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3

 

제 5 장

3

 

두세시간을 눈을 붙이는둥마는둥한 류진영이며 조창혁, 김관은 아침부터 찾아드는 여러 나라 대표단 책임일군들과 만나는통에 오전시간을 뭉청 잃고말았다.

지정철부부장이 아침비행기편으로 날아와 대사관숙소에 있다는것을 알았으나 누구도 그를 만나볼 틈을 낼수 없었다. 면담도중의 조창혁이 전화상으로 간단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조창혁은 다 잘될것이라는 한마디 말로 복잡한 정황에 대한 자기 견해를 밝히는 지정철의 음성이 몹시 긴장되여있는것을 느꼈다.

대표단책임일군들과의 면담은 점심식사시간에도 계속되였다. 누구는 만나고 누구는 만나지 않는가 하는 불만을 사지 않기 위해서도 피할수 없는 일이였다. 오늘 오후부터 평양축전주최문제가 토론된다는것으로 하여 여러가지 질문과 의견들이 따르는 면담이였다.

많은 경우 지지와 감사를 표시하는것이였으나 여러가지 의문을 붙여 타진해보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조창혁이가 적도기네대표와 만나고 응접실 겸 면담실로 쓰는 방에서 나올 때 국제부지도원이 그 앞에 나타나 프랑스기자 하쎈이라는 사람이 긴급상면을 요청한다는것을 알려왔다.

창혁이는 어제밤 마로넨꼬와 함께 나오다 본 사람이 하쎈이 분명했음을 알았다. 회의장에 갈 시간이 가까와진다는데로부터 흥분되고 초조해진 창혁이로서는 하쎈을 만날 기분도 시간적여유도 전혀 없었으나 매정하게 잘라버릴수도 없었다.

《어데 있소?》

《자기 차나 어디 밖에서 만나자는걸 여기 오라고 했습니다. 복도에 있습니다. 무슨 큰 비밀을 가지고 온것 같습니다.》

하쎈은 벽돌색가죽외투에 벽돌색무늬가 간 꼭지달린 모자를 쓰고 복도끝 창문쪽에 서서 려송연을 태우고있었다.

《오래간만입니다.》

창혁이는 백악관문턱도 마음대로 넘나든다는 그의 말을 상기하며 반갑게 악수를 했다. 인사를 나눈 하쎈은 복도의 량끝을 휘둘러 보고 말을 떼였다.

《나는 어제아침 이 나라에 도착하여 크레믈리의 몇몇 인사들과 특히 당신들의 주요사업대상인 레닌공청비서 마로넨꼬, 쏘련청년단체위원장인 악쏘노브와도 만났습니다. 창혁씨도 어제밤 마로넨꼬를 만났지요?》

《만났습니다.》

창혁이는 서방기자들이 취재가 적잖게 탐정식방법을 동반한다는것을 알고있었지만 자기의 움직임을 새삼스럽게 확인하는것이나 또 마로넨꼬를 주요사업대상이라고 찍는것이 적잖게 거슬렸다. 하쎈은 아무런 기미도 감촉하지 못한듯 통역이 끝나기 바쁘게 재빨리 말을 이었다.

《지금 서방계청년단체는 물론이고 쏘련측에서도 금후 축전에서 반제를 빼며 축전의 광범성, 접촉과 활동의 자유, 공개성의 보장을 기본요구조건으로 보고있습니다. 귀측은 그 요구조건에 대해서 어떤 립장입니까?》

《그에 대해선 회의장에서 들어봐주십시오. 우리의 립장은 그 어떤 리해관계나 요구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변하는것은 아닙니다.》

창혁은 《비밀적인 이야기》라는데 속히워 괜히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쎈은 호인다운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진중하였다.

《오해하지 마시오. 나는 당신들의 말꼬투리나 잡아가지고 뭘 어째보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전의 하쎈도 아니구요. 나는 최근 당신들을 잘 알고있는 프랑스의 주체사상신봉자 기 듀프로선생을 만나 당신네에 대한 리해를 보다 깊이있게 할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지금의 나를 사심없는 벗으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내가 오늘 당신을 꼭 만나자고 한것은 나의 직업상 흥미도 있지만 주요한 문제를 알려드리기 위한데 있습니다.》

하쎈은 또한번 복도의 량끝을 둘러보았다. 창혁이가 의아해서 보자 하쎈은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며 낮춰 말했다.

《까게베(쏘련국가안전위원회)는 세계적으로 으뜸가는 청각을 가지고있지요. 내가 당신들에게 알려드리자는것은 쏘련청년팀이 크게 두개로 갈라져있다는것입니다. 마로넨꼬 대 악쏘노브입니다. 내가 알건대 두사람 다 전형적인 볼쉐비크이지만 마로넨꼬는 본래의 볼쉐비즘에 굳게 서있다면 악쏘노브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런데는 그것이 악쏘노브자신의 사상과 정견때문이 아니라는데 흥미가 있지요. 그의 뒤에는 크레믈리의 당사상비서 야꼬블레브가 있습니다. 이 야꼬블레브에 대해서 나는 그가 카나다주재 대사때부터 알고있습니다. 개명하고 지략있는 활동가인데 지금 그는 정통적볼쉐비즘의 도식에서 벗어나고있습니다. 옳고 그름은 두고봐야 하겠지만 당신네의 립장과 당신네가 바라는 축전주최는 그로 하여 난관에 부닥친것으로 될것입니다. 야꼬블레브는 이번 회의에서 쏘련측 립장의 결정권을 악쏘노브에게 주었습니다. 마로넨꼬는 의견을 표시했지만 묵살당했습니다. 내가 알기에 이건 쏘련력사에 처음있는 일이지요. 참으로 흥미있는 일입니다. 이로 하여 이번 회의는 더욱 난관을 불러일으킵니다.

누가 이기는가는 이번 축전과 앞으로의 청년운동의 좌표를 결정하는것으로 될것입니다.》

하쎈은 자그마한 청소용 밀차를 앞세운 세명의 로씨야 녀자관리원이 나타나는것을 보고 말을 마쳤다. 하쎈의 말은 그가 떠나서 몇분 안되여 나타난 진영의 말로써 확인되였다. 새벽부터 찾아드는 세계민청시절의 동무들이며 여러 대표단 단장급들과 만난 그는 쏘련측이 어떤 《외교공작》을 벌리는가를 알았다.

《나는 방금 쎄르게이를 만났는데 그는 거의 모든 질문과 공격에 벙어리였소. 마지막에 자기의 립장에 변함이 없다고 하면서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거요. 참!··· 그래서 나는 그에게 동지관계에서 결별을 선포했소.》

여기까지 말하고난 진영은 지친듯 쏘파에 앉아 상두대우의 사과를 버석버석 씹었다. 아침을 건넨 그였다. 김관이 우리도 손을 써야 한다고 하며 열이 올라 소리치자 진영은 머리를 저었다.

《늦었소. 저쯤되면 짝패들끼리 최종문건기안을 다 해놨을걸.》

《그따위건 아랑곳할것 없어. 우리도 문건초안을 가지고 맞불질을 해야지. 우선 사회주의국가와 발전도상나라, 우리와 가까운 모든 단체, 기구 대표들을 만나 그치들의 배신행위를 폭로하고 공동보조를 호소하자는거요. 이제야 판이 이렇게 됐는데 저들 체면 봐줄것 있어?》

창혁은 가슴이 죄여들었다.

떠나오기전에 뵈왔던 경애하는 장군님의 모습이 우렷이 떠올랐다.

《··· 단호히 치려고 합니다.》

《찬성이요!》

하지만 그것은 극단의 경우가 아닌가.

《아직은 좀더 두고봐야 할것 같아.》

창혁이가 이렇게 말을 떼자 김관이 울컥해 쏴붙였다.

《아직이 뭐요, 오후면 시작인데.》

《여보, 우선 그 찌프려진 눈섭부터 펴야겠소. 얼굴색도 밝게 가지고.》

《그럴 계제가 되오?》

허구픈 웃음들을 웃었다.

이날 점심식사는 대사관가족들이 성의껏 준비해온 조선음식들이였다. 당콩을 둔 흰 찹쌀밥에 고추장, 보쌈김치며 깍두기까지 올랐다. 고향집 부엌과 어머니의 따뜻한 눈길을 생각케 하는 음식. 외국생활에서 이 이상 별미가 어데 있으랴. 허나 밥그릇들은 거의 그대로들 남았다. 없어진것은 깍두기와 김치국물뿐이였다.

조창혁이 말한 밝은 얼굴색은 회의장인 모스크바국제무역쎈터에 들어서며 저절로 해결되였다.

《코레아!》라는 웨침이 연방 터지는가운데 복도와 홀에 넘쳐있던 모든 대표들이 너도나도 친근한 미소를 보이며 인사말의 소나기를 퍼부었다. 창혁이네가 귀빈실에 이르렀을 때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악수로 손잔등이 벌겋게 부어오를 정도였다. 귀빈실안에 들어서서도 조선대표단 책임일군들은 모두의 초점을 모으는 주빈으로 되였다.

시누런 창가림이 드리운 창문가에서 몇몇 청년대표들과 이야기를 나누고있던 악쏘노브는 그들을 보자 손까지 흔들며 마주왔다. 창혁이와 진영이가 왈드며 마로넨꼬, 국제학생동맹 일군과 인사말을 나눌 때였다. 악쏘노브는 그 세사람에게 량해의 미소를 던지고는 조창혁과 진영이와 더없이 가까운 사이임을 증명하듯 팔까지 끼고 자기의 《연설》을 듣던 청년들쪽으로 이끌어갔다.

악쏘노브는 진영이와는 이미 구면인 유럽민족청년위원회 리사회위원장, 유럽자유급진청년동맹위원장, 북유럽중심청년조직 총서기를 두사람에게 소개한 뒤 《13차축전주최국으로 되려는 조선사로청의 노력과 성의에 만족을 표시한다》고까지 말하였다.

통역의 설명을 들으며 창혁은 순간적이나마 악쏘노브의 《뒤공작》이 지어낸 허구가 아닌가 할 정도로 그의 친절에 끌려들었다.

악쏘노브의 소개를 받은 서방계청년조직의 《리더》(지도일군)들도 창혁에게 각별한 친절과 관심을 보여주었다. 알게 되여 반갑다는 말로부터 찾아오게 되면 반가운 귀빈으로 맞겠다는 초청암시까지 있었다. 그들과의 대화는 쏘련최고쏘베트상임위원회 1부위원장 제미쵸브가 나타남으로써 중단되였다.

제미쵸브는 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던중에 창혁이네 앞에서는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안부를 묻고 축전주최의사에 대하여 사의를 표시한다고 말했다. 제미쵸브를 안내하던 악쏘노브도 그에 동감이라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각 3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국제준비위원회 1차회의가 개막되였다.

악쏘노브가 회의개막을 선언하며 100여개 나라 청년단체들과 25개의 국제 및 지역기구들에서 온 285명의 대표들이 참가했음을 알리였다. 개막회의 첫 연설은 제 미쵸브가 하였다.

그의 연설에서 《평양축전》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었다. 이때부터 창혁은 자기가 절대금물이라고 생각한 초조와 불안을 다시금 맛보지 않을수 없었다.

다음 차례로 마로넨꼬가 나갔다. 창혁은 그의 얼굴에 어제밤 본 홍조가 새겨지는것을 보았다. 그는 입술을 감빨고 일어서며 창혁을 심각한 눈길로 일별하고 빠른 걸음으로 연탁에 나갔다. 악쏘노브는 그를 외면하고 고개를 떨군채 종이장만 뒤적이였다.

마로넨꼬가 연설을 시작하자 그는 약간 경멸하는 눈길로 보다가 그 연설내용은 들으나마나하다는 태도로 옆에 앉은 쟝 불로드 케네디(12차축전때 조정서기관이였던 프랑스사람)에게 귀속말로 뭔가 수군거렸다.

창혁은 레시바의 가는 실줄을 매만지며 악쏘노브의 삐여진 동작이 일종의 연기라고 판단하였다. 레시바에서 울리던 통역의 말이 한옥타브 올라가는데 신경을 도사렸다.

《··· 우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도 평양에서 1989년에 다음기 축전을 주최하려는 조선사로청의 발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창혁의 시선은 반사적으로 악쏘노브에게 가 멎었다. 악쏘노브의 눈과 눈섭은 맞붙어있었고 입가에는 조소어린 미소가 실려있었다.

창혁은 좌중의 몇몇 사람들도 시답잖는 태도로 주변을 흘깃거리고 저들끼리 뭔가 쑤얼거리는것을 보았다.

온몸의 신경이 팽팽히 살아올랐다. 하여 마로넨꼬가 들어와 앉는데도 주의를 돌릴수 없었다.

쟝 불로드 케네디의 연설이 그의 가슴에 한줄기 시원한 바람을 안겨주었다. 쟝은 《··· 12차축전상설꼬미샤에서 적극 활동한 조선사로청은 아시아에서 진행되는 첫 축전인 제13차 축전을 성과적으로 보장할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창혁은 그 말을 들으며 기쁨과 함께 비통한 심정도 맛보았다. 지리적으로도 국교관계로도 아득히 먼 프랑스청년은 저처럼 지지의 목소리를 높이는데 명색이 사회주의국가의 공산당원이며 공청일군출신인 악쏘노브는 정녕 반대의 립장에 서있는것인가.

개막회의가 끝나고 전원회의에 들어가기전에 15분간 휴식이 선포되였다. 창혁이가 구석쪽 쏘파에 앉아 연설문을 매만지고있을 때 진영이가 꾸바청년대표 안드로와 함께 나타났다.

곱슬머리에 피부색이 진밤색인 안드로는 방금 권투경기나 치른 사람처럼 씨근거렸고 대조적으로 얼굴이 흰 진영은 눈에 불이 펄펄 일것처럼 격동되여있었다. 진영은 숨찬 소리로 말을 떼였다.

《악쏘노브가 개죽을 쓰오. 이번 전원회의 첫 연설은 창혁동무가 하기로 되잖았소. 한데 다섯번째로 돌려놓았다오. 그리고··· 돌아가며 이번 회의에서 쏘련측은 축전장소와 시기, 구호 결정은 바라지 않는다거니 종전의 구호도 재검토한다거니 하고 떠든다는거요. 이 안드로한테까지 말이요···》

안드로라는 소리를 알아들은 꾸바청년대표는 다짜고짜로 창혁의 손을 잡았다.

《조동지, 위험한 모략이 꾸며지고있습니다. 류가 말했겠지만 쏘련··· 악쏘노브가 심상치 않습니다. 나는 오늘 연설때 이 모략에 대하여 폭로하고 단죄하겠습니다.》

진영의 통역을 들으며 창혁은 온몸의 피가 설설 끓어오름을 느꼈다. 《때려야 한다!》 뜨거운 피는 이렇게 속삭였다.

아바나청년의 정의로운 웨침은 회의장에 마른하늘의 우뢰처럼 울릴것이며 악쏘노브에게는 치욕과 창피를, 악쏘노브의 지휘봉에 따르려는 청년들에게는 반성과 부끄러움을 안겨줄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창혁은 맹렬한 론전과 그 론전을 흥미있게 지켜볼 얼굴들을 그려보았다.

끓던 피는 서서히 랭각되였다.

그의 리성은 신심넘쳐 말씀하시던 김정일동지의 가르치심을 자자구구 생각케 하였다. 그는 안드로의 손을 꽉 쥐였다.

《좀더 두고봅시다. 쏘련측이 그러한 립장을 공공연히 표시할 경우 우리도 때리려고 합니다. 나는 그 경우 꾸바동지들도 자기의 원칙적립장을 보여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앞에서 우리들끼리의 의견상이와 마찰을 로출시킨다는것은 단결에 손해를 주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그때문에 찾아와 의논하는것입니다. 문제는 막뒤에서의 놀음이 무섭습니다. 음모적이니까요··· 근심스럽습니다.》

속회를 알리는 종소리에 안드로는 창혁의 손을 한번 더 잡아흔들고 사람들의 물결속으로 잦아들었다. 창혁은 주석단입구에서 악쏘노브와 부딪쳤다. 정확히 말하면 악쏘노브는 그를 기다리고있었다. 까자흐스딴사람같은 조선말 통역이 붙어있었다. 악쏘노브는 미안쩍은 표정을 감추지 못한채 호의적인 웃음을 보이려 애쓰며 말했다.

《조창혁동지, 동지의 연설은 다섯번째로 놓았습니다. 먼저 연설자들의 발언을 통해 견해흐름들도 파악하고 청중과의 교감준비도 타산했습니다. 꼭 필요하다면 첫 순서로 할수 있습니다.》

《첫 연설자에게는 이미 준비시켰겠지요. 이제 내가 그를 밀어내고 한다면 어떻게 될것 같습니까. 우리가 무례한건 둘째치고 악쏘노브동지가 편심을 든다는 말을 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창혁은 통역의 말이 채 끝나기전에 그의 곁을 스쳐지났다. 악쏘노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창혁은 어째서인지 마음이 홀가분해지며 태연해지였다. 연설문을 두고 하신 김정일동지의 말씀이 그에게 커다란 힘과 용기로 되였다. 최악의 경우에 안드로같은 수많은 지지자들이 일떠날것이라는것도 그 배심의 주요한 바탕이였다.

첫 두명의 연설자의 발언에서는 평양축전소리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다만 앞으로 있을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의 성격문제만 론의되였다.

그것도 늘 듣게 되는 축전의 광범성, 접촉과 활동의 자유, 그러루한 소리였다. 창혁은 그들이 대표한 나라 단체이름을 듣고 이미 짐작했던바라 별로 자극을 받지 않았다.

세번째로 나온 연설자에 대해서는 기대를 가졌다. 우리 나라와 친선적인 나라 대표라는데도 있었지만 진영이와의 만남을 통해 《무조건적인》지지를 확약한 그였기때문이였다.

그러나 에르반이라는 그 청년은 3분도 못되는 연설에서 《조선사로청의 축전주최발기를 기쁘게 생각한다》는 외에는 평화와 친선의 소리만 몇번 곱씹고 황황히 연탁을 내려섰다. 이때야 창혁은 그의 나라가 사회주의나라들에서도 구입하기 어려운 쏘련제 미그-29비행기를 받는 나라임을 상기했다. 나라간의 경제적리해관계는 한 청년의 약속과 량심마저 지켜낼수 없게 하는것이였다. 악쏘노브가 다음의 연설자를 부를 때 창혁은 아연하였다. 유럽민족청년위원회 리사회의 로찌였다.

좌석의 맨 뒤구석에서 성큼 일어난 그는 자기에게 쏠린 눈길들에 무슨 연극배우나 되는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뛰듯이 걸어나왔다. 연탁에 올라 주석단을 향해 30°각의 경례를 한 그는 작년 가을 연회장에서 도발적질문을 할 때와 같은 어성으로 입을 떼였다.

창혁은 자기의 감정을 엿보일듯싶어 원주필을 들었다. 로찌의 어성과는 반대되게 뜨직뜨직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울리는 통역의 말을 몇단어씩 책에 옮겨썼다. 로찌는 앞의 연설자와 달리 직판 본론으로 들어갔다.

《··· 우리는 조선사로청에서 13차축전을 자기 나라 수도 평양에서 개최할 희망을 표시한데 대하여 응당한 감사를 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 모인 많은 청년대표제씨들과 함께 그 희망을 받아들일수 없다는것을 잘 알고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이 나라가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상태에 있다는것, 다음으로 지리적으로 거리가 멀뿐만아니라 체제상 우리와 전혀 호흡이 맞지 않는 국가라는것···》

그의 말은 채 이어질수 없었다. 장내에서 격한 웨침이 울리며 몇사람의 손이 쳐들리였다. 창혁은 그속에서 나이제리아, 인디아, 꾸바, 동부도이췰란드청년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허나 악쏘노브는 못본척 하고 로찌만을 지켜보다가 연거퍼 《사회!》를 부르는 소리에 이마살을 찡그리며 마이크에 입을 가져갔다.

《회의에서 민주주의를 보장합시다.》

그리고는 로찌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찌는 한손을 쳐들며 량해를 구하는 미소를 보이고는 계속했다.

《때문에 우리는 이번 회의에서 축전장소문제는 다른 발기국이 나올 때까지 연기하며 축전이 명실공히 자유와 평화, 화목을 위한 청년들의 명절로 되게 하는 문제를 토론해야 한다고 봅니다.》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여기저기서 불평어린 말들이 튀여나왔다. 창혁은 반쯤 고개를 수그리고있는 악쏘노브를 보며 쓴 웃음을 삼켰다. 로찌에게는 구태여 분격해할것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무엇보다 괘씸한것은 악쏘노브가 무엇때문에 로찌를 자기앞에 내세워 연설을 시켰는가 하는것이였다. 그 악랄하고 도발적인 발언에 리성을 잃고 언쟁에 휘말려들게 하자는것이였는지 아니면 《분위기흐름》에 위압되여 《반제》구호를 철회하게 하자는것이였는지···

(천만에.)

로찌는 연설을 마치고도 몇초동안 장승처럼 그냥 뻗쳐 서있었다. 자기말에 대한 반응을 지켜보려는듯싶었다. 몇사람의 투닥거리는 박수가 분개한 소음들에 묻혀버리자 로찌는 쫓기듯 연단에서 내려섰다.

이 순간 창혁은 로찌가 무척 가긍하고 불쌍하게까지 보였다.

(그래. 저런자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해서도 우리의 축전은 꼭 실현되여야 한다.)

악쏘노브가 호명하는 소리에 조용히 일어선 창혁은 호기심과 기대에 넘친 수백쌍의 눈길들을 보자 새삼스럽게 기운이 뻗쳐올랐다.

적들에게는 철추를, 벗들에게는 힘을!··· 그는 이 순간 자기 한몸에 세계청년들의 운명이 질머지워져있는것 같은 비상한 충격속에 있었다.

《세계를 품어안으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자기를 지켜보시는듯싶었다.

온화한 웃음을 머금고 연단에 나선 그는 마이크의 음량을 알아보듯 숨을 내불고 입을 열었다.

장내가 일시에 물뿌린듯 조용해졌다.

창혁은 조선사로청과 청년들이 지난 기간 축전사업들에 적극 참가한것으로부터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의 성과적보장을 위하여 어떤 노력과 성의를 기울이고있는가를 언급하고 평양은 축전의 리념과 진보적청년들의 희망과 요구에 따라 모든 준비를 최상의 수준에서 갖출것이라는것을 말한 다음 이번 축전은 아시아에서의 첫 축전으로 화려하고 아름답고 특색있는 축전으로 될것이라는 대목에서 잠시 말을 끊었다가 김정일동지의 말씀을 그대로 옮기는듯 한 심정속에 계속해말했다.

···해솟는 맑은 아침의 나라 삼천리금수강산에서 사는 우리 인민들은 예로부터 평화를 사랑하고 근면성실한 민족으로 이름이 높았다.

평화와 친선과 화목을 바라는 우리 인민들과 청년들은 이번 축전에 대하여 상당한 관심과 기대를 가지고 축전손님들을 기다리고있다.

하여 우리 조선사로청과 청년들은 세계의 모든 청년대표들이 평양에 와서 낯을 익히고 친선과 단결을 도모하며 침략과 착취와 억압이 없는 세계건설의 희망과 뜻을 나누기를 간절히 바라고있다. 우리는 평양에 찾아오는 청년들에 대해 그 어떤 사상과 정견을 가졌건 열렬히 환영할것이다. 사상과 정견이야 어떠하든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지향하고 침략과 억압을 반대하는데서는 모든 청년들의 심정이 하나로 되여있는것이 아닌가. 우리는 이로부터 모든 청년들을 벗으로 맞을것이다. 나는 우리의 이런 심정과 희망이 여기 모인 모든 대표들의 희망과 어울리리라고 굳게 믿는다···

그의 연설이 끝나자 장내는 우렁찬 박수로 떠나갈듯 하였다. 악쏘노브마저 어색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박수를 쳤다.

조창혁은 자리에 와서도 선뜻 앉을수 없었다. 박수가 채 멎어지지 않았기때문이였다. 의례적으로 마주 박수를 쳤다.

조창혁의 뒤를 이어나간 서남아프리카대표와 인디아대표가 조선사로청의 발기를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격동적인 연설을 했다. 인디아대표는 로찌의 《몰상식하고 허위에 가득찬 야비한 폭언》을 규탄하고 조선의 문명성과 아름다움을 강조한끝에 《평양축전》과 시기선정에 대한 조선사로청의 제안에 전적인 지지를 표시하였다. 그는 조선을 아시아의 《등불》이라고 한 인디아시인 타고르의 시를 읊고 오늘의 발전된 조선의 현실을 생동히 그려보인것으로써 객석에서 요란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런데 인디아대표 다음으로 나간 청년대표가 또다시 제동을 걸었다. 김관의 표현에 의하면 국제회의때마다 쏘련측 마이크로 된다는 중근동청년이였다. 머리를 푹 떨군채 나온 그는 서너페지의 연설문을 1분도 되나마나한 초음속으로 냅다 읽었다.

《···우리는 앞으로의 축전성격에 대한 합의를 보기전에는 장소문제는 론할수 없다고 봅니다. 현 국제발전추세로 볼 때 제국주의문제를 가지고 계속 론의해야 하는가 마는가가 결정되여야 할것입니다. 때문에 〈평양축전〉은 상기한 문제의 결론전에는 시기상조라고 봅니다···》

그가 연탁에서 내리자 유럽자유급진청년동맹위원장인 노르웨이 대표 폰 울크하젠이 나가 조선에서의 축전을 환영하지 않으며 가지도 않을것이라는 강경발언을 하였다. 또 몇사람의 쏘련마이크가 중근동청년과 비슷한 소리를 하였다.

(악쏘노브가 뿌린 씨앗이 독초로 자랐구나.)

창혁은 불가피한 《론쟁》을 내다보며 싸늘한 얼굴로 굳어졌다.

우리 대표들의 긴장된 얼굴들이 안겨왔다. 각양각색이였다. 입을 꾹 다물고 어딘가 벽의 한쪽을 쏴보는가 하면 배포유한 태도를 보이려 반쯤 눈을 감은채 귀뿌리를 매만지는 사람도 있었다. 진영은 얼굴이 해쓱하게 질린채 뭔가 말할 기회를 찾는듯 사회자와 좌석쪽을 엇갈아보며 일어설듯말듯한 자세로 있었다.

(그래, 필요하면 싸워야 한다!)

창혁은 주먹을 꽉 부르쥐였다.

그때 회의장 측면 출입구로부터 갈색머리의 청년이 긴허리를 접고들어와 쎄르게이를 불러내갔다.

잠시후 자못 흥분된 얼굴로 들어선 그는 악쏘노브에게 주석단 왼쪽을 가리켜보이며 자리에 앉았다.

악쏘노브는 자못 의아쩍게 쎄르게이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무대왼쪽으로 나가는것을 본 쎄르게이는 몇줄 건너앉은 진영에게 한 손가락을 들어 v자를 그려보였다.

조창혁은 무슨 뜻인지 알수 없었다. v자 표식은 유럽사람들이 승리를 표시하는 의미로 쓰인다는것을 알았으나 쎄르게이에게서 승리는 과연 무엇일가.

쎄르게이는 옆에 앉은 공청국제비서에게 진중한 기색으로 뭔가 열심히 말했다. 악쏘노브는 1분도 못되여 주석단에 되돌아왔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종이장을 매만지다가 몇글자 써서 마로넨꼬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는 주석단사람들에게 두손을 조금 벌려보이고 쏘련대표의 연설이 있겠다고 하였다. 그 말을 마친 악쏘노브는 청동조각을 련상시키는 엄엄한 자세를 취하였다. 마로넨꼬가 발끝으로 조창혁의 구두뒤꿈치를 건드렸다. 조창혁은 그의 노트장에 핵폭탄폭발에서 생기는 버섯구름이 그려진것을 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레시바에서 울리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그는 깜짝 놀랐다. 말그대로 핵폭탄의 폭발처럼 들리는 소리였다.

《···나는 먼저 조선사로청대표동지의 훌륭한 연설과 제안에 깊은 공감과 지지를 표시하면서 쏘련 청년단체와 공청을 대표하여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평양에서 하려 하는데 대하여 열렬한 감사와 전적인 지지찬동을 표시합니다.》

객석이 술렁거렸다. 당황한 기색으로 악쏘노브에게 묻는듯 한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때부터 회의분위기는 이상하게 흘렀다. 열렬한 지지연설이 있는가 하면 연설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와서도 도대체 찬성인지 반대인지 알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다가 악쏘노브의 불만한 기침소리에 놀란듯 흘깃 돌아보고 연탁에서 내려서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례외없이 김관이나 진영의 계산에서 《쏘련마이크》로 되여있는 대표들이였다.

에짚트, 타이, 벌가리아, 말레이시아. 칠레, 끼쁘로스 대표들이 련이어 나가 평양축전주최지지를 표시하자 런니의 주변에 앉은 청년들이 악쏘노브를 향해 손을 쳐들어보였다. 그러나 악쏘노브는 그쪽은 본척만척하였다.

회의가 끝나 밖으로 나올 때 마로넨꼬가 조창혁의 옆구리를 찌르며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따와리씨 김정일!》

악쏘노브마저 창혁의 손을 꼭 잡아쥐고 흔들었다.

(어찌된 영문인가.)

유럽민족청년위원회 리사회위원장이 그를 막아섰다.

《우린 오늘 그렇게 좋은 연설을 듣게 될줄은 몰랐습니다. 우리의 견해를 재검토하려고 합니다.》

대유럽제국창설의 꿈을 꾸며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문명이전의 땅덩어리로 질시하고 사회주의를 역병처럼 본다는 이 청년대표의 감동과 찬사는 왈드와 몇몇사람이 나타남으로써 더 뿜어나올수 없었다.

《시작은 좋습니다.》

왈드는 조창혁의 손을 꽉 잡아흔들며 뭔가 중요한 내용을 알려줄듯 망설이다가 여러 사람들이 창혁에게 인사말을 건네는통에 고개를 저으며 물러섰다. 조창혁은 어둠에 잠긴 밖에 나서서야 축하객들의 손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화끈 단 이마가 선뜩선뜩해졌다. 눈이 내리는것이였다. 창문들에서 쏟아져나오는 불빛에 흰눈은 나비떼의 흩날림을 련상시켰다. 차에 다가가니 진영이가 어린 소녀처럼 두손을 펼치고 흰눈을 받고있었다.

《우리를 축하하는 꽃송이들이요.》

《시작에 불과하오.》

창혁은 자기의 흥분을 보이기 싫었다. 진영은 창혁이와 나란히 자리를 잡고앉아 싱글싱글 웃었다.

《무슨 일이 있은지 아오?》

꾀바른 눈길로 창혁을 지켜보았다.

《꼬지 말라구. 무슨 일이요?》

《쎄르게이가 그러는데 크레믈리에서 긴급지령이 떨어졌다고 하오. 우리와 일체 공동보조를 취하라고···》

호텔에 돌아오니 지정철이 와있었다. 방안이 썰렁했다. 창문이 반쯤 열려있고 푸르스름한 담배연기가 성에낀 창문틀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밖으로 흘러나왔다. 얼굴이 불깃이 상혈된 지정철은 빠른 걸음으로 들어서는 그들을 보자 피우던 담배를 눌러끄며 일어섰다.

《어떻게 되였습니까.》

그의 다급한 질문에 조창혁은 더 커가는 의문을 지울수 없었다.

《모를 일입니다. 쏘련측이 회의도중에 갑자기 180° 전환을 했습니다.》

《음.》

지정철은 꺽 막히는 소리를 내며 손을 내밀었다.

《어찌된 일입니까?》

조창혁은 의아스런 눈길로 그를 보았다. 지정철은 뭔가 참는듯 입을 꽉 악물고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난 이순간까지도 자신을 못가졌댔소.》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재차 하는 말소리는 떨렸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어제아침 이곳 정형을 보고받으시고 나에게 쏘련당 국제부의 책임일군을 만날 위임을 주셨습니다. 오늘 나는 그에게 장군님의 말씀을 전달하였습니다. 그는 축전문제에 대한 장군님의 말씀을 듣고나자 몹시 놀라며 당황해했습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번 축전에 대한 쏘련당의 움직임을 놓고 사회주의원칙과 우리 당에 대한 쏘련당의 태도와 립장을 가늠하는 결정적계기로 될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에게는 폭탄선언처럼 들렸을것입니다. 그는 일이 그렇게 크게 번져질줄 몰랐다고 하면서 일부 일군들의 무책임한 행동때문이라고 량해를 구하며 총비서에게 즉각 반영하여 대책을 세우도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걸작은 쏘련당 총비서를 즉시 만날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그는 〈나는 당신들의 영명한 지도자께서 어떤분이신가를 잘 안다. 총비서도 알고있다. 우린 조선동지들과 결렬을 바라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우린 국제공산주의운동권에서 소외되고만다.〉라고 하는것이였습니다.

솔직한 말로 좀 뜻밖이였습니다. 그리고 헤여질 때 그는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면서 〈조선동지들은 행복하다. 존경하는 김정일동지께서 청년문제에 그토록 관심하실줄은 몰랐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가 사태를 바로잡겠다고 할 때도 기연가미연가 했는데.···》

지정철은 더 말을 잊지 못했다. 김관과 류진영이 ­­《부부장동지!》하며 그를 와락 그러안았던것이다. 그다음 다들 웃었다.

로숙하고 굳센 당일군의 눈물을 보는 조창혁의 눈가에도 뜨거운것이 굴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