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장 3

 

제 9 장

3

 

극장무대의 막이 다시 오르며 꽃파는 처녀의 웃음띤 얼굴이 나타나자 온 장내는 떠나갈듯 한 박수소리로 차넘쳤다. 반쯤 자는듯싶던 로찌도 덩달아 박수를 치고는 손수건으로 눈굽을 닦는 런니를 보자 비양대듯 말했다.

《〈혁명의 꽃〉을 샀으니 이젠 어델 간다?》

런니는 로찌의 안경밑에서 차겁게 웃는 눈에 웃음을 지어보였다.

《로찌, 음악이 좋지 않는가요?〈음악은 정신속에서 일상생활의 먼지와 때를 씻어준다.〉 누구의 말이던가요?》

《바하요.》

아이레스는 로찌앞에서 애처로울 정도로 굽어드는 런니가 측은했다. 로찌는 아이레스의 말에 심술궂은 눈길을 던졌다.

《바하건 바카스신이건 다 선전이야. 이왕지사 머리를 씻을바에는 어데든 안내하지.》

로찌는 런니를 돌아보며 말했다. 밖에 나서자 로찌는 《꽃파는 처녀》라는 제목에 끌려 공연히 극장에 왔다고 게두덜대며 여기 최고급식당이 어디냐고 런니에게 물었다.

《글쎄요. 별로 식당에 다니지 않아서··· 참, 옥류관이 좋아요.》

《마까로니식당.》

《아니, 국수와 마까로니는 달라요. 거기선 조선국수가 전문이지만 서양료리도 하지요.》

《아이레스, 반대없겠지?》

《마음대로―》

아이레스는 로찌가 자기를 불러낸 리유가 무얼가 하고 생각하며 선선히 응했다.

그는 오늘도 런니만 아니라면 로찌의 청을 거절했을것이다. 로찌는 아이레스가 도착한 첫날 그가 든 호텔에 나타나 개막행사때부터 란장판이 되게 해야 한다고 하며 아이레스네 대표단에서도 프랑카드든 삐라로든 이 나라를 헐뜯는 충격적인 행동을 취해줄것을 부탁했다.

아이레스는 알겠노라는 식으로 적당히 대답하였다. 그리고는 잊어버렸다. 그러자 로찌는 개막행사가 끝난 다음날 아침 또다시 아이레스에게 나타났다. 아이레스가 《자연 및 환경보호》토론회가 열리는 청년호텔 회의실로 떠나려던 참이였다. 로찌는 그 토론회에서 조선을 때리지 않을바치고는 참가하지 않고 자기와 중요문제를 의논하자고 하였다.

아이레스는 그 청을 거절하였다. 토론회장에 가서는 환경오염과 파괴를 막기 위한 노력에서 조선을 따라배워야 한다는 여러 나라 대표들의 연설에 박수를 보내였고 그 자신도 연단에 나가 생태환경유지와 주민생활의 편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토론하였다. 그날부터 오늘까지 그는 모든 행사장들을 빠질세라 찾아다녔다. 단지 조선예술인들의 공연장소만은 가지 않았다. 림향옥의 생각으로 가슴아팠기때문이였다. 오늘 그는 사회경제발전에서 노는 청년들의 역할을 토론하는 회의장에서 송재경을 보았다. 연단에 나선 송재경은 미제의 침략으로 재더미가 된 땅우에 오늘의 조선을 건설하는데서 발휘한 조선청년들의 위훈을 말하여 수많은 대표들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아이레스도 그의 말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따로 만나고싶기도 하였다. 그러나 림향옥에 대한 생각이 그 충동을 물리쳤다. 피차에 어색하고 괴로울것 같아 단념했던것이다. 그 시각에 런니와 로찌가 나타나 그를 불러낸것이였다.

《여기가 좋지요. 강물우의 루각같고―》

옥류관 측벽에 붙은 발코니식탁으로 안내해온 런니가 흘러가는 강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로찌는 외국인들은 한명도 없고 띠염띠염 놓인 식탁들에 몇몇 조선사람들만이 있는것을 보고 못내 흡족한 기색이였다.

《아주 좋아. 나도 한번 와본적이 있소. 빌어먹을, 그때 왔던 녀석들은 죄다 조선마까로니에 넋을 잃더라니까. 런니양, 미안하지만 메뉴를 부탁하오. 공주님이야 이젠 절반 평양처녀니까. 있는것 다 가져오게 하고··· 돈은 내가 내겠소.》

아이레스는 로찌의 희떠운 소리에 웃었다.

(한푼을 두고도 벌벌 떨던 녀석이 꽤 통이 커졌는걸―)

로찌는 게걸든 사람처럼 위스키에 포도주를 마구 들이키다가 들었던 포도주잔을 바닥에 내던졌다. 쟁강! 하고 깨여지는 소리에 식사를 하던 사람들이 놀란 눈길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로찌씨, 여기선··· 실례예요.》

《뭘, 돈을 내면 되지.》

《돈이 문제가 아니예요.》

《이봐, 런니양, 이건 런니양과 아이레스의 래일을 축복하는 의미야. 래일, 래일이란 말이야.》

래일이란 말에 런니는 두려운 눈길로 로찌를 스쳐보고는 아이레스에게 숫된 미소를 보내며 깨여진 유리쪼각들을 구두끝으로 살살 쓸어모았다.

아이레스는 런니가 다섯달동안 조선에 체류하는 기간 몹시 달라졌다고 생각하였다. 자기의 미를 도전적으로 시위하듯 하던 교태기도 없어지고 광택이 나던 화장대신 연한 화장으로 하여 애된 소녀다운 귀여움까지 자아냈다.

《아이레스, 자네도 좀 취하라구.》

로찌는 맥주잔에 술을 부어 아이레스에게 내밀었다.

《이때문에 불렀나?》

《허, 내 말하지 않았나. 런니양과의 상봉연때문이라구.》

아이레스는 잔을 받아 조금 마셨다. 목줄기가 뜨끔해지며 머리가 핑― 돌았다.

《오늘은 괜찮은데요. 더 드세요.》

런니는 포도주잔을 내밀었다. 그의 풀색 브라우스자락이 벌려지며 부푼 가슴이 눈에 띄였다.

(저기가 과연 금단의 구역이 되여있을가?)

아이레스는 런니의 잔도 다 마셔비우고 고개를 쳐들었다. 연재색 구름사이로 쪼각달이 보였다. 껍질벗긴 바나나같았다. 부지중 아이레스는 자기자신도 이 좌석도 무의미하게 생각되였다.

지금쯤 향옥이가 어느 병상에 외로이 앉아 저 달을 볼수도 있을것이였다. 외로운 사람에게는 울고싶게 하는 달···

《아이레스, 자넨 지금 무얼 생각하나?》

《자네를 생각하지.》

《그런가···》

로찌는 웃옷단추를 터제끼고 털이 부실부실 난 가슴팍을 식탁의 물수건으로 벅벅 문지르고는 그답지 않게 심각한 상을 했다.

《자넨 래년도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한다지.》

《그걸 어떻게 아나?》

《허허, 이 로찌가 모르는게 있는가. 런니양이 자네때문에 어떻게 정조를 지키는것도 알고있고.》

그 말에 런니는 낯이 빨개지며 독살스럽게 로찌를 보다가 그의 눈길과 마주치자 고개를 돌렸다.

《로찌, 시시한 소리는 그만하게.》

《시시한거라니. 대재벌에 국회의원이라, 오죽한가. 자네의 래일에 내가 특별히 관심을 둔다는것을 잊지 말라구. 봐하니 자넨 여기 와서까지 정치연구에 몰두하는것 같은데 아주 장하이. 한데 그 빌어먹을 폰 울크하젠이라는 작자는 어찌된건가. 뭐 조선청년들처럼 일한다면 세계가 21세기전으로 수요에 대한 요구가 다 실현된다고 줴쳤다며··· 허허, 내 참 맨 눈꼴 뒤집히는 일뿐이야.》

《무엇이 뒤집힐 정돈가?》

《자넨 청맹과닌가. 여기 온 검둥이, 흰둥이들 몽땅 다 평양만세가 아닌가. 몽땅 쏴갈겨야 할것들이야. 글쎄 공산주의열병에 걸린자들은 그렇다치고라도 평양에 와서 무슨 큰 일을 벌릴것처럼 하던자들도 미이라처럼 되고말았으니 통분할 일 아닌가. 그렇게 되니 로씨야것들도 미제침략자가 이렇소 저렇소 하고 떠들지 않나. 죄꼬만 나라한테 유라시아건 아메리카주건 죄다 뒤흔들리는 판이야.》

《흔들리기야?··· 흠잡을것 없으니 그러지.》

《게 진심의 소린가, 왜 흠잡을것이 없어. 여기 저 녀급들을 하나 안아보자고 해봐. 뺨을 친다고 해. 돈을 줘도 말이야.》

《또 뭔가.》

《너무 째였어. 왜 저들이라고 돈을 주는데도 가지려 하지 않겠나. 이 역시 자유를 막기때문이 아닌가.》

《통제가 심할것이라는것은 나도 인정해. 하지만 그 통제가 녀성의 인격과 존엄을 지키게 한다는데서는 좋은것 아닌가.》

《으―음 그렇댔군. 유감인걸. 난 자네가 작년에 이 나라에 와서 미군들에게 주먹질을 한것도 알고있네. 왜? 놀라운가? 켐프씨가 그 사진을 보여주더군. 하지만 그는 자넬 믿어. 어쩔수 없이 그랬을것이라고.》

《아니, 그건 진심이였어. 남의 나라땅에 버티고 선것을 칭찬할수야 없지 않나.》

《허, 그럼 난 지금 공산주의자와 마주서있군.》

로찌의 얼굴에 살기가 어렸다. 아이레스가 히죽이 웃자 로찌는 쥐고있던 포크를 소리나게 놓았다.

《아이레스, 자넨 뭘 믿고 그러나. 돈, 돈이겠지? 하지만 자네네 회사도 미국의 재단들과 련결되여있지 않나. 만약 켐프가 이걸 알면 자네네 회사가 잘돼나갈걸세.》

《위협인가.》

《뭐 위협까지야, 생각해보게. 자넨 어쩜 그럴수 있어. 자네는 이 사회를 인정하는걸루 되는데 그래 자네네 그 많은 동산과 부동산을 다 내놓을 용기가 있나. 천만에. 아니겠지, 하지만 자네처럼 자네네 나라 청년들이 머리에 쉬가 쓸면 우선 자네부터 때려눕히고 그 재산을 다 빼앗자고 할걸세. 런니양, 알거지가 된 아이레스를 생각해보오. 멋있을테지.》

《로찌, 난 알거지가 될 생각은 없어. 하지만 그런 악담은 그만하지. 난 보고 느낀대로 말했을따름이야. 사실 자네같은 파시스트광한테는 내가 사회주의자라고 말하고싶네만 거짓말은 할수 없어.

난 사회주의는 질색이니까. 하지만 똑바로 보라구. 내가 본 이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던 그런 사회주의는 아니야.》

《<병영식>질서, <병영식>생활··· 그래 이것이 좋다는것인가.》

《정돈된 생활과 질서를 <병영식>이라면 병영식도 좋은것이지. 그래 자네의 조국에서처럼 마피아가 날치고 매일 강도질과 살인으로 란장판이 돼야 좋겠나. 자네도 전번 4차아이피씨에 참가하고 와서 나에게 말한적이 있지. 밤이건 낮이건 활개치고 다녀도 걱정될 일은 없었다고―》

《아이레스, 그러니 자넨 완전히 변절했군.》

《깨달은 셈이지.》

《좋네.》

로찌는 성난 암범같이 눈을 희번득이며 식탁우의 술잔을 쳐들어 밑굽까지 다 비워마시고 벌떡 일어섰다. 비칠거리며 문쪽으로 나가다가 벽에 부딪쳐 자빠졌다. 조선청년 두셋이 달려와 그를 부축해 일으키자 로찌는 경례를 붙였다.

《공산주의 만세!》

《취했어요.》

로찌는 차에 오르는 아이레스를 보고 염량좋게 웃었다. 아이레스가 전세로 쓰는 택시에 말없이 오르기가 멋적었던 모양이였다. 아이레스는 발동을 걸고 청년공원쪽을 보다가 거기가 오늘 여러 나라 청년들의 련대성공연장소로 되였음을 상기하고 그쪽으로 차를 몰았다.

《어델 가나?》

《흠집을 찾아봐야 하지 않아.》

《응, 건 좋아.》

로찌는 게트림을 하며 풀썩 쓰러져 등받이에 모자로 누웠다. 차는 백여메터 조금 가서 더 나갈수 없었다. 립체음악의 선률이 차흐르는 가운데 춤마당이 펼쳐져있었다.

《아이레스씨, 우리도 춤춰요.》

런니는 로찌가 코까지 고는것을 보며 그의 팔을 껴잡았다.

《로찌를 왜 무서워하오?》

차에서 내렸을 때 아이레스는 이 말부터 했다.

그의 팔굽을 잡았던 런니의 손이 바르르 떠는듯 했다.

《그런 말 하지 말자요. 전 아무런 약속도 못지켰거든요. 참 여긴 공기가 좋지요.》

런니는 그의 어깨에 뺨을 붙이며 안길듯 붙어섰다.

(모를 녀자다.)

런니가 메고있는 삼각형손가방이 무르팍에 부딪쳤다.

《그건 차에 둬둘걸 그랬소.》

《아이, 정말···》

런니는 가방을 둘러메며 교태어린 미소를 보였다. 춤마당에는 푸른색 웃옷에 흰바지를 입은 조선청년대표들과 함께 수많은 외국청년들이 엇섞여 돌아갔다. 런니는 사람들이 빼곡이 선 곳으로 아이레스를 이끌었다.

수많은 팔과 어깨들의 부딪침속에서 아이레스는 디스크도 록크도 아닌 춤가락에 맞춰 돌아갔다. 경쾌한 음악속에 녀성가수의 노래소리가 흥을 돋구었다. 《친선》이라는 조선말을 알아들을수 있었다. 그 말처럼 춤에 심취한 사람들의 눈빛과 표정은 너나없이 친선과 우애의 따뜻한 웃음을 띠고있었다. 아이레스는 런니를 여러번 놓쳐버렸다. 런니는 흑인청년들속에 끼여 돌아가다가도 인차 아이레스를 되찾아왔고 그때마다 온몸을 그에게 밀착시키며 방긋이 웃는 얼굴을 그의 어깨에 묻었다. 춤이 고조되자 아이레스는 머리가 어지러워졌고 온몸에 땀이 질펀해졌다. 과음한때문인것 같았다. 런니가 그냥 춤을 출것을 바랬으나 아이레스는 그만 돌아가자고 했다. 밀치고 부닥치는 속을 뚫고나왔을 때 런니가 깜짝 놀란 소리를 쳤다.

《핸드빽?!》

런니는 삽시에 얼굴이 파랗게 질리며 어깨로부터 발끝까지 내리 훑어보고 휘번득이는 눈길로 주변을 살피다가 미친 사람처럼 《핸드빽!》소리를 반복하며 아이레스가 말릴 사이없이 춤판으로 달려갔다. 아이레스는 어처구니 없었다.

(무엇이 들어있기에 저러는가?)

화장도구와 몇푼의 용돈일것이였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런니의 《핸드빽》소리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외국청년들은 런니를 춤의 열기에 심취한 처녀로 알았던지 얼싸안을듯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조선청년들 몇이 런니에게 의아한 눈길을 주는것을 보며 아이레스는 자기가 창피를 당하는듯싶은 모욕감속에 런니에게 다가가 억지다싶이 끌고나왔다. 그때 등뒤에서 《핸―드빽!》하는 서툰 억양의 말소리가 울렸다. 작달막한 키의 조선청년이 세모난 가방을 내흔들며 달려왔다. 런니는 그 가방을 보자 감전된 사람처럼 굳어져있다가 손벽을 탁―치고는 날새처럼 뛰여가 그것을 잡아채였다. 실오리같은 금도금사슬이 끊어져 너덜거리는 레몬빛 가방은 뽀얗게 먼지를 쓰고있었다. 땀투성이 청년은 큰일을 치르고난 사람처럼 기쁜 웃음을 지으며 후―하고 숨을 내쉬였다.

그런데 런니는 그 청년에게 인사할 생각도 하지 않고 가방의 쇠단추를 잘칵 열어 잽싼 손짓으로 안의것을 더듬어보고는 핸드빽을 가슴에 꼭 겨안았다.

《고맙소.》

아이레스는 런니를 대신해 조선말로 그 청년에게 인사를 했다. 그 청년은 놀랍다는듯이 보다가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때 런니가 손가방에서 지전 한장을 꺼내여 그 청년에게 내밀었다. 순간 그 청년은 어처구니 없다는듯이 웃고는 아이레스에게 돌아섰다. 호기심과 반가움에 넘친 눈길로 보며 뭐라 말했다. 아이레스는 그의 말에서 《송재경··· 림향옥···》이라는 이름을 알아들었다.

《스톱!》

청년은 아이레스의 손을 잡아쥐며 땅바닥을 가리켜보이고 춤판으로 달려갔다. 그 청년은 2분도 못되여 두명의 청년을 데리고 나타났다.

부다뻬슈뜨의 세계민청청사에서 몇번 본적이 있는 폴리오라는 청년과 함께 뛰다싶이 마주오는 청년은 송재경이였다.

《아이레스!》

송재경이 먼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송, 안녕하오!》

아이레스는 걷잡을수 없는 반가움속에 마주가 재경의 손을 잡았다.

《어떻게 여길 왔소?》

《구경다니오.》

송재경은 영어로 아이레스는 서툰 조선말로 대답했다.

《반갑소.》

송재경은 다시한번 그의 손을 흔들었다.

《춤판에 왔으면 춤을 춰야지.》

재경은 불빛 휘황한 공원쪽을 가리켜보였다. 아이레스는 머리를 저어보였다. 애어린 조선청년앞에서 망신스러운짓을 한 런니때문이기도 했지만 미상불 오래 만나면 향옥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에 오를수 있기때문이였다. 향옥에 대해서 묻기도 난처하고 그 물음앞에 얼굴빛을 흐릴 재경의 딱한 처지도 생각했던것이다.

아이레스는 폴리오에게 지나가는 소리로 인사말을 몇마디 하고 떠나겠다고 하였다. 송재경은 폴리오와 꼬마청년과 함께 승용차를 세워두었던 곳까지 따라왔다. 그런데 차가 보이지 않았다. 로찌의 작간이 분명했다. 송재경이 차를 구해본다고 하며 가더니 얼마 안있어 조선측 안내통역과 함께 차를 가지고 나타났다.

광복거리숙소에 돌아와 송재경과의 상봉이며 향옥이의 일을 두고 생각하다가 잠들었던 그는 다음날 아침 런니로부터 로찌가 병원에 실려가있음을 알았다. 승용차를 몰고가다가 가로등전주대에 부딪쳐 차의 앞머리가 으깨여지고 로찌는 타박상으로 운신하지 못하는 형편이라고 하였다. 그 사실을 알리는 런니는 반가운 소식을 전하는 어투였다. 아이레스는 점심경에 런니와 함께 로찌의 문병을 갔다. 로찌의 부상은 상상했던것보다는 훨씬 경하였다. 이마에 혹같은것이 부풀어올랐고 왼다리를 조금 절었을뿐이였다. 자기는 당장 나가고싶으나 병원에서 붙잡아둔다고 하며 독을 피웠다.

《돈을 짜내자는것이지. 내가 정신을 잃었을 때 돈지갑을 봤을테니까.》

이런 투덜거림이였다. 아이레스에게는 자기 돈만으로는 승용차수리비를 감당할것 같지 못하다고 하며 우는 소리를 하였다. 아이레스가 이 나라에서는 무상치료를 하니만치 외국인일 경우에도 례외가 아닐것이라고 말하고 승용차수리비는 자기가 맡을것이라고 하자 로찌는 몹시 게면쩍어하는 태도였다.

《그 사람에게 무슨 선심을 써요?》

차에 올랐을 때 런니는 그를 나무람하였다. 아이레스는 런니의 가방끈이 달라진것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고 물었다.

《그 가방에 얼마나 있소?》

《300.》

런니는 생긋 웃고는 그의 눈길에서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라이타를 켤 때 눈가에 실주름이 모여들며 런니를 퍼그나 늙어보이게 했다. 이때 아이레스는 런니가 가방을 그처럼 귀중히 여긴것은 돈도 돈이지만 거기에 한채의 집도 불사를수 있는 수지폭탄이 있었기때문이라는것은 알수 없었다. 런니는 이번에 온 로찌로부터 개막행사나 페막행사때 그 폭탄을 사용할 임무를 받았다. 그것을 실행하지 못할 경우 켐프가 그의 몫으로 약속한 은행구좌의 자금도 동결될것이고 아이레스에게 남성편력의 비밀을 죄다 말할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런니는 어제밤 그 수지폭탄을 갈기갈기 찢어 변기속에 버리고말았다.

아이레스는 국제상설위원회청사앞에서 차를 세우고 런니더러 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물었다. 런니는 교태어린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저었다.

《전 오늘 아이레스씨와 함께 움직이겠어요.》

《허, 난 오늘 당신의 적수인 조선사로청부위원장 류진영과 함께 움직이기로 했는데.》

《저와 함께 가면 안되는가요.》

《나까지 거짓기사대상을 만들지 않겠소?》

지난기간 류진영과의 인터뷰를 두고 하는 그의 말에 런니는 귀뿌리까지 빨개졌다.

《아이레스씨, 전 그와 이미 〈화해〉를 했어요. 이 나라 사람들하고도···》

런니의 눈에는 슬픔이 깃들어있었다.

《그럼 갑시다.》

아이레스로서는 런니의 말이 너무나 뜻밖이였으나 놀라운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어쩌면 그와 자기는 많은 면에서 동질적이여서 깨달음에서도 일치를 가져오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하였다.

류진영을 만나 아메리카주청년들과의 련대성집회장에 갔던 아이레스는 전날 만났던 폴리오가 자국내의 반동정권과 아랍지역에서 감행하는 미국과 이스라엘반동들의 침략책동을 성난 사자처럼 폭로규탄하는 모습에 자못 놀랐다. 부다뻬슈뜨에서 가끔 만날 때마다 기죽은 사람처럼 눈치만 보던 폴리오가 전혀 딴 사람처럼 된것이였다.

(허, 정말 모를 일인걸.)

아이레스는 진정으로 감탄했다. 이 땅에 오면 모든 사람들이 달라지게 된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뇌리를 쳤다.

폴리오가 연단에서 내려왔을 때 그는 류진영에게 재미난 구경이(재미난 구경이란 진영이가 한 약속이였다) 폴리오의 토론이였는가고 물었다. 진영은 두눈이 잔잔스름해져 웃으며 자기만 따라다니라고 했다. 집회가 끝나 모든 사람들이 대형뻐스와 승용차에 오를 때 아이레스는 진영의 차를 놓칠세라 그 차의 꽁무니에 바싹 붙어 따랐다. 다른 차와 뻐스들도 마치 그와 같은 약속이나 받은듯 그들의 뒤를 다쫓아왔다.

아이레스는 꽃배들이 떠흐르는 대동강가에 와서야 진영이의 약속이 련환공연관람임을 알고 괜히 왔다는 후회가 들었다. 개막행사를 보고난 뒤부터는 그 어떤 나라의 예술공연도 그의 흥미를 끌지 못했던것이다.

《어느 무대를 보겠소?》

차에서 내린 진영이가 시큰둥해 서있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물었다.

《적당히.》

아이레스는 마지못해 응수했다. 그러자 런니가 그전날 진영한테 죄진 일을 갚음하려는듯 애교있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부위원장선생의 취미에 따르겠어요.》

《나는 아시아무대를 택하려는데··· 아이레스, 반대없겠소? 오늘은 우리 나라 예술인들이 출연하오.》

아이레스는 조선예술인들의 공연을 보지 않기로 했던것으로 하여 잠시 머뭇거리다가 진영의 재촉하는 눈길에 지고말았다.

《그럼 베르길리우스(단테의 〈신곡〉에서 나오는 시인을 천상으로 안내한 사람)가 되여주오.》

승용차와 뻐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거의다 《아시아무대》(대동강에서의 련환공연은 대륙별로 〈무대〉가 정해져있었다)로 걸음을 다그쳤다. 조선청년대표들이 내리는 뻐스옆에서 진영은 누군가를 찾으려는듯 걸음을 멈추었다.

아이레스는 폴리오가 송재경과 함께 내리는것을 보고 그들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닐세라 진영은 그들을 소리쳐 부르고 아이레스에게 돌아서며 기쁜 낯으로 말했다.

《송재경동무를 알아보겠소?》

《난 어저께 이미 만나봤댔소. 저 폴리오도.》

《그렇소?》

진영이와 말하는 아이레스를 알아본 송재경은 전날 저녁처럼 반갑게 마주왔다. 폴리오도 《당신도 왔구만.》하며 아이레스와 친구지간이였던듯 포옹을 했다.

진영이 송재경과 폴리오를 런니에게 소개하자 런니는 사뿐히 머리숙여 인사를 표하고는 호감어린 시선으로 송재경을 여겨보았다.

강변의 돌계단쪽에 만들어진 관람석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다행히도 미리 와 앉아있던 조선청년들 몇이 류진영을 알아봐서인지 자리들을 내주었다. 진영은 런니를 돌아보며 《당신들의 덕분》이라고 말했다. 아이레스는 그 말도 옳다고 생각되였다. 두차례의 평양방문을 통해 외국인들에 대한 이 나라 사람들의 태도가 각별히 친절함을 목격했던것이다.

그들이 앉자 조선치마저고리를 입은 처녀가 나와 소개말을 하고 뒤를 이어 아랍처녀와 유럽, 아프리카 처녀들이 나타나 여러 민족말로 통역을 했다.

무대는 황홀미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락조의 타는듯 한 불빛에 불그레 물든 강물우에 떠있는 무대였다. 오색조명등의 교차속에 나타난 무용수들은 꿈속의 요정같이 보였다. 춤과 노래가 뒤바뀌는 속에서 환호성과 휘파람이 연신 울려나왔다.

아이레스는 무대와 객석의 분위기가 고조될수록 침울해져가는 마음을 걷잡을수 없었다. 또다시 향옥이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던것이다. 그런데 폴리오의 옆에 앉은 재경은 장면이 바뀔 때마다 요란스러운 손벽을 치며 공연에 심취해있었다.

(군인출신이라고 했지. 그때문인가.

아니, 이 나라 사람들은 전체가 전쟁을 겪으며 독한 사람들로 되였다고 했어.)

《조국의 진달래》라는 무용이 소개되자 진영이가 그의 옆구리를 건드렸다.

《잘 보오.》

군복차림에 짧은 장화를 신은 처녀들이 무대우에 나타났다. 아이레스는 은근히 가슴이 죄여들었다. 유럽의 음악도시에서 향옥은 이 무용의 《스타》(별)였던것이다.

그렇게 봐서인지 무용수들은 거의다가 향옥이처럼 보였다. 향옥이처럼 날씬한 몸매에 향옥이처럼 아릿다운 웃음을 보이며 맵시있는 률동을 보여주었다.

《알아보았소?》

진영이가 또다시 그의 옆구리를 건드렸다.

《뭘 말입니까?》

《향옥이 말이요.》

《그건 무슨 소립니까?》

아이레스는 놀림을 당하는듯 하여 맞갖지 않게 진영을 보았다. 진영은 싱긋이 웃었다.

《똑바로 보오. 저기 저 가운데 저··· 선회동작을 하는 처녀를―》

아이레스는 심장이 뚝 멎는듯 했다.

붉은기를 상징한다는 붉은 수건을 높이 들고 팽이처럼 돌아가는 무희. 부채살처럼 퍼진 치마자락밑에서 얼씬거리는 곧고 흰 다리··· 선회동작을 마치고 생긋이 웃는 얼굴을 알아본 아이레스는 눈을 감았다떴다. 분명히 그였다. 향옥이같은 처녀가 아니라 향옥이! 그 별인것이다.

아이레스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눈앞이 어질거리고 심장이 북치듯했다.

《앉소.》

진영이 느긋한 어조로 말하며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이건··· 어찌된 일입니까?》

아이레스는 뭔가 마비된 사람처럼 진영을 보았다.

진영은 그의 손을 꼭 잡아쥐였다.

《우리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저 동무를··· 원상대로··· 회복되게 하였소.》

그 뒤를 이어 하는 진영이의 말은 먼 꿈결에서처럼 들렸다.

(기적!··· 이래서였구나!)

그는 뜨거운것을 삼키였다. 이 나라 사람들이 어찌하여 자기들의 수령과 지도자를 어버이로 따르는지, 어찌하여 혼연일체라는 말을 그리도 즐겨하는지 리해되였다.

그는 젖어든 눈길로 송재경을 보았다. 재경의 눈빛은 타는듯 번쩍이고 얼굴은 붉게 달아있었다.

향옥이네의 춤이 끝나고 박수소리가 터져나올 때 그는 진영의 귀전에 입을 대고 물었다.

《송과 향옥의 관계는 어떻게 되였습니까》

진영은 그의 물음을 기다렸던듯싶었다.

《이제 머잖아 화합의 꽃불을 올리게 되오. 우리의 재경동무는 향옥이가 제대로 운신할수 없게 된다는걸 알았을 때 정식 청혼을 하였댔소.》

《불구자가 된다는걸 알고말입니까?》

《그렇소. 그러나 향옥은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았소. 자기가 불구자이때문에 멀어지려 한것이요.》

《!···》

아이레스는 세찬 충격에 입술을 떨었다. 언젠가 읽은 소설의 한대목이 떠올랐다. ··· 서로가 더 훌륭하고 아름답기를 바라는 사랑, 자기의 부족점으로 하여 멀어지려 하기도 하고 상대를 위해서는 자기의 모든것을 바치는 사랑!···

(이들이야말로 내가 꿈속에서 그려보던 사랑의 정화가 아닌가.)

아이레스는 아무 말없이 다시 일어섰다.

《어델 가려고 하오. 향옥동무를 만나야지 않소?》

류진영이 하는 말을 뒤전에 들으며 좌석을 헤쳐나간 그는 꽃방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말도 길도 잘 모르는 그는 어데가 어덴지 향방조차 가늠할수 없었다. 디스크곡이 울리는 방향을 따라 걸음을 재우쳐간 그는 유럽청년인듯싶어보이는 사람들속을 두릿거리며 아는 친구를 찾아보았으나 어둠속이여서 누가 누군지 가려볼수 없었다. 그는 브론드색의 머리칼을 한 한 청년의 손에 꽃다발이 들려있는것을 보고 돈지갑을 꺼내며 그 꽃을 팔수 없는가고 물었다.

그 청년은 아이레스의 흥분한 얼굴을 이상스레 보다가 그냥 가지라고 하며 꽃다발을 주었다. 아이레스는 일생 나서 처음으로 동냥받는 처지가 되여 그에게 깊숙이 절을 하고 돌아섰다.

진영은 꽃다발을 들고온 아이레스를 보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공연이 끝났을 때 아이레스는 진영이를 앞세우고 무대로 올라갔다. 다른 행사가 있다고 돌아서려는 송재경의 손목을 꽉 틀어잡은 그는 자기가 오늘 일생에 두번 다시 없을 장한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무대뒤의 분장실에서 향옥이를 만난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데도 아랑곳않고 송재경과 향옥을 맞붙여세운채 말했다.

《나는 송과 림양의 포옹을 보지 않고서는 떠나지 않겠습니다.》

아이레스의 말에 두사람의 얼굴이 빨갛게 되고 향옥의 눈이 별같이 빛나며 웃음의 불꽃이 튕겼다. 《우린 말예요.》 향옥은 아이레스를 돌아보며 천연스러운 태도를 뽐내듯 말했다.

《포옹보다 이렇게 한답니다.》

향옥은 재경이를 향해 손을 내밀며 생긋 웃었다. 두사람이 손을 맞잡는것을 본 아이레스는 정중한 자세로 꽃다발을 내밀며 진심을 말했다.

《당신들은 사랑의 천사들입니다. 부디 행복하시오.》

《고맙소, 아이레스.》

송재경은 꽃다발을 향옥에게 넘기며 아이레스의 어깨를 그러안았다.

아이레스는 희스름한 하늘가에 어슴푸레 빛나는 별들을 보며 달콤한 애수와 환희에 젖었다.

그날저녁 아이레스는 재경이며 폴리오, 런니와 함께 향옥의 집구경을 갔다. 조선속담에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향옥의 집에서는 외삼촌의 생일연이 있었다. 생일상에는 향옥의 은인이시고 이 나라 인민들이 미래의 태양으로 모시는 김정일각하께서 보내주신 생일상이 놓여있었다.

아이레스는 그분께서 이번 축전에 참가한 대표들의 생일때마다 이런 선물을 보내주신다는것을 알고있었으나 자기의 우상이였던 처녀의 친척에게 보내주셨다는것으로 하여 더욱 감격이 컸다.

여러 외국기자들까지 와있었다. 생일상의 주인공이 초청했다는것이였다. 그 주인공은 로찌의 표현으로 하면 《적화》사업을 하기 위한듯 자기의 불우한 인생편력과 아이레스가 방금 들어 아는 향옥의 신상담을 기자들에게 루루이 말했다.

축배잔이 오고갈 때 아이레스는 향옥의 방에 들어가 해포석으로 만든 조그마한 군함을 보며 그에 깃은 사연과 재경이의 무훈담을 들었다. 그 말을 들려주는 향옥은 무시로 재경의 얼굴빛을 살피며 얼굴을 붉히기도 하였다.

아이레스는 꿈속에 있는 기분이였다.

(시간이여, 멈춰주렴.)

그는 인간행복의 극치를 본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