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5

 

제 2 장

5

 

한영국은 약속된 시간에 3. 1빌딩에서 리병찬이와 만났다. 그가 엊저녁 전화로 만나자고 련락해왔을 때는 어쩐지 속이 메슥하였다. 혹시 전번에 망원동에서 인옥이를 만났던 일때문이 아닐가하는 의문이 없지 않았으나 거기에는 별로 끈잡힐 일이 있을것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안기부에서 요구하는 상면을 무턱대고 거절할수도 없었다.

방안에는 고요가 깃들어있었다. 방문 하나만 열고 나가면 흥창망창 먹고 떠들어대는 술집이였지만 두툼한 방음장치가 되여있는 이 칸에는 별세상같은 기운이 돌았다. 랭풍기에서는 서늘한 바람이 흘러나왔으며 아담하게 차려진 술상에는 두사람이 감당하기에 알맞춤한 술과 안주가 챙겨져있었다.

희고 포동포동한 팔을 드러내놓은 리병찬은 언제나와 같이 세련된 몸가짐과 례의로써 한영국을 대하였다.

인격과 지식으로 볼 때 머리가 반백인 한영국의 눈에는 리병찬의 존재가 보잘것없는 대상이였지만 권력의 측면을 고려할 때에는 언제나 온몸에 소름이 끼쳐지는 무시못할 존재였다.

《한잔 드십시오. 그런 후에 이야기를 나눕시다.》

무도수금테안경을 낀 리병찬은 술을 따르면서 미소를 지었다.

《순서는 좀 바뀌는것 같습니다만 이름있는 이딸리아포도주니까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발폴리첼라입니다. 자, 어서.》

포도주는 맑은술 다음에 하게 되여있는 서양식주도가 무슨 상관이냐는 투로 일종의 파격적인 멋을 부려보이는 리병찬에게 한영국은 우정 저빠듬한 태도로 한마디 던지였다.

《술맛이 있게 해주겠거들랑 빨리 용건부터 말해야 하지 않을가?》

《용건이요? 하하하. 선생님두.》

리병찬은 번연한걸 가지고 왜 따분하게 만드느냐는 표정을 짓는다.

《이게 용무지 다른것이 있습니까. 그저 오늘은 이렇게 머리를 좀 쉬우자는것입니다.》

《그러지 마오. 당신이 나에게 이런 〈호의〉를 베풀적에야 아무 용건없이 그런다는게 말이 되오. 어서 터놓소. 배역을 알아야 내가 대사를 외우고 연기를 할게 아니요?》

《원 선생님도, 좋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한잔 들고 기탄없이 말씀드리죠.》

말재주로서는 한영국을 당해낼수 없다는것을 리병찬은 잘 안다.

때문에 알콜의 도움이 필요했던것이다. 역시 그런 내심을 죄다 간파할수 있었던 한영국은 흔연히 잔을 들어 마시였다. 목에서부터 명치끝까지 고드름으로 빠악 내리긋는것 같다. 그러나 안주는 집지 않았다. 위를 그냥 비워두어야 알콜의 효능이 클것이였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한가지 새소식을 알려드리자는겁니다.》

《새소식을?!》

《그렇지요. 북에서 우리한테 구호물자를 보내주겠다는 보도는 들으셨겠지요?》

《아하, 그거!》

한영국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소식이란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 그런 후에 찰랑찰랑한 술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리병찬의 얄팍한 입술에 얄궂은 미소가 스쳐갔다.

《그게 어쨌다는거요?》

한영국은 빈잔을 상우에 내려놓고 수건을 들어 입언저리를 얌전히 닦았다.

《구호물자에 대한 불필요성쯤 만들어내라는거요?》

약간 도전기가 어린 물음이였다. 두어잔 술기운에 취기가 오르며 저도 몰래 담이 커졌다. 최근에 와서 갑절이나 우울해지던, 그 무엇인가에 대한 마음속 울분을 이런 식으로라도 터쳐놓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운 한영국이였다. 그러나 그 계선이상은 결코 넘어서지 않았다. 까닭은 앞에 앉은 녀석이 살살 웃어주며 《친절》과 《호의》를 표하지만 그 웃음속에는 언제나 살기가 번뜩이고있다는것을 잘 알고있기때문이다.

《아닙니다. 선생은 지내 성급하군요.》

리병찬은 이런 식으로 그의 흥분을 일단 눅잦혀놓고나서 여전히 상대방의 혼을 빼낼듯한 간사한 웃음을 살살 지으며 주를 달았다.

《이번에는 북의 구호물자를 받겠다는 성명을 내게 됩니다.》

《뭐요, 그게 사실이요?!》

한영국은 귀가 번쩍 틔여 상앞으로 바투 다가앉았다.

《사실입니다. 아마 래일 아침보도에 나갈것입니다. 그때에는 필경 온 세상 사람들이 지금 선생님처럼 깜짝 놀라게 될것입니다.》

한영국은 떨떨해졌다. 사실로 믿기에는 너무도 어망처망한 놀라운 희소식이였고 보도계에서는 일대 선풍을 불러일으킬만 한 대사변이였다. 그러나 그는 흥분에 앞서 날카로운 경계의 신경이 자기감정의 테두리를 억척같이 감싸버리는것을 느끼였다. 아직 당국이 발표하지 않은 이 중대한 사변을 이자가 무엇때문에 자기에게 먼저 귀뜀해주는것인지 알수 없었다. 그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흥분을 애써 누르고 짐짓 태연한 기색으로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모르겠군. 난 도무지 믿어지지 않누만.》

《그럴겁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떨떨했었으니까요. 그러나 이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9월 8일 북에서는 쌀 5만석, 천 50만m, 세멘트 10만t, 기타 의약품을 구호물자로 보내기로 한다고 성명했습니다. 량도 그만하면 상당한겁니다.》

리병찬은 그의 빈잔에 술을 또 부었다. 그때까지도 석연치 않은 기색을 풀지 못한채 쭝해 앉아있던 한영국이 다시 물었다.

《병찬군, 빙빙 에돌지 말고 툭 털어놓고 얘기해보오. 당국에서는 어떻게 돼서 이번엔 북의 구호물자를 받기로 용단을 내렸소? 결코 북의 의도를 받아들이자는 선의는 아니겠는데···》

《역시 선생님의 날카로운 추리력앞에 저는 고개가 숙여집니다. 바로 그겁니다. 〈북한〉에서는 구호물자를 보내주겠다고 세계에 대고 공포하긴 했지만 사실은 빈껍데기란말입니다.》

《빈껍데기라니?》

《아무것도 줄것이 없으면서 한번 선전공세를 취해보자는거지요. 그래서 우리가 안받겠다면 〈봐라, 남에서는 동포애가 없다, 인도주의가 없다, 백성들에 대해 관심이 없다〉하고 세계에 대고 한바탕 우리를 헐뜯어보자는겁니다. 이게 〈북한〉공산주의자들의 간교한 술책이지요.》

《모르겠소. 설마하니 그런 거짓말이야···》

《하, 이거 믿지 않는군! 우리 안기부가 장악한 정보에 의하면 〈북한〉에는 지금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쌀을 줄 여유가 없답니다. 그러니 우리가 구호물자를 받겠다고만 하면 〈북한〉에서는 부득불 쏘련이나 중국에 가서 천이나 쌀을 수입해다 줘야 할 판인데 우리가 그럴 시간적여유를 주지 않을테니까요. 그러면 사태가 어떻게 번져지겠는지 상상해보시오. 선생님의 필력을 한번 시위해볼 절호의 기회가 아닙니까.》

《···》

《선생님을 믿고 하는 말입니다만 이건 주한미국대사와 전두환〈대통령〉이 지혜를 합쳐 만든 묘안입니다. 〈북한〉공산주의자들의 모략을 밑뿌리채 파헤쳐 세상에 고발한다 이겁니다. 이번 일만 잘되면 해방후 40여년간 근 30차에 걸쳐 〈구호미를 주겠다, 전기를 보내겠다, 실업자를 구제해주겠다〉하고 이제껏 떠들어온 북의 그 모든 제기가 한갖 기만선전에 불과했다는것이 만천하에 드러날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선생은 이번에 특전을 받은 셈입니다. 선생은 이 모든것을 직접 체험하는 목격자가 될테니까요.》

《목격자요?》

《그렇지요. 제가 오늘 선생님을 조용히 만나자고 한것도 바로 그겁니다. 우리가 구호물자를 받겠다고 하면 틀림없이 실무절차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회담을 벌릴것이고 그러면 선생님은 그 회담장에 나가서 〈북한〉공산주의자들의 선전공세가 얼마나 허위적인것인가를 목격하게 될겁니다. 선생이 그걸 지상을 통해 국민들과 온 세상에 알게 해줍시사 하는 그겁니다.》

《그러니 잡아당기면서 밀어버리는 전술이구만.》

《옳습니다.》 하고 리병찬은 한영국의 팔을 다정하게 잡아흔들며 기뻐하였다.

《우리가 사람을 빗보지 않았습니다. 기쁩니다. 면도칼처럼 예리한 선생님의 그 견해가 우리에게 요구되는것입니다. 가치관이 투철한 선생이기에 우리는 크게 기대를 가집니다. 자, 어서 드십시오.》

할말을 다 하고난 리병찬은 입가에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잔을 들었다. 한영국이도 사양없이 잔을 들어 단숨에 쭉 들이켰다. 그들은 얼마간 서로 말없이 마시고 또 마시였다.

한영국은 무언지 모를 우울한 심정에 사로잡혀 기왕 입을 댄김에 의식을 잃을만치 만취되고싶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정신은 새록새록 맑아졌다.

이때 리병찬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한영국의 일거일동을 주의깊게 살펴보고있었다. 그의 표정변화와 행동거지에는 별로 특이한것은 없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무표정해보이는 그 태연한 태도가 속에서는 순편치 않다는것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있었다.

리병찬은 어제 안전기획부장 송일선을 만났던 일을 상기했다. 그도 북에서 구호물자를 보내주겠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기절초풍하리만큼 깜짝 놀랐다. 지금 백성들속에서는 수해를 입어 한지에 나앉은 사람들에 대해서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고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다. 자기의 장인으로 될 박만호와 같은 사람은 병중에 의식이 오락가락하는데도 《해주, 해주》 하고 고향을 그리워하고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북에서 구호물자를 주겠다는 소식이 퍼지면 가만있자고 하지 않을것이다. 그렇다고 선뜻 받을수도 없는 형편이다. 그러면 순수한 물에 의한 피해보다 몇배로 더 큰 《붉은물》에 의한 피해가 생길것이다, 그러면 이전처럼 이번에도 우리에게는 구호가 필요없다, 우리는 구원의 손길을 받아야 할 정도로 가난하지도 않으니 우리 앞처리는 우리가 한다 하고 거절하면 어떻게 될것인가. 그렇게 되면 《북한》의 선전공세가 뒤따를것이고 여론은 우리에게 십배로 불리해질것이다.

이런 때에 리병찬은 과장의 전화를 받고 그와 함께 부장의 방으로 올라갔던것이다. 안기부 제8과의 평범한 부원에 불과한 리병찬이따위가 부장실에 나타난다는것은 전혀 이례적인것이였다. 10년이 넘어도 부장실에 들어가보지 못한 부원이 태반이고 지어 그런 일이 한번도 없이 한생을 보내거나 퇴직하는것이 보통인것이다.

그럴만치 부장실은 엄엄하게 페쇄되여있어 내막을 얼마간 아는 사람들은 전두환의 방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리병찬이 거기에 불리워가게 되자 그는 속이 두근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때문일가? 과장도 그 내막을 아는것 같지 않았다.

응접실을 거쳐 장방형으로 된 부장실에 들어서니 회전의자에는 송일선이 의자등받이에 저빠듬히 등을 기대고 앉아있었다. 그들이 들어서자 부장은 턱으로 의자를 가리키였다. 탁자를 중심으로 세사람이 둘러앉자 송일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갑자기 불러서 안됐소. 북에서 구호물자를 보내주겠다는 보도는 이미 들었겠지. 그런데 당신네들은 무슨 일을 그렇게 하오?》

첫마디부터 가시돋힌 질책에 리병찬은 정신이 얼떨해졌다.

《〈대통령〉각하께서 얼마나 노하셨는지 아오? 망원동주민들은 이번 수재가 저수지수문을 잘 보수하지 않았기때문에 생긴 인재라고 하면서 당국에서 손해배상을 내라고 야단이래. 게다가 〈동아일보〉앞마당에 사람들이 왁작하기에 알아보라고 했더니 북에서 보내겠다는 구호물자보도기사를 실은 오늘호 신문을 광고판에 내붙였다는거요. 누구를 위한 어느쪽을 위한 신문들인가? 응? 이때문에 〈문화 및 공보부〉가 되게 얻어맞긴 했지만 그 불찌가 우리한테도 날아왔단말이요. 〈동아일보〉야 〈보도지침〉을 틀어쥔 당신네들의 담당관할이 아니요?》

(그렇구나. 그래서 《보도지침》담당인 나까지 불러들였구나!)

리병찬은 낯색이 캄캄해지고 속이 떨리였다.

《정신들을 좀 똑바로 차리고 일해야겠소. 어제 〈대통령〉각하께서도 말씀이 계셨지만 우리의 출판보도는 모두 제가달이거든. 모임서두에 각하께서는 출판보도에 대해서 매우 기분나쁘다고 하시였소. 그래 과장, 당신은 〈보도지침〉이요 뭐요 하면서 모두 꼼짝 못하게 쥐고있다고 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거요?》

차츰 송일선의 어조가 거칠어지고 종착점에 이르러서는 책임추궁이 뒤따르게 되자 영민한 과장은 리병찬에게 시선을 보내였다. 《보도지침》은 당신이 담당했기때문에 책임적인 답변을 이 자리에서 해보라는것이다. 함정에 빠져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리병찬은 재빨리 발뺌을 하였다.

《저는 요새 아시다싶이 과장님의 개별지시로 딴 사업을···》

《딴 사업이란 도대체 뭐요? 내가 모르는 일이 우리 이 안기부에서 생겨날수가 없겠는데.》

벌써부터 혈압이 올라 그런지 얼굴이 벌겋게 된 송일선은 목덜미를 주무르면서 아니꼽게 과장을 쳐다보고있다.

《다른것이 아니라 부장님 명의로 워싱톤에 보낼 글을 이 병찬군에게 씌우고있습니다. 그래서.》

《여보, 그거야 뭘 품이 들게 있소? 한 열흘동안 극적극적하면 되는건데. 좋소. 교훈을 찾소. 그건 그렇고 내 당신들에게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려줄게 있소.》 하고 송일선은 신중한 기색을 짓고 등받이에서 몸을 일으켜세웠다. 그리고는 북에서 주겠다는 구호물자를 받겠다고 성명을 낸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리병찬과 과장은 동시에 어리벙벙해졌다.

그러자 송일선은 의례히 그럴줄 알았다는듯이 껄껄 웃고나서 구호물자를 받겠다는 파격적인 성명은 주한미국대사와 전두환《대통령》이 지혜를 합친 결과에 생겨난 《걸작품》이라는것을 요약해서 들려주었다. 그제서야 리병찬은 송일선이 왜 자기를 불러들였던지 그 까닭이 리해되였다.

이리하여 그는 오늘저녁 한영국이와 조용히 마주앉았는데 예상외로 첫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리병찬은 그가 정의감이 있고 의리심이 강한 사람이라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의 미숙한 글재주를 맨처음 발견하고 내세워준이도 다름아닌 한영국이라는것을 그는 언제나 잊지 않고있었다. 하긴 20여매밖에 되지 않는 그 원고속에 비껴있는 사회에 대한 예리한 분석, 박력있는 필치, 섬광처럼 번뜩이는 추리력이 안기부 해당 인사과의 관심에 들게 되여 종당은 출세의 첫 디딤돌을 딛게 되였지만 어느모로 보나 한영국은 리병찬에게 있어서 허술히 대할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안기부에서 맡은 자기의 직분이 의리따위에 구애되여가지고서는 도저히 수행될수 없는것임을 새삼스레 절감하였다. 당국의 정치적리해관계에 따라 때로는 검은것도 희게, 흰것도 검게 만들어야 하는것이 이른바 안기부의 《보도지침》이였다. 그렇다고 하여 그걸 부정하거나 그에 대해 사소한 의혹이라도 가진다면 하루아침에 목이 달아나고 귀신도 모르게 저승으로 가기 마련이였다.

리병찬은 대학시절 학생시위에 참가했던 적지 않은 학우들이 신념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철창가로 끌려가는 엄혹하고 무자비한 현실을 목격했고 투쟁이란 혈기왕성한 젊은 한때의 류행병과 같은것이라면서 생활전선에 뛰여들어 예쁜 안해를 얻어 안락한 생활을 추구하고있는 동료들도 보았었다. 그들은 제나름대로의 생활관이 있었다. 거기서 그가 얻은 결론은 사람은 어디까지나 환경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고 그속에서 생존하자면 어차피 환경에 순응해야 한다는것이였고 그럴바치고는 주도적인 순응자가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순응자》로 되자는것이였다. 이런 그에게 장애로 되는것은 한영국이였다.

기자로서의 명성도 일정하게 있고 영향력도 적지 않은 한영국은 언제나 그 글이 말썽이였다.

《나는 오는데 너는 왜 가느냐?》라는 기사를 내여 안기부의 신경을 돋구게 하는가 하면 일산고아원을 찾았던 방문기 《인도주의 극치-일산고아원》을 내여 한동안 사회계에서 여론이 분분하게 했다. 매판자본가들이나 공관들의 추문을 들춰내여 망신을 시킨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만큼 적수는 많았으나 또 그만큼 그를 두려워하기도 하였다.

예리하면서도 날카로운 그의 필력을 당국의 리익에 맞게 잘 리용한다면 그 영향력은 몇배로 커질것이였다. 이런 의미에서 한영국은 리병찬의 앞길에 놓인 다루기 말짼 《장애》이면서도 출세의 디딤돌로 될수 있는 《좋은 먹이》이기도 하였다.

실상 한영국에게서는 《좋은 먹이》로 될 조짐이 보이고있었다. 령리하고 로숙한 그는 절대로 당국을 맞대놓고 조겨대거나 당국에 도전하는 따위의 어리석은짓은 하지 않았다. 대체로 개별적인 사람들과 개별적인 대상에 대한 객관보도로서 그 진실을 파해치군 했으며 당국과 관련되는 문제인 경우에도 직선적이 아니라 멀리 에돌아 표현하군 했다. 이것은 그가 권력을 두려워하고 경계하고있다는것을 말해주고있었다. 그의 이런 약점을 잘 리용하면 당국이 원하는대로 글을 쓸수 있도록 만들수 있다고 리병찬은 확신하고있었다.

리병찬은 자기의 이 계획이, 함정에 빠진 승냥이를 구해준 토끼에게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배고픔도 덜게 해달라면서 자기를 구원해준 토끼를 잡아먹으려 했다는 동화속의 승냥이심보와 비슷하다는 느낌도 들었으나 인차 머리를 저었다.

(세상리치란 모든게 그런거다. 남을 잡아먹지 않으면 내가 살수 없는것이 인간세상이거든. 나를 이 길로 출세케 했으니 도울바엔 깨끗이 돕는것도 나쁘지 않지.)

이런 생각으로 리병찬은 배심이 든든했다. 그는 이미 작정한대로 올가미를 든든히 씌우리라 결심하고 잠바 염낭에서 신문 한장을 꺼내 탁자우에 펼쳐놓았다.

한영국이 넌지시 넘겨다보니 《동아일보》였다.

《여기 난 이 글이 한선생거지요?》

그는 손가락으로 1면 하단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나는 오는데 너는 왜 가느냐?》는 제목으로 된 기사가 실려있었다.

《그렇소. 거기에 기자이름도 찍혀있겠는데···》

《뜻밖입니다. 수재가 아니고 인재라는건 뭐며 간다는건 또 누구지요?》

《난 딴것이 없소. 액면그대로니깐. 기자가 할수 있는 직분을 난 그대로 수행했을뿐이요.》

《좋습니다. 난 선생님이 쓴 글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시비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당국의 립장이야 봐야지요. 선생님도 이 〈한국〉의 언론인이 아닙니까. 선생님을 생각해서 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여 한참동안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얼마후 그들은 밖으로 나왔다. 리병찬은 한영국이와 헤여질 때 손을 흔들어주며 《선생, 그럼 부탁합니다. 선생님의 뒤는 제가 늘 보살펴드린다는걸 잊지 마십시오.》라고 위협절반 롱담절반의 의미깊은 소리를 한마디 던지였다. 그 한마디 의미가 내포하는 뜻을 감수성이 예민한 한영국이 모를리 없었다.

(뭐, 보살펴드린다고?)

한영국은 쓰겁게 웃었다. 무심히 던진것 같지만 신경을 몹시 자극하는 말이였다. 그 말을 뒤집어 엎으면 그의 일거일동을 지켜보고있겠다는 소리다. 여느때같으면 가슴이 섬찍하고 머리칼이 곤두설 위협이지만 몹시 흥분한 지금으로서는 다만 불쾌하고 역겨울뿐이다.

한영국은 터벅터벅 밤길을 걸었다. 취기는 순간에 달아나고 머리가 싸늘해졌다. 그러자 방금전에 리병찬이 들려준 말마디가 되살아오르며 피를 끓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