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1

 

제 3 장

1

 

물밀듯이 흘러가는 승용차, 형형색색의 차림과 불빛머리, 금발머리, 은회색머리의 사람들···

향옥이네는 끝없이 교차되는 인파속에서 서로 놓칠세라 두세사람씩 손을 잡고 걸었다.

이 도시에 와 이틀째 되는 날이다.

안내 겸 통역으로 동행한 대표부 직원이 사치와 화려함의 외피를 쓰고있는 이 도시의 력사와 실상을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향옥은 처음으로 이런 도시에 온 햇내기가 아니니만치 반쯤 귀밖에 흘려듣는 자세로 걷는다. 그러나 모든것이 호기심의 대상이다.

지나가는 사내의 닭의 볏머리로부터 런닝그바람으로 걷는 처녀의 잔등에 그려진 사자대가리까지 기억에 새겨둔다. 그리고 지난 기간 배운것으로 제나름의 판단을 내린다.

포도에 바퀴 한쪽을 올려놓고 선 차의 주변에 멋진 신사풍의 차림으로 서있는 사나이가 이제 차의 주인만 나타나면 유리창을 재빨리 닦고 몇푼의 돈을 받아쥐리라는것도 그리고 커다란 인조보석목걸이를 활짝 드러낸 가슴에 드리우고 잽싸게 눈동자를 굴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녀자가 하루 살 돈을 줄 남자를 낚으려 한다는것도 다 알고있다.

향옥이네는 신문, 잡지매대들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군 했다. 자기들의 공연사진을 볼 때면 괜히들 가슴을 울렁거리군 했다. 이미 호텔에서 공연 평들과 사진들이 실린 신문들을 보고 나온 길이지만 이 사람들의 반영이 어떨지··· 향옥은 자기의 선회동작을 확대해 찍은 사진을 볼 때면 더욱 가슴이 울렁거렸다. 엊저녁 공연이 끝났을 때 극장안을 뒤흔들던 박수와 휘파람소리는 얼마나 요란했으며 또 오늘아침에는 호텔지배인까지 나타나 《예술계의 별》들이라고 감탄하지 않았던가!

신문, 잡지매대에 대한 관심이 거의다 식어갈무렵 그들은 한 매대앞에서 대여섯사람들이 향옥이네 공연사진을 보며 뭐라 떠드는것을 보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향옥은 중학교때 배운 영어지식으로 토막말이나마 알아들으려 했으나 《코레아》라는 소리만 한번 얼핏 알아들었을뿐이다.

베토벤과 모잘트의 반신상이 서로 마주서있는 거리모퉁이의 호텔앞에서 그들은 또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철새처럼 왔다가 철새처럼 떠나간다는 류랑악단들이 머물군 한다는 호텔이였다. 거의 모든 창문들을 열어제낀 그곳에서는 고전음악과 이 도시에서《현대음악》이라고 일컫는 쟈즈와 록크가 어울려 소란하기 그지없었다. 향옥은 그 소음속에서 한가닥 가냘프게 흘러나오는 동방적색채의 구슬픈 가락을 여겨들었다.

《홍란파노래가 아닌가.》

예술단 부단장은 노래가락이 흘러나오는 창문쪽을 찾아보며 노래가사를 조용히 뇌였다.

 

어제 밤 고기배가
고향으로 간다 하기에
내 오늘 소식 전하려
바다가로 나갔더니
그 배는 멀리 떠나고
물만 출렁이네

 

《조선사람같군.》

향옥은 그 노래가 울려나오는 3층 베란다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여름철인데도 와이샤쯔우에 털내의를 겹쳐입은 로인이 목언저리에 바이올린을 붙인채 열심히 활을 긋고있었다.

향옥이네 일행이 바라본다는것도 모르고 연주에 심취해있던 로인이 불시에 음악을 멈추며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푸시시한 흰 머리칼이 귀바퀴를 뒤덮고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하여 어딘가 궁상스럽게 보이는 로인이였다. 부단장의 말대로 조선사람같았다. 그 로인은 한참동안 얼빠진듯 보다가 한손을 쳐들며 싱그레 웃어보이고는 창문가에서 물러났다.

《외국음악단에 고용되여있는 남조선음악가인것 같소.》

대표부직원이 측은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채 말했다.

저녁공연을 마치고 호텔에 돌아와 식사를 하고났을 때 향옥은 뜻밖의 일에 부딪쳤다.

예술단 부단장이 그를 찾아와서 아이레스라는 외국청년을 아는가고 물었다.

향옥은 얼굴이 빨개지였다.

《그자가 어떤 호부자녀석인지 모르겠는데 굉장한 꽃다발을 가지고 동물 찾아왔소. 어쩌겠소, 만나야지.》

《제가 꼭 만나야 하나요?》

《만나야지. 공연을 축하하러 오지 않았소.》

향옥은 손가방에서 거울을 꺼내여 조선녀성의 체모를 손상시킬 흠집이 없는가를 살피며 (어떻게 만날가? 참 별난 사람이야.) 하고 여러가지 속구구를 하였다.

단장방의 응접실로 들어서던 향옥의 눈에 처음 띄운것은 연회색쏘파팔걸이를 짚고있는 하얀 손과 그 손가락에 끼인 밤알만 한 청보석반지가 불빛에 번쩍하는것이였다. 그 임자가 일어섰다.

다위드의 조각상을 련상케 하는 금발머리의 하얀 얼굴··· 입가에는 알릴듯말듯 웃음이 떠도나 눈매는 쌀쌀할 정도로 도고하고 거만스러웠다. 향옥은 그전의 불유쾌한 기억이 생생했으나 점잔을 빼고있는 그를 보자 웃음이 나갔다.

아이레스가 먼저 머리를 숙여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림··· 향··· 옥.》

놀랍게도 조선말로 번졌다.

《안녕하세요.》

향옥은 반갑게 인사를 받으며 맞은켠 쏘파에 앉은 단장에게 눈길을 주었다. 외국방문공연에서 이와 비슷한 일을 여러번 겪어본 단장은 여유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아이레스라는 청년은 우리들의 공연을, 특히 향옥동무를 보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왔다고 하오. 구면이라니 서로들 이야기를 나누지, 거기 앉소.》

아이레스의 맞은켠 쏘파를 가리켜보인 단장은 실례한다는 말을 남기고 방에서 나갔다.

《다시 만나니 반갑습니다.》

향옥은 그가 우습게 생각되였으나 사뭇 친절하게 말했다.

통역의 말을 전해들은 아이레스는 두손을 맞잡고 빙그레 웃었다.

《전··· 엊저녁··· 위성중계텔레비죤에서 아가씨의 모습을 보고··· 아, 그 녀자구나 했지요.》

통역이 번지는 말에 향옥은 귀뿌리까지 빨개졌다.

《감사해요.》

향옥은 이런 정황에서의 례절과 처신법을 생각하며 가볍게 웃어보였다. 아이레스가 뒤이어 하는 말에 통역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송동무란 누구요? 결혼의 꽃불을 올렸는가 묻고있소. 동문 애인이 있었구만.》

향옥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이레스는 한해전 그때의 자기와 송재경의 《연기》를 그대로 기억하고있는것이다.

《그럴만 한 일이 있었어요.》

향옥은 구석쪽 원탁우에 놓인 커다란 꽃묶음을 얼핏 보았다. 그러자 송재경이 이 자리에 있으면 어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웃음을 깨물었다.

군화를 뚜벅거리며 나타난 재경이를 극장에서 처음 보았을 때 향옥은 반가움과 함께 어지간히 당황하기도 했다. 전체적인 인상이 12차축전에 갔을 때보다는 촌스러웠다. 그러나 재경이를 훔쳐본 동무들의 평은 그의 마음을 허궁 뜨게 했었다. 《미남자야.》,《멋쟁이야!》하는 말들은 강력한 촉매제가 되여 지난 기간 품었던 재경에 대한 존경과 따뜻한 감정을 더욱 북돋구었다.

향옥은 통역의 웃는 눈길이 대답을 독촉한다는것과 다음날이면 이 소문이 어떻게 퍼질가 하는 위구심속에 망설이다가 통역이 적당히 말하라는 소리에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때문에? 이렇게 됐는가요?》

아이레스가 불시에 눈빛을 반짝이며 손등을 맞대여보였다. 향옥은 머리를 저었다.

《저흰 결혼을 서두르지 않는답니다.》

《그러니 여전히 사랑은 한다 이것인가요?》

《이를테면··· 그런거지요.》

그 말에 아이레스는 등받이에 몸을 젖히며 싱긋이 웃었다.

《아가씨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니 몹시 기쁩니다. 하긴 아가씬 결혼하지 않는것이 좋을것입니다.》

그리고는 통역을 향해 뭐라 열정적인 태도로 말했다. 통역은 놀란 얼굴로 듣다가 향옥에게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이 사람은 동무가 대단히 마음에 든다고 하오. 지난해부터라고 하오. 허, 통역 3년에 처음 보는 일이구만.》

통역과 향옥의 표정을 진지하게 지켜보던 아이레스는 뭔가 좋지 않은 느낌을 받은듯 재차 입을 열었다. 통역은 진중하게 머리를 끄덕여보이고는 향옥에게 말했다.

《자기의 감정은 진실한것이기때문에 희롱당할순 없다고 하오. 하니만치 나도 이제부턴 정식으로 직역하겠소.》

《저에게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고, 남녀간의 사랑엔 오직 한사람밖에 없다고 말해줘요.》

《알고있습니다. 나는 그걸 미풍으로 보고있습니다. 유럽은 로메오와 쥴리에트를 쓰레기통에 넣었지만 나에겐 그들이 리상입니다.》

아이레스는 향옥의 말에는 별로 개의치 않고 시계를 보더니 상냥한 미소를 보이며 일어섰다.

《그럼 오늘은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를 바래워 복도문까지 따라나갔다가 되돌아온 향옥은 호기심때문에 급히 들어선듯 한 단장이 원탁우에 놓였던 꽃다발을 들고있는것을 보게 되였다. 그런데 단장의 다른 한손에는 빨각거리는 종이봉투가 들려있었다.

《이걸 어떻게 하겠소? 꽃다발에 끼여있던것인데 딸라요.》

《네?》

향옥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덮치듯 봉투를 받아든 향옥은 쏜살처럼 밖으로 달려나왔다. 아이레스는 승강기에 오르고있었다. 향옥은 얼굴이 파랗게 질린채 그의 양복주머니에 돈봉투를 찔러넣고는 문닫기단추를 잽싸게 눌렀다.

무슨 일인가싶어 주머니를 황급히 뒤져보고 눈살을 찌프리는 아이레스의 모습이 스르르 닫기는 승강기문에 가리워 사라졌다. 향옥은 호- 하고 숨을 내뿜었다.

그런데 다음날아침 아이레스가 또다시 나타났다. 향옥은 몸이 불편하다는 구실로 만나지 않으려 했으나 단장이 례절은 지켜야 한다고 했다.

전날의 통역이 동석하였다.

아이레스는 돈을 준건 호의에서이지 모욕적행위가 아님을 발명하고나서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여 본국으로 떠나게 된다고 말했다.

향옥은 부친의 건강이 하루빨리 회복되기를 바란다고 하며 서둘러 작별인사를 했다. 아이레스는 향옥을 삼키듯 보다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앞으로 당신네 나라에도 가려고 합니다. 이번 우리 청년조직에도 당신네 나라에서 13차축전을 주최하겠다는 희망이 전달되여왔습니다. 나는 향옥아가씨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도 평양축전을 지지하려고 합니다. 나로 말하면 사회주의자는 아니지만 그 최종목표에 한해서는 공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의 아버지는 우리 나라에서뿐만아니라 유럽안에서도 손꼽히는 자본가입니다. 사회주의자들의 견해로 볼 때 로동자들의 고혈로 살찐 대부르죠아이지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저의 부친은 오래 살 가능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버지의 막대한 재산은 나에게 상속되게 됩니다.

나는 그 자본을 더 불구는 착취배로는 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사회주의자가 되자는건 아니고··· 세계는 자기 발전의 단계적법칙이 있고 또 인간의 의지로는 어쩔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나한테 넘겨질 그 재산이 만민의 행복에 기여된다면 기꺼이 희사할수 있지만 그렇게 될순 없지요. 때문에 나는 그 돈을 나의 벗들과 나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데 쓰려고 합니다.》

향옥은 저으기 놀랐다. 자본가의 아들치고는 꽤 진보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레스는 평양축전때 꼭 조선에 가겠다는것 그리고 향옥의 외국공연시에는 장거리전화로 자기에게 알려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일어섰다.

그때 그는 작별기념이라고 하면서 성냥갑크기보다 조금 더 큰 섬세한 은빛문양이 그려진 밤색가죽곽을 선물로 주었다. 향옥은 뭔가 께름직하였으나 통역의 눈짓도 있고 하여 받지 않을수 없었다.

향옥은 그에 대한 답례로 목란꽃휘장과 금강산정경을 담은 수예품을 주었다. 아이레스가 떠나간 다음 그 곽을 열어본 향옥은 깜짝 놀랐다.

칠색무지개빛을 황홀하게 뿜는 보석반지였다. 통역원도 이런 물건은 처음보는듯 혀를 둘렀다.

이 나라 돈으로는 3∼4천, 딸라로는 5∼6천이 될 보석반지라고 했다.

향옥이네 공연은 대성황리에 계속되였다. 텔레비죤들은 앞을 다투어 이 《동방의 무희》들을 집중방영하였다. 몇명의 배우들은 텔레비죤인터뷰를 통해 경력과 가정환경까지 소개되였다. 향옥이도 그중의 한사람이였다. 그런데 공연이 마감을 맺고 떠나오게 된 전날 향옥에게는 또하나의 뜻밖의 손님이 나타났다. 동무들과 함께 거리구경을 나갔다가 돌아오는데 호텔아래층 카운다에서 청량음료를 마시던 중절모를 쓴 한 로인이 움쭉 일어서더니 그들을 향해 마주 왔다.

《안녕들 하십니까?》

중절모를 벗어 가슴에 안으며 하는 그의 말은 정확한 조선말이였다.

《전 림향옥양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는 맨뒤에 서있던 림향옥에게 눈길을 곧추 주며 머리를 약간 숙여보였다. 향옥은 저으기 놀랐다. 로인인즉은 류랑악단의 호텔에서 보았던 바이올린연주가였다.

《누구신지요?》

향옥은 누군가 옆구리를 건드리는바람에 한걸음 앞으로 나가며 물었다. 로인은 주름진 눈시울을 떨며 향옥을 이윽히 보다가 어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에게 몇가지 물어볼 일이 있어 왔습니다. 저는 재미교포로 이 도시 관광을 왔던 사람이올시다. 만나줄수 있겠는지요?》

그는 일행의 책임자를 찾는듯 이사람, 저사람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만나시지요. 올라갑시다.》

대표부직원이 친절히 말했다. 로인은 그에게 또한번 머리를 수그려보이고는 올라가자는 청을 사양했다.

《감사합니다. 전 잠간 만나면 됩니다. 여기서··· 좀 이야기를 하게 해주실수 없을가요?》

《그렇게 하시지요.》

대표부직원이 선선히 응낙하고 동무들과 같이 향옥의 곁을 떠났다.

로인은 물끄러미 향옥을 보다가 빈 의자를 자기 가까이 끄당겨놓으며 앉으라고 하였다.

《뭘 마시지 않으려우?》

《고마워요, 전 밖에서 마셨어요.》

로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였다.

《체네 부모의 고향이 남포라고 했지요?》

《건 어떻게 아셨는가요?》

향옥은 텔레비죤으로 자기의 래력이 소개되였다는것도 잊고 깜짝 놀라 물었다. 로인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허, 달리 생각마시오. 난 서울사람이 아닙니다. 체네부모의 고향을 알게 된건 텔레비에서 알았지요. 내 고향도 남포라우···》

《그런가요? 남포 어데서 사셨는가요?》

향옥은 반가움에 겨워 다급히 되물었다.

《갈천이요.》

《그래요?- 저의 외가집도 갈천인데요.》

향옥은 호기심이 부쩍 동해 로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로인의 얼굴이 약간 굳어지는것이 알렸다.

《저 그럼 어머니의 성함을 어떻게 부르시오.》

《그건 뭣때문에 물으시는지요?》

향옥은 의혹이 살아올라 물었다. 로인의 얼굴에 서글픈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고향이, 고향사람들이 그리워서 그러오.》

로인의 목소리는 떨리였다. 향옥은 눈언저리가 뜨끔해졌다. 로인이 측은하면서 불쌍해보였다. 하여 그는 사실대로 어머니의 이름을 밝혔다. 순간 로인의 두눈이 흡뜨듯 커지며 얼굴의 근육살이 경련하듯 이지러졌다.

《로인님, 왜 그러십니까?》

향옥은 이런 로인들한테서 있을수 있는 심장발작이나 고혈압증세를 우려하며 겁이 나 물었다. 허나 로인은 고개를 푹 꺾은채 반응이 없었다. 의사든 누구든 불러야겠다고 향옥이 일어서려 하자 로인은 그의 손을 꼭 쥐며 앉혔다.

《체네, 이자 어머니이름이 분명 정려분이라고 했지?》

《네.》

《그럼 부친의 성함은 어떻게 부르시오?》

《림영찬이라고 합니다.》

《림영찬-》

로인은 신음하듯 나직이 되뇌이고는 향옥의 얼굴을 유심히 여겨보다가 꿈에 취한 사람마냥 빙그레 웃었다.

《지금 집은 평양에 있다고 했지?》

《네.》

《부친은 뭘하시오?》

《건설부 부부장입니다.》

《그러니 정부요인이구만. 차관급이지.》

로인은 혼자 말하듯 중얼거리고는 주머니에서 지전 한장을 꺼내여 카운다주인에게 내맡긴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떠나시렵니까?》

《가겠소. 체네, 날 만나주어 정말 고맙소.》

향옥은 례의상 그를 바래줘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호텔 회전문까지 로인을 따라 걸었다. 로인은 뒤따르는 사람이 없는가를 알려는듯 한바퀴 휘둘러보고는 허둥거리는 눈길로 향옥을 걸탐스럽게 보았다.

《얘야!》

바람소리처럼 나직하게 울리는 그 말에 향옥은 온몸이 굳어지는 감을 느꼈다. 로인은 입술을 푸들푸들 떨다가 더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이제 내가 말할 때 큰 소리를 내지도 말고 다른데를 보지도 말아. 정신우라는 이름을 들어봤니?》

향옥은 숨이 꽉 막혀들었다. 정신우라는 로인은 처참하게 얼굴을 이지러뜨리다가 쓰겁게 웃었다.

《물론 놀랄테지.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너의 외삼촌이란 말이다.》

《외- 삼촌이라구요?》

향옥은 혀가 얼음물에 잠겼다 나온것처럼 굳어져 간신히 되물었다. 하지만 정신우라는 로인은 그의 물음은 들은듯만듯 계속했다.

《가거들랑 어머니에게 전하거라. 그날 내가 바다가에서 죽은것이 아니라··· 남으로 갔다고··· 난 너희 이북을 좋아는 안하지만 그렇다고 너희들께 죄진 일은 하지 않았다. 그만 가겠다. 너희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겠다.》

향옥은 머리속이 온통 뒤죽박죽이 되였다. 이 로인이··· 정말 자기의 외삼촌이란 말인가!

《근데··· 어떻게 되여 여기 와 사는가요.》

로인의 태도가 또다시 바꿔졌다. 그는 자못 점잖으면서도 거만스러운 웃음을 띄우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관광겸 한 악단의 코취(고문)로 왔다. 집에 가서도 꼭 말하거라. 내가 지금 잘 지내고있다고, 독집도 있고 승용차도 있다. 은행구좌도 가지고있고···》

향옥에게는 그의 말이 잠꼬대처럼 들렸다.

《할아버지가 저의 외삼촌이라면 우리 어머니랑 보러 한번 조국에 올수 있지 않아요.》

로인의 낯빛이 차겁게 변했다.

(나쁜 사람이구나.)

향옥은 마음을 도사리며 반발적으로 말했다.

《할아버지가 진짜 조선사람이면 조국을 찾아오는것이 응당한 도리일거예요.》

향옥의 오돌찬 말에 로인은 저으기 당황한 표정으로 입술을 씨루었다.

《가고싶기는 하다. 암 가고싶구말고.》

로인은 다시 선량한 사람의 자태로 돌아가 떨리는 손으로 돈지갑을 꺼냈다. 빨각거리는 지전을 매만지던 그는 퍼러스름한 지페장을 꺼내여 그에게 내밀었다.

《외삼촌이란게 지금은 이것밖에 쥐여줄것이 없구나. 널 만날줄 알았더라면 몇천딸라쯤은 가져왔겠다만-》

《넣어두세요.》

《허허, 이거 무슨 동냥으로 생각하느냐. 친척의 징표다. 하긴 적다는거겠지. 정말 내 가져온데서는 이이상 여분이 없다.》

로인은 몹시 어색해하였다. 향옥은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느낌에 발끈해졌다.

(잘산다는것은 거짓말이야. 한데 왜 부자시늉을 할가.)

메마른 손에 들린 지페장과 길게 기른 손톱 하나에 조갑무좀이 먹어든것을 보며 향옥은 분기를 눌렀다.

모든것을 돈으로 재여보고 평가하는 사회!···

향옥은 그에게 자기라는 처녀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고싶었다. 그에 대한 동정과 련민과 함께 이름할수 없는 우월감에 둥- 떴다.

《잠간, 가지 말고 기다리세요.》

향옥은 홱 돌따서 막 문이 닫기려는 승강기에 뛰여올랐다. 호실에 뛰여든 그는 아이레스가 주고간 반지곽을 꺼내들고 계단을 달려내려왔다. 로인- 외삼촌은 호텔밖에 단장을 짚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화살같이 달려나간 향옥은 로인에게 그 곽을 넘겨주었다. 그다음 무슨 말을 어떻게 하고 돌아섰는지 모른다.

홀에서 기다리던 동무들이 무슨 사람이냐고 물을 때 그는 얼뜬 사람마냥《남포에서 살았대요.》하는 말을 반복했다.

그날 저녁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향옥은 발신인주소도 없는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동안 향옥이네와 어지간히 친숙하여 몇몇 배우들의 이름까지 알고있는 키다리접수원이 석간신문에 실린 향옥이네 사진을 가리키며 한바탕 떠들다가 향옥이더러 기념수표를 해달라고 하였다. 향옥은 자기에게만 청하는것이 이상스러운바가 없지 않았으나 그가 내미는 수첩에 큼직이 이름을 적어주었다. 그리고 돌아서려는데 접수원이 이상스럽게 눈을 끔쩍하였다.

향옥은 그 어떤 예감과 호기심에 끌려 동무들이 식당쪽으로 몰려 갈 때 그 접수원앞에 다시 갔다. 그러자 키다리는 매눈이 되여 사방을 휘살피다가 향옥에게 편지를 주었다.

《코레얀 림?!》

향옥은 접수원의 한마디 말에서 그 편지가 외삼촌이 보낸것이 아닐가 하고 가슴을 두근거렸다. 식사를 대충 하고 호실에 올라간 그는 욕실에 들어가 다급히 봉투를 찢었다. 봉투안에서는 퍼런 지페장들과 한장의 편지 그리고 외삼촌의 사진이 나왔다. 향옥은 머리칼이 쭈빗하고 진땀이 내배는속에 편지의 글구를 더듬어내려갔다.

《귀여운 향옥아, 반지를 판 돈을 보낸다. 미국에서 거래하면 4천딸라는 받을수 있었겠지만 여기서 급급히 팔게 되니 2천 200밖에 받지 못했다. 량해하거라. 정말이다. 한푼도 떼지 않았다.》

두세번 편지를 훑고난 향옥은 《정말이다. 한푼도 떼지 않았다》는 대목에서 점도록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마음이 끝없이 서글퍼졌다. 다심한 육친적애정에는 눈물이 솟구치는가 하면 돈에 매인 인간의 타산적인 심리에는 가슴이 아파들었다.

아무리 돈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산다 해도 어쩜 이럴수 있는가.

지페장을 다시 보는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왔다. 마치도 그와 장사거래를 한듯 한 수치스러운 기분에 휩싸인때문이였다.

(저걸 어떻게 할가.)

돈에 그려져있는 장발머리의 초상은 온몸에 소름까지 끼치게 했다.

그는 온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동무들과 일군들이 이 사실을 알면 자기를 어떻게 보겠는가, 또 조국을 배반한 사람에게 반지를 준데 대해서는 어떻게 말하며···

자기로서 무엇때문에 그에게 반지를 넘겨줬던지 곰곰히 따져보지 않을수 없었다.

시끄러운 《물건》을 처리한다는것도 있었고 그에 대한 동정도 있었다. 부자라는것을 자랑하면서도 돈지갑을 꺼내들고 떨던 손···

(아, 이 일을 어쩐담.)

향옥은 편지와 돈, 사진따위를 죄다 불태워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입을 열지 않는 이상 이 일은 영원한 비밀속에 묻혀있을것이였다. 허나 새날이 밝을 때 향옥의 결심은 또다시 바꿔졌다. 사진은 어머니에게 가져다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외삼촌이 원쑤될 일을 하지 않은 이상 무작정 배척할수 없으며 더군다나 외삼촌의 일로 하여 남모르게 가슴아픔을 겪는 어머니에게 기쁨을 주는것이 자식된 도리라고 근거를 세워보았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동무들이 박물관구경을 나갈 때 향옥은 방에 떨어졌다. 상두대우에 놓인 손님봉사용성냥을 집어든 그는 욕실로 들어갔다. 봉투안의 돈들을 꺼내 처음으로 자세히 살펴보았다. 퍼러스레한 지페장우에 새겨진 사람의 모습이 외삼촌의 얼굴로 보였다. 반지곽을 받아들 때 번쩍하던 그의 눈빛이 떠올랐다. 늙은이의 석양길이 돈으로 하여 비참하게 되였다는 생각이 가슴을 찔렀다.

향옥은 이를 사려물고 지페장들을 찢었다. 그러나 잘 찢어지지 않았다. 그는 파란 타일우에 돈뭉치를 놓고 성냥을 켰다. 떨리는 손에서 성냥가치를 두개나 부러뜨리며 불을 켜 지페장들에 가져다대였다. 그러나 노리끄레한 연기가 피여오를뿐 돈은 타들지 않았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여다보는듯 한 심정에 사로잡혀 다시 집어들었다.

가슴이 콩당콩당 뛰였다.

떠나오는 날 그는 외화기재란에 외화를 적어넣어야 된다는것을 알았으나 동무들이 알가봐 써넣지 않았다. 그런데 운수사납게도 비행장 세관검열에서 그 딸라가 드러났고 외화기재란에 밝히지 않은 위법소지자라는것으로 회수당하게 되였다. 앞뒤에 줄느런히 선 동무들의 놀라와하는 눈길,

무슨 돈인가? 감추고있다니?···

이 일로 하여 림영찬의 집은 란가가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