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1

 

제 4 장

1

 

1986년 12월 1일 (날씨 흐림)

··· 지금 학생소년궁전건설장은 온통 수렁판이다.

불도젤, 굴착기, 기계란 기계는 다 뒤걸음친 속에 말그대로의 육탄전투를 벌리고있다. 3만여㎥의 토량을 파제껴내는 일이다. 나는 이 작업에서 전투적랑만과 희열을 찾으려 애쓴다. 하나 매일 수천, 수만번으로 이어지는 단조로운 삽질과 30∼40㎏의 감탕을 지고 하루 50∼60여리 걸음의 《수렁판행군》을 하느라면 온몸은 허탈상태에 들어가고 웃을 기력마저 잃게 된다.

(해병! 단련이 부족해.)

나는 이렇게 자신을 비웃기도 한다.

가장 좋기는 백두설한풍속 험한 눈길을 헤쳐가는 부상당한 항일혁명투사의 강의한 모습을 그려보며 장군님께 다진 맹세를 목숨바쳐 지켜가리라는 영화주제가를 입안으로 부르는것이다. 그러면 등짐의 무게도 잊혀지고 걸음발도 가벼워진다.

그러나 그 세계에만 잠겨있을수도 없다.

대원들에게 웃음어린 얼굴도 보여줘야 하고 고무어린 말도 해줘야 하기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연기》는 (나로서는 아직 이것을 연기라고밖에 할수 없다. 의식적인 노력이니까.)공연한 노릇이기도 하다.

가장 어린 대원들까지 억센 장부의 힘과 기상을 보이려 씩씩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더 담으라.》,《뛰자!》하고 호통을 뽑기도 하며 기세를 돋구는 작업장이다.

침실에 누웠을 때야 그들의 본색이 드러난다. 《엄마!》를 부르며 잠꼬대를 하기도 하고 다리에 쥐가 일어 신음소리를 내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깨여일어나면 언제 피곤에 쓰러졌던가싶게 밝고 힘찬 얼굴이고 혹시 연장작업같은데서 제외시키려면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 하고 싸울듯 대든다.

아! 얼마나 의젓하고 훌륭한 우리 청년들인가!

북부철길에서 온 《로병》들은 더욱 그렇다.

이들은 하나같이 대대의 순양함들이다.

지금의 난관쯤은 새발의 피라고 으쓱거린다. 뽐내는것만큼 일도 제낀다.

이들에게서 흠이라면 지휘관들의 명령지시를 제멋대로 받아들이고 골라가며 집행하는것이다. 《휴식!》과 《취침!》지시쯤은 제 마음대로 하라는 소리로 여기며 틈만 있으면 《도적작업》에 나간다. 하긴 이런 도적작업에 지휘관들이 즐겨 《공모》를 한다.

이럴 때면 나는 어느 한 외국소설에 나오는 처벌과 표창을 동시에 해야 하는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규률위반》에 대해서는 추궁을 해야 하지만 수고한데 대해서는 《미거》로 소개할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니 신대원들까지 자연 그 물이 들어 요즈음 온 대대가 교대없이 12∼14시간씩 작업장에 붙어있기도 한다.

이런 경우 대견해하면서도 나무람을 해야 되고 못마땅해하는척 하면서도 싱긋거리며 따라가는 사람이 정치지도원인 나다. 이때의 나는 무한한 행복감과 긍지를 느낀다.

공통된 지향과 목적속에 하나의 화음, 하나의 선률을 울리는 집단에 대한 긍지다. 개개인의 하루일엔 어려움도 있고 지루함도 있고 피곤도 있지만 그 모든것을 이겨내야 한다는 마음과 마음들이 어울려 서로가 고무를 하고 고무를 받는속에 생겨나는 집단적화음과 선률이라고 할가.

이렇게 볼 때 건설장에서의 전투적희열과 랑만이란 개인적감정의 순간적점화가 아니라 집단적흐름의 열띤 공기가 매 인간에게 뿌려주는 빛발이다.

여기서 집단적흐름이란 개개인의 가슴속에 자리잡은 참답고 아름다운 마음들의 결합에서 생겨난것임을 밝히고싶다.

이에 대한 정의는 지혜련동무의 말로 더 보충하자.

물줄기가 터져나온 첫날밤, 전체 대대들이 물과의 싸움에 바께쯔며 세면기까지 들고 총출동했을 때 녀성들도 남자들처럼 물판에 뛰여들었다. 급한 고비를 넘기자 처녀들은 죄다 철수하라고 려단장이 소리쳤다. 왜 나가요? 처녀들은 더 뻐기는 자세로 물푸기에 전념했고 적지 않은 남대원들도 말없이 그들을 응원했다.

려단장은 버럭 성을 내였다.

《철딱서니들 없이, 처녀들 몸에 해롭다는걸 모르는가?》

범처럼 을러메고난 그는 지휘관들에게 녀대원들을 죄다 《색출》하여 쫓아낼것을 명령하였다.

그때 지혜련이 그에게 다가갔다. 흙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귀바퀴뒤로 젖히며 비웃듯 말했다.

《려단장동지, 려단장동진 그래 우리 처녀들에게 후날 가장 어려운 모퉁이마다에서 물러섰다는 수치를 주려는건가요. 처녀들에 대해선 저희가 더 잘 아니 걱정마세요.》

려단장은 억이 막힌듯 혀를 차며 동무까지 그러면 어쩌느냐고 하다가 마침 흙을 퍼담은 기중기바가지가 기우뚱거리며 물을 쏟뜨리는것을 보자 그리로 뛰여갔다.

물밖에 추방되였던 처녀들이 《소대장언니》하고 기뻐 어쩔줄을 몰라하며 다시 물판에 뛰여들었다.

지혜련과 남상혁의 비밀은 오늘까지 고스란히 지켜지고있다. 혜련은 자기와 남상혁의 《관계발전》에 대하여 궁금해하는 《로병》들에게 《좀더 두고보려는것이예요.》라고 시치미를 뗐고 언젠가 휴식할 때 그 동무를 한번 만나야 하지 않는가 하는 나의 말에 얼굴이 홍당무우처럼 되여 쩔쩔매면서도 두번다시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오금박듯 내쏘는것이였다.

어떻게 약속을 했는지 남상혁이도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지혜련을 볼 때마다 그와 향옥이가 가까이 지내는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한다. 여기 돌격대안에서 향옥의 마음의 문을 조금이라도 연 사람이 있다면 지혜련이다.

그런데 나와 향옥이의 《관계》는 여전히 《랭전상태》다. 참으로 낯 뜨거운 일이다. 나는 향옥동무를 대할 때마다 2중3중의 묘한 심리속에 방황한다.

여기에는 인간 송재경과 정치지도원 송재경과의 심리적대결과 마찰도 있다.

《향옥동무에게는 문제점이 있고 얼룩이 있다. 그러나 근본은 아름다운것이다. 하니만치 따뜻이 대해야 한다.》

정치지도원은 이렇게 웨치고있으나 인간 송재경은 그 반대다.

그의 아름다운 외모는 어지러운것을 감춘 가면처럼 보인다. 이것이 문제가 아닌가.

나는 한때 이 세상 처녀들중에서 그를 제일 아름다운 처녀로 보았다. 모스크바의 춤판에서 아이레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을 때 분한 눈물을 머금은 그를 보며 나는 먼지 하나 묻을세라 자기를 지키려는 처녀의 순결미를 보았다. 하여 끌렸었다. 사랑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면 나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오점도 곱게 보인다고 하는데··· 결국 나는 가면에 끌린 셈이였다.

(아니다. 너무하다.)

정치지도원의 호령에 끌려 따뜻한 마음에 발동을 걸어 따뜻이 말할라치면 비웃음으로 나오고 딱딱하게 대하면 먼산보기로 듣는둥마는둥이다.

결국 그에 대한 나의 《개별방조사업》은 수포로 돌아간셈이다.

나의 이 《고민》을 알게 된 돌격대부국장은 향옥이를 다른 대대에 돌리면 어떨가 하고 물었다.

나는 돌릴수 없다고 말했다. 부국장은 웃었다.

《떨어지기 싫단 말이지?》

나는 대대의 명예를 생각해 그런다고, 보내도 그가 만점짜리 사로청원이 된 다음 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얼굴은 잔뜩 붉히나?》

그래, 나는 얼굴을 붉힌것 같다. 떨어지기 싫어한다는 부국장의 말에는 진실이 있기때문이다.

이것 역시 나에게 문제점이 아닌가!

내가 지금 이 일기장에 그에 대해 많이 쓰는것이나 백여명되는 집단가운데서 그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는것이 단순히 그가 《대대의 짐》이여서만인가. 그것만이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재경은 보름전에 썼던 일기를 보다말고 책을 접어놓았다. 무거운 한숨이 절로 나간다.

오늘 그는 향옥의 문제로 하여 류진영부위원장한테서 적잖게 나무람을 들었다.

향옥이한테서 무엇이 걸려있는가? 어떻게 하면 그를 잘 도울수 있겠는가? 하는 류진영의 물음에 재경은 이렇다할 대답을 찾지 못했다.

향옥이의 표면상 결함이란 동무들과 잘 섭쓸리지 않는것이였다.

오늘일도 그랬다. 작업장에 나오면 늘 향옥이와 맞들이채를 들던 류진영이 작업휴식참의 오락회때 향옥이를 지명했다.

《향옥동무의 춤솜씨를 보는것이 어떻습니까?》

그의 말은 만장의 호응과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향옥은 응하지 않았다.

《전··· 못춥니다.》

발딱 일어섰다가 주저앉는 향옥의 얼굴은 쌀쌀하기 그지없었다. 익살궂고 비위좋기로 소문난 오락회책임자까지 무안을 탈 지경이였다. 모두가 난색한 표정이였다. 동맹부위원장의 지명까지 거절하는데 놀랐던것이다.

《허, 언땅과 싸우느라 맥을 다 뺀 모양이구만.》

진영이의 웃음어린 말에 오락회의 분위기는 그런대로 유지되였으나 모두가 올곧지 않게 향옥이를 보았다. 재경이는 누구보다 기분이 더 잡쳐들었다. 진영부위원장과 향옥이의 남다른 관계를 어느 정도 알고있기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그는 진영이한테서 여러가지 조언과 의견을 받고난 지금에도 그를 만날념을 하지 못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향옥은 자기의 무례한 행동이 진영이나 동무들에게 모욕으로 된다는것을 모를수 없을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욕설로만 다불릴수는 없지 않는가. 진영은 무엇보다 믿음과 정을 주는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상태에서 어떻게 무슨 식으로 《믿음과 정》을 준단말인가.

그와 마주설 때의 향옥은 오직 《네》, 《알겠어요.》, 《됐습니다.》하는 식의 말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되고말았기때문이다.

《잘못되였어.》

재경은 입술을 악물었다. 애당초 그가 자기 대대로 오는것을 막았어야 했다. 재경은 그가 처음 자기 대대로 온다고 할 때 어지간히 당황한중에도 기뻤다. 함께 있게 된다는 감정이 그리고 남보다 그를 더 따뜻이 도울수 있다는 생각이 마음을 들뜨게 했던것이다.

어둑한 얼굴로 앉아있던 그는 책상우에 놓인 전보용지를 보고 일어섰다. 지혜련이한테 온 《로할머니 병위급》이라는 전보였다.

3일전에 온 전보를 혜련은 오늘까지 감춰두고있다가 동무들의 눈에 우연히 걸려들게 되자 자기를 보고싶어 친 《거짓전보》라고 발명했다. 재경이앞에서는 상혁이가 가봤다는것으로 시치미를 뗐다. 집에 가도 기초공사가 끝난 다음 간다는것이였다.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재경은 그의 태도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것을 느꼈다. 하여 남상혁이를 만나려 마음먹게 되였던것이다.

오늘저녁까지 기초파기가 끝났다. 련 며칠간 철야작업을 벌렸던 대대는 오늘밤부터 래일까지 대휴를 받게 되였다.

솜외투를 벗겨입던 그는 구석쪽에 놓인 허름한 군대배낭을 보고 무르춤해 굳어졌다. 배낭에는 용접봉꼬투리가 꽉 차있었다. 재옥이가 건설장구내를 돌아다니며 모은것이다. 재경은 파고철수집때문에 애쓰는 동생의 일이 무척 기특했으나 그 용접봉꼬투리들은 붙여 쓸수 있을것 같아 두고가게 했다.

재옥은 후에 더 많이 모아주겠다는 재경의 말을 믿고 그냥 돌아갔다. 하지만 오늘까지 재경은 한꼬치의 쇠쪼박도 모으지 못했다. 그럴 생각도 못했고 여유도 없었다.

(래일아침 작업장을 한번 돌아봐야지.)

그가 막 문을 열려는데 돌격대부국장이 들어섰다.

《어델 가려고 하오?》

《잠간 가볼데가 있어서···》

《대대장동무는 어데 있소?》

《한증탕에 있습니다. 열흘나마 목욕을 못했으니까요. 근데 어떻게 오셨습니까?》

재경이가 의자를 권했으나 부국장은 앉을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재경을 흘끔 보고 언짢게 말했다.

《오늘 동맹중앙위원회에서 동무네 대대에 순회우승기를 수여하기로 했소. 그런데 다음번에는 일을 암만 잘해도 어림없다는것이요. 진영부위원장의 말인데··· 향옥동무의 얘기가 나왔소. 우승기를 받는 대대야 하나같이 합심이 되고 뒤떨어진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것이요.》

《그 동무도 일이야 잘하지 않습니까?》

《일이면 다요. 집단속에 자기를 용해시켜살려는 지향이 보이지 않거든.》

《그건 제탓입니다.》

《동무 무슨 소릴 그렇게 하오? 하긴 동무의 책임도 있지.》

《부국장동지!》

재경은 며칠전부터 생각던 문제에 아퀴를 지으려 하였다.

《향옥동무든가 저를 다른 대대에 보내주십시오. 저는 다른 동무들한테도 그렇지만 특히 그 동무한테는 여러모로 부족점이 많다고 봅니다. 그 동무가 대대에 안착되지 못하고 울타리를 치고있는것도 구경은 제탓입니다. 제가 그 동무와의 호흡을 잘못맞추다나니 다른 동무들과의 관계도 그렇게 되는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동무가 자기라는 울타리속에만 있게 된것은 집단에 대한 무시라기보다 지난 기간의 자기 잘못에 대한 수치감때문이지··· 그 어떤 소시민근성이라고는 볼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눈섭을 잔뜩 찡그리고 섰던 부국장은 재경의 마지막말에 싱그레 웃었다.

《동무의 변호가 그럴듯 하오. 옳소. 동무가 그런식으로 생각하고 이제부터라도 잘 도와주면 문제없겠소.》

부국장은 서로 갈라져야 한다는 말은 듣지조차 못한 태도였다.

《부국장동지! 부탁입니다. 그를 위해서도 돌려주십시오.》

《허허, 그것도 말이라고 하오. 언제는 보내지 말아줍시사 하더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요.》

부국장은 이렇게 말하며 재경의 어깨를 툭 쳤다.

《여보, 그건 동무가 아직 그를 동지적측면에서보다 이성적인 사랑관계에서만 생각하기때문이요.》

《그··· 그런건 아닙니다.》

《아니긴, 년장자의 말을 새겨들으라구. 그건 동무가 아직 자기도 그 동무도 잘 몰라서 하는 소리요. 그한테는 너무 복잡한 심리학을 가지고 대할게 아니라 진심그대로 대하란 말이요. 성실하게 따뜻하게··· 이거요. 참 그리고 그 동문 여기와서 아직 한번도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는데··· 사실이요?》

《그렇다는것 같습니다.》

《그것 보오. 내가 아는것도 아직 똑바로 모르고있으니 이야말로 무관심이 아니요. 지금 향옥동무가 있소?》

《네. 취침준비를 할겁니다.》

《그 동무를 오늘 당장 집에 보내오. 아니 청년려관에 보내야겠구만. 림영찬부부장동지가 거기 있으니까.》

《건 뭣때문입니까?》

재경의 물음에 부국장은 기발한 착상에 접한듯 실눈이 되여 웃었다.

《오늘 저녁 수도건설지휘부 협의회에 림영찬부부장동지가 별난 의견을 들고나왔소. 궁전기초공사만 끝나면 우리 돌격대를 다른데 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것이였소. 기술적작업은 감당하지 못할것이라고.

다행히 여러 일군들이 반대해서 아직은 락착을 보지 못했지만 방심해선 안될것 같소. 그러니만큼 우리는 기능제고를 하는 한편 각방으로 외교전을 벌려야 하오. 향옥이를 우리 돌격대원들의 <특사>로 보내자는것이요. 부부장동지야 원래 딸의 말이라면 옴짝을 못했다니까···》

《지금이야 쫓겨나온 처지가 아닙니까.》

《아니 그때문에 더욱 그렇소. 향옥이가 그 일에 나서면 아버지로서는 돌격대가 자기딸을 크게 신임한다는데서 마음이 풀릴것이고 또 향옥이도 자기자신에 대한 긍지감이 생기고 그를 보는 동무들의 눈도 달라질것이 아니요.》

《무슨 경희극같군요.》

《필요하면 경희극도 해야지. 가서 불러오오. 나도 지금 청년려관에 가는길이니까.》

《부국장동지가 직접 지시를 주십시오.》

《헛참, 동문 대범한 사낸줄 알았는데··· 》

부국장의 말에 얼굴이 화끈해졌던 재경은 그가 나가기 바쁘게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길에 나섰다.

뻔질나게 오가는 화물차 하나를 얻어타고 팔동교에까지 갔다가 거기서 두세번 뻐스를 옮겨타며 릉라경기장 건설장에 간 그는 지혜련이가 그려준 략도를 머리속에 더듬어보며 남상혁이 있는 숙소를 찾아갔다.

여러 사람들이 둘러앉은속에 내의바람의 남상혁은 얼굴이 화독처럼 달아올라 장기를 두고있었다. 이름을 불러서야 재경을 돌아본 상혁은 기겁하듯 놀랜 소리를 치며 일어섰다.

《야, 이거 해군사관장이 아닌가. 내 다 들었소. 우리 동무의 <정치위원>이시라며···》

그는 재경의 손을 왁살스럽게 쥐고 흔들고는 옆의 사람들에게 간단히 소개를 하고 다시 장기판앞에 마주앉았다.

《잠간만 기다리오. 내기장기가 돼서···》

상혁은 황새 여울목 굽어보듯 장기판을 내려다보며 말은 끊지 않았다.

《앉소, 잠간이면 되오. 래일 우리가 가설보를 올리는데 누가 맨꼭대기에서 일하는가를 결판짓는 장기요. 연공작업에서는 우리 둘이 좌상이거든.》

그는 맞은편 장기군을 가리키며 엄지손가락을 쳐들어보였다. 재경이 장기판을 내려다보니 남상혁이가 수세에 빠져있었다. 재경이가 훈수를 들려 하자 옆에 청년들이 그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을 말라고 했다. 남상혁의 상대도 보아하니 한마디 훈수만 비쳤다간 장기판을 내동댕이칠 잡도리였다.

남상혁은 끙끙 갑자르며 몇번 멍훈, 장훈을 부르다가 지고말았다.

《이 손님때문에 양보한줄 알라구.》

남상혁은 볼이 부어 투덜거리며 재경을 끌고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우리 친구한테 무슨 일이 생겼소?》

상혁은 근심스럽게 물었다. 창문을 등지고 선 그의 얼굴은 몹시 어두워보였다.

《아니, 동무도 볼겸 두루 왔소.》

《고맙소. 약속을 지켜주고있다는 말도 들었고···》

말끝을 얼버무리는 상혁은 재경의 눈치를 살피였다. 재경은 장기판에 마주앉았을 때와는 판달리 변한 그의 태도에 의문을 품었다.

《먼저 한가지 묻기요. 혜련동무의 할머니한테 동무가 갔다왔소?》

상혁은 추운듯 어깨를 으쓱하며 처마밑에 달린 고드름을 뜯었다.

고드름이 유리장처럼 부스러지며 그의 어깨팍에 우수수 떨어져내렸다. 그러나 상혁은 어깨를 털념을 하지 않았다.

《혹시 일바람에 당신네 두사람 다가 목석이 된게 아니요.》

《그만하오.》

상혁은 재경의 손목을 슬며시 잡았다.

《난 재경동무와 두번째 상면이지만 친구로 알고있소. 혜련동무가 말하는 로할머니란 나의 할머니요.》

재경은 울컥하고 성이 났다.

《아니, 친할머니던 시할머니던 병이 위급하다면 가게 해야 할것이 아니요.》

《잘못했소.》

재차 말을 잇는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사실 난··· 할머니가 우릴 보고싶어 찾는것으로 알았댔소. 근데 가보니 실지··· 누워계시더군. 별로 아픈데는 없고 맥이 없다고만 하기에 인차 돌아서려고 했소. 근데 나와 마주 오래도록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잠드시더니··· 다시 깨여나지 못했소. 의사들은 무슨 질환에서가 아니라 장수자들에게서 흔히 보는 편안한 림종이라고 했소.》

《그러니 돌아가셨단말이요?》

《그렇소.》

《에이!》

재경은 그의 손에서 팔목을 나꾸채듯 뽑았다.

《동문 도대체 무슨 사람이 그렇소.》

《너무 그러지 마오. 사실 혜련이도 함께 갔어야 했는데 이제 후회한들 어쩌겠소.》

재경은 획 돌아섰다. 상혁이가 황급히 그의 손목을 다시 잡았다.

《내말을 마저 듣소. 우리 할머니는 올해 86살이고 1945년도 당원이요. 전쟁때는 전선원호대 부락책임자였고··· 림종직전에 할머니가 한 말씀이 뭔줄 아오. 자기는 공로메달밖에 받지 못했지만 혜련은 국기훈장을 받고 영웅이 될것이라고 하며··· 그를 잘 도와서 가문에 빛을 내게 하라고 했소···. 그래서 집안에서도 토론하고 그를 찾지 않기로 했지. 사실 돌아와서도 그한테 알리지 않으려 했는데 그저께밤 그가 여기 왔을 때 그만 내가 실수를 해서 알게 되였소.》

《그러니 혜련동무도 알고있구만.》

《그렇소.》

《하여간 무정하오. 동무도 그도.》

《그를 욕하지 마오. 그는 어릴적부터 우리 할머니를 친할머니처럼 따랐고 효성이 극진했소. 사실 그가 우리 집 사람이 되게 된것도 할머니때문이요.》

재경은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