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2

 

제 5 장

2

 

똘스또이거리의 지하철도역앞 류진영이 보고간 3층벽돌건물의 한방에서는 60객으로 보기엔 눈매가 너무나 날카롭고 50대로 보기에는 이마가 무척 벗어진 빼빼마른 체구의 사나이가 영국식 벽난로에서 타오르고있는 불길을 물끄러미 지켜보고있었다.

제임스 켐프, 미국에서 흔한 이름을 가진 이 사나이는 얼마전 백악관의 국가연회장에서 열렸던 신년축하모임을 생각하고있었다. 거기서도 벽난로의 불길이 이처럼 타올랐다. 다르다면 그 불길은 인공적으로 조작해 만들어진것이라면 이 벽난로의 불은 씨비리산 참나무로 지핀 진짜배기불인것이다.

축배잔을 들고 오가던 레간대통령이 그의 앞에 다가와 더없이 친절한 미소를 지어보이던 모습이 눈앞에서 얼른거렸다.

《수고하겠습니다. 제임스 켐프씨.》

레간은 말자체보다 그 말의 억양과 얼굴표정으로 자기 생각과 감정을 훌륭히 전달할줄 아는 사람이였다. 모름지기 그것은 오랜 배우생활의 숙련을 통해 얻어진것일것이였다.

그때 켐프는 레간의 말과 표정에서 《나의 친근한 벗이시여. 부디 이번 사업에서도 성공이 있기를 바랍니다.》하는 부탁을 읽었다.

(그래, 그는 잘 알고있어.)

켐프는 실눈을 지으며 레간을 생각했다.

레간은 자기라는 사람의 노력만 없었다면 대통령으로 되는것도 또 오늘날에 《신레간주의》로 서방을 떠들썩하게 하는 새로운 세계전략도 내놓지 못했을것이다.

레간도 그것을 알고있다.

대통령의 인가밑에 산업계의 거물들과 정계의 몇몇 원로들만 초청되는 신년회에 《후버연구소》(1919년 미국대통령 허버트 후버의 기금으로 창설된 반좌익리념을 연구정립하는 극보수정책연구기관)의 한개 고문에 불과한 자기를 청한것이다. 물론 그의 명함장에는 모르간재벌계통의 어마어마한 재단의 리사라는것도 밝혀있기는 하다. 레간이 물러가자 국무장관 슐쯔를 비롯한 여러 장관들과 며칠후에 자리를 내놓을것이 분명한 《미중앙정보국》국장 월리암 죠세프 캐씨도 그에게 다가와 친절하게 인사를 건늬였다.

켐프는 매 사람들에게 례의를 잃지 않을 정도로 인사도 받고 경의도 표하였으나 별반 그들에게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캐씨를 내놓고는 두뇌로 보나 정치활동의 경력과 공적으로 보나 아득히 눈아래로 보이는 사람들이였기때문이였다. 그들도 역시 이것을 알고있었다. 레간의 《신세계전략》을 론문으로 만들어준 사람이 켐프라는것도, 또 레간으로부터 대통령 특별담당 보좌관의 직책권고를 받고도 마다한 사람이란것도 알고있을것이였다.

켐프가 대통령보좌관의 유혹을 뿌리친것은 레간에 대하여 나삐 생각했다거나 견해상 차이가 있었기때문에가 아니였다. 단지 취미에 맞지 않았기때문이였다. 그는 레간이 아이젠하워 다음가는, 아니 그보다 더한 《미국의 영웅》으로 될것이라는 기대를 은연중에 품고있었다.

남들은 배우출신의 레간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하지만 켐프는 바로 배우출신이라는 그 점과 럭피(투구)을 좋아했던 레간에게 전통적인 《카우보이정신》(기마목동의 정신)을 물려받은 용맹하고 담찬 기질과 저돌적인 돌격정신이 있는것을 중시하였다.

그의 기대에 따라 레간은 화약내속에서 산 아이젠하워보다 더 전쟁과 공산주의에 대해 두려움이 없었으며 인기주의자였던 케네디보다 한수 더 떠 국민들의 마음을 틀어잡을줄 알았다.

하여 그는 대통령을 받들어 뒤에서 소문없이 일할 결심을 다졌던것이다. 하긴 그의 일생은 그렇게 뒤에서 소문없이 일을 꾸미고 작전을 펼쳐가는것으로 지금까지 흘러왔다.

소리없이 문이 열리며 은빛광택이 나는 야회복차림의 런니가 조용히 들어섰다.

그때까지 조는듯 한 자세로 까딱않고 앉아있던 켐프는 젊은이같이 곧추 몸을 펴며 일어섰다. 수북이 드리운 눈섭아래의 날카로운 눈에서 따뜻한 빛이 생기롭게 피여올랐다.

《잘 다녀왔소?》

《네.》

런니는 추운듯 몸을 옹송그리며 그에게 다가와 메마른 볼의 살가죽에 살짝 입을 대였다가 뗐다.

《앉소.》

켐프는 자기가 앉은 3인용쏘파에 런니를 앉히고 그의 곁에 앉았다.

《그도 왔는가?》

《네.》

런니는 애교있게 웃음을 지으며 난로불앞에 손을 내뻗쳤다. 그리고 켐프가 묻기전에 그의 속심을 다 안다는듯 말했다.

《아직 두ㅡ 세사람이 오지 않았어요. 저흰 비행장에서 곧추 이리로 오는 길이랍니다.》

《그래.···》

켐프는 시계를 얼핏 본 다음 예술가가 자기의 조각품을 감상하듯 런니를 아래로부터 우까지 찬찬히 살펴보았다. 실지 런니는 그의 창작품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 아이레스라는 청년에게 나에 대해서 말했소?》

켐프는 감상적인데로 뻗어가려는 생각을 누르며 물었다.

런니는 할끔 그를 치떠보고는 실무적대화라고 생각했음인지 손을 내리드리우며 마지못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의 친구되는분이라고 말했어요.》

《솔직히 말해줄걸 그랬소. 그는 지금도 평양에 가겠다는 태도요?》

《그는 평양처녀에게 미쳤으니까요.》

《그래서 하는 말이요. 왜 그를 안지 못해?》

《저를 매춘부로 생각지 말아주세요.》

런니가 쌀쌀히 내붙이자 켐프는 빙그레 웃었다.

《거야 그렇지. 근데 아이레스가 이번 회의에서 어떻게 나올것같소?》

《건 걱정마세요. 그는 평양에 갈 꿈을 꾸지만 신념은 강한 사내니까요.》

《예측이요? 그의 말이요?》

《예측이기도 하고 그의 말이기도 해요. 활동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곳이라면 안된다는데 동의했으니까요.》

《그의 영향력이 크지.》

《당신처럼 돈부자니까요. 세계민청이나 국제학생동맹에도 그의 의견을 따를 친구들이 많아요.》

《그에 대해 책임질수 있소?》

《약속한것이 아닌가요.》

《그에게 단단히 못을 박소. 그가 지금 평양처녀에게 반해있다는데 그에게 말해주오. 거기 간다 해도 그 처녀를 만나지 못하게 하거니와 만나는 경우 안전경찰의 련행을 당한다고··· 그런데 당신은 그를 평양처녀한테서 떼여낼 재간이 없소?》

이 말에 런니가 샐쭉해지자 그의 어깨를 짚었던 켐프의 손이 뱀처럼 미끄러져내리며 가슴자락에 닿았다. 그러나 얼굴표정은 변함이 없고 말투도 그랬다.

《런니가 장담한 반대토론자들의 준비는 다 했소?》

《다 됐어요. 하지만 신통치는 못해요.》

런니는 약간 몸을 꼬았다. 손자극이 세게 몸에 미쳐왔기때문이였다.

켐프는 이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손을 내리웠다.

그리고 런니가 한 신통치 않다는 말을 굴려보며 다시금 벽난로의 불길에 눈을 주었다.

(그래 신통치 않아, 모든것이. 런니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젊었을 때와는 너무도 달라.)

그는 죤 포스톤 덜레스가 이 자리에 있다면 어떻게 할가 생각하였다. 덜레스는 미국의 리익을 위해서라면 깽단의 두목이건 나치스의 정보원이건 가림없이 만났고 지구의 동반구와 서반구를 때없이 주름잡아 다녔다.

일찌기 프리스튼대학의 학생회장이였던 21살의 켐프는 모교를 찾아온 그 《반공》의 거성에게 꽃다발을 안기고 장시간에 걸쳐 따뜻한 담화를 나누는 행운을 지님으로써 출세의 길에 오르게 되였다. 대학의 수재인 켐프를 잊지 않은 델레스는 자기 아우인 알렌 덜레스에게 그를 맡겨 초대중앙정보국조직에 참여하게 하였고 거기서 다시 불러 쌘프린씨스코우강화조약과 세아토창립에 수행원으로 따라다니게 했다. 그는 국무성비서실에도 있었고 조선전쟁때는 국무성특사로 동맹국들을 찾아다니며 《파병》과 《지원금》보장을 촉구했다. 그러나 오늘까지 덜레스가 그러했듯이 그도 한생의 위업인 《반공승리》의 결정적인 날을 보지 못하고있다.

1959년, 림종을 앞둔 델레스를 찾아 그의 별장의 음산한 방에 갔을 때 벽난로앞에서 성서를 보고있던 71살의 그 로인은 유언같은 말로 켐프의 마지막인생길의 리정표를 가리켜주었다.

《내 대에는 소원을 성취하지 못했소. 켐프, 나는 당신네들한테서 그 소원성취를 믿고있소. 절대 비관하지 말고 물러서지 마오. 로씨야를 보오. 흔들리는것이 보이지 않소? 그 나라 수령이라고 하는 흐루쑈브도 흔들리거던. 하지만 당장은 안될것이요. 10년 20년··· 그들의 후손들, 이를테면 4세, 5세때는 꼭 변화가 있을것이요. 청년들을 잘 살피고 관심을 돌리오.》

켐프는 그 말을 금언처럼 받아들였고 자기 활동의 지침으로 삼았다. 하여 그는 자기 재단과 수표만 하면 뭉테기로 쏟아지는 중앙정보국의 자금을 가지고 여러 출판물들과 방송회사들을 장악했으며 덜레스로인이 자기를 키웠듯이 《반공의 꽃》들을 키우기 위해 힘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레간이 취임하기 얼마전까지만도 《미중앙정보국》검찰관으로 있었다.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이 거의 알지 못하고있는 검찰관직제는 미국을 움직이는 세력가집단의 중요한 받침돌이였다. 검찰관은 오직 대통령과 중앙정보국 장관에게만 복종하게 되여있었고 사업보고도 오직 그 두사람에게만 하게 되여있었다. 미국회상원에서 채택되는 온갖 대외전략도 검찰관의 사전의견을 받게 되여있었고 국가안전보장회의에 제출되는 중앙정보국작전안도 그의 동의가 없으면 상정될수 없게 되여있었다. 하지만 철저한 공화당원이고 《매파》인 그는 우유부단한 민주당원인 테오도오 소텐슨 터너장관(1978년부터 1980년까지 《미중앙정보국》 국장으로 있었음.)과 호흡이 맞지 않았고 온건한 대외정책만 추구하는 카터대통령에게 환멸을 느껴 단호히 사표를 제출했던것이다. 그러나 그는 검찰관의 직제는 벗어놓았지만 미중앙정보국이라는 활동무대에서는 벗어날수 없었다. 하여 그는 유럽지역 특별담당 촉탁으로 가 서도이췰란드의 본과 이딸리아의 로마, 프랑스의 빠리에 사무소를 설치하고 델레스의 유언집행을 위해 정력을 아끼지 않았다.

백악관신년연회에 불려왔던 그는 캐씨장관과 교육장관, 국회상원 외교분과위원장과 레간의 특별담당보좌관까지 하여 다섯명이 모인 자리에서 캐씨의 《87년도 국제전략정책안》을 청취하면서 그 수많은 계획중에 《평양축전》을 저지파탄시켜야 한다는 조목이 나오자 역시 레간과 그 측근들이 대세를 볼줄 안다고 긍정하며 자기의 솜씨를 보일 때가 왔다고 쾌재를 올렸다.

대세는 덜레스의 《예언》대로 되는듯싶었고 자기는 그 실현에 로년의 마지막기운을 다 쏟아부어야 할것이였다. 2차세계대전때부터 유럽에서 맹활약을 벌리던 캐씨도 이젠 늙어 은퇴하게 되는데 자기도 그럴 날이 멀지 않으니만치 더욱 서둘러야 했으며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하는것이였다.

승산은 명백하였다. 덜레스의 《예언》대로 쏘련과 동유럽사회주의나라들의 새 세대 지도자들은 레간의 낚시에 걸려 흔들거리고있는것이다. 모스크바에 온 첫날로 만난 크레믈리의 당사상비서(켐프는 그를 카나다주재 쏘련대사로 있을 때부터 면식을 익혔다.)는 고르바쵸브와 일맥상통한 립장이라고 하며 평양이 반제축전을 고집하는 한 외면하는 자세를 취하겠다고 대답을 주었다.

이렇다 하여 완전히 마음을 놓을수는 없었다.

쏘련과 동유럽의 청년들이 《변화》를 보이듯이 미국과 서방의 청년들도 자기 립장을 망각하는 현상이 많았다. 정치에는 외면하고 제 향락에만 치중하고있으며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느끼지 못하고있는것이였다.

(런니, 너야 그럴수 없지.)

켐프는 꺼칠한 손을 썩썩 비비며 아득한 옛날 일개 대학생이였던 자기를 친절히 대하던 덜레스의 언동을 되살려보았다. 덜레스가 자기를 《수재》라는데서 관심을 돌렸댔듯이 켐프는 런니의 총명함과 미모를 값높이 보았다. 반대로 켐프는 파렴치성과 난봉군기질로 이름짜한 《꽃》들도 가지고있다.

《런니는 이제 친구들에게 꼭 해줘야 할 말이 있소.》

켐프는 덜레스가 아들벌되는 자기를 동료처럼 대하며 자기 심중을 솔직히 드러내던 그식으로 말했다.

《이번 회의에서 쏘련 청년단체나 공청은 지난 기간 부정하던 우리의 주장을 거의다 받아들일 자세요. 하니만치 조금만 힘을 쓰면 평양축전이 깨지는것은 물론 축전은 이제까지의 동구권놀음이 아니라 런니, 당신네 손에 들게 되오. 력사적분기점이요.》

켐프는 이 말을 하고 저도모르게 이마살을 찡그렸다. 그는 이번에 《평양축전》을 파탄시키고 새로운 축전을 마련하기 위한 구상을 하면서 그동안 별로 관심하지 않았던 조선에 대한 연구를 깊이 하였다. 이 과정에 그는 아이젠하워가 덜레스앞에서 설명한 조선전쟁에서의 참패리유를 들었을 때보다 더한 좌절감을 느꼈던것이다.

《어디 아프세요?》

런니가 의아쩍게 그를 보았다. 켐프는 자기의 울적한 심사가 드러난것 같아 거북했으나 천연스런 태도로 타이르듯 말했다.

《내 말을 호언장담으로만 듣지 마오. 물론 북조선은 그 지도자들의 대외적권위와 영향력으로 많은 지지세력을 가지고있는것만은 사실이요. 그러나 쏘련과 그에 따른 위성국들이 물러서고 당신들이 조금만 지레대질을 하면 그들은 산정에서 굴러내리는 바위돌신세를 면하지 못할것이요.》

문기척소리와 함께 납다직한 얼굴에 기름을 발라재운 반고수머리의 사나이가 들어섰다.

《다 왔습니다.》

《나가겠소.》

《누군가요?》

런니는 납다직한 얼굴의 사나이가 문을 닫자 재빨리 물었다.

《〈미국의 소리방송〉에 적을 둔 한국사람이요.》

켐프는 구체적소개는 피했다. 신년연회참가차로 워싱톤에 갔을 때 중앙정보국 국장인 캐씨로부터 소개받은 사나이였다. 그 사나이는 켐프를 각하로 때로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남조선 《안기부》 부장 박세직이 써보낸 소개신을 보여주었다. 소개신에는 《안기부》 부장과 같은 성의 박무엇이라고 밝힌 이 사나이가 《미중앙정보국》과 오래동안 관계하며 일해온 유능한 일군이라는것이 적혀있었다.

《갑시다.》

켐프는 런니의 팔을 가볍게 잡고 문쪽으로 걸어나가다가 한가지 잊을번 했던것을 말했다.

《파티가 끝나면 아이레스를 나에게 소개시켜주오.》

《알겠어요.》

···아이레스는 딴스홀처럼 넓은 방가운데의 연회탁에 앉아 국제전화로 시간과 장소까지 찍으며 이 연회를 마련한 주최측이 누구일가를 점쳐보았다. 이 방에 들어설 때 한국계 미국인으로 《미국의 소리방송》에 적을 두고있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40대사나이의 경박한 거동을 봐서는 그럴만 한 재목이 못된다고 보았다.

타원형의 커다란 연회탁에는 아이레스가 거의 다 알고있는 국제기구와 청년단체 대표들이 10여명가량 모여와있었다. 국제자유급진청년련맹, 세계청년회의, 유럽민족청년위원회 리사회, 도이췰란드련방청년리사회, 노르웨이 우익청년조직··· 매 대표들은 여느때없는 친근감과 의기양양한 태도를 보이며 악수도 하고 인사말도 나누었다. 그리고 아이레스와 마찬가지로 궁금증이 어린 눈길로 연회탁의 빈자리들과 《미국의 소리방송》이 사라진 문쪽을 흘끔흘끔 살펴보기도 하였다.

아이레스는 이 초대연의 목적이 어렴풋이 짐작되였다. 앞으로의 축전성격과 평양축전주최에 대한 립장을 밝힘에 있어서 공동보조를 취하기 위한 일종의 토론회일것이였다.

아이레스가 맞은편 벽의 량쪽에 설치된 텔레비죤에 시선을 주고있을 때 《미국의 소리방송》이 사라진 문쪽에서 런니와 함께 키가 훌쩍 큰 로인이 나타났다.

아이레스는 그 로인을 어디선가 보았댔음을 기억했다.

런니가 탁의 청년들에게 켐프를 소개할 때야 그는 메마른 살갗에 눈빛이 날카로운 이 로인이 지난해 열렸던 유엔국제청년학생운동회의때 래빈의 자격으로 축하연설을 하던 사람이였음을 알아보았다.

켐프는 도고하면서도 겸양스러운 태도로 탁주위를 돌아가며 매 청년대표들과 따뜻이 악수를 나누었다.

《알게 되여 반갑습니다.》

은근하면서도 품위있는 어조로 인사말을 하며 그가 앞에 이르렀을 때 아이레스는 그의 눈이 한순간 매눈처럼 자기를 살피는것을 보며 왜서인지 오한비슷한것을 느꼈다.

《아이레스라고 하지요. 런니를 통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켐프는 그의 손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오래 잡고 두세번 가볍게 흔들었다.

런니와 켐프, 박모라는 사나이가 자리에 앉자 그때까지 보이지 않던 애어린 처녀가 매사람앞의 잔에 샴팡을 부었다.

그 녀자는 동양인인듯 했으나 코날이 상큼하고 눈에 쌍가풀이 진것을 보면 프랑스인형 같기도 했다.

켐프가 려행길에서의 무사함과 알게 된것을 축하해 들자고 하며 주인역을 했다.

《나는 오늘 당신들과 자리를 같이하게 된것을 더없는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코리안 박도 여러분들이 이처럼 찾아준데 진심으로 사의를 표하고있습니다.(그 말에 박모라는 사나이는 일본식인사 비슷이 머리를 까딱거렸다.)

내가 오늘 당신들과 이 자리를 함께 하게 된것은 당신들에게 미국시민으로서 동시에 미국행정부의 의사를 대변하여 간절한 부탁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늙었고 당신들은 젊으며 그만큼 나는 로둔하고 당신들은 명민합니다. 하지만 나는 반백이 넘은 오늘까지 서방세계의 리익을 위해 싸워온 파란많은 인생사속에서 내딴의 교훈과 경험을 깊이 새겨안고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여기 모인 당신들이 래일의 주인들이며 자유세계의 수호신들임을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서두가 장황해 미안합니다.》

켐프는 흰수건을 꺼내여 입가에 가져갔다가 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래일 당신들은 력사적인 대결장에 나서게 됩니다.

지금 북조선은 여기 모인 여러분들과 자유세계의 의사에 맞서 〈평양축전〉이라는 〈적화〉의 축전을 마련하려 하고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것이지만 〈적화〉라는것은 일찌기 윈스톤 처칠경이나 죤 포스톤 덜레스께서도 말한것처럼 개개인의 리익과 자유를 유린하는 무서운 독소입니다. 오늘날에 와서 자유세계의 적으로 되였던 로씨야는 그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물러서려는 때에 북조선만은 전세계를 〈적화〉의 함정으로 이끌려 하고있습니다.

때문에 나는 자유세계의 수호신들인 당신들이 이 기도를 무찔러버릴것을 간곡히 호소하는바입니다.

그렇다면 가능성이 있는가. 있습니다. 그것은 평양이야말로 자기들의 사상외에는 그 어떤 사상과 정견도 용인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고리를 틀어잡고 그들의 오만한 희망을 짓부셔버려야 할것입니다. 력사와 자유세계는 지금 당신들을 지켜보고있습니다. 나는 당신들이 현세의 청년운동을 자유와 공정성의 길로 돌려세운 력사적영웅들로 되리라는 기대와 확신을 표명합니다.》

탁의 사람들이 다음말을 기다릴 때 박수소리와 함께 《오케이.》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레스는 문가에 로찌가 나타난것을 보았다. 그는 켐프와 박에게는 구면인듯 약간 머리를 끄덕여보이고 이런 장소에서 인사치레따위는 아랑곳 없다는 태도로 는적는적 걸어와 아이레스의 어깨를 그러안았다. 《난 자네가 빠질가봐 우크라이나호텔앞에서 반시간을 떨었네.》

런니를 보자 손등에 입맞추는 시늉을 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손을 들어보이고 빈자리에 가앉았다. 켐프는 너그럽게 웃으며 보다가 계속했다.

《여러분들도 알겠지만 현재의 공산주의운동은 급속한 조락기를 맞고있습니다. 며칠전에 열린 쏘련공산당 전원회의에서 경제개혁뿐만아니라 정치에서의 개편까지 론의한것은 공산주의의 불합리성과 모순을 인정하고 방향전환을 선포한것으로 됩니다. 이것은 쏘련의 립장과 견해만 아니라 그 위성국들의 동일한 립장과 견해로 된다고 봐야 할것입니다. 때문에 축전과 청년운동을 자유의 길로 역전시키는데서 밝은 전망이 열리였습니다. 문제는 여러분들에게 달려있고 13차축전을 평양에서 하지 않게 하는데 있습니다. 나는 다시금 여러분들의 수고와 노력을 호소합니다. 감사합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전에 박이 처녀에게 눈짓하자 도자기병술을 매 사람의 잔에 부었다.

술병에 붙어있는 중국글자를 본 아이레스는 언젠가 《빼주》에 혼난적이 있었던지라 들지 않으려 했으나 례의상 마시지 않을수 없었다. 그런데 술은 《빼주》와 달리 달콤하면서도 감미로왔다. 그가 술잔을 내려놓자 박이라는 사나이가 삽삽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술은 한국의 유명한 〈법주〉입니다. 미국의 대통령들도 이 술에 대하여 높은 평가를 내렸습니다.》

《포도주잔에!》

로찌가 《프랑스인형》에게 소리치자 저마끔 포도주잔을 그 처녀에게 내밀었다.

몇순배 돌아가자 실내등이 어두워지며 텔레비죤형광판이 밝아졌다. 소리없는 화면이 흘러갔다. 처음에는 뉴욕의 건물 비슷한 몇개의 고층집이 나오고 경기장이 펼쳐지는가 하면 유럽의 어디서나 볼수 있는 스트립 쇼장면이 펼쳐졌다.

녀배우들이란 발육이 채 못된 처녀애들을 벗겨내세운것 같이 초라하고 볼품 없었으나 아이레스는 눈이 커졌다. 조선녀자들이였기때문이였다. 그런데 그 장면은 인차 없어지고 뛰르끼예탕 비슷한 목욕탕에서 안마를 하는 처녀며 해수욕장에서 딩구는 동서양 사람들과 운동장처럼 넓은곳에 가득 박아세운 승용차따위들이 나타났다.

술잔으로부터 그 화면에 시선을 옮긴 사람들이 어덴가고 묻자 박모라는 사나이가 서울이라고 하며 능숙한 영어로 88올림픽준비에 대하여 말하였다.

《지금 한국정부에서는 서울올림픽을 력사상 최상의 봉사와 환대로 특징지어질 축전으로 하려 하고있습니다. 여기 오기전 나는 한국정부의 한 고관을 통해 이번 축전문제토론에서 공헌하는분들에게 특별초대장을 드릴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려비로부터 숙식비에 이르기까지 일체 한국정부가 담당할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나도 보증합니다. 우리 대사관 참사가 정식 나에게 통고해왔습니다.》

켐프가 말했다. 아이레스는 썩은 고기덩이를 씹은 기분이였다. 너무나도 로골적인 매수작전이였기때문이다. 그는 작년도 아버지의 회사근무원이 서울에 갔다가 독성식품에 중독된 사실을 상기하였다.

《서울에서는 대학생과 경찰이 늘 싸움을 벌리고있는데 그때엔 최루탄가스가 없어질가요. 외국인들의 사진촬영까지 곤봉으로 때려막는다고 했는데.》

아이레스는 박모의 눈길을 곧추 보며 물었다. 좌중의 시선이 불쾌한 빛을 담고 그에게 쏠렸다. 그런데 이제까지 서푼짜리라고 보아온 박모가 의외로 매우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간혹 그런 일이 있습니다. 민주사회에서 흔히 볼수 있는 일이지요. 그러나 그때엔 최루탄가스가 없을것입니다.》

《당신은 2중국적입니까?》

《아니, 나는 미국시민입니다. 그러나 모국과는 어머니의 젖줄과 떨어질수 없듯이 인연이 맺어있는것이고··· 이로 하여 나는 〈한미〉친선상에서 성의높은 통신원이며 불순물이 없는 전도체이지요.》하며 박모는 빙긋 웃고는 탁에 놓인 원격조종장치의 단추를 눌렀다.

텔레비죤화면이 흑색으로 변하며 2차대전직후 동유럽의 신설도시들과 류사한 거리가 나타났다. 2층짜리 건물이 태반이고 간혹 4∼5층짜리 건물도 보였다.

《북조선의 평양입니다.》

박모라는 사나이가 좌중을 둘러보며 해설자의 억양으로 조용히 말했다. 아이를 업고 보퉁이를 인 녀인이 나타나는가 하면 쩍쩍 갈라진 세멘트포장도로로 달구지가 굴러갔다. 그옆에는 장죽을 꼬나문 로인이 걸었다.

《목가적인데ㅡ》

누군가 야유조로 말하자 박모는 긍정하는투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동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그곳 산천은 사실상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인간생활이란 의미에서는 여러분들로 볼 때 지옥이지요. 가령 그 나라 청춘남녀들이 련애를 하자고 해도 안전부에 사전보고하고 승인을 받아야 하게 되며 공원같은곳에서의 밀회는 엄금되여있습니다.》

《감옥이군요.》

런니가 담배를 꼬나물며 하는 말에 박모는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사실 지금 적지 않은 사람들속에서 한국을 〈인권의 불모지〉라거나 〈군사파쑈국가〉라고 하지만 북조선에 비하면 꽃동산이지요.》

아이레스는 심한 피곤을 느꼈다. 이러루한 선전은 여기서 처음 듣는것이 아니였다. 북조선은 《공산독재》의 국가이니만치 그 선전이 무근거한것은 아니겠지만 역시 동서방의 대결심리로부터 과장된 선전일것만은 틀림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다른 청년들도 다같은 표정이였다.

《음악을 들읍시다.》

켐프가 박모에게 눈짓하였다. 그러자 박모는 《프랑스인형》에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처녀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까닥이고는 《무대》뒤쪽으로 사라지고 뒤미처 털외투를 걸친 7∼8명의 녀인들이 우르르 쓸어나왔다. 하나같이 골라세운듯 몸매가 쭉 빠지고 얼굴이 환한 로씨야처녀들이였다.

아이레스는 다시한번 이 켐프와 박모라는 사나이의 정체를 두고 생각했다. 서방과는 달리 매춘부와 사영 무용수를 허가하지 않는 땅에서 저런 무용수들을 이 장소에까지 끌어왔다는것은 그 힘이 간단치 않음을 의미하는것이였다. 그는 런니에게 그만 떠나지 않겠는가고 말했다. 춤에 습관된 그였으나 지금은 빨리 가서 자고싶은 욕망밖에 없었다. 런니는 은은히 울리는 부르스곡에 귀를 기울이며 망설였다. 그때 켐프가 굵진 소리로 런니가 노래를 불러줄것을 제기했다. 여러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어쩔수 없군요.》

런니는 마지 못한듯 일어나 마이크쪽으로 걸어갔다. 아이레스는 그가 마이크를 잡으며 떠나지 말라는 시늉으로 애절한 눈길을 보내는것을 보면서 일어섰다. 몸이 불편해 그만 떠나겠다고 하자 켐프와 박모는 매우 실망한 기색을 보였으나 굳이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이레스가 문가에 이르렀을 때는 실내의 전등이 거의다 꺼지고 벽밑의 파란 불과 뻘건 불만이 번쩍이였다. 런니의 노래소리가 그의 목청과는 전혀 달리 전문음악가 못지 않은 풍만한 성량으로 흘러나오고 무대에 나와 흔들거리던 녀자들이 털외투를 벗어 마구 던졌다.

반라체의 녀인들이였다. 아이레스는 급히 문을 열고 쫓기듯 걸음을 옮겼다. 그때 《프랑스인형》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처녀의 손에는 얄팍한 책이 들려있었다.

《뭐요.ㅡ》

《기념입니다. 받으세요.》

처녀의 생글거리는 미소를 귀찮게 보며 책을 받아들자 손에 딱딱한것이 감촉되였다. 잡지안에는 편지봉투가 들어있었다. 아이레스가 의문어린 눈길로 보자 《프란스인형》은 정확한 영어로 말했다.

《모스크바에서 마음난 기념품을 사라는것입니다. 딸라입니다.》

《당신이 가지오.》

아이레스는 잡지만을 들고 돌아섰다. 정문을 나오자 부르스곡은 록크음악으로 변하여 그의 마음을 끄당겼다. 런니가 지금 어느 남자와 춤을 추겠는가 하는 생각이 치밀며 절로 이마살이 찌프러졌다. 런니에 대해서는 좀더 알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떻게 한다?···)

아이레스는 켐프의 매눈이며 돈봉투를 주려던 《프랑스인형》을 그려보며 래일 있게 될 회의를 생각했다.

평양축전을 지지하면 그 연회탁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적의를 살것이고, 반대한다면 그토록 호기심을 끄는 림향옥이며 평양이라는 아름다운 도시도 못볼것이였다.

《햄리트씨, 어떻게 할가요. 사느냐, 마느냐지요.》

아이레스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축전과 청년운동에 대한 자기의 견해가 무엇일가 하고 따져보았다.

《사느냐, 마느냐.》

차에 올랐을 때 아이레스는 햄리트의 한 대사구절을 뇌이며 쓴 웃음을 머금었다.

런니와의 교제와 자기의 《정치행각》이 그 어떤 음모적인 놀음판에까지 이르게 되였다는것이 몹시 불쾌했다.

그가 《정치》에 뛰여든것은 《성해방》의 물결이 온 나라를 휩쓸 때였다. 방송과 출판물, 국회연단에서까지 그 웨침이 소리높이 울리고 거리에서는 시위까지 벌어지고있을 때 당시 22살의 청년이였던 아이레스만은 그 흐름을 거슬러 나섰다. 나라의 경제계를 뒤흔드는 대산업가의 아들인 아이레스의 이러한 태도는 사회계와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허나 《성해방》을 반대하는 그의 말과 글이 텔레비죤과 출판물에 나가자 그는 며칠사이에 《금욕주의자》,《중세기기사》로 락인되고 말았다.

그렇다 하여 물러서거나 주저앉을 아이레스가 아니였다. 2차세계대전시기 히틀러군 치중대와 암거래를 하여 폭리를 얻은 아버지의 예민한 두뇌와 영악한 기질이 그의 피에도 섞여있었다. 그는 하나 둘 지지파를 얻어내며 아버지의 돈에 의거하는 출판사에 《원시에로의 려행》을 즐겨하는 무리들에 폭탄같은 비난을 들씌웠다.

그런동안에 《성해방》이야말로 일시적환락이지 가정과 인간사랑의 고유함마저 다 무덤에 끌고가는것임을 알게 된 사람들은 아이레스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였다. 정계의 인사들이 아이레스를 끄당기며 자기파의 청년두령으로 내세우려 했다.

하지만 그에게서 정치란 전혀 관심밖의 일이였다.《〈성해방〉반대투사》로 된것은 그의 체험에서 얻어진 생각을 내놓았다가 맞불질이 오자 지지 않으려는 승벽으로 끝까지 해댔던것이다.

그는 이미 16살부터 녀성들의 《포위환》속에서 살았다. 어떤 녀성들도 이 대자본가의 아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들에게만은 돈에 아낌이 없던 아버지는 그의 어떤 교제에도 눈을 감아주었다. 일본의 기생들로부터 미국 헐리우드의 녀배우들에 이르기까지 그가 흥미를 가지는 모든 녀성들이 돈에 끌려 그에게 추파를 던졌다. 그러나 기나긴 녀성편력끝에 얻어진것은 허무와 환멸뿐이였다. 그와 부닥친 녀성들은 죄다 그라는 인간이 아니라 그의 돈주머니를 사랑했던것이다. 하여 그는 너무나도 일찍 성애의 조락을 체험했다.

나폴리에서 만난 녀자와의 교제가 마지막으로 되였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살결이 가무잡잡한 그 녀자는 아이레스의 돈지갑까지 훔쳐가지고 사라졌다.

바로 이러한 때 아버지가 에이즈비루스에 감염된것이 드러났다. 일찌기 차사고로 어머니를 잃은 아버지는 가정부 하나를 고용한채 녀성들과의 관계에서 무절제하고 복잡했던것이다. 이 불행은 아이레스로 하여금 《〈성해방〉반대론자》로 된 결정적계기로 되였다.

그는 사랑에는 물론 녀성에 대한 일종의 혐오까지 느꼈다. 세상살이마저 귀치않게 여겨졌다.

도박이나 경마, 사냥놀이 같은것에 취미를 붙여보려 했으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도박에는 협잡과 기만술이 뒤따라야겠지만 그에게는 그나름의 고지식성으로 하여 거슬렸고 경마와 사냥은 너무나 단조로왔다. 현대의 집시라고 하는 《허피》족들속에 섞어 야인의 생활에 몸 적실가도 생각했지만 그것은 체면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여 그는 독서에 취미를 붙이려 했다.

세계적으로 이름있다는 작가들의 작품을 닥치는대로 읽었다. 그러나 어느 하나 끝까지 읽지 못했다. 자기가 환멸속에 외면한 지난기간의 생활로 되돌려세우려는 저속한 내용이 아니면 난해하고 모호하여 머리를 아프게 하는 소설들이기때문이였다. 우연중 텔레비죤에서 《햄리트》를 보고 쉑스피어를 파고들었다.

햄리트가 작가의 환상에서 빚어낸 인물이지만 혈통상 자기의 먼 선조라는 동질감과 그의 번민이 마음에 들어 자신을 현대판 햄리트로 생각해보았다. 고전을 거슬러 올라가던중 바이론의 《차일드 하롤드의 편력기》는 신통히 자기를 그려낸것이 아닐가 할 정도로 감동이 되였다. 그런 선상에서 선택된 독서는 인간은 현대와 가까울수록 타락했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아름답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하였다. 루쏘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도 그런 의미에서 받아들여졌다.

(《로메오와 쥴리에트》의 시대로 돌아갈수 없을가.)

그에게는 이러한 장미색공상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가 《정치》에 용약 뛰여들어 사회민주당과 록색당의 후원을 받는 청년단체의 한 역원으로 된것은 바로 이때문이기도 하였다.

재작년 모스크바에서 조선청년들을 만나게 된것은 그의 인생사에서 극적인 전환점으로 되였다. 서방의 언론매체들과 적지 않은 동료들이 《페쇄적》이라고 하는 조선청년들에게서 그는 자기 공상의 실존을 보았다.

구김살이 없고 가식이 없는 그들에게서는 20세기 문명의 허울을 쓴 타락과 방탕의 병균을 찾아볼수 없었던것이다.

《이것이다!》

림향옥은 그에게 창세기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지닌 리상과 희망의 별로 되였다. 녀성들과 교제할 때 쓰던 장기로 광열의 춤속에 이끄는 그 순간에도 그 녀자는 정화된 미를 잃지 않았다.

한 청년이 뛰여들어 그 춤을 제지시켰을 때, 풀어진 머리와 웃섶을 매만지며 수치와 분노에 빨갛게 달아오르던 얼굴, 눈물이라도 떨굴듯싶게 부끄러움을 내비치며 야멸차게 자기를 쏴보던 녀자의 눈길에서 그는 마음속으로 환성을 올렸다. 끝없이 깨끗한 넋을 발견했던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조선에 대한 진지한 관찰자, 연구자가 되였다. 조선영화와 예술단공연의 록화테프를 얻어 열심히 보았고 조선을 소개한 책자들과 세계의 지성계에 파문을 일으키고있는 주체사상에 대한 책들을 주의깊게 읽었다. 주체사상은 그에게 끝없는 경이와 황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선전과 현실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것을 체험으로 새겨안고있는 그는 반신반의속에 이 나라의 정치와 제도를 주시하였다. 정치체제나 사상상 리념이 쏘련과 동유럽사회주의나라들과 본질적으로 같을것이라는것이 차단봉처럼 그의 앞에 늘 드리워있었다.

허나 림향옥이만 응한다면 그 차단봉도 뛰여넘을만큼 그의 정열은 한곬을 타고 무섭게 타끓었다. 림향옥에 대한 이러한 열중에 대하여 동료들이 비웃을 때 그를 리해해준 사람이 런니였다. 그전까지만도 유럽민족청년위원회 리사회나 그 비슷한 회의장소에서 가끔 만나군 한 런니였으나 동료들이 굉장한 미모의 이 녀인에게서 환심을 사려는것과는 달리 아이레스는 그에게 무척 랭담하였다. 그러루한 미인들에게 수많이 치여난 그로서 녀성과의 교제를 단념한 뒤끝이라 더욱 그러하였다.

런니 역시 처음에는 은근한 추파를 몇번 보내였지만 아이레스에게서 아무러한 반응조차 없자 인사나 나누는 정도의 사이를 유지하였다.

《동양에는 에덴(에덴동산ㅡ인류시조인 아담과 이브가 있었다는곳)이 있다고 믿는가부지요?》

런니는 이 말로써 그에게 접근해왔다.

《전 이제껏 당신을 나르시쏘쓰(물에 비친 자기용모에 반하여 녀성을 피해 수선화가 되였다는 신화의 인물)로 생각해왔어요.》

이것이 런니의 두번째 말이였다.

런니한테는 랭담하면서도 림향옥에겐 부쩍 빠져든데 대하여 비난하는 말같았다. 그런데 런니는 자기 역시 나르시쏘쓰를 본딴다고 말하였다.

아이레스는 놀랐다. 녀성이, 더구나 눈에 한번 웃음만 띄워도 수많은 남자들이 덤벼들 미모의 녀성이 자기와 비슷한 생각을 품고있다는것이 천만뜻밖이였기때문이였다. 화제가 깊어지자 아이레스는 이 런니라는 녀자가 처녀성을 그대로 《보존》하고있으며 앞으로도 《금단의 과일》로 될것을 결심했음을 들었다.

성적불구자인가 하고 점쳐보았으나 이런 육체미를 가진 녀성에게는 있을수 없는 일이였다. 아이레스는 이 공통점의 발견으로 하여 런니와의 친교를 깊이 했다.

인생과 사회에 대하여 보는 시점에서도 거의 일치하다는것을 알았을 때 림향옥은 손잡기 어려운 별이였으나 런니는 체취와 호흡을 가까이 느끼게 되는 현실적인 벗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