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5

 

제 1 장

5

 

물, 물, 온통 물이다.

서울은 어디나 물천지로 되였다.

정답고 은혜롭기만 하던 물이 그만 미쳐버리고만것이다. 괴물이 되여버린 물은 용을 쓰면서 무엇이나 다 압도하고 자빠뜨리면서 자기앞에 굴복할것을 요구하였다. 언덕과 나무, 논과 밭, 집들과 극장, 영화관들, 교량과 석축제방들을 무너뜨리고 모두다 한본새로 무자비하게 밀어버렸다. 벌거죽죽한 물이 서울일판을 잠그었는데 또 그 물과 비슷한 빛갈의 하늘이 머리우에 음울하게 드리워져있다. 안개는 모든것을 몽롱하게 만들어 사람들이 이 재난이 어떠한것인가를 인차 알아볼수 없게 하고있다.

《동아일보》사회부 기자 한영국은 무턱대고 제1한강교복판에 들어섰다. 발들여놓을 짬없이 물을 피해나온 사람들이 꽉 찼다.

강물과 거리의 한계가 없어져서 물이 늠실거리는외 아무것도 보이는것이 없었다. 벌써 아침해가 한발이나 올라왔을 때인데도 물안개가 뽀얗게 서려서 온 천지가 꿈속같이 몽롱하였다.

다리밑을 내려다보니 물비린내가 확 풍기면서 교각에서 튕겨난 물방울이 온몸에 들씌워졌다. 순식간에 턱밑에 물방울이 맺히고 목덜미로 물이 흘렀다. 한영국은 카메라가 젖지 않게 옆으로 돌려메고나서 안개서린 상류쪽을 바라보았다. 물에 뜬 온갖것들이 서서히 미끄러져내려오면서 자기 본색을 차츰 드러낸다. 박자에 맞추기라도 하는것처럼 흥떵흥떵 흔들리면서 내려오는것은 김치독, 장독 등속이고 또 통나무들도 그와 비슷하게 흘러온다. 왝왝 소리를 지르면서 떠오르는것은 단말마적으로 용을 쓰는 돼지들이다. 말이나 소는 아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대가리를 쳐든채 허우적이고있다. 농짝, 궤짝, 판자, 울바자, 풀단 등 별의별것들이 다 떠내려온다. 마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건들이 앞을 다투어 나타나서는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고있는것 같다. 벼짚이영을 지붕으로 떠인 초가집이 통채로 떠내려온다. 지붕우에는 강아지새끼를 안은 발가벗은 사내아이와 로파 하나가 앉아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팔을 휘젓고있다. 사람을 실은 그 지붕은 순식간에 가까와오더니 교각을 떠받고 물속에 산산이 흩어지고만다.

참경을 목격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째지는듯 한 비명을 지르고있다.

강남, 강서 지구들이 태반이 그런것처럼 여기도 발을 들여놓을수 없었다. 말그대로 아비규환이다.

사람들의 비명소리, 통곡소리, 누구를 찾는 소리, 위험하다고 주의를 주는 소리··· 들고 이고 메고 피난을 가는 사람들, 어데론가 몰려가는 사람들, 또 이쪽으로 밀려오는 패거리들···

와지끈와지끈 집이 무너지고있다. 한영국이 어데로 가볼가 생각하고있는데 천둥소리처럼 둔중한 음향이 울리는것과 함께 바로 앞에 있던 2층집 하나가 털썩 나자빠진다.

강물에서는 모든 잡것들이 자취없이 잠겨버리는것이라면 여기서는 온갖것들이 물우에 솟아오르는것이다. 사람들, 가장집물들, 상점의 물건들이 물에 떠오르거나 사람들이 끄집어내다 무져놓는다. 되도록이면 수면에서 높은데를 선택하다보니 눈에 잘 보이는데 로출되기마련이였다.

한영국은 벅작소동이 일어난 그속에서도 자기 직무를 잊지 않고 잘칵잘칵 사진을 몇장 찍었다.

이런 정황에서 글을 쓰기 위해 취재를 한다는것은 도저히 불가능할뿐더러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몇장의 사진을 더 찍고나서 오후쯤에 다시 와보리라 마음먹었다.

얼마간 시간을 보낼데를 생각하다가 남산쪽에 있는 양아버지네 집에 가보기로 하였다. 피해지구는 아니지만 그래도 와보지 않았다고 칭원할수도 있는것이다.

그는 취재용 《도요다》를 몰아 벽돌담장이 높이 들린 고풍의 양옥안마당에 들어섰다.

《아버님 계세요?》

그는 마당에 딴채로 세운 실험실문을 열며 소리쳤다. 언제보나 실험실안에 흰 위생복차림으로 앉아있군 하던 그의 양아버지 양기섭이 현미경에서 눈을 떼며

《이거 어찌된 일인가? 꿈쩍 않더니!》

하고 반가와한다.

《그새 뭐 별일 없었어요?》

한영국은 몹시 늙어보이는 양기섭의 얼굴을 쳐다보며 다정하게 인사를 하였다.

《아니, 이거 자네 물에서 건져낸것같은 꼴일세그려. 거긴 아빠트 3층이니까 별일없을줄 알았는데.》

《네! 하느님 덕분에 집엔 별일 없습니다. 그런데 잠간 강변과 거리를 돌아보니 말이 아닙니다. 온 서울이 물에 잠겼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필요되지 않던가? 하두 못된 세상을 만들어놓으니까 하느님이 심판을 하자고 잡도리를 한것이겠지.》

《아닌게아니라 수재가 큰것 같습니다.》

《수재? 자넨 지성인인데 그렇게 보나? 수재가 아니라 인잴세. 인재.》

《하긴 그럴수도 있지요. 어쨌든 큰일은 큰일입니다.》

《이번엔 잘 투시해보고 본질을 밝히라구. 카메라처럼 외형이 아니라 렌트겐처럼 안속을 들여다보아야 하네.》

양기섭은 벗어놓은 옷을 줄에 널어주면서 의자에 앉으라고 한다.

《그런데 피난온건 아니겠지.》

양기섭이 의아한 눈길로 쳐다본다.

《오후에나 나가보아야지 지금 당장은 취재라는 말도 붙이지 못하겠습니다.》

《그럴테지.》

《이쯤 사태가 벌어졌으니까 아버님네 인도주의가 활기를 띠게 되였습니다.》

《뭐? 인도주의, 내가 뭐 스위스의 쥬낭인가 하나?》

《아니면 〈대한〉적십자사중앙위원이 무관심할수야 없잖습니까?》

《명색이야 화려하지. 그러나 〈대한민국〉적십자사는 곯을대로 곯은 고름주머니야, 몽땅 부정부패여서 인도주의는 썩을대로 썩었어. 적십자병원과 혈액원은 몽땅 협잡판이 되였구 고아원들마다에는 혼혈아들이 꽉 찼는데 그것들에 주는 급식비를 쓱싹해서 먹는판이여, 아이들은 영양실조에 걸리고···》

《아무튼 이런 재난에 적십자사가 침묵할수야 없잖습니까?》

《리치로 보면 그런데 〈대한〉적십자사는 망조가 든지 오래네. 이제는 어느 누가 망조가 든 적십자에 입김을 불어넣게 되겠는지.》

《너무 실망하진 마십시오. 인도주의가 인간에게 필요한 이상 적십자는 존재할것입니다.》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겠나.》 양기섭은 눈물이 글썽해서 장탄식을 하였다.

《적십자리념이야 오죽 좋은가. 인도, 공정, 중립, 봉사, 단일, 보편, 참 훌륭하지.》

《기억력이 대단합니다.》

《기억력? 허허, 어리석은 애착이지.》

하긴 그 인도주의때문에 한영국이 그와 인연이 생겼을수도 있다.

이름있는 과학자 양기섭은 다른것은 다 거절하고 인도, 중립을 주장하는 적십자에 20년이나 이름을 걸고있었다.

그의 말대로 18명의 위원가운데 《대통령》, 《총리》, 현직장관 6명의 고정석을 떼고나면 고작 10명남짓한데 그중 정치적, 재정적 고려로 절반을 또 떼우고 그다음에 일반 민간인이 차지하는 자리에 그가 끼워있었다. 그럴만치 그는 순수한 학자였고 또 권위있는 인물이였다.

그는 80이 오래지 않은 고령이지만 원기가 왕성하고 머리가 잘 도는 축이다. 그는 아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아무때고 실험을 중단하고 시간가는줄 모르고 한담을 늘어놓군 하였다. 그는 미생물연구에만 몰두하는것이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 문화의 각 방면에 걸쳐 관심을 가지고있었고 그만큼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선친의 영향으로 력사학을 전공했었다.

근대사를 전문한 그는 일본동대시절에 그것을 포기하고 생물학으로 전환하였고 그것때문에 미국에 류학한적도 있었다. 그는 늘 자기의 한생을 두 토끼를 좇는 사냥군에 비유하였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력사를 연구하였기때문에 력사를 생업에서 제외할수 없었고 력사에 지탱해서 생물학을 하고있다고 하였다.

그의 방향전환은 2차대전이후시기에 와서 더욱더 공고한것으로 되였으며 70년대에 들어서서부터는 드놀지 않는 신념으로 되였다. 자료에 의하면 금세기안으로 세계는 60억이상의 인구를 먹여살려야 하며 그후 또 한세기안으로 100억이 되면 인류는 거주지마저 모자라 바다밑을 개발하든지 땅속 혹은 우주공간으로 옮겨가든지 여하간 모종의 대책이 있어야 한다는 가설이 나오고있는 형편이다. 그때에 가서도 인류가 밀이나 쌀과 같은 량곡에 운명을 걸고 있을수는 없기때문에 바다를 농경지로 혹은 목축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여기서 흥미있는것은 어디서나 생산할수 있는 미생물에 의한 새로운 형의 식량개발이다. 양기섭이 흥분을 가지고 대하게 된 첫 계기는 도이췰란드의 학자 막스, 델부르그 등이 식료효모로써 로자헤퍼(장미색효모)라는 야생효모에 착안했었다는 자료에서부터였다.

그 연원을 캐면 1차세계대전시기 식량위기에 직면한 도이췰란드의 당시 황제 웰헬름2세가 과학자들의 제의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서 어느정도 진척시켰던것이 그 출발로 된것이다. 가까이에는 패전한 일본이 톱밥이나 강냉이송치에서 단백이나 당을 추출했다는 기록도 있다는것이다. 언젠가 한영국이 《아버님의 연구과제는 너무 료원한데요.》 하니까 한참동안 껄껄 웃고나서 옹근 한강의에 해당한 설명을 늘어놓은적이 있었다.

《력사는 한사람의 당대에 어느 한 리념이나 사변이 옳다 그르다 하고 평가를 내릴만치 속도를 가지고있지 못하다.》

이렇게 양기섭은 자기를 합리화하였다. 바로 이런형의 인간이기때문에 의지가지없던 한영국이 지금과 같은 《아들》로 되였다고도 볼수 있었다.

유복자로 태여난 한영국은 열네살때인 6. 25 며칠후에 형인 한영도와 헤여졌다. 같이 살던 어머니는 그해 겨울 미군 군용트럭에 치워 사망하였다. 홀연 고아가 되여버린 그는 페허가 된 서울거리를 헤매면서 밥을 빌어먹으며 살았다. 열네살난 사내애에게 직업이 차례질수 없고 누구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한데 어느날, 바로 지금 이 집자리에서 어느한 중년사나이를 만났다. 무너진 집터에서 벽돌장을 주어내고있었다. 화로불에 마주앉아 불을 쬐면서 몇마디 묻는 말에 대답을 했는데 양기섭이 놀랄만큼 흥미를 가지고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령리하고 똑똑하다고 감탄해하는것 같았다. 그래 할 일이 없으면 그 이튿날에도 또 와서 같이 일을 하자는 그의 말에 그렇게 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여 처음에는 심부름군으로, 다음에는 양자로 되였다.

양기섭은 처음 그를 자기 연구사업의 조수로 만들겠다고 하였으나 뒤늦게 중학을 나온 한영국이 차차 커가면서 활동형으로 번져가자 억지로 개성을 휘여서 생물학자로 만들수 없다고 보아 사회학을 하든 문필가가 되든 하고싶은것을 하라고 내버려두었다. 그리하여 한영국은 양아버지의 후원속에서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나올수 있었던것이다.

무릎을 마주하고 앉자 그들은 자연히 지금 온 서울시내와 남조선 전역을 휩쓸고있는 큰물피해에 대해 걱정하게 되였고 한지에 나앉을 리재민들과 빈번히 재난을 빚어내는 한강이며 락동강, 금강의 범람을 두고 개탄하면서 화제를 시국한담으로 번져갔다. 그러다가 이번 전두환《대통령》의 일본행각문제가 론의에 오르자 양기섭은 훌렁 벗어진 이마가 시뻘겋게 되면서 열을 올리였다.

《끝내 왜놈들한테 굽신거리자고 찾아간다는거지.》

평상시에는 언어문화에 대해서도 대단히 의의를 부여하고있던 그인데도 걸직한 욕설을 함부로 퍼부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앉았다 한다.

《그런 무식하고 잔인한놈이 대통령을 한다는것은 나라의 수치야. 그놈은 수천명의 동포를 하루사이에 학살한 광주의 죄상만 가지고도 천추에 용서받을수 없는 범죄자이고 악마라는것이 명백하거든.》

맞장구를 치면 양기섭의 분노는 끝없이 뻗어갈것 같았다. 그래 한영국은 오래간만인데 바깥에 나가 바람이나 쏘이지 않겠는가고 하였다.

그렇게 되여 한영국은 이미 습관된대로 양기섭의 팔을 부축하고 천천히 보도를 따라 공원으로 올라갔다. 나무그늘이 서늘하였다. 벗나무잎이 기껏 푸르러졌고 울타리를 지은 매화덩굴에서는 향기를 풍기고있다. 지지리도 끌던 늦장마도 자기 할노릇을 다 했다는듯이 서울장안을 제 마음대로 휘둘러놓더니 거뜬한 기분이 되여 하늘이 풀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무잎들에는 아직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참, 자네 〈주체사상에 대하여〉라는 책을 다 읽어봤나?》

양기섭은 시인 김소월시비가 있는앞에서 걸음을 멈추며 나직이 말을 떼였다.

《읽어보았습니다. 읽어도 두번 세번이나 명심해 읽었습니다.》

양기섭은 장미가 꿋꿋이 일어설만치 긴장해져서 한영국을 잠간 쳐다보다가 장의자에 가앉자고 하며 먼저 자리를 잡았다. 양기섭은 고개를 끄덕이고나서 천천히 뒤를 이었다.

《나는 한당대 숱한 책을 읽었지만 그 책에서처럼 눈이 번쩍 뜨이기는 처음이였네. 그래 혼자만 알구있을수 없어서 자네더러 읽어보라고 한거네. 나는 주체사상에 진심으로 매혹되였네. 왜 그런가? 그것은 우선 학술적으로 봐서도 훌륭한것이라고 생각했기때문이네. 인간에 대한 탐구가 그동안 얼마나 많았는가. 불교에서는 사람을 두고 이르기를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했네. 또 공자, 맹자의 견해를 보면 그것도 전자와 어슷비슷하네.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놓은것을 봐도 역시 어슷비슷하네. 가령 〈동몽선습〉에 쓰기를 우에는 하늘이 있고 아래에는 땅이 있나니 하늘과 땅 그어간에 있는 만물가운데서···》

그는 혀가 잘 돌아가지 않아 약간 더듬기는 했지만 그래도 거침없이 내리외웠다.

《천지지간 만물지중에 오직 사람이 가장 귀중하니 바로 귀한 그 사람은 다섯가지 륜리를 가지고있기때문이니라고 하였네. 그런데 주체사상은 사람이 귀하다는 즉 륜리적범주에만 국한하지 않고 사람이 자연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으며 그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것을 밝혔거든. 인간은 자주성을 가진 산 존재이고 자주성은 인간의 생명이라고 하였네. 여태까지의 철학에서 인간은 언어를 가진 동물이다. 인간과 뭇짐승과의 다른점은 로동을 하는것이며 로동도구를 만들고 지닌것으로 구별된다, 등등이였지.

인간의 참된 본성과 가치를 이렇게 투철하게 천명한적은 없었네. 희랍 아테네의 〈지혜의 신전〉현판에는 〈자기자신을 알라〉라고 새겨져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결국 인간이 인간자체를 알아야 한다는것이 아니겠나. 그런데 주체철학을 보면 간단명료하고 론의할 여지없는 정당한 정의를 내리고있네. 인간은 세상만물의 주인이며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존재라고 소리높이 구가했단말일세. 난 이 명철한 명제를 아테네신전 현판에다 당당하게 바꿔걸어놔야 한다고 보네. 주체사상은 값진 진리를 발견해냈고 그것으로 해서 사람들의 리성을 매혹시키는것이야. 안그런가?》

양기섭은 80로인답지 않은 생기어린 웃음을 온 얼굴에 띄우고 한영국을 쳐다보았다. 온갖 사물과 현상에 대해 회의적으로 대하던 양기섭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이쪽의 표정을 살피고있는것이였다.

《그렇습니까?》

한영국은 측은한 눈길로 로인을 한참동안이나 마주보았다. 론박할 여지없이 옳다. 자기도 옳다고 생각은 했지만 양기섭이처럼 력사적견지에서, 비교의 관점에서 고찰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칼날처럼 날카로운 정치투쟁속에서 산생되는 그 어떤 사상이나 주의주장이든 겉으로 표방하는 매혹적인 말마디들을 곧이곧대로 믿을수는 없다고 보았다.

《모든 정치인들의 주장이나 저서들을 보면 한결같이 옳고 지당한 주장이 넘칠만큼 꽉 들어차있는것이 엄연한 현실이고 인간세상입니다. 말이나 성명으로는 다 그럴듯 하지요. 때문에 나는···》

한영국은 하던 말을 끊고 간이매점에 가서 두개의 에스키모를 사들고왔다. 좀 열을 올렸던지라 혀에 대인 크림은 온몸을 싸늘하게 만들었다. 양기섭은 이가 시려 입에 대지 못하겠다고 머리를 저으면서 어서 하던 말이나 계속하라고 눈짓으로 재촉한다.

《때문에 나는 모든 리념이나 사상을 순수 그 사상을 피력한 말이나 글만 보고 평가할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나타난 행동을 보고 그 사상을 구현한 현실을 보고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언행의 일치성을 문제삼는거지요. 아버님이나 내가 신봉하고있는 그리스도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말보다 오히려 행동적으로 지극했다는 그 점에서 오늘까지도 숱한 사람들이 믿고 따를만치 견인력을 가지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막에서 목이 말라 허덕이는 자에게 물을 주고 문둥병소굴에 서슴없이 찾아들어가 위안을 했다는 이점이 수억의 신도들이 자랑하는 성서의 가치란말입니다. 오늘에 와서 인간의 육신이나 령혼이 이른바 천당에 간다는것을 고스란히 믿고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물론 〈주체사상에 대하여〉라는 저서는 인간 그 자체를 사랑하는데 기초해서 서술한 뛰여난 리념저술이더군요. 아주 매혹적이구요.

나는 그렇게 보고있습니다. 주체사상을 한마디로 집약하면 인간에 대한 참다운 사랑의 철학이라고 할수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그 매혹적인 리념을 현실적으로 어느만큼 행동으로 옮기고있는가 하는 점에서는 믿기 어렵지 않습니까? 북의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있기때문이기도 하겠지요. 듣건대는 지금도 북에서는 계급투쟁이라는것을 계속 주장하고있다는데 인간의 계급적집단과 집단호상간의 투쟁을 장려하면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강요한다는것은 뭔가 모순되는게 있지 않습니까?》

한영국은 문득 가슴이 뭉클해나서 말을 더 해낼수 없게 되였다. 흉벽이 쿵쿵 울릴만치 심장이 뛰며 옥죄여들었다. 전쟁때 의용군으로 북에 들어간 형이 갑자기 생각난것이였다. 십중팔구 형은 전쟁의 동란속에서 살아나지 못했을것이다. 다행히 살아서 이북의 그 어딘가에서 목숨을 부지하고있다 해도 말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계급투쟁》이라는 와중속에서 어찌 숨인들 제대로 쉬겠는가? 북에 들어간 이남출신 의용군은 따돌림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한영국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이 가슴속의 아픔을 감춰둔채 비밀로 간직해오고있었다.

그는 심지어 양기섭의 양자로 들어가면서조차 자기의 가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것이 없다고 했으며 지금껏 줄곧 속여오고있는것이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양기섭은 가벼운 한숨과 함께 말하였다.

《하긴 자네 말이 옳을수도 있네. 학설은 곧 생활이 아니니까. 생활은 적응되지 않으면 사멸되고만다는것을 일찌기 가르치고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