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1

 

제 3 장

1

 

《더러운 사기군놈들!》

안락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안창후는 맞은켠에 놓인 록화기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고함을 질렀다.

《끄시오! 보기 싫소.》

안창후는 아까 오후의 다른 일을 다 뒤로 미루고 서울에서 방영한 북남적십자회 실무대표의 판문점접촉현지실황록화테프를 돌리라고 했었다. 대표단을 인솔하고 직접 회담장에 나갔던 그가 어째서 서울의 실황방영을 꼭 봐야겠다고 하는지 그 속심을 어느 누구도 알수 없었다.

동석했던 모든 사람들이 의아한 눈길로 그를 흘끔흘끔 살펴보는 가운데 판문점접촉장면들을 참을성있게 봐나가던 안창후는 대표들의 퇴장장면에 이르러 마침내 분격을 터뜨리고만것이다. 그럴수밖에 없는것이 실제 판문점접촉에서는 리치와 경우에 몰린 남측대표가 9월중 일괄인수만을 고집하며 앉아버티기를 몇시간이나 계속하다가 뒤에서 쪽지 한장이 날아든것을 계기로 훌쩍 자리에서 일어나 퇴장해버리고만것인데 서울에서 방영된 텔레비죤에서는 테프에 가위질을 해서 우리측이 먼저 퇴장한것으로 순서를 바꾸어놓았던것이다.

《협잡군들, 날강도들!》

안창후는 얼굴색이 새파래져가지고 온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록화기가 꺼졌다. 급기야 방안이 조용해졌다. 누구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안창후는 숨만 씩씩거릴뿐 어찌할바를 몰라했다.

푸른불이 이글거리는 그의 눈길은 록화기를 한동안 쏘아보고 있더니 그다음에는 창가림짬으로 좁다랗게 내다보이는 남쪽하늘을 응시하고있었다. 그가 눈길을 보내고있는곳마다에 안경을 끼고 야스껍게 생긴 남측대표의 얼굴이 어른거리였다. 아무리 동포애와 인도적립장에 서서 좋게 보고 좋게 대하자고 해도 그렇게 되여지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한형제, 한겨레의 립장이 아니라 원쑤의 립장에 완강히 버티고서서 한걸음도 접근해오지 않고있다.

초점을 잃어버린 안창후의 눈길은 쓰겁게 담배들만 빨고있는 부서동무들에게 가멎었다.

《패덕무례해도 정도가 있지 어쩌면 이럴수가 있소. 구호물자를 주겠다는 사람들을 이렇게 모독하고 우롱하다니?···》

워낙 격하기 잘하는 성미이긴 해도 이렇게 무분별할 정도로 흥분되여본적은 일찌기 없었던 안창후였다.

《9월중 일괄인도, 이것이 우리에게 큰 난관으로 된다는것쯤이야 삼척동자라도 능히 짐작할만 한 일이 아닌가. 우리가 회담장에서 루루히 설복을 거듭했지만 애당초 〈거절〉할 속심을 가지고 나온 그네들은 막무가내로 립장을 바꾸려 하지 않았단말이요. 그런데 이게 무슨짓이요. 필림을 장난질해서 방영해? 천하에 이런 나쁜놈들이 어데 있소!》

안창후의 목소리는 갈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당초의 우리측 의도를 관철시킬 방도가 없었다. 한주일후인 21일에 다시 접촉하게 되겠는데 그때 제기할 안이 서지 않는것이다. 저쪽에서는 우리가 립장을 달리하지 않는한 다시 접촉할 필요가 없다고까지 잘라 말했다.

방안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때 지도원이 들어와서 고윤학부총리가 왔다고 알리였다. 안창후와 협의할것이 있다면서 전화가 있었는데 약속한 시간보다 30분이나 앞당겨온걸 보면 그도 심상치 않은 소식을 들은것 같았다.

뒤미처 방에 들어선 고윤학은 저기압이 흐르고있는 방안분위기를 대번에 알아챘다.

《왜들 이렇게 다 굳어져있소? 싸우고난 사람들처럼 방안공기가 어수선하구만.》

안창후는 억지로 푸르딩딩한 기색을 풀고 부총리를 정중히 맞아들였다. 그러나 속에서 끓는 의분만은 좀체로 삭일수 없어 그가 자리에 앉자 회담소식을 들었느냐고 물었다.

《들었소. 그 사람들이 말째게 나온다면서?》

《말째게 나오는 정도가 아닙니다. 서울에 돌아가서는 필림장난질까지 해가지고 우리측이 먼저 퇴장한것처럼 날조하여 방영하고 있단말입니다.》

《부위원장동무는 그들과 처음으로 상종하는것 같군? 이런 일을 당해본적이 어디 한두번이요?》

《그래도 그렇지요. 앞에서는 받겠다고 해놓고 뒤에서는 이따위 너절한 오그랑수를 쓰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악당들이 우리와 동족이라니 정말 창피스럽습니다.》

그 말에는 고윤학이도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도 남측의 비렬한 행동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기는 안창후와 조금도 다를바 없었다.

판문점에 나간것이 안창후였으니말이지 거기에 자기자신이 나갔다 해도 절대로 달리 될수 없었을것이다. 그러나 회담은 안창후가 맡은것이고 자기가 담당한 사업, 말하자면 물자를 확보하여 그것을 필요한 장소에 옮겨놓는것과 같은 실무적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의 직분대로 명확한 태도를 취해야 하기때문에 안창후에게 말을 하지 않을수 없다고 여겼다.

《부위원장동무! 내가 온건 다른게 아니요. 다음번 회담을 위해서도 9월중 일괄인도에 대한 우리의 립장을 미리 말해두어야겠기에 만나자고 했댔소. 9월중 일괄인도는 불가능하오. 왜 그런가. 사실은 10월 10일까지를 타산할 때도 우리는 최대한의 수치를 짜내서 제기했었소. 구호물자의 전량은 거의 전부가 남조선에 보내기에 편리한 개성이나 남포, 원산 같은 출발시점에 있는것이 아니라 전국 도처의 생산 및 저장지에 널려있소.

각지에서 이것을 모아다 남조선에 보내자면 일정한 운반시일이 필요하오. 남측에서 계속 9월중 일괄인도를 고집한다면 우리가 취한 동포애적조치에 인위적으로 난관을 조성하여 파탄시키자는 목적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요. 그러니 이런 사정을 알고 다음번 회담에 참고해주길 바라오.》

《다음번 회담이 열리겠는지는 아직 확신할수조차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9월중 일괄인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음번 회담장에 나와 마주앉는것도 무의미한 일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뭐라구?!》

고윤학의 눈에서도 퍼런 불이 일고 꽉 틀어쥔 주먹이 부르르 떨었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분개한 부총리의 모습을 보며 묵묵히 입을 다물고있었다. 안창후도 얼굴이 컴컴해서 창가에 서있었다.

《알겠소. 내 우리 동무들과 실무문제는 다시한번 토론해보겠소. 그렇다고 해서 그 어떤 기적이 생기리라고는 믿지 마오. 내 적십자사업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고싶지는 않지만 동지적으로 한마디 하고싶은것은 우리가 아무리 동포애적감정을 가지고 구호물자를 보내려 한다 해도 남측에서 그렇게 나오는 이상 절대로 굽어들어서는 안되겠다는 명백한 립장만은 잃지 말아달라는거요.》

《알겠습니다. 우리도 그 측면에서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을 결심입니다.》

안창후도 주먹을 그러쥐며 힘주어 대답하였다.

 

×

 

사무실에 돌아온 고윤학은 서기에게 관계자들을 20분안으로 불러들이라고 이르고나서 걸상에 털썩 앉았다.

안창후를 만나보고 온 그의 마음은 더욱 초조하고 화가 부걱부걱 괴여올랐다.

회담이 예상외의 장애에 부딪쳤다는 소식을 듣긴 했어도 남측에서 그렇게도 야스껍게 나올줄은 몰랐다. 성미가 불같은 안창후앞에서는 내심을 내비치지 않았지만 남측의 비렬한 행위에 대해서는 끓어오르는 의분을 금할수 없었다. 뭐니뭐니해도 이 난관을 타개할 중대한 과업이 자기의 두어깨에 짊어져있지 않는가.

조금후 서기가 다 모였다고 알려왔다.

《들어들 오라고 하시오.》 고윤학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다가갔다. 먼저 나타난것이 키가 큰 철도부장, 그와 비슷하게 생긴 해운부장, 그다음이 목소리가 높기로 이름난 량정총국장과 잠바를 입은 화학공업부장이였다. 그밖에 두세명이 들어섰다.

《자! 다들 이쪽으로 나앉으시오.》

고윤학은 담배갑을 앞으로 밀어내놓으며 앞상옆으로 자리를 옮기였다.

《급한 일이 있어서 불렀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판문점에서 적십자대표들의 접촉이 있었다는것과 남측에서 9월말까지 일괄인도하지 않는다면 한알의 쌀도 받아가지 않겠다고 도리여 저희들쪽에서 투정을 부리는 행위에 대해 격분에 넘쳐 들려주고나서 말하였다.

《사태는 이렇습니다. 그러니 동무들자체가 심사숙고해서 책임적인 안을 내놓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남측의 요구때문에만 그런다고는 생각하진 마시오. 남측에서 그런 비렬한 행위로 나오는 이상 어떻게 하나 구호물자 전량을 되도록 빠른 시일내로 보내줌으로써 그들의 모략적책동을 짓부셔버려야 합니다.》

담배를 붙여문 고윤학은 잠간 사이를 두었다가 오른쪽에 듬직이 앉아 수첩장을 뒤지고있는 일군에게 시선을 보내였다.

《앉은 순서대로 토론합시다. 우선 량정총국에서 먼저 대답해보시오. 쌀을 며칠안으로 다 도정해낼수 있겠습니까?》

《글쎄말입니다.》

량정총국장은 돋보기를 벗어들면서 우렁우렁한 목소리를 내였다.

《9월말까지 인도인수를 다 하자면 우리는 불과 4∼5일안으로 정미소에서 떠나보내야 한다는 계산인데요.》

《물론 그렇습니다.》

고윤학은 고개를 끄덕여보이였다.

《어찌겠습니까. 형편이 그렇게 되였으니 대상정미소를 더 늘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수송량도 그만치 불어나게 되는데 그것은 자체로 해결해보겠습니다.》

《정확히 계산해서 대답해주어야겠습니다. 해보다가 정 안되는거야 어찌겠는가 이렇게는 못합니다.》

《알고있습니다. 꼭 하겠습니다.》

《꼭 하겠다.》 고윤학은 량정총국장의 말을 받아외우며 수첩에 적었던 맨웃머리에 표식을 하였다. 그러나 고윤학의 얼굴에 비낀 긴장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첫공정에서 큰 암초가 없었다는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그다음이 문제인것이다.

《다음은 세멘트에서 대답해보시오.》

《우리는 론의에서 빼줬으면 합니다. 공장마다 무져놓은것이 있기때문에···》

《알만합니다. 그러면 결국 철도와 해운에서 대답해야 할 차례입니다.》

고윤학은 수첩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철도부장을 건너다보았다.

《오늘도 또 철돕니까?》 하고 목이 기름하고 머리가 반백인 철도부장이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의 얼굴은 신심도 아니고 실망도 아닌 어중간한 기색을 나타내고있었다. 생산량이 불어나면서부터 몇해동안 계속 피동에 빠져있는 그였던것이다.

《내가 피뜩 계산해보아도 근본적인 대책이 있어야겠다는것은 명백합니다. 우리는 현재까지 약 20일간 다시말하여 10월 10일경까지 예상했는데 그것을 절반으로 단축하자면 이미 계획했던것을 배로 높여야 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문제는 명백합니다. 그만한 량을 다른데서 축소하는수밖에···》

《다른데서 축소?》 고윤학은 급소를 찔리운것처럼 흠칫하며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렇게는 못합니다. 그렇게 할바에는 우리가 모여앉을 필요도 없는것입니다. 계획위원회에 지시하면 되는것이지···》

역시 짐작이 맞아떨어졌다. 수송이다. 그중에도 철도수송, 사전에 예견했던것이 그대로 들어맞았던것이다.

고윤학은 《으흠》 하고 의자에 등을 기대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모두 난감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수굿한채 묵묵히 입을 다물고 앉아있었다. 형편은 이러니 정무원에서 결심을 내리시오 하는 눈치이다.

《좀 더 토론을 심화시켜봅시다.》

고윤학은 좌중에 대고 한다기보다 자기자신에게 타이르는것 같은 말을 해놓고 얼마간 기다려보았다. 그의 가슴속에는 이미 형태를 갖춘 두개의 안이 자리잡고있었던것이다. 그 하나는 안창후의 말대로 판문점접촉에서 이미 예정했던대로 우리 안을 끝까지 관철시키는것이며 다른 하나는 구호물자만 한 수송량을 인민경제의 다른 수송량에서 삭감하는것이다. 사실상 현재 철도수송은 바늘하나 들어갈만 한 틈도 없었다. 그러나 딱한것은 이 두개의 안중 어느 하나도 현실성을 담보하기가 힘든것이였다. 다른 수송을 얼마간 죽인다는것은 년말생산을 한창 다그치고있는 때에 큰 돌덩이를 던지는 결과를 가져올것이다. 그러나 세번째 방안은 생각나지 않는다. 둘중의 하나, 제3은 있을수 없다.

고윤학은 협의회시간을 끌었다. 항상 후회되는것은 조급한 결론, 조급한 처리였기때문에 부러 시간을 끌면서 좋은 안을 제기하라고 해본다. 그러나 더 이상 의견이 제기되지 않았다.

하는수없이 고윤학은 제기된 문제를 종합하면서 실책이 없도록 하나하나 력점을 찍어넘기였다.

도정작업을 기일안에 하되 모두 합격품으로 할것. 특히 수분에 주의를 돌릴것.

세멘트는 수출품으로 하고 포장에 주의를 돌릴것.

방직총국에서는 직물의 구색을 고려할것, 모두 한본새로 하지 말고 다양하게 배합하면서 그것이 실지 가정에 유용한것으로 되여야 한다는것.

그가 협의회를 그만하자고 하자 철도부장이 놀라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느 쪽인가요?》 하고 묻는것이다. 기일을 늘이는가? 다른 수송을 미루는가?

《철도수송은 따로 지시를 주겠습니다. 어느쪽이든 혼자서 결심할것이 못됩니다.》

긴급히 소집하였던 사업토의는 별로 묘술을 찾아내지 못한채 일단 끝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