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2

 

제 4 장

2

 

워싱톤이다.

이곳 거리형성은 다른데 비해 특이한 점이 있다. 캐피폴의 언덕을 중심으로 바둑판처럼 금을 그었다. 동서로 나가면서는 1가, 2가, 3가 즉 아라비아수자로 나누고 남북으로 금을 그어서는 A가, B가, C가로 알파베트순으로 나갔다. 그리고 거리복판에 8개의 대통로가 뻗었는데 그것을 갈라 펜실베니야거리, 뉴욕거리 등으로 련방주의 이름을 달았다.

지하철을 타고 동북간으로 뻗은 종점에서 빠져나오면 번화가에서 썩 벗어난 조용한 주택거리에 이르게 된다. 여기를 두고 여기 사람들은 《푸른거리》라고도 한다. 그것은 여기에 숲이 우거진 공원이 있기때문이다.

최성덕은 석양이 비낀 《푸른거리》의 한적한 길을 걷고있었다. 그는 매일 이맘때면 번지지 않고 정향나무숲속길을 거닐었다. 코가 시릴만치 맑은 공기와 쏴쏴 울리는 바람소리가 좋았다. 싱그러운 숲의 향기는 그의 기분을 마냥 상쾌하게 해주었다.

흰 바탕에 푸른 띠를 두른 운동화, 팽팽하게 만들어입은 밤빛바지, 실내와 야외 겸용으로 입을수 있는 회색잠바들은 70을 갓 넘긴 나이에 비해 그를 퍽 젊어보이게 하였다. 그래도 거지반 다 벗어진 머리며 듬직하고 여유있는 몸가짐은 정계와 군부의 세파속에서 세련된 그의 인품을 잘 나타내고있었다.

그는 골프장을 끼고들면서 팔을 휘둘러보기도 하고 목을 돌려도 보고 또 허리도 죽신죽신 늘궈놓기도 하였다.

얼마쯤 가다가 다리를 건너 숲에 이르게 되였을 때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벌써 9월도 중순을 넘기였는데 왜 아직 소식이 없을가 하고 생각해보는것이였다. 금테안경을 낀 얼굴에 긴장이 살짝 어리면서 걸음이 떠졌다.

그에게는 9월달을 넘기지 말아야 할 두가지 중대한 용건이 있었다. 그것은 두가지 다 자기 생활에 결정적의의를 가지고있는것으로서 어느 하나 무심히 대하거나 방임해버릴수 없는것들이였다.

우선 조바심이 생기는것은 이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입국사증을 신청한것이였다. 신청서를 제출했을 때 시청의 외사부관리는 9월초에는 회답을 받게 될것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초순이 아니라 중순도 다 넘긴 오늘까지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또 하나는 도꾜에 있는 옛친구 안재수가 이달안으로 찾아오겠다고 해서 기다리는데 아직껏 나타나지 않는것이다. 그가 무슨 일로 갑자기 찾아오겠다고 하는지 그 리유는 알수 없었다. 그는 편지에서 이번의 자기 행차가 최성덕의 인생행로에서 키를 돌리는 정도로 의의가 있을것이라고 썼을뿐이였다.

최성덕이 산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식탁에 앉았을 때 안해 류보영이 라지오로 들은 소식을 알려주었다.

《북조선에서 남조선에 구호물자를 보내주겠다고 한것은 순전히 정치선전이였다는군요.》

《누가 그래?》

《누군 누구겠어요. 〈케이. 비. 에스〉지요. 그저께 18일에 판문점에서 회담이 있었는데 북에서는 넘겨줄 능력도 없고 의사도 없다는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다는거죠. 회담에서 말이 막히니까 북측대표는 먼저 퇴장을 했다는거예요.》

《그건 남쪽에서 해대는 소릴거고. 북쪽중앙방송은 뭐라고 했소?》

《안들었어요. 들으나마나 이쪽과는 정반대겠지요뭐.》

《아니 여보, 한쪽 말만으로는 송사 못한다는 말도 있는데 당신은 정말.》

최성덕은 식탁에 놓인 《워싱톤 포스트》지를 집어다 와락와락 펼치며 안해를 몰아주고있다.

《방송이나 신문따위로서는 사태의 진속을 알수 없다는것쯤이야 당신도 알지 않소?》

그는 큰 제목활자를 대충 훑어가면서 말하였다.

《그러나 거기에 몇가지만은 명백한것이 있기는 하오. 남조선일대에 수해가 있었다는것. 그것때문에 북조선에서 구호물자를 보내주겠다고 제기한것, 그밖의것은 아직 미지수이나 결과는 뻔하오. 북에서는 주겠다고 할거구 남에서는 안받겠다고 할것인즉 입씨름이나 하다 말겠지. 행여나 해서 귀가 솔깃했다가 그저 속아넘어가는건 국민들뿐이요.》

《정말 당신은》하고 안해는 두부국을 공기에 떠내놓으며 눈을 이쁘게 흘긴다. 《그 회의주의에서 언제나 빠져나올수 있겠는지 모르겠어요. 그렇지 않고는 어데도 지탱 못하고 안개속을 방황하는 그 넋을 깃들일데를 찾지 못할겁니다.》

《아니 뭐?》

최성덕은 신문을 든채 눈살이 꼿꼿해져서 안해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둥글고 사색적인 눈을 가진 류보영은 신문을 뺏으며 포크와 나이프를 돌려놓아준다.

《어서 드세요. 시장하시겠어요.》

최성덕은 하는수없이 안해의 요구에 응하는수밖에 없었다. 미국으로 건너온후 늙은 내외가 고독하게 살아가면서부터 그에 대한 안해의 관심은 각별히 다심해졌는데 그걸 긇다고 나무랄수도 없었던것이다.

《여보! 이걸 보오.》 최성덕은 한쪽에 던져진 신문장을 다시 집어들고 말을 걸었다. 《오래간만에 〈한국〉소식이 하나 났소. 쌘프랜시스코에 있는 리봉호씨가 운영하는 〈한국〉인 구호회에서 고아들을 데려온다고 했소. 〈한국〉고아를 미국사람들이 양육하겠다는 신청이 있다는군. 24일에 공항에 도착한다고 했소.》

이때 전화종이 울렸다. 류보영은 사뿐히 자리를 떠서 수화기를 들었다.

《네! 여기 최성덕이네 집입니다.》

최성덕은 포크를 덜컥 놓더니 고개를 돌리였다. 영어가 아니고 모국어로 대화를 하게 된다는것이 이집에서 하나의 사변이 아닐수 없는것이다. 뒤미처 류보영이 놀라는 소리가 방안을 울리였다.

《안재수선생이예요? 아유, 얼마나 기다린다구요. 네, 계셔요. 내 바꿔드릴게요. 잠간.》

류보영은 빛나는 눈으로 남편을 쳐다본다. 최성덕은 후둑후둑 뛰는 가슴을 붙잡고 탁자앞까지 걸어가더니 덮쳐잡듯이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최성덕이네!》

《안재수가 왔습니다. 련대장님!》

귀에 익은 목소리가 틀림없는 안재수였다.

《편안하셨소. 안! 야스가와상!》

최성덕은 대범하게 말하건만 소리는 갈리였다.

《래일오전에 날아가겠습니다. 그때 이야기합시다. 그럼 되지요. 련대장님!》

《옹색하게 왜 자꾸 련대장님이라구 그러나. 고망년때의 칭홀 가지고.》

《백년이 가면 뭐랍니까? 내 얼마전에 서울갔다가 물란리를 만나 죽다 살았습니다. 본것 들은것 다 말하지요.》

《그건 그렇고 위는 일없는가?》

위라는것은 그들간에만 통용되는 장사리속, 이를테면 리윤상황을 비유해하는 말이다.

《위는 좋으니까 여기까지 온게 아닙니까. 제 래일 거기 워싱톤으로 날아가지요.》

《가만, 떠나느라 하지 말고 내가 쌘프랜씨스코에 갈 때까지 기다리라구.》

그것으로 그들의 대화는 끝났다.

잠시동안에 늙은 부부는 기분이 들떠버리고말았다.

이번까지 하면 안재수가 미국땅에 나타나기가 세번째이다. 맨처음은 박정희의 압력에 못이겨 최성덕이 여기 아메리카로 건너왔을 때 생활안정을 도와주기 위해서 왔었고 그다음은 최성덕이 급성취장염에 걸려 생명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받고 달려왔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슨 용무로 찾아오는가.

이튿날 최성덕은 쌘프랜씨스코로 갔다. 안재수와 함께 재미《한국》인자선사업을 한다면서 뛰여다니는 리봉호도 만나야 하였다.

호텔에 들어서니 안재수는 현관에서 기다리고있다가 맞아주었다. 굳게 포옹하였다. 머리카락이 다 없어졌거나 모두 희여버린 그들은 눈물이 글썽해져서 두번세번 거듭 볼을 비벼대였다. 몇해전에 본 인상을 상기해보면 안재수는 이미 일본사람이 다 되여버리였다. 태반이 일본말이였는데 약간 조선말과 영어가 섞여있었다. 몸차림이나 체취도 일본사람이였다. 그러나 최성덕은 그와 대조적으로 조선말에 간혹 영어가 끼였는데 그것마저 매우 서툴었다. 인사를 나눈 그들은 안재수가 들어있는 호화로운 방으로 들어갔다.

《안형! 어떻게 이렇게 날 또 찾아왔소?》

다른 때같으면 이런투로 묻지 않아도 성급한 안재수는 벌써 속심을 다 드러내놓았을것이였다.

《허허, 조급해 마시오. 차츰 이야기하지요.》 하고나서 그는 이달초에 서울에 갔던 이야기를 꺼내였다. 《온 한국천지가 물란리를 겪고있습니다. 간데마다 수재민들이 우글거리고있지요. 그런 판인데도 전두환〈대통령〉은 일본에 건너와 히로히도를 만나 정담을 벌리고요. 돌아가는 말을 들으면 그의 행각은 자기 몸값을 구걸하는거라고 합디다. 이남민중은 그걸 한사코 반대해 왁짝 떠들고 그런 판에 북에서는 구호물자를 보내주겠다고 했다는겁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설상가상으로 수재는 수재대로 처리난인데 이북의 선전공세때문에 애를 먹고있습니다. 참말 리해할수 없는 일입지요. 우리 장사군들의 계산법에 의하면 구호물자를 주겠다면 아, 그렇소, 미안하오 하고 받아먹으면 되겠는데 쌀에도 정치가 있다, 직물에도 주의가 묻어온다, 세멘트도 폭발물과 같다 이러면서 야단이 아닙니까. 결국 보면 정치란것도 우리 상업론리와 마찬가지로 맨 밑바닥에는 속임수라는 요술이 깔려있습니다. 그래서 이남은 지금 란장판이지요. 심지어 전두환은 이번 기회에 북에서 남침할 위험이 많다면서 계엄령을 내리고 하루건너 반상회를 열게 하여 반공선전을 합니다.》

별로 반응이 없게 되자 안재수는 말할 흥미를 잃어버리고말았다. 최성덕은 이미 라지오를 통해서 들은것인데다가 능히 추측할수 있는것들이여서 상대방이 만족할만 한 반응을 보일수 없었다. 더구나 그는 부러 바다를 건너와서까지 의논해야 할 용무를 깊숙이 묻어두고있기때문에 그 어떤 놀라운 사건이라고해도 귀를 기울일만한것이 못되였다.

승용차에 앉아 그들은 곧 공항을 향해 달리였다. 등받이에 기대여 편안히 앉은 최성덕은 색안경을 거쳐서 안재수를 쳐다보고있었다. 왜 그런지 이전과 같지 않았다. 무엇인가 불투명한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 안재수의 래방리유는 무엇이겠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최성덕의 모습을 지켜보던 안재수는 그의 무릎을 흔들며 넌지시 말을 건네는것이였다.

《이전부터 느끼고있는것이지만 최형은 인정이 매우 뜨겁습니다. 군인답지 않게 말입니다. 먼길을 마다 않고 친구의 자선사업을 고무하기 위해 이렇게 걸음을 걷고있으니 말입니다.》

《인정이라구?》하고 최성덕은 어색한 낯을 지었다. 《그건 정말 잘못 보았소. 나로 말하면 인정이 메마른 목석같은 인간이지요. 사실 부끄럽소. 속을 털어놓는다면 나는 정의로운것에 주린 인간이 아니겠소. 가만 생각해보니 이 세상에는 부정의와 부조화가 판을 치고있는 암흑세계이지만 그속에서 아직 꺼지지 않고 깜박이는 정의의 불꽃이 한점 있더란말이요. 그것이 바로 리봉호씨가 하고있는 그런 일이라고 보고있지요. 사회에서 어찌어찌해서, 결국 불의에 의해 고아라는것이 생겨나는것인데 그것을 구제한다는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더구나 그것이 우리 한국사람들에 의해서 이룩된다고 하기에 축하할만 한 일로 보았던거지. 리유는 그것뿐이요.》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불의의 바다속에서 깜박이는 하나의 불꽃, 마치 시인의 목소리같습니다.》

차는 어느덧 공항대합실 층계앞에 멎었다. 손님들이 많았다. 귀청을 자극하는 강한 금속성이 머리를 흔들어놓는것 같이 울리였다. 활주로에서는 연방 비행기가 떠오르기도 하고 내려앉기도 하였다. 온 대합실이 하나의 공명통이 되여 고성기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울려놓고있다. 나들문쪽에 이르니 손님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나오는중이였다. 눈을 들어 내다보니 렬의 맨 꼬리에 쪼무레기아이들 10여명을 인솔한 리봉호가 눈에 띄였다.

잠시동안에 손님들이 다 빠지자 리봉호는 동행하는 녀인 하나와 함께 아이들을 닦아세우며 다가왔다.

《리봉호씨! 수고하시는군요.》

최성덕은 못내 기쁜 마음으로 고함을 질렀다. 너무나 뜻밖이여서 잠간 어리둥절해졌던 리봉호는 손을 흔드는 최성덕을 알아보고 급히 달려왔다.

아이들을 내버리고 새치기를 해서 먼저 빠져나온 리봉호는 최성덕의 가슴에 덥석 안기였다. 마치 그 장면은 영원히 만날수 없을것으로 작별했던 사람들이 만나는것과 비슷하였다.

《참말 수고했소. 부럽소. 인간을 위한 자선이니 얼마나 좋은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최성덕의 말이였다. 뜻밖에 친구의 마중을 받았고 겹쳐서 분에 넘친 치하에 리봉호는 눈물이 글썽해지기까지 하였다.

《아주 꺼지지 않고 깜박이고있군 그래.》

최성덕은 혼자소리를 처량하게 흘리고있다.

풋낯이나 있었던것만큼 안재수와도 정이 넘치는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는 사이에 아이들이 나들문앞에 이르렀다.

리봉호는 손에 들었던 가방을 최성덕에게 맡기고 아이들을 하나하나 세여 대합실안으로 들여놓았다. 11명 모두다 네댓살난것들뿐인데 태반이 계집애이고 남자는 두명밖에 없었다.

《어디 보자, 요 귀염둥이들!》

최성덕은 팔을 벌려 아이를 하나 닁큼 들어올리였다. 허공에 들린 계집애는 고사리같은 손을 흔들면서 《할아버지, 안녕하세요?》하고 서투른 영어발음을 하였다. 최성덕은 흠칫 놀라며 아이의 모자를 벗겨보았다. 하얀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가 나타났는데 그 아이는 다정하게 안아주는 사람의 목을 그러안고 허리를 흔들며 좋아서 야단이다. 한순간에 기분이 상해버린 그는 얼른 아이를 내려놓고 기침을 하기 시작하였다. 가슴이 울컥하더니 숨을 쉬기 가빠났던것이다. 머리를 흔들면서 수건으로 입을 싸쥐였다. 예민하게 감정흐름을 지키고있던 리봉호는 어색한 낯을 지으며 동행하는 젊은 녀인에게 지시를 주고 최성덕이앞으로 다가섰다.

《혼혈아들이요. 어찌겠소. 자꾸 만들어지는걸. 또 여기서는 순수 〈한국〉족은 검둥이와 같이 보니까.》

알고도 남는 소리를 중언부언하고있다.

《어쨌거나 자네는 자선가다워.》

용기를 내서 최대의 선의와 동정을 보이려고 하지만 한번 삑 돌아선 감정은 제자리에 돌아오질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안재수는 여기서 나온 젊은이와 함께 아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나서 두사이에 끼여들었다.

《아이들은 다 우량하니까 괜찮게 수요자가 있을것 같네. 여기 녀편네들은 이런 아이들도 제 배에서 나온것만 못지 않게 귀여워한다니까. 하긴 뭐 강아지도 이불안에 넣고 자는 형편이니까. 하나에 한 천딸라씩 받아낼수 있겠나?》

안재수는 그 어떤 색다른 상품처럼 제나름으로 흥정을 해보면서 호기심을 보이고있다. 잠간 지체하였다가 그들은 헤여지게 되였다. 최성덕은 뻐스에 오르는 아이들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옷은 각각 제나름이였는데 가슴에는 명찰을 하나씩 달았다. 이름, 나이, 국적을 밝히였다. 아이들은 여기서 내딛는 한걸음이 자기 운명에 어떤 의의가 있는지 알지 못하면서 재잘거리고있다.

최성덕은 리봉호와 다시 만나기로 하고 호텔을 향해 떠났다. 동정은 가지만 사랑의 감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혐오스럽기 그지없었다. 혼혈아문제는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제기되였다. 미군병영근처에서 생겨나는 이것은 감출래야 감추어낼수 없었다. 모래로 샘구멍을 막자는거나 같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전쟁이라는 흉물이 지나간 뒤에 의례히 있기 마련인 재난의 하나로서 보았던것인데 그것이 목전에서 벌어지는 이런것으로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결국 망국의 징조이며 신성한 우리 민족에게 흘러드는 구정물인것이다.

최성덕은 빚어세운것처럼 앉아서 차창유리에 시선을 보내고있었다. 창밖에서는 거리가 번개처럼 뒤로 흘렀다.

그만 못지 않게 그의 뇌리에서는 가지가지 지난 일들과 또한 방금 보고난 가련한 아이들의 모습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군 하였다. 흰머리카락에 푸른 눈, 그 계집애는 이제 어떤 로파나 혹은 변덕스러운 젊은 녀인의 손에 끌리여 낯설은데로 잠자리를 옮길것이다. 혹시 행운이 차례져서 남조선의 고아원에서보다 좋은 음식과 침대가 차례질수도 있을것이다. 그리하여 하루 또 하루 날이 가서 그 어린 가슴에도 혈육의 정이 그리워나고 나중에는 내가 태여난 고장, 나를 낳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게 되였을 때 그에 대한 대답을 무엇이라고 할것인가.

최성덕은 실성한 사람처럼 허허 웃어보았다. 피가 질퍽한 전장을 밟으며 살아왔고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던 온갖 희로애락의 절정도 함부로 넘나든 옛군인이며 망명객인 최성덕이 가냘픈 처녀들처럼 감상에 빠져있는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도대체 너자신은 그 혼혈아들보다 나은 점이 무엇인가.

흰머리에 푸른 눈, 그 아이는 불쌍하기는 하지만 그애자신은 자기가 그렇게 태여난것을 책임질수 없다. 그러나 나는 어떤가? 왜 나는 그 계집애만 못한 인간이 되고말았는가.

차창에 비낀 자기의 모습을 언뜩 볼수 있었다. 탄력을 잃어버리고 한껏 주글주글해진 눈굽에 물기가 번지더니 그것이 다음순간 번쩍 빛을 반사하였다. 이렇게 되자 최성덕은 리봉호와 헤여질 때 분격을 못이겨 입이 열리는대로 《민족의 수치》요 《인신매매》요 하고 욕설을 퍼부은 자신을 후회하게 되였다.

이튿날 안재수를 데리고 워싱톤으로 돌아왔다.

등이 구불써하고 백내장때문에 시력이 매우 좋지 않다는 안재수는 동작은 느리지만 그의 사색활동이나 추리능력은 한개의 련대를 기발한 작전에로 추동하던 참모장때와 별로 다름이 없었다.

안재수는 처져내린 금테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올리며 아무리 정치인이라 해도 이대로 앉아 시들어버릴수야 없지 않는가고 하며 최성덕을 나무랐다. 그러나 최성덕은 인간이란 무대에서처럼 정계나 사회계에서도 필요한 때에 등장했다가 제때에 퇴장할줄도 알아야지 그렇지 않고 막이 다 내리도록 퇴장할줄 모르면 웃음거리가 되거나 비극적처지를 면할수 없게 된다고 반박하면서 자기의 은거생활을 오히려 당연한것으로 변명해나섰다.

안재수는 포도주 몇잔에 얼근해졌다. 그는 방금 불붙여 물었던 담배를 성급히 재털이에 비벼끄고 벽장에 넣었던 손가방을 집어내는것이였다. 가방안에서는 돈이 나왔다. 그는 뭉치돈을 대강 세여보더니 툭 하고 소리가 나게 그루를 박아 최성덕의 앞으로 쭉 밀어놓았다.

《최형! 달리 생각말고 이걸 받소. 내 얼핏 살펴보니 살림이 궁색한것같은데 보태쓰시오.》

최성덕은 선량하게 웃고있는 안재수와 뭉치돈을 번갈아보았다.

《그래 이번에 안형이 나한테 찾아온 용무가 이거란말이요? 이건 동정인가 아니면 그 무슨 흥정인가? 어쨌든 감사하기는 한데 여기다가 뭐라고 제목이라도 달아놔야 할거 아닌가.》

이렇게 말을 해놓고도 속은 께름직했고 자기 역시 명백한 초점이 없다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별스럽게 생각하지 마시오. 생활에 보태라는건데 뭘 그렇게 심각해지시오. 우리의 의리가 그렇게도 값이 없는것이라면야 우리사이에 무엇을 말할수 있겠소. 섭섭합니다. 최형의 얼굴에 내비친 궁색은 무엇으로써도 가리워내지 못합니다. 딴 의미는 없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복잡하게 생각지 마시오.》

안재수는 얼굴이 붉어지기까지 하면서 자기의 의도가 좌절당할가봐 같은 말을 몇번이나 되씹었다.

이때 최성덕은 눈앞이 캄캄해졌다가 다시 천천히 밝아오는것을 느끼였다.

《나는 이대로 굶지만 않으면 되지만 안형은 그것이 영업에···》

《허허. 이거 앉아있기 바쁜데요.》

안재수는 돈뭉치를 훌쩍 집어들더니 창가에 놓인 책상서랍에 밀어넣고 되돌아왔다.

《혹시 알겠습니까. 사람이 살아가느라면 돈쓸 일이 많지요.》

최성덕은 더욱더 미궁을 헤매는것 같아 난처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서랍에 밀어넣은것을 뽑아던질 용기는 나지 않았다. 3년전에 급성취장염으로 생사기로에 놓였을 때 도와달라고 전보를 친것도 그리고 그 전보를 받고 달려온것도 안재수가 아니였던가.

방안에 잠간 침묵이 흘렀다.

그러는 사이에 창가에 다가서서 밖을 내다보고있던 안재수가 결연히 돌아서 최성덕앞으로 다가왔다.

《그건 그렇구. 최형, 솔직히 말합시다. 최형이 북을 방문하겠다는것이 사실이요?》

《안형도 그 소식을 들었는가?》

《듣다뿐입니까. 내가 이 말만은 하지 말자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나는 악하기 이를데 없고 우정을 저버린 나쁜 인간이 될것 같아 말하겠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말한다면 북으로는 절대로 가지 마시오. 그것은 오산입니다. 그렇지 않고 북에 발을 들여놓는다면 최형은 두개의 칼을 받게 될것입니다. 하나는 〈북한〉공산주의자들의 칼입니다. 사단과 군단을 내몰아 공산주의를 박멸하기 위해 날뛴 최형의 죄악을 그쪽에서 누가 취소라도 했단말입니까? 난 최형이 그리로 찾아가는걸 리해할수 없습니다. 아마도 비행장에 내리자마자 체포해서 마이크를 들이대고 당신은 귀순했다고 성명하라고 요구할것입니다. 그런후에 적당히 선전용으로 써먹다 없애치웁니다. 다른 하나의 칼은 〈남한〉에 있습니다. 최형자신도 알고있지만 박정희때부터 형의 뒤에는 밀정이 따르고있습니다.

북으로의 움직임이 있다는것을 알기만 하면 그때는 단호하게 처리해버리게 될것입니다. 이런 형편인데 내가 왜 보고만 있겠습니까. 심사숙고하시오. 절대로 어느 칼에도 맞아서는 안됩니다.》

안재수는 숨이 차서 헐떡거리기까지 하였다. 주름이 한벌 덮인 얼굴은 과도한 긴장때문에 볼이며 눈두덩이 푸들푸들 떨었다. 하지만 처세에 능란한 그는 추호도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안형의 이번 방문의 기본목적은 이것인가?》

《그건 좋을대로 생각하십시오. 하지만 내 말을 끝까지 귀담아 들으시오. 우리들은 피차 인생말년입니다. 때문에 여직 쌓아올린 탑을 제손으로 허물 필요가 없습니다. 내 어느 계통을 통해서 들은 말인데 최형에 대해서 전두환은 이전과 다르게 생각하고있다고 합니다. 만약 귀국할 의향이 있다면 내가 힘껏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때 아래방문이 급히 열리더니 류보영이 들어섰다. 여느때는 례의에 밝아 남정들끼리 이야기하는 자리에는 함부로 끼여들지조차 않던 녀인이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안선생! 우린 어쩌면 좋지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형편이니···》

녀인은 두손을 가슴에 얹고 어깨를 헐썩거리였다.

최성덕은 눈을 사납게 흘기였다. 그렇게 되자 류보영은 대번에 풀이 죽어 하던 말을 중단하고말았다. 삼종지의를 가풍의 기본으로 삼았던 탓으로 남편의 말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는데 습관된 류보영은 슬그머니 아래방으로 물러갔다.

안재수는 잠시 입을 다문채 최성덕의 심리적움직임을 지켜보다가 권하지도 않는 포도주병을 기울여 한잔 마시더니 창가에 놓인 안락의자에 몸을 던지는것이였다.

미동도 없이 숨을 죽이고앉았던 최성덕이 안경을 벗어 탁자우에 놓고 낯을 찡그리며 안재수를 쳐다보았다.

(남에서 와달라는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렇다면 당국자들에 의해 안재수가 이 최성덕을 낚아갈 임무라도 받았단말인가.)

최성덕의 심리는 착잡하였다.

사실 안재수는 《대한민국》안기부에서 짜준 각본대로 행동하고있었던것이다.

얼마후에 안재수가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세워 최성덕의 앞으로 다가왔다.

《잘 생각해보시오. 어데까지나 나에게는 친구에 대한 일이고 최형은 자기자신에 대한 일이니 최형의 생각여하에 달린겁지요.》

하고나서 안재수는 벽장에 걸린 옷을 벗겨들며 오늘밤 비행기편으로 떠나가겠다고 하였다.

《이왕 말이 난김에 이야기를 좀 더 하세나.》

최성덕은 안재수를 붙잡았다. 안재수도 그러기를 기다렸다는듯이 못견디는척 하고 안락의자에 와앉았다.

최성덕은 정색해서 말을 시작하였다.

《안형은 나에게 참으로 신중한 말을 해주어 고맙소. 앞으로 두고두고 생각하겠소. 안형은 이 최성덕의 목을 향해 두개의 칼이 동시에 겨누어져있다고 하였는데 생각해보니 정말 그럴것 같소.

그리고 또 그 두개의 칼을 다 피해서 안전한 길을 택하라고 하면서 다시 남으로 가볼 생각을 하라고 하였는데 그것도 고맙게 생각하고 또 그렇게 하면 무사해질것 같다는 생각도 드오.》

여기까지 말해놓은 최성덕은 보온병에서 물을 따라 마시였다.

목을 추기고난 최성덕은 입술을 감빨면서 초조한 기분을 누르고 말을 다시 꺼내였다.

《그런데 유감인건 그것이 이제는 시간이 너무 늦었다는거요. 아다싶이 내 나이 지금 일흔하고도 둘이요. 안형은 나에게 두 칼을 피해 요령있게 살것을 권했지만 나는 벌써 인생의 종착점에 거의다 와닿은 사람이요. 그러니 죽음에 대한 공포는 내게 전혀 없소. 내게는 지금 어떻게 하면 더 오래 살아나갈수 있을가 하는것이 문제로 되는게 아니라 내 넋을 어디에 깃들이고 눈을 감겠는가 하는것이 문제로 되여 남아있을뿐이거든. 명예요 재산이요 안식이요 하는것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였소. 거듭 말하지만 애오라지 소원이라는것이 있다면 허공중천에 떠서 방황하는 이 넋을 편안히 깃들일곳을 찾는것이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북에 가보면 어떨가 하고 생각했었소. 안형은 내가 북에 간다니까 이미전에 가졌던 그 어떤 신념의 변화로 보는것 같은데 그런것은 전혀 아니요. 나는 설사 그것이 공산주의라해도 내 넋을 깃들일 땅만 찾을수 있다면 이대로 죽는대도 원이 없겠소. 나는 다만 아버지의 무덤앞에서 한생을 헛되게 살아온 자신을 돌이켜보고싶어서 아버지의 시신이 있는 북을 찾아가려는것이요.》

이때까지 참고참아오던 안재수가 약간 동안이 생긴 틈을 노려 중간에 끼여들었다.

《련대장님! 왜 자꾸 이러시오. 이건 정말 생사람 미치겠습니다. 이 밝은 대낮에, 그리고 문명한 20세기말에 이거야 너무나 허황하고 망상적이 아닙니까.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시오. 〈국군〉사병들과 군단을 내몰아 멸공전선에서 맹활약한 어제날의 원쑤인 최형을 만나면 그들이 그래 가만둘것 같습니까? 히틀러의 장군들은 40년도 더 지난 오늘까지도 잡히면 처형받고있습니다. 련대장님은 부친의 분묘가 그렇게 중요하다지만 그걸 누가 인정합니까. 최형이 이제라도 〈남한〉으로 돌아가면 그런대로 여생을 별일없이 마칠수 있고 시신도 제 민족이 사는 〈남한〉강토에 묻을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영영 개죽음이 되고맙니다. 여기 미국땅도 최형에게 더는 안전하지 못하다는것을 내 귀뜀해드립니다. 알만합니까. 무슨 소리인지···》

안재수는 너무 각박하게 만드는것 같아 잠간 말을 중단하고 상대방의 기분을 살펴보았다.

안재수의 말을 듣고있던 최성덕은 갑자기 앞이 캄캄해졌다. 처음에는 어렵지 않게 물리칠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던것이 차차 의사를 교환하는 과정에 자기 립장이 말뚝에 올라앉은것처럼 불안하다는것을 느끼게 되였다. 그러나 최성덕은 필사적인 반항을 하는것이였다.

《안형은 결국 나더러 히틀러무리에 속했던 전범자들처럼 범죄에 대한 징벌을 피하려거든 숨어살라는 소리인데 난 그렇게는 못하겠소. 나는 전범자도 또 다른 범죄자도 아니요. 만일 내가 공산주의자들한테 범한 죄가 있다면 벌을 받는것이 응당할것이요. 또 내가 〈남한〉의 어느 누구한테 죄를 지었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벌을 받아 마땅한것이고. 나는 이젠 누구앞에서나 솔직하게 말할수 있게 되였소. 욕망과 사리가 없는 순수한 심장을 가지게 되였으니말이요. 내 립장은 이렇소. 늙어서 죽어가는놈이 림종의 순간까지 비겁하게 살 필요가 없다는거요.》

《아! 가련하구나. 이 인생》

안재수는 눈자위가 붉어진 최성덕을 이윽토록 바라보다가 훌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푸른 꿈을 안고 지나대륙을 종횡으로 달리던 최성덕이 벌써 저승에 가앉아 있을줄 누가 알았을가!》

《나는 내 운명을 슬퍼하오!》

최성덕은 가슴을 쥐여뜯으며 한숨을 내쉬였다.

이야기가 계속되면 될수록 차츰 더 알쑹달쑹해져서 안재수는 허무한 생각만 들었다.

《소인은 이만하고 사라지겠소이다.》 안재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성덕은 안재수와 같이 비행장으로 나갔다. 그는 차를 천천히 몰면서 뒤에 앉은 안재수의 동정을 살피였다. 후사경에 비친 그의 얼굴을 자주 쳐다보았다. 태연하고 침착하였다. 그런 표정에는 아무런 악의도 없을것 같았다. 그러나 좀전에 그가 하던 말마디들을 돌이켜보면 어쩐지 께름해지는 생각을 금할수 없었다. 책상서랍을 열고 아무 미련없이 밀어넣던 돈뭉테기도 이번만은 그전처럼 순수한 감정으로 받아들일수 없었다.

《최형!》하고 안재수가 불렀다. 최성덕이 뒤를 돌아보자 말을 계속하였다. 《혹시 최형이 〈북한〉에 대한 어떤 새소식이라도 듣고 그에 귀가 솔깃해진것이 아닙니까. 그게 뭐냐하면 말이지요. 〈북한〉에는 지금 김정일이라는 젊은 새 지도자가 나타나 활력있는 정치를 하고있다는 소식말입니다.》

《글쎄.》하고 최성덕은 후사경을 쳐다보며 호기심을 가지고 대답하였다. 《여기 재미교포들속에서도 그분에 대한 소문은 많이 나돌고있소. 나도 사진도 보고 책도 한권 가지고있소만 저작이 많다는데 입수한것은 〈맑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의 기치를 높이 들고 나아가자〉라는것이요. 그래, 〈남한〉에서도 이런 말들이 오가던가?》

최성덕은 자기가 하고싶은 말은 뒤전에 돌려놓고 물었다.

김정일지도자는 그 어떤 사람도 감화시켜내는 힘을 가지고있다고 합디다만 정치라는건 믿을바가 못되지요. 최형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수재민에게 보내겠다는 북측의 구호물자는 사실상 가짜라는겁니다. 그래서 남측에서는 북측의 선전전에 골탕을 먹이기 위해서 받겠다고 했다는겁니다. 결국 어떻게 됐는가. 실무자들이 판문점에서 회담을 했는데 남측에서는 재차 강타를 먹였다는군요. 9월중에 일괄인도하라, 그렇지 않으면 받지 않겠다고 했답니다. 이것이 결정적강타라는거지요. 정치란 바로 이렇습니다. 이렇게 끝없는 각축전이지요. 오죽하면 내가 일본사람이 되였겠습니까.

최형도 공연히 조국이요, 민족이요 하는데 그러지 말고 현실을 보고 살아가시오. 넋이 어떻소, 주의가 어떻소 하지 마시오. 이에서 신물이 납니다.》

무심히 앉아서 말을 하고있던 안재수가 흠칫 놀라서 밖을 내다보았다. 차가 멎으면서 반동을 일으킨것이다.

《자! 이왕 말이 난김에 여기서 조용히 이야기하세. 달리면서 대화를 하자니까 잘 되지도 않고.》

교외를 채 벗어나지 못한 길섶에 차를 세웠다.

《이보오. 안형, 난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가?》

최성덕은 구슬픈 소리를 내더니 조향륜에 손을 얹고 천천히 뒤를 이어대였다.

《나는 단 하루라도 누구를 사랑하고 또 누구에게서 사랑을 받고싶소. 그것이 전부요. 여태 나의 한생에는 그것이 없었소. 애국이였는가, 아니요. 애족이였는가, 아니요. 애민이였는가, 그것도 아니요. 그러니 내가 누구한테서 사랑을 받을수 있겠나. 그러니 나는 정치적고아요. 결국 허무지.》

《그러니 사랑할 대상을 찾고 사랑을 받을 땅을 찾는다는거지요. 그렇게 놓고보면 나도 마찬가진데요. 나는 내 육신과 내 혈육외 누구도 사랑한것이 없으니까. 심각한 철학이군요!》

《그렇소.》

《그러나 내 권고를 잊지 마시오. 후회하게 됩니다.》

《알겠소.》

최성덕이 안재수를 떠나보내고 집에 돌아오니 류보영이 봉투하나와 무슨 꾸레미를 내보이였다.

《그게 뭐요?》

《당신이 기다리는 려권이예요.》

하고 봉투를 내주는 류보영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히 어려있었다.

최성덕은 상의를 벗어 안해에게 넘겨주고나서 봉투를 열었다. 거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가는 려권이 들어있었다.

《본인이 와야 한다고 하는걸 앓는다고 하고 내가 찾아왔어요.》

《뭐 다른 말은 없었소?》

번연한것을 물으면서 흥분을 누르려고 하였다. 손에 들린 얇은 증서는 그의 가슴에서 울리는 파동이 그대로 전달되였음인지 후두두 떨었다.

《없었어요.》

《이건 또 뭐요?》

이번에는 안해가 들고있는 꾸레미를 가리키며 물었다.

《안선생이 잊으신것 같아요. 아직 떠나지 않았으면 빨리 다녀오시든지 후에 전송으로 보내시든지.》

《돈이로구만. 그건 되돌려보내는게 좋겠소.》

최성덕은 려권을 안해에게 넘겨주고 침실에 건너가 벌렁 누웠다. 천정이 빙빙 돌아가고 침대가 물에 뜬것처럼 기울떡거렸다. 눈을 감았는데도 려권과 돈뭉치가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기도 하고 멀어졌다 가까와졌다 하였다.

《아!》 하고 그는 머리를 싸쥐면서 허리를 뒤틀었다.

며칠전까지만 하여도 그는 자유로운 몸이여서 어데나 가고싶은데로 갈수 있을것 같고 또 갈길도 수없이 많은것으로 알았었다. 그런데 오늘은 두 극단의 길, 북이 아니면 남, 그것밖에 내다보이지 않았다. 그거나마 안재수가 말한대로 위험천만한 길이였다. 지금 처지에 보라빛희망이 구름처럼 피여오르고 달콤한 행복이 맞아주는 그런 길을 바랄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답게 림종을 맞고 사람답게 봉분을 꾸밀 두평방정도의 편안한 자리야 있어야 할게 아닌가. 그러니 시체철학가들이 말하는것처럼 인간은 나서 죽을 때까지 순간순간을 선택에 의해 《실존》하게 되며 따라서 선택자체는 불안이라는 피할수 없는 운명을 끌어오게 된다는것이 진실이 아닌가.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만든다고 하는것이 진리가 아닌가.

아! 사랑, 참된 사랑을 하고싶고 참된 사랑을 받고싶다 단 한번만이라도 이 고상하고 아름다운 세계에 몸과 마음을 잠그고 싶다. 끝간데없이 드넓고 그러면서 황량하기 그지없는 70평생을 가로세로 썰면서 촘촘한 각쟁이로 긁어보건만 정신적미나 그런 흔적은 한오리 걸리는것이 없고 다만 사막에서나 들을수 있는 메마르고 처량한 소리가 울릴뿐이였다. 텅빈 가슴에서는 지꿎게 묻고있다. 해놓은것도 없고 해야 할것마저 똑똑치 않다면 너는 이미 저승에 가있는것이 아닌가. 《아니다!》하고 그는 잠꼬대처럼 웨쳐대였다. 《인내천이 아닌가!》 나에게는 아직 두가지 길이 있다. 그 하나는 북조선에 가서 부친의 무덤을 찾아보는것이며 그다음은 철면피하게나마 안재수가 말하던 그대로 이전에 그러했던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차피 배달족이 사는 땅을 베고 눕게 될것이 아닌가.

그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 책상에 마주앉았다. 백지를 한장 꺼내놓고 원주필을 가져다대였다. 거침없이 글을 써내려갔다.

 

나의 보영에게

 

내가 떠난 다음에 당신이 이 글을 보게 될것이요.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북한》땅에 발을 들여놓기로 결심하였소. 그러니 내가 《북한》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숨졌다는 소식이 와도 내가 자업자득한것으로 여기고 놀라지 마오.

한가지 부탁은 나의 시신을 찾아서 부친의 옆에 묻어달라는것이요. 만약 그것이 허락되지 않으면 재가루로 만들어 비행기에서 뿌려주오. 조국강토에 먼지로라도 남아있게 해주오.

 

       한생 어리석었던 남편 최성덕

 

최성덕은 글쪽지를 두벌로 접어 눈에 잘 띄는 록음기우에 올려놓고 안경집으로 지질러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