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4

 

제 5 장

4

 

한영국은 끝내 울화를 터뜨리고야말았다. 이것저것 부닥치는 일마다 신경이 바늘끝처럼 일어서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참고 견디여보려 하였으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맘대루 하구려!》

꽥 고함을 지르며 손에 들었던 중절모를 방바닥에 둘러메쳤다. 그바람에 고려대학 3학년생인 맏딸 원심이와 둘째딸 원옥이가 겁에 질려 어쩔줄을 몰라하였다.

《이건 가정이 아니라 지옥이란말야. 남편을 알기를···》

원옥이가 달려나와 아버지의 입을 막으며 참아달라고 애원한다.

《당신이야 그저 한당대 제 일만 제 일이라고 했지 언제한번 처가켠일에 성의를 보인적 있어요.》

《정 이러겠소.》 한음계 더 높은 고함소리가 복도와 방안을 울린다.

《내 말하지 않아. 이게 어디 내 가고싶으면 가고 말고싶으면 마는거요. 더구나 이번 일이 어떤거라는걸 당신이 모르오?》

《나도 모르지 않아요. 하지만 번마다 이러니 나도 부모들이나 동네사람들 보기가 창피하단말예요. 당신이 처가집이라고 아버지환갑때에 갔댔어요? 진갑때에 갔댔어요? 어머니 진갑때에도 간다간다 하다 또 무슨 급한 일이 있다면서 출장갔더랬지요? 오죽했으면 동네늙은이들이 그 집 맏사위는 신문사일을 혼자 다 맡아 하는 모양이라면서 죽기전엔 만나보기 어렵겠다고까지 했겠어요. 그런데 이번에 또 혼자 내려가면··· 》

《어머니, 그만해요. 같이 못가는 아버지는 마음이 편하겠어요. 중한 일로 떠나시는 아버지에게 자꾸 이러시면 어떻게 해요.》

맏딸 원심이가 제 어머니를 막아서며 달래인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참으면 되겠는데 말마디마다 부아를 돋구니 아버지가 그런다고 옹알거렸다.

문제의 발단은 대구에 있는 친정에서 막내동생 결혼식이 있는데 한영국이 여직 간다간다 해오다가 정작 떠나가는 대목에 와서 또 못간다고 돌아서기때문에 생긴것이였다.

한영국은 화가 나서 문을 후려닫고 밖으로 나왔다. 항상 일에 쫓기우다보니 공교롭게도 대사가 있을 때마다 여의치 않은 일이 생겨 빠지군 하였는데 따지고보면 처가에 대한 무관심도 전혀 없었던것은 아니였다. 안해는 그것이 가슴에 맺혀 늘쌍 불만이였는데 이번에 또 이런 경우에 부닥치고보니 뻔히 아는 푸념질을 해서 부아를 돋궈주는것이였다.

신문사에 도착하자 그는 곧 대기하고있던 《도요다》에 몸을 싣고 판문점을 향해 떠나는 집결소로 달리였다. 집결소에서는 대형뻐스가 판문점으로 떠나가는 기자들을 기다리고있었다. 뻐스에 오르니 리병찬이 창가옆자리를 내주며 얼굴이 벌겋게 된 한영국을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

《푹 쉬였습니까?》

응대가 없이 권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방금전에 안해와 다투던 기분나쁜 일을 더듬고있노라니 리병찬이 살살 눈웃음치며 또 한마디 보태였다.

《휴식이 잘돼야 글도 푸짐해지겠는데요.》

《누가 아니라오. 그러나 생활은 야속하오. 그런 혜택을 어디 줘야 말이지. 지옥이란 땅속에 있는가 했더니 실은 우리 집 방안에 있드란말이요. 허허.》

한영국은 허거픈 웃음을 짓고나서 천주교신자답게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라고 중얼거리며 먼저 이마, 다음에 가슴과 량어깨를 짚어 십자를 그었다. 판문점 남측차단소에 이를 때까지 그는 줄곧 침묵을 지키였다.

그가 며칠전부터 약간한 자극에 의해서도 발작적으로 고함을 지르거나 술을 병채로 마시게 된것은 가정사정도 아니며 더구나 현행직무에 의한것도 아니였다. 그것은 한시도 짬을 주지 않고 뒤따르는 리병찬이때문이였다.

로골적으로 협박해오기 시작한 첫 동기는 안기부장 송일선의 축하연설이 있은 연회에서 중도퇴장한 때부터였다. 그날밤으로 리병찬은 한영국의 집에 찾아와 호의를 그렇게 물리치는 리유가 무엇인가고 따지고들었던것이다. 하루 지나 본사 비서부에서는 리력서를 다시 써내되 가족친척관계를 자세히 밝히라고 력점을 찍었다. 다음사건은 바로 어제 있었다. 가정사정으로 며칠간 대구에 갔다와야겠다고 하니까 날자가 어찌 그리 공교로운가고 하면서 사장은 《우리도 맘대로 못하오. 당신은.》 하고 결근계를 부결하였다. 이때도 그는 고압이 어데서 오고있는가 하는것을 능히 짐작할수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리병찬은 오늘도 취재에서 성과가 있기를 바란다면서 담배갑을 내밀었다. 한영국은 성근히 담배가치를 뽑아들면서 오늘은 《북한》과 결판을 내는 치렬한 전투가 벌어질것인데 볼만한 광경일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다보니 리병찬은 자연스럽게 《보도지침》에 지적한 내용을 설명할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오늘로서 우리의 작전은 끝장이 날것입니다. 더는 우리가 양보할수 없습니다. 사실은 먼저번에 내댄 9월중일괄인도로 저들이 후퇴할것으로 보았었는데 뜻밖에 완강하게 나왔던것입니다. 그래 오늘은 어떤 일이 있어도 둘러메쳐야 합니다. 그것은 능히 가능합니다. 중요한것은 쌀이라고 보고있는데 약간이라도 불순물로 인정되는것이 나타나기만 하면 그것을 리유로 인수를 거부하면 됩니다. 그다음에는 약품인데 약이란 인명과 관련되기때문에 아무것을 걸고채도 될것으로 보고있습니다. 이를테면 딴전을 위한 예비책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나오리라는것을 북에서 모르지 않을것이라는 그 점입니다. 그리고 구호물자를 인도인수하는 마당이 순간에 제2차 6. 25로 돌변할수 있다고 우리는 보는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북에서 쌀이요. 구호물자요 하지만 결국 남침의 기회를 노린다는것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때문에 오늘의 이 마당은 전쟁의 화약고를 안은 총포소리 없는 대결장이라고 봐야 합니다. 자, 보십시오.》

그는 손을 들어 서남쪽산발을 가리키였다.

《저기에는 지금 한개 련대병력이 이 판문점과 대성동 일대 저쪽까지 겨누고있습니다. 총소리 한방만 울리여도 일격에 소멸해 치울 작전을 짜놓았습니다. 하지만 안심할수는 없습니다. 어데까지나 〈북한〉빨갱이들은 만만치 않은 대상이니까요.》

한영국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하였다.

리병찬이 보건대 자기 말을 듣고있는 한영국이 상당한 정도로 충격을 받고있는것 같았다. 지어 경계심이 지나쳐서 공포를 자아내는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한영국은 속으로는 공포라기보다 그 어떤 우려를 느끼고있었다. 리병찬의 말이 전부는 아니고 그 절반만을 사실이라고 한다 해도 무시무시한 사변이 일어날것은 틀림없는것이였다. 그는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 잠간 들렸다가 대성동 인도인수장소로 가겠노라고 하고 리병찬과 헤여졌다.

검문소에서는 키가 수수대같은 미군소위가 매우 까다롭게 놀았다. 출입증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분증을 보자 몸수색을 해야겠다 하면서 복잡하게 굴었다. 하지만 그는 침묵으로 응수할뿐 쓰거운 말 한마디 던지지 않았다.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은 휑뎅그렁하였다. 그렇지만 또 한장 찍었다. 찍어두면 어느때든 요긴하게 쓸 기회가 있을것 같았기때문이였다.

벌써 개성쪽에서는 와릉와릉 발동기소리가 울려왔다. 초보적계산에 의해도 무려 400대에 가까운 자동차가 이 벌판을 꽉 채우게 될것이다. 아닌게아니라 전쟁기분이 나는것 같기도 하였다. 산봉우리마다에서 포신이 일어났다. 부러 보라고 그러는것인지 서툴게 은페해서 그런지는 알수 없으나 여러곳에 중기화점들이 눈에 띄였다. 그는 쑥대만 설레이는 들판을 향해 카메라를 대였다. 여기가 수라장이 될수도 있는것이다.

그다음 그는 대성동으로 급히 달려가 야적장을 돌아보았다. 하적작업을 담당한 청장년로력이 몇천명이나 한군데 모여서 지휘관의 훈시를 듣고있었다. 모두다 씨름군같은 체격들인 그들은 리병찬의 말을 들으면 특수훈련을 받은 군인들인데 이쪽 산기슭천막에 엄페한데서 임의의 시각에 총과 탄알을 실은 자동차가 그들에게로 달려나갈 준비가 되여있다고 하였다.

그는 하역인부들을 향해 카메라를 둘러대였다. 그때 뒤에서 덜미를 나꾸채여 하마트면 뒤로 자빠질번 하였다.

《왜 그래?》

한영국은 땅에 떨어진 카메라를 집어들면서 험상스럽게 생긴 작업복차림의 청년에게 고함을 질렀다.

《임마, 기자문 다야.》

그자는 팔소매를 걷어올리며 턱을 쳐든다.

《뭣때문에 우릴 찍어, 너 빨갱이 아냐? 우리 련대장님은 누구도 우릴 알게 해서는 안된다고 했단말이야. 광주사건같은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런 마당에서는 도리나 리치는 아무 소용도 없는것이다. 한영국은 그자리에서 물러나 적십자대표들이 만나도록 되여있는 천막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멀찍이 세운 대형 《포드》를 하나 발견하였는데 여겨보니 로이드안경을 낀 송일선이 앉아있었다.

대성동은 승용차, 화물자동차, 작업복으로 위장한 특수부대로 한벌 덮였다. 취재기자들이 완장을 끼고 가로세로 달려다니고있다. 그러고있는 사이에 자동차에 설치한 고성기에서 《북한》공산주의자들의 자동차행렬이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에 들어섰다고 알리였다. 사방에서 구령소리와 호각소리가 울리였다. 엄페호에 매복한 군대들은 장탄을 하였고 산봉우리에 일어섰던 포신들이 하적장을 향해 겨누어졌다. 온 들판이 꽛꽛하니 얼어붙은것처럼 되였다. 말그대로 일촉즉발의 순간이 왔다.

한영국은 잠간 멍청해섰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사진을 또 찍었다. 대상과 초점을 가릴새도 없이 닥치는대로 찍었다. 그러다가 그는 훌연 자기로 돌아왔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이런 연극이 력사의 어느 대목에서 연출되였던적이 있었던가. 반경 2㎞에 달하는 들판에 거창한 하나의 정치, 군사적연극이 벌어지고있는것이다. 무엇때문에 이렇게 할 필요가 있는가. 이것은 하나의 큰 기만이다. 우선 민중을 속이는것이고 겸해서 자기자신을 속이자는것이다. 상품생산이 리윤의 법칙에 의해 이루어지는것처럼 정권지탱은 기만의 법칙에 기초한다는 말도 있지만 이것은 너무하지 않는가. 북에서 쌀이 아니라 폭탄을 싣고 올것이며 대성동이 아니라 수백대의 자동차에 은페된 특수부대를 싣고 서울로 단숨에 밀려나온다는것이다.

한영국은 소리없이 쓰겁게 웃었다. 하늘마저 위선자의 낯짝처럼 찌뿌둥한것 같았다. 어쩌면 이렇게 저지능자들만이 생각해낼수 있는 바보짓을 꾸미는가. 히틀러가 꾸민 《의사당방화》쯤은 그래도 목적이 뚜렷했고 그 주모자가 말한것처럼 기만은 크게 꾸밀수록 실감이 난다고 했지만 이건 과연 무엇인가. 쌀이 아니고 폭탄이라고, 지함에서 천이나 의약품이 아니라 특공대가 나온다고, 하하하, 두고보자, 이제는 몇분 남지 않았다. 그는 또다시 웃었다. 그렇지만 초긴장상태에 돌입한 이 마당에서는 실성한 사람처럼 되여버린 그에게 누구도 눈길한번 돌리지 않았다.

고성기에서는 《북한》자동차행렬이 대성동어구에 들어섰다고 하였다. 또 한번 북극바람과 같은 랭기가 대성동들판을 휘익 지나갔다. 방금전까지 정신없이 뛰고 닫고 하던 군인, 기자, 하역군 또는 자기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검은 안경을 낀 모모인사들 전부가 움직이지도 않았고 아무러한 음향도 일으키지 않았다. 쥐죽은듯이 고요해진 들판에 애오라지 고성기소리만이 파도를 이루어 거침새없이 음울한 공간으로 미끄러져나갔다.

한영국은 한달음을 쳐서 야적을 하기로 정해진 언덕쪽으로 달려갔다. 발을 옮겨짚는데마다 물탕이였다. 꼬박 이틀동안 계속 쏟아지던 비가 오늘아침에야 겨우 멎었던것이다. 이쯤하면 아무리 잘 건조했던 쌀이라도 습도가 오를것이다. 보관도 문제였겠지. 모두가 야적을 할수밖에 없었을테니까. 여하튼 두고보자. 그는 맨선두차부터 촬영하기로 하였다. 같은 《동아》촬영반이 민활하게 움직이고있다지만 그래도 자기로서는 가만있을수 없었던것이다. 그는 북에서 오는 첫 자동차를 향해 샤타를 누르고나서 문득 하나의 생각이 번개처럼 떠오름을 의식하였다.

《그러면 너는 이 대기만극에 무슨 역을 담당했지?》

순간 그의 눈앞은 캄캄하였다. 연극구경을 오라고 광고지를 뿌리는자인가 아니면 얼굴에 가면을 쓰고 징을 치면서 괴상한 몸짓을 하는 어리광대인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지만 그런 생각은 몇초동안에 있은 일이고 그다음부터는 자기 본래의 기분에 떠서 행동하였다.

하차작업이 진행되였다. 자동차가 들어오는족족 인부들이 달려들어 어깨에 메서 발판우에 올리쌓았다. 처음에는 하적콘베아를 써서 식을 내려고 했던것인데 그것으로는 감당해낼수 없어 등을 돌려대라고 하였다. 다른 한편 적십자 량쪽대표들은 전문가들과 함께 품질검사를 시작하였다.

한영국은 쌀검사하는데로 찾아갔다. 별로 복잡한것은 없었다. 포대에서 검사시료를 떠서 습도기에 넣으면 눈금표식판의 바늘이 수자를 가리키게 되여있었다.

이것은 과학이고 기계의 놀음이기때문에 협잡이 있을수 없는것이다. 검사를 립회하게 되여있는 유력한 증인인 국제적십자사 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담당자가 술이 얼근해서 계기가 놓인 바로 앞에 발을 벌려디디고 서있었다. 끝이 예리한 니켈도금파이프로 쌀포대의 여러점을 찍어 정해진 량만치 계기에 밀어넣었다. 그 순간이였다. 둘러섰던 수십쌍의 시선이 머리칼오리만 한 눈금에 일제히 쏠리였다. 계기바늘은 천천히 령점에서 떠나더니 차츰 속도를 가해서 잠간사이에 9, 10, 11로 올라갔다. 그런 기세면 표준수치 15는 문제로 되지 않을만큼 속도를 내였다. 모두다 숨을 죽이였다. 인수자들은 은근히 15는 넘을것이라고, 그러면 일격에 이 연극은 막을 내리게 될것이라고 생각하고있는것이다. 숨막힐듯 한 한초가 또 지나갔다.

바늘은 무엇에 걸리기라도 한것처럼 13. 5의 눈금에서 딱 멎었다. 그 순간 한영국은 움켜잡았던 가슴을 놓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왜 그런지 그 바늘이 자기 운명을 계시하는 어떤 신비한것으로 느껴졌던것이다. 너는 어느쪽인가? 15미만을 바라는가 아니면 그 이상을 바라는가 하고 누가 묻는다면 대답할수 없었다. 그저 무의식중에 15%미만을 다행으로 생각했던것이다. 그런후 과학이 도달한 정밀한 계기의 역할이 오늘처럼 대단한 의의를 띠게 되고 오늘 이자리에서처럼 사람들의 심장을 옥죄이고 예리하게, 정확하게, 그러면서 위대하다고까지 찬양해야 할 역할을 수행한적은 일찌기 없었을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몇분후에 다시 계기를 들여다보고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탄성을 올리였다. 재차 뜬 시료는 마대의 바깥면에서 이틀동안이나 계속된 비의 영향이 많을것으로 알았던것인데 그것은 13. 3일뿐이였다.

《됐습니다. 습도는 문제될것이 없습니다. 최소한 15%로 보는것이 국제적기준인데 이 쌀은 13. 5입니다. 잘 건조된 쌀입니다.》

캡을 쓴 사나이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호의를 보인다는 투로 큰소리를 쳤다.

《그럴수밖에요. 고미, 고고미니까요. 아니 고자를 다섯개는 달아야 할 정도 묵은 쌀입니다.》

그때 남측대표 한사람이 습도계를 들어옮기는 례의 그 사나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한영국은 한걸음 나선뒤에야 그가 리병찬임을 알게 되였다. 눈치를 보니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신호같았다. 습도계기가 말한것이지만 거기에 덧얹어서 몇해나 묵은 쌀이라고 한다면 북은 온통 기근지대로 화했다고 선전해온것이 허위로 될가봐 그러는것 같았다.

《습도 하나만으로 질을 말하기는 이릅니다. 몇포대 헤쳐봅시다.》

남측대표가 얼굴이 시퍼렇게 되여 어물어물 말하였다.

《그렇게 해보지요. 후에라도 유감이 없어야 하니까요.》

북측대표의 자신만만한 대답이다. 시시하고 철면피하기 이를데 없는놈들, 하고 한영국은 생각하였다. 저렇게 하는것이 얼마나 인간의 도리에 어긋나는지도 모르는 바보들, 심술궂고 몰렴치하고 감각이 없는 저런자들의 량적확대의 최절정이 이른바 《한국》의 《대통령》이며 그밑에 줄레줄레 사슬처럼 고리를 이루고 달아매운것이 그들의 통치체제인것이다. 거지가 동냥품에서 질의 흠을 잡으려드는 추태가 어떤것인지 모르는놈들, 덮어놓고 고맙습니다 하고 왜 한마디 하지 못하는가. 제일 좋기는 검사는 필요없습니다, 우리가 돈주고 사는것도 아니고 한겨레끼리인데 나쁜것을 보내겠습니까, 우리는 북측의 성의를 그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래야 인간인것이다. 이래놓고도 선전은 하고싶은대로 하자. 여기도 정치마당인데 왜 허위와 기만이 없을라구.

이러한 착잡한 생각을 좇고있는데 마대를 헤치고있던 사람들이 《야!》 하고 탄성을 질렀다. 검불 한대 없는 옥백미가 펼쳐진것이다. 또 하나 헤쳤는데도 마찬가지였다. 기자들이 사진을 찍었다. 모두 한줌씩 쥐여내서 입에 넣고 씹었다. 한영국은 쌀을 입에 넣는 순간을 몇개 포착하고 자기는 손을 대지 않았다.

북남 량측대표가 어울려있는데로 다가갔다. 북측에서는 얼굴이 허여멀쑥한 백무엇이라는 사람이 겸손한 자세로 담배대를 물고있고 남측은 키가 크고 가느다란 사람인데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다. 그러나 연방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고있다.

《북측에서 수고가 많았습니다.》

《쌀을 보니 밥맛이 있을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난처한 심리를 감추지 못하고있다. 품질을 타발해서 거절해야 하는데 그런 언질을 잡을수 없었다. 한영국이 그의 귀에 대고

《어떻소, 기분이?》 하니까

《야단 아니요, 흠잡을것이 없소. 난 이제 이거요.》 하면서 손으로 목을 썩둑 베는 시늉을 하였다.

한영국이 만나는 사람마다 《큰일났어요. 흠잡기는 틀렸어요.》 하고 맥풀린 소리를 지르고있다. 지어 쌀포대를 메나르던 어깨패마저도 《완전무결이요.》 하고 입을 비죽거린다.

한영국은 우정 사복경찰 하나를 만났다.

《어때요? 현품을 보니까.》 하니 그는

《경찰도 백주에 우량품을 가지고 불량품은 못만들지요. 졌어요. 우리가!》 라고 하였다.

한쪽 천막안에서는 북측 방송원이 현지실황을 보내느라고 흥분된 소리를 지르고있었다. 그것을 방해하기 위해 안기부의 선발된 한 젊은이가 렴치없이 다가들었다.

《아니, 이거 리경설방송원이 아닙니까? 저를 모르겠습니까? 강남중학 동기동창 정신국입니다.》

그는 손을 내들고 다가들었다. 방송원의 심리를 혼란시키려는것이였다. 그러거나말거나 북측방송원은 마이크에 대고 격조높은 말을 계속하고있었다.

리병찬이 좀 만나자고 하였다. 뒤로 돌아서니 물자현품보다는 북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야 좋은 세부를 쥐지 않겠는가고 하였다. 그 충고는 받아들일만 한것이여서 곧 동의하였다.

쌀검사에 이어 직물검사가 있었고 마지막에 의약품검사가 있었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자동차행렬이 서있는쪽으로 다가갔다. 짐을 부리는동안 자동차운전사들은 차를 점검하는 사람도 있었고 운전대에 앉은채로 대성동일판에서 벌어진 특이한 광경을 바라보기도 하였다. 누구를 짚어야 그럴듯 한 세부를 손쉽게 잡아낼지 알수 없었다. 특수취재는 대개 사전구상이 있어야 좋은줄 알지만 이번에는 심히 역겹기도 하고 또 하나의 《테스트》로 될것으로 인정하였기때문에 무턱대고 접어들었다.

리병찬은 앞질러나가면서 청년 하나, 중년 하나쯤 그것도 《공작원》이 아닌 진짜 운전사를 만나는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합시다.》 하고 한영국은 성근히 응하면서 리병찬이 권고하는 형의 청년을 하나 만났다. 눈이 크고 령리해보이는 스물네댓 되였을가한 운전사였다.

《운전사동무, 안녕하십니까?》

한영국은 롱조로 《동무》라는 말에 력점을 찍었다. 그런데 말투가 어색했던 모양인지 청년은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남측기자선생같은데요.》

《이야기를 좀 나누어볼가요?》

한영국은 친근감을 표시하면서 한걸음 다가갔다.

《이남땅, 여기 대성동에 도착한 소감이 어떻습니까?》

《소감이라구요?》 하고 청년은 《금강》을 꺼내 한대 피워보라고 하면서 벙긋 웃었다.

《소감이라는건 별것이 없습니다. 여기도 제 나라, 제 땅인데 왜 마음대로 오가지 못하게 하는겁니까?》

얼마간 대화가 진행되는동안 네댓명의 운전사들이 또 모여들었다. 문화 및 공보부 관리들이 사전에 주의를 준데 의하면 북측사람들은 될수록 접촉을 피할것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정반대이다.

《기자선생, 그 집에서는 물란리에 들지 않았는가요?》

《우리가 직발 서울까지 갔으면 편리할텐데 왜 이렇게 거치장스러운 놀음을 한다는겁니까?》

《우리가 서울에 나가면 〈적화〉통일하려 한다고 했다면서요?》

련속 들이대는 질문에 한영국은 뜻하지 않은 《포로》가 되여 쩔쩔매였다. 적당히 대답을 해버리고 취재를 해야겠는데 북측운전사들은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때 뒤쪽에서 《한동무, 차발동을 끄라구.》 하고 누군가 웨치는 사람이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멀찍이 나섰던 청년이 손짓을 하고있었다.

《한동무》라는 청년은 저발치에 세워두었던 차에 달려가 발동을 끄고 다시 가까이 다가왔다.

순간 한영국은 《한가?》 하는 혼자소리를 내며 그 청년을 쳐다보았다.

구리같은 얼굴색이며 눈이 부리부리한 청년인데 그를 보는 순간 한영국은 까닭모를 충격에 몸을 비칠하였다. 한순간 그는 자기가 왜 그렇게도 세찬 충격에 넋을 잃게 되였는지 몰랐다. 낯빛이 굳어지고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어쩌면 이렇게도 신통할수 있을가?)

30여년전 한강다리목에서 헤여지던 형의 모습이 저 이북의 낯모를 청년에게서 그대로 재현되고있는것이다. 그는 자기 눈을 의심하듯 눈을 슴벅이였다. 때로 그는 형의 모습을 상상해보려 하였으나 그때마다 안개속처럼 어린시절의 추억이 어렴풋이 떠오를뿐 똑똑한 모습은 그려낼수 없었는데 저 청년을 보는 순간 모든것이 엊그제일처럼 생생한 인상으로 되살아오르는것이였다. 대범하고 서글서글해보이는 저 넙적한 얼굴이며 우뚝한 코, 눈꼬리가 약간 치째질사하면서도 정기가 도는 저 눈은 헤여질 때의 형의 모습과 신통히도 비슷했다.

한참이나 어리둥절해있던 한영국은 스스로도 어이없는 생각에 곧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도 마음속으로 형을 그리다보니 형의 모습과 비슷한 저 이북의 청년을 보고 그는 그렇게도 놀랐던것이다. 사실상 자세히 보니 비슷하긴 해도 형은 아니였다. 하긴 30여년전의 형이 저렇듯 애젊은 청년으로 환원되여 나타날수는 없는것이다.

그는 이쪽 운전사들에게 서둘러 적당히 대답하고는 그 청년에게로 다가갔다.

《북에서 온 운전수아저씨, 수고많았습니다. 실례지만 지금 몇살입니까?》

《수고없습니다. 내 나이말입니까?》

운전사는 볼우물을 지으며 덧이를 드러내였다.

《왜 중매라도 서렵니까? 그러자면 사진이 있어야겠는데 어서 한장 찍으십시오.》

사진기를 내드는것을 보자 슬쩍 이렇게 받아넘기며 차창밖으로 손을 내흔들었다.

한영국은 사진을 찍고나서 또 말을 붙이였다.

《이 자동차는 북에서 만든건가요?》

《네! 〈태백산〉호이지요.》

《알속은 다 외국거고 깝대기만 씌운거겠지요?》

《기자선생! 외구멍으로 묻지 말고 두구멍으로 보지요.》

《두구멍?》

청년은 운전대에서 뛰여내려 기관부뚜껑을 열었다. 주물할 때 새긴 《태백산》이라는 글자가 뚜렷하였다.

한영국은 카메라로 기관부를 찍고나서 또 말을 걸었다.

《그래 이곳에 온 감상은 어떤가요?》

《감상이요? 감상을 말하면 이 구호물자들을 여기다 부리지 말고 수재를 입은 서울시민들에게 직접 가져다드렸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못하는게 아쉬울뿐입니다. 그런데 여보시오. 내 보기엔 기자선생같은데 마치 경찰처럼 심문하시는데요. 내 어느 소설에서 보니까 자본주의나라 경찰도 자기 소개쯤은 하고 남의 안속을 들추거나 심문을 하던데요.》

《아! 그렇군. 이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한영국은 수집은 처녀처럼 얼굴이 단번에 붉어졌다. 애당초 운전사를 높이 보려고 생각지도 않았지만 사상이나 리념에 의해 모든것이 불꽃을 일구는 마당이고보면 그런 례의쯤은 생략돼도 무방하다고 보았던것이다. 그러한 바르지 못한 자세는 이북의 애숭이청년의 약간한 타격에도 쉽사리 넘어질수 있었다.

《량해하시오. 바쁘다보니 그렇게 되였습니다. 나는 〈동아일보〉기자요. 한영국입니다. 구호물자를 가져다준 본인의 감상을 듣고싶어 그럽니다.》

《아, 그렇습니까.》하고 청년은 손을 내미는것이였다.

《기자선생, 우리 손이나 한번 잡아보지 않겠나요. 동포끼리인데. 더구나 나는 한남준이라고 합니다. 같은 한씨니까 전혀 인연이 없는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한영국은 껄껄 웃으며 악수를 하였다. 로동청년의 기지가 대단한데 놀랐고 그도 같은 한씨라니 무척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순수 운전사는 아니고 대학을 나온 《북한》의 훈련된 당일군이 틀림없다고 생각되였다.

《어느 대학을 나왔는가요?》

불의에 찔러보았다.

《앞으로는 대학에 가겠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중학을 다녔을뿐입니다.》

《대학에는 가고싶으면 누구나 가낼수 있는가요?》

《가낼수 있는가가 아니라 의무적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 작업반에서는 몇해안으로 27명 전원이 대학졸업자격을 가져야 한다고 결정하였지요. 나도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집행해야지요.》

《하아, 그래요?》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도 이북에서는 11년제의무교육을 실시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대학과정을 마치는것이 의무로 되고있다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 또 세계 그 어느 나라나 체제에서도 그런 일이 있다는것은 일찌기 본적도 들은적도 없었다.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하긴 의용군으로 들어온 우리 아버지의 말을 들으니 어렸을 때 학비가 없어 공부는 못하고 서울에서 쓰레기통만 뒤졌다고 했습니다.》

《응?! 아버지가 의용군이요?》

《예, 전쟁때 인민군대에 입대하여 의용군으로 들어왔지요.》

《고향이 어덴가요? 아저씨.》

《나말입니까? 무산광산이지요. 쇠돌소박에서 나서 쇠돌소박에서 자랐습니다.》

《아! 그렇군요. 부모들은 뭘합니까? 그리고 아버지의 고향은 어딘가요.》

《부모요? 아버지는 채광기사구 어머니는 식료공장에서 떡을 만들고있습니다. 아버지 고향은 서울이구요. 이번 서울일대와 남조선전역에서 수해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아버지는 밤잠을 주무시지 못했지요.》

《아니, 아버지가 서울에서 살았단말이요?》

《예.》

그때 《출발》 하는 구령소리가 들리였다. 짐을 다 부렸기때문에 차는 개성쪽에 또 한탕 갔다와야 하는것이다.

《안녕히 계십시오.》

운전사청년은 손을 흔들며 저쯤으로 사라져갔다. 하지만 그는 발걸음을 뗄수 없었다. 같은 한가, 서울, 의용군출신, 거기다가 신통히도 헤여질 때의 형모습을 닮은 청년, 이런것들이 순식간에 하나의 사슬로 꿰여지며 흥분으로 가슴이 후두두 떨리였다. 여기에 무슨 의미를 부여할수 있는가, 아니면 우연한 세부들의 일치성이겠는가. 호기심과 흥분에 높뛰는 심정을 걷잡을수 없었던 그는 직물을 인도인수하는 장소에 가야 할것을 그만두고 그자리에 서서 목지키기를 하였다.

담배를 피우면서 그는 늘 염낭에 들어있는 시계줄을 만져보았다. 매끈매끈한 사슬이 인차 땀에 질퍽해졌다. 청년은 오래 걸리지 않고 인차 돌아왔다. 그는 곁가지를 달지 않고 직발 필요한것만 몇가지 물으리라 결심하였다. 례의 그 청년이 자동차를 돌려세우자 한영국은 급히 달려갔다.

《대단히 속도가 빠른데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대성동 벌판길이 형편없어 차가 벌벌 깁니다.》

《한가지 더 물읍시다. 아저씨네 아버지 이름이 뭡니까? 나이는 얼마고.》

《또 심문입니까?》

《아니요, 같은 한씨기때문에 관심이 생겨서.》

《한영도지요. 올해 52살입니다.》

너무나 놀라와서 그는 손에 들었던 카메라를 툭 떨구었다.

(그럼 이 청년이 나의 조카가 틀림없단말인가. 세상에 이런 희한한 일이라구야!)

《다시한번 말해보시오. 이름이 뭐라구요?》

한영국은 청년을 덮칠듯이 몇걸음 황황히 다가갔다. 청년의 얼굴에 놀란 빛이 비껴갔다.

《한영도입니다. 열여덟살에 집을 떠났다는데 그때 집에는 어머님과 네살아래인 동생이 하나 있었다고 하나 지금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수 없다고 합니다.》

(맞구나. 틀림없어!)

한영국은 온몸이 돌덩이처럼 굳어졌다. 이것은 틀림없는 형이다. 그렇게 고대하던 형의 소식이다. 그는 《오!》 하고 탄성을 지르면서 십자를 그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자기앞에서 괴상한 표정과 손짓을 하고있는 기자의 거동이 우습강스러웠던지 청년은 《기자선생! 더 알고싶은것은 없어요?》 하고 벌씬 웃었다.

《있소.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소. 아버지 한영도는 건강한가요?》

《건강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통일되는것을 봐야겠다고 합니다. 만 50살되는 생일날부터 랭수마찰과 아침달리기를 시작했는데 효과가 좋습니다. 혈압이 정상이고 감기한번 안걸립니다. 의용군에 나올 때 한강다리목까지 따라나왔던 어머니와 동생을 만나기전에는 눈을 감을수 없다는거지요.》

이때 한남준은 할머니옷감을 가지고 가겠다고 했을 때 《그것만은 안된다. 그건 아무때고 아들인 내가 가지고가야 한다.》 하며 눈물짓던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런것까지는 말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한남준이라고 했지요? 아버지 사진이라도 가지고있는건 없소?》

《유감인데요. 그런데 그건 왜 갑자기 묻습니까?》

한남준은 기자의 말투가 순식간에 하대투로 변하며 어딘가 모르게 무척 흥분하고있는데 주의가 가서 눈이 둥그래졌다. 그 순간 한영국은 남준이, 너는 내 조카다, 한영도는 내 형이구, 한강다리목까지 따라나갔던 동생이 바로 나다 하는 웨침이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르는것을 겨우 삼키고말았다. 가슴속에서 불이 이는것 같아 숨을 제대로 쉴수가 없었다. 그는 가슴을 붙잡고 기침을 컬럭컬럭하였다. 눈앞이 뽀얗게 흐려지고 의식마저 몽롱하게 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너는 왜 사실을 털어놓지 못하느냐 하는 의문이 생기였다. 가슴속에서는 용암같은것이 솟아오르는데 그것을 한사코 눌러야만 했다. 기침을 한참 깇고나서 그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리병찬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데서 지키고있는지 알수 없다.

그는 적당한 말을 골랐다.

《젊은이! 한가지 더 묻기요. 그 집에서는 행복하오?》

《행복한가구요, 물론입니다. 대단히 행복합니다.》

《좀 자세히 설명해주시오. 모든걸 다 알고싶소.》

《당신은 지금 무부하공회전을 하고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사실을 말한댔자 당신네가 사실그대로 신문에 써낼수 있습니까? 보나마나 〈북한〉공산당이요 뭐요 하면서 우리를 걸고들고 욕이나 할 건덕지를 찾고있겠지요. 내가 평양 혁명박물관에 가보니까 일제때 〈동아일보〉라는 신문에 우리 수령님의 활동이 난것을 본 기억이 납니다. 뭐라고 했는가. 〈김일성공산군 두만강연안에 출몰〉한것도 있고 또는 〈김일성부대안에는 녀대원도 수십명〉 이런따위로 신문을 찍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정도도 못하고 〈구호물자 받되 문득 트로이목마생각이〉라고 했다던가. 또 〈북의 경제력으로 보아 일괄인도는 불가능〉 이렇게 했다면서요. 시시합니다. 진실을 말못할바에야 신문을 찍어선 뭘해요. 그렇지만 기자선생이 물었기에 답변은 해주지요.

우리 가정은 행복합니다. 우리는 행복이라는것을 짐승들처럼 배나 채우고 부화방탕하게 사는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자기 하는 일에 긍지를 가지며 래일의 희망이 뚜렷하고 하루하루를 보람있게 사는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우리 인민을 자유와 행복에로 이끌어주시는 수령님을 중심으로 단결해서 조국통일을 이룩하자고 성심성의껏 일하고있습니다. 나는 자동차운전을 하는 로동자올시다. 쇠돌을 많이 나르는것이 나의 생활이고 임무입니다. 거기에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이 있고 내가 사는 보람이 있습니다. 일이 끝나면 애인과 산보도 하고 구경도 다닙니다. 얼마전에는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우리 약혼을 축하해주셨습니다. 이만하면 행복하고 최대의 영광이 아닙니까?》

《가만, 김정일지도자께서 젊은이네를 축하해줬단말이요?》

《그렇습니다. 지난번에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우리 광산에 현지지도차로 오셨습니다. 그이께서는 우리들의 생활형편까지 일일이 물어주셨고 그날밤에 있은 제 약혼잔치에 남에서 오지 못하는 할머니를 대신해서 부총리동지가 참석하게 해주셨고 또 술과 옷감까지 받쳐 축하도 보내주시였습니다.

우리의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는 우리 인민들을 끝없이 사랑합니다. 남조선인민들도 물론이구요. 사실말이지 우리가 싣고온 구호물자도 어버이수령님과 친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 누구보다 먼저 생각하시고 친히 마련해보내주신것입니다.

기자선생! 이걸 그대로 신문에 내시오. 만약 신문에 내지 못하겠으면 당신네 식구들한테만이라도 말하시오. 무산광산 로동자 한남준이 쌀을 싣고와서 말하더라고 말입니다.》

(모를 소리다. 모를 소리야. 아무러면 한 나라의 지도자가 일개의 로동자약혼식을 축하해주시다니. 지금 이 청년은 거짓말을 해도 너무 엄청난 거짓말을 하고있다. 하지만 감히 전혀 엉뚱한 거짓말을 할수야 없지 않은가?)

《알겠소. 젊은이의 말을 참작하지. 유익한 말을 해주어 고맙소. 그런 의미에서 내가 기념으로 뭘 하나 줄테니 받아주겠소?》

한영국은 시계줄을 꺼내 한남준의 손에 얼른 쥐여주었다.

《이건 뭡니까. 시계줄이 아닙니까. 이런걸 어디에 쓴다는겁니까?》

청년은 펄쩍 뛰며 시계줄을 당장 내던질 기세였다. 그러는것을 한영국이 곁눈을 살피며 간청하듯 말했다.

《부탁이요. 쓸모없더라도 기념으로 받아다 아버지에게 꼭 전해주오.》

한남준은 무슨 사연이 있는것 같아 마지못해 그걸 받아 한번 훌쩍 추슬러보고는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한영국은 가슴을 옥죄이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머리끝이 오싹하였다. 리병찬이 띄여본것이다. 담배를 피우면서 못본척 하며 고개를 돌리고있다.

자동차에서 물러난 한영국은 리병찬에게로 다가갔다. 까짓거 이제는 엎지른 물이다. 될대로 되여라.

《좋은 세부를 쥐였는가요?》

리병찬이 능청스럽게 웃는다.

《로동자라고 하는데 고급한 정치인 못지 않은 안목을 가지고있소.》

《그럴테지요. 로동당정수분자를 뽑아 훈련을 줬을테니까. 뭐라고 하던가요?》

《사랑에 대한 심오한 철학을 풀더군.》

《넘겨준건 뭡니까?》

《그쪽에서 땅에 떨군걸 집어줬소. 라이타더군요.》

《그래요?》

한순간에 미묘한 감정이 오고갔다. 호상 의혹에 번뜩이는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때였다. 같은 또래의 안기부 요원이 달려와 리병찬을 급히 데리고갔다. 숨가쁜 순간을 용케 모면할수 있게 된 한영국은 후- 하고 한숨을 내쉬였다. 식은땀이 내돋은 이마를 훔치며 벌판 한끝을 내다보니 거기에는 고급승용차가 두어대 와있는데 리병찬따위의 사나이들 일여덟이 모여 쑤군덕거리고있었다.

리병찬은 오래지 않아 곧 되돌아왔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의 얼굴에는 아까와는 달리 징글스러운 웃음이 피여나있었다. 무슨 기쁜 일이라도 있는듯 하였다. 운명을 내건 승부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이룩한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수 있는 기고만장한 표정이였다. 또 무슨 오그랑수가 있는것이 아닌가 했는데 리병찬이 그를 손짓해 불렀다.

《한선생, 선생은 신의 조화를 믿습니까?》

벌겋게 달아오른 리병찬의 얼굴은 여전히 싱글거리고있었다. 한영국은 그가 무슨 뜻으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수 없어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자기는 기독교신자라고 대답하였다.

《하늘이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북에서 인천으로 오던 〈대동강〉호가 장산곶앞 임당수에 꼴깍했습니다.》

《예?!》

한영국은 어째선지 속이 덜컥하며 순식간에 온몸의 피흐름이 멎은듯 낯빛이 창백해졌다. 다행히도 리병찬은 자기의 들뜬 감정에 취해 한영국의 이런 심리를 미처 눈치채지 못한듯 하였다.

《병찬군, 그게 사실이요?》

《사실입니다. 방금 련락이 왔습니다. 세멘트 1만 2천t을 실은 배인데 어제밤 좌초되여 가라앉았다는겁니다. 이곳에서 흠집을 못잡으면 야단이라고 했는데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너그럽게 선손을 써서 1만 2천t의 세멘트는 받은셈치고 안받겠다고 북측에 통보했습지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알만합니까?》

리병찬의 눈가에 그에게 특유한 야릇한 미소가 물결쳐갔다. 그럴수록 한영국은 차츰 마음이 랭담해졌다.

《그래 저쪽에서는 뭐라고 했소?》

《뭐랄게 있습니까. 이제 합의된 날자까지 그걸 보충해 실어온다는것은 세상이 열두번 뒤집힌다 해도 도저히 불가능하지요. 울며 겨자먹기로 북측에서는 우리의 〈너그러운 아량〉을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게 됐습지요. 그러니 선생은 이런 사정을 알고 취재를 계속 추진시키시오. 그럼 난 바빠서··· 다시 만납시다.》

리병찬은 날개가 돋힌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어디론가 급히 사라졌다. 한영국은 무엇에 한대 얻어맞은듯 한참이나 멍청히 서있다가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었다. 도대체 무슨 갈래판인지 알수 없었다. 세상일이 얄궂기도 하고 어처구니 없기도 했다. 분단 40년만에 기적적으로 이루어진 혈육의 뉴대를 잇는 이 중대사가 뜻하지 않은 재난을 입다니··· 좌초가 사실이라면 북에서 구호물자전량을 넘겨주기는 곤난하게 됐다. 북을 지지하는건 아니지만 그걸 두고 그렇게도 기뻐하며 기고만장해 돌아가는 리병찬을 보니 구호물자를 받겠다고 하면서 오그랑수를 쓰던 당국의 더러운 속심을 들여다보며 역스러움을 금할수 없었던 때의 일이 다시금 떠오르며 이남당국자들에 대한 반감으로 피가 끓는것을 느끼였다. 한마디로 놀부의 심보라 하겠다. 하긴 이것이 이남정치체제의 생리적본태이며 생존방식인지도 모른다.

한영국은 정신이 버쩍 들었다. 한쪽 말만 들어서는 모른다. 그는 북측대표를 만나 좌초에 대한 견해와 립장을 듣고싶었다.

그는 천퉁구리를 헤쳐놓고 어루쓰다듬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속으로 뚫고들어가 얼굴이 둥글둥글하고 호남아로 생긴 북측대표 한사람을 붙들었다.

《〈동아일보〉 기잡니다. 잠간 실례하겠습니다. 한가지 묻고싶은 말이 있는데요.》

《어서 말씀하십시오.》

예상외로 북측대표는 너그러이 웃으며 취재에 응하였다. 그는 아마 지금 사람들이 감탄하고있는 천퉁구리와 관련해서 물으려는줄 아는 모양이였다.

《제가 묻고싶은건 말이지요. 방금 들은 소식에 의하면 북에서 떠나오던 배 한척이 침몰됐다고 하던데 〈대동강〉호라고 하던가요?》

북측대표는 라이타를 켜서 담배에 불을 달고나서 웃음기가 가셔진 랭담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소. 그런데 그걸 보도하려는건가요?》

《보도도 보도지만 좀 자세히 알고싶은게 있어놔서··· 그렇게 되면 예정했던 세멘트가···》

《걱정마시오. 배 한척이 어떻게 됐다구 해서 무슨 변화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건 선생의 혼자생각인가요? 아니면··· 세멘트 1만 2천t이면 적은 량이 아닌데요.》

《알고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사고가 있으리란걸 미리 예견하고 세멘트를 준비시켜놓거나 사람들을 대기시켜놓은것이 없다는것을 잘 압니다. 그리고 그 많은 량을 하루이틀내로 렬차에 실어다 항에 부리워서 배에 다시 싣는 일이 간단치 않은 일이란것도 모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구호물자 전량은 합의된대로 예정된 지점에 어김없이 가닿을것입니다. 이것은 나혼자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 북녘의 인민들모두가 우러르고 따르는 우리 당의 의사이며 우리 인민의 드팀없는 립장입니다.》

한영국은 그가 무얼 믿고 그처럼 자신심을 가지고 장담해나서는지 리해되지 않았다.

《그건 무엇으로 담보하는가요. 세멘트를 보충할 무슨 묘책이라도 세워졌는가요?》

《여보 기자선생, 당신은 우리가 벌리고있는 이 모든 사업의 맨우에 어느분이 서계시고 보살피고있는지 아시오? 우리의 이 사업을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께서 떠밀어주고계신단말이요. 그것이 우리의 담보요. 알만하오?》

《아,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그때 한영국은 자기를 바라보고있는 리병찬을 발견하였다.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등골에서 랭기가 흘렀다.

그는 인사차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황황히 자리를 떴다.

이날저녁 한영국은 대성동에서 돌아오는 길로 책상에 마주앉아 날이 어둡도록 보도기사를 썼다. 다른 두명의 기자도 같은 류의 글을 썼지만 그들은 거뜬히 원고를 편집국에 넘겨놓고 벌써 가버렸다. 한영국은 몇십년동안 기자생활을 했지만 이번 대성동에서처럼 큰 사건을 당해본적은 일찌기 없었다. 그리고 또 열댓장 갈기면 되는 글인데 그렇게 붓이 돌아가지 않는것을 처음 체험하고있다. 담배를 계속 잇대면서 썼다가는 그어버리고 그었다가는 또 쓰군 하였다. 재털이가 차서 꽁초를 틀어막을 틈도 없었다. 그는 유리재털이를 털고 또 한대 붙여물었다. 좀 늦어진다고 집에 알리니 안해는 울고불고하며 낮차로 떠나가고 아이들만이 밥을 해먹고 아버지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생각이 착잡한 가운데 그럭저럭 마감을 해가지고 편집국에 가니 당번이 기다리고있다가 원고를 읽었다. 나이로는 두세살차이뿐인데 신문기술에서는 《귀신》이라고 하는 번대머리는 몇분사이에 쭉 훑어보더니

《한영국이치고는 졸작인데?··· 내용전달은 되니까 두고가오. 그리구 또 수고해야겠소. 위스키나 한잔 하고 푹 잔담 래일 인천에서 솜씨를 보여야지 매사건건 잘할순 없지만 말이지.》

《인천으로 세멘트가 제대로 들어오는가요?》

《들어오지 않구. 휴전선을 넘어 쌀도 들어오는데 배길로 오는 세멘트가 못오겠나.》

(흠, 이 〈귀신〉은 배가 좌초된줄 아직 모르고있구나. 그나저나 인천에도 가보자. 북측사람들이 그렇게도 장담하던데 어떻게 되나 봐야지···)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온 한영국은 책상을 대충 정리해놓고 밖으로 나왔다.

거리는 여전히 번화하였다. 그는 뻐스를 탈가하다가 시간이 걸려도 걷기로 하였다. 밤거리를 걷는것은 사색할 필요가 있을 때 제격인것이다. 그는 가방을 흥청흥청 휘두르면서 어둑어둑한 골목길로 걸어갔다.

이것은 운명의 희롱이 아닐수 없다. 하루동안에 있은 일은 얼마나 공교롭고 또한 극적인가. 나는 어째서 북에서 온 쌀이 습도 15를 넘지 말기를 바랬는가. 계기바늘이 움직이기 직전만해도 랭랭한 기분이였었다. 수분이 좋으나 나쁘나 관계할바가 아니였다. 그런데 어째서 13. 5에 멈취섰을 때 야릇한 기쁨과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되였단말인가. 하긴 그 순간에 그는 정의롭고 진실한 편에 서고싶었던것만은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의 각도편차이며 그 어떤 살아 숨쉬는 싹일수도 있다. 각도편차라면 미세한 차이가 종점에 이르러 엄청난 간격을 가져올수 있고 그 무슨 싹이라고 한다면 독초일수도 있는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다고 볼수 없다. 형의 이름과 동성 동명, 의용군, 한강다리목, 4살아래인 동생, 이렇게 우연이 한군데에 집중될수 있을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우연이라고 볼수 없는것이다.

한영도는 나의 형이다. 틀림없다.

《형! 형! 같이 가자. 형! 같이 가자.》

한강다리목, 발을 동동 구르며 손을 놓지 않던 그 순간 《너 정 이러겠니, 넌 아직 어려서 못가! 내 인차 돌아올게 그동안 어머니 모시고 잘 있어 응?》 하고 타일러주며 허리춤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는 시계줄을 풀어내여 약속을 지키마고 다짐하던 형의 모습이 어제런듯 눈앞에 방불히 살아오른다. 그때 어머니는 치마자락으로 눈귀를 찍어내며 목멘 소리로 그를 달래였다.

《영국아, 이러지 말아. 어서 형의 손을 놓지 못하겠니. 영도야, 부디 몸성히 다녀오거라.》

영국은 어머니의 품에 안겨 떼를 쓰며 발버둥쳤다.

《엄마, 나두 갈래! 나두 갈래! 형, 나두 군대 갈래!》

아, 그때 한강 다리목에 메아리쳐가던 그 안타까운 호소, 그런데 그 리별이 어언 30여년이 흘러 판문점에서 조카와의 뜻깊은 상봉을 맞게 될줄이야··· 설사 신의 조화라 해도 요렇게 만들지는 못할것이다. 한남준이란 청년의 눈길, 그것은 틀림없는 형의 눈길이였다. 《나는 행복합니다.》 할 때 그의 눈은 밝은 빛을 발산하고있었다. 긍지와 자부심이 온몸에서 넘쳐흐르고있었다. 그 청년의 말이 사실이라면 북은 완전히 령도자와 인민이 하나로 뭉쳐있다는것을 의미한다. 김정일지도자에 대해 자랑스럽게 말하는 그 청년의 감정은 구김살이 없고 진실하였다.

《아! 이런.》

한영국은 고개를 들었다. 맞받아오던 자기또래 양복쟁이가 충돌을 피하며 손을 내대였다.

《미안합니다.》

그는 건성 인사를 차리고 또 같은 모양으로 걸어나갔다.

《형! 형은 잘 갔는지도 모르겠소. 인간의 가치를 귀중히 여기는곳이라면 단 하루를 살아도 여한이 없는것이요. 어머니와 동생을 보지 않고는 눈을 감을수 없어 랭수마찰을 하며 달리기를 한다구요?》

한영국은 옆에서 알아들을수 있을만치 혼자소리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있었다.

《그런데 나라는 인간은 한남준이 내 조카가 틀림없다는걸 알고서도 안부 한마디 전하지 못했소. 내가 너희 아버지가 자나깨나 잊지 못하는 그 동생이다. 한강다리목까지 따라나간 그 동생이라고 끝내 말을 못했단말이요! 형, 용서해주오. 이 못난 동생을.》

그는 걸음을 멈추고 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눈물은 하염없이 흘렀다.

《아! 이 고통을 이대로 안고 살아서는 무엇하는가.》

고가도로에 나서자 그는 걸음을 멈추고 좌우를 살피였다. 고층건물이 렬을 이룬 남대문앞거리였다.

크고 요란하게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위엄을 느끼게 하자는 의도가 력력하나 통채로 썩고 병든 서울이며 림종을 향해 달리는 남조선의 모습인것이다. 허위, 기만, 부정의가 홍수처럼 범람하는 땅이다.

그는 한강쪽으로 나가는 뻐스에 올랐다. 밤이 깊다보니 통근뻐스도 한결 헐그러워졌다. 한강이 저쯤 바라보이는 정류소에서 훌쩍 뛰여내린 그는 얼마간 걸어서 다리어구까지 나갔다. 이제는 지형이 너무 변해 알수 없었다. 그때는 《국군》이 남으로 내뛰면서 다리를 폭파해버렸기때문에 중간이 끊어져서 자동차는 다니지 못하고 사람들만 엉성하게 이어놓은대로 밟고지나군 하였다. 형은 이 어방에 와서 결정적으로 헤여지자고 했던것이다.

그는 컴컴한 발밑을 더듬어보았다. 아스팔트포장이 떨어져나간 바로 그 웅뎅이에 런닝그바람인 자기 한영국이 서있었고 그옆에 한평생 자기 체적을 줄이기에 시달렸던 어머니가 불안스레 서있었다.

형이 저쪽으로 사라져갈무렵 그는 발돋음을 하고 손을 흔들었다.

《형!》

저쪽에서도 《영국아!》 하며 손을 흔들었다.

《형! 약속 지켜야 돼! 이거.》

그는 시계줄을 흔들면서 더 크게 소리쳤었다.

부지중 바로 그때의 그자리에 선 한영국은 《형! 약속 지켜야 돼!》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한가닥 메아리도 일구지 못한채 고함소리는 텅빈 공간으로 자취없이 사라지고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