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1

 

제 5 장

1

 

조국을 떠나 한달 가까이 유럽으로, 중근동으로 동분서주한 류진영은 조창혁이의 일행이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며칠후인 2월 5일 저녁 쉐레메찌예브비행장에 내렸다. 에티오피아의 수도에서 떠난 장거리비행이였다. 그와 함께 에티오피아에서 열렸던 국제학생동맹집행위원회의 참가성원들과 도중역에서 올라탄 여러 나라 청년단체와 지역지구대표들이 비행기에서 내렸다.

모스크바의 날씨는 혹독할 정도로 추웠다.

비행기안에서 미리 속내의도 한벌 더 껴입었지만 땅에 발이 닿기 바쁘게 온몸이 얼어들며 이가 떡떡 맞쪼였다. 그를 마중나온 지도원은 몇분만 더 밖에 있으면 동태귀신이 되겠다고 우는 소리를 하며 어서 가자고 재촉했다. 그러나 진영은 거의 모든 승용차들이 떠나가고 유측진곳에 섰던 검은색 포드형승용차가 발동을 걸 때에야 차에 오르며 그 차를 따르라고 했다.

포드형승용차는 시내중심의 대도로를 달리다가 몇개의 골목을 꺾어들어 자그마한 쇠울타리를 두른 3층건물앞에 들어가 멎었다.

《기억해둬야겠소.》

진영은 철문기둥에 리베트로 고정시킨 동판을 보며 차를 돌리라고 했다. 동판에는 무슨 《대외무역지사》라는 글자가 부각되여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방해군들이요.》

진영은 호기심에서 뒤따라온 차안의 런니와 아이레스를 그려보며 우울히 말했다. 런니와 아이레스는 에티오피아 수도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들은 회의참가가 아니라 회의에 오는 친구들을 만날겸 놀러왔다고 했다. 그들이 단순히 놀러온것이 아니란것은 명백했다.

오늘 비행기안에서 그들과 또 부딪치고 세계민청의 동부도이췰란드대표가 런니를 가리켜 《흑막의 인물》이라고 할 때는 더욱 그러했다. 이번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1차아이피씨에서 그 본성을 말끔히 드러내겠구나 하는 위구심에서 그들이 탄 차를 따라가보았다. 그 차가 그들의 해외대표부차가 아니라 미국대사관차라는것으로 하여 의심이 더욱 깊어졌기때문이였다.

진영은 이번에 열두개의 나라들을 돌아보았다. 오래전부터 초청이 제기되였거나 새롭게 초청해온 나라 청년단체들에 대한 방문이였다. 그는 초청받은 모든 나라들에서 귀빈으로 환대를 받았고 《평양축전》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와 찬동을 담보받았다.

그러나 베를린과 에티오피아에서 열린 회의는 그에게 락관할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았다.

이번 모스크바 1차아이피씨에 내놓을 국제학생동맹의 립장과 견해를 합의보는 국제학생동맹집행위원회 회의에 제출된 쏘련측 문건과 결의들에는 《반제》는 물론 《미제국주의》라는 지칭도 《미국행정부》라는 단어로 바뀌였다. 꾸바대표와 쏘련대표간에 장시간 벌린 단독회담에서 《미국행정부》는 《미제국주의》로 수정되였으나 《반제》는 끝내 넣지 못했다. 그런데 이 《미제국주의》라는 말도 최종문건채택에서는 삭제되고말았다.

이에 대하여 실망하고 분개하는 사람들속에는 국제학생동맹위원회 위원장도 있었다. 지난 기간 조선에 와 위대한 수령님의 접견도 받은바 있는 그는 자기로도 막을수 없는 이 《힘》에 대하여 개탄하여마지 않았다. 이 《힘》이란 서방계와 중간우익세력의 반대책동과 쏘련측의 태도를 념두에 둔것이였다.

《그러니 지금 창혁동무는 없겠구만.》

지도원이 들려주던 소식중에 조창혁이 지금 레닌공청1비서를 만나러 갔다는걸 상기하며 물었다.

《인젠 돌아왔을겁니다.》

《한데 그 마로넨꼬가 초청했소? 아니면 우리가 가서 만나는것이요?》

《형식이야 초청이지만 우리가 요구한것이지요. 레닌공청1비서인 마로넨꼬는 군인출신이라는것으로 해서 조창혁동지가 만나게 했습니다. 지금 우린 그 결과를 놓고 무척 초조해있습니다.》

지도원의 말투엔 헛된 《추적》으로 시간을 잃게 한 진영이를 못마땅히 여기는 기분이 다분히 어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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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혁은 강철로 부어만든 사람마냥 시종 꼿꼿한 자세를 허물지 않고 앉아있는 마로넨꼬를 보며 오늘의 면담에서 아무런 성과도 기대할수 없구나 하고 생각했다.

연밤색머리의 마로넨꼬는 칼칼한 얼굴에 눈빛은 차고 날카로왔다. 창혁이가 마로넨꼬를 만나게 된것은 종잡기 어려운 쏘련측의 움직임때문이였다. 쏘련청년단체의 일부 일군들은 이번 회의에서의 축전장소결정은 시기상조한것이고 축전성격문제나 합의보는것이 바람직하다는 말까지 내돌리고있었으며 우리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도 정황과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만치 평양축전제기를 보류하는것이 좋겠다고 권고해왔다.

더구나 놀라운것은 그런 랑설의 앞장에 쏘련청년단체를 대표하는 악쏘노브가 서있는것이였다. 악쏘노브는 우리 대표단이 도착하는 첫날 비행장에까지 나와 조선측의 희망과 의사를 실현시키기 위해 사심없는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했다. 그처럼 언약한 《노력》이 축전주최를 포기하라는것과 같은 《보류》설로 뻗으니 이것을 어떻게 리해해야 하는가.

이 문제로 면담을 청한 김관에게 악쏘노브는 지난해 봄과 비슷한 처지요, 립장이요, 전술이요 하는 말을 중언부언하다가 본심은 변함없으나 정세를 고려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변명까지 잔뜩 늘여놓았다.

마로넨꼬는 조창혁의 말에 대하여 이따금 머리를 끄덕이든가 실눈을 짓는것으로 알고있다던가 잘 모르겠다는식의 연기만을 보여주고있었다.

(마찰은 피할수 없구나.)

창혁은 참나무판으로 된 맞은편 바람벽의 레닌초상기를 보며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있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레닌공청이 취하고있는 태도와 움직임을 보면 반제전선에서 퇴각하고있다는것으로밖에 달리 설명할수 없다고 보아집니다. 이로부터 래일 있게 될 회의에서 우리 두 나라 청년단체의 의견상이가 서방은 물론 전세계에 알려지게 된다는 사실에 유감을 금할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청년들은 물론 쏘련의 청년들과 인민들도 바라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로넨꼬가 통역에게 한손가락을 쳐들어보였다. 면도를 깨끗이 한 그의 흰 뺨에 알릴듯말듯 한 홍조가 서리였다.

《창혁동지, 극단으로 나가지 맙시다. 먼저 나는 모든것을 리해하고있고 깊이 생각하고있으며 정의로운 립장에서 물러서려 하지 않고있음을 말하게 됩니다.》

그는 웃몸을 더욱 꼿꼿이 폈다.

《레닌공청의 원칙적립장에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조선사로청의 희망과 요구대로 이번 회의에서 평양축전주최문제가 결정되여야 하며 축전성격과 구호에서 반제련대성이 필수적이라는것을 인정합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창혁의 물음에 마로넨꼬는 매끈히 다스린 분홍빛손톱을 내려다보다가 처음으로 미소 비슷한것을 보였다.

《인정한다는것과 실천한다는것에는 차이가 있지요. 우리로써는 현재상태에서 〈반제〉를 정면에서 들고나오기 어렵게 되였습니다.》

《그건 무엇때문입니까?》

《나로써는 그 문제에 대해 더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번에 〈반제〉구호와 〈장소〉결정을 동시에 내밀려 한다면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우리는 평양축전을 지지합니다.》

《감사합니다. 그에 대하여 나는 쏘련동지들이 우리의 〈반제〉립장에 제동을 걸지 않으리라는것으로 리해하겠습니다. 다시말하건대 나는 이 문제로 회의장에서 불쾌한 마찰이 없기를 바랍니다.》

마로넨꼬의 얼굴이 침울한 빛으로 굳어졌다.

《리해됩니다. 하지만··· 회의정황이 어떻게 될지 ··· 우리는 어쩔도리가 없습니다.》

《그런 정황이 없게끔 동지들도 도와야지요.》

창혁은 그를 뚫어지게 보았다. 마로넨꼬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무겁게 대답했다.

《노력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은 없습니다. 나의 직권상 힘이 미치는껏 노력하겠다는것 그뿐입니다. 그리고 조선동지들도 필요하면 막뒤에서 자기할바를 다하라는것입니다. 나는 그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지지 않겠습니다.》

창혁은 놀랐다.

(모순속에 있구나, 아니 고민이다.)

처음 만났을 때의 무감각한 태도와 차거운 얼굴빛이 그 고민을 감추기 위한 연막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가 측은해보였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제일 불만스럽게 보게 되는것이 악쏘노브동지의 태도입니다. 쏘련청년단체 전체를 대표한것으로 되는 그가 우리의 축전주최를 다음기로 미루려고 하고있습니다. 나는 마로넨꼬동지가 그에게 응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여줄것을 부탁합니다. 쏘련청년단체의 주축이 공청이고 지금까지 쏘련청년단체가 공청의 선도적위치를 인정하고 그에 따른만치 나는 이 문제가 쉽게 해결될것으로 믿습니다.》

창혁은 처음과 달리 대화가 어느 정도 성과를 보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로넨꼬의 대답이 몹시 짓눌린 어조로 울려나오는데 신경이 씌여졌다. 마로넨꼬는 두손을 맞잡고 눈길을 떨군채 뜨직뜨직 말했다.

《나는 악쏘노브동무에게 오늘의 담화내용과 우리 공청의 립장을 다시금 밝히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견해를 바꾸려 하지 않을것입니다. 그와 우리 사이에서 지시를 주거나 받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청년단체는 청년단체대로 독자적일뿐아니라 대외적으로는 공청까지를 포괄한 조직으로 되니만치 우리가 이래라 저래라 할수 없습니다.》

《그는 공산당원이 아닌가요.》

마로넨꼬의 얼굴에 서글픈 그림자가 스쳤다.

《물론 공산당원이지요. 그리고 그의 견해도 다 당의 해당 일군과 합의밑에 형성된것일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리해되지 않습니다.》

마로넨꼬는 쓰겁게 웃었다.

《우리는 당내 민주주의와 다원제의 흐름을 역행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롱인가, 기만극인가. 그러나 마로넨꼬의 허심하고 진지한 그리고 어떤 고통을 묵새기는듯 한 눈빛에서 그러한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뭔가 리해되였다. 마로넨꼬도 악쏘노브도 그 어떤 새로운 흐름의 물결에 떠실려 자기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흘러갈따름이다. 마로넨꼬에게는 제나름의 모지름이 있다.

창혁은 더이상 대화가 필요없음을 깨달았다. 악쏘노브가 어데 있는가를 물었다.

《그를 만나지 못할것입니다. 오늘밤에도 적게 잡아 열댓나라단체 단장들과 만나게 될것입니다.》

창혁은 문밖에 나올 때 반쯤 열려진 대기실안에 역시 열댓명이상 될 여러 나라 청년일군들이 있는것을 보았다. 그런데 쏘파등받이에 몸을 기댄채 화보를 보는 반백의 맑스머리가 퍽 낯이 익다는데 주의가 갔다. 마로넨꼬는 조창혁이 차를 타는데까지 따라나왔다.

《나는 조선사로청의 대외적영향력이 크다는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마로넨꼬의 마지막말이였다. 악수를 할 때 그는 뭔가 더 말을 할듯말듯 하다가 《안녕히》라는 밤인사로 대치하고말았다.

《우크라이나호텔》에 돌아오니 홀안은 수많은 나라 청년대표들과 기자들로 붐비였다. 몇몇 풋낯이 있는 청년일군들이 창혁에게 환성을 올리며 마주왔으나 창혁은 인사말만 남기고 황급히 자기 방에 올라갔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류진영이 그를 기다리고있었다. 창혁은 류진영이 만났던 청년단체들모두가 《평양축전》지지세력이라는데서 고무를 얻었고 반면에 진영은 쏘련측에서의 《동요》를 두고 몹시 걱정했다. 쏘련의 영향력밑에 있는 나라 단체들에서 《동요》와 《기권》으로 나올수 있기때문이였다. 창혁이도 그와 마찬가지의 심정이였지만 문제는 서방측이나 그들에게 기울어진 청년조직대표들의 도발과 공격을 어떻게 막는가 하는데 승패의 여부가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이로부터 진영의 입에서 나온 런니와 아이레스의 움직임은 창혁이로 하여금 호기심에서라기보다도 다가올 위험이 어떻겠는가를 알아보는 중요한 일로 여겨져 각별한 관심속에 듣게 되였다. 평양을 떠나오기전 김정일동지께서 서방과 남조선《안기부》의 책동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런 세력의 움직임에 대한 예고였다는것을 생각하며 어려운 전투를 앞에 둔 지휘관같은 긴장과 초조감을 맛보았다.

(과연 그네들이 어떻게 나오겠는가.)

쏘련측의 태도도 역시 아직은 두고봐야 할 일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