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4

 

제 2 장

4

 

흰띠처럼 아득히 뻗어나간 서해갑문언제는 파도사나운 바다를 길들여 품어안은 억센 팔뚝처럼 보인다.

석축벽에 찰랑찰랑 부딪치는 잔물결우에서는 가무스레한 물고기들이 해빛을 즐기며 유유히 헤염치고 이따끔 갈매기들이 수면을 핥으며 내리다가는 창공을 향해 힘차게 솟구쳐오르면서 《아오, 아오.》하고 웨친다. 거대한 대리석조각군상속의 병사들이 이 정경을 묵묵히 바라보고있다.

련합부대 사로청위원회에 제대보고 겸 작별인사차로 올라왔던 송재경은 미리 준비해가지고왔던 꽃다발을 대리석군상앞의 대돌우에 놓고 한식경이나 서있었다.

김정일동지께서 갑문건설의 영웅들을 잊지 말자고 세워주신 저 조각군상속에는 그의 전우도 있다. 소해정의 유능한 잠수병이였던 전우는 가물막이언제의 한귀퉁이가 터져나갈 때 밀려나는 모래가마니를 몸으로 막은채 숨을 거두었다. 산소통련결관은 모래가마니에 눌려 비틀려져있었다고 했다. 그러니 호흡이 막힌 상태에서 심장이 고동을 멈추었을것이다. 물에 익숙된 잠수병이였으니만큼 련결관을 떼여버리고 일여덟번 팔을 휘저었으면 물우로 솟구쳐올라 생명을 건졌을것이다. 하지만 청진이 고향이였던 그의 전우는 생명보다 병사의 량심을 더 귀중히 여긴것이다.

소년단원들과 처녀들이 재경의 옆을 스쳐가다말고 그를 다시 돌아본다. 그러나 재경은 그에는 눈도 주지 않는다.

재경은 호흡이 막혔을 때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다.

2년전 우리측 어선을 랍치해가는 적의 프리케트함을 추격할 때 그도 전우의 최후순간과 비슷한 일을 체험하였다. 겨울의 날바다우에서였다. 우리측 어선에 접근하는 재경이네 경비정을 향해 적들은 대구경기관총으로 마구 불질을 해왔다. 그런 속에 물에 뛰여들었던 재경이와 여러 병사들이 어선에 올라보니 갑판우에는 피투성이가 된 상태로 바줄에 묶인 어로공들이 줄느런히 쓰러져있었다. 재경은 먼저 견인삭부터 끊으려 내달리다가 왼쪽 옆구리가 선뜩하여 주저앉을번 했다. 기관총탄알에 맞은것이였다. 하지만 그는 필사의 기력으로 그냥 달렸다.

얼음버캐가 낀 견인삭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나이론바줄이라 네댓번 단검으로 내리쳐서야 끊어졌다. 그 순간 폭음이 울리며 어선이 통채로 기울어졌다. 몽몽한 연기와 화약내가 코를 찔렀다. 분계선을 넘어간 적의 프리케트함에서 포탄을 발사했던것이다. 재경은 뜨뜻한 피가 솟구쳐나오는 옆구리를 꽉 누른채 이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빨리! 빨리! 배가 가라앉는다.》

어로공들을 껴안고 물에 뛰여드는 전우들을 살피던 재경은 펑끗 하고 떠오르는 생각에 몸을 떨었다. 그의 생각을 반증하듯 물우에 뜬 사람들속에서 《초상화를!》하는 신음소리같은 웨침이 터져나왔다. 재경은 물에 뜬 전우들 몇이 되돌아서고 경비함에 있던 동무들까지 다시 물에 뛰여드는것을 보며 선실에 들어섰다. 차거운 물이 무릎으로부터 배로, 가슴으로 순식간에 불어올랐다. 초상화를 가슴에 품었을 때 그의 온몸은 물속에 잠겨있었다. 세찬 물결의 휘돌림과 부상처의 출혈로 하여 바다의 인어라고 불리우는 해병이였건만 좀처럼 물속에서 솟구쳐나올수 없었다. 호흡이 막혀 심장이 터져나갈것만 같았다. 몇번 찬물을 들이키자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렇게 끝나는가?)

그는 초상화를 꽉 가슴에 그러안은채 언제건 한번은 꼭 가까이에서 뵈우리라 생각했던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을 생각하였다. 흐려지는 의식속에서 그 어떤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얼레구름이 비껴간 하늘과 근심스런 눈길로 자기를 내려다보는 전우들과 지휘관들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는 먼저 자기 가슴을 만져보았다. 누군가 그의 눈앞에 액틀에 모셔진 초상화를 엄숙히 쳐들어보이는것을 어렴풋이 보며 그는 행복스런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쩝쩔한 눈물이 입가로 흘러내리는것도 그 시각에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부ㅡ웅 하고 울리는 부두가의 배고동소리를 들으며 그는 마지막으로 군상의 병사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잘있소. 동무들!》

평양행 렬차에 올랐을 때도 그는 갑문건설의 영웅들을 두고 생각했다.

흘러가는 마을과 야산들이 그에게는 뿌옇게 보였다. 이제부터 자기는 밝은 교실에 앉아 편안한 생을 영위할것이다. 갑자기 울려나오는 취주악대의 요란스러운 음악소리에 그는 생각에서 깨여났다.

렬차는 멎어서있었다.

크지 않은 간이역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꽃다발을 흔들고있었고 가슴에 꽃송이를 단 젊은 청년들이 마치 개선장군이나 된듯 한 기상으로 렬차에 오르고있었다.

(무엇때문일가?)

재경은 호기심에 넘쳐 내다보다가 차에서 내렸다. 모여선 군중들을 슬몃슬몃 보며 과일매대에서 도마도 몇알을 사들고 다시 차에 오르던 그는 승강구로부터 날아내리는 한 청년과 부딪쳐 구럭채로 도마도를 떨구고말았다.

《안됐소.》

청년은 힐끔 그를 쳐다보고는 그냥 옆을 스쳐달렸다. 암팡진 몸매에 관골이 튀여나온 얼굴이였다. 그는 청량음료매대앞에 오도카니 서있는 처녀에게 가는것이였다.

《혜련이, 내 깜빡 잊을번 했는데 공민증은 분실한것으로 하오. 공민등록과에는 말해놨소.》

《알아요. 어제 밤에도 말하잖았어요.》

《그랬던가.》

청년은 씨익- 웃고는 뒤더수기에 손을 올리다가 무릎을 탁 쳤다.

《참, 책임비서동지가 중앙사로청에 전화를 걸어주겠다고 했소. 그러니 수틀리면 중앙사로청엘 가오.》

《가선 누굴 만난단 말이예요.》

오목눈의 처녀는 주변사람들의 시선이 쏠려드는것을 알고 귀뿌리까지 빨개졌다. 청년도 그것을 느꼈음인지 주변을 둘러보고 한결 청낮은 소리로 말했다.

《가면야 크게 놀판이지. 책임일군들을 만나오.》

기관차가 두번째 기적을 울리였다. 청년은 돌아서 몇걸음 옮기다 말고 다시 그 녀자에게 뛰여갔다.

《혜련이-》

《야- 정말··· 가요. 사람들이 봐요-》

《뭐라오. 다른거 아니구 이젠 빨리 나가 뻐스를 타오. 올 때 서왔는데 갈 때도 서가겠소?》

청년은 눈을 한번 끔뻑하고는 치-익 하고 움직이기 시작한 차에 날파람있게 뛰여올랐다.

(어떤 사이일가?)

재경은 의문 가득히 지켜보다가 그의 팔을 잡아주었다.

《고맙소.》

이번에도 청년은 피끗 그를 보고는 오목눈을 향해 열심히 손을 저어보였다. 오목눈은 여러 사람이 보는 앞이라 몸을 옹송그리고 서있다가 차가 멀어져서야 손을 흔들었다. 렬차원이 문을 닫는 바람에 밀려난 청년은 재경이를 보고 벙긋 웃었다.

《아까는 안됐소.》

《그 녀동문··· 애인이요?》

재경은 녀자가 서있던쪽을 눈짓하며 물었다. 호기심을 누를수 없었던것이다.

《다 들었소?》

《들었소. 토막극의 한 장면이더구만.》

《허허-》

청년은 턱을 매만지며 유리창밖을 내다보다가 얼굴을 돌렸다.

《우리 칸에 가지 않겠소?》

《가기요.》

재경은 호기심에 끌려 따라갔다.

군인칸 다음이였다. 차칸은 이 청년과 같이 보위색정복차림을 한 손님들로 차고넘쳤다. 청년은 손녀의 잔치를 보러 간다는 늙은 부부와 자리를 마주잡고있었다. 옆에는 《프로그람수자조종계산법》이라는 책을 든 안경쟁이가 과학의 세계를 려행하는지 의자등받이에 기대앉은채 반쯤 눈을 감고있었다. 재경은 두사람사이에 끼여앉았다.

《자, 우선 변상부터 해야지···》

청년은 당반우에 가득 놓인 지함들중에서 하나를 들어내려 끈을 풀어헤쳤다. 도마도구럭을 떨궈버릴 때 말한대로 《그따위》들이 가득했다. 참외며 올사과까지 들어있었다. 재경은 목이 말랐던지라 참외를 골라들고 어적어적 깨물었다. 늙은이들과 안경쟁이에게 과일을 권하고난 청년은 약간 시무룩한 기색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까 묻던것을 대답줘야지 않소?》

재경은 손에 흘러내리는 참외물을 털며 청년의 옆구리를 찔렀다.

《허, 그건 알아 뭣하오?》

《비법적인 말들이 있어 그러오. 공민증! 알겠소?》

《뽑아낼줄 아누만.》

청년은 게면쩍은 웃음을 머금고 망설이다가 말했다.

《어제까지 부부지간이였다면 오늘부턴 남남이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소릴 낮추오. 정 듣고싶다면 말해주지. 좀 우스운 일이긴 한데-》하면서도 말과는 달리 자랑스러운 기색이였다.

《동무도 짐작할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저 동무들과 함께-》

그는 보위색 정복들을 가리켜보이고 말을 이었다.

《수도건설에 가오. 릉라경기장 소리를 들었소? 그 건설이요. 당원돌격대로 우리 군에서 뽑힌 사람은 몇이 안되오.》

《그런데 그것과 애인과 갈라진다는것엔 무슨 관계가 있소?》

《관계가 있지. 그도 수도건설에 올라오게 되오.》

《그렇소?!》

《보통 이악쟁이가 아니니까. 하긴 얼마전까지 속도전청년돌격대의 한다하는 녀성소대장이였소. 한데 돌격대는 아주머니들을 받지 않거든. 할수 있소, 3년간은 〈리혼〉이지.》

《그래 정말 〈리혼〉을 했단 말이요?》

《아니, 그럴수야 있소. 이제부턴 총각, 처녀로 돌아간다는거지.》

재경은 깜짝 놀랐다. 청년을 다시 보게 되였다. 관골이 툭 삐여져나와 감때사납게 보인데다가 행동거지가 덤베북청 비슷하여 신통치 않게 보였으나 그의 말때문인지 뜯어볼수록 호감이 가고 사내싸보이는 청년이였다.

인사치레로 사과를 받아쥔채 여전히 눈을 감다싶이하고있던 안경쟁이도 고개를 기웃하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도마도를 씹던 두 늙은 부부는 무슨 외국말이냐 하는식으로 눈이 덩둘해 청년을 보았다.

《그런데 조직에서 승낙을 했소?》

《쉽게 될리 있소. 발이 닳게 뛰여다녔지. 다행히 군당책임비서동지가 나와 우리 안해··· 하긴 이젠 안해가 아니라 혜련동무지만··· 잘 알기때문에 사를 좀 봐준셈이지요. 눈을 감았다 그 말이요.》

《근데 거기 꼭 가야 할 리유는 무어요?》

《허, 이 동무가 군대에 있으니 깜깜이구만. 수도건설은 축전이고 축전은 당에서 중시하는거요. 요 얼마전에 하달된 당, 정무원의 공동지시문을 못 보았소? 축전은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직접 발기하시고 내미신단 말이요. 당에서는 수도건설에 우리 청년들만이 아니라 온 나라 인민들이 떨쳐나설것을 호소하고있소. 그리고 나나 혜련동무로 말하면 건설에서 다들 사관장급이요. 배운 솜씨를 이럴 때 써먹어야 할것 아니요.》

《그러니 안해라는 동무도 수도건설에 온다는것이구만.》

《자기가 있던 속도전청년돌격대에 가기로 했소. 우리 군당책임비서동지와 군사로청에서 적극 힘써주겠다고 했으니 꼭 될거요. 사실 나도 속도전에 가고싶었지만··· 당원돌격대에 뽑혔소.》

《당원돌격대라구··· 거 참 반갑구만.》

《프로그람수자조종계산법》에 다시 고개를 박고있던 안경쟁이가 한무릎 나앉으며 청년의 어깨를 툭 쳤다.

《자, 알고 지냅시다. 나도 당원돌격대에 가오.》

《네?!》

청년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는 체소한 몸매의 안경쟁이를 까근히 훑어보고는 억이 막힌듯 웃었다.

《손님은 거기가 무슨 사무기관인줄 압니까. 100㎏쯤은 씽씽 메고날라야 돌격대지요. 우리 구역에서도 숱한 지원자들이 나섰지만 약골들은 아예 축에 들지도 못했습니다.》

《허허, 이 동무 봐라. 혹시 동문 구석기시대 사람이 아니요? 나는 고급설계가로서 현장설계참모로 발탁되였소.》

《아, 그렇습니까. 제가 큰 실수를 했군요.》

청년은 실수했노라는 말과는 달리 흡족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재경은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며 속이 들먹거렸다. 이들이 부러웠고 자랑스러웠다.

평양까지 가는 사이에 재경은 남상혁이라고 부르는 청년과 군사복무를 함께 했던 전우들만치나 가까와졌다. 이 길에서 그는 군행정위원회 부원의 자리를 뿌리치고 청년돌격대에 다시 갈것을 결심했다는 지혜련이며 8대독자 외아들로서 로할머니의 강권에 결혼을 서둘렀다는 잔치이야기며 두루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평양역에서 내려 당원돌격대를 태우러 나온 차에 오르는 남상혁과 안경쟁이를 바래주고 돌아설 때 누군가 그의 잔등을 탁 치는 사람이 있었다.

《재경동무 아니요?》

재경은 껑충 뛸 정도로 반가왔다.

모스크바축전에 갔을 때 알게 된 속도전돌격대 부국장이였다.

《여길 어떻게 나왔습니까?》

재경은 거수경례로 인사를 붙이며 물었다.

《환영행사때문이요.》

재경의 손을 꽉 틀어잡은 돌격대 부국장은 방금 와선 대형뻐스를 가리켜보였다. 뻐스에서는 청년돌격대 제복차림을 하고 《경제선동대》완장을 두른 청년들이 내리고있었다.

《무슨 환영행사입니까?》

《이제 함북도와 함남도에서 수백명의 신입대원들이 도착하오. 동문 무슨 일로? 휴가를 왔소, 집이 평양이라고 했지.》

《제대되였습니다.》

《제대?!··· 어데 가려고 하오. 우린데 오지 않겠소.》

부국장은 한눈을 찌붓하고 웃으며 물었다.

재경은 어딘가 미안스러움을 느끼며 대답했다.

《대학추천을 받았습니다.》

《그거 잘됐구만. 그럼 잘 가보오. 차가 도착할 시간이 돼서.》

부국장은 다시한번 그의 손을 잡아흔들고는 (방금전보다는 열적은 감이 들었다.)돌아섰다.

재경은 돌격대 부국장과 청년돌격대원들이 역사안에 사라질 때까지 한자리에 멍하니 굳어져 서있었다. 자기가 마치 시대의 어떤 거센 흐름속에서 밀려난듯 한감을 느끼며··· 서해갑문기념비앞에 섰을 때의 기분이 되살아났다.

집에 들어서자 그 모든것이 잊혀졌다. 입대할 때만도 코흘리개였던 동생이 형님을 축하한다고 기타를 쳐대고 이웃집사람들까지 모여들어 명절마냥 음식상앞에서 저마끔 흥띤 인사말을 나누며 떠들썩했다. 술이란 전혀 입에 대지 않던 아버지까지 거나하게 취해 자기의 손과 잔등을 쓸어만지고 부엌으로 들락날락하는 어머니가 틈틈이 정겨운 시선을 보낼 때 그는 그동안 잊었던 가정적단란과 행복감을 찌릿하게 맛보았다.

손님들이 돌아가고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동생인 재옥이가 엉뚱한 소리를 하여 모두를 웃겼다.

《아버지, 우리도 이젠 세칸짜리 집 받아야지요.》하는 재옥의 말에 《뭣때문에 갑자기 그 소리냐. 너야 형님하고 한방에서 지내면 되지.》아버지는 꾸중하듯 나무라는데 재옥은 생글생글 웃으며 투정조로 나왔다.

《그야 얼마동안이지 뭐, 형님도 이제 장가가서 아지미를 데려와야 하지 않아요.》

그의 말에 재경은 얼굴이 뜨뜻이 달아올랐다. 향옥이의 모습이 불쑥 떠올랐던것이다.

다음날 그는 대학도 가볼겸 시내구경도 할겸 겸사겸사로 집을 나섰다. 대학구내에는 그와 비슷한 제대군인들과 고스란히 학교를 걸쳐 대학추천을 받은듯싶은 애젊은 청년들이 빈손으로 혹은 외국어사전 같은 책을 끼고 오락가락하고있었다. 여기서 그는 몇명의 제대군인들과 통성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었다. 이번 시험에는 응시자수가 많아 입학비률이 높다는거며 그동안 책을 놓은지 오래되여 꽤 붙을수 있겠는가 하는 두루 근심하는 이야기들이였다. 재경이도 그 소리들이 꺾쇠처럼 머리속에 박혀들어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돌격대 부국장이 열적은 기색으로 돌아서던것도 생각났다.

옥류관에서 점심을 치르고 시내를 한바퀴 돌고난 그는 집에서 떠날 때부터 갈것인가 말것이가 망설이던 향옥이가 있는 극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향옥은 련습복차림 그대로 달려나왔다.

날씬한 몸매와 봉긋한 가슴이 그대로 드러나게 착 달라붙은 까만 의상과 그에 대조되여 더욱 희고 눈부시게 보이는 목은 재경의 눈길을 땅에 떨구게 하였다.

《제말대로 됐겠지요?》

향옥은 손벽을 치듯 두손을 맞잡으며 숨찬 소리를 질렀다.

《네.》

재경은 접수실녀인의 은근한 웃음을 느끼며 더욱더 거북스러워졌다. 그가 어루더듬는 눈길로 조용한 곳이 어델가 살피는것을 알아본 향옥이가 제먼저 말했다.

《일없어요. 련습도중이여서-》

공교롭게도 향옥이와 같은 옷차림을 한 처녀들 몇이 우연인지, 호기심에서였는지 접수실쪽에 나타났다가 재경이의 눈길과 마주치자 천연스러운 표정으로 어딘가 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누구를 기다리는듯 사위를 두릿거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리없이 돌아선 그들이 복도굽이로 사라질 때 숨죽은 웃음소리와 재잘거리는 소리들이 울려왔다.

그 순간 재경은 향옥이의 눈길이 자기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까근히 훑어보는것을 느꼈다.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오늘 푸대접을 한것으로 되지 않아요.》

향옥은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선선히 응하는 태도였다.

《퇴근시간은 어떻게 됩니까?》

《공연이 없을 때엔 여섯시인데 요즘은 대중할수 없어요. 3일후에 외국공연을 떠나니까요.》

《그럼 귀환공연을 할 때 다시 오지요.》

재경은 거북스러웠던 기분에서 벗어났다. 향옥은 미안스러운 기색으로 입술을 잘근히 깨물다가 밝은 웃음을 지었다.

《참, 깜빡 잊었네. 그동안 극장구경도 못했겠는데 오늘 저녁 만수대예술극장에 가보세요. 거기 관람표가 몇장 우린데 왔으니까요.》

《거참 고맙습니다. 줄바엔 두장을 주십시오.》

재경은 동생 재옥이를 생각했던것이다.

향옥은 잠간 기다리라고 하고는 10분도 되나마나한 사이에 되달려왔다. 그의 얼굴은 더욱 밝아졌고 눈에는 살뜰한 정을 담은 웃음이 차넘쳤다. 파란 글씨로 인쇄된 관람표 두장을 쳐든 그는 가쁜숨을 톺으며 생글거리고 서있다가 관람표는 도로 자기 옷주머니에 밀어넣었다.

《이제 한시간만 기다려주세요. 저와 함께 가보자요. 반대없지요?》

바쁘다고 했는데?··· 재경은 어리뻥해 그를 보았다.

《승인을 받았어요.》

향옥은 손을 한번 까딱거려보이고 날새처럼 복도안으로 사라졌다.

극장관람석에 가서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향옥이가 가방에서 꺼내 건네주는 캬라멜을 받아들었을 때 그의 손의 온기를 느끼며 가슴이 한번 후두둑 했다.

공연이 끝나 밖에 나오자 향옥은 분수밑 돌의자에서 쉬고가자고 했다.

시원한 포말들이 날리는 분수밑에 앉으니 바다를 헤가르며 달리는 배전머리에 서있는듯 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불쑥 이 시간이면 야간순찰을 떠난 배가 파도마루를 타고넘을것이라 생각되였다. 긴장된 눈길로 어둠서린 바다를 살필 전우들의 모습이 생생히 밟혀왔다. 또다시 거북스러운 감정이 되살아올랐다. 향옥에게서 풍기는 향긋한 체취때문에 더 그런지 모른다.

《시험에는 자신이 있어요?》

향옥이의 첫 말이였다.

《글쎄요···》

《동문 문제없을거예요. 그리고 사업해놓은것도 있으니까요.》

《사업이라니요?》

《제가 진영부위원장동지한테 부탁했으니까요. 알지요? 모스크바축전때 부단장으로 갔던··· 상봉모임에도 여러번 함께 다니지 않았어요.》

《압니다. 그런데 사업이라니 좀 별나군요.》

《호호. 이제 지내보면 알게 돼요. 사회는 군대와 좀 다르니까요.》

재경은 불시에 마음이 흐려들었다. 어쩌면 그런 말을 이처럼 쉬이 할수 있단 말인가.

그는 이 하루 깊이 생각했던 결심을 입에 올렸다.

《향옥동무, 이제 내가 어느 건설장에 탄원해간다면 어떨것 같습니까?》

그의 말에 향옥은 가는 눈섭이 휘여져 말끄러미 보다가 까르르 웃었다.

《왜요? 무슨 영웅이 될 꿈을 꾸셨나보지요.》

《네. 뭔가 돼보고싶습니다.》

재경은 속이 뒤틀렸다. 향옥은 그의 어둑한 낯빛을 보고 저으기 놀라는 기색이였다.

《정말이세요?》

《그럴가 합니다. 오늘 대학에 가보니 입학비률이 높더군요. 다들 수재급이 온다고 하는데 제가 구태여 거기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할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건설장을 택한다는것이예요?》

《이번에 오며 보니 온 나라 청년들이 수도건설에 떨쳐나서더군요. 더구나 나로 말하면 12차 축전에까지 갔던 사람으로서 축전준비와 관련한 이 건설에 외면할수 없지 않습니까.》

《재경동지.》

향옥은 깍듯이 례입을 썼다. 눈에는 잔웃음이 줄달음쳤다.

《생각해보세요. 동지는 명령으로 제대되셨고 명령에 따라 대학에 온것이예요. 군대규정에도 있다지요. <명령에는 오직 알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향옥은 약손가락을 곧추 펴들며 훈계조로 말했다.

《초소를 가리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당의 요구예요. 당에서는 동지가 대학에 가야 할 사람이고 앞으로 나라의 믿음직한 대외일군이 되여 조국의 명예를 빛내이기를 바래요. 그리고 또 동지는 군사복무기간에 피까지 바치며 조국앞에 지닌 의무를 훌륭히 수행했어요. 그러니 다른 생각 말고··· <정보로 앞으로!>》

향옥은 이 말을 하며 일어섰다.

재경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개맞는 말로써 위장된 처녀의 속심을 읽으며 일종의 실망이 오면서도 한편으로 그에게 더욱더 마음이 끌려드는 자기를 발견하였던것이다.

《좀 앉소.···》

재경은 호주머니에 넣고 온 딱딱한 물건을 매만지다가 슬며시 꺼냈다. 향옥의 재빠른 눈길이 거기에 닿았다.

《저···》

재경은 마른침을 삼키며 손에 쥔것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건 나의 군대복무기념인데··· 받아주오. 내가 타던 경비정모형입니다. 해포석을 깎아 만든것입니다.》

《그걸 저한테 준단 말이예요?》

향옥은 숨넘어가는 소리를 하며 반색해하였다.

《야, 참 곱군요.》

향옥은 포신과 구명대까지 새겨진 반뽐도 못되는 가벼운 돌조각을 매만지며 감탄했다.

《그런데 이런 군대생활기념품을 제가 가져도 되겠어요?》

《나에게도 또 하나 같은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먼바다길에서 이런 손장난도 한답니다.》

재경은 향옥이를 주려 이 해포석을 다듬다가 (향옥의 방 장식대를 그려보며)손을 베였던 일이며 무엇때문에 두개씩 깎느냐고 하던 동무들의 말을 생각하고 싱그레 웃었다.

《고마워요.》

향옥은 떨리는 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헤여질 때 향옥은 대학을 포기할 생각은 절대 하지 말라고 애처로울 정도로 간곡히 당부했다. 그러나 재경은 다음날로 돌격대 부국장을 찾아가 입대를 제기했다. 그의 문제는 사로청중앙위원회에까지 제기되여 대학에 추천받은 제대군인을 받느냐 마느냐 론의끝에 승인을 받게 되였다.

향옥은 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채 외국공연의 길에 올랐다.