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6

 

제 4 장

6

 

적십자종합병원구내에 있는 소공원이였다.

최성덕은 단풍나무밑을 천천히 거닐고있었다. 간밤에 비를 흠뻑 맞아 더욱더 붉어진 나무잎은 아침해빛을 받아 손이 닿으면 물이라도 들것처럼 보였다. 공원안 여기저기 드문드문 놓인 장의자에는 환자들이 혼자서 혹은 둘셋씩 앉아서 조용조용히 이야기들을 나누고있었다.

최성덕은 홀로 나무밑을 거닐며 깊은 사색에 잠겨있었다. 평양에 처음 들어서는 날 우연히 이전에 취장염을 앓았던적이 있다고 한마디 흘린것이 언질이 되여 벌써 이틀째나 발목이 묶이여 병원울타리안에 갇히게 된 최성덕이다. 물론 지난 이틀동안을 허송세월로 보냈다고는 할수 없었다. 그제 오전에는 실험검사에 응하고 오후에는 윤숙경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 가벼운 움직임같은것은 허용이 되여 어제는 평양에서 이름있는 참관대상이라는 주체사상탑과 개선문, 만경대 등을 가보았다. 그 이틀동안의 참관에서 얻은 느낌은 총괄적으로 자기가 차츰 그 어떤 미궁속에 깊이 빠져들어가고있다는것이다. 그 미궁은 칸도 많고 칸마다 각기 제나름의 특징들이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부닥치는 사실마다 모두 상상외로 리상적인 수치에 도달해있었다. 이 별세상에서는 거지와 실업자를 볼수 없고 또 그런가 하면 호화찬란한 기생충인간의 생활도 볼수 없었다. 이 별난 《북한》사회에서는 교육과 병치료, 세금의 부담에서 모든 사람들이 완전히 해방되였다. 젊은 사람들은 학비요, 입원료요, 세금이요 하는 어휘조차 모르는 형편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러한 제도, 이러한 체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는것은 알길이 없다. 그건 그렇다치고.

《우리에게 온 손님은 우리 나라를 벗어날 때까지 우리가 건강을 책임지게 됩니다.》

려관진료소 녀의사가 무심히 흘리는것 같던 이런 말이 이 적십자병원 사람들에게서도 흘러나왔다.

어쨌든 잠간 머리가 아찔했던것이 계기가 되여 치명적인 병을 안고있는 환자로 인정되여 《건강을 책임진다》는 사람들에게 잡혀 여기까지 《끌려》와서 복잡한 문진을 당하고 혈액을 뽑히우고 갖가지 전자기구의 실험대상이 된것이다. 지어 치아가 80프로이상 병들어 썩었기때문에 마저 빼치우고 틀이를 하자고까지 권고한다. 이들의 친절성이 선천적일수는 없을것이다. 하다면 대체 이 친절한 봉사와 성의있는 치료의 저의는 무엇인가.

이런것이 나하나에 국한된것인가. 아니면 그 누구에게나 모두 일반적으로 해당되는것인가?

아무튼 최성덕은 자기의 건강을 《책임진다》는 고마운 사람들에게서 한시바삐 벗어나 자기의 이북방문의 첫번째 목적인 부친의 성묘부터 추진하고싶었다. 부친의 묘가 평양교외의 어디인가에 있기는 있다는데 그것이 사실이기나 한지? 인생말년의 아버지는 공산치하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으며 사후의 아버지는 과연 여하한 대접을 받는지?

최성덕은 이런 식으로 종잡을수 없고 끝을 볼수도 없는 어수선한 생각에 잠겨든채 소공원의 숲속길을 호젓이 거닐었다.

그럴 때 오른쪽 포장길로 담당의사 양학선이 다가오고있었다. 나이는 아직 40도 되지 않았다는데 머리가 많이 벗어져 50이 다된것처럼 보이는 침착하고 상냥한 중년의 사나이였다. 그는 하루에 한번씩 진찰을 하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무시로 찾아오기도 하고 또 만나는 기회마다 몸에 이상이 없는가 묻군 하였다.

《최성덕선생!》

가까이 온 그는 다정하게 팔을 잡아주며 물었다.

《기분이 어떻습니까? 바람 쏘이려 나오신걸 보면 짐작이 가긴 합니다만 건강상태는 기분에 제일 민감하게 반영됩니다.》

《보는바와 같습니다.》

최성덕은 머리를 숙여 례의를 표시하면서 웃어보였다.

《참말 다행입니다. 취장이란 맹랑한것이 돼서 평상시에는 어데 붙어있는지 알지도 못하다가 일단 탈이 생기면 말썽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니 내가 귀인을 만나서 무사히 넘기는가 봅니다.》

《웬걸요. 병은 어디까지나 환자자신이 잘 해야···》

《감사합니다.》

《그럼 편히 안정하십시오.》

양학선이 그곁에서 물러나려고 할 때 어데선가 《아버지!》 하는 야무진 어린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성덕이 고개를 돌리니 등뒤쪽에서 두 어린애가 총알처럼 날아드는것이였다. 좀 큰것은 예닐곱 났을 처녀애이고 그보다 작은것은 깡뚱한 반바지를 입은 네댓살되나마나한 사내애였다. 두 아이는 양학선의 허리를 그러안기도 하고 팔에 매달리기도 하면서 제각기 좋아서 깡충깡충 뛰였다. 아이들에게 붙잡힌 양학선은 벙글벙글 웃으며 우선 사내아이를 닁큼 들어 가슴우까지 올리였다. 그러는 사이에 처녀애는 아버지의 다리를 붙잡고 빙글빙글 돌았다.

《아버지, 왜 집에 안왔나요?》

사내애가 목을 안으며 물었다.

《응! 바빠서.》

《누나랑 우리 기다렸는데.》

《그래, 아버지 바쁜 일이 있어서 못갔다. 오늘은 가겠다.》

그때 처녀애가 아버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아버지! 아버지!》 하고 불렀다. 그런후에 처녀애는 《우리 그그제밤에 지도자선생님의 차를 타고 엄마한테 갔댔다.》하고 말하였다.

《아니 뭐? 지도자선생님의 차? 너 거 무슨 말이냐?》

《아버지! 정말이야. 지도자선생님께서 경남이하구 나하구 차에 태워서 엄마 직장까지 갔댔어.》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든 양학선은 두 아이를 앞에 세워놓고 차근차근 묻기 시작하였다. 처녀애는 엄마가 오지 않아 뻐스정류소에 마중나갔다가 공장에까지 갔다온 이야기를 하였다. 양학선이와 함께 처녀애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고있던 최성덕은 커다란 의문에 질리였다.

《양선생! 한가지 물읍시다.》

최성덕이 장의자에서 일어나 아이들쪽으로 몇걸음 나서며 말을 이었다.

《이애들이 말하는 지도자선생님이라는분이 김정일, 그분을 말하는게 아닙니까?》

《옳습니다.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최성덕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껏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후 양학선은 아이들을 데리고 소화기병원쪽으로 멀어져갔다. 다시 혼자 남은 최성덕은 장의자앞을 천천히 거닐었다. 그는 너무나도 놀랍고 지어 신기하기까지 한 사실에 직면하고나니 가슴이 몹시 들먹거리였다. 자기가 듣기에는 김정일, 그분은 항일명장이며 불세출의 위인이신 김일성주석님의 위업을 계승하여 북부조국의 집권당과 나라를 다스리는 범상치 않은 지도자이시다. 그렇게 높고 귀한 나라님이 무릇 길가에서 비를 맞는 평민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전용차에 앉히고 제 어미곁에까지 데려다주시였다니 믿을래야 믿기 어려울만치 놀라운 사실이였다. 이런 일이 다른 나라, 다른 세상에서는 있을법이나 한가? 이야말로 이 별세상에만 있는 특이한 현상이 아니겠는가. 양선생도 놀라기는 했으나 그것을 신기하거나 불가사의한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 선생의 놀람은 갑자기 닥쳐든 행복에 대한 폭발적인 기쁨일따름이였다. 그러니 여기서는 이런 일이 흔히 있을수 있는 범상한 현상으로 된것이 아닌가!

최성덕은 문득 쌘프랜씨스코에 있는 리봉호가 남조선의 육아원아이들을 비행기로 실어다가 미국에서 팔아먹고있는 사실을 보고 민족적 수치와 격분을 참지 못해하던 일이 되살아올랐다.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등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리였다. 피끗 돌아다보니 윤숙경이 급히 걸어오고있었다.

최성덕은 마냥 반가와 손을 내밀고 마주 걸어나갔다.

《선생님, 미안하게 됐습니다. 아침 일찍 온다는게 글쎄 도로가 막혀서 한시간이나 기다리다가 먼데를 에돌다나니···》

《미안하다니 원 무슨 말씀을?! 또 이렇게 찾아봐주는 성의에 감사하기만 한데요. 그런데 오다가 도로가 막혔다니 거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요?》

《네, 오늘 구호물자를 실은 자동차행렬이 판문점을 향해 평양을 떠나게 된다나봐요.

그 자동차들이 지금 김일성광장에 집결하느라고 사처에서 광장으로 몰려들고있더군요. 그때문에 한참 길이 막혔댔어요.》

《그래요? 자동차가 수백대 잘되였겠습니다?》

《광장과 그 주변의 대통로에 꽉 들어찼더군요.》

《그 참 장관이겠구만요?》

《볼만해요. 벌써부터 수만명의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답니다.》

최성덕의 가슴속에서는 무어라 형용할수 없는 미묘한 호기심이 회오리쳤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가볍게 롱담했다.

《헌데 부인은 눈등이 부석부석한걸 보니 잠을 좀 설친것 같군요. 혹시 주인장께서 손님을 대동하구와서 늦도록 약주를 하신건지 아니면 새 손자나 손녀를 보는 경사라도 생긴건지? 허허, 이거 미안합니다. 주책머리없이 롱담이 지나쳐서.》

《괜찮습니다. 그런 일로 볶이우는건 로년기에 행복한 사람들이지요. 저한테는 그래줄 사람들이 없답니다.》

눈으로는 웃고있었지만 윤숙경의 가슴에서는 피방울이 돋고있었다. 최성덕은 롱하지 말았어야 할 상대에게 눈치없는 말을 한것 같아 재빨리 화제를 돌리였다.

《소인은 어언 나이 70이라 아무런 결실도 없이 한생을 헛되이 살며 보람없게 늙기만 했은즉 이제나마 할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부친의 령전에 엎드려 명복을 비는 자식된 도리뿐이라 그것마저 못하고말가봐 두려웠소이다.》

《그 심정이 리해돼요. 어느 한 시인은 〈개화결자 60세〉라 일렀는데 저 역시 열매를 맺지 못한채 시들고있는 꽃처럼 세상나서 해놓은 일이 별로 없답니다. 그런 점에서 선생님과 저는 엇비슷한 신세군요.》

《아하!》

최성덕은 가슴이 텅빈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나서 그는 윤숙경을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나같은 경우는 개화결자가 없지만 부인이야 여기서 살고있다는것자체가 결자가 아닐가요?》

《아닙니다.》 윤숙경은 도리머리질을 하고나서 뒤를 이었다.

《나의 결자는 식의주걱정없이 편안히 사는것이 아니라 두동강이 난 우리 조국을 통일하는것이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아무런 결실이 없잖습니까. 보십시오. 그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가. 재난을 입은 동포에게 구호물자를 보내는것마저 얼마나 힘들게 보내고있습니까? 참 시간이 너무 지체되였군요. 이제는 떠나보지 않겠습니까?》

《그럽시다. 그런데 부인, 저의 청을 한가지 들어주지 않겠습니까?》

최성덕은 신중한 기색으로 녀인을 마주보았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나를 광장에 좀 안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내 눈으로 구호물자를 실은 자동차수송행렬을 보고싶습니다. 별스러운데 관심이 있다 하겠지만 혹시 〈개화결자 70세〉가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렇게 합시다. 잠간만···》

윤숙경은 진찰결과를 알아보기 위해 의사실에 들렸다가 인차 돌아나왔다. 취장염은 만성화되여서 당장 구급대책을 취하지 않아도 되며 심장은 신경성초기이기때문에 본인이 주의하고 구급약을 가지고다니면 되겠다는 의사들의 말을 전해듣자 최성덕은 천만다행이라고 기뻐했다.

얼마후 승용차에 앉은 그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김일성광장을 향했다.

최성덕은 병원에서 풀려나온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여겼다. 어찌어찌하여 열흘이나 보름쯤 병원에 붙잡혀 아까운 기일을 허비할수도 있는것이다.

김일성광장입구에서 차를 내린 최성덕은 사람들틈을 비집고 화물자동차가 꽉 들어찬 광장복판으로 들어갔다. 여느때는 정도이상 침착하고 조심스럽던 그였는데 완전히 딴사람처럼 행동하였다.

광장 량기슭에는 군중들이 발들여놓을 틈도 없이 모여섰지만 자동차를 세운곳까지는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런 질서에는 아랑곳않고 최성덕은 앞에 서있는 자동차에 무작정 접근해갔다.

《여기에는 무엇을 실었습니까?》

그는 차창유리를 닦고있는 운전수청년에게 물어보았다. 청년은 걸레질을 하다말고 그를 돌아보더니 최성덕의 류다른 옷차림에 약간 의아해하며 슬며시 발판에서 내려섰다. 윤숙경이 미국에서 온 동포라고 그를 소개하였다.

《아, 그렇습니까. 반갑습니다. 이건 쌀입니다. 남조선리재민들에게 보내는 쌀이지요.》

《그래요?! 구호물자를 싣고가게 돼서 기쁘겠습니다.》

《네, 정말 기쁩니다. 하마트면 구호물자수송대에 끼지 못할번했는데 끝내 끼여들어 운전대를 잡았거든요. 정말 꿈같습니다.》

청년은 노상 싱글벙글하며 자랑하지 않고서는 못견디겠던지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저는 워낙 무산광산 운전수인데 이런 행운을 얻었단말입니다.》

《그럼 그녁은 평양사람이 아니구요? 그러니 이번 수송대는 전국적으로 선발해온 운전수들로 꾸린건가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지방사람으로 수송대성원에 끼인건 아마 나 하나뿐일겁니다. 수해를 입은 남조선사람들에게 구호물자를 보낸다는 보도를 듣고 나도 운전수인데 왜 내가 차를 몰고가면 안되겠는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평양에 달려올라와 구호물자를 싣고가게 됐다는 자동차사업소로 달려갔더니 어림이나 있습니까. 딱 잘라매더란맙입니다. 나같은 지망자가 하루에도 몇십명이 넘는데 청원하는대로 다 받다가는 사람사태가 난다는거지요. 숱한 기관을 찾아가 열렬히 호소했지만 이가 들지 않더군요. 하는수없이 나중엔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를 모시고 우리 무산광산에 내려왔다가 내 약혼식에 참석해주었던 부총리동지를 찾아갔습니다.》

《누구라구?》

거침새없이 흘러나오는 청년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있던 윤숙경이 놀란 표정을 짓고 그를 바라보았다.

《고윤학부총리동지말입니다.》

《그래 만났어요?》

《정문에서 딱 자르더군요. 용무가 뭐냐고 묻는데 얼른 대답할 말이 떠올라야지요. 그렇다고 개별용무로 왔다면 못만나게 할것은 뻔하고. 그래서 큼직하게 조국통일문제를 가지고 토론할 일이 있어 왔다고 했지요.》

《그래서?》

《그 말을 듣더니만 곱사랗게 생긴 접수원처녀가 미심쩍어하면서 전화를 했는데 웬걸 제꺽 승인이 되고 부총리를 만나 오늘 이 대렬에 끼이게 됐습니다.》

《하하하.》

《호호호.》

최성덕과 윤숙경은 동시에 소리를 높이 웃었다. 한남준은 제딴에도 쑥스러웠던지 뒤덜미를 긁적거리며 벌씬벌씬 웃었다. 천진하면서도 소박한 청년의 모습이였다.

《어떻습니까. 윤선생, 믿어야겠지요?》

《믿으십시오. 부총리도 인민의 충복이라는 점에서는 다른 사람과 같으니까요.》

《아하, 그렇습니까!》

최성덕은 고개를 연방 끄덕이였다. 여기 생리는 이렇게 되여있는것이다. 한집안식구처럼 모두 어울러져있고 정이 통해있는것이다. 이것이 이북정치이며 이 정치는 권력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인간의 정이 오가는 인정정치라고 볼수 있는것이다.

《그럼 그 쌀을 좀 보여줄수 없겠나요?》 최성덕은 근엄해진 얼굴로 한남준을 쳐다보았다.

《어서 보십시오. 우리 이 줄까진 쌀이고 저쪽에는 직물, 또 저쪽에는 의약품을 실었습니다.》

한남준은 로인의 한쪽손에 들린 카메라를 여겨보면서 화물차뒤문을 절컥 열어제끼였다. 적재함우에는 쌀포대가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최성덕은 고개를 끄덕이고있다가 잘 보았노라고, 감사하다고 하였다. 문을 닫으려고 하자 그는 《잠간.》 하고 손을 들었다. 한남준이 문짝을 들어올리다가 손을 멈추었다. 그러자 최성덕은 적재함바닥에 몇알 널린 쌀알을 손가락끝으로 모으더니 그것을 자기가 가져도 좋은가고 물었다.

《좋습니다. 얼마든지.》 한남준은 발돋움을 해서 멀찍이 널린 쌀알까지 모아 주글주글한 로인의 손에 쥐여주었다.

최성덕은 눈을 쪼프리고 자기의 손에 쥐여진 쌀알들을 그 무슨 보물마냥 여겨보았다.

《쌀알들이 솜싸라기처럼 눈부십니다! 이거야말로 선전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지요!》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윤숙경이 물었다.

《나는 워싱톤을 떠나 이리로 오는 도중에 비행기안에서 남조선신문 몇장을 본 일이 있습니다. 북에서 남으로 보내자는 구호물자를 두고 그 신문들에서는 뭐라고 썼는지 압니까? 〈전량 9월중인도는 불가능, 북조선 경제력 감당못해.〉, 〈정치적선전기도 백일하에 빵짝나.〉 제목만 해도 이쯤 붙였으니 그 내용이야 짐작할만하지요. 그런데 사실은 어떻습니까? 평양에서 서울로 구호물자의 〈홍수〉가 분계선제방을 허물어뜨리며 밀려나가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거야말로 엄연한 현실이지요.》

그는 두손을 들어 《홍수》가 밀려나가는 형용을 하면서 말을 맺었다.

《평양에서 하는 주장이 선전이 아니라는것을 이보다 더 훌륭히 실증할수 있습니까.》

최성덕의 대머리진 정수리에 해빛이 비쳐 뭇사람들속에서도 눈에 띄게 두드려졌다. 윤숙경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였다.

《선생이 실지 당해보신게 다행입니다. 워싱톤에서 텔레비죤으로 이 장면을 보셨더라도 아마 선전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실테니까요.》

《그 말이 옳습니다.》

최성덕은 아픈 마음으로 수긍하고나서 쌀알을 손수건에 정히 싸서 양복주머니에 넣었다.

이윽하여 자동차행렬은 바줄이 풀려나가듯이 장사진을 이루어 평양거리를 빠져 남으로 뻗은 고속도도로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