들이 점점 더 끓어번지기 시작하였다.

한쪽옆에서 다리절름뱅이가 하는짓을 유심히 지켜보고있던 리병찬은 까닭모를 울기가 뻗쳐올라 앞으로 나섰다. 넥타이는 매지 않았지만 신사풍으로 희고 빳빳한 목깃이 일어선 와이샤쯔차림을 한 그는 얼굴을 잔뜩 찌프렸다. 소매를 걷어올린 팔의 힘살이 푸들푸들 떨리였다. 하지만 그는 참을성있게 다리절름뱅이 있는데까지 따라가서 쌀알을 집어주고있는 팔목을 붙잡았다.

《누구요?》

《손님, 나 좀 봅시다.》

리병찬은 팔을 뿌리치며 허둥거리는 심창억을 데리고 골목길로 들어갔다.

차츰 리병찬의 거동에서 심상치 않은 기미를 눈치챈 심창억이 《나리, 왜 이러십니까?》 하고 팔을 빼려고 버드럭거렸다.

《너같은건 죽어야 돼!》

리병찬은 골목길에 들어서자 사려물었던 이새로 이렇게 한마디 흘리고나서 격술을 배울 때 기억해두었던 급소를 쥐여질렀다.

심창억은 윽 하고 소리를 지르며 활개를 펴고 뒤로 벌렁 자빠졌다.

그때 《형님!》하는 고함소리가 들리였다. 뒤를 돌아다보니 서른 좀 남짓해보이는 장발의 사나이와 또 그뒤로 여럿의 젊은이들이 달려오고있다. 리병찬은 재빨리 겨드랑밑에 손을 넣어보았으나 권총이 잡히지 않았다. 두고온것이다. 맞다들면 재미없을것 같아 얼른 몸을 숨기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달려온 사나이가 다리절름뱅이를 안아일으키고있다. 그리고는 형의 복수를 해야겠다고 윽벼르며 그가 숨은 변소앞을 두리번거리다가 성급히 지나가버렸다.

리병찬은 급히 골목으로 빠져나갔다. 어쩐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는 왜 그 다리절름뱅이 병신에게 그토록 참을수 없는 분노를 느꼈던지 까닭을 스스로도 알수 없었다. 구호미를 몇알씩 나누어주며 당국의 처사를 비난하는 그 빈정거림때문이였던지 아니면 이북에서 보내온 쌀을 두고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그네들의 소행이 괘씸해서였던지··· 직무상 의무로 보나 감정적으로 보아 결코 용납할수 없는 광경이여서 응당한 벌을 주긴 했지만 그것으로 하여 울적하던 심사가 후련해지는것이 아니라 도리여 더욱 꼬여들고 침울해지는것이였다. 그러고보면 그의 울적한 심사는 비단 그 다리절름뱅이의 소행때문만은 아닌듯 했다. 그러자 살이 피둥피둥 오른 과장의 능글맞은 웃음이며 안기부가 무위도식자들을 먹여살리는 자선단체가 아니라며 은근히 독침을 놓던 말마디들이 귀전을 울리며 마음을 무겁게 하는것이였다.

그는 이미 낯이 익은 골목길을 터벅터벅 걸어나갔다. 한주일전에 비해 많이 정리되였으나 아직 가구와 부엌세간은 그대로 마당이나 가건물에 쌓여있었다. 어느 집에서나 뚝딱뚝딱 망치질소리가 났다. 저녁어스름이 내리는 저쪽 언덕에 인옥의 집이 바라보였다.

유리가 없어 화보장을 붙인 창문에는 푸른빛이 잔잔히 감돌고 비닐관으로 굴뚝을 대신한 연통에서는 비자루같은 허연 연기가 음산한 저녁하늘을 스적스적 쓸고있다.

부엌문이 열리더니 인옥이가 밖으로 허둥지둥 달려나온다. 머리는 산산이 흩어지고 아래우 옷은 짝짝이였다. 색조가 강한 붉은 바탕에 흰줄로 물결무늬를 나타낸 브라우스에 아래는 통이 좁은 바지를 입었는데 별로 촌스럽게 느껴졌다. 그나마 브라우스의 아래도리를 바지에 잘 밀어넣지 못해 볼꼴없이 삐여져나와 허리춤에서 너풀거렸다. 그가 여직 알고있는 인옥의 인상중에서 가장 처참한 몰골이였다. 불길한 예감이 리병찬의 머리속을 호되게 후려치며 지나갔다.

며칠사이에 왜 이렇게 변하였는가? 신비할만치 아름다와 한번 보기만 해도 사람의 마음을 취하게 만들던 처녀의 매력은 다 어데로 사라졌는가?

숱한 대상을 다 물리치고 재산도 명예도 이북출신이라는 딱지도 막 밀어제끼게 한 그 힘, 뛰여난 용모와 육체의 매력, 그 아름다움은 지금 어데로 갔는가.

《인옥씨, 무슨 일이 생겼소, 왜 이 모양이요? 엉?》

리병찬은 한달음에 달려가 그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인옥은 낯선 사람이나 보듯 그를 멀거니 쳐다보며 금시 쓰러질듯이 기진한 기색으로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균형과 안정을 잃어버린 처녀의 입에서는 실날같은 말소리가 간신히 흘러나왔다. 리병찬은 처녀의 얼굴을 두손으로 감싸쥐였다. 하얗게 질린 처녀의 얼굴에서 힘없이 눈이 감기면서 물기머금은 발가스름한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도대체 아버지가 어떻게 됐다는거요. 잘못됐소?》

처녀앞에서는 언제나 자신만만해지는 그였던건만큼 이때도 거만하다할 정도로 따지고들었다.

처녀는 도리머리를 저었다.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리병찬은 인옥을 데리고 문쪽으로 다가갔다. 구두를 마루에 벗어놓고 아직 초벽을 했을뿐인 눅눅한 방에 들어가 꿇어앉았다. 한때는 중류급은 넉넉히 된다고 보았던 무게있던 집이 며칠사이에 과거의 흔적을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게 변하였다. 방은 두칸이지만 한방에는 가구가 차있고 지금 이 아래방에는 단출한 식구마저 거처하기 바쁠정도로 비좁았다. 습기가 과도하고 곰팡내가 났다. 장판을 한우에 돗자리를 깔고 환자가 누웠다.

리병찬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박만호의 손을 부둥키고 절절하게 문안을 하였다.

《아버님! 어떻습니까? 어떻게 하나 이 어려운 고비를 넘기셔야 합니다. 아버님의 병은 어떤 불치병이 아니니까요. 잘 치료하면 곧 나을수 있습니다. 지금 항생제가 좋은것이 많이 나왔기때문에 기관지염이나 페염은 능히 고칠수 있습니다. 지금 어느 병원에나 큰물에 부상당한 환자가 꽉 차서 입원이 곤난합니다. 그리고 또 이 병은 입원해도 별것이 없습니다. 주사를 맞고 간호를 하는것뿐이니까 인옥씨가 하는것이면 병원이나 같습니다.》

박만호는 턱을 들었다놓으며 고맙다고 하였다.

얼굴은 부었고 입술에서는 덕지가 일었다.

《이사람아! 나는 더 오래 살고싶은 생각 없네. 인생은 60평생이라 하였는데···》

그의 목소리는 몹시 갈려있었다. 옆에 앉았던 인옥이가 숟가락으로 물을 떠넣어서야 말을 계속하였다.

《한생을 넘겼으니 그게 어딘가. 내 평생 소원은 고향에 한번 가보는것이였는데···고향에 가보는것, 아, 아.》

기침을 터뜨렸다. 이제는 기운이 없어서 가래도 제대로 톺지 못한다. 온 내장의것을 다 끄집어내는것 같은 기침을 한참이나 계속하더니 차츰 진정되였다. 인옥이가 깡통을 들이대여 가래를 뱉었다. 그러나 리병찬이로서는 아직 림종은 멀었다고 보았다. 우선 정신이 하나도 흐려지지 않았고 기력도 그만하면 괜찮은 편이였다.

박만호는 잠시동안 엉성하게 철사로 엮고 아직 종이를 바르지 못한 천정을 한참이나 쳐다보고있다가 이윽해서 리병찬이쪽으로 시선을 돌리였다.

《병찬이!》 그는 숨을 몰아쉬며 한마디 부르고나서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계속하였다.

《나는 자네를 아들겸 사위겸 그렇게 믿고 살아오고있네. 그런데 내 짐작에도 내가 오래 살지 못할것 같아. 소원을 하나 말할테니 들어주겠나?》

《어서 말씀하십시오. 내 힘으로 할수 있는껏 다하겠습니다.》

《아! 감사하네 감사해. 내 소원이라는건 뭔가. 내가 나서자란 고향에 한번 가보고싶은거네. 낳기는 황해도 신천이지만 자라기는 해주서 자랐지. 아! 나는 해주에 가보고싶네.》

《걱정마세요. 해주로 갑시다.》

이때 숟가락에 물을 떠서 아버지의 입에 흘려넣어주던 인옥이가 고개를 들어 리병찬을 쳐다보았다. 의혹에 잠긴 그 눈길에는 해주에는 어떻게 간다고 그러세요 하는 의문이 담겨져있었다. 그러나 리병찬은 그런데는 개의치 않고 《해주로 갑시다.》 하고 무릎에 놓였던 손을 마주비비고있다.

《내가 왜 해주에 가겠다고 하는가?》

박만호는 흐릿해진 눈으로 딸과 사위감을 번갈아보면서 뒤를 이었다.

《전쟁때 내가 해주를 버리고 여기 서울로 온것은 잘못이였네. 내가 왜 제 고향을 버렸겠는가말이야. 해주는 살기 좋은 고장이지. 농사도 잘되고 인심도 좋지. 철따라 과일도 나고 물고기도 잡네. 봄에는 까나리가 나지. 조기, 칼치, 오징어, 새우, 굴, 뚝감도 좋구, 꽃게, 조개, 사과, 배···》

마음이 격해져 그런지 다음은 말끝을 잘 아물구지 못하고 웅얼웅얼하기만 하였다.

아득히 먼데를 바라보고있는것처럼 눈길을 천정에 던진 그는 나서자란 고향하늘로 명상을 날리면서 모든 시름을 잊고있는것같았다. 지어 이때 그의 얼굴에 순결한 웃음마저 피여나있었다.

아닌게아니라 이때 박만호는 아늑한 향수에 잠겨 제나름의 생각에 묻혀있었다. 그 누구에게나 고향은 정다운것처럼 박만호는 역시 고향 해주를 그렇게 생각하고있었다. 어머니 가슴은 나무랄것이 없는것이다. 그 따뜻한 온기와 부드러움 그리고 인간에게 필요되는 모든것이 여기에 뿌리를 내리고있는것이다. 사랑도 성장도 미래도 꿈도 지혜도 용감성도 인간의 미도 향기도 여기에서 출발하는것이다. 고향은 어머니의 터전이다. 고향과 어머니는 뗄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이며 언제나 같이 있는것이다.

그의 눈앞에는 푸른 바다가 아득히 펼쳐졌다.

바다가··· 휘여돌아간 물굽이··· 거기에서 어린 그는 자기또래 사내애들과 함께 달리고 기고 딩굴고있다. 온몸에 감탕칠을 해서 깜둥이가 된 사내아이들이 밀물을 따라나가면서 하늘이 울릴만치 고함을 지른다. 감탕이 사타구니까지 올라오는데서 조개를 집어내고 뚝감을 캐낸다.

정신없이 바다에 떠다니는데 아스레하니 《만호야, 만호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난다. 고개를 돌리면 노을에 하늘땅이 다 새빨갛게 된 그 새짬에 역시 새빨간 치마저고리가 손짓을 하고있는것이다. 어머니였다.··· 박만호는 웅얼웅얼 무슨 말인가 계속하였다.

리병찬은 박만호를 이미 저승에 한발을 들여놓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리치를 가릴 필요없이 해주가 좋다면 좋은것으로, 서울로 온것이 잘못이라면 그것도 또 그것대로 잘못된것으로 수긍하였고 해주에 보내달라면 그렇게 하자고 수긍하는것이다.

하지만 인옥이는 그와 전혀 사정이 달랐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아버지의 고민을 리해할수 있었고 이러저러한 사정에는 동정이 갔다. 이전에는 해주라는 말만 나와도 발끈 성이 났었는데 이제는 어딘지 모르게 정이 생기고 그것을 그렇게 그리워하는 아버지가 불쌍하게 생각되기도 하였다. 때문에 리병찬이 《그렇게 합시다.》한다든지 《해주에도 가야지요.》하는 소리를 할 때면 심한 모욕이나 조롱을 당하는것으로 느껴졌다.

《내가 해주를 떠난것은 한생 돌이킬수 없는 과오였네.》

박만호는 인옥이가 흘려넣은 물을 넘기고나서 리병찬을 쳐다보았다.

《내가 여기 온것을 왜 잘못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건 평양의 공산세상이 좋고 여기 서울의 〈자유세계〉가 나쁘다 그것이 아닐세.

그럼 뭔가? 단순하지. 고향을 버리면 안된다는거네. 전쟁이 터져서 몇달후에 미군이 들어왔네. 전쟁때문에 물건들을 거지반 땅에 묻고 얼마 남지 않은걸 상점에 내놓고있었는데 하루는 공산군이 또 밀려나온다 하지 않겠나.

그래 난 공산군이든 미군이든 다 겪어봤으니 될대로 되여라 하고 그냥 해주에 뻗대고있을 생각을 하고있었지. 그런데 〈국군〉이 선전하기를 이제 미군이 다 나간 다음에는 원자탄을 떨궈서 몽땅 재가루를 만든다고 하지 않겠나. 겁이 덜컥 나더군. 어떻게 하면 살수 있는가 하니 미군이 나가는 남쪽으로 따라가면 된다기에 따라나섰지. 아! 그때 내짚은 한걸음이 인간을 이모양으로 만들줄 누가 알았겠나. 지금에 와서 그것을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후부터 나는 하루에도 몇번씩 하느님께 속죄를 하고있네. 그런데 신은 나에게 용서를 주지 않네그려.》

박만호의 눈굽에는 눈물이 하나가득 고이였다.

인옥이는 쌍가풀진 눈을 들어 리병찬을 쳐다보았다. 당장 숨이 넘어갈것 같던 아버지가 리병찬이와 이야기를 하게 되자 기운이 솟고 눈이 밝아진것을 보았기때문이다.

《그런데 이사람!》

박만호는 물을 떠서 입으로 가져오는 숟가락을 손으로 붙잡고 말하였다.

《내 소원을 풀어주게.》

기침을 또 터뜨렸다. 그러나 기력이 진하다보니 낯을 찡그릴뿐 숨을 제대로 내쉬지 못하고있다. 눈살이 꼿꼿해지고 입술이 새파랗게 이문다.

《아버님! 아버님! 진정하십시오.》

리병찬은 가래끓는 소리가 나는 여윈 가슴을 흔들면서 웨치다싶이한다.

《해주에는 이제 가게 됩니다. 해주로 갑시다. 아버님! 정신을 차리세요.》

리병찬은 인옥이에게 물을 떠넣으라고 손짓을 하면서 소리를 지르고있다.

《아버지!···》

이번에는 인옥이가 다급한 소리를 질렀다. 숟가락을 방바닥에 던지고 그는 아버지의 가슴을 어루쓸면서 숨을 돌려세우려고 하였다.

《아버지! 왜 이래요. 나를 보세요. 인옥이를 혼자 두고가면 돼요? 아버지! 나를 보세요.》

가슴을 찢는듯 한 웨침소리가 방안을 울리였다.

문밖에서 인적기가 났다. 근처사람들이 모여왔지만 림종을 같이 겪을만 한 사이는 되지 못해 그랬던지 방안동정만 살피고있다.

이윽해서 박만호는 후유- 긴숨을 내쉬면서 눈을 떴다. 눈물을 흘리고있는 딸의 정상이 보기 거북했던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일없노라고 형용을 하였다.

《병찬이, 부탁이네. 해주에는 못가. 내가 그걸 왜 모르겠나.》

방금 숨이 넘어갈것 같았는데 기적적으로 다시 말을 하고있다.

그것도 정확하고 명료하게.

《해주에는 못가니까 거기 간셈치겠으니 북에서 온 쌀로 나 밥한술 먹여주게. 소원이네.》

아! 이런걸 왜 내가 몰랐었는가 하는 기색으로 인옥이는 아버지의 볼을 싸쥐고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아까 고향이야기를 할 때보다는 한결 누그러진 얼굴이였다. 볼꼴없이 이그러졌던 미간과 눈가장자리는 편안해졌고 숨소리마저 고르로와진것 같았다.

《그리고 병찬이 이사람! 저기 저 성경책을 나한테 집어주게.》

박만호는 마디가 굵은 손을 내뻗치였다.

리병찬이 책상우를 살피니 겉가위를 씌워서 소중히 다룬 성서가 한쪽에 놓여있었다.

리병찬은 그것을 집어들고 가위를 번져보았다.

《대한》성서공회에서 발행한 구약, 신약 합본이였다.

박만호는 성경책을 신비스럽게 쳐다보며 인옥에게 종이장을 끼워 표식을 한데를 읽어달라고 하였다.

《결국 내가 물때문에 망하게 되였으니 노아의 방주가 생각이 나서 그러네.》

박만호는 구슬픈 눈길로 천정을 쳐다보는것이였다. 닷새전만하여도 박만호는 돋보기를 걸고 글을 읽을만 하였는데 지금은 딸을 시켜 구약성서 창세기편을 읽으라고 했다. 인옥이는 거기에 무슨 뜻이 있는것 같아 무릎을 꿇고앉아 노아의 방주가 적힌 제6장부터 내리읽었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느님과 동행하였으며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여기서부터 방주의 크기가 《장이 삼백규빗 광이 오십규빗 고가 삼십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뒤에서부터 한규빗에 내고···》라는데를 거쳐 제7장에 이르러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앞에서 외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까지 읽었다.

잠잠히 듣고있던 박만호는 딸에게 그아래를 자세히 읽으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날에 노아와 그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처와 세 자부가 방주에 들어갔고 그들과 모든 짐승들이 그 종류대로, 모든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 곧 각양의 새가 그 종류대로 무릇 기식이 있는 육체가 둘씩 방주에 들어갔으니··· 홍수가 땅에 사십일간 있었느니라··· 땅우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것과 모든 사람이 다 륙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것은 다 죽었더라···》

박만호는 원래 기독교신자가 아니였다. 하던것이 차차 신세가 침몰하면서부터 성서를 구하고 례배당에 가끔 나들게 되였던것이다. 인옥이가 노아의 방주에 대해서 읽는동안 잠든듯이 눈을 감고있다가 제8장 끝머리 《륙백일년 정월 곧 그달 일일에 지면에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뚜껑을 열어제치고 본즉 물이 걷혔으니 이월 이십칠일에 땅이 말랐더라.》까지 읽었을 때 박만호는 한숨을 크게 쉬며 눈을 떴다. 잠시후 딸과 리병찬을 쳐다보며 그는 한마디 간신히 내뱉는것이였다.

《내가 물의 심판에 걸린것도 하나님의 뜻이니 할수 없지. 그러나 마지막 소원은 고향쌀을 내 입에 넣어봤으면 하는거네.···》

인옥이는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병찬씨! 내 인차 동사무소에 갔다오겠어요. 오늘 구호미배급을 준다고 했으니까. 하긴 벌써 한축 줬다는 말두 있구.》

벽에 걸린 옷을 벗겨들고 인옥이는 바깥출입을 준비하고있다.

《가지 마오. 지금 가야 소용없소. 12시전에는 내주지 않소.》

《어째서요?》 인옥은 낯빛이 파래서 병찬이를 놀랍게 돌아보았다.

《글쎄 그런줄 알라니까. 우에서 취한 조치인것 같소.》

《그래도 사정하면 되겠지요. 앓는 환자가 마지막으로··· 부탁하는건데··· 전 가보겠어요.》

더 설명할 사이도 없이 인옥은 부엌으로 나간다.

《무슨 소릴 하오?》 리병찬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엌문턱을 넘어섰던 인옥이가 그를 원망스레 돌아보았다. 리병찬은 환자를 옆에 두고 큰소리친것이 미안하여 약간 누그러진 어조로 타이르듯 말했다.

《거기 가서 뭘 설명하겠다는거요?》

그는 환자가 들을가봐 흘깃 돌아보고나서 좀더 낮은 소리로 인옥에게 수군거렸다.

《한가지만 생각지 말고 우리 둘의 장래를 생각해야 할게 아니요.》

《네?!》

《인옥씨는 리병찬의 장인이 림종전야에 이북쌀을 기어코 먹어 보고싶다고 했다는 말을 들어야 좋겠소?》

창백하게 질린 인옥의 낯빛이 한동안 굳어져서 풀어지지 않았다. 그러더니 차츰 입술이 파들파들 떨면서 눈가에 원망의 눈물이 괴여올랐다.

처녀는 별안간 홱 돌아서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인옥씨! 안된다니까.》

그러거나말거나 인옥이는 자루를 들고 어둠이 짙게 깔린 골목으로 사라져갔다.

박만호는 딸이 나가버린것도 알지 못하고 자기 의식이 이끄는대로 말을 번지고있었다.

《아! 나는 속았어. 속았단말이네. 내가 왜 고향을 버리고 여기 왔겠나. 원자탄? 아니야, 속았단말이야. 공산당이 모조리 죽여없앤다고? 아니야.》

리병찬은 차츰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박만호는 자기 하고싶은 말을 계속하고있다.

《나는 속았단말이야. 어데 원자탄이 떨어졌는가? 공산당이 생사람을 다 죽여버리고만다? 어데 그런 일이 있었는가? 병찬이 이 사람, 내 말 알겠는가.》

박만호는 뿌연 눈길로 신경을 꼿꼿이 도사리고있는 리병찬을 쳐다보고있다.

반면에 리병찬은 박만호가 존경할만 한 인옥이의 아버지가 아니라 어떤 마귀의 형상처럼 보이였다.

구렝이같이 징그러운 몸체가 자기앞에서 꿈틀거리고있는것이다. 그는 자기가 가장 악독한 공산분자의 선동을 듣고있는것 같은 분노를 느끼였다.

《아버님, 그러면 안됩니다.》

《뭐가 안돼?》

박만호는 눈에서 시퍼런 빛을 내쏘며 적의에 차서 반복하고있다.

《내 일생의 교훈이 미국놈들한테 속은거야. 속았어. 속았단말이야, 아! 원통한지고. 원통한지고. 해주! 해주!》

주저할 필요도 없고 가리울 필요도 없다고 보는 박만호였다.

한당대 묻어두고 눌러오던 오뇌가 머리를 쳐든것이다.

《그만하세요!》

참다못해 리병찬은 징그럽게 보이는 늙은이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렇게 되자 박만호는 단말마적인 힘을 내서 손을 뿌리쳤다.

그러고나서 좀 더 크게 웨치고있다.

《아! 나는 속았어. 속은것이 잘못이지.··· 해주! 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