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6

 

제 2 장

6

 

얄미울 정도로 눈가에 살살 웃음을 치며 자기들이 뒤에서 보살피고있음을 잊지 말라고 씨벌이던 리병찬의 말이 밤새 머리속을 맴도는바람에 한영국은 잠을 설친채 입맛이 없어 조반을 뜨는둥마는둥하고 본사로 향했다. 길을 걷는데도 환각속에서 엊저녁 하던 사색은 계속되였다.

(민중을 위한 참정치는 이 《남한》세상에 없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무엇을 위해 글을 써야 하는가. 돈을 위해? 명예를 위해?··· 하긴 이것이 이남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도인지 모른다. 아니 인간이 살아가자면 어차피 그렇게 되기 마련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제 리병찬이 뭐랬더라. 《북한》공산주의자들의 허위를 온 세상에 발가놓는 글을 쓰라고 하였지.)

재난을 입은 수재민들에게 주겠다는 북의 구호물자가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면 구태여 리병찬의 지시가 없었다 해도 그의 량심이 먼저 분노할것이며 정의의 수술칼로 그의 진속을 가차없이 해부해버릴것이였다. 그러나 그 글이 리병찬이나 안기부의 요원들, 나아가서는 전두환따위의 권좌를 유지케 하는데 악용된다고 생각하면 꼬물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리병찬은 자기들이 뒤에서 늘 《보살피고》있노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해왔는지 모른다.

본사에 들리니 벌써 여러번 공보부에서 전화독촉이 있었다고 하면서 차를 대기시키고있었다. 9월 14일 북측제기에 의해서 판문점에서 량측 적십자사대표들의 구호물자인도인수에 대한 회담이 있다는것이다.

한영국은 공보부가 지명한 보도요원으로서 판문점 회담장에 나가게 되여있다고 하였다. 안기부가 짜놓은 각본의 역이였던것이다. 카메라를 메고 취재수첩을 드니 길차비는 간단히 끝났다. 그러나 만약을 위해 비옷을 둘둘 말아들고 차에 올랐다.

공보부마당에서 대형뻐스에 옮겨앉으니 잠시동안에 수색동을 지나 백마, 일산을 거쳐 금촌, 파주에 이르렀다.

판문점차단소에서 증명서검열이 있었다. 미군 소령이 이마살을 찌프리면서 증명서를 들여다보았다. 어떤 위압이나 공포를 주려는것 같았다.

《수고하오.》

한영국은 영어를 던지면서 불룩 나온 그의 배를 손등으로 툭툭 쳤다. 이것도 미국놈이다. 미국놈은 보기만 해도 속에서 불이 일지만 함부로 내색할수 없다. 그러나 이쪽의 심리를 전혀 알수 없었던 미군은 유리알같이 새파란 눈을 번뜩이면서 웃고있다.

《좋아!》

기자들과 맞서보았댔자 리날게 없다는것을 느꼈는지 그자는 한영국의 어깨를 떠밀어 공동구역안으로 들여보내였다.

언제나 그런것처럼 구역안에는 대기실로 쓸만한 변변한 건물하나 없어서 모두 서서 이야기를 하였다. 삼삼오오 떼를 지어섰기도 하고 이쪽저쪽으로 밀려다니기도 하였다. 사진기나 촬영기를 메고 든 패가 있는가 하면 야비한 눈길로 이사람 저사람을 쳐다보면서 냄새를 맡아보려는자들도 있었다.

《오! 〈동아〉의 한선생!》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치길래 돌아다보니 《서울신문》에 있는 민기선이였다. 색안경을 낀 그는 어깨가 구불사한 장신자인데 신문을 흔들면서 다가왔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해서 어디 당해낼수 있는가요. 며칠전에는 망원동수재구역에서 정철의 시를 읊더니 또 오늘은 판문점이구려.》

《오, 민선생!》

한영국은 호기있게 대하면서 보도계의 원로답게 너그럽게 웃었다. 그러나 얼굴은 홧홧 달아올랐다. 속에 없는 가짜를 적은것이 가책되였다.

《인도주의가 차고넘치던데요. 열댓장되나마나한 글에 그토록 큰 사상을 담기란, 정말 한선생이 아니고서야.》

《너무 이러지 마시오. 고무풍선을 지나치게 불구면 터집니다.》

《역시 기지도 대단하시구.》

칭찬같기도 하고 야유같기도 하였다.

한영국은 문득 《이번에 보니까 적십자정신이라는것도 만만치 않은데요.》 하고 정색해서 말을 걸었다.

그렇게 되자 예민한 민기선이 안경을 밀어올리며

《간단치 않을뿐만아니라 감동을 줍니다요.》

하고 대꾸하였다.

《그런데 나라마다 표정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렇긴 합니다. 주한일본대사 다니노씨는 며칠전에 의연금으로 10만딸라를 기탁해왔는데 미국의 워커대사는 2만 5천딸라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국제적십자총재 델타마타라는 사람은 빈말삼아 의연금이 필요치 않는가 해보고 그것을 사양하게 되자 여봐란듯이 〈국제적십자사의 지원사양은 한국력량 립증〉이라고 인터뷰에서 말해놓고 북남접촉에서 〈정치성의 배제가 선결문제〉라고 〈가르치심〉을 주고있는 형편입니다.》

《하하하, 모두 벼루기낯짝내들기 비슷하지요. 그걸 보면 동포애가 크긴 크지요. 북에서는 대아메리카합중국의 백배나 넘는것을 주겠다고 하는 정도니까요.》

《쉬!》

롱담을 잠간 하고나서 그는 담배를 붙여물었다. 사색을 정리해 두어야 취재를 제대로 할수 있는것이다.

《잡아당기면서 밀친다.》-그것이 이제 어떻게 연출되겠는지 두고보아야 안다. 유술에 그것을 적용하여 팔을 잡아당기면서 발을 날려보내면 옹근 한판으로 이기게 되는것이다. 가능성은 의심할바 없다.

구내가 갑자기 설레여 고개를 드니 남조선측적십자대표가 차에서 내리고있었다. 넥타이를 매고 모두 정장을 하였다. 5명의 대표가 될수록 긴장성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사담을 하면서 걸음을 옮기고있다. 그러나 끌려나온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보아 그런지 어딘가 모르게 조심스럽다는것이 알리였다. 맨앞에서 안경을 낀 날씬한 몸매의 리영덕이 걸었다. 몸가짐이 세련되고 사교에 능한 그였지만 행동거지가 매우 부자연스러웠다. 그다음에 따르는것이 역시 안경을 꼈지만 농민형으로 생긴 조철화, 그다음에 송영대, 그밖에는 누군지 알수 없는것으로 보아 안기부 요원따위가 끼여있을것이였다. 카메라들이 사처에서 찰칵거리였다.

그때에 반대쪽, 정확히 말하면 북쪽에서 사람들이 또 설레였다.

북측에서 대표가 나타난것이다. 그들은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 나들문쪽으로 가고있었다.

한영국은 재빨리 사진을 찍고 옆에 서있는 북의 기자에게 물었다.

《앞에 선 사람이 북측 단장입니까?》

《예, 우리 적십자회중앙위원회 부위원장입니다.》

《아, 그러세요. 젊었고 활기가 있는데요.》

오전 10시 정각, 회의가 시작되였다. 량쪽에 각각 5명씩의 대표가 앉고 그 뒤에 보좌성원들이 자리를 차지하였다. 한 30㎡정도 되나마나한 작은 방에 비좁게 들어앉았다. 창구마다 기자들이 모여들어 짬에 끼우기도 힘들었다. 량쪽 기자 100여명이 작은 집을 둘러쌌다. 그렇지만 한영국은 재빨리 맨 중심창구를 차지하고 마이크를 깊숙이 들이밀었다.

방안에서는 벌써 대화가 시작되였다. 북측 단장이 입을 열었다. 이마가 좀 벗어지고 얼굴이 둥글둥글한 그는 침착하게 발언요지를 들여다보고나서 고개를 들었다.

《오늘 우리는 온 민족과 겨레의 커다란 관심과 이목이 집중되고있는 가운데 남조선의 수재민들에게 공화국북반부인민들의 혈육의 정이 담긴 구호물자를 보내는것과 관련하여 북과 남의 적십자실무대표접촉이 마련된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북측 단장의 음성은 그닥 웅글은 편은 아니였는데 매 말마디들이 연덩어리같은 무게를 가지고 방안을 울리였다. 그의 얼굴에는 알릴듯말듯한 미소가 어려있었으며 몸가짐은 의젓하였다. 그는 간단한 말로 서두를 떼고 지난 9월 8일에 채택한 적십자회중앙위원회 결정 제32호 내용을 소개하였다. 그에 의하면 남조선수재민들에게 동포애와 인도주의적립장에서 보내주기로 한 구호물자는 쌀 5만석, 천 50만m, 세멘트 10만t, 기타 의약품이 포함되여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 구호물자는 물론 남조선수재민들의 생활을 완전히 안정시킬수 있는 충분한것으로는 되지 못하지만 남조선당국이 최종집계하여 발표한 리재민수에 비추어볼 때 5인가족으로 계산하여 가구당 쌀은 약 250㎏(5가마니), 천은 17m가 차례지는것으로 되며 세멘트는 약 3만동의 살림집을 신축할수 있는 량이며 의약품도 수해구역에서 일반적으로 발생할수 있는 각종 질병의 예방과 치료에 효과적으로 쓰일수 있을것이라고 하였다.

계속하여 북측 단장은 구호물자전달절차문제와 관련하여 첫째 둘째 조항을 꼽아가며 조리있게 설명하였다. 첫째 구호물자수송은 최단기간안에 끝내자는것이며 그러기 위해 륙로로도 하고 해상으로도 하자고 하였다. 물자를 넘겨주고 넘겨받는 장소로서는 수송하는데 편리한 서울, 속초항, 인천항, 부산항 4개의 지점으로 하자고 하였다.

귀를 기울이고있던 한영국은 차츰 북측 단장의 발언에 공감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고 펀뜻 놀랐다. 북측 단장의 발언은 말그대로 겨레의 재난을 자기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성의껏 도우려는 동포애가 절절히 느껴지고있을뿐 남의 당국자들이 제일 꺼려하는 정치선전은 전혀 개입되여있지 않았다. 그렇게 본다면 리병찬이 말한것처럼 어떤 수놀음이 벌어질것 같지 않았고 따라서 당기고 밀치고 하는 극이 연출될만한 어떤 조짐도 느낄수 없었다.

긴장이 풀리게 되자 한영국은 마이크를 내댄 팔이 갑자기 무거워났고 다리도 팽팽해졌다. 그러나 그는 인내성있게 벽에 몸을 붙이고 창구를 들여다보았다. 북측대표의 발언은 다섯째 항목의 통신문제까지 상정시키고 일단 끝났다.

잠시 동안이 생겼다.

남측수석대표는 오른쪽 옆에 앉아있는 안경쟁이로부터 쪽지를 받아 펼치였다. 쪽지를 본 그는 확신에 넘친 표정을 짓더니 손가방우에 놓였던 봉투 2개중 하나를 펼치였다. 자신만만한 손동작으로 연설원문인듯한 서류를 꺼내더니 잠간 첫 머리를 들여다보고나서 고개를 들었다. 입을 놀리는것으로 보면 발언을 시작한것같은데 말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한영국은 자신이 그렇게 느끼고있을뿐인지 아니면 음성이 그런정도 낮은지 알지 못해 고개를 돌려 좌우를 살피였다. 창구 몇개에 100여명가까운 량측 기자들이 모여들었기때문에 서로 밀치고 닥치고 하였다.

한영국은 땀발이 서서 번들거리는 팔을 들어 마이크를 뽑아내려고 하였다. 남측대표발언문같은것은 차후에도 얼마든지 손에 넣을수 있기때문이다.

그때 옆에 섰던 북의 기자가 어깨를 들이밀었다.

《자리를 같이 리용할가요?》

한 서른살가량 난 민첩하고 영민하게 생긴 사람인데 넥타이를 매고 회색상의를 입었다. 정색한 차림새와 순박한 얼굴은 북의 사람이라는것을 직감적으로 말해주었다. 그가 끼여들려는 순간 한영국은 야릇한 시기심같은것이 불쑥 솟아올랐다.

《안됩니다. 난 지금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서···》

그러나 벌써 북의 기자는 어깨너머로 카메라를 들이대고 연방 찍고 있었다. 그때에야 방안에서 울리는 남측대표의 말이 들리였다. 북측대표가 발언할 때 상당한 정도로 흥성거리였는데 갑자기 조용해졌다. 싸늘한 바람이 휘익 스치고 지나가는것 같았다.

남측수석대표는 설명이 전혀 가해지지 않은 법조문과 같은 문장을 그것도 재빨리 읽어내려갔다.

첫째, 물자를 인도인수하는 주최는 쌍방 적십자단체가 한다.

둘째, 물자인도인수는 9월중에 완료한다.

셋째, 물자의 운반은 배로 한다. 물자의 인도인수장소는 운반거리 등을 감안하여 인천항으로 한다.···

다섯째, 물자는 전량 일괄하여 인도인수한다.

전문을 다 내려읽는동안 남측대표는 한호흡도 중단함이 없이 장대같이 잇대였다. 발언문 마지막장을 번지고나서야 그는 고개를 들며 후- 숨을 내쉬였다. 그런 후에 그는 처져내린 안경을 밀어올리고 앞을 쳐다보았다.

방안에는 무거운 침묵과 함께 랭랭한 공기가 흘렀다.

그것도 처음에는 놀라움을 보이는 쭈빗한것이더니 그다음에는 그럴줄 알았다는 식의 실망으로 변하였고 나중에는 절망으로 마치 시신을 쳐다보는 상주의 기분처럼 되여 꽛꽛이 얼어붙었다.

창구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말마디들을 하나하나 새겨듣고있던 한영국이도 머리가 뗑해졌다. 남측대표의 발언에는 제나름으로 한조항한조항 모두 뜻이 있기는 한데 그대신 전혀 온기를 느낄수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구호를 받는쪽의 대표가 아닌가. 그런데 인사치레조차 똑똑히 차리지 않았고 랭랭한 얼굴로, 그거나마 간혹 웃음을 짓는다고 하는 경우에도 로골적으로 모멸에 찬 시선을 날리며 지어 적의를 보이고있는것은 무엇때문인가. 수재민들에게 동포애적지성으로 보내오는 구호물자를 받겠다고 하는쪽에서 이렇게 표정을 지울수가 있는가. 가슴이 들먹거리고 입에서 더운 김이 내불리는것을 느낀 한영국은 미심결에 창구를 다시한번 들여다보았다.

남측수석대표는 눈살이 꼿꼿해져서 쳐다보는데 북측 단장은 미소를 띠고 설명을 계속하고있다.

《우리가 쌀과 옷감을 싣고 직접 서울에 들어가는것이 어째서 접수되지 않는지 리해되지 않습니다. 서울에는 리재민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루빨리 식량과 옷감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것이 왜 불편하고 납득되지 않는 일로 된단말입니까?》

북측단장은 벌써 같은 말을 세번이나 곱씹고있다. 그러나 남측수석대표는 고집스레 침묵만 지키고있을뿐이다. 이윽해서 남측수석대표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는 못합니다. 정 그것을 고집한다면 우리는 구호물자접수문제를 달리 생각하는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쪽에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안이 있어야 할것이 아닙니까.》

《그에 대해서는 차츰 생각해보겠습니다.》

《차츰이 아니라 당장 요구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굶주리고 헐벗고있는 리재민을 돕기 위한 문제를 놓고 론의하는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차츰 생각해봅시다.》

《그러니 그쪽에서는 그런 정도의 다른 안을 낼만 한 권한도 가지고있지 못합니까?》

《무슨 일에서나 절차와 단계가 있으니까요. 어쨌든 리재민으로 말하면 우리 리재민이 이닙니까.》

《옳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피줄을 이은 우리 계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관심할수 없는것입니다.》

한영국은 낯을 찌프리면서 창구에서 물러났다. 소태를 씹은것같았다. 몇분전까지만해도 완강하게 차지해야 했던 창구는 순간에 아무 소용도 없는것으로 되였고 다시 시선도 돌리고싶지 않은것으로 되였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담배를 피웠다. 그때 뇌리에서는 방금전에 남측수석대표가 하던 말이 되살아났다.

《···9월중에 전량 일괄하여 인도인수, 장소는 인천항으로···》

그렇다면 래일부터라고 해도 열흘이 되나마나한 사이에 그 방대한 물자를 단꺼번에 인천항 한군데서 어떻게 받는다는건가 하고 한영국은 추리해보았다.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북에서 그렇게 막대한 량의 물자를 미리 이런 일이 있을것을 예견하고 어디다 저장해둔것도 아닐거고 설사 그렇게 해뒀다고 가정해도 열흘이라는 기일안에 보낼 차비부터 시작해서 짐을 싣고 나르고 부리우고 넘겨주기까지 한다는것은 되지 않을 일이다. 그러니 결국 《잡아당기면서 밀친다》던 연극이 이렇게 연출되는것이였던가. 그렇지, 받겠다고 공식적으로 말하는것은 잡아당기는것이고 이렇게 도저히 실현불가능하게 앞뒤를 막아놓는것은 밀치는것이다. 이것은 당초에 안받겠다고 성명하는것보다 몇배 더 악독하고 잔인한 우롱행위이다. 이렇게 해놓고 결국에 가서는··· 우리는 구호물자를 받자고 한다, 동포애적성의를 줄만한 물자도 없고 줄수 있는 능력도 없기때문에 못주는것이니 어떻게 하겠는가. 내막을 파헤치고보면 구호물자를 주겠다는 북측의 제기는 사실상 《정치선전》에 지나지 않는것이다.··· 이런 말을 할수 있는 국면을 조성하자는것이 명백하다.

한영국은 가슴에서 불이 이는것 같아 반반하게 다져진 석비레마당을 왔다갔다하였다. 과연 어느쪽에 지성이 있고 어느편에 가식이 있는가?

북측대표는 시종 같은 말을 거듭 반복하고있는데 거기서는 시종여일한 진정이 느껴진다. 그들의 표정과 목소리에서도 그것을 느낄수 있다. 반면에 남측대표의 론리는 억지스럽고 리치에 닿지 않는다. 그 자세와 눈길에서는 감출수 없는 적의가 풍긴다. 일부러 미소를 보이고저 하는 때에조차 적의가 발산되고있다.

한영국은 애당초 회담장구역에 들어설 때부터 무작정하고 남을 훈수하고싶은 잠재의식이 있었는데 이 마당에서 그것이 완전히 뒤집히고말았다. 자신도 놀랄만큼 괴이하고 무서운 일이지만 엄연한 사실앞에서 어쩔수 없이 일어난 변화였다.

얼굴이 붉어지다못해 푸르러지기까지 한 한영국은 담배꽁초를 집어던지고 다시 종전의 그 창구로 다가갔다. 그래도 행여나 저 낯가죽 두터운자들의 멍든 가슴에 량심이라는것이 꼬물만치라도 남아있어서 요행 사태가 바로 잡힐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들여다보았다.

북측대표는 시종 진지하게 설복하고있었다. 가까운 륙로를 두고 멀리 바다길을 에돌 필요가 없다는것, 해상도 하나에만 국한하지 말고 편리하게 륙지길, 바다길을 다 리용하자는것, 인도인수를 9월중으로 완료하자고 하면서 인도인수 장소와 통로를 하나로 제한하자고 하는것은 고의적으로 장애를 조성하는외 아무것도 아니다. 북측 단장은 사리정연하게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고있다.

《쌀이나 천을 무엇때문에 판문점에 부리워놓았다가 그것을 다시 실어 서울에 가져가겠습니까. 쌀을 실은 차가 리재민이 있는 서울까지 직접 가는것이 왜 나쁩니까. 우리는 그것이 리해되지 않습니다.》

(그렇다, 바로 그렇다.) 하고 한영국은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저것이 합리적이다. 저것이 솔직하고 명백한 론거이다.)

뒤이어 남측대표가 잘라 말했다.

《우리는 이미 내놓은 조건들을 하나도 변경시킬수 없습니다. 그것을 변경하라고 고집하면 우리는 부득불 더이상 론의를 계속할수 없습니다.》

(저건 순전히 억지이다. 무지막지한 거절이다.)

한영국은 한껏 치밀어오르는 혐오스러움때문에 금시 토할것 같아 속이 메슥메슥하기까지 하였다.

《한선생!》

뒤에서 누가 사진기멜빵을 잡아당기였다.

《여기 있는걸 그렇게 찾았군요.》

한영국이 돌아다보니 리병찬이 손짓을 하고있었다.

《뭘하고있어요, 여기서.》

《왜 그래?》

한영국은 무뚝뚝하게 반문하였다.

《카메라는 뒀다 뭣에 쓰지요? 북측의 난처해하는 저 얼굴을 왜 찍지 않습니까?》

《누가 난처한가?》

《저걸 보시오. 지금 저 북측 단장의 표정이 〈북한〉공산주의자들의 진면모입니다. 정치선전의 정체는 바로 저렇습니다.》

눈에 벌겋게 피가 진 한영국이 창구에서 물러나 리병찬이앞으로 나섰다.

《무슨 정체가 어떻다는거요?》

록록치 않은 자세로 서있는것을 본 리병찬은 미소를 지으며 한걸음 앞으로 다가서는것이였다.

《북의 공산주의자들은 기회가 있을적마다 선전해왔습니다. 〈해방후 수십차례에 걸쳐 남조선에 구호물자와 원조를 주겠다고 해왔는데 그때마다 받지 않겠다고 해서, 동포애적성의가 전해지지 못하고있다.〉 이렇게 말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받겠다고 하니 사태는 돌변하지 않습니까.

전〈대통령〉의 신축성있는 전술이 정면대결보다 좋다는것이 증명되였습니다. 두고보시오. 이제 손을 들고 세계면전에서 항복하지 않나.》

《여보! 리병찬선생!》

비꼬임이 극한에 이른것 같다. 하지만 한영국은 일단 꼭지를 뗀 이야기를 주저없이 풀어내쳤다.

《내 이야기를 들어보우. 굶주린 거지가 문을 두드리면서 여봐라, 게 누가 없느냐? 있거들랑 한상 잘 차려 3분안으로 내앞에까지 가져오너라. 만약 시간을 어기면 나는 이 집을 도적으로 몰아 포도청으로 끌고가겠다, 어허흠. 하고 호통질했지.》

《아니?!》

리병찬의 얼굴이 하얗게 된다.

《야유가 심한데요. 롱담으로는 너무 지나치구 진담이면 재미적습니다.》

언제나 궁지에 빠질 때면 권력의식이 안전변처럼 적절하게 동작하는 병찬이였다.

《이소프를 흉내내여 해보는 서뿌른 익살이요.》

50이 거의 되고 지성인의 인격이 한몸에 내밴 한영국이였지만 이때만은 어리석고 파렴치하게 되고말았다. 가슴속에서는 비굴한 자기자신을 떠박지르며 량심이 항의하고있었다. 어째서 진담이라고 하지 못하는가, 어째서 거지가 바로 다름아닌 당신이 극구찬양하는 그 전두환이라고 터놓진 못하는가. 하지만 또 다른 하나의 한영국은 어렵지 않게 미소를 지으면서. 그러나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얄팍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는것이였다.

《북측의 난감한 표정을 포착하기에는 아직 늦지 않았소.》

(그래 이것이 적응이지, 《적응되지 않으면 사멸된다.》 나는 이 철리를 따르기로 했다. 그렇다, 주의도 리념도 살아남은 후에 제2차적인 문제인것이다. 량심이라는것에 현혹되여서는 안된다. 량심은 종종 반항에로 추동하지만 그것은 《금지구역》에 통해있다. 량심이란것은 인간의 정신을 어느정도 정화시키기는 하지만 육체는 무시하거나 혹사시키는 경우가 많다. 적응되여야 한다. 세상만물은 다 그렇게 살아가며 자기 종을 유지하고있다. 나도 역시 그속에 있는것이다.)

한영국은 다시 창구로 다가갔다. 회의장안에서는 여전히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고함소리 한마디 울리지 않았고 지어 격한 음성마저 들리지 않았다. 그저 남측대표는 랭랭하게 앉아버티고있었고 북측에서는 인내성있게 설복하고있었다.

대화는 오후에도 계속되였다. 이제는 기자들이 모두 무관심해졌고 지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한영국은 창구에서 물러나지 못하였다. 매 순간마다 뒤덜미에 와닿는 리병찬의 시선을 느끼며 그는 회의장안의 동정을 지키고있었다. 대화는 오후 3시가 넘어서까지 진행되였지만 구호물자의 인도인수장소문제와 방법문제에서 합의를 보지 못하고말았다. 이리하여 무려 6시간에 걸쳐 진행된 북남적십자실무자접촉은 어느것 하나 똑똑히 합의를 보지 못한채 끝나게 되였다.

남측수석대표는 안경을 번뜩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방안이 울리게 말하였다.

《북측에서 립장을 달리하지 않는 한 21일에 만나자는것은 아무런 의의가 없을것 같습니다.》

남측수석대표가 손짓을 하자 좌우에 앉았던 남측대표들 전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퇴장하려고 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북측단장은 하는수없이 의자에서 일어나 남측수석대표가 내민 손을 잡았다.

《다시 만납시다.》

북측 단장의 뒤를 이어 북측대표 전원이 동시에 일어났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모두 회의장에서 나갔다.

넓다란 마당 한쪽에서 기자회견이 진행되였다. 북측에서도 진행되였고 남측에서도 진행되였다.

한영국은 별로 흥미를 가지지 않은채 사람들이 몰린 뒤전에 멀찍이 서서 리영덕의 발언을 듣고있었다. 목소리를 높이고있는 리역덕의 갈린 음성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대신 머리속에서는 모든 음향을 압도해버릴만한 강렬한 소리가 울리였다.

《비렬하다, 간악하다. 아무리 정치리념이 다르고 주의주장과 체제와 제도가 다르다 해도 이럴수가 있는가. 북은 공산주의, 설사 그렇다 한들 재난을 덜어주겠다고 성의있게 나오는 사람들을 그렇게 모욕하고 타기해야 옳단말인가. 이것은 비인도적이다. 비민족적이고 비량심적이다.》

온몸이 사시나무떨듯 하였다. 가슴속에서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동시에 그는 이름할수 없는 공포도 느끼는것이였다. 한나라 한강토가 둘로 갈라져 고통을 주고있다.

한영국이 이렇게 상념에 잠겨있는데 어느덧 기자회견은 끝나고 모였던 사람들이 흩어지게 되였다. 본사에서 같이 왔던 기자들이 한영국을 둘러쌌다. 날이 저물기전에 빨리 돌아가자는것이다. 그래서 기사를 제꺽 써내야 할것이 아닌가고 하였다. 그때 리병찬이 나타나 눈짓을 하였다. 아예 현장에서 《보도지침》을 주고말겠다는것이다. 이름있는 《대한》 6대 일간신문이 별실에 모였다. 선채로 리병찬은 말하는것이였다.

첫째, 신문에서는 《한국》측대표의 주장을 견결히 옹호하고 북측을 반대배격해야 한다. 특히 륙로로 서울까지 구호물자를 싣고 오겠다는데 그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렇게 되면 쌀이나 천, 세멘트가 구호물자로 되는것이 아니라 그것은 곧 《남한》전체에 붉은 물을 들이고도 남을 적화물로 될것이다.

둘째로, 9월중으로 일괄인도되여야 한다고 요구해야 한다. 절대로 이것을 양보해서는 안된다. 북에는 지금 우리에게 줄만한 물자가 없기때문에 9월중 일괄인도요구에 응하지 못한다고 써야 한다. 설사 물자가 있다 해도 우리에게 단 시일안에 가져올수 없다. 날고 기는 재간을 가져도 단시일내에 못가져온다. 그러니 우리가 9월중 일괄인도요구를 뻗대기만 하면 북측공산주의자들의 민족애요, 동포애요 하는것은 공중루각이며 《정치선전》이였다는것이 백일하게 드러나게 된다.

셋째는 북측대표가 회의장에서 먼저 퇴장한것으로 보도해야 한다. 전체 이남민중이 볼수 있도록 그 장면을 특대판사진으로 강조해야 한다.

《만약 이런 지침을 어기고 제멋대로 보도하면》하고 리병찬은 손을 흔들며 열을 올렸다. 《결국은 북의 공산주의자들을 돕는것으로 우리는 인정할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공산주의자들앞에서 약점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호시탐탐 남침을 노리고있는 북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자그마한 틈이라도 보여주면 안됩니다. 오직 무자비하게 치는것뿐입니다. 동포애적조치요, 민족적량심이요 하는 감언리설에 용해되지 마시오. 이번 이 사건과 관련해서 보도진이 얼마나 중대한 임무를 맡고있는가 하는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신문, 텔레비죤, 통신사들에서 다 명심하시오. 보도가 늦어지지 않도록 서둘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참고로 한마디 할것은 〈보도지침〉에서 모를것이 있다든지 애매한것이 있으면 전적으로 〈동아〉의 론조를 따르면 되겠습니다. 알만합니까? 솔직히 말하면 우리 보도계의 원로인 여기 이···》

이때 리병찬은 옆에 서있는 한영국에게 눈인사를 보내며 어성을 높이였다.

《한영국선생의 글을 표준으로 삼으면 되겠습니다.》

한영국은 고개를 떨구었다. 온몸에 모닥불을 끼얹는것 같았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것이 피빛으로 물든것 같고 사람들의 말소리는 공명통에서 울리는것처럼 왕왕 울리였다.

모여섰던 사람들이 잠간사이에 다 흩어져갔다. 그때에 리병찬이 이편에서 어색해하는것을 리해할수 있다는듯이 팔을 붙잡아 이끌면서

《정치란 그저 그런거지요. 하기야 선생님은 나보다 더 깊이 들여다보고있겠지만 말입니다.》 라고 하였다.

한영국은 온몸의 힘이 손끝으로 빠져달아난것 같아 그에 대꾸할만 한 기운을 짜낼수 없었다.

리병찬은 아직도 미흡한데가 있었던지 옆에 물러선채 진저리나게 굴었다.

《오늘 보도에서 중요한것은 9월중 일괄인도와 북측의 퇴장입니다. 알겠습니까?》

《북측에서 먼저?》

한영국은 어째서 또 무슨 용기로 그렇게 반문했는지 자신도 알수 없었다.

《그렇습니다. 북측에서 먼저 퇴장입니다.》

《사실이야···》

《사실이 어떻다는겁니까. 필림을 현상해보시오. 북측은 일어서 나갔고 남측은 모두 앉아있는것이 나타날것입니다. 이것이 그래 사실이 아니란말입니까?》

《그러나 그 먼저.》

《하하. 한선생, 왜 이러시오? 전날밤에 내가 알아들을만치 설복한것으로 알고있는데. 선생의 펜이 필요하다는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이건 너무하지 않나. 사실을 꺼꾸로 뒤집어서···》

한영국은 걸음을 멈추고 야멸차게 생긴 리병찬을 쏴보았다.

《너무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런 사고방식은 서푼어치도 안되는 지성인의 가냘픈 량심때문입니다. 바로 그걸 버리십시오. 정치마당에서는 리치가 필요없습니다. 그리고 한선생은 자기 처지도 잊지 말아야지요.》

《내 처지가 어떻다는건가?》

《다른건 없습니다. 한선생이 처신을 잘해야 6. 25동란때 잃어버린 형을 만나도 떳떳하다는겁니다.》

(엉?! 이 자식이 그걸 어떻게 알가?)

《난 형이 없소. 고아요!》

그의 음성은 떨리였다.

《알고있습니다. 고아라면 고아라고 합시다. 우리는 법적으로 이북관련자를 문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찌겠습니까. 명백히 대답하시오. 선생의 펜은 누구의겁니까? 우리것이 옳지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

《우리는 선생의 뒤를 지켜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바로가는가 모로가는가 하고 말이요.》

한영국은 앞이 캄캄해서 걸음을 내디딜수 없었다. 한참동안 서있다가 발을 내짚으려는데 땅이 모두 움실움실하는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비척거리면서 앞으로 걸어나갔다.

《정치란 이런겁니다.》

한영국은 리병찬이 방금전에 거침없이 흘리던 말을 상기하였다.

그는 걷기도 하고 또 멈춰서기도 하면서 바늘끝같이 뾰족하게 내민 그 정치라는것에 대해 사색에 잠기였다. 그렇다. 정치란 그런것일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거짓일수 있다. 그러길래 리상국가를 구상해낸 공상가들도 《유토피아》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첫마디로 《여기에는 정의가 있습니다.》 라고 했을것이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은 정치라는것을 정의하면서 그 문자자체를 바를정자로 적도록 하였던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의 모든 정치는 공상가들의 념원과는 달리 《거짓》으로 일관되여있었다. 인류력사를 더듬어보면 그 어느 력대정치가들치고 국민을 우롱하고 기만하지 않는자들이 없었다. 그들이 내들고 표방하는 구호는 언제나 《백성을 위한 정치》, 《만민복리를 위한 정치》라고 떠들었지만 그것은 한갖 기만과 거짓에 불과하고 저들의 더러운 정권야욕을 추구하는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였다. 리승만독재정치가 그러했고 박정희군사파쑈통치가 그러했다.

인류초창기에 실시된것이 물신숭배로서 우상을 내세워 그것을 믿게 하는 미신정치였다면 중세기에는 종교정치였으며 근대에 이르러서는 정당정치였다. 정당정치는 군주제를 대신해서 공화제를 받아들였고 현대문명을 낳게 하였다. 영국이나 미국, 프랑스 등도 모두 정당에 의거한것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도 낡아지고 정보정치가 판을 치고있다.

때문에 지금 그 어느 나라에서나 겉으로는 정당을 내세우지만 실지에 있어서는 정보에 의존하고있으며 어디서나 감시의 눈초리가 예리하게 매 개인의 움직임을 살피고있는것이다.

이러나저러나 미신정치, 종교정치, 정당정치, 정보정치-이 모든 정치는 집권자들이 백성들을 순한 양처럼 복종시키고 부려먹기 위한 다스림에 불과한것이다.

참으로 백성들을 위한 참정치란 동서고금의 그 언제, 그 어디에도 있어본적이 없었다.

이른바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는 위정자들이 수재를 당하여 살길이 막막해하는 리재민들을 저들이 나서서 위로하고 돕지는 못할망정 고통받는 겨레를 향해 내대는 구제물자를 받겠다고 거짓대답을 하고서는 그것을 마다할 모략을 꾸미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통탄할 기막힌 일이 아닌가?

(아, 참으로 민중을 위한 참정치는 이 세상에 없단말인가? 이북식 사회주의가 민중중심, 민중중시의 참정치라고들 하는데 그것을 직접 체험할수는 없는거구···)

한영국은 맥없이 차단소까지 걸어나왔다. 뿌옇게 흐린 하늘이 그의 머리우에 드리워있었다. 승용차들은 앞을 다투어 배기가스를 내불면서 남쪽으로 내닫고 있었다. 한껏 침울해진 한영국은 황량하게 펼쳐진 등판을 바라보았다. 쑥대와 잡초들이 흐느적이고있었다.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은 들판을 무자비하게 가로질러 분계선이라는것을 만들어놓았다. 철조망 말뚝이 삐뚜름히 서있는데 그 꼭대기에 까마귀 한마리가 앉아 부리를 쳐들고 《까욱까욱》 하고있다.

《적십자!》하고 한영국은 쓰거운 웃음을 지었다. 언젠가 책에서 본 기억이 떠올랐다. 저 알프스산넘어 이딸리아땅에서 전쟁이 있었다. 수라장에는 숱한 시체와 부상병들이 널려있었다. 하늘에는 음울한 기운이 떠돌고 짓이겨진 풀숲에서는 신음소리가 들리였다. 허름한 중절모에 지팽이를 짚고 길을 가던 스위스청년 쥬낭이 신음소리가 나는데로 더듬어갔다. 쥬낭의 눈앞에는 스무살안팎의 청년이 허리를 비틀면서 림종을 겪고있었다. 이러한 인간을 두고 적군이요 아군이요 가릴 필요가 있겠는가. 이에게는 오직 구원의 손길만이 필요하다. 적십자정신의 첫 제창자인 쥬낭은 그를 둘쳐업고 밤을 새워 수라장을 빠져나갔다.···

한영국의 시야에는 역시 그러한 수라장이 펼쳐졌다. 어떤 사나이가 부상자를 업고 지척지척 걸어가고있다. 그것을 쳐다보고있던 한영국이 와뜰 놀라 정신을 차렸다. 환각은 깨여지고 좀전에 보았던 분계선 말뚝이 흉물스럽게 저만치에 서있었다. 오래도록 그것을 바라보고있던 한영국은 진땀이 솟은 이마를 들고 뻐스있는데까지 가까스로 발을 옮겨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